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질문 : ida, 진아
 정리 : 진아

 4월 18일 수요일, 화창한 오후 덕수궁 앞에서 ida님과 오늘의 주인공 Jay님을 만났다. Jay님을 알게 된 건 2003년이다. 오프라인에서 뵌 것도 그 즈음 언젠가라고 생각한다. 어느새 Jay님을 알게 된 것도 4년 가까이 되어 간다. 그간 Jay님은 번역과 창작 양쪽 모두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처음엔 거울에 번역 필진으로 합류했던 Jay님은 편집진에게도 비밀로 했던 필명 이수완으로 {우주류}라는 단편을 단편 게시판에 올려 독자우수단편에 선정되면서 시간의 잔상에도 합류했다. Jay님의 첫 창작단편인 {디저트}가 [2004 환상문학웹진 단편선]에 실린 걸 시작으로 [2005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에 {입적}을, [과학소설 전문무크 HAPPY SF] 2호에 {앨리스와의 티타임}을 실었다. 케이트 윌헬름의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와 엘리자베스 문의 [어둠의 속도]가 번역/출간 되었으며 출간 준비중인 번역서도 몇 권 더 있어 번역자이자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우린 적당한 카페로 옮겨 그간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한 후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갔다.




ida   어떻게 번역을 시작하셨나요?

Jay   행복한 책읽기에서 SF총서 만들 때, 행책 웹사이트 자유 게시판에서 어떤 책이 나왔으면 좋겠는가, 원서랑 재출간 바라는 거 다섯 권씩 목록을 받았어요. 그 때 제가 재출간을 바란 책으로는 시어도어 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가 있었고, 번역 안 된 것 중 번역이 되었으면 하는 책으로는 케이트 윌헬름의 [노래하는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를 적었었어요. 근데 그 책이 다른 출판사에서도 검토를 하던 책이었어요. 워낙 고전이고 하니까…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도저히 기억이 안 나는데(웃음), 당시 행책 총서 기획자이셨던 김상훈님과 그 전부터 알고 지냈거든요. 김상훈님이 저에게 직접 맡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하셔서 좋다고 했어요. 워낙 욕심이 나는 책이고 해서요.

인터넷에 번역해서 올린 건 2002년 말~2003년 초반부터인 것 같아요. 그건 그냥 다 같이 봤으면 좋겠다 싶은 작품들로요. 그 때 {로스트 앤 파운드}라는 단편을 번역해서 워터가이드에 올렸었어요. 김상훈님 추천도 있었지만 행책에서 그 번역을 보고 마음에 든다고 해서 하게 되었지요. 그게 2004년 봄이었어요. [노래하는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가 제 첫 계약이죠.

{로스트 앤 파운드}는 제가 올린 번역본을 보고 원군님이 플래쉬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하셨는데, 그게 인터넷에서 엄청 떴어요. 그래서 행책에서도 그걸 그림책으로 내볼까, 하는 이야기가 잠깐 있었지요. {로스트 앤 파운드}는 아마 판타스틱(Fantastique)에 실리게 될 것 같아요.

원래도 번역을 하고 싶어 했던 케이트 윌헬름은 그렇게 하게 된 거고, 제가 정말로 좋아했던 책이 아직 안 나왔는데, 2004년에 번역을 마친 책 중에 스타트렉 각본을 쓴 사람이 쓴 [화성에서 온 아이(The Martian Child)]라는 책이 있어요. 화자가 SF 작가이자 동성애자인데, ADHD 장애가 있는 7~8살 정도 된 아이를 입양을 해요. 아이는 자기는 화성에서 왔다고 주장해요. 일종의 실화소설이에요. 이걸 읽고 진짜 많이 울었어요. 휴고랑 네뷸러를 탄 건데, 사람이 이건 꼭 하고 싶다, 그런 게 있잖아요. 제게 그 책이 그랬어요. 그 책 기획서를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계속 번역하고 싶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는데, 케이트 윌헬름부터 해보라는 제안을 받아서 케이트 윌헬름을 먼저 했고, 첫 번째 책을 하고 나니까 두 번째 책은 출판사를 쉽게 찾게 되어서 [화성에서 온 아이]도 번역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수월하게 시작한 것 같아요. 김상훈님이 옆에서 많이 봐주셨고, 행책 총서 시작할 때 한데다가 시작할 땐 계약도 다 똑같이 하게 되어서요. 처음 일 시작할 때는, 나쁜 출판사에게 당해서 계약금 떼이는 일 같은 것도 많다고 들었는데, 그런 일도 없었고요.


ida   아직 안 나온 거죠?

Jay   그 쪽 출판사에서 [화성…]  맡았던 담당자도 바뀌고, 언제 나올 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원래는 올해 가정의 달에 나오는 거였고, 그 전에는 2006년 가정의 달에 내자고 했었고. (웃음)

진아  지금 2007년인데요.(웃음)

Jay   (웃음) 그러게요. 중간에 원고를 빼올까도 생각을 했었는데, 계약금도 받았던 지라… 근데 이게 최근에 영화화 되었어요. 존 쿠삭 주연으로 아카데미를 노려서 10월에 개봉을 할 거예요.

진아  그럼 그 시점에서는 적어도 번역서가 나오겠네요.

Jay   네. 그 출판사가 그런 건 워낙 잘 맞추는 편이니까. 그건 지금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어요. 제 마음 속의 작품, 그런 느낌이라서… 정말로 좋은 작품이에요.



▲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진아  Jay님이 거울에 들어오게 된 것도 A님의 추천이었는데.

Jay   아, 그랬나요. 전 기억이 잘… 벌써 3년이나 된 일이라… (웃음)

진아  저는 기억할 수밖에 없어요. Jay님께서는 창간호에 랜달 쿠츠의 단편 {신들의 토스터}를 번역해 주시면서 거울에 합류하셨잖아요. 거울 초기 기획에는 번역 꼭지가 없었어요. 그런데 S님께서 번역 꼭지를 넣어라, 나도 있고 A님도 있으니까 격달로 하면 충분히 운영이 가능하다며 절 설득하시더라고요. 망설이다 하기로 했는데, 막상 사이트를 오픈할 때가 되니까 S님이 바쁘시다는 거예요. 그 때 A님이 Jay님을 소개해주셨죠. (본인이 땜빵을 못할 땐 다른 사람 소개라도 해주는 거울의 완전 소중 A님 만세!)
덕분에 Jay님을 알게 되었고, 번역꼭지도 어찌어찌 운영해가고 있고요. (웃음)


▲ [Happy SF] 2호에 실린 앨리스와의 티타임


ida   원서는 언제부터 보셨어요?

Jay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요.

ida   원서는 어디서 찾으셨어요?

Jay   처음에는 홍인기님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은 건 아니고요. 당시는 아직 정크 SF가 활발할 때인데, 그 때 인기님이 정크 SF에 서평을 많이 올리셨어요. 그 서평이 책을 고르는데 많이 참고가 되었어요. 인기님 취향이 지금 보니까 굉장히 독특한데, 그 독특한 것 중에 저랑 취향이 맞는 게 있었어요. 그렇게 해서 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아주 클래식하게 시작했어요. 아서 클라크, 아시모프, 조지 오웰, 웰즈… 그 작가들의 원서를 읽고 나서 대학에 갔는데 도서관에 다 번역본이 있어서 엄청나게 허탈해하고… (웃음)

파운데이션 시리즈를 고3 때 접했는데, 수험생이다 보니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공부하고, 토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읽어서 한 1년에 걸쳐서 완독을 한 거예요. 그런데 대학에 와서 보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 번역서가 이미 나와 있고… (웃음) 원서를 읽을 때만 해도 저는 번역본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었어요.

제가 83년생이니까… [로봇] 같은 경우에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나왔을 수 있어요.

그 다음에는 확산을 하는 방식으로 읽었어요. 하트웰의 [SF 단편집] 같은 걸 하나 사서 읽다 보면 마음에 드는 작가가 한둘은 걸리기 마련이거든요. 그럼 그 작가의 이름으로 검색해서 그 작가의 작품이 들어있는 책을 사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다른 사람이 걸리면, 그 사람 걸 사고. 그런 식으로 해서 읽어나가니까 처음에는 웬만한 작가는 거의 전작을 다 읽게 되었었는데, 아는 작가가 많진 않았고요. 그 다음에는 아예 외국에서 비평 잡지 같은 걸 많이 구입했고요. 한창 볼 때는 영국이랑 미국이랑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잡지까지 해서 SF 잡지를 한 달에 열 가지 정도를 정기 구독한 적도 있어요. 그러다보니까 나중엔 단편은 벅차서 못 읽고, 리뷰 읽고 마음에 들면 사고… 막상 읽지는 못하고, 책은 끝없이 쌓여가고… (웃음)

그 때는 제가 번역 일을 하기 전이니까, 과외 재벌이라서… (웃음)


ida   말로만 듣던 과외재벌이셨군요. ^^

Jay   정말로 웬만한 회사원만큼 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편하게 산 것도 있고요. 좋은 때였죠. (아련)

진아  과외가 번역보다 벌이가 훨씬 좋군요.

Jay   비교가 안돼요. 시간대비 성능으로도 그렇고. 과외는 뒤끝도 없잖아요. 열심히 공부 시키면 점수가 좀 오르고, 안 오르면 할 수 없고… (어깨 으쓱)

근데 번역은 교정지 오고 교정지 오고, 교정지 오고 겨우 책 나오고…


진아  돈은 늦게 나오고… (웃음)

ida   그래도 번역을 하는 이유는요?

Jay   좋아하니까… (웃음)

ida   언제부터 SF를 읽으셨나요?

Jay   맨 처음에 읽은 건 SF 팬덤 분들이 많이 그렇듯이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급문고로 있던 아이디어 회관이었어요. 물론 그 때는 모르고 그냥 읽었고, 나중에 자라서 찾아보니까 아이디어 회관이었어요. 재밌더라구요. 근데 그 다음에는 SF를 안 읽고 완전히 순문학을 읽었어요. 한국 단편선들 이런 거, 50권이나 20권 묶음으로 된 장편도 있고, 단편도 있는 문집이 있었어요. 세로쓰기로 되어 있는 건데, 그걸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정말 열심히 읽었었어요. 염상섭이라거나. 소설은 사실 그거밖에 안 읽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번역서도 거의 안 읽었고… 사실 제가 소설 자체를 잘 읽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런 애들 있잖아요. 만화 읽는 것 같아서 가서 보면 [재미있는 수학], [만화로 보는 현대과학] 뭐, 이런 거 읽고 있는 애들. 제가 그랬어요.(웃음)
그런데 제가 굉장히 존경했던 칼 세이건이 SF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했었어요.




칼 세이건

1934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출생하였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이민노동장의 아들로 태어나 시카고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을 공부하였다. 1962∼1963년 스탠퍼드대학교 의과대학 유전학 조교수, 1963∼1968년 하버드대학교 천문학 조교수를 거쳐, 1968년부터 코넬대학교 천체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1975년부터는 코넬대학교의 방사선물리학 및 우주연구센터의 부소장을 겸임하였다. 1968년부터는 《국제 태양계 연구잡지 ICARUS》 편집장을 지냈다.

한편, 미국 항공우주국( NASA)에서 마리너호·바이킹호·갈릴레오호의 행성탐사 계획에 실험연구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 설치한 전파교신장치를 통하여 우주 생명체와의 교신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우주에 관한 텔레비전 시리즈물인 《코스모스》의 해설자로 나서 까다로운 우주의 신비를 텔레비전을 통하여 쉽게 전달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 밖에 《Intelligent Life in the Universe》(1966) 《The Cosmic Connection》(1973) 《Mars and the Mind of Man》(1973) 《Other Worlds》(1975) 《The Dragons of Eden》(1977) 등이 있다. 1996년 화성탐사계획에 참여하던 중 사망하였다. 미국 항공우주국은 그의 업적을 기려 1997년 7월 화성에 도착한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호의 이름을 ‘칼세이건기념기지’로 명명하였다.  ――― 네이버 백과사전




Jay   제가 그 분 책을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읽었는데 정말로 인상 깊었거든요.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혹시 읽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코스모스]보다 그걸 먼저 읽어서, 정말 인생을 바꿨다고 해도 좋을 책이에요. 학교마다 그런 거 하잖아요. 책 서로 바꿔보기, 그 때 마다 그걸 가지고 가고. [창백한 푸른 점]은 제가 용돈을 세 달 모아서 샀던 책이에요. 그 때 되게 비쌌거든요. 그 때 제가 중학교 2학년, 3학년 때인데 그 때 한 2~3만원 정도 했던 거 같아요.

제가 고등학교 2, 3학년 때 쯤이 경시대회 열풍이 불 때였어요. 대학에서 학생을 뽑을 때 다양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선발한다, 해가지고, 외국어 경시대회, 수학 경시대회, 무슨 경시대회 이렇게 해서 뭘 되게 많이 했었어요. 저는 상금을 벌기 위해 외국어 경시대회에 열심히 나갔었어요. 그 때 대학들이 홍보 차원에서 개최하기 시작해서 대부분이 1회였어요. 저는 해외 유학 경험도 없이, 국내파로 출전해서 상금을 받고 나니까, 이 돈으로 원서를 사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외국어 경시대회에서 받은 상금이니까. 그런 식으로 칼 세이건 원서를 샀었어요. 코스모스도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렇게 원서를 샀고요. 그런데 도저히 못 읽겠는 거예요. 저는 나름대로 되게 영어를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봤자 고등학교 2학년이잖아요. 정말, 도저히 어려워서 못 읽겠기에 꽂아놓고… 소설을 읽자, 소설이 더 쉽겠다, 그렇게 생각해서 아시모프랑 웰즈 이 쪽으로 넘어갔던 거죠.


ida   정통 코스를 밟으신 거네요. 순문학을 공부하신 다음에 이제 과학을 공부하시고, 그 다음에 SF에 입문하신…

Jay   그럴 듯하게 표현하면 그런 건데… (웃음), 저는 중학교 한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말 그 때 까지는 픽션 자체를 읽은 적이 없어요. 책을 읽어도 마틴 루터 킹이나 마리 퀴리 부인 등 주로 위인전을 많이 읽었어요.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픽션의 가치를 그렇게 높이 치지를 않았어요. 어렸을 때 읽었던 강렬했던 단편들, 휼륭한 작품들을 너무 일찍 읽었기 때문이 아닌가도 싶기도 해요. 염상섭 이런 걸 중학교 1학년 때 읽어서 뭐에 써요. (웃음) 현진건 읽으면서 엄청 강렬한 느낌 받고, 지금 읽으면 좀 느낌이 다르긴 한데, 처음에 너무 강한 걸 먹은 거예요.

그게 왜 그렇게 됐었느냐 하면, 큰외삼촌이 국문학과를 나오신 시인이셨거든요. 지금은 시인 폐업하시고 선생님 하시는데(웃음). 외가댁 서재에 가면 외삼촌이 국문학 공부하시면서 본인이 읽었던 전집이나 되게 오래된 문학잡지들이 많이 있었어요. 거기 있는 걸 냅다 가져다가 읽은 거죠,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읽고 나니까 현대소설을 봐서는 느낌이 없는 거예요. 게다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나온 순문학 소설들이 대체로 주인공들이 운동권이던, 그런 계열의 소설이 득세하던 때잖아요. 저는 그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예전에 읽었던 {오발탄} 같은 뭔가 강렬한 걸 바란 건데, 그런 게 없으니까…

(픽션 읽는 걸) 잠시 쉬었다가 SF를 읽으니까 새롭고, 어릴 때 읽었던 아이디어 회관이 있고 과학자가 되고 싶단 꿈이 있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SF 원서로 쭉 가게 된 것 같아요.

진아  네, 그런데 번역서들이 도서관에 다 있었고… (웃음)

Jay   김상훈님이 젤라즈니를 소개해 주셔서, 프로스트와 베타를 읽었는데 그게 정말 굉장히 강렬했었어요. 그래서 젤라즈니 원서를 막 샀죠. 못 읽겠는 거예요. 젤라즈니 원서는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아직도 읽지도 않고 집에 박혀 있어요. 나중에 김상훈님이 번역해서 나온 걸로 읽고. 이제는 (젤라즈니를 원서로도) 읽으려면 읽을 수 있는데, 귀찮아서 못 읽겠어요. (웃음)

ida   그러면 지금 장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Jay   행시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공무원이 되겠다는… (웃음)

진아  공무원이자 번역가이자 작가로? (웃음)

Jay   시험에 붙으면 번역은 못할 것 같고요. 야근이 많아서 시간이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붙을 경우 이야기지만…

못 붙더라도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요. 저는 책에 대한 환상이 있었어요. 글을 쓰는 행위나 책에 굉장히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책이라는 물건 자체에 가격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그러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책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있다고 봐요. 저는 그게 되게 강했거든요.

저는 정말로 이 나이에 이 책을 읽어서 내가 바뀌었다, 라는 책들이 딱딱 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었고, 중학교 1학년 때 [데미안]을 읽었고. 중학교 2학년 때 [창백한 푸른 점]을 읽었고요. 이런 식으로 딱딱 정말 기점이 된 책들이 있기 때문에, 책만으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책이 사람을 바꾸고,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라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번역을 시작할 때는 그 일에 의미부여를 많이 했어요. 근데 거기서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책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건 여전히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과관계를 쌓아가서 내가 세상을 바꾼다, 그건 아니더라고요. 나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작지만 내가 어떤 책을 번역하거나 혹은 써서 그 책을 수많은 사람이 읽고, 그렇게 해서, 내가 죽고 나서도 그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식의 논리 구조가 제 머릿속에는 있었어요. 근데 그게 아니구나, 세상을 바꾸려면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되는 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어요.


ida   정치를 하셔야죠. (웃음)

Jay   네, 정치를 해야겠구나,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인데, 정치가 가진 영향력은 굉장히 크니까, 저는 가까운 지인들한테, 나는 어쩌면 나중에 정치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를 가끔 하거든요.

그러니까 현재 정치랑 무관하게, 정치라는, 사회 전체의 어떤 이데올로기를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이라는 거, 개인이 굉장히 큰 힘을 갖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 게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끝이 어떻게 되는지는 멀리 갈 것 없이 지금의 대통령을 비롯해 다른 예가 많지만, 그래서 역시 하면 안 되는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지금은 좀 더 직접적으로 뭔가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제가 그런 책을 번역을 많이 해요. 아까 이야기했던 [화성…]도 남자애는 여덟 살짜리 장애아고, 입양이고, 남자 주인공은 동성애자잖아요. 이런 것도 그렇고, 지금 기획서를 넣어서 저작권 계약을 알아보고 있는 책이 있는데, 이것도 주인공은 트렌스젠더인 17살짜리 남자애이고, 동생은 평범한 16살짜리 여자애예요. 오빠가 트렌스젠더인데, 가족들은 아무도 모르고 여동생만 알아요. 가족들은 게이일 수도 있다고 의심은 하지만 트렌스젠더까지는 생각을 못 하죠. 그런 전형적인 성의 틀 안에서 괴로워하는 청소년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도 번역을 하고 싶어요. 이런 돈 별로 안 될 것 같은 기획서 들고 다녀요. (웃음)

이런 일도 중요하지만 한 편으로는 좀 더 직접적인 일도 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사회복지학과이다 보니 이런저런 현장에 나가 기관에서 활동해 봤는데, 할수록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이라든가, 나의 생각이라든가, 나의 용돈 몇 푼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건 택도 없구나라는 생각이랑 비슷한 건데. 물론 안하는 것보다야 하는 게 의미가 있지만. 사람이 그걸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저는 했거든요.

봉사활동 가보면, 기관에서 일 해봤자 소용이 없구나, 이게 한계가 있구나, 역시 우리나라는 특히나 아직까지는 공권력이 워낙 크니까 정부에서 뭔가 할 수 있다면 많은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됐고, 대학원에 가서 정책 쪽으로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좀 더 큰 틀을 짜서, 그 틀 안에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게 하면, 그게 영속적으로 가는 거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민주주의가 수 천 년을 갔잖아요. 최소한 차악이라는 이야기를 듣잖아요. 그런 식의 어떤 거대한 틀 같은 거.

예를 들면 제가 성금을 삼 만원을 내면 제가 후원하게 된 애의 사진이나 아이가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런 식으로 아이에 대한 정보가 와요. 근데 그게 그 동네 우물물만 깨끗하게 하는 일인 거예요. 물론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죠. 그 사람한테는 죽고 살고의 문제잖아요.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한 명 한 명 도와서는, 이 사람들을 살 수 있게 만드는 데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그렇지만 만약에 사회에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생기면, 그 때부터는 누가 공무원을 하든, 누가 대통령을 하든, 누가 왕을 하든, 어떤 애가 태어나든 간에 체계 안에서 목숨을 이어갈 수 있고, 무언가 다른 걸 할 수 있게 되잖아요. 그런 틀을 만들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앞으로 계속 번역을 하려고요. (큰웃음)


진아  왜 갑자기 결론이… ^^;; 앞에서는 번역의 한계에서 시작하셨는데…

Jay   말하다보니까 이게 굉장히 민망해져서…

ida   감동적인데요.

진아  지금 세상은 어떻다고 보시는지, 제이님이 만들고 싶어 하는 세상은 어떤 건지, 이를테면 제이님이 꿈꾸는 파라다이스는 어떤 거예요?

Jay   파라다이스는 역시 적정수의 인구가 태어나서, 적정한 수준으로 굶어죽지 않고, 터무니없는 병으로 죽는 그런 일 없이 어느 정도 수명까지 살 수 있는 그런 거요. 모든 사람들이 일정 수준의 삶의 질을 누리면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자, 이게 사회복지의 강령이거든요. 근데 그거는 말 그대로 이상이고.

현실은 어떠냐고 한다면, 현실에 사실 큰 불만이 있는 건 아닌데, 단지 앞으로 나아갈 여지가 많다는 거고, 좀 더 열린 사회가 되길 바라는 게 제일 큰 관심사예요. 예를 들면, 휠체어를 타고 가는 사람을 봤을 때, 내가 그런 걸 봤어, 그렇게 되지 않는 거. 누가 목발을 짚고 다리가 없는 상태에서 걸을 때, 지나가다 한 번 더 보지 않는 거. 지금 저런 곳에 (앉아있던 야외 테이블에서 길 쪽을 가리키며) 점자 블록이라도 하나 더 깔리는 거. 점자 블록 저기서 끊겨 있잖아요.

점자블록을 깔 때도 촌스럽더라도 색깔을 밝게 해주는 거. 지하철 점자 블록은 노란색이잖아요. 그게 왜냐면, 일급 시각장애, 완전히 아무 것도 못 보는 시각장애가 있는가 하면, 희미하게는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희미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선명한 색을 하는 거죠. 근데 지금 저기 보이는 것처럼 색깔이 비슷하면, 시각 장애가 심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사실상 아무 것도 안 보이게 되요. 저런 사소한 것부터 배려가 있는 사회. 그런 면에서 북유럽이 많은 모델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그런 거야 말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법 안에서 만들면 되는데, 법 안에서 만들고 과징금을 세게 때리고, 이러면 되잖아요. 물론 지금도 있지만, 잘 안 되고 있고.

고등학교 때 그런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어요. 커다란 건물들에 들어가서 기울어진 경사로 경사각이 규정에 맞게 되어 있는지, 엘리베이터에 옆에 버튼 높이가 규정에 맞게 되어 있는 지를 보는 거요. 경사로도 경사각이 정해져 있어요. 일정 이상 올라가면 사실상 일반적인 휠체어는 올라갈 수 없거든요. 폭도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충분히 넓어야 하고요. 엘리베이터에서도 옆에 버튼이 휠체어에 앉은 상태에서 닿아야 해서, 높이 규정이 있어요. 그래서 엘리베이터 옆에 버튼과 경사로 등등이 높이에 맞게 달려 있는지, 폭과 각도는 규정에 맞게 되어 있는지 줄자를 가지고 가서 재는 거죠. 백화점 하나하나 건물 하나하나 경사로 폭 재고, 휠체어가 다닐만한 지, 밀어서 끼워보고. 근데 되게 안 되어 있거든요.

이걸 우리가 해봤자, 큰 효과가 없어요. 사실 그런 일반 시민단체에서 해봤자, 이런 게 있더라, 좀 고쳐라, 이러고 공문서 하나 보내는 거잖아요. 공문도 아니죠. 그냥 권장, 그런 거 하나 하고, 또 잘 해봐야, 신문 구석에 예를 들면 YMCA에서 이런 걸 했는데, 이런 게 문제라더라, 토막 기사 하나 나는 거죠. 이걸 법제화를 해서 엄격하게 만들면, 완전히 모든 걸 너무 법적으로만 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괜찮아지는 거잖아요. 어느 정도 이상으로 확대가 되고 나면, 그게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되면 누구나 만들게 되는 거죠.

근데 더 좋은 건 법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시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없는 건물을 보면 아, 이거 좀 문젠데, 하고 생각을 하고, 자진해서 항의를 해주는 거죠. 그렇게 생각해서, 또 번역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하려면 역시 의식개혁의 문제고. 의식 개혁을 하려면 역시 책 만한 게 없다는 게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의 생각이고. 하지만 역시 요샌 영화, TV, 이게 짱이 아닌가 싶어요. TV에서 정지선 지키는지 몰카 설치해서 보는 기획 프로 한 번 했더니 효과 좋았잖아요.(웃음) 반은 농담으로 하는 소리지만, 좋잖아요.


ida   언제부터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어요?

Jay   거기에 대해선 제가 작년 스승의 날에 홈페이지에 한 번 쓴 적이 있어요.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굉장히 특이한 분이셨어요. 이 분이 익명으로 북한 어린이 돕기에 천만 원을 기부했다가 기자한테 꼬리가 밟혀서 지역신문에 나왔는데, 그 때 까지 아무도, 반 학생들도 모르고 있었어요.

근데 그 분이 정말 어렵게 사는 분이었거든요.  전 그걸 보면서 패러다임이 바뀐다고 해야 하나, 그런 충격을 받았어요. 사람이 기다리기만 해서는 할 수가 없는 거구나, TV 보면서 어려운 사람 이야기 나오면, 저 사람 진짜 불쌍하다, 그러면서 울고, 이웃돕기 적십자 이런 거 내라 그러면, 남들 내는 것만큼 딱 내고, 그래왔는데, 그게 아니구나. 이건 어느 시점에서, 지금부터 시작해야 할 수 있는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저도 그 때 집안이 약간 힘든 시기였어요. 그러니까 여러 가지로 타이밍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제게 굉장히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시기에 그런 걸 보게 된 거죠. 제가 집안 상황이 그렇다 보니까 선생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고,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관심을 가지고 나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한 번 보이기 시작하면 눈을 감을 수 없는. 그 전까지는 천문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과에서 문과로 전향을 했어요. 처음엔 tv에서 가끔 나오는 훌륭한 인권 변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법대에 지망을 했다가, 사회복지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사회복지로 오게 되었어요.

선생님한테 받은 게 되게 컸기 때문에, 교육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한 거죠. 아프리카에 가서 학교를 세우자, 그럼 이 학교는 없어지지 않을 거고, 학교에서 아침점심저녁을 줘서 애들을 모아서 애들한테 공부를 시켜서 그렇게 하면, 사람이 생각이 달라지면, 돌이킬 수 없다는 그런 걸 되게 많이 느꼈기 때문에, 교육받은 아이들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 학교를 세우려면 경영학과에 가서 돈을 벌어야 되더라고요. 완전 잘 못 왔구나. (웃음)

그래서 전과를 하려고 다른 과를 알아봤었어요. 과를 죽 늘어놓은 다음에 내가 도저히 갈 수 없는 생물학, 물리학, 의대 등등을 지우고, 그런 식으로 지우다가 남은 게 인류학과랑 외교학과 둘이었어요. 그 두 과사에 가서 전과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전공 수업도 들어봤어요. 그런데 또 그게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그 때는 봉사활동 하던 기관에서 아, 이거는 안 되겠다, 싶은 일이 있기도 했거든요. 사회복지 현장이 어려운 덴 되게 어렵잖아요. 그니까 이런 식으로 해선 끝도 없고 사람만 소모되겠구나,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아서, 다른 길을 가자는 생각을 했는데, 그 단계를 넘기고 나니까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내가 뭘 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으로 넘어가게 되더라고요. 하나의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진아  여기서 자하님의 질문이 어울릴 것 같아서 해볼게요. “Jay님의 단편과 번역하신 것들을 보면 뚜렷한 편향성이 보입니다. 뭉뚱그려서 따뜻함, 휴머니즘, 잔잔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들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러한 방향성이 있다는 걸 인식하고 계신지? 인식하고 계시다면 의도하신 것인지? 의도하신 게 아니라면 왜 이런 방향성을 가지게 된 건지 스스로 생각나는 원인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물론 그런 방향성이 없다, 방향성은 있지만 다르다 고 하신다면 그것도 듣고 싶어요~~”

번역서 고르신 거나, 그런 걸 보면 장애인들이 나오는 작품이 많고…

Jay   예, 의도하고 쓰는 것들이에요. 처음에는, <로스트 앤 파운드>를 번역할 때 까진 그런 게 없었어요. 그냥 제가 정말 좋게 읽었던 것들을 그냥 번역을 한 건데, 몇 번 하다 보니까, 제 눈에도 그게 보이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글의 성격이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원서를 읽을 때도 제가 좋아하는 글에는 휴머니즘, 따뜻함, 잔잔함 그런 게 있었는데 의식하지는 못하다가 내가 번역한 걸 다시 읽어보니까 다 그런 작품인 거예요.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확고하게 인식하고 나서는 그 쪽으로 갔어요.

창작도 처음에 글을 쓸 때는 그런 걸 의식하고 있지 않았어요. {우주류}같은 경우에는 그냥, 정말로 쓰고 싶어서 쓴 거거든요. 딱히 장애인, 여성을 그려야겠다, 그런 게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이런 걸 쓰고 싶다, 그래서 쓴 건데, 쓰고 나서 보니까 그런 게 있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쓴 {입적}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의도한 바가 있었어요. 전쟁이라든지, 죽음이라든지, 한 사람의 삶이 가지는 무게라든가, 입양을 한다든가, 이런 식의 테마에 대한 의식이요. 특히나 주인공은 여자잖아요. 여자니까 비구니로 들어가는 그런 거는 남자라면 그런 게 없으니까, 여성이 어떻게 사는가, 그런 것들도 있었고요.

{마산 앞바다}같은 경우 처음에 생각했을 때는 이성애자였어요. 남자친구하고 마산앞바다에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시작했는데, 시작하다 보니까 저랑 약간 안 맞는 부분들도 있더라고요. 글 자체의 흐름이요. 전 남자가 등장하면 그 때부터 헤매요, 사실. 그 남자애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알아야 뭘 쓰지, 그런.(웃음) 그래서 의도적으로 동성애자로 만들었어요.

지금은 번역에 있어서는 확실히 의도하고 있어요. 이번에 나오는 [어둠의 속도]도 자페라는 장애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기 때문에 선택했고, 그런 작품들을 많이 찾아서 읽어요.

아까 말한 트렌스젠더 청소년 소설 같은 경우에도, 레즈비언, 게이, 바이 섹슈얼, 트렌스젠더, 다시 말해 보통 LGBT라고 하는 소재와, 장애인을 소재로 다룬 청소년서 목록을 죽 뽑아가지고, 열 권 정도를 읽고 하나를 고른 거예요.

그런 식으로 지금은 편향성을 띠고 있고, 창작소설에 있어서도 앞으로 아마 계속 그럴 거 같아요. 창작에 있어서는 제가 이런 걸 쓰겠다, 이렇다기보다는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이 움직이지 않는 부분이 좀 있어요. 그런 게 나오지 않는다면 중간에 어색함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처음이 아니기를}은 처음에는 진짜 노골적으로 호모 섹슈얼을 소재로 해서 쓸려고 했는데 실패를 했다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아직 쓸 준비가 안 됐었어요. 동성애 같은 경우에는 제가 개인적으로 쉽게 접근 할 수 없는 그런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이유가 있는데, 너무 성급하게 해서 저의 감정이 넘쳐 버리는 바람에 이야기가 안 된 거예요. 소설이라고 하면 나와 독립되어 독자에게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제가 가지는 어떤 원념이 너무 많이 배어 버린 거예요. 제가 그걸 보고 굉장히 많이 반성을 했거든요.

그 다음에 {마산 앞바다}를 썼는데 이것도 거울에 올린 판본은 사실 마음에 되게 안 들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너무 원념이 많이 들어가서. 그래서 그걸 계속 고치고 고쳐서 낸 것이 대학문학상에 응모한 {마산 앞바다} 거든요. 그 버전에는 만족을 해요.


ida   원념이 들어갔다는 게 어떤 뜻인가요?

Jay   그러니까 저의 어떤 개인적인 감정이라든가… 음… 저는 성정체성에 있어서 굉장히 오랫동안 혼란을 겪어왔어요. 지역의 영향도 있었는데, 저는 굉장히 보수적인 경상도에서 살았어요. 얼마나 보수적이었느냐 하면은, 직장을 가진 엄마가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처음에 서울에 전학 왔을 때 그게 첫 번째 컬쳐 쇼크였어요. 저희 집에 딸이 둘인데, 이웃들이 아들이 없다는 것에 대해 좀 안타까워하면서, 그래도 그런 딸이 둘 있으면 열 아들 안 부럽다는, 그런 말이 가능하다는 자체에서 보여 지는 그 사회의 문화적인 분위기가 있잖아요. 그런 식의 인식이 굉장히 강해서, 저는 세상이 다 그런 줄 알았어요. 그래서 성정체성으로 혼란을 경험하게 됐을 때, 미치겠는 거예요. 저는 진짜로 제가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뭔가 이상하다.

저는 부모님이랑 사이가 좋은 편이고, 부모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저희 집은 소위 말하는 너무나도 정상적인 가정이에요. 부모님이 표준적인 상식과 표준적인 보수성을 가진 그런 분들이거든요. 비록 부모님을 전적으로 믿지만 이거는 어머니, 아버지한테 절대로 말할 수가 없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이건 이 분들이 나를 좋아하고, 싫어하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다, 그걸 알겠더라고요. 지금도 당시 부모님과 저의 관계에서는 그 때 판단이 맞았다고 생각을 해요.

그 때는 인터넷도 없잖아요. 서울에는 있었지만 거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더 오래 끌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오래 끌고, 굉장히 안 좋게 끝이 났어요. 그 때 단짝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도 굉장히 모호하고 애매하게 그걸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사회나 세상은 그런 걸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고민하다가 저한테 그런 얘길 했어요. 저는 그 때 쯤, 아, 내가 아니구나, 라는 걸, 약간 나의 어떤 그런 것에 대해서, 걸스카웃에도 있었기 때문에 걸스카웃 쪽에서나 여러 곳에서 자료를 찾아서 모든 자료를 다 읽어보고 라디오 EBS 상담코너를 계속 듣고, 혹시라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그랬었어요. 뭔가 나올 지도 모르니까. 근데 안 나오더라고요, 그런 건. 집 나오고 싶다, 이런 거나 나오고. 난 집을 나오고 싶진 않았는데. (웃음)

아무튼 친구가 저한테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그걸 제대로 소화를 못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저도 불안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겠고, 나도 지금 내가 뭔가 이상한 것 같고, 게다가 저는 굉장히 모범생이었고, 그 때는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이제 슬슬 자리가 잡혀가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이걸 고민해봐야 소용이 없는 거구나, 이런 식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얘가 나한테 얘길 하니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그러한 상황에서 한 마디로 말하면 굉장히 상처를 줬어요. 그, 지금 생각해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거는 정말로 잘못했어요.

근데 만약에 제가 그런 것에 대해서 전혀 혼란이 없었고, 남자애들을 일상적으로 좋아하고 그런 상황에서 얘가 그런 이야기를 했으면 오히려 쉬웠을 텐데, 나도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친구는 나름대로 결정이 난 거죠, 그래서 나한테 얘기를 했는데, 나는 결정이 안 났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래서 거기에 대한 반성이랄까, 약간 뭐랄까, 죄책감이랄까, 속죄에 대한 개념도 사실 약간 있어요.

무엇보다 나 같은 혼란을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는 생각이 있어요. 그게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저는 자살하고 싶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데, 나는 절대 죽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 살겠다, 이런 계열인데, 그러니까 너무 괴로운 거예요. 어떻게든 살아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지 모르겠고, 또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게 어떤 건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그랬고요.

우리 집이 너무나 그런 집이었어요. 교과서에 나오는 것 같은 모범 가정이었고. 지금도 그렇고. 친척들을 봐도 보통 하나쯤은 망한 집도 있을 법 한데 그런 집도 없어요. 다 공무원, 선생님이고, 양가 할아버지 두 분 다 고등학교 선생님이고요.

그런 식이다 보니까 어떻게 해야 사회적으로 용인되면서, 적당하게 섞여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았어요, 그 때부터. 뭘 그 때 제일 고민했느냐 면은, 겨우 중학생이 앉아가지고, 만약에 내가 정말로 동성애자라면,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 어떻게 해서 이걸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내가 나의 이 생활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 아무리 고민해도 중학생이 무슨 답이 나와요, 사실. 그래서 중학교 때는 사람들 안 만나고 연구실 틀어박혀서 연구를 하며 살고 싶다,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그 이면에도 그런 게 있었어요. 사람들과 접촉이 적은 직업을 선택해야 되겠다, 이런 식으로, 어린 나이에 정말 생각 많이 한 거죠.

지나고 나니까, 그런 고통을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나중에 대학에 와서도 그런 쪽 공부를 많이 했어요. 해보니까 그 나이 때는 원래부터 성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 하는 확률이 되게 높다더군요. 그런데 저는 몰랐던 거예요. 남들도 이런 고민 한 번쯤 한다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나만 이런 줄 알았고, 친구인 걔만 그런 줄 알았던 거예요. 그런 걸 정말로 두 번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청소년 서적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일부러 청소년 서를 번역하거나 최소한 청소년이 읽을 수 있는 책을 했으면 하고 지금도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 그래서예요. 그 나이 때 그런 고민 전혀 없었던 사람은 이런 고민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그게 자기 고민인 사람에게는 이런 게 책으로 나올 만큼 흔한 얘기다, 이게 네 주변에는 아무도 없을지 모르지만, 이런 내용을 다룬 책이 있다, 그런 식의 얘길 하고 싶었어요.


진아  {처음이 아니기를}을 이번에 인터뷰 하려고 다시 읽었는데, 제이님은 반대로 이야기 하셨지만 원념이 개인적으로 더 많이 느껴지는 건 {마산 앞바다}고, {처음이 아니기를}은 좀 더 세련되게 감춘 쪽으로 보여요. 그 때는 독자우수단편에 선정이 안됐는데, 다시 보니까 이게 왜 선정이 안됐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제이님만 괜찮으시면 이번에 시간의 잔상에 올렸으면 해요. 그냥 묻혀서 지나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단편이더라고요.
제가 그 때 그 글을 제대로 못 읽어냈던 것 같아요. 그 때 썼던 독자우수단편 평도 다시 봤는데, 반성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Jay   그 글에서 세련되게 감췄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저도 어딘지 알겠는데, 그건 제가 저 자신에게도 감췄기 때문에 그렇게 나왔던 거예요. 아직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말을 하려고 하다 보니까 감출 수 있는 형식으로 밖에 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거 있잖아요.

{마산 앞바다}도 왜 처음에 진아님이 마지막 부분에 좀 더 드러내서 썼으면 좋겠다고 몇 번 이야기 하셨었고. 근데 그게 잘 안 된 것도, 여전히 내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글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고.

근데 되게 신기한 것 같아요. 글이 나와서 떨어지고 나니까 이제 말하기를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게 사실 진짜 얼마 안 됐어요. 거의 이제 10년 정도 된 얘긴데도, 되게 어렵더라고요.


진아  글쓰기가 글을 쓴 이의 무언가를 치유해주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Jay   예, 저는 그걸 믿어요. 아까 얘기했던 장애를 가진 아이를 입양한 동성애자 글을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그게 좀 있었고. 주인공이 동성애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커밍아웃을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덕분에 치유가 된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어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부분이 있죠, 예. 글을 쓰면 더 되는 것 같고.

   ※ 인터뷰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2편을 읽으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