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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2002년 겨울,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나는 당선가능성이 거의 없는 어떤 후보를 찍은 뒤 학교 앞에 있는 라이브 클럽에 갔다. 그날 무대에 오른 밴드가 발표한 신곡의 제목은 '오늘은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제로 내 앞에서 누군가가 연주하는 것을 코앞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관객은 이삼십 명 남짓, 노래는 모두 자작곡이었다. 나는 왜인지 가슴이 머엉하게 울렸다. 아마도 음향 탓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나는 홍대 근처 지하의 한 클럽에 있었다. 클럽이라고 해서 헐벗은 남녀들이 짝짓기 상대를 찾는 그 클럽이 아니다. 어깨에 기타를 이고 지고 지하철을 타고 온 이들이 무대에 오르는 공연 클럽이었다. 친구들의 초대였다. 그들은 이제 막 오디션에 통과해 매주 화요일에 공연 일정을 잡았다고 했다. 보통 라이브 클럽의 대목은 금토일요일이고, 월요일은 쉬는 날이다. 그런데 화요일이라니, 일단 세워는 주겠다는 것이다. 관객은 여섯 명. 두 명은 클럽 직원이었고 네 명은 밴드 멤버의 친구들이었다. 더러 연주를 틀리기도 하고 썰렁한 멘트를 날리기도 하면서 그들은 공연을 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분명 그들은 진짜 공연을 했다. 방구석에서 외로이 연습하는 게 아니었다.

 다시 또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내가 있던 대학 웹진에서는 캠퍼스에 있는 밴드들의 자작곡을 녹음해 음반을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대부분 카피곡을 연주하는 스쿨밴드들 가운데에서 소박하게나마 자작곡을 갖고 있는 밴드를 모아보니 열 손가락에는 꼽혔다. 컴필레이션 타이틀은 '뺀드뺀드 짠짠'. 녹음실을 빌려 어찌어찌 녹음을 했고 디자인은 아는 미대생에게 부탁했다. 시디는 꽤 그럴듯하게 나왔고 밴드들은 별러왔다는 듯 앨범 부클릿 말미에 여자친구에 부모님에 자기가 믿는 신에게까지 'special thanks to'를 줄줄줄 나열했다. 500장의 앨범은 더러 팔리고 더러 남아 편집실 한 구석에 쌓여 있었다.

 그 뒤로도 나는 종종 공연을 보러 갔다. 거의가 아는 사람이 하는 밴드였다. 그들을 보러 가서 함께 공연하는 다른 밴드의 음악도 알게 되었다. 때로 처음 보는 밴드에 '꽂히면' 대기실로 찾아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오늘 공연 너무 좋았어요'라고 말하고는 후다닥 도망갔다. 공연장 입구에서 파는 시디를 사기도 했다. 그들 중 일부는 먹고자고일어나 연습만 한 것처럼 환상적인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악기를 잡은 지 반년도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참 좋게 들렸다. 적어도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 부르고 싶은 노래를 전해 듣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일이년쯤 지난 어느 날, 나는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된 계기에는 어떤 소설을 읽고 '이게 뭐야'라며 집어던졌던 일도 있고 감자를 캐다가 뮤즈가 강림한 일도 있고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글 쓰는 것밖에 없겠구나 하고 인정한 일도 있었다. 만약 한 세대 전이었다면 나는 다시 대학에 가서 문학을 전공해야 하나 신춘문예 일정은 언제일까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 사사를 받아야겠다던가 신춘문예를 통해 짜잔하고 등단해야겠다고 마음먹지는 않았다. 일단 써버린 글을 그냥 누군가가  당장 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쓴 소설을 그대로 블로그에 올렸고 이런저런 온라인 창작사이트에 글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무도 알아주지는 않지만 혼자서 꾸역꾸역 작가의 ㅈ자쯤을 써내려가고 있을 무렵, 나는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이거 왠지 익숙한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 내가 이런 걸 어디서 배웠지?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내가 인디를 따라하고 있구나. 이미 인디밴드의 생존법을 보아버렸구나. 그들 대부분은 스승없이 독학했고 그저 노래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 가지고 채 여물기 전에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어설픈 모습 그대로 관객과 만났다. 기타코드 세 개만 알면 곡을 만들어 무대에 올라 본다는 그들처럼 나도 플롯이고 인물이고 묘사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식하고 용감하게 나선 거였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저절로 그냥.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의 작가모델, 즉 문학을 전공하거나 신춘문예에 응모해 등단부터 하고, 문예지에 단편을 싣고,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는 과정은 굳이 비유하자면 수년간 연습생 생활을 거쳐 갈고닦은 후 데뷔해 상업적인 코스를 밟는 기획사 가수와도 유사한 것이었다.(내용의 진지함이나 사회적 역할이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클럽과 인터넷이 존재하기 전에 노래하는 이들은 음반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관객을 만날 길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PC통신과 인터넷이 존재하기 전에 글쓰던 이들은 출판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독자를 만날 길이 없었다.

 혼자서 노래를 하거나 글을 쓰는 데에는 거의 돈이 들지 않지만 음반과 책을 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음반을 내기 위해서는 만만찮은 자본이 필요하고, 돈놓고 돈먹기 식의 엔터테인먼트의 구조 하에서 음악이란 예술 이전에 좀더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킬만한 상품이어야 한다. 하지만 자취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작곡을 녹음해 노트북 시디 라이터로 음반을 구워 팔 때 필요한 것은 열정과 더불어 노가다를 감내할 마음가짐뿐이다. 거기에는 자기가 부르고 싶은 노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으면 된다.

 마찬가지로 책 한 권을 상업적으로 출판하기 위해서는 전문인력이 투입되어야 하고 그와 더불어 상당한 비용이 소모된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는 검증된 독자군이 있어야 하고 비평집단이 문학성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온라인에 글을 올려 독자와 만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전 국민에게 보급된 컴퓨터와 인터넷선 뿐이다. '졸라쎈 투명드래곤'이 등장하고 이계로 순간이동해 무림고수들이 격돌하는 황당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얼마간의 독자를 찾아낼 수 있다.

 이처럼 원래 '인디'는 단지 유통방식을 정의하는 용어였지만, 그 유통의 방식이 바뀌자 거기에 담긴 내용도 변화했다. 뮤지션이 관객과 만나는 문이 하나였을 때에는 둘은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문지기들의 지침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둘씩 뒷문이 생기고, 그러다가 결국은 아예 여기저기 벽이 허물어지는 상황이 오자 제각각 알아서 벽 너머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도 좁은 문 앞에 진을 치고 앉아 요새는 왜 이리 재미가 없을까 요새는 왜 이리 불황일까 하고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한 켠에서는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권위 있는 누군가의 말보다는 자신의 직관을 따라가는 생산자/소비자들이 벽의 허물어진 틈새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둘이 산발적으로 만나는 공간이 홍대앞 인디씬인 것이다. 그리고 음악판에서 일어난 이 '벽 붕괴'의 현상은 문학의 영역에도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인디음악과 온라인문학은 나름의 리듬과 속도로 움직여 왔지만, 전반적으로 궤를 같이 한다. 두 판의 생산자와 소비자는 대부분 90년대에 십대와 이십대를 보내면서 바다건너의 문화를 익숙하게 섭취했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펜이나 노트보다 편하게 느낀 첫 번째의 세대다. 그들은 자라면서 한반도의 국경 안에는 자신들이 섭취할 컨텐츠가 없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인디음악이 외국 밴드들의 곡을 커버하는 것으로 시작해 점차적으로 자신의 언어를 찾아갔다면, 온라인문학은 톨킨으로 대표되는 북구신화기반 판타지를 통해 한 번 폭발한 뒤 조금씩 '지금 여기'에서의 방법론을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홍대앞으로 대변되는 인디씬의 문화적 에너지가 기존 음반산업을 뒤흔들 정도의 파급력을 서서히 보이고 있는 반면, 온라인문학은 아직 '그들만의 리그'에 머무르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는 기획사/인디신/고급가요로 삼분된 현재의 음악계를 삼국지의 위,촉,오에 비견했다.(관련글: 인디 음악을 둘러싼 시선, 그리고 과제) 반면에 문학판은 이미 생명력이 스러져가는 황실(=문단?)을 두고 대륙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는 구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물론 지난 십년간 거의 온라인문학의 동의어가 되어버린, 엘프와 드래곤이 등장하는 판타지를 계속 써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인디씬의 전례를 본다면, 이미 바다 건너 존재했던 그 누군가의 스타일을 답습하는 것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그런 방식의 글쓰기는 팬덤을 형성할 수는 있으나 기존의 판을 뒤흔들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재미와 즐거움은 있지만 읽는 이들에게 '내 이야기'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번역을 거치고 수백만 광년 너머의 우주나 이계로 날아가고 주인공의 이름이 철수에 영희가 되더라도 그 내면의 정서는 다분히 서구적이다. 대다수의 독자로서는 자기와 동일시는 고사하고 동네 친구나 아는 사람 정도로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같은 서구형 판타지문학의 대안이 꼭 뛰어난 문학성과 유려한 문체를 갖춘 완벽한 작품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 여기'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잠깐이라도 뒤흔들 수 있다면, 그동안 존재했던 그 누구도 닮지 않은 독창성과 깊이를 어설프게라도 살짝 보여줄 수 있다면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문학에, 이야기에 목마른 사람들은 매혹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또한 관건은 내용의 좌표만이 아니다. 형식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현재의 온라인 문학은 단지 '돈 주고 사서 보지 않아도 된다'는 특징 외에는 사실상 오프라인 문학과 형식상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다. A4 한 장짜리 소설을 주요 컨텐츠로 하는 창작사이트 '한페이지단편소설(http://1pagestory.com)'을 운영하고 있으며 '웰컴투언더그라운드'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서진은 계간 <작가와 사회> 2008년 봄호에 게재한 ‘인터넷이 문학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라고?’ 에서 '인터넷에서만 가능한 문학형식'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온라인은 다중 결말, 여러 개의 시점, 독자참여내러티브 등 종이책에서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던 실험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떤 집단에서도 그러한 시도가 활발하게 경주되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가 없다. (혹은 내가 아직 모르는 걸 수도 있다. 있으면 좀 알려주시길.)

 유통방식은 어떨까? 인디씬에서는 이미 대부분의 밴드들이 EP부터 음반을 찍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즉 PC를 통한 홈레코딩으로 음원을 만든 뒤, 3,4곡 정도의 '싱글음반'을 자비로 제작해 공연장 등에서 판매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음악적 색깔과 맞는 인디레이블에 들어가 정식음반을 내기도 하고, 싸이월드나 네이버 등의 온라인 포털에서 음원을 판매하기도 한다. 대개 큰 돈은 안 된다고 하나, 가끔은 음원판매차트에서  '브로콜리 너마저'나 '장기하와 얼굴들'같은 괴물들이 나타나 빅뱅와 원더걸스 위에 떡하니 들어앉아 있곤 한다.

 온라인문학도 이런 유통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작가지망생들은 너무 소극적이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책이란 남이 찍어주어야 '가오'가 선다고 여기는 것 같다. 나만해도 '어떻게 내가 내 책을 직접 팔아…'라는 부끄러움이 가장 먼저 고개를 내민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인디씬, 만화판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좀더 노골적이다. 상업만화를 패러디해서 돈을 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팔리는 것은 등장인물들을 동성애적 관계로 만들거나 포르노의 주인공으로 그려 각색한, 말하자면 '패륜적'인 만화들이다. 심지어 상업작가보다 더 거금을 버는 동인지 작가들도 있다.(중간마진이 없는 덕분이다.) 우리는 순수 창작물을 만든다. 그런데 부끄러울 것이 무어란 말인가? 창작물이라 부끄러운 건가?

 판타지 소설을 위시한 기존의 장르문학이 밟아온 온라인 유통-인기작 출간의 경로도 분명 대안적인 방식이었지만, 수익구조라는 측면에서는 결국 기존의 등단-출판사 출간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누가 인력과 자원을 투자해서 내 책을 내 주어야만 돈이 된다. 또한 글이란 음원과 달리 종이로 읽어야 제맛이다. 책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들도 EP음반처럼 단편 2,3개를 담은 '싱글 개인지'를 만들면 어떨까?

 거창하게 매킨토시나 출판용 소프트웨어를 써서 인쇄소에 넘기지 않아도 된다.시디라이터로 음반을 굽고 잉크젯 프린터로 라벨을 찍어 수공업 음반을 파는 '붕가붕가레코드'의 방법론을 본따 보자. 워드프로세서로 편집하고 프린터로 인쇄해 손으로 묶는 것이다. 그런 방식이 궁상맞다고 자조할 것도 없다. 붕가붕가(각주: 붕가붕가라는 단어조차 동물의 자위행위를 말하는 비속어로, '혼자서 생산하고 스스로 즐긴다'는 모토를 대변하고 있다)도 학교 강의실을 빌리고 구성원들의 자취방을 전전하며 수공업 방식으로 앨범을 아홉개쯤 냈을 때 '장기하와 얼굴들'로 대박이 났다. 공식적으로 팔린 것만 만 장이고 다운받거나 동영상을 통해 음악을 들은 이들은 수십, 수백만 단위로 추산된다.(정확한 숫자를 누가 알랴?) 그들은 만 장을 손으로 찍느라 밴드 멤버고 레이블 직원이고(서로 친구들이다) 거의 초죽음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래도 그 돈으로 사무실을 빌리고 상근직원도 채용하고 시디 굽는 기계도 샀단다. 소설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나?

 물론 하나의 서브컬쳐가 메이저급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일부 구성원들이 고군분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정형화된 기존의 방식에 대한 소비자들의 욕구불만이 누적되어야 하고, 생산자 집단 내에서 새로운 것을 능히 시도할 수 있는 유연한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며, 새로운 유통방식에 힘을 실어줄 만한 기술적 혁신 내지는 마케팅적 방법론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 삼박자가 맞아떨어질 때 바깥에서 보기에는 느닷없이 '무서운 아이들'이 무대 위에 솟아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여타 분야의 전례가 말해주듯, 손놓고 기다린다고 혁명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장강이 흐르고 있다면 시체로 강을 메워서라도 다리를 만들어야 물을 건너가는 것이다. 국산 애니메이션계는 십 수 년간 끝이 보이지 않는 노가다를 한 끝에 겨우 '뽀롱뽀롱 뽀로로'같은 히트작을 냈다고 한다. 홍대앞 인디씬의 '키드'들도 밥 굶고 기타 팔고 편의점 알바로 연명하며 청춘을 불살라 버틴 끝에 이제 겨우 부흥의 시기를 맞고 있다. 만화판도 대여점과 스캔만화로 다 망했다고 생각했더니 포털 웹툰이라는 신천지가 나타나 새로운 감성의 작가들을 미친듯이 낳고 있지 않은가. 문학이라고 예외일까?

 분명 문학판에는 한때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사들의 집단이라는 월계관이 존재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아직도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그 옛날의 이야기를 발굴하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모든 문화적 생산물이 그렇듯이, 캐스팅보트를 쥔 것은 결국 소비자들이다. 듣는 이 없는 음악은 단순한 소음이며 읽는 이 없는 소설은 누군가의 낙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문학의 소비자, 즉 독자들이 조금 더 목마르고 조금 더 갈급하고 조금 더 부지런해질 때, 반드시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문학을 간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가 왔을 때 천하의 대권을 거머쥘 이들은 환상문학의 자유 안에서 작가적 진지함을 고민하는 이들일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각종 영화와 만화와 게임을 통해 이미 넓어질 대로 넓어진 소비자들의 취향을 충족시키면서도 10대를 타깃으로 쓰인 대여점용 소설로는 만족할 수 없을 만큼 어른이 되어버린 이들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작가주의 환상문학 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시체가 되어서라도 강물에 빠지는 치열함과 미리 '그 때'를 준비하는 치밀함이 필요하다. 쓰자. 쓰고 쓰고 계속 쓰자. 그리고 뿌리자. 뿌리고 뿌려서 누구에게든 읽히고 보이고 멕이자. 고단하고 피곤하고 힘겨워도 그렇게 대장정의 길을 가다보면 어느새 중원에 다다라 있을 것이다. 홍대앞 인디씬과 만화판의 사례를 보건데, 그 시기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온다. 그 때가 되면 여유롭게 돌아보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엔 참 막막하고 캄캄했다고. 내 이야기를 과연 누가 읽어주기나 할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고. 이렇게 쓰는 것들이 단돈 몇 만원이라도 될지 의구심이 들었다고. 그저 내 이름이 찍힌 책을 한번 보기나 하는 게 꿈이었다고. 그렇게 말할 때가 곧, 곧 올 것이다. 혹시 아는가.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한국영화처럼 한국 장르문학도 한반도를 제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 문학판으로 퍼져나가 일찍이 본 적 없었던 뉴웨이브를 일으킬지.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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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 09.06.27 09:30 댓글 수정 삭제
    시체로 강메우기... 애니메이션계는 뽀로로가 나오기까지 숱한 시체를 강에 쏟아부었죠. 언젠가 누군가와 술먹으며 들었던 이야기가 나와서 놀랐습니다. 과연 고민하는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걸까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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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Real 09.06.27 13:26 댓글 수정 삭제
    as// 아마도 우리가 같은 사람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요(...) 아무튼 우리 시체가 되지 말고 강을 건너가 천하를 거머쥐는 사람들이 됩시다 음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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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 09.06.27 14:26 댓글 수정 삭제
    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건가요. 그렇다면 유추하건대 제가 먼저 들은 듯 하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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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밀 09.06.27 16:26 댓글 수정 삭제

    공감합니다. 분명 언더그라운드적 자유와 작가적 진지함도 갖춘 이 장르문학은 소비자들의 취향을 충족시키기에 걸맞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작가들은 그 가능성을 200%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면이 있고요. 좀 더 진취적으로 용감하게 나서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ㅎㅎ
    다만, 음악씬과 비교/대입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그래서 정확히 무엇인가, 에 대해서 고개를 좀 갸웃하게 돼는데요.
    논거로 드신 디테일 부분에서 좀 이견을 제시하고 싶어서 몇 자 적어봅니다.

    인디 음악의 성공이 좀 더 넓어지고 다양해진 소비자들의 취향과 니즈가 메이저의 시스템에서 충족되지 못하고, 이에 따라 '생산자/소비자'들의 벽이 허물어진 틈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원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소비자에게 영합하는 것은, 그건 디펜던트-생산자가 훨씬 낫지 않을까요. 디펜던트란 말 그대로 자본과 그로 인한 손익, 대중과 그에 대한 인기에 '의존'한다는 뜻이니까요. 장기하나 브로콜리너마저가 없더라도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원더걸스나 빅뱅만으로도 만족해하게 마련이지요.
    인디펜던트는 역시 문자 그대로, 그런 것들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걸 말하잖아요. 인디 밴드들이 돈을 못 벌고 있는 건 저들이 스스로 대중의 인기와 취향에 맞추지 않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나 다름 없고 돈을 못 버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의존하지 않아서 얻는 것이 무엇이길래? 바로 음악성이지요.
    단순히 자기가 부르고 싶은 노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치기로만 나서는 것은 인디의 본질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게만 해서는 스쿨밴드 이상으로 나아가기도 힘든 게 사실이고... 가사나 내용 면에서 '지금 여기'가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움은 되겠지만 부수적이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성에 대한 탐닉이지요.

    팝/락 음악판의 구도가 문학계와 다른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디펜던트는 대중의 취향에 맞지만 그만큼 쉽게 잊혀지며 비독창적이고 키취합니다. 인디펜던트는 대중의 취향에 맞지 않는 대신 '음악성'을 고민하구요. 그들의 음악은 작품성 면에서 빼어나지만, 그들이 하지 않았다면 한국에서는 돈벌이가 안되기 때문에 아무도 하지 않았을 음악들이에요. 그러나 그들은 하지요. 그만큼 음악성과 작품성에 몰입하고, 고민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는, 음악 오타쿠들이기 때문예요.

    그러나 문학계는 이와 판도가 좀 다른 것 같아요. 엄밀히 말하면 문학계에는 디펜던트와 인디펜던트의 구분이 음악판과 정 반대의 구도를 이루는 듯해요. 음악판에서는 디펜던트=오버그라운드, 인디펜던트=언더그라운드였다면, 문학판에서는 디펜던트=언더그라운드, 인디펜던트=오버그라운드의 구도인 셈이랄까요.
    언더그라운드 즉 온라인에서 연재하면서 활동하는 언더 작가들은 사실상 그다지 '인디'하지 않아요. 대부분 '디펜던트'하죠. 그들이 하는 문학은 대개 통속소설 대중소설이고 (장르문학이라고 해도 하드하지 않고), 대중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은 글이에요. 반면, 오버그라운드 즉 등단을 거친 본격문학 작가들은, 음악계의 오버그라운드와는 달리 절대 '디펜던트'하지 않죠. 그들이야말로 작품성에 몰입하고, 고민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는 문학 오타쿠들이랄까요. 그렇기에 이들의 예술성과 작가주의는 놔둔다고 돈이 자동적으로 벌리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국가가 나서서 보조해주는 취지인 거고요. 반 공공재 성격이랄까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멋대로 쓸 자유도 좀 사라진다는 역설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같아요. 좀 거칠게 쓰자면. (하지만 '내가 쓰고 싶은 거 멋대로' 쓴다는 건 결국 일기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많이 합니다 (웃음) 중요한 건 내가 쓰고싶은 걸 멋대로 쓰지 못하게 하는 억압기제가 어디의 누구이고 어떤 성격을 갖고있는지에 달려있겠지요.)

    음악계에서는 음악을 정말로 좋아하고 지식이 풍부한 소수의 소비자들은 인디펜던트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중영합적이고 듣다 금방 버리는 팝이 아니라 정말 작품성을 추구하는 작품을 듣고싶다면, 인디 외에는 선택지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 소수의 소비자들이 그 인디밴드들을 먹고 살려주지요. 그 과정에서 정말로 실력파이고 싹수가 푸른 인디밴드들은 자신들을 알아봐준 선진적 소비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외부에도 알려지게 됩니다. 장기하나 오지은도 반드시 그런 과정을 거치구요.

    문학계에서도 문학을 정말로 좋아하고 지식이 풍부한 소수의 소비자들은 인디펜던트로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요. 대중영합적이고 읽다 금방 버리는 공항 라운지나 화장실용 소설이 아니라 정말 작품성을 추구하는 작품을 읽고 싶다면 인디 외에는 선택지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인디펜던트가 문학계에서는... ^^; 언더그라운드 인터넷 소설이 아니라 결국 오버그라운드 본격문학이 아닐지.

    이런 구도에서 거울을 비롯한 일부 작가주의 언더그라운드 작가들은 위치가 좀 애매한 것 같아요. 음악판의 인디계와는 정확히 대입될 수 없는 중간지대에 있다고 할까요. 음악에서는 소비자들이 언더그라운드에 작품성/난해함을 기대/예상하지만, 문학에서는 독자들이 언더그라운드에 작품성/난해함을 그다지 기대/예상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너무 단순한 구분인 듯하고 물론 예외들도 많다는 걸 알지만, 어디까지나 '음악과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그런 비교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제가 하고싶은 말은... 음악판 인디계에서 성공하는 밴드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고급 입맛과 귀를 가진 청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인디펜던트는 결국 인디펜던트라는 말 자체가 작품성으로 승부한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노래 좀 못하고 독창성 좀 없어도 성공할 수 있으려면 디펜던트로 가야겠죠.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인디는 곧 작품성으로 승부한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문장 좀 못 쓰고 독창성 좀 없어도 성공할 수 있으려면 디펜던트(=통속소설)로 가야 할 거고...(웃음) 그러니까 요지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공부를 많이 해서 좋은 작품을 잘 써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인데요. 다만,

    말씀하시는 '지금 여기'를 쓰고 소비자들을 설득하는 글을 쓴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디펜던트'해질 수 있는 걸까요.
    그렇다고 '작가주의'만 하자니,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작품성만 고집하면서 (똑같이 작품성을 고집하는 오버그라운드 작가들은 나랏돈을 받는데 우리는 돈도 없고 무엇보다도 '작품성을 판가름하는 비평적 기준도 부재'한 채 출판사의 의견와 독자들의 시선 사이를 헤매며) 시체로 강을 메워야(!) 할까요.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통 형식에 대해서 조금만 덧붙이자면,
    음악 인디계의 유통방식이 좋은 것은 그것이 저들이 특별히 용감하거나 진취적이어서 새로운 유통방식을 적극적으로 계발하고 추진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 말씀하신 EP반이나 싱글, 자가 제작 방식, 수용자에게 직접 찾아가는 방식 등은, 레코드라는 게 만들어진 이래로 정착된, 역사가 유구한 시스템이니까요. 하지만 문학의 언더그라운드계는 주로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 온라인이라는 것의 역사가 얼마 안되다보니, 종이책과 결부한 유통이나 시스템 구축의 차원에서 아직 혼란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요. 결국은 작가들이 열심히! 해야겠지만. ㅎㅎ

    이래저래 길게 적었지만.. 시리얼님께서 말씀하신 핵심에는 동의를 한답니다. 태클이라기보다는 더 깊이 생각해보자는 차원에서 덧붙인 이야기들이었어요.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하네요. :D

    덧. 노파심에 적어두자면 지금까지 제가 쓴 것에서 이른바 '통속소설'이라는 것에 대한 폄하의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오해 없으시길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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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Real 09.06.30 06:56 댓글 수정 삭제
    와아 왕긴 덧글에 감동먹었어요. 역시 왕언니 아밀님... (제 마음 속에서;;)

    아무튼;
    아밀님의 지적은 제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을 일깨워주셨어요.
    특히 인디와 오버, 디펜던트와 인디펜던트(아이 복잡하다...)의 정의는 현재의 환상문학을 규정할 수 있는 핵심적인 키워드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오버 문학판'의 작가들이 작품성을 추구하는 문학 오타쿠...라는 부분에서는 조금 고개가 갸우뚱해지네요. 말하자면 그건 하나의 신화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지요. 좀 조야하게 말하자면 어깨에 힘주고 이마에 주름잡는다고 작품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잖아요. 저는 작품성이란 한 인간의 진정성과 진솔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진지'한 '순수'문학에는 그 가치들이 실종되고 있다고 보고요.

    말하자면 인디펜던트란 그 어떤 외부적 권위 혹은 구조와 무관한 자신의 내면적 울림을 따라가는 마음가짐을 일컫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오버문학에서는 그 권위가 여전히 살아있잖아요. 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이 공공재로서 보조금으로 이어지고 있는 거라 할지라도, 분명 돈은 돈이지요. 그리고 작가지망생들은 거기에 걸맞는 양식의 글들을 써내고 있고요. 그것이 과연 인디펜던트일까요? 저는 의문이 듭니다. 과거에 인디펜던트한 스타일이 지금도 그러리란 법은 없는 법이잖아요.

    물론 아밀님이 지적하신 대로 언더온라인문학은 다른 의미로 디펜던트합니다. 그쪽은 자본에 의해 디펜던트하죠. 그런 의미에서 작가주의 환상문학은 제3의 길? 아무튼 시체 메우기임은 맞는 말이죠. 문제는 우리가 이미 시체인 것이냐, 아니면 죽을동 살동이냐...^^

    저는 '지금 여기'의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진정성과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진정성은 본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 분리가 심하다면 메우기 위해서, 즉 독자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글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메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라는 질문에는 작가도 일정부분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편집자나 잡지쟁이들도 여기엔 책임지분을 갖고 있겠지만요. 아무튼 저는 판타스틱을 보기 전까지 한국에서 작가주의 환상문학이라는 게 가능한 건지도 몰랐으니까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음악판에서 성공하는 인디들에 대한 제 생각은 아밀님과는 조금 달라요. 브로콜리같은 경우 정말 골방에서 이불 뒤집어 쓰고 녹음한 EP의 음질은 어떤 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귀 열고 듣기 끔찍할 정도'였다고 하거든요. 멜로디도 새롭다기보다는 복고적이었고요. 하지만 그 복고적인 감성과 진솔한 가사가 동시대 블로거;;;들의 마음을 움직였죠. 저는 그런 의미에서의 대중성과 진정성이 문학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아니 쓰고보니 아밀님도 같은 얘기를 하신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아무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시 열심히 살고 열심히 쓰는 것...이라는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는군요. 그리고 뭐, 돈 없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로서 마음이 해이해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근처 도박장에 가서 전재산을 탕진하고 왔대요. 그러면 글에 대한 절박함이 달라지더라나요. 우리도 절박하잖아요. 전 돈 많으면 한달에 하나씩 단편은 못 쓸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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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Real 09.06.30 07:08 댓글 수정 삭제
    아 그리고 인디의 작품성 추구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밴드들은 대부분 작품성에 대한 진지한 추구보다는 그저 노래를 하고 싶고 만들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이라... 이 역시 표본추출에 문제가 있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자기가 하는 음악에 작품성있는 태그를 붙이는데도 성공한 밴드는 제가 보기에 루시드폴과 국카스텐 정도... 나머지는 거의가 '내가 무슨 음악의 대안을 만들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건데' 의 분위기예요. 그리고 그런 '안 진지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음악이 현재 인디씬의 주류라고 생각하고요. 그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니까요.

    아마도 이것은 작품성에 대한 아밀님의 시각과 제 시각이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둘다 같은 얘기를 좀 다르게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저는 작품성이란 작품성 그 자체에 대한 추구로서는 잘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걸 말로 설명해서도 그렇구요. 그건 작가의 인간관과 세계관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요.

    기왕 인디음악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인디 얘기로 마무리를 짓자면,
    장기하가 그냥 인디밴드맨이었던 시절 만들었던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가 참으로 촌철살인이었는데, 다음과 같았지요.

    '너는 항상 솔직한 게 가장 좋다고 내게 말하지만
    하지만 니가 만약에 아주 나쁜 놈이라면
    그래도 정말 솔직한게 정말 좋은걸까'

    제 생각에는 자기가 나쁜 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솔직해도 되지 않을까요.
    자기가 나쁜 줄 알면 더이상 나쁜 놈이 아니니까...^^;;

    저는 그런 맥락에서 진솔함과 진정성, 그리고 거기에 테크닉이 더해질 때 진정한 작품성이 추출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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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임즈 09.07.01 02:49 댓글 수정 삭제
    와......우연찮게 들어와 글을 읽어봤는데....
    정말 좋은 글이군요!

    하지만 단 한가지
    지금 장르문학에 대여점이 미치고 있는 부분의 설명없이 출판의 새로운 시도를 말한게 조금 아쉽군요..

    그래도 글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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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임즈 09.07.01 02:51 댓글 수정 삭제
    아, 그리고 이 칼럼의 주소를 사이트 [문피아]에 소개해도 좋을까요?
    좋은 글이라 나누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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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밀 09.07.02 00:07 댓글 수정 삭제
    음, 제가 작품성이라는 단어를 일단 사용하기는 했습니다만 아주 적절한 말은 아니었네요. 말하자면 어떤 장르든 어떤 분야든 좋은 작품은 그 자체로 작품성은 좋을 수 있으니까요. 바흐와 비틀즈를 비교해봤자 의미가 없는 거랑 비슷하지요.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예술성'에 가깝겠어요.

    예술성은 이상적으로는 예술성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자의 반응, 시대의 대세, 정치적인 영향력이나 억압, 인기와 돈의 유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창작자 자신의 감흥과 욕망과 진실성-진정성!' 같은 것까지도 모두, 사실상 핵심적인 지표는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물론 그런 것들이 도움이 안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도와주기만 하느냐면 그것도 아니고. 진정성의 경우 잘 쓰면 깊이있는 글이 되지만 잘못 쓰면 작가의 작품 장악력이나 판단력을 흐리는 독이 되고 말죠. 본질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성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 아닐까요. 즉 문학의 형식과 짜임과 테크닉과 그 내용에 담아내야 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 능력과 이 모든 것을 끌고 나가는 부단한 실험과 공부라고 생각해요.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여기'의 독자들을 설득하는 공감력이 작품에 있어야 하고 그게 바로 문학의 힘일 거예요. 하지만, 그게 과연 작가 한 개인의 인간관과 세계관, 한 개인의 솔직함, 그런 것에서 얻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듭니다.
    자기 진정성, 자아 실현, 내 감정, 내 시야-를 추구하는 거랑,
    나와 너의 같음과 다름, 인간과 인간의 원형성과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사회와 인간의 마음과 그 세계-를 공부하고, 이해하고, 소설에 녹여넣어서 독자를 설득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가 아닐까요?
    전자에 치우치면 운이 나쁘면 평생 일기만 쓰다가 끝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쩌다가 그게 남들과 파장이 잘 맞을 정도로 보편적인 상태/감정을 나열하고 있는 거라면, 운이 좋아서 공감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내가 너무 마이너한 인간이라면(나쁜놈이라면?) 아무리 솔직해봤자 아무도 공감 안해줄 수도 있고 말이죠.. (웃음)
    이렇게 되면 시리얼님이 말씀하신 그 '독자와의 분리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되는데, 저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문학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장르든 문단이든 어디든 간에, 누구나 무언가에 디펜던트하거나 어떤 압력에 제한당한 채로 창작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항상 생기고, 또한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요(순문학 작가들도 어차피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긴 하지 않나요?). 또한 누구나 한 사람의 진심은 전체 대중에게 전해지기에는 너무 내밀하고 조악하게 마련이라서, 그걸 혼잣말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특정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데, 바로 그 기술에 노정되는 일련의 노력과 실험과 태도가 작품성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작품의 진정성이라는 건 작가 개인의 자유의지의 여부보다도, 진정성이 느껴지도록 '잘' 쓰여진 '작품'이 존재할 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잘 쓰여진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요. 세상 공부, 테크닉 공부, 이야기의 원형성 공부, 기타등등.

    그리고 그런 점에서의 가치는, 문단문학 즉 순수문학에서 결코 실종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이 어깨에 힘주고 이마에 주름잡고만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T_T; 무엇이 가장 완성된 문학인가를 고민하고, 인간과 세계를 공부하고 성찰하고, 독립적인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이, 권위나 엄숙이나 진지함으로만 평가될 수 있을까요? 순수/본격문학이라는 건 그런 문학 본연의 독립적 예술성을 가장 본격적이고 순수하게 추구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 어떤 뭔가 별 다르고 머나먼 곳에 있는 특정한 장르를 의미하는 건 아닌데 말이지요. 물론, 순수문학 바닥이 실질적으로 그렇게 말처럼 알흠답게 돌아가고 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고, 문단문학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는 실정인 것도 맞고, 순수문학이라는 게 '뭔가 별 다르고 머나먼 곳에 있는 특정한 장르'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들만의 트렌드'에만 빠져있는 경향이 있는 것도 맞아요. 하지만 문학 본연의 예술성을 고민하고 추구한다는 방향성은, 어떤 장르든 어떤 문학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태도라고 믿고 있어요.

    사실 이 문제는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무엇이 가장 방해가 되는가'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네요, 이건. 시리얼님은 그걸 권위나 외부의 억압이라고 보시는 듯하고, 저는 창작자의 자의식(과잉)이나 수용자의 반응에 딸려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고. 그렇게 다른 걸지도 모르겠어요. :3

    아무튼 아음, 말씀하신 것처럼 저와 시리얼님의 작품성에 대한 시각차를 잡고 이야기하다보니, 이야기가 너무 내밀한 부분으로 간 게 아닐까 싶은데...;; 사실 창작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작가마다 다 다른 거 아니겠슴까. 다 써놓고 이제와서 이렇게 말하면 좀 진상이다 싶습니다만 ... -_- 그냥 뭐 가장 중요한 건 재능인 것 같아요! 재능이요!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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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Real 09.07.02 17:11 댓글 수정 삭제
    네임즈 // 좋은 글이라고 평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링크는 당연히 하셔도 됩니다. 그거야 인터넷을 쓰는 사람들의 당연한 권리지요. 퍼가시겠다는 것도 아닌데...

    대여점에 대해서는, 저는 이미 끝난 논의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환상문학(장르문학)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고, 대여점에는 미래가 없으니까요. 문피아처럼 장편 위주의 사이트에서는 여전히 대여점이 주요한 유통망의 하나로 취급되고 있지만, 거울은 단편 중심이라 그렇기도 하고요. 물론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아밀 // 예술성과 작품성, 순수문학 작가들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더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지금 여기서 눈에 띄는 아밀님과 저의 차이는 좌표인 것 같아요. 창작을 하는 데 있어 아밀님의 좌표는 작품의 안, 창작자의 내면에 있다면, 저는 작품과 독자 사이의 어떤 지점에 더 관심이 많아요. 그들이 만나는 곳이요. 그 조우의 순간을 위해서라면 '예술성'을 잠시 뒤로 미루어 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물론 저도 매 창작의 순간마다 예술적으로 작은 성취나마 이루기를 바라고, 독자의 반응이 아닌 저 자신의 사이클에 따라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독자의 내면에서 재구성되는 과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작품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 역시 독자를 상정할 때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염두에 두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불특정 소수'를 생각하지요. 글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많은 영향을 받는 소수요. 물론 그 소수가 헤게모니를 잡으면 다수의 감성으로 전염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좀 또 다른 논의고.

    아무튼;; 테크닉에 대해서는 적극 공감해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진정성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테크닉이 필요하죠. 말하자면 데이터 손실률을 최소화해야 한다고나 할까요... 열효율을 극대화해야한다고 해야할까요.

    근데 저도 자의식 과잉이나 수용자의 반응에 딸려가는 거 무지 경계하는데... 다만 이 글의 논지는 외부의 권위나 순수문학의 룰에 굴하지 말고 내키는 대로 일단 쓰자! 라는 거였으니까 말이죠.

    요는 작가/독자의 이분법을 넘어선 어떤 지점에, '공감'의 지점이 있을 거라는 얘기였어요. 작가로서 저는 그곳을 찾고 싶고, 테크닉을 개발해 그리로 가는 최단거리의 길을 뚫고 싶고요. 저 자신의 예술적 성취는 그리로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획득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뭐 결국은 이런 말 수천마디보다는 작품으로 보여야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참 흥미진진한 일이에요.

    결론은 거울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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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밀 09.07.02 17:36 댓글 수정 삭제
    음... 저는 그 예술성이라는 것이 결국 독자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구가하는 본질이라고 보는 거거든요. 시리얼님이 말씀하신 그 '조우'의 순간을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의 문제요. 마케팅에서 나오는 얘기지만 대중의 '니즈'는 거기에 이미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생산자가 만들어내는 거라고 하지요. 작품을 탐하게 하는 그 니즈라는 것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독자를 사로잡고 제압할 수 있는 공감력의 원천은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그것이 바로 예술성 탐구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난해하고 고차원적인 상아탑적 연구라기보다는요(물론 그런 측면을 배제하는 건 아닙니다만).
    여하튼 알흠다운 토론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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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림 09.07.04 07:49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많이 비슷하네요. 별러왔다는 듯 스페셜땡스투... 눈물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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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Real 09.07.04 15:31 댓글 수정 삭제
    아밀 //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아밀님과 제가 다른 곳에 서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온 문은 달랐을지 몰라도요. (나가는 문도 다를려나요? ^^)

    계림 // 그때 저 앨범에 참여했던 밴드들이 현재 인디씬에서 한가닥들 하고 있지요. 근데 당시에 앨범 제작팀에게 스페셜 떙스투를 날린 밴드는 딱 하나 있었다는 슬픈 비하인드 스토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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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토 09.12.21 19:13 댓글 수정 삭제
    좋은 글, 댓글 많은 걸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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