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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단에 맞서는 한 논객의 위치

  그렇다면 조영일 씨의 '상상력'은 어떠한가? 가령 그는 이제는 유명하다 못해 흔한 고유명사가 되어 버린 '진중권'과의 구별짓기를 자주 시도해왔는데, 내가 봤을 때 그것은 결국 자신이 '논객'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기 위한 한 방편이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리고 분명 오늘날 논객을 자처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 중요한 제스처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오늘날 200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논객의 시대가 단순히 끝났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인터넷 매체를 통해 주로 활동하는) 논객의 위상은, 그것이 대중들에게 구사하는 필력과 수사적 설득력과, 그것이 뒷받침하는 정치적/인문학적 상상력 간의 '불균등 결합 발전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게 정황상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논객들은,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자신의 연구와 독서 시간까지 희생해가면서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지만, 어떤 반복 속에서 대부분은 나중에 빈말에 불과해져버려는, 혹은 하나마나한 말들을 쏟아내는 것으로 귀결되며, 결국 그들의 정치적/인문학적 상상력이 별게 아니었음을 드러내 보이곤 한다. 진중권 씨는 물론이고 시대를 풍미했던 진보/좌파 논객들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라는 월계관이 김대중 주필에서, 손석희 아나운서에게 옮아간 것은, 대중들이 더 이상 그들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방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더욱이, 논객활동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금-여기에 인문학적 식견을 갖춘 비평가들 중에서 논객처럼 말하고 글을 쓰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조영일 씨 자신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조영일 씨가 정치적/인문학적 상상력이 빈곤하다고 단언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잡지 <GQ>에서, <한국 문학과 그 적들>을 두고 행해진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가령 지난 번 조문정국 때 MB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진중권의 글 한 편을 들춰보자.

  "사회를 '매스게임'에 비교해 보자. 거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가령 북한의 매스게임을 보자. 그 게임은 한 사람(혹은 몇 사람)이 머릿속으로 기획한 것이다. 매스게임에 참여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누군가 기획한 그 프레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기들 몸을 맞춰야 한다. 이런 매스게임에서는 한 사람이 두뇌가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족이 된다. 이게 MB가 꿈꾸는 한국 사회의 이상적 모습이리라. 하지만 지도자가 '인풋'한 것을 인민들이 그대로 '아웃풋'해야 하는 사회는 결국 한 개인이 가진 두뇌용량의 한계에 갇히게 된다.
  다른 유형의 매스게임도 있다. 천수만 새떼들의 비행. 새들은 누가 명령하거나 지도하지 않아도 하늘에 변화무쌍한 그림을 그려낸다. 촛불집회가 그것을 닮았다. 지도하거나 명령하는 사람 없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체적 효과를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이를 '창발'(emergence)이라 부른다. 우리 사회에 그런 유형의 집회가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토대에 변화가 생겼다는 신호다. 정보화 사회의 경제는 한 사람의 머리가 아니라, 네트워크로 연결된 수많은 머리들의 창발 효과를 통해 발전한다. 디지털의 경쟁력은 바로 개별 주체들의 참여와 자율에서 나온다.
  여기서 MB의 리더십이 얼마나 시대착오인지 보게 된다. 아직도 그는 2주일에 한 번 공중파에 나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혼잣말을 늘어놓는다.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그는 이를 '국민과의 대화'라 부른다. 솔직히 이런 경쟁력 없는 프로그램은 당연히 시장원리에 따라 퇴출되어야 한다. 굳이 해야겠다면 대학로에 소극장 빌려 모노드라마를 하면 되지 않는가. (연출은 유인촌씨가 맡는 게 좋겠다.) '빨간 피터의 고백'의 뒤를 잇는 '파란 명박의 고백'은 국민은 몰라도, 적어도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 정도는 감동시킬 것이다. (출처 : MB는 유통기한 30년 지난 '우파의 답례품' - 오마이뉴스)"

  첨단 IT 기술로 무장한, 인터넷 다중Multitude의 천수만 세때와 같은 창발적인 속성을 들먹이면서 그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MB식 통치와 대립시키는 식의 진부한 발상은 이제 전혀 놀랍지도 않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그가 현 시국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실패'의 방증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밖에 말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을 또한 고려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 하나의 중요한 질문인데(이 점에 관해서 나는 아직 어떤 단언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조영일 씨의 다음과 같은 글은 진중권의 빈곤한 상상력과 얼만큼 변별되가?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문학지망생들은  문단문학시스템이라는 피라미드 아래에 줄을 섬으로써 자유로워야 할 상상력을 '그들만의 장르규칙'에 붙들어 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런 규칙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 즉 문학에는 다양한 장르가 존재하고 개별 장르들은 그것들 나름대로 사회적-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에 대한 명확한 인식입니다. 즉 장르문학 독자든 또 장르문학 지망생이든 자신의 독서행위나 창작행위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실제 어떤 장르에서든 진정으로 뛰어난 작품들은 항상 장르규칙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보편문학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사실상 일치하고 있습니다.(조영일, 한국장르문단의 행방)"

  여기서 내가 우려되는 것은, 그 역시 마치 진중권씨 처럼 단순히 그가 상상적으로만 상정하고 있는 대중(-장르)지성의 '창발적 속성' 같은 것에 기대면서, 상황의 당위성을 조야하게 도출해내는 어떤 애매한 방식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 않겠느냐는 점이다. 어떻게 본다면 여기서, 통속화된 논객과 이론적 비평가 사이에서 다소 간에 거친 구분을 도출해 볼 수 있는데, 논객의 가장 큰 특징은 상황을 어떻게든 단순화하면서 정말로 규명되어야 할 가장 큰 상황의 난국을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으로 처리하는 데 있을 것이다. 반면, 가라타니 고진의 말마따라 비평가는 혹은 (칸트적 의미에서의) 비판가는 오히려, 근본적인 개입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의 고통스러운 이율배반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에 그 가치가 있을 것이다. 조영일 씨가 '문단영역의 확장'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드는 의문이란, 어떤 음모론이 아니고서야, 그가 개탄하듯, "통속소설이나 다름 없는 작품을 앞장세워 장사를 하면서도, 그와 같은 변절을 인정하기봐는 문단의 권위로 그것을 감추면서 마음껏 대중문학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게, 과연 실체가 있는지 여부이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장르문학을 자처하는 이들이 문단문학의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대체하지 못하는, 그 자체의 내속적 실패를 엄폐하는 미끼에 불과하지 않은가? 또한 <문단문학과 장르문학>을 읽어본 독자 입장에서 질문들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정말로, 단 1%의 행복한 소수를 제외하고서는 다수의 문학 지망생들이 문학에서 멀어지는 게 과연 문단 탓인가?" "시장의 수요-공급 메커니즘을 온전히 따른다면 이 현상이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화되지 않을까?" "게다가 이 문제의식은 앞서 유럽의 문학역사를 서술한 '문학역사는 문학의 도살장이다'이라는 금언과 배치되지 않은가?" "차라리 문단이라는 문학적-조합주의적 장치를 통해 불필요한 경쟁과 시장의 개입을 배제하는 게, 일단 문단에 들어선 후에 더 많은 혜택과 기회를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행복'한게 아닌가?" "장르의 다양성이 '문단' 내부에서 확장된다는 게 나쁘다는 근본전제는 무엇인가?" 기타 등등. 질문은 열려 있지만, 여기에 대한 성찰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게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말하자면, 조영일 씨의 '쾌도난마'와 같은 글에서 식별되는 명백한 '반국가주의적' 혹은 '반제도권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이상한 짝패관계를 이루는 순응주의적 측면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아직 거기에 대해 깊고 파고들어갈 시점은 아닌 듯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애초에 설정하는 문단/반문단 대립구도에 담겨 있는 문제의식이, 바로 그 대립구도를 '초과'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조영일 씨에게는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모든 논객들은 바로 그 대립구도를 손쉽게 호언장담하면서, 정확히 그것을 넘어설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한 가지 변증법적(?) 역할을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비단 문단 뿐만 아니라 비문단의 영역 모두를 가로질러 적극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조영일 씨 말대로, '자가당착'으로 귀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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