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진아  제이님은 절대로 자살을 해볼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타입이라고 하셨지만, 제이님 작품을 보다 보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작품에서 많이 느껴져요. {마산 앞바다}도 약간 그렇고, {처음이 아니기를}도, 그 느낌이 되게 강했고.

Jay   그거는 정말 의도하지 않은 편향성이었어요. 저도 최근에야 깨닫고 좀 놀랐어요. {마산 앞바다}를 쓰면서, 되게 놀랐어요. 거기 나온 림보 이미지, 그런 설정이 나한테서 나왔다는 게 놀랍고.

자살할 타입이 아니라고 제가 이야기한 게, 타고난 성격이 자살할 타입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각오를 다져야만 했던 순간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든 이걸 살아서 넘겨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 걸 넘기면서 나는 자살할 타입이 아니다, 라고 결론적으로 나온 거 같아요. 그 전에는 자살을 고민하는 타입이었던 거죠. 결론적으로 그냥 살자, 이렇게 됐고, 그게 반영이 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저는 종교가 없어서 그런지 죽음이라는 게 완벽한 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딱히 종교가 없더라도 죽고 나선 뭔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잖아요. 근데 저는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그건 정말 성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데,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 게 있잖아요.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죽으면 끝이지, 사람이. 이렇게 밖에 생각이 안 되기 때문에 더 그런 공포가 강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귀신, 유령, 이런 것들도 하나도 못 믿겠고, 그냥 그 쪽은 상상이 안돼요.

저는 과학적으로 다 증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모른다고 해서, (지금 있는 비과학적인) 설명이 맞는 건 아니죠. 무당들이 신내림할 때 쓰는 방언이라는 게 있잖아요. 교회에서도 있는 거 같은데, 암튼 그 말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통한다면서요. 그 언어가. 근데 그런 것도 신이 내려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은 공통적으로 자극되는 뭔가가 있어요. 공통적인 이상이 있다거나, 보이지는 않지만 뭔가 초능력이라거나, 초능력이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초능력이 아니라 다른 의미에서 사람들 뇌 구조가 기본적으로 같으니까, 우리가 아직 밝혀내지 못한 뇌의 특정 부분에서 변이가 있다거나 어떤 그런 식으로 육체 안에서 모든 게 다 설명이 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ida   역시 SF 작가… (웃음) 저는 굉장히 기쁩니다. 국내 최초로 SF를 좋아하는 정치인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웃음) SF는 이제 발전할 수 있어요.

모두 웃음

Jay   죽음이 끝이라는 생각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그게 글에 배는 게 아닌지, 그런 생각은 좀 들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다거나 그런 일에 대한 공포는 확실히 느낀 적이 있거든요. 어렸을 때는 자다가 일어나서 갑자기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에 막 운 적도 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죽음을 경험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인 것도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양쪽 조부모님이 다 살아 계시니까… 사실 제 나이에 그런 경우 굉장히 드물잖아요. 워낙 일찍 결혼해서 일찍 낳고, 이게 반복 되서 그렇게 된 건데, 되게 건강하시고. 돌아가신 분이라고 해봐야 너무 연세가 많으시고, 정말 백 세 가까이 사시다 돌아가신 분이랑 사고를 당했는데, 굉장히 오래 끌어서 가족들이 다 지친 후 돌아가신 친척이라거나, 그런 경우밖에 없어서. 아주 가깝게 내가 늘 보던 분이 돌아가신 경우는 없어요. 그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상담을 해보면, 특히 고등학생 때 가장 인상 깊은 경험을 물어보면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신 거거든요. 정말 거의 그래요. 일곱 명 조 짜서 이야기하면 여섯 명은 그렇게 말할 정도로 흔해요.


ida   아니면 집에 빨간 딱지 붙은 경험이라든가요.

Jay   예, 그건 좀 더 이야기하다 보면 나오고. 고등학생이나 중학생들은 자존심이 있으니까 그거보다는 강렬한 죽음이 먼저 떠오르는 지도 모르겠어요.

진아  근데 그거 앞사람이 먼저 그걸 이야기해서 뒷사람들은 따라 하게 된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Jay   어, 듣고 보니 그렇네요. 한 명이 할아버지 돌아가셨다 그러면 뒷사람은 할머니 돌아가셨다 그러고.

모두 웃음

ida   학교 다닐 때 싸이코드라마를 했었거든요. 무대에 올라온 친구들이 자신이 겪었던 문제를 이야기하곤 하는데, 대부분이 집안 한 번 망했던 이야기였어요. 생각해보면 그것도 처음 시작한 사람이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Jay   예, 저도 만약에 앞에서 그런 식의 이야기를 했다면, IMF 때 겪은 이야기를 했을지도 몰라요.  근데 앞에서 다 죽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전 죽은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난 왕따 당한 이야기나 하고…

진아  상상이 잘 안 가는데, 왕따를 당한 적이 있으세요?

Jay   전학 해서 그런 일이 좀 있었죠.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신도시로 이사를 왔는데, 제가 그 때는 지금처럼 귀엽지가 않아서 (웃음) 굉장히 힘들었어요. 이 때의 경험은 아직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영역인 것 같아요. 소설로 한 번 써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언젠가는 쓸 수 있기를 바라고 있고, 다른 일들처럼 그렇게 되겠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의도한 건지 무의식적인 건지 잊어버린 부분도 많고…

어머니께서 아주 드물게, 그 때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실 때가 있는데 들으면서 놀라요. 헉, 그런 일이 있었어요? 하고요. 예를 들어, 이것도 저는 기억이 안 나고 어머니에게서 들은 얘긴데, 반 애가 생리대를 안 가져와서 주위에 앉은 애들한테 너 생리대 있니, 하고 가까운 순서대로 물어 본 적이 있었나 봐요. 저도 그 근처에 앉아 있었는데, 혹시 저한테는, 없는 애 취급하듯이 안 묻고 넘어갈까봐 조마조마했는데, 그 애가 저한테도 물어봤대요. 그래서 제가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나한테도 물어 줘서 너무 기뻤다, 그런 얘길 했대요. 그 얘길 듣고 어머니가 나중에 저 없을 때 마음이 아파서 우셨다 더라고요. 그런 일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 놀라운 게, 그 때는 다른 아이들이 가해자라는 생각을 안 했어요. 저는 비평준지역에서 꽤 유명한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해가 과학고나 외국어고 학생들이 내신 문제로 대거 자퇴를 해서 뉴스에도 나고… 굉장히 예민한 시기였어요. 그런데 저는 중간에 들어가면서 말하자면 제 점수보다 아주 조금 낮은 학교에 편입하게 됐는데, 하필 편입하자마자 시험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전교생의 내신 등수를 한 칸씩 뒤로 밀어내는 짓을 저지른 거죠. 이건 제 표현이 아니라 그 때 다른 학생이 했던 말이에요. 그렇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안 좋아 지고, 저한테 말 거는 애들이 거의 없었어요. 이름을 안 부른다거나, 전학한 게 언젠데 계속 전학생이라고 부르고… 복도 지나가다가 일부러 틱 부딪힌다거나, 앞에 가는 모르는 애들이 누구 욕을 열심히 하는데 듣다 보니까 그게 제 욕이라거나.

무엇보다도 저에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제일 괴로웠어요. 뭐랄까, 나와 몇 마디라도 말이라도 해 보고, 쟤 진짜 재수 없다, 싫다, 그런 판단을 내려서라면 납득을 할 텐데, 변호의 기회도 없고 서로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온갖 이야기가 들려오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죠. 수업 시간 50분이 쉬는 시간 10분보다 훨씬 짧게 느껴진 건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 수업 시간에는 뭘 하면 되는지 아니까.

그런데 그 애들이 나쁜 애들이 아니었어요. 정말로 평범하고, 이런 말 좀 이상하지만, 건전하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도 좀 있고, 그런 상황에서 제게 왜 그러는지 너무 이해가 잘 되어서 화를 낼 수가 없었어요. 이게 구조적인 문제다, 이 애들이 나쁜 게 아니다, 사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모두 피해자나 다름없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오히려 이제 와서는 그래도 그건 심했지… 싶은 기억이 가끔 떠오르는데, 그 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원망하고 하지를 않았기 때문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전학도 고려해서 타지역 학교나 특목고도 알아봤었는데 사실 전학이 어디 쉽나요. 게다가 어느 학교를 가나 결국 같은 문제가 생길 테고… 그래도 이 학교에선 벌써 한두 달 버텼는데.

그런 식으로 가다가 학년이 바뀌고 다들 익숙해지면서 점차 괜찮아졌고요. 이 때에는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던 때와 달리, 근본적으로 내 문제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내 잘못일지도 모른다는 어떤 두려움이, 없진 않았지만, 훨씬 덜했기 때문에…

앞 얘기로 돌아가서…그래서 주변에 죽은 사람이 없던 저는 그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 날 저녁인가, 다음 날인가, 1학년 때는 저와 같은 반도 아니었고 2학년 되어서 그럭저럭 친해졌던 애가 청소하는데 슬그머니 다가와서, 널 몰랐다고, 그렇게 힘들었을 줄도 몰랐다고, 미안했다고 눈 피하면서 얘길 하고 갔어요. 그날 밤에 정말 많이 울었어요.

지금은 힘들었던 본편은 잘 기억이 안 나고, 그런 게 기억나요. 눈치 안 보고 일부러 저한테 큰 소리로 인사해 줬던 애나, 그런 작은 것들, 사람이 어떻게 작은 것에서 구원을 찾을 수 있는지, 사람이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게 얼마나 사소하면서도 위대한 일인지,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얼마나 다짐을 했었는지…그리고 당연하게 생각하던 타인의 인정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나, 내가 잘나서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여유가 사실 그런 게 아니었구나, 그냥 보호막이 두터웠을 뿐이구나, 그런 생각들이요. 딴에는 그 각오를 잊지 않겠다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한 일 년은 고등학교 뱃지를 책가방에 달고 다녔어요.(웃음)


ida   (앞에 이야기한 가족들에 대한) 제이님 말을 들으니까 제이님 글에서 항상 느껴진 게 탄탄한 기반이었어요. 안정성이 느껴졌거든요. 어떤 이야기를 하든, 정말 안정적인 바탕이 깔려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가정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아  Jay님 글은 건전하고 올바른 느낌이 있어요. 비틀린 구석이 없고. 편견을 다루고, 사회적으로 소수인 사람을 다루고, 그런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각도 있지만 그 이전에 정말로 정서적으로 굉장히 안정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Jay   지인이 한 번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창작 소설을 읽으면, 특히나 20대 소설을 읽으면 주인공이 백수다, 직업이 없다, 아니면 뭐 해서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네 글은 다 직업이 있더라, 어디서 먹고 사는지 꼭 나온다. (웃음) 그 이야길 듣고 보니까 정말 그런 거예요.

진아  인물들이 다 뿌리를 박고 있는 무언가가 있어요.

Jay   저 자신은 그게 한계이자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다르게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저는 이미 이런 사람이고, 그런 거 밖에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런 글을 그냥 잘 쓰는 쪽으로 매진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ida   굉장한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작가들이 결핍에서 글을 쓰거든요. 안정성을 가진 작가는 정말 드문 것 같아요. 비슷한 느낌을 받은 작가가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예요. 그 작가도 정말 탄탄한 안정성 위에서 글을 썼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분은 그 책 한 권밖에 쓰지 않았어요. 그리고 퓰리처상을 받았는데… 그거 하나 쓰고 나서 더 이상 쓰지 않았다는 게 조금은 이해가 가더라고요. 너무나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더 쓸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걸지도, 라는 느낌이 있었어요. (말하고 나니까 불길한 느낌이; … 쓰는 거 멈추시면 안 돼요오…T.T)

진아  제이님은 아직도 글로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런 욕망이 있어서 글을 계속 쓰시나요?

Jay   그런 것도 있고, 아직까지 저도 쓰고 싶은 게 조금은 남아있는 거 같아요. 근데 아마 무리해서 쓰지는 않을 것 같아요. 번역을 하니까 좋은 원서를 많이 읽게 되잖아요. 훌륭한 작품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쓰는 것보다 번역하는 게 낫구나. 좋은 책을 소개하는 게 내가 쓴 책 한 권 읽게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거다.(웃음)

ida   그런 생각을 하시기엔 글솜씨가 아깝지 않습니까.(훌쩍)

진아  습작을 전혀 안하셨다고 들었어요. 거울 단편 게시판에 다른 필명으로 올리셨던 {디저트}가 첫 글이었다고. 맞나요?

Jay   예, 그게 처음 쓴 글이었어요. 쓰고 싶어서 썼고, <우주류>도, {처음이 아니기를}도 그렇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진아  저도 그렇게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셔서… 놀랐어요, 습작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 정도의 글이 나올 수 있다는 게요. 그 이유 중 하나가 일기인 것 같아요.

Jay   저도 그 생각했어요. 진짜 1인칭 밖에 안 되더라고요.

진아  홈페이지에서 제이님 일기를 읽으면, 흔히 사람들이 하는 블로깅이 아니라,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매일 일기를 쓰면 글이 는다고 말하지만, 매일 일기를 쓴다고 글이 늘지 않아요. 매번 일기를 쓸 때 마다 공들여서 잘 쓸 때에만 글이 느는 거라는 걸, 새삼 느꼈어요. 제이님 일기는 한 편 한 편 모두 공들여서 잘 쓴 글들이에요. 요새는 바빠서 간략하게도 쓰시지만… (웃음)

{디저트}가 처음 쓴 글이고, 그 뒤로 글을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었어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있잖아요. Jay님 글은 그게 없었어요.

한 때 제이님 때문에 일기를 공들여서 써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그래서 시도해봤는데, 결국은 성격에 안 맞아서… (웃음)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웃음)

인터뷰 녹취록을 정리하며, 제이님의 글들이 말 그대로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록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간, 수많은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확고한 목표를 가진 독서,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던져온 질문들, 그리고 꾸준히 성실하게 써온 일기라는 탄탄한 기반이 있었다.


▲ 최근 Jay님의 번역으로 출간된 엘리자베스 문의 [어둠의 속도]

ida   이수완이라는 필명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Jay   SF 작가 중에 마이클 스완윅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미국 작간데, 네뷸러랑 휴고 몇 번씩 탄 사람이에요. 그 스완윅을 한국 식으로 바꾼 거예요. 스완리, 이수완. (웃음)

ida   석호필 같은 식이군요.

Jay   사실 그 아이디어는 김상훈님의 강수백에서 나왔어요. 유명한 SF편집자인 휴고 건즈백 (이 사람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게 ‘휴고상’이죠.) 에서 따서 강수백이라고 하시는 거거든요.

ida   아, 그렇군요.(감탄)

Jay   좋은 아이디어다. 나도 하자. 그래서 하게 된 거예요. 한 번 해보세요. 되게 재밌어요. 왠지 애착도 좀 생기고…

진아  Jay님이 번역하신 스완윅 작품을 몇 개 읽어봤는데, 스완윅은 따뜻함, 잔잔함, 휴머니즘, 이런 쪽과는 거리가 먼 작가 같던데, 스완윅을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다면요?

Jay   스완윅은 진지하고, 음, 말하자면 제 글이 갖는다고 하시는 ‘휴머니즘’과는 다르지만 역시 휴머니즘이 있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이라크전이 일어났을 때, SF와 판타지 작가들이 반전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거든요. 근데 그게 공식작가협회에서 발표한 성명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아무도 안 하니까 스완윅이 그런 태도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자기가 나서서 작가들을 모아서 성명 발표를 했었죠.

언뜻 보기에는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글을 쓰기는 하지만, 그 작가의 글에서는 그런 열정이랄까,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다움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서 좋아해요. 그리고 굉장히 똑똑한 작가죠. 데뷔작으로 단번에 네뷸러상을 탔고 그 뒤에도 명작 [파우스트]를 재해석한 [잭 파우스트]같은 장편을 발표했는데, 너무 어렵다는 평이 많지만 그래도 읽는 사람의 머리를 탁, 친달까, 그런 면이 있어요. 자신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과 SF와 판타지에 대한 애착도 강하고, 유머감각도 뛰어나고요.



▲ 제2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만화부문을 수상한 {우주류}의 한 장면.
Jay님의 원작 소설을 박도빈님이 만화로 그렸다.



진아  ida님은 Jay님이 이수완이라는 이름으로 거울에 들어오기 까지 비화 모르시죠?

ida   저야 전에는 알고 지내던 분이 아니니까요.

진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갑자기 흥분하며) 어느 날 단편 게시판에 이수완이라는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아, 이 사람을 낚아야겠다. 진짜 낚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그래서 거울 필진으로 합류하면 좋겠다고 연락을 했는데 이 사람이 거부를 하는 거예요. 왜 거부를 할까, 지금까지 딱 한 분을 제외하곤 실패한 적이 없는데, 그 분은… 어쩔 수 없고(웃음), 나의 두 번째 실패 기록으로 남는가, 이러며 좌절하고 있었어요. 아, 저 사람, 진짜 탐나는데, 이러면서요.

그 때 제이님이 워낙 단편이나 잡지를 많이 보신 분이라서 거울 초반에 제가 msn으로 조언도 많이 구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제가 제이님에게 말만 걸면 바쁘다며 가버리시는 거예요. 내가 뭔가 실수한 게 있나, 나한테 화나셨나, 많이 고민했었어요.

제이님은 내가 말을 하는 동안 계속 낄낄 웃으셨다.

Jay   제가 거짓말을 잘 못해요. 진아님이 저에게 이수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벌써 저랑 진아님이 오프라인에서 본 적이 있는 사이였거든요. 근데 절 앞에 두고 이수완이라는 분을 영입해야겠다고 이야기를 하시는데 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거예요. 부추길 수도 없고, 관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화제를 돌렸어요. (웃음)

ida   다른 닉네임을 쓰신 이유는 뭐예요?

Jay   아무래도 진아님이랑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고, 번역 원고도 넘기고 있고 하니까…

진아  객관적인 평을 바라셨던 거죠?

Jay   네. 그런 것도 있었고….

ida   그럼 밝히신 이유는…?

Jay   거짓말 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웃음)

진아  그러다가 어느 날 제이님이 저한테 메신저로 말을 걸어서 그러는 거예요. “진아님, 고백할 게 있어요.” 저는 어쩔 줄을 모르고, 아, 제이님, 마음은 고맙지만, 아아, 제이님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분이시기는 한데, 이를 어쩜 좋아… 하고 (웃음)

Jay ida (폭소)

진아  혼자 어쩌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제이님이 “제가 이수완이에요.” 이러시는 거예요. “진아님이 이수완 이야기할 때 마다 홍차 타러 가는 것도 한두 번이고…” (웃음)

Jay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어서… (웃음)

진아  얘기해도 된다고 하셔서, 다른 분들에게도 “알고 있었어? 제이님이 이수완님이래.”라고 이야기했었죠. 다들 궁금해 했었거든요. 이름은 필명 같고, 과연 누굴까. 갑자기 이렇게 잘 쓰는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졌을 리도 없고… (웃음) 저는 이 분은 팬덤활동 같은 거 안 하고, 혼자 쓰다가 나온 분일 거다, 라고 말했었고, 다른 분들은 아니다, 의외로 우리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 라고 했는데 다른 분들이 맞았죠.

참고로 전 이런 류의 내기?에는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

ida   저도 Jay님을 개인적으론 몰랐지만 홈페이지를 찾아가고 있었고, 이수완이라는 이름도 정크SF를 통해 봤던 지라 홈페이지에 “저는 이수완입니다.”라고 올리신 걸 보고 놀라긴 했었어요. 아는 분이 아니라 많이 놀라진 않았지만…

진아  저는 얼마나 놀랐겠어요. 매일 이야기하던 분이었는데… (웃음) 생각해보면 복선?이 있었어요. {디저트}도 다른 이름으로 올렸다가 나중에 이야기하셨거든요. 그 글 좋아요. 귀엽고, 발랄하고.

Jay   배고파서 썼어요, 사실. 먹고 싶은 거 순서대로 다 나오고. (웃음)

진아  비평 게시판에 어떤 분이 {디저트}의 두 주인공을 여자 커플이라고 생각하는 평을 올리셨었잖아요.

Jay   저도 그 이야기 듣고, 읽고 보니 그렇게 보는 게 자연스러운 것도 사실이더라고요.

진아  네, 두 친구의 모습이 남녀 친구보다는 여자 친구들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근데 지금은 본격적인 동성애 이야기를 쓰시고… (웃음)

Jay   약간은 그게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그 글을 의도적으로는 아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여자남자라고 생각하려고 했던 게 있었는데, 그렇게 해 가지고는 안 되겠구나.

글을 쓰다 보면 누구나 그렇잖아요. 하다못해 블로그에 혼자 쓰는 일기를 써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과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 있는데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는 쪽으로 글을 쓰는 방향이 나아가잖아요. 물론 하다보면 역방향으로 가는 일도 생기지만… 글로 쓰는 영역이 넓어지려면 내가 이걸 쓰지 않을 수 없겠구나. 비평 게시판에 올라온 그 글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었어요. 내가 무의식적으로 남자라고 생각하는 구나, 나의 어떤 개인적인 걸 생각하자면 이게 의도적으로 써야 될 부분이구나, 그 생각도 들었고. 그 생각을 하고 보니 그 분은 저의 은인♡


진아  아, 그렇게 되나요.

Jay   그 분이 수많은 청소년의 은인이 될 지도 몰라요.

모두 웃음

ida   한국의 장래를 바꿀 수도 있는 분이군요. (웃음)


▲ 제2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만화부문을 수상한 {우주류}의 한 장면.


진아  {마산 앞바다}에 이런 문장이 있었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첫 죽음은 첫사랑보다 먼저 다가온다.”라고 하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의미가 단지 마산, 림보를 앞에 두고 사는 마산 사람들을 말하는 건 아닐 거고,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Jay   예, 중의적으로 쓰였죠. 마산앞바다의 림보라는 건 굉장히 모호한 거잖아요. 죽음이 눈앞에 있는, 실체화된 그런 모습이에요. 그런데 그게 그 글을 쓰고 나서 제가 생각한 건데, 그, 죽지 않고 살아야겠다, 또는 이거로 인해 죽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그러면 그 기억이 가진 죽음이 있게 된다고 생각해요. 내 목숨이 너무 위협을 받지 않는 상황이라도 내가 진짜 죽고 싶다, 또는 아, 이렇게 사람이 죽는구나, 그런 식의 어떤 생각을 하면 그 순간에,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서 그 순간에 거기마다 말하자면 묘비가 하나씩 박힌다고 생각을 해요. 정신적으로.

그 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다시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거죠. 무의식속에서. 예를 들어 학창 시절에 어떤 일이 있어서 진짜 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 못 죽고 살았던 사람이 있다면, 걔는 학창시절이라는 말을 딱 들으면 무심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당시의 그 일 자체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사고를 당한 사람을 떠올린다거나. 지난달에 갔던 장례식이라거나. 그리고 인생에서는 내 것이 아닌 묘비라도 박힐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그런 느낌? ‘우리 같은 사람’은 그런 묘비를 이미 하나 가지고 있는 거죠. 주인공 같은 경우에도 자기 인생에 이미 그런 묘비가 있죠.

마산앞바다는 실제로 하나의 상징일 뿐이잖아요. 실제로 그런 게 있는 게 아니고. 근데 주인공은 성정체성에 대해 자신에게도 커밍아웃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고, 그런 어떤, 그런 상황에서의 기억들, 그런 식으로 자기 인생에 이미 묘비가 박혀 있는 거죠. 그런 사람에게는 사랑보다 죽음이 먼저 있는 거죠, 이 자리에. 그리고 그런 묘비가 한 사람에게 여러 개 있을 수도 있고. 반면에 주인공이 좋아하게 된 지원이 같은 경우에는 그게 없는 사람인 거예요. 어쩌면 있는데 주인공이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이 지원이에게, 마산 앞바다의 림보를 봤느냐고 하니까, 지원이는 수학여행으로 갔지만 자기는 그냥 차에서 잤다고 굉장히 일상적으로 이야기를 하잖아요. 주인공이 보기에는 그게 어떤 그런 묘비가 없는 사람을 보는, 나중에 사귀다보면 그게 아닐 수도 있고, 그 뒷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상황을 주인공 입장에서 봐서는 묘비가 없다는 것 자체가 첫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갖게 되는 어떤 구원의 의미라거나, 도피처가 될 수 있다거나, 그런 느낌을 넣고 싶었어요.


ida   <입적>에서 마지막에 “어떻게 살아남았어요?”하는데 “…배웠어요.”라고 하고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잖아요. 그 부분에서 굉장히 가슴이 아렸거든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조금 이야기를…

Jay   배웠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배웠다고 했어요. 상대방은 인간이잖아요. 아무리 자기랑 비슷하고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이라고 해도 사실 나랑 완전히 다르잖아요. 그런 사람한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을 이렇게 하고 다녔고, 저렇게 해서 살았고, 같이 다녔던 페이아인이 있었고,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그것도 그렇게 총을 들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니까 배웠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게 어떻게 생각하면 소통의 한계이기도 하고. 배웠다는 말 뿐만이 아니라요.

끝까지 남편 이름이 안 나오는데, 그것도 의도했던 부분이에요. 남편과 주인공의 사이에서 말한 대화는 뭐랄까, 얼마나 다른가. 설명되지 않는 것들. 말로 할 수 없는 것들. 대화가 단답이잖아요. 굉장히 핵심적인 질문들, 남자 입장에서 보면 자기 입장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부터 하잖아요. 일단 너 뭐냐, 어떻게 살았냐, 내 애 내놔라, 그런 식이잖아요. 단답형으로 밖에 될 수 없다는… 그런 거.


진아  그토록 오랜 친구였는데, 마지막에 “페이아인이래!” 라고 달려가는…

Jay   친숙한 사람에게 가는 거죠. 같은 인간이고, 가족이고, 남편인 사람에게.

ida   결말도, 이 아기를 끝까지 기르겠다고 하는 것도… 이런 결말이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감동이었어요.

진아  <입적>의 마지막 부분은 정말 쉽게 하기 힘든, 오랜 성찰 끝에서만 얻을 수 있는 삶에 대한 긍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애정과,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이 없이는 나오기 힘든 결론이라고 생각해서, 정말 진심으로 감탄했었어요.

Jay   고맙습니다. ^^

내가 살고 싶으니까 다른 사람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어요. 내가 너무나도 살고 싶고, 이게 너무 간절하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태어났을 때부터 한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살고 싶다고 결정을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어떤 목숨이나 영화에 나오는 엑스트라 하나하나까지요.

저 공포 영화 진짜 못 봐요. 너무 슬픈 것도 못 봐요. 주인공이 죽는 것도 못 보고요. 나한테 이만큼 소중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소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소중할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건 어떤 사람을 아무리 오래 알아도 알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과 같은 것들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소중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웃음)


진아  이렇게 원대한 꿈을 가지고 글을 쓰는 분은 지금까지 인터뷰한 분 중 처음이에요.

ida   그러게요.

Jay   저는 내가 소설을 쓰겠다, 어떤 식으로든 나의 글을 쓰겠다는 욕구는 그렇게 높지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글을 쓰면서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는 게 나 자신의 어떤 경험에서도 그렇고, 가끔 진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있어요.

그러니까 뭐든지 쓰고 싶다. 먹어도 안 되고, 자도 안 되고, 써야만 해결되는 그런 종류의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아주 가끔은 느끼거든요. 그럴 때는 번역을 해요. 편하게 이렇게 우수한 글을 나의 손으로 옮긴다는 것으로… (충족을 해요.) (웃음)


진아  번역으로 해소가 돼요?

Jay   아주 감명 깊게 읽은 글은 해소가 되고, 아주 감명 깊게 읽은 글이 많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살아온 건 이십 몇 년 밖에 안 되니까, 내가 아무리 경험해서 아무리 끌어내도 결국은 이십 몇 년 치밖에 안 되는 거고, 그 중에서 기억할 수 있는 걸 잘라내면 더 줄어들 거고요. 그런데 내 앞에서 살아온 작가들은 수천 명이 있잖아요. 하나하나 사람들의 인생을 일렬로 세우면 엄청 길 거 아니에요. 지구를 몇 바퀴 돌 정도로요. 안드로메다까지 갔다 올 지도 모르죠.

내 인생에서 가장 처절했거나 가장 인상 깊었거나 정말로 어떤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고 생각하는 그런 경험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경험들이 다른 사람들 글 안에는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걸 좋아하는 편이고. 그것도 필요한 거 같아요.

내 삶이 가지는 근본적인 경험의 부재라는 게 있다고 저는 굉장히 생각을 많이 해요. 기관에서 일할 땐 더더욱 많이 느끼고,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살 수가 있나 그런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초등학교 1학년이 있는 집에 간 적이 있어요. 그 나이면 유치가 영구치로 바뀌는 나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뽑거나 관리해 줄 부모가 없는 거예요. 자기 혼자 이가 빠지길 기다려서 빠진 이를 책상에 올려놨는데, 책상에 먼지가 이만큼 쌓여있고, 옷장을 열어보면 지저분한 옷들이 막 떨어지고. 그런 가정이 생각보다 굉장히 많아요. 그런 거 보고 나면, 내가 평생을 살아봤자, 내가 아무리 대단하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중요하고 그런 가치 있는 경험을 한다고 해도 이것과 저것의 무게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는가. 내 것이 작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 얼마나 클 수 있는가를 많이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런 것 하나하나가 가진 무게들.

그런데 나한테도 내 무게가 있으니까 그런 걸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드는 거고. 본 것들을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하는데 아직은 거기까진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울컥울컥 하는 감정이 많을 뿐이지, 내가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기껏해야 애 데리고 나와서 언제 감았는지 알 수 없는 머리를 감겨주고, 도시락 주고.

일곱 살 여덟 살 밖에 안 된 애들이 도시락을 먹는데 하나도 안 흘려요. 급식 도시락 있잖아요. 그걸 너무 어렸을 때부터 먹었기 때문에 젓가락질도 되게 잘 하고 하나도 흘리질 않아요. 그게 더 슬퍼요.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 까지 애들 열 몇 명을 모아놓고 먹는데, 첫 날엔 신문지를 깔아야 하나 생각했는데, 아무도 안 흘리는 거 있죠. 깨끗하게 먹어요. 한 아이는 자기는 이거 하루에 두 번씩 먹는다고 자랑해요. 그거 밖에 못 먹는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하면. 그런 것들… 그래서 그걸 소개하고 싶다는 욕망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볼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런 걸 영상으로 찍어가지고 24시간 틀어도 모두 볼 수 없어요. 그렇지만 글은 남잖아요. 시간차가 있어도 되잖아요. 인터넷으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이론도 그 시간차를 노린 거잖아요. 지금이 아니라도 누군가 언젠가는 볼 수 있다. 그리고 단 한 명에게 만이라도 번역이든 창작이든 어떤 식의 글이든 그 사람에게 아주 적절한 순간에 그 사람의 가슴을 찌를 수 있을 거고, 그렇다면 그 사람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 설사 그 사람이 아무 것도 못해도, 다음 날 죽더라도. 그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 자체로 온전하게 하나인 거니까.

저는 제가 굉장히 안전하게 살아왔다는 걸 알아요. 아까 제 안정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는 실제 아주 안전하게 살아왔거든요. 제가 중간 중간 어려운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라도 부모님이 튼튼하게 곁에 있었어요. 확실하게 내가 이 사람에게는 기댈 수 있다, 내가 절벽으로 떨어질 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면 이 사람이 날 붙잡아 줄 것이다, 라는 정말 그런 완전한 믿음이 있어요.

어릴 때 머릿속에서 제가 절벽에서 떨어지는데 어머니가 내 발을 잡아주는 그런 영상이 있었어요. 그런 게 사실 성정체성의 혼란, 이런 걸 겪으면서 확립이 된 건데, 내가 동성애자라고 부모님에게 고백을 해도 이 분들은 받아들여 주시리라, 그런 감정을 이해하지는 못할 지라도 나를 딸로서 사랑해줄 것이다, 라는 느낌이 어느 순간 찾아오더라고요. 그러고 나니까 편안해졌어요.

그게 참 어려운데, 그런 확신을 가진다는 것이 드물다는 것을 그 때 알았고, 지금은 더더욱 잘 알게 되었고,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그거는 정말로 받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그리고 교육도 제대로 받았고, 그래서, 제가 교육받기 위해 들었던 온갖 직.간접적인 비용은 내가 무엇을 해도 갚을 수 없다는 채무감이 있어요.

저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영상화를 자주 하는데, 커다란 물통으로 물이 콸콸콸 들어오는데 쫄쫄쫄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아무리 들어와도 다 나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든 좀 더 크게 나갈 수 있는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그 구멍이 너무 크면 내가 버틸 수가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 스스로를 한계라고 생각하는데, 물통에서 이미 이게 물이 조금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 이만큼 차 있어야 하는 거예요. 스스로. 내가 필요로 하는 거,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이 이미 너무 많기 때문에. 당장에 저한테 단칸방에서 어떻게든 먹고 살아라,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그렇게 살아온 적이 없기 때문에. 길에 나가서 구걸을 해서 만 원을 벌어오라면 못할 것 같아요. 그런 걸 필요로 하는 상황에 놓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내가 필요로 하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남는 나머지는 어떻게든 쳐내야 한다는 어떤 그런 게 좀 있어요. 그런데 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지금도 고시공부하고 있잖아요. 내 방 따로 있고. 학원 다니고. 근데 그게 어떤 식으로든 투자가 되서 다시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은 많이 하죠.


더워서 야외 테이블에 앉았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기온이 떨어져 한기가 느껴졌다. 아쉽지만 인터뷰를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다.

진아  마지막으로 새로 출간한 [어둠의 속도] 소개 부탁드려요. ^^

Jay   [어둠의 속도]도, 읽으시는 분들은 여러 가지 방향에서 받아들이실 수 있는 책이지만, 제 입장에서는 앞에서 말했던 것과 비슷한 문제의식이랄까, 그런 면에서 맡아서 옮긴 책이에요. 주인공이 1인칭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주인공은 자폐인이죠.

자폐라고 하면 병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실제로 보면 자폐‘증’이라고 많이 하고, 자폐‘아’는 말은 많이 해도 성인 자폐인을 일컫는 말은 딱히 없잖아요. 저는 그 용어의 부재 자체가 자폐 같은 것을 유아적인 것, ‘정상 어른’은 갖지 않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주인공은 30대 중반 남자이고, 세상을 다른 사람들, 소위 ‘진짜 사람들’과 다르게 보고 그래서 가끔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사람이죠. 이 사람이 자신의 눈으로 소위 정상인 세상을 바라보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정상이라고 쉽게 규정하는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비정상적일 수 있는지, ‘다름’을 우리가 얼마나 쉽게 ‘틀림’으로 치부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에요.

자폐증을 완전히 낫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실험적인 신기술이 개발되는데, 주인공이 다니는 회사의 악당 상사는 주인공을 비롯한 자폐인 직원들에게 이 수술을 시험적으로 해보고 싶어 하죠. 그리고 주인공은 비장애인인 여자를 사랑하고…자세한 줄거리는 직접 사서 읽어 주시고…(웃음)

무엇보다도 SF가 말하는 ‘경이감’이라는 것을 장애/비장애라는, 실제로 아주 흔하지만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면 쉽게 잊어버리기도 하는 소재와 연결지어 강렬하게 드러낸 책이죠. 저도 처음에 읽고 정말 감동받았고, 이 책을 번역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과정에서 뭐랄까, 저 자신이 변화했다는 생각이 들고, 독자들에게도 일단 읽기만 한다면, 그런 의미를 갖는 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는 있는데, 두껍고 비싸서… 얼마나 반응이 있을지 걱정이 많아요.


 Jay님은 다른 약속을 위해 자리를 떠야했다. ida님과 함께 Jay님을 지하철역까지 바래다 드렸다. Jay님은 돌아서서 우리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순간, 지하철로 내려가는, 바깥보다 어두운 지하의 내부가 Jay님을 중심으로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분명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밝고 건강하고 강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던가. 우주류의 화자가 그러했듯이, 모퉁이마다 숨어있는 좌절에 굴하지 않고, 삶에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걸어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던가.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신 Jay님께 감사드리며, 부디 우리나라 최초로 SF를 좋아하는 정치인이 탄생할 수 있기를… (… 이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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