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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SF는 자칫 작가와 독자 모두를 냉소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장르인 것 같다. 대개의 SF가 근간으로 삼고 있는 자연과학이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주의를 기본에 깔고 있는데다가, 상당수의 작가들이 과학을 통해 낙관하기보다는 비관하는 쪽을 택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이 가져다줄 장밋빛 미래란 과학 잡지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픽션에는 그다지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로봇이 모든 집안일을 대신해주거나 통신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나다닐 필요가 없는 편리한 미래사회에 어떤 극적 긴장감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수많은 SF들은 인간의 본성과 문명의 미래를 쉽사리 긍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앞으로 일어날 지도 모르는 불행한 사건들과 어두운 사회상을 그리고, 과학기술이 오용될 때의 위험성을 다루며, 다른 행성과 다른 우주에 가서도 여전히 치고 박고 싸우는 인간군상을 그려내어 지구의 미래와 인류의 앞날을 한층 더 어둡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배명훈이라는 작가는 기본적으로 그런 '어둠의 자식들'이 만들어 온 계보와는 좀 다른 흐름을 타고 있는 듯하다. 그는 ‘타워’를 통해 674층의 초고층 빌딩으로 상징되는 물질문명 속에서도 인간의 마음이 꽃필 수 있음을 은근슬쩍 설파한다. 물론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헉 소리 나도록 끔찍한 반전을 선사했던 배명훈은 분명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쉽사리 그러한 어둠에 빠져들거나 비관하지 않는다.

 빈스토크라는 건물과 그 구조가 주는 위압감, 그리고 음험함을 한껏 고조시킨 첫 번째 에피소드에 비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와 절실함을 구비구비 풀어낸 2,3 에피소드는 그래서 더욱 배명훈스럽다. 두 번째 에피소드 '자연예찬'에서는 자연의 위대함을 서술하는 것으로 눈 앞의 현실에서 고개를 돌리는 현실 비판적 작가가 등장한다. 저소공포증으로 인해 빈스토크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그는 지중해 언덕의 집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을 대가로 소신껏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묶어둔다. 하지만 권력에 의해 살해된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결국,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의 하얀 집에서 살고픈 욕망을 포기한 채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펜을 움직여버린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권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물고를 당하는 것이다. 그런 그를 먼 훗날 위로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타인의 소박하고 성실한 마음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는 명석하고 냉철한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민권과 병역의 의무에 대한 역사적 코드를 미묘하게 건드리는 이 에피소드에서는 사랑하는 여자와 같은 곳에 살기 위해 군대를 한 번 더 간 남자가 등장한다. 4년간의 재복무를 마치기 6개월 전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적국의 미사일에 의해 격추된 그는 자신을 고용한 빈스토크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묻혀 자신을 고용한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버림받는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그를 위해 움직이는 것은 초고층빌딩의 차가운 외벽 안에서 여전히 심장을 간직하고 있는 한 명 한명의 개인들이다.

 이처럼 배명훈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건물 하나에 구겨 넣음으로서 정치권력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분노를 세련되게 드러내지만, 그것이 한 개인의 선량함과 따스함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는 듯하다. 오히려 권력은 십년을 가지 못하고 무상하게 스러져도 사람의 온기는 수십 년을 지나도 여전할 수 있다고, 독자의 호주머니에 슬쩍 낙관주의를 찔러 넣는 것이다.

 일 년 전 있었던 촛불시위 때 배명훈은 어디에 있었을까. 길 위에 있었을까, 글 위에 있었을까. 어디에 있었던 간에 그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련의 상황들을 명료한 눈으로 낱낱이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새삼 촛불정신의 소강을 아쉬워하고 정치권력이 나날이 인간성을 잃어가는 모습에 수많은 사람들이 비관적이 되어갈 때, 배명훈은 '타워'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쉬이 지쳐서 포기하거나 도피하지 말자고. 그리고 그는 분노하기보다는 풍자하는 쪽을, 절망하기보다는 기다리는 쪽을 택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정말로 세상에 십 수 년이 지나도 아무런 대가 없이 여전히 로봇을 돌보고 그 영혼을 찾아 헤매는 소녀가 있을지, 자신의 사소한 실수로 인해 바뀌어버린 타인의 운명을 위해 이런저런 수고와 위험을 감내하는 공무원이 존재할지.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수백만 명이 만만찮은 노력을 들여 지겨운 일에 정말로 몰두할 수 있을지는. 하지만 적어도 배명훈은 그런 일들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쉬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유머 감각을 잃지만 않는다면. 아주 작은 따스함을 잃지만 않는다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타워'를 읽고 나니 왜인지 그렇게 믿고픈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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