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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




  ――― 새로운 디스토피아 환상 세계를 체험하다




  [베오울프](닐 게이먼·케이틀린 R. 키어넌, 아고라, 2007년 11월)를 출간한 아고라 출판사에서 이번에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차이나 미에빌, 아고라, 2009년 4월)을 출간했다. 작가 차이나 미에빌은 국내에서 그리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이 작품으로 아서 C. 클라크 상과 영국환상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실력 있는 작가이다. 국내에는 [쥐의 왕](차이나 미에빌, 들녘, 2001년 7월)이 출간된 적이 있다.

  이 작품은 ‘어번(urban) 판타지 3부작’으로 불린다. 바로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과 [상처The Scar], 그리고 [강철의회Iron Council] 세 작품이다. 그는 이 3부작을 통해 판타지 문학의 혁신자로 떠올랐다고 한다. 특히 [상처The Scar] 같은 작품은 영국 가디언지가 뽑은 SF&판타지 목록에 선정되기도 했다.

  어번 판타지란 흔히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도시전설류의 판타지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은 현실의 도시를 배경으로 삼지 않고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바로 공해에 찌들어가는 부패하는 대도시 ‘뉴크로부존’이라는 도시가 배경이다. 이 도시에는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고 다섯 개의 기차 노선이 만나는 도시의 심장부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이 존재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권 당 500페이지 가깝게 2권으로 나온 이 책은 그 두꺼운 분량을 충분히 살린 작품이며 상당히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다. 놀라운 환상과 과학이 공존하는 세계를 작가는 치밀하게 그려냈고, 그 섬세한 디테일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초반부는 이 세계를 묘사하는데 집중하고 있어 지루할지도 모르지만, 이야기가 진행되고 사건이 벌어지면서 재미는 극에 달한다. 잘 들어보지 못한 작가라서, 혹은 한 번에 와 닿지 않는 제목 때문에, 또는 두툼한 분량 때문에 이 책을 접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중에 읽고 나서 늦게 읽은 것을 후회할 정도로 인상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종족과 어딘가 현실 세계와 유사하면서도 전혀 다른 도시 ‘뉴크로부존’의 묘사는 매력적이다. 전혀 다른 세계를 체험한다는 것. 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그 두 가지의 매력을 이 소설은 가지고 있다.

  첫 페이지를 넘기면 마치 뇌처럼 생긴 복잡한 ‘뉴크로부존’의 도시 지도가 보인다.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표현되어서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그만큼 작가가 얼마나 상세하게 설정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진정한 판타지 소설을 쓰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종족들




  이 소설에는 여러 다양한 종족들이 등장한다. 한 번에 외형부터 습성이 쉽게 다가오는 종족이 있는가, 하면 낯설고 머릿속에 모습도 그려지지 않는 종족도 있다. 이런 다양한 종족은 환상소설만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들을 보면서 사고의 확장을 할 수 있고 이들을 통해 인간을 새로 조명하기도 하며 또한 기존에 없었던 존재들로 인해 새로운 환상과 모험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여성은 케프리족인데, 놀랍게도 벌레 머리를 가진 종족이다. 이런 종족은 기존에 환상소설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종족이 아닌가 싶다. 원래 환상소설에서는 종족을 뛰어넘는 사람은 힘든 법이지만, 케프리족과의 사랑은 읽는 내내 감정이입이 되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다.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인지 머릿속에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도 힘들었고 더군다나 주인공처럼 애정을 갖기는 힘든 면이 있었다.

  그리고 사건의 발단이며 장마다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는 ‘야가렉’은 조인족 가루다이다. 이는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았는데 바로 표지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곳곳에서 많이 접한 이미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리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야가렉’은 죄를 지어 날개를 잃었고 주인공에게 다시 하늘을 날 수 있게 해달라고 의뢰를 한다.

  노동하기 좋게, 또는 형벌을 받아 신체를 개조하는 리메이드 족. 이들은 역시 기괴한 신체구조로 등장하기 때문에 쉽사리 이미지를 상상하기는 어려웠지만, 이 도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종족이며 이 소설에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종족이기도 했다. 디스토피아 세계를 단정적으로 보여주는 종족이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종족이 등장하며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인간과 전혀 다른 외형과 사고를 하고 있는 이런 종족들은 이 소설에서 체험할 수 있는 환상을 극대화 시켜주는 장치이며 다양한 알레고리를 담아내는 효과적인 설정이기도 하다.




  소설의 끊는점은, 396쪽




  비주류 과학자인 주인공 아이작은 날개를 잃은 가루다 ‘야가렉’에게 하늘을 다시 날게 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는 의뢰를 수락하고 연구를 위해 하늘을 나는 갖가지 짐승들을 모으던 중에 정체불명의 애벌레 한 마리를 얻게 된다. 이 애벌레는 곧 엄청난 파국을 몰고 온다.

  이 소설은 지나치게 섬세하고 뛰어난 디테일을 자랑한다. 그 말은 곧 빠른 속도감을 원하는 요즘 독자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새로운 세계를 그려냈기 때문에 종족 하나하나의 상세한 외형 묘사부터, 도시 곳곳의 묘사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야기 진행은 초반에는 상당히 느리다. 게다가 각 장마다 가루다 ‘야가렉’의 심리가 1인칭으로 펼쳐지는데, 뛰어난 문장력과 유려한 묘사로 아름답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 진행을 늦추고 분량을 늘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배경 설명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빠른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라면 초반만 읽다가 지쳐서 그만둘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분을 지나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는 순간, 이제까지 지루함은 단번에 날아가고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 것이다.

  1부 의뢰, 2부 비행해부학을 지나 3부 변태에 가서야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즉, 아이작이 우연찮게 얻게 된 정체불명의 애벌레가 변태를 하고 깨어나는 순간, 이야기는 활력을 얻고 재미를 선보인다. 세계의 위기가 닥치고 주인공들은 그에 맞서며 모험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주인공 아이작의 연구나 여자친구인 린이 새로운 일을 맡게 되는 것, 아이작이 가루다인 야가렉의 의뢰를 받고 비행해부학에 대해 연구하는 이야기가 상세하게 펼쳐진다.이 도시는 물론 흥미로운 배경이지만 도무지 이야기가 전개되지를 않고 소개만 계속 하고 있으니 독자는 도대체 여기서 뭘 말하고 싶은지 답답함마저 느끼는 게 사실이다. 다른 소설들이라면 한 장으로 압축할 만한 이야기를 길게 늘여놓은 것이다. 이 부분은 지루함을 느끼기 쉽다. 하지만 3부 변태부터는 이야기가 속도감이 생기고 흥미로운 소재들의 등장으로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애벌레가 변태를 해서 사상 최악의 괴물로 탄생하다. 인간의 정신을 흡수해 빨아먹는 악몽의 생명체. 천적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괴물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세상에 풀려난다. 독자는 여기서 흥미를 느낀다. 이제 이 괴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도시는 이대로 괴멸될 것인가. 아니면 반전에 성공할 것인가.

  시장은 먼저 악마와 만난다. 여기서 앞에서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던 환상성이 갑자기 흥미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마조차 그 괴물을 두려워하고 아무리 최상의 조건을 내걸어도 응하지 않는다. 악마조차 두려워하는 괴물이라니! 악마도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꿈을 꾸기 때문에 괴물을 제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이 꺼리는 두 번째 대안은?

  바로 ‘직조자’라는 존재다. 거대한 거미의 외형을 가진 이 직조자는 생략 어법을 사용하는 정말 특이한 존재다. 세계를 거미집으로 삼아 자신에게만 보이는 에테르 천의 무늬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역시 강력한 힘을 가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기이하면서 독특한 매력적인 존재였다. 놀랄만한 지적 능력과 재료 마법 능력을 갖추고 거미집을 사냥용으로 쓰지 않고 심미적 객체로 보게 된 기이한 정신 세계의 예술가가 직조자다. 이 소설의 개성과 매력, 흥미는 바로 이 직조자가 짜넣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재미있었다. 이 소설은 지루한 배경 설명이 끝나고 사건이 벌어진 뒤에 슬슬 재미를 느끼게 되는데, 본격적으로 독자가 소설에 빠져드는 끊는 점을 꼽아보자면 396쪽이라고 할 수 있다. 악마의 대사와 회담이 실패하고 시장이 그럼 직조자를 만나러 가볼까,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과연 악마보다 더 꺼리면서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그 강력한 ‘직조자’는 어떤 존재일까에 대한 흥미가 글에 놀라운 흡인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직조자뿐만 아니라 1권에서 결정적인 흥미를 제공하는 존재가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청소기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인공적인 지능을 갖게 된 청소기다. 이 소설은 신체를 변형하고 물질을 변형하는 다양한 마법이 존재하는 한 편, 기차가 다니고 자동 청소기가 존재하며 기계가 인공지능을 갖게 되는 등 SF적인 요소도 섞여 있다. 또한 마법 역시 과학적으로 해석되면서 뉴크로부존만의 법칙 안에서 사용되어지고 연구되는데 이 점도 과학적으로 비친다. 이 소설은 환상소설이면서 한편 과학적 요소도 섞여 있는 작품이다.




  구성의 매력




  이 소설은 300쪽이 넘도록 차츰 사건이 벌어질 분위기를 암시하면서 인물들과 배경을 소개하는데 주력하고 있지만, 괴물이 깨어나고 숨가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앞에서 하나씩 느긋하게 나왔던 인물들과 배경이 섞이면서 놀라운 재미를 제공한다. 앞에서 힘겹게 읽어나간 내용들이 나중에는 하나로 합쳐지면서 구성의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가령 청소기가 망가지고 수리공이 와서 수리를 할 때 수리공은 일부러 바이러스를 주입해서 복선을 넣는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위기에 처한 순간, 청소기는 쪽지를 통해 친구의 배신을 일러주는 활약을 선보인다. 또한 주인공 아이작의 야가렉을 날게 하기 위한 연구는 상당히 진척이 된 상태인데, 그 도중에 그가 발견한 엄청난 기술은 사건을 풀 핵심적인 열쇠로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잠깐씩 나왔던 인물들이 하나로 뭉쳐서 살아남기 위해, 도시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모습은 뛰어난 재미를 준다.

  

  매력적인 악몽의 서사시




  이 작품은 한 마디로 기이한 악몽 같은 소설이다. 어둡고 음울한 꿈 속 세계를 독자는 독서를 통해 간접체험 할 수 있다. 마치 악몽 속 세계처럼 기괴한 세계 속에서 괴물에게 쫓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꿈이라기 보기에는 눈에 잡힐 듯 묘사되는 도시의 모습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환상을 체험하게 만든다. 게다가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뿐만 아니라 때로는 깜짝 놀랄 만큼 근사한 문장들을 만나게 되는데 작가가 그만큼 굉장히 공들여 쓴 문체 또한 인상적이다.

  한 마디로 구성이나 세계관, 캐릭터 등에서 굉장히 탄탄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은 소설이며, 모험소설로도 충분히 재미있고, 초반만 넘기면 환상적인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는 매혹적인 소설이다.

  정말 오랜만에 뛰어난 환상소설을 접했다. 뉴크로부존이라는 도시를 만들어낸 작가에게 경의가 느껴질 정도다. 환상소설 또는 과학소설을 좋아하는 장르소설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소설이며, 읽고 나면 2부와 3부도 기대하게 될 것이다.

  환상소설을 좋아한다면, 또 환상소설을 쓰고 싶은 지망생이라면 이 작품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은 낯선 작가와 제목 또는 두툼한 분량 때문에 놓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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