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걷기 딱 좋을 만큼 맑은 날, 홍대 앞의 스파게티점에서 유서하님(이하 서하님)을 만났다.
   서하님은 {플라스틱 프린세스}가 거울 32호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44호에 {웨딩 마치}를 발표하며 거울 시간의 잔상 필진으로 합류하셨다. {플라스틱 프린세스}는 이후 웹진 크로스로드 2007년 9호에 게재된 바 있다. {웨딩 마치}는 제1회 황금드래곤 문학상을 계기로 만들어진 환상문학 창작 동호회 ‘환상서고’에서 회원들의 작품들을 모아 출간한 단편선 [환상서고](김유정 외, 드림필드, 2001년 12월)에 수록되었던 작품이다(거울에 게재된 단편은 출간된 것에서 다소 수정되었다).


  

   서하님을 처음 만난 것은 {플라스틱 프린세스}가 독자우수단편으로 수록된 [변신!: 2006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 출간 모임 때였다. [변신!]을 출간하며 연 조촐한 술자리에서, 서로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책을 주고받았다. 문제는 모두 똑같이 생긴 책이다 보니 누구의 책인지 헷갈려, 같은 책에 “서하님에게”와 “진아님에게”가 동시에 씌어지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했다는 점이었다.

   지난번 합평회 때 뵙고 근 두 달 만이었다. 반갑게 인사하고 따뜻한 창가 자리에 앉아서 연어 샐러드와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 카르보나라 스파게티를 하나씩 주문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카메라를 꺼내놓고서도, 다 먹고 나서야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사진을 찍으며 늘 이렇다고 둘 다 웃었다. 식사하며 사이사이 질문을 했다.


  

   ▲ ida님의 서하님 캐리커처.

   진아   거울은 언제부터 들러서 보셨어요?
   서하   창간호부터요~
   진아   흐흐, 네. 언젠가 거울 초기에는 무슨 이야기가 오갔나 자유게시판 맨 앞부분을 보니 서하님 이름이 보이더라구요. 깜짝 놀랐어요.

   인터뷰어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서하님께서 언제부터 거울에 오셨는지 모를 독자분들을 위한 질문이었다. ^^;

   서하   저도 기억나는데, 배너 주소를 드래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글이었어요. 드래그 방지 소스를 적용하더라도 배너 주소 정도는 따로 드래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html 태그들을 예로 들었는데, 정작 글을 쓰고 나니 이 정도 규모의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그걸 몰라서 안 쓴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남들 다 아는 이야기 괜히 한 번 더 해서 기분 상하시게 한 건 아닐까, 하고 고민했어요.
   진아   아, 그 글 올리셨던 분이 서하님이세요? 저도 기억나요. 그래서 그 부분만 드래그가 가능하게 고쳤거든요. ^^

   진아   창간호 때부터 찾아오셨지만 독자단편 게시판에 글을 올리신 건 한참 뒤잖아요. 거울에 {플라스틱 프린세스}를 올리시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서하   거울 이전에도 딤비라는 환상문학 창작 동호회에서 운영자 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딤비 회원들이나 딤비에 오시는 손님들 대부분이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장르 독자로 활동해오신 분들이셔서, 장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거울도 창간되자마자 알 수 있었고요.
   시간이 지나니 딤비의 회원들 중 일부는 개인 사정으로 활동하기 어려워지기도 했고, 마침 인터넷의 이슈가 홈페이지에서 블로그로 이동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딤비가 좀 느슨해졌어요.
   저도 창간호부터 계속 거울 독자였고, 딤비 회원들 중에도 이미 거울에 독자로서 작품을 투고하시는 분들이나 필진으로 가입하신 분들이 계셨거든요. 심심하던 참이었고,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되면 책을 준다길래, 잘하면 책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고...
   진아   와... 독자우수단편 상품으로 책을 보내드리는 게 의외로 효과가 있나 봐요. ^^
   서하   문장에서는 월장원 선정상품으로 문화상품권을 주는 것 같았는데, 그건 그거 나름대로 장점이 있겠지만, 무슨 책이 올까, 하고 두근두근하는 점이 재미있었어요.
   진아   지금은 목록을 드리고 그 중에서 고르시게 할 때도 있어요. ^^
   서하   아, 그래요? 예전에는 그냥 보내셨던 것 같았는데... 그래서 무슨 책이 올지 모르는 것도 꽤 재미있었어요. 게다가 팔다리가 뚝뚝 잘라지는 소설({플라스틱 프린세스})을 썼더니 몸에 외계인이 들어가는 소설([바디 스내처])을 받게 됐잖아요. 뭔가 연관성을 고려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진아   맞아요, 연관성을 고려하기도 해요. 소설을 읽고 나서 이 작가가 이 소설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소설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어요.

   세상은 좁고 좁다. 서하님께서 필진으로 합류하신 이후에 알고 보니, 의외로 거울에 계시는 분들 중 서하님을 잘 아시는 분들이 많았다.
   살다 보면 거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서로 연관 없을 것 같은데 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나, 알고 있는 사람이 겹치는 사람들이 많다.


   진아   음... 이건 권님께도 드렸던 질문인데, 거울을 밖에서 볼 때와, 필진이 되어 안에서 보게 되었을 때의 차이점이 있다면요?
   서하   웹진인 만큼 공식적인 느낌이 들었던 것과 달리... 음... 겉보기에는 딱딱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말랑말랑하다는 느낌?

   진아   리뉴얼을 맡으시기 전부터 이런저런 대문들을 만들어 오셨는데, 힘들지는 않으세요?
   서하   힘들지는 않아요. [혈중환상농도 13%] 광고 대문은 그림도 직접 그렸지만, 그 뒤로는 스톡 이미지 사이트들에서 로열티 프리 이미지를 다운로드받아 쓰고 있어요. 디자인만 하는 셈이니까 시간도 그렇게 많이 뺏기지 않아요.
   진아   아, 로열티 프리 이미지... 그러고 보니 요즘 저작권이 이슈기도 하고...
   서하   리뉴얼하면서 그 점에도 신경썼어요. 그래서 지금 제로보드를 포함해 거울에 사용된 모든 아이콘, 이미지, 소스 들은 공개된 것이거나 직접 제작한 것들이예요. 특히 필진 프로필에 사용된 ida님의 일러스트라거나~

   진아   역시 권님께도 여쭸던 거지만, 제가 리뉴얼해달라고 했을 때 무슨 생각 하셨어요? ^^;
   서하   권님께서도 같은 대답을 하셨던 것 같은데, 올 것이 왔구나...
   진아   (쓰러진다)
   서하   필진으로 가입하고 나서 리뉴얼 이야기를 들었는데, 외주가 아닌 이상 내부 인원으로 리뉴얼을 소화한다면 잘은 모르지만 홈페이지 제작이 가능할 것 같은 분은 ida님, jxk160님 정도가 아닐까... 그리고 한 분 한 분 못하겠다고 말씀하시는 상황을 보며 어라, 그럼 정말 내가 하게 되는 건가? 하고 생각했어요.
   진아   (쓰러진 채 못 일어나며) 사실 ida님, jxk160님 전에도 몇 분들께 부탁드린 적이 있는데, 말을 꺼내자마자 난색을 표하시거나, 한두 달 작업하시다가 작업량이 너무 많아 어렵다며 고사하셨죠. ^^;
   서하   작지 않은 웹사이트니까요. 작업량이 많기도 했고, 게다가 한 번 엎고 다시 작업하기도 했고...
   진아   아, 맞아요. 처음에 제가 리뉴얼 컨셉을 제대로 설명해드리지 않았죠. ida님께서 먼저 작업하시다가 개인사정으로 못하게 되셔서 그 다음에 서하님께 부탁드렸는데, 하도 여러 분들께 리뉴얼 컨셉을 설명하다 보니 서하님께도 설명한 줄 알고 아무 말도 안 한 거였어요!
   서하   그래서 제가 완성한 시안은 전혀 엉뚱한 거였죠. 진아님께서 사실은 이런 컨셉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수정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아무래도 수정하는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처음부터 다시 작업했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말을 따로 듣지 않았더라도 디자이너 지망생이라면 고려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예전 인터뷰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ida님께서 심리학을 전공하셨던가요?
   진아   맞아요.
   서하   예를 들면 ida님께서 제게 주신 리뉴얼의도.hwp에 언급된, 모니터를 보는 시선은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Z자를 그리며 이동하기 때문에 웹사이트의 가장 중요한 정보는 항상 왼쪽 위에 모두 출력되어야 한다던가, 그런 이야기는 심리학과에서뿐 아니라 디자인과에서도 학부 내내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거든요. 그런데도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는 이유로 이 홈페이지에 껍질만 예쁘게 갈아 씌우면 되나 보다, 하는 안이한 생각을 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 오기가 나서 이미 완성된 작업물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다시 작업했어요.
   결과적으로 추가된 요소들도 많지만 ida님께서 말씀하신 요구사항들은 거의 모두 구현되었어요. 그것들을 어떤 아이디어를 통해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가 리뉴얼의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가 되었죠.
   진아   리뉴얼이... 거의 3, 4개월 걸렸죠? 힘들지 않으셨어요?
   서하   작업량은 만만치 않았지만 힘들지는 않았어요. 재미있었죠.
   다른 이야기지만 리뉴얼하면서 가장 위기라고 생각했던 때는 작업량에 치이던 때가 아니라, 제가 확신을 가지고 정한 디자인 컨셉을 진아님께서 반대하셨을 때였어요.

   왼쪽 위에 거울 로고를, 오른쪽에 필진 목록을 넣으면서 가운데의 메인 화면에 할당되는 공간이 너무 좁아져, 리뉴얼 전처럼 메인 화면을 3단으로 하자 기사 제목들이 거의 다 잘리고 굉장히 답답해 보였었다. 결국 논의 끝에 2단이 어떻겠느냐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그렇게 하니 메인 메뉴가 세로로 너무 길어져, 상대적으로 아래쪽으로 내려가게 되는 메뉴가 죽는 건 아닐까 좀 과하게^^; 걱정했었다.

   진아   하지만 결국 서하님 생각대로 한 게 옳았던 것 같아요. 저는 거울을 구석구석까지 다 알고 있으니까, 거울의 어디가 불친절하다는 건지 감이 안 왔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오시는 분들은 접근하기 힘든 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확 편해졌죠. 업데이트될 때마다 up도 반짝반짝거리고. ^^
   서하   감사합니다~ ^^

   진아   리뉴얼에서 제일 중점을 둔 사항은 어떤 건가요?
   서하   리뉴얼을 맡기 전에도 웹2.0, 웹표준 내지 크로스 브라우징에 대한 요즘의 이슈들을 고민하고 있었어요. 리뉴얼을 맡을 수 있느냐는 말을 듣고, 그것들을 좀더 공부하며 작업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일단 저희 집에 각각 환경이 다른 PC 네 대가 있어요. 제 PC에 항상 쓰던 익스플로러 외에 사파리, 오페라, 파이어폭스를 설치하고, 각각의 브라우저들, 그리고 각각의 성능이 다른 모니터들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계속 확인하면서 작업했어요. 그리고 맥을 사용하는 친구에게 스크린샷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부탁해서, 맥에서도 거울이 최대한 같게 보이도록 작업했어요. 제로보드부터가 익스플로러 외의 웹브라우저들을 무시하는 부분이 있기도 했기 때문에 제로보드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하면서 이것저것 모두 고쳤어요. 그래서 지금 거울은 어떤 환경에서도 그럭저럭 비슷하게 보여요.
   그리고 거울이 연재공간으로뿐 아니라 필진들의 포트폴리오로도 사용될 수 있었으면 하는 진아님의 생각을 어떻게 구현할지를 고민하다가, 오른쪽에 필진 목록을 넣었어요. 클릭하면 곧바로 필진들의 프로필과 게시판을 확인할 수 있고, 새 글이 올라오면 알 수 있기도 하고. 이것 때문에도 진아님과 오랫동안 토론했죠.
   진아   그랬었죠, 새벽까지. ^^;

   한밤중에 두 시간에 달하는 서하님과의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 서하님께 졌다. ^^;
   MSN 메시지 로그를 뒤져 당시 오른쪽 필진 목록에 대한 논쟁의 로그를 찾아냈다. 그때의 뜨거운 논쟁을 조금만 엿보자면 다음과 같다.


   [유서하] 何が欲しいか分からなくてただ欲しがって 님의 말 :
   일단, 5열 배치의 이유가... 1024*768 해상도 모니터로 봤을 때 딱 먼 여정 필진 목록 아래에서 잘리게 돼요. 업데이트 여부가 표시되는 목록까지는 한 화면에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어요.
   [유서하] 何が欲しいか分からなくてただ欲しがって 님의 말 :
   지금 3열 정도로 자르게 된다면 먼 여정을 포기하게 되고요,
   [유서하] 何が欲しいか分からなくてただ欲しがって 님의 말 :
   그리고 제 생각에는 메인 화면을 변형 2단으로 고치게 된다면, 간단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답답하지 않게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음... 변형 2단으로 해도..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밑으로 내려가는 기사들이 죽지 않는다면 좋지만...
   [유서하] 何が欲しいか分からなくてただ欲しがって 님의 말 :
   메인 화면 외에 540px 사이즈 메인 화면은 보통 페이지나 게시판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요.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5단인 건 좋아요. (현재 거울 홈페이지는 전체 4단이다. 이때는 왼쪽에 거울 로고, 가운데에 기사가 배치될 메인 화면 3단, 오른쪽에 필진 목록, 총 5단이었다.―――편집장 주)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메인에 넣으셔도 되어요. (필진 목록을 말하는 것이다.―――편집장 주)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근데 메인 페이지를 봐요. 가장 중요한 건, 거울에서 쓴 글을 독자가 읽는 거잖아요.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일단 읽어야 누가 썼는지 생각하게 되죠.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서하님 같은 경우에는..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기본적으로 장르에 오래 계셨고...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창작을 지향하시고...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그러니 이 곳을 만드는 사람이 누굴까, 가 더 궁금하셨을 거예요.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근데 순수하게 독자입장에서 메인 페이지를 봤을 때...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가장 먼저 클릭하게 만드는 곳은 메뉴들이어야 해요. 걔네가 읽기 편한 형태로 클릭을 기다려야 하고요.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음.. 클릭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클릭을 유도해야 하죠. ^^; (가운데의 메인 화면이 3단이라 각 단이 너무 좁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편집장 주)
   [유서하] 何が欲しいか分からなくてただ欲しがって 님의 말 :
   제 생각은 다른데... 왜냐하면 메인 화면에서 클릭을 유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메인 화면의 약발은 5일을 가지 않아요. 25일 동안에 다른 메뉴가 눈에 띄지 않는다면 공치게 되죠. 지금 서평 게시판이나 감상/비평 게시판이 애매한 상태로 있는 것도 그래서라고 생각해요.
   [유서하] 何が欲しいか分からなくてただ欲しがって 님의 말 :
   그리고 지금의 디자인에서 오른쪽 필진 목록도 엄연히 하나의 메뉴라고 생각하고요.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근데.. 그렇게 따지면.. ^^;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기사화되는 애들의 유효기간은 5일이에요.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매달 바뀌어도 유효기간 일주일인데, 저렇게 긴 게(우측 필진 목록을 가리킨다.―――편집장 주)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즉, 우측에 필진 목록이 계속 걸려 있다 해도 누가 볼 것인가, 라는 의견이었다.―――편집장 주)
   가릉이랑 가릉가릉 님의 말 :
   바뀌지도 않잖아요.
   [유서하] 何が欲しいか分からなくてただ欲しがって 님의 말 :
   필진목록을 클릭하면 그 사람이 여태 올린 글들을 볼 수 있는 페이지로 들어가고, 그 페이지는 지금까지보다 여태 올린 글들을 보도록 더 잘 유도할 수 있어서, 한 번 지층의 저 아래로 묻힌 글이 다시 조명될 기회가 더 많다고 생각해요. 그게 잘 되지 않는다면 한 달에 한 번, 5일 정도만 조금 읽게 되고, 나머지 시간은 커뮤니티화될 수밖에 없어요.


   서하   또, 디자이너로서가 아니라 독자로서 예전부터 생각했던 것이기도 한데, 제로보드를 사용하는 소설 연재 웹사이트들이 대부분, 퍼센티지를 사용하는 게시판 가로폭 설정 초기값을 그대로 사용하다 보니 게시판이 가로로 넓거든요. 거기 익숙해진 독자들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적어도 ‘소설’이라면 ‘출판’되었을 때의 환경과 최대한 유사하게 업로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장 많이 쓰이는 판본인 신국판을 기준으로, 그것과 어느 정도 비슷한 리듬으로 문장이 끊어져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폐간된 [이매진]에서 어떤 작가분의 인터뷰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기억이 흐릿하지만 아마, 통신상에서 읽었을 때는 감동적이었던 장면이 책으로 읽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독자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대한 답변이었을 거예요. 통신 작가들은 문장을 어디에서 끊는가, 엔터를 어디에서 몇 번 치는가 같은 ‘기술’을 본능적으로 터득하고 있지만 그런 기술은 조판ㆍ편집 과정에서 모두 소멸된다. 같은 장면에 반응이 다르다면 그런 것 때문일 수도 있다...
   진아   아, 맞아요. 하이텔 시절 작가분들마다 편집 방식이 모두 달랐는데, 이영도님께서 편집 방식을 제시하시자 그게 거의 표준이 됐었죠. 문단마다 한 줄씩 띄우고, 대화마다 한 줄씩 띄우고...
   서하   네, 그런데 그런 방식은 VT상이나 웹상에서는 편리하지만 결과적으로 웹에서의 소설 읽기를 책으로의 소설 읽기와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려요. 오랫동안 웹에서 글을 읽어온 독자로서 소설 웹사이트라면 그 간극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게시판 가로폭을 줄였어요.
   이렇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주제에 자게에 게시판 가로폭이 좁아서 불편하다는 글이 올라온 것을 읽고 덜컥 놀랐지만... 제 판단이 틀린 걸지 잠시 고민했지만 결과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해요.
   진아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음... 예전에 독자분들께 거울에 대한 의견을 받는 [숨어있는 거울을 찾아라!] 이벤트를 열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동방신기짱! 님께서 올리신 글을 읽고 배를 잡고 웃었던 기억이 나요. “당장에 어느 꼭지든간 클릭하여 들어가보아라. 초보유저라면 기절초풍할 수많은 모음과 자음의 향연들. 게다가 스크롤은 왜 이다지도 길단 말인가. 한 번 클릭했다가 심장을 벌떡거리며 뒤로 버튼을 클릭하게 만드는 저 용감무쌍한 글자크기하며...” 이 부분 읽다가 배가 당기도록 웃었었죠. 마음이 아팠어요. ^^;

   동방신기짱! 님의 글을 읽으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진아   리뉴얼이 끝나고 나서도 업무가 줄어들 생각을 안 하는데... ^^;
   서하   그래도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자초한 결과이기도 해요.
   작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생각했던 건, 리뉴얼이 웹디자이너의 수고를 줄이는 방향이 아니라 업데이트 담당자의 수고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거였거든요. 리뉴얼 전 거울은, 의도했는지는 모르지겠만 웹디자이너가 할 일이 많지 않았어요. 예를 들면 헤더와 푸터가 게시판 상위에 이미 삽입되어 있어서, 게시판 생성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게시판이 새로 만들어진다던가... 그렇지만 리뉴얼된 거울은 게시판에 헤더와 푸터 외에도 이미지 파일로 작업해야 하는 게시판 이름, 필진 이름, 이용자 위치 표시 같은 것들이 있어서 진아님께서 작업하시기 어려운 부분이 많죠.
   특히 업데이트에서 반복적인 수작업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로보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사이트링크 같은 필드와 예비 필드를 동원해 기사를 작성한 필진의 이름, 연락처, 기사 호수를 따로 입력할 수 있게 했어요. 매번 본문에 연락처를 붙여넣고, 한 호가 지날 때마다 이전 호 기사들의 제목을 수동으로 수정해 호수를 입력했던 예전보다 수고를 적게 들이도록 하고 싶었어요.



   ▲ 예로 들기 위해 가져온 59호 국내소설 리뷰 기사 입력 폼. 남는 필드를 이용해 제호, 필진 이름, 필진 이메일/홈페이지 등을 입력할 수 있게 했다.

   서하   그리고 소설을 읽고서도 그 소설을 쓴 작가에 대해 알기 힘들다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글마다 아래에 자동으로 프로필이 붙게 했는데, 처음에는 이것을 지금과는 다른 구조로 설계했어요. 업데이트 담당자가 글을 업데이트할 때 라디오 버튼을 이용해 작가 목록 중에서 그 글의 작가를 선택하면, 선택된 작가의 프로필이 글 아래에 붙게 할 생각이었죠. 그렇지만 생각하니 그렇게 해도 새로 가입하는 작가가 있을 때마다 웹디자이너가 그 작가의 프로필을 추가로 작업해야 한다는 점은 해결되지 않고, 업데이트 담당자의 수고는 예전보다 줄어들기는 하지만 없어지지는 않죠. 본문에 프로필을 붙여 넣는 수고는 덜지만, 어쨌든 라디오 버튼을 한 번 눌러야 하니까요.
   그래서 필진별로 제로보드 스킨을 모두 따로 만들었어요. 이렇게 하면 업데이트 담당자가 필진 정보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아도, 원고만 올리면 프로필이 자동으로 붙으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바보 같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결과적으로 나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진아   나은 선택이셨어요! 전보다 이미지를 많이 쓰게 돼서 그 부분은 조금 번거로워졌지만, 대신 예뻐졌고요. 전에는 일일이 수동으로 입력해야 했던 것들이 자동으로 되어서 그 부분은 정말 편해졌죠!

   예전에는 업데이트를 마치고 나면 지난 호에 올렸던 기사들을, 일일이 수정 버튼을 눌러 제목 앞에 호수를 달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역시 예전에는 한 편 한 편 글을 올릴 때마다 일일이 필진들의 닉네임, 이메일 주소를 역시 수동으로^^; 입력해야 했다. 하지만 역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별 것 아닌 차이로 보일 수도 있지만, 굉장히 편한데다가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괜히 전문적(...;)인 기분도 든다. ^^;


   진아   컨셉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제15종 근접조우] 표지 일러스트를 맡기도 하셨잖아요. 표지 컨셉은 어떤 것이었나요?
   서하   맞다, [제15종 근접조우] 제작진 인터뷰 때 비슷한 질문이 있었는데도 말하는 걸 잊어버린 부분이 있었어요. 그 일러스트는 비틀즈(Beatles)의 [Abbey Road](1969, Capitol) 패러디였거든요. 혹시 [린다 린다 린다](リンダリンダリンダ, 2005) 보셨어요?
   진아   아뇨, 그게 뭐예요?
   서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들 중 하나예요. 포스터의 카피를 빌리자면 “단기속성 다국적 여고생 펑크밴드” 영화예요. 배두나가 일본으로 유학간 한국인 여고생 송으로 나와요.  
   평범한 여고생 밴드가 있는데, 학교 축제를 코앞에 두고 멤버 둘이 싸워서 보컬 자리가 비게 돼요. 그래서 누구든 자기들이 의욕 없이 앉아 있는 곳 앞을 처음 지나가는 사람에게 보컬을 맡기기로 해버려요. 결국 일본으로 유학간 한국인 여고생이, 일본어도 잘 못하면서 보컬을 맡게 돼요.
   축제가 며칠 남지 않았는데 연습할 장소가 없어서, 학교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밴드 멤버의 예전 남자친구가 갖고 있는 스튜디오로 가는 장면이 있어요. 네 명의 여고생들이 한 줄로 나란히 걷는 장면이 [Abbey Road] 커버아트를 연상하게 하죠. 말하자면 밴드 이야기를 하는 영화로서의 의무이자 느슨한 복선이죠. 그 여고생들은 비틀즈는 아니지만 적어도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서는 비틀즈만큼 위대하거든요.
   밴드가, 혹은 밴드가 아니더라도 네 명의 사람이 나란히 횡단보도를, 혹은 횡단보도가 아니더라도 어딘가를 걸어가면 누구나 [Abbey Road]를 연상할 수밖에 없어요. 20세기에 만들어진 일종의 ‘원형’이랄까? 근접조우가 제15종쯤 되면 외계인들이 지구인들과 위화감 없이 어울려 살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구인이 아니어도 [Abbey Road] 흉내내기 놀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 비틀즈만큼 위대한, 단기속성 다국적 여고생 펑크밴드.

   진아   거울에 바라는 점이라거나, 거울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이라거나, 그런 게 있다면요?
   서하   음... 지금 거울은 웹진답게 공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내부는 문자 그대로의 동인처럼 운영되고 있잖아요. 대문 하나 만드는데도 배명훈님께서 카피를 쓰시고, jxk160님이나 제가 그래픽 작업을 한다던지... 편집장님께서 휴가를 가시면 필진들이 의논해서 업데이트를 해본다던지...
   진아   제가 더 늦게 왔어야 하는데...

   지난 겨울, 거울을 잠시 비운 채 여행을 다녀왔다. 길면 3개월이라고, 거울을 알아서 잘 굴리고들 있으라고 엄포(!)를 놓고 떠났다가 달랑 한 달 있다가 돌아오는 만행(...)을 저질러 편집장 없이 아름답게 굴러가던 거울에 얼음물(...)을 끼얹었다는 전설이 있다.;

   서하   출판 같은 성과도 물론 개인에게는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즐거워야 한다는 거라고 생각해요. 계속 재미있었으면 좋겠어요.

   진아   글도 쓰시고 디자인도 하시는데,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세요?
   서하   그런 것을 고민한 적도 있었는데, 비중은 계속 달라졌더랬지만 지금은 50 대 50이라고, 거의 똑같다고 생각해요.

   혼자 잔뜩 긴장해서 한 질문이었는데 기뻤다.

   진아   디자이너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들 중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세요?
   서하   일러스트레이션은 지금 제가 생각하는 제 진로와 그렇게 가깝지 않아서 큰 관심이 없어요.
   디자인이라면... 지금 이 시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는 학부생이라면 누구나 벗어나기 힘든 그림자는 아마 존 마에다(John Maeda)의 것이리라고 생각해요. 그래픽 디자이너, 비주얼 아티스트, 컴퓨터 과학자, 교수 등의 직함들을 혼자 소화하고 있는데다, 구글 아티스트 테마에 선정될 정도로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디자이너예요. 마에다를 비롯한 디자이너들의 영향으로 최근 시각디자인의 조류는 이전과 달리 엔지니어링과의 교집합이 커졌어요. 학부생의 입장에서 그런 조류의 결과를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예시라면 디자인과에 공대 교수님들을 초빙하는 강의가 늘었다는 것이겠죠. 디자인과 무관한 사람들이라도 시장에서 ‘컨버전스’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가 통합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죠. 그것을 피부에 와 닿게 보여주는 상품이라면 그건 아마 아이폰 내지 아이팟 터치일 테고요.

  

   ▲ Illustrandom ⓒ2005, John Maeda

   서하   원래 제가 한동안 제 진로라고 확신했던 쪽은 타이포그래피였어요. 그 분야에서 가장 주목했던 디자이너는 데이비드 카슨(David Carson)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카슨의 [The End of Print]를 열심히 읽고 있는 것을 본 교수님께서 그 책을 읽지 말라면서, 다른 추천서적 목록을 이메일로 보내주신 적이 있어요.
   진아   왜요?
   서하   음... 흔히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라는 말을 하잖아요? 타이포그래피도 그래요. 물론 타이포그래피사(史)를 전체적으로 보면 타이포그래피가 결코 변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결과물이 어쨌든 읽혀져야 한다는 룰을 벗어날 수는 없죠.
   그런데 카슨 같은 해체주의 타이포그래퍼들은 그 룰을 무시했어요. 예를 들어 ‘fire’라는 타이포(typo)를 다룬다면, 다른 타이포그래퍼들은 글자(letter, typeface) 단위까지밖에 내려갈 수 없어요. 글자 단위를 넘어서 글자를 조각내더라도 그 글자가 그 글자로 읽힐 수 있을 만큼 글자의 대부분을 남겨야 하죠. 자간, 행간, 장평, 크기, 폰트 같은 것들을 조절하더라도 결과물은 fire라고 읽혀지는 단어여야 해요.
   그렇지만 카슨은 글자 단위를 넘어서 글자를 산산조각내서 지면에 뿌릴 수도 있어요. 그렇게 하면 물론 누구도 그 조각들을 fire라고 읽을 수 없죠. 그렇지만 대신 그 조각들을 지면에 일렁이는 불길 모양으로 뿌린다면, 비록 그 조각들을 fire라고 읽을 수는 없지만 불이라는 이미지를 느낄 수는 있어요. 말하자면 fire라는 기표(記標)는 더 이상 거기 없지만 불이라는 기의(記意)는 아직 거기 있어요.
   그것이 타이포그래피라는 관점에서 옳은지는 아직 논쟁중이예요. 교수님께서는 아마 이제 막 타이포그래피를 배우는 학생이 가장 극단적인 주의부터 접하는 건 아무래도 좋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지금은 교수님이 옳았다고 생각하지만 카슨의 작업도 여전히 좋아해요.

  

   ▲ One of the posters for a sold out tsunami relief benifit event at Bowans Island, South Carolina ⓒ2004, David Carson

   진아   본인은 어디까지 와 있다고 생각하세요? 소설과 디자인 양쪽에서 모두.
   서하   디자인에서라면... 21세기의 다른 모든 분야가 그렇듯 디자인도 엄청나게 빠른 변화 속에 놓여 있어요. 말하자면 여기 디자인이라는 격류가 흐르고 있는데, 이 격류 속 여기저기 거대한 암초처럼 위대한 디자이너들이 버티고 서 있어요. 격류의 방향은 암초에 의해 시시각각 변해요. 앞으로 또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르죠. 지금 저는 그 흐름에 뛰어들기 전의 한 알의 모래알에 불과해요.
   소설 역시 마찬가지예요. ‘작가’로 인정받으려면 자신이 단지 다른 작가들의 어깨 위에 올라선 것만이 아님을 증명해야겠죠. 자신만의 무엇인가를―――스타일을 가져야죠. 제가 소설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을 때, 운좋게도 제 주위에는 제 소설을 읽어주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노트에 소설을 썼는데, 제가 하루에 한두 페이지쯤 쓰고 덮어두면 그 노트가 친구들 사이에서 한 바퀴 돌아 다시 제게 도착했어요. 아까 썼던 페이지를 펴면 위아래 여백에 덧글처럼 의견이 빽빽하게 씌어져 있었죠. 친구들에게 늘 이 문장은, 이 구성은, 이 아이디어는 누구에게서 많이 보던 것과 같다는 지적을 들었고,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어요. 소설 역시 아직 그것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디자인에 있어서는 정말 자신의 ‘스타일’을 말할 단계까지 오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서하   앗, 그런데 문학웹진 인터뷰 기사에 디자인 이야기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진아   그, 그런가요. ^^;
   그럼 소설 이야기도 좀더 해요. 한 번에 두 가지를 하고 계시는데, 장래희망은 어떤 거예요?
   서하   음... 좋은 소설가 겸 좋은 디자이너?
   진아   좋은 소설가라... 그럼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소설가가 있으세요?
   서하   그런데 ‘존경하는’ 소설가는 ‘좋아하는’ 소설가와 다르지 않나요?
   진아   그럼 둘 다, 존경하는 작가 먼저...
   서하   없어요. 아, 이 이야기는 스스로도 오랫동안 생각했던 거예요.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저희 학교에서는 다이어리 꾸미기가 유행이었어요. 플레이컬러 아세요?
   진아   아뇨, 모르겠어요.
   서하   양쪽으로 쓸 수 있는 펜이예요. 한쪽은 얇은 펜, 반대쪽은 두꺼운 펜이예요.
   진아   아! 그걸 플레이컬러라고 불러요?
   서하   네, 그런 펜들 중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였어요. 색깔별로 수십, 아니 수백 가지 모델이 나와요. 좋아하는 색깔로 필통 하나 가득 채워서, 그걸로 다이어리를 예쁘게 꾸미는 게 유행이었어요. 위클리 페이지도 열심히 꾸미고, 메모 페이지는 반 친구들에게 돌려서 편지 같은 걸 쓰게 해서 돌려받았어요. 그래서 다이어리 하나만 열심히 꾸미면 1년치 추억이 고스란히 쌓이는 셈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제 친한 친구와 똑같이 다이어리를 꾸미고 있었어요. 색깔을 쓰는 방법뿐 아니라 문장을 어떻게 쓰는지, 어떤 문장의 어떤 타이밍에 어떤 단어를 쓰는지, 그리고 거기에 어떤 색깔을 칠하는지까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전 꼭 다이어리 꾸미기가 아니더라도, 어떤 분야에서든 쉽게 영향받는 타입이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다이어리를 그 친구와 다르게 꾸몄고, 조금 더 자라서 그런 결심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하는지 알게 되자 결코 롤 모델을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무심코 존경할 만큼 훌륭한 작가를 발견하면 존경하는 대신 언젠가 따라잡고 말겠다는, 그것도 그 작가와 같은 방향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작가의 그림자도 닿지 않는 다른 길로 따라잡겠다는 목표를 세우곤 해요. 스스로도 자의식 과잉 사춘기 소년 같은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어쨌든 그래요.

   진아   그럼 좋아하는 작가는요?
   서하   좋아하는 작가는 계속 변해요. 요즘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좋아해요.
   진아   처음 들어요.
   서하   레즈비언, 인간 혐오자,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작가랄까... [동물 애호가를 위한 잔혹한 책]이라는 단편집이 있거든요. 인간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된 인간 혐오를, 동물의 시각을 빌린 1인칭 시점으로 묘사해요. 동물의 시각을 빌리지 않은 작품들에서도 인간성 그 자체에서 비롯된 불안 내지 분노를 읽을 수 있고, 그런 의도를 위한 장치 외에는 불필요한 것이 거의 없는 미니멀함이 마음에 들어요.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을 이야기해요.

  

   ▲ 하이스미스의 사진으로 표지를 디자인한 [Beautiful Shadow: A Life of Patricia Highsmith](Andrew Wilson, Bloomsbury USA, 2004)(왼쪽), [동물 애호가를 위한 잔혹한 책](퍼트리샤 하이스미스/민승남, 민음사, 2005년)

   진아   음... 미니멀하다는 게 어떤 거죠?
   서하   작가가 소설로 이룩하려는 이데아를 위한 장치 외에 불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저 혼자 그렇게 불러요. 물론 그런 이야기에 찬성하지 않을 작가는 없겠지만... 다른 이야기지만 펫샵 보이즈(Pet Shop Boys)의 신곡 제목이 {Minimal}인데, 제목과 달리 별로 미니멀하지 않아서 별로였어요.
   진아   푸핫. ^^;
   서하   [리버틴](The Libertine, 2004)이라는 영화를 좋아해요. 연극과 정치에 대한 영화예요. 조니 뎁이 분한 존 윌모트, 로체스터 백작이 사만다 모튼이 분한 리지 배리에게 “그러나 극장에서는 선행이건 악행이건 모든 행동에 결과가 있소. 당신이 손수건을 떨어뜨리면 그 손수건은 반드시 당신의 목을 조르러 돌아오지(But in the playhouse, every action, good or bad, has its consequence. Drop a handkerchief, and it would return to smother you)”라고 말하는 장면이 좋아요.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세계의 부조리함에 실망한 로체스터 백작이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자신의 진심을 처음으로 드러내는 대사이기도 하고. 연극에서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겠지만 지금의 주류 매체인 영화에서라면, 저는 손수건, 손수건이 들어 있던 앞가슴, 그리고 그곳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손끝 외에는 뷰파인더에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불필요한 것을 모두 없애 앙상해진 소설을 작가가 레고 블럭처럼 재배치해 만들어내는 형식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플라스틱 프린세스}는 그 이상처럼 충분히 미니멀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의도로 씌어졌어요. 1년 단위의 날짜로 구분된 챕터들이 모두 ‘안녕’이라는 인사로 시작하고, ‘너’에게 하지 못한 말을 속삭이고,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로 끝나고.

   진아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세요?
   서하   그것도 계속 바뀌지만, 최근 제가 혼자 쓰고 있는 글들을 읽으면 저 스스로도 어떤 경향이 눈에 띄어요. 그건 조금 전에 말씀드린 미니멀함과 형식미에 대한 집착이예요.
   아직 수정중인 단편소설이 한 편 있는데, 어떤 날짜를 기준으로 그 전과 그 후로 이야기가 나뉘어요. 그 전후가 마치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대칭된 아름다움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조금씩 고치는 중이예요.
   그리고 그런 미니멀함이 단지 미니멀함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캐릭터들이 자기 할 일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장면에서 멈춰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독자에게 계속 말을 거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예요. 독자가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진아   기대됩니다! ^^
   서하   와~ 감사합니다!
   아, 맞아요. 공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났어요. 제가 거울 말고 다른 곳에 올린 {플라스틱 프린세스}를 퍼가신 분이 있었는데, 제가 진아님께 이야기한 적이 있나요?
   진아   아뇨, 처음 들어요.
   서하   {플라스틱 프린세스}의 주인공이 롤리타다 보니 베이비 더 스타즈 샤인 브라이트(Baby, The Stars Shine Bright!) 같은 롤리타 양복 브랜드가 몇 번 언급돼요. 아마 그분도 롤리타 양복 브랜드로 검색해서 찾아오셨을 거예요. 소설을 모두 읽었다고, 소설이 마음에 들어서 친구들과 함께 읽기 위해 자신의 블로그로 퍼갔다고, 혹시 문제가 된다면 알려달라고 덧글을 쓰셨어요.
   펌해가시는 것보다는 링크해가시는 것이 더 낫겠다는 덧글을 쓰려고 그분의 블로그에 갔는데, 그분은 롤리타였고 아마 같은 롤리타일 것 같은 친구들과 함께 퍼온 소설에 대해 덧글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플라스틱 프린세스}를 쓰면서 희망했던 것들 중에는, 서먹서먹하게라도 소녀들, 그리고 롤리타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것도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가장 말을 걸고 싶었던 이들이 제 말을 들어주었다는 것은 제 소설이 펌된다던지 링크된다던지 하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링크로 바꿔주세요, 같은 시시한 덧글을 쓰는 대신 그냥 나왔어요.
   진아   그 비슷한 기분 저도 느낀 적 있어요.

   잠시 공감대 형성.

   진아   새 글 쓰고 계시잖아요. 어떤 글인지 간략하게 말씀해주신다면요?
   서하   거대한 재앙이 닥쳤을 때 그 재앙을 원거리에서 크레인 샷으로 찍는 것이 아니라, 재앙에 맞닥뜨린 주인공을 근거리에서 핸드헬드 샷으로 찍는 것을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한국으로 무대를 옮겨 아주 작은 스케일로 다시 찍은 [클로버필드](Cloverfield, 2008)랄까?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주인공을 바라보게 되면 사실 재앙이 어떤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돼요. 중요한 것은 재앙에 맞닥뜨린,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삶을 결심하는 친구를 바라보는 ‘나’의 감정이예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을 좋아하고,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서하님과 함께, 세뇰님과 felias님께서 계시는 상파울로로 향했다.
   felias님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몇 년 전 아름다운 가게에 참여해 거울 종이책을 판매하던 때였다. 오랫만에 만난 felias님과 반갑게 인사하고, felias님께서 거울 자유게시판에서 분양하시던 책을 나누어 받았다.
   커피를 한 잔 하며 거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쉽게 헤어졌다.

  

   바쁘신 와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서하님께 감사드립니다.
   준비중이신 새 글도 기다리겠습니다. ^^
댓글 2
  • No Profile
    날개 08.06.04 00:30 댓글 수정 삭제
    확실히 리뉴얼 이야기가 분량이 많고 인상적이네요. 웹진 거울의 리뉴얼에 이런 긴 사정들이 있었는지 이번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깔끔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던 리뉴얼된 홈페이지가 새롭게 보이네요. :D
  • No Profile
    ida 08.06.04 03:55 댓글 수정 삭제
    멋진 리뉴얼로 거울의 분위기마저 변화했다고 생각합니다. 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