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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번 판타스틱 여름호에 실린 조영일 씨의 평론에 대한 여러 리뷰들을 읽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조영일 씨에 대한 어떤 '긴장관계' 같은 것을 혼자 상정하고 있지만, 이번에 그의 글이 수용되는 것에 어떤 위화감을 느끼게 되서 작성하게 되네요. 아무튼, 좀 더 다듬어야 할 글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비평고원과 제 블로그에 수정-증보 판이 올라올 것입니다. 원래는 거기에 올리기 위해 쓴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여러분들에게도 보여져야할 것입니다.

1. 한국문학의 이퀼리브리엄?

  통상 매트릭스의 아류로 평가되는 영화 이퀼리브리엄의 배경은 매우 극단적인데, 가령 어떤 미래 도시에서는 정부가 인간의 감정을 약물을 통해 강제적으로 통제하며, 감정을 촉발하는 모든 것들을 전적으로 금지하는 것으로 나온다. 시, 회화, 음악과 같은 예술작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애완용 강아지마저도 이와 같은 금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몰래 향유하거나 약을 투여받지 않는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한, 테트라그라마톤이라는 조직이 있으며 그것은 심지어 이런 정부의 단속에 무장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을 진압하기 위한 특수한 기술('건카타'Gunkata라는, 권총으로 수행하는, 뉴에이지 느낌마저 드는 매혹적인 무술 '권법')과 무기들을 보유하기까지 한다. 영화 초반에 이들 저항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이들이 진행하는 작전을 보다 보면, 그것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진행되서 비록 작위적인 설정이지만 이들 저항세력이 지키고자 하는 대의를 옹호하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기서 통상적인 영화의 서사의 흐름을 잠식하는 결정적인 반전이 등장하는데, 무장세력을 잔인하게 진압하고서, 군인들의 손에 의해 은신처에서 저항군이 매우 소중하게 숨겨놓고 있던 '사물'들이 쏟아져나오는 순간, 그것들은 곧 이발소에 걸릴 법한 짝퉁 '모나리자' 그림과, 베토벤의 음반들, 시시한 시집 같은 키취한 잡동사니였음이 밝혀진다. 더군다나 그 진압과정에서 예이츠 시집을 빼돌린 한 요원은 주인공 크리스천 베일에 의해 즉결처형되는데, 죽기 전에 그는 '나는 가난하여 꿈 밖에 가진 것 없네'라는 유명한 구절을 읊는 식이다.

  나는 조영일 씨가 이번 <판타스틱> 잡지에 기고한 글을 읽고서 위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은 재앙적이다 싶을만한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독자 입장에서 그가 문단권력에 맞서 지키고자 하는 게, 혹은 문단권력을 비판하면서 실제로 겨냥하는 게 정작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평소에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그것에 대한 답이 주어질 때 뭔가 허탈한 반전을 목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어떤 기대와 실망이 '상상적'이라는 반론이 주어질 수 있겠지만, 단순히 조영일 씨가 쓴 글의 차원을 넘어서, 정작 조영일 씨의 수신인이 될 사람들, 문단 바깥에서 나름의 문학장르를 추구하고 있는 독자-작가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표준적 반응을 참조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인상으로는, 그는 수신인을 잘못 선택하고 있었고, 따라서 나아가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비판의 요지가 뭔지 더욱 알 수 없게 되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우선 '그들'이 문단과 어떤 긴장관계를 형성할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근거 없는 것이다. <거울>의 독자리뷰에 실린 같은 반응(./zboard/view.php?id=in&no=145)을 보자:

  "조영일 씨의 '평론'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는 문단문학 쪽에서 그가 이야기해 왔던 것의 답습이었다. 혹자는 그게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 점이 문제다. 21세기 장르 잡지에 프로 문학을 이야기하는 대범한 시대착오는 차지하더라도, 애초에 장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평론'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다.
  (중략)
  (조영일 씨의) 평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중문학'을 놓고 문단문학과 대중문학의 관계에 대해 역사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한국의 장르문학이 대중문학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둘의 차이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과거의 장르문학과 현재의 장르문학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니,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과거 대중문화의 특징과 상황=현재 장르문학의 특징과 상황"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때에만 타당하다. 하지만 과연 이 공식이 성립하는가?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야기하려면 바로 이 '장르문학=대중문학?'의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해답이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실제 문단 작품과 대중문학 작품과 장르작품에 대한 비교평가(실제비평)와 함께 다양한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이론적 틀에 입각하여 현 상황을 분석하고 논평(이론비평)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둘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실제비평은 아예 할 능력이 안된다는 것을 밝혔으며, 이론비평의 실제적 예시는 장르문학이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해외문학계도, '현대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8~90년대도 아닌, 광복 이전의 한국 '근대문학계'에서 찾고 있따. 그리고 근대의 한국 대중문학이 21세기의 장르문학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반응이 어느 정도는 예견된 성격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조영일 씨의 글은 마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신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 노동자들에 대한 실패한 동일시의 사례와 유사하지 않은가? 여기서 문제는, 독자는 조영일 씨의 글의 문제의식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영일씨의 그것과 전혀 다른 (라클라우의 표현을 빌자면) '상상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의 문제의식은, "한국 장르문학 평론계의 부재를 겸허히 인정하고 장르문학 평론가를 키워내거나, 해외 평론계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해외의 웹진에 접촉하여 청탁한다면 원고료와 번역료를 두 번 지출하는 부담이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 평론가들보다 훨씬 실제적이고 내실 있는 평론을 기대할 수 있으 것이다. 그리고 이번의 경우처럼 한국의 장르문학에 대해 모르면서 자신이 배운 그대로 이론적인 비평을 기계적으로 쓰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평론은 엄연히 문학의 한 갈래이고, 또한 문학지가 추구하는 미학적 가치와 방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장르문학에 대한 평론이 부재하고, 장르문학의 장르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 하에서 장르문학지를 표방하는 [판타스틱]의 역할은 장르문학이 지닌 가치가 합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비평과 평론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독자 입장에서, 조영일 씨처럼 장르문학을 문단문학에 경쟁적 관계에 있는 구도를 설정하는 것은 '장르문학이 지닌 가치'를 '합당하게' 평가한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조영일 씨가 문단문학의 폐해로 든 사례들을 반박하면서, 드러나는 바이다. "또한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박상륭, 서정인, 오정의, 이외수 등과 같은 작가들이 주목 받는 이유나, 조세희, 최인훈 같은 작가의 작품들이 정말 문학적 가치가 없거나 독자의 자발적 선택을 받지 못할 만큼 떨어지는 작품인지에 대해서 실제적인 비평을 통해 이야기하지도 못했다. 최인훈은 벌써 예전에 외국으로 번역 소개되어 호평 받았고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서 그 가치를 몇 마디 말로 무시한다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검증이 된 상태이며, 조세희는 단지 문학교과서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수능 특수와 엄청난 광고세례에 힘입어 그야말로 '학생들의 교과서'가 된 이문열 평역 [함국지]가 최근에 145쇄를 돌파했는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미 200쇄를 돌파한지 한참 지났다. 비슷한 시기에 집필된 이문구의 [관촌수필]이 30쇄 정도인 것과 비교해보면, 단순히 교과서 때문이라고 치부할 만한 일은 아니다.)" 조영일 씨 말대로라면 필시 이미 문단 이데올로기에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한 이 '독자'가 갖고 있는 일련의 문단 작가들에 대한 대한 연대감은, 그것이 '상상적인' 것에 불과하다손 치더라도 분명 우연한 것도, 일탈적인 것도 아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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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로스 09.07.12 19:39 댓글 수정 삭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박가분님이 말씀하시는 '문단 이데올로기'라는게 어떤 의미인지 하는 것입니다. 소위 '문단 주류'의 정치적인 부분을 이야기하시는 건지, 아니면 문단에서 통용되는 미학적인 부분을 이야기하시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감이 안 잡히거든요.

    그리고 저는 최인훈이나 박상륭 등의 작가들이 (어느 쪽이든)문단 이데올로기 내에 있는 작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고, 작품의 미학적인 평가에서 그들이 지닌 가치를 부정하기란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문단 이데올로기(이게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를 재생산하는 중심에 있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현재 문단 주류라고 보기 어렵고, 문단에서의 그들에 대한 평가도 그들의 잣대로만 바라보고 있어 별로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나름의 재평가 작업이 필요한 작가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문단 작가들에 대한 연대감이라는 것은, 제게는 꽤나 당황스러운 오해입니다.(솔직히 말하자면 좀 허탈하기도 하고 그래서 헛웃음도 나오고 그렇습니다) 저는 문단에 대한 연대감도, 경쟁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까놓고 말해, 뭐가 있어야 연대를 하든 경쟁을 하든 하죠) 저는 장르소설의 미학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뚜렷하게 밝히지도 못한 조영일 씨와 같은 분이, '무너져가는 문단문학' 상황에서 장르문학을 하나의 대중문학적 '돌파구'로 인식하려는 투의 안일한 구도 설정에 반대하는 것뿐입니다. 아니, 왜 우리가 그들의 '대안'이 되어줘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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