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개별 질문으로 넘어갔다.


▲ 그림 뽀

――― 배명훈
 * 명훈님의 글은 아이스크림 퐁듀 같다. 달콤한 초콜릿을 입혀놓은 맛있는 아이스크림. 맛도 있지만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워서 정신이 번쩍 든다. 다 먹고 난 이후에는 아쉬움과 여운이 입안에 진하게 남아 꼭 다시 찾게 될 것 만 같다.
 {이웃집신화}, {임대전투기}, {355서가} 모두 낄낄거리면서 재미있게 읽었다. {누군가를 만났어}의 감동은 여전했다. 외계인과의 만남을 이렇게 감동적인 단편으로 엮어낸 명훈님의 역량에 감탄할 뿐이다. {철거인6628}은 예전에 웹으로 읽었을 때랑 또 다르게 읽혔다. 처음 읽었을 때는 뭔가 허전하니 한두 장(章)이 빠져있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니 하나의 완결된 단편으로 읽혔다.
 명훈님의 글에는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튕기게 만드는 유머가 녹아들어가 있다. 그러한 유머에 덧붙여 그럴싸한 뻥, 그러니까 {임대전투기}에 나오는 은경 씨의 말을 빌리자면 "이 인간 뻥 한 번 제대로 치네"라는 게 들어가 있다. 특히 {누군가를 만났어}에 등장하는 고고심령학이 그렇고, {임대전투기}에 나오는 부이마스가 그렇다. 너무 그럴싸해서 {철거인6628}읽었을 때는 정말 전쟁나면 어떻게 하나 싶었고, 요즘도 도서관 가면 {355서가} 근처에는 얼씬도 안한다.
 또한 명훈님의 글은 거대한 이야기를 작은 한 점에 응축시키는 돋보기 같다. 대책 없이 큰 이야기를 끌어들여서 그걸 {이웃집신화}로 만들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나.


이웃집신화
누군가를 만났어
임대전투기
철거인6628
355서가

   아이스크림 퐁듀 같다는 느낌은 이야기의 배치 때문에 더 그랬나 봐요. 가벼운 느낌의 글 사이사이에 정말 깊은 여운을 남기는 글이 들어가 있으니까요.
고고심령학이나 바디카운트 같은 소재는 어디서 찾아오시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명훈  바디카운트는 실제로 있는 거고요. 지금 논문 주제 잡기 전에 한동안 들여다봤었어요. 시체 세는 거 연구하는 사람 실제 있어요. 어디에 몇 메가톤의 폭탄이 떨어지면 몇 명이나 죽을 건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전쟁이 벌어지면 몇 명 사망하고, 그런 게 1단위까지 나오는 경우가 있잖아요.

명훈  그건 제가… 딴 것 때문에 깊이 들여다봤는데… 옛날에는 살아있는 사람만 셌던 전쟁이 있었어요. 죽은 사람은 백만 단위로 세고, 살아있는 사람은 한 명 단위로 세고. 그런데 요즘 전쟁은 미국 때문에 그런 거 같은데 (미국은) 사람 한 명 죽는 걸 굉장히 민감하게 생각하잖아요. 미군은 전쟁나면 죽은 사람 한 명 단위까지 나와요.
그리고 조금 더 일반적인 건 어느 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러면 그 나라 정부에서는 오십 명 죽었다 그러고 NGO에서는 500명 죽었다 그러고, 그 동네 간 기자들이 인터뷰했더니 2000명이 죽었다 그러는데 그 숫자들이 다 나름대로 의미가 담긴 숫자들이거든요.. 그런 숫자 세는 것과 관련해서 그런 걸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거기서 나온 소재고… 냉전 때 이런 걸 연구 많이 했어요. 핵을 떨어뜨리면 여기서 몇 명이나 죽을까 같은 걸요. NRDC라고 환경보호단체 같은 덴데, 여기에서 원자력 문제나 핵 문제도 다뤄요. 그 사람들이 그런 걸 해요. 여기에 폭탄 떨어지면 몇 명이나 떨어질 지를 연구하고 있더라구요.

   고고심령학은…?

명훈  그건 지어낸 건데요. (웃음)
{고고심령학자}라는 제목의 단편이 있어요. 다른 곳에 공개는 안 한 단편이에요. 중간 단계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누군가를 만났어}는 그 단편의 연작이 아니라, 개작이라는 기분으로 쓴 글이에요. 글의 (음산한) 분위기는 대학원 다니면서 학교에서 본 것들을 응용한 거죠. 이 사람들이 뜬구름을 잡는 것 같기도 하면서, 뭐랄까… 교수들 얼굴에 귀기가 서려있다는 그런 것들? 학교에 있어본 분들은 355서가처럼 거의 이해를 해주시는 건데, 학교에 있다보면 사람들 얼굴에 드리우는 이상한 무언가가 있어요.

   영감 같은 거요?

명훈  영감이라기보다는 귀기랄까요? 그런 걸 표현하기 위해 끌어온 거예요. 학교에 오래 있어서 여러 가지를 써먹고 있어요. (웃음)

   거울에 글을 매달 올리셨는데 매번 다 새로 쓰신 글을 올린 건가요?

명훈  전에 있던 거 올린 적도 한두 번 있어요.

룩스  거울 '시간의 잔상' 펑크를 명훈님이 막고 계셨어요.

이다  맞아요. (웃음)

명훈  그런가요. (쑥쓰) 전 한 달에 한 편씩 쓴 게 몇 년 됐어요. 4년 쯤? 중간에 막혔을 때도 있었는데… 평균적으로 그 정도는 쓴 거 같아요.

   355서가 같은 경우 도서관십진분류법에 따른 서가 번호인데 6628은 어디서 온 거예요?

명훈  아, 그게…

   설마 명훈님 차 번호라거나?

명훈  아, 네…

   설마했는데 진짜네!

명훈  뭐, 어딘가 길을 가다가… 은색 6628을 발견하셔도 돌을 던지진 말아주세요. (웃음)
철거인 6628을 쓸 때 평양 지도하고 위성사진을 많이 들여다 봤어요. 거기 위성사진을 보면 차들이 다니는 것도 다 보여요. 구글 어딘가로 들어가면 볼 수 있는데, 요즘 건 아니고 좀 된 거구요.

진아  검색하면 위성사진이 다 나와요?

명훈  네. 지리학이나 그런 거 하는 사람들이 쓰나봐요. 지금 사진이 나오는 데는 유료인 것 같아요. 사람들 지나가는 것까지 다 보여요.

진아  아, 사생활이란 없어. 온 사방에 널린 CCTV 따위.

명훈  철거인 6628에서 쓰고 싶었던 건, 북한도 여기(남한)도 사람 사는 곳인데, 그걸 매개하게 되는 건 폭탄뿐인가? 그런 식의 이야기였어요.


▲ 배명훈

   인도 영화라거나 인도 신화 같은 거 좋아하시나봐요.

명훈  네, 좋아해요.

   … 끝이에요? ^^;;

명훈  이번에 실은 글 중에 네 편이 인도에 관한 뭔가가 들어가 있는데, 그건 우연이었어요. {누군가를 만났어}는 인도 영화 제목을 따온 거고, {임대 전투기}는 외계인 머릿속에 입력된 지구 언어가 영어와 힌디어였고, {이웃집 신화}는 인도 신화 부분을 따 왔고, {355서가}는 은경이 책을 들고 인도로 나르고… 철거인 6628만 빼면 다 들어가 있어요.

이다  최근 인도 여행도 다녀오셨죠.

명훈  네 ^^

진아  특별히 인도를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어떤 면에 끌리세요.

명훈  음… 글쎄요. (인도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인도 영화를 좋아하고요. 인도 신화 같은 걸 보면 정신적인 세계에 대한 이야기? 인도 신화는 재밌는게 악마들과 신들이 싸우는데, 악마들이 신들에게 도전하기 전에 1000년간 고행을 하고, 깨달은 다음에 도전을 하고, 기본적으로 깨달음이 깔려 있는 이야기라서, 그런 걸 생각하다보니 인도 신화에 끌리는 거 같아요. 정신적인 이야기라는 점에서요.

룩스  검색해서 돌아다니다 해피 에스에프 무크지에 실린 명훈님 글에 대한 리뷰를 봤어요. 명훈님 글을 굉장히 재밌게 본 사람인 것 같았는데, 그렇지만 ‘배명훈은 굉장히 능숙하고 영리한 작가지만 이 사람의 소설은 소설 이상으로 읽을 수는 없다‘는 문장이 있었어요(정확하진 않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제 나름대로는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았어요. (그 분이 실제로 무얼 표현하려고 쓰셨는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제 나름으로 느낀 부분은)이다님이나 애진님 글은 소설을 써서 이것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있다, 주제를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위해서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드는데 명훈님은 글쓰기 자체에 굉장히 충실하다는 느낌이예요. 주제가 없을 리는 물론 없겠지만, 형식이 더 튀고, 그런 면에 상당부 임팩트를 두는 거예요. 그래서 글 쓰는 방식이 (다른 두 분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고,예컨대 이런 걸 전하기 위해 문장을 쓴다기보다는 그 문장이라는 것 자체나 글쓰기 서사의 실험을 해 본다거나. 그래서 글을 쓰는 관점이 궁금해요.

명훈  전 (주제를) 숨겼다고 생각해요. 주제가 왜 없겠어요. 그렇게 안 읽어주는 것 같은 글들이 있어요. 다이어트 같은 경우는 쓴 사람 입장에서는 의도하고 있는 주제가 굉장히 강하고, 그 주제를 쓰기 위해 그 형식을 가져온 글인데, 형식적으로 매력적인 것처럼 비친 것 같아요. 근데 제가 쓰려고 한 건 (형식) 보다는 더 쓴 것 같아요. 그런 경우들이 있어요. 이번에는 355서가는 반응이 아쉬운 글인데, 가볍지 않게 썼는데 소품으로 읽으시는 분들이 가끔 있어요. 근데 제가 이 글의 주제는 이거예요, 라고 설명할 수는 없잖아요.

룩스  명훈님 글은 숨겨져 있고, 독자가 형식에 매료되기가 쉽기 때문에 다른 것 같은 느낌이에요.

명훈  숨기는 게…, 숨겨야 된다고 생각해서, 그걸 독자가 모르더라도 숨겨놔야 한다고 생각해서 숨긴 거고, 그걸 못 읽었다고 왜 못 읽어~ 그런 생각은 안 드는데… 머릿속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가, 어느 날 생각해보면 아, 이거였구나, 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대놓고 그렇게 읽으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진아  거울에 업데이트 된 명훈님 글은 반응이 늘 좋아요. 댓글도 많이 달리는 편이구요. 명훈님 글은 얼핏 보면 굉장히 쉽고 명쾌하지만, 진짜 의미를 읽어내려면 굉장히 어려운 글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명훈  제 글에서 사람들이 의외로 잘 못 알아채는 코드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요, 예를 들어서 {누군가를 만났어}에서 주인공이 만난 누군가가 누구게요?

일동  글쎄요.

명훈  스크라이버에요.

진아  스크라이버가 누구…

명훈  {스윙 바이}에서 토성 위성 탐사선에 실려 갔던 애 있잖아요.

이다  아, 그래서 그 영혼들이 거기를 지킨 거였군요. 야한 이야기를 써 줄 사람이 필요해서. (웃음)

명훈  그렇다기보다는 {스윙 바이}에서 스크라이버가 영혼을 얻잖아요. 그 영혼을 지구에 있는 생명체들이 지키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누군가를 만난” 건 그 글의 주인공이 처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살았던 생명체들이라는 거예요. 주인공이 찾은 건 결국 과거에 지구를 지배하던 누군가가 우주에서 온 누군가를 만났던 장면이지 그 “누군가” 자체를 찾은 건 아니라는.)

이다  외계에 있는 스크라이버가 어떻게 지구에 왔나요?

명훈  그게 설명이 되면 연작이 되겠지요. ^^ 그렇게 딱딱 연결이 되는 건 아니고, 그냥 그런 이미지를 빌려온 거예요.




▲ 그림 뽀

――― 김보영
 * {땅 밑에}와 {우수한 유전자}를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보영님의 글은 세계의 전환(전혀 다른 위치와 시선에서 세계를 보는 혹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보는 듯한)이 탁월하다. 그 전환이라는 것이 {땅 밑에}와 {우수한 유전자}에서는 반전이었지만 {종의 기원}은 처음부터 대놓고 로봇들만의 세계로 이끌어 나갔다. {종의 기원}은 그러한 세계의 전환을 통해 한 번 더 사유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거울 같은 글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인간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얼마나 닫혀있는 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그저 탁월하다고 밖에는 표현을 못하겠다. 고품격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박상준님의 평(책 뒤표지에 있는)이상의 무언가를 찾을 수 없었다. 굳이 주제를 말하라면 '인간이 여행을 하는 이유'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아님 말고) 억겁의 시간과 광속에 가까운 속도를 넘나들며 생명 그 자체를 노래한 {미래로 가는 사람들}의 결말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종의 기원
미래로 가는 사람들

룩스  일단 처음에 묻고 싶은 건, 이다님 글 주인공이, 우수한 유전자, 미래로 가는 사람들, 종의 기원 등등의 주인공이 왜 다 남자예요?

이다  그러네요. (사이) 음… 여자도 있어요.

룩스  상대적으로 별로 나오지 않는다는 거죠 뭐…^^
거울 필진들 중에는 선비님이나 진아님은 확실히 난 여자로 쓸 거야, 라는 그런 면이 보이는데요. 이다님 글은 안 보인다기보다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남자가 되어버려서 그게 좀 묘하긴 해요. 보편적인 존재로서 ‘인간’을 상정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남자가 더 쓰기 편하기 때문에 남자가 된 건지, 아니면 일부러 남자로 상정을 하신 건지…

진아  종의 기원에서 세실은 여자 아니에요?

   종의 기원에서 로봇들 성별의 구별이 없지 않아요?

룩스  다리에 이상한 거 달려 있는 놈이 있고, 가슴이 있는 로봇이 있잖아요.

이다  (다른 로봇들은) 성별은 없는데 네 자리 수 모델만 성별이 나뉘어져 있는데, 로봇들은 그 이유를 모르죠.

   그 로봇들이 형태는 다르더라도 어떤 남성 여성의 역할이라거나 사회적 지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잖아요.

이다  외모적인 차이죠. 걔네들이 보기에는…
음… 이야기에 따라 여자가 주인공이어야 할 이야기가 있고, 남자가 주인공이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우연히 남자가 많았던 거고. 만약에 남자가 주인공이 된다면 내가 온전하게 남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거기서 여성적인 게 나오면 그건 일종의 실패라고 생각해요. 남자라면 남자의 생각을 해야 하고, 여자라면 여자의 생각을 해야 하는 거고.

룩스  그럼 쓰신 글들은 대부분 남자여야 하는 글이라고 생각을 하신 건지.

이다  꼭 그런 건 아니었지만… (웃음) 그러게요.

진아  어떤 글은 주인공이 남자여야 하고, 어떤 글은 주인공이 여자여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이다  헉… 그건… 너무나…. ^^;;;

진아  아까 그런 이야기를 하셔서요. 궁금해서. ^^;;

이다  그래야 할 건 없었죠. ^^;;

명훈  이야기상 애를 낳아야 한다거나…

진아  그건 너무 생물학적이고…

룩스  그냥 별 생각 없이 하신 건지, 이 글은 남자여야 해, 라고 생각하신 건지.

이다  그냥 남자가 좋아요…

이 질문을 받은 날부터 이다는 왜 자신이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지 한동안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룩스  제가 SF를 별로 안 봐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건데, 이다님이 그 쪽으로 탁월하게 쓰시고, [누군가를 만났어]의 세 분 중에선 제일 그 쪽으로 가까우신 것 같아서…

진아  제일 정통 SF에 가까우신…

룩스  물리적인 세계관으로 설정을 하셨잖아요.

이다  물리적인 설정으로 간다는 게 어떤 의미신지…?

룩스  영혼들이라는 게 다 같이 한 몸이 되는데…

이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에서} 나중에 영혼 나타나는 거 말씀하시는 거죠?

룩스  확장이 되어서 무한한 시간으로 가는 건데…

이다  물리적인 설정이라는 걸 좀 더 자세히…

룩스  SF죠, 결국 말하자면. 합쳐질 수 있다는 걸 광속 때문인 걸로 설명을 하고, 광속에 가까워지는 거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하고, 우주론으로 어떤 걸 보여주려고 하고, 어떤 경이잖아요. 예를 들어서, 헤세를 좋아한다고 하셨…으니 감히 헤세로 예를 들어보자면, 싯타르타 같은 경우에도 어떤… 영들이 합치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건 물리적인 설정을 통한 게 아니죠. 비슷한 방향인 듯한 결론 혹은 경이가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가능한 건데, 물리적인 세계관을 설정해서 가능케 하는 방법을 택하신 거죠. 그 쪽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이다  SF를 좋아하니까 SF스러운 게 나오는 거죠. 제가 현실을 묘사하기에는, 그러니까 현실을 일부러 안 쓰는 게 아니라, 현실을 묘사하기엔 제가 현실에 대해서 아는 게 굉장히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상세계가 나오는 거고, 하지만 어느 정도 논리적인 설명은 저 자신을 위해 필요한 거죠. 그 가상세계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 뭐, 여전히 말도 안 되지만 현실성을 갖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해요.

룩스  에… 그러니까, 물리적인 설정을 써야만 할… 그러니까 그게 본인의 글에 제일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시느냐, 아니면 필연적으로 그럴 것이냐? 하는 것도 한번 여쭐게요. SF만이 줄 수 있는 경이감이 있기 때문에 SF를 본다고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다  꼭 그래야 되는 건 없는데요.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진아  저는 회색도시가 로봇이어야만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SF를 통해서만 가능한 경이감이 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회색도시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고요.

이다  헤르만 헤세도 SF로 분류할 수 있는 형식의 글을 많이 썼어요. SF가 현실을 비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가장 직설적으로 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해요. 아주 다른 세계를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세계를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거죠. 게르드의 [이갈리아의 딸들]처럼요. 헤세가 쓴 {내가 전쟁을 피하는 방법}이라는 단편에서는, 어떤 사람이 허가서 없이 산책했다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는데, 사형에 처하려면 돈을 내야 하고, 그 돈이 없어서 죽지도 못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가상적인 사회를 통해서 모순된 현실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죠.

룩스  조금 더 자세히…

이다  [멀리 가는 이야기]에 실린 글들은 사고의 흐름에 따라 쓴 거거든요. 그 사고의 흐름 사이에 있었던 것이 세계관의 전복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중간에 나오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그걸 계속 쓰겠다고 하는 건 아니에요. {미래로 가는 사람들}도 사고의 흐름을 따라 가다보니, 마지막엔 그런 식으로 결말을 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세상과 시간의 끝으로 갔던 거구요. 확산도 하고.(확산되었다는 건 주인공의 마지막 상태를 말합니다)

진아  저는 회색도시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느냐면요. SF냐 아니냐 장르를 떠나서, 그게 로봇이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제 멋대로 읽은 거지만,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본 따서 로봇을 만든 거고, 그 로봇이 자신의 모습을 본 따서 인간을 만든 거잖아요. 약간 역설적으로. 이를테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 따 인간을 만들었는데, 인간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본 따 신을 만든 거라는… 그 모순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건 로봇이라는 소재만이 가능했던 거라고 봐요.

이다  로봇이라는 말이 애초에 처음 나온 게 카렐 차뻭의 로봇이라는 연극 극본이었잖아요. 거기서 사회 노동자계층, 억압받는 사람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로봇이라는 걸 만들어낸 거잖아요. 문학 속의 로봇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약자, 불평등, 계층구조 등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로봇이 현실화가 되지 않은 현재에서는.

진아  그렇게는 생각 못해봤는데 재밌네요.

   터미네이터라거나…

이다  터미네이터는 기계공포 쪽에 가까운 것 같고요.

명훈  세계가 전복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쓰려고 로봇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을 차용하는 게 아닌 가 싶어요. 도전해 오는 적들을 만들고 그 적들을 힘으로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냉전 때 그런 거 많이 나왔고요.

룩스  이건 사소한 질문! 에키온의 연료는 왜 꽃이어야 해요? 그것도 빨간 색?

이다  왜 꽃이어야 할까요? (웃음) 일단 에키온은 생물로 설정을 했고, 생물이라면 무언가를 먹어야 할 거라고 생각을 했고요, 먹어야 한다면 탄수화물이나 식물 쪽이 좋을 거라고 생각을 했고, 그러면 품종개발을 할 수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했고요.

룩스  그럼 꼭 꽃이어야 할 과학적인 이유는 없는 거예요?

이다  과학적인 이유는 없죠. (웃음) 쌀이어도 됐죠. (웃음) 연료로 꽃을 키운다는 게 화면상 예뻐 보일 거 같아서.

진아  전 에키온의 연료가 꽃이라는 점이 좋았어요. 기계 문명과 꽃 그러니까 자연은 서로 되게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꽃이 역설적으로 연료가 된다는 거, 그러니까 우주선이라는 과학의 정점의 연료가, 우주를 여행하게 해주는 동력원이 꽃이라는 게, 되게 낭만적으로 느껴졌어요. 의도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이다  낭만적이군요. 그렇군요. (웃음)


▲ 이다님

룩스  미래로 가는 사람들 승에서 광대에게 모빌을 보여주면서 이게 네 공포의 원천이라고 하는데 혹시 그 모빌이 우리도 아는 물건이에요?

이다  아니요. 그게 우리의 세계였다면 악마 형상일 거고,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서운 것이었겠죠. 그것도 머리 속에 바로 들어오는 영상으로요.

   {종의 기원}에서도 그렇고, {미래로 가는 사람들}도 그렇고, 생명을 가진 무기물이 나오잖아요. 무기물(예를 들어, 로봇)에 인간처럼 생명이 깃들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다  생물학자들도 아직 생명의 정의를 정확히 내리지 못했어요.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와 닮은 걸 생명이라고 할 뿐이에요. 고대 사람들은 모든 걸 살아있다고 생각했어요. 돌, 흙, 지구, 공기 이런 것들도요. 우리는 과학적인 사고를 하다보니까 생명을 우리와 비슷한 거라고 한정을 지은 거예요. ({종의 기원}에서) 로봇도 마찬가지로 자기와 비슷한 걸 생명으로 한정 짓는 거죠. (생명의 정의를 한정짓는 건) 편협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돌은 살아있습니다, 여러분. (웃음)

진아  그런 사고의 전복을 의도해서 넣은 씬이라고 생각했어요. {종의 기원}에서 생명의 정의 부분을 읽으면서, 생명의 정의라는 게 얼마나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건지 보여주고 싶은 지 넣으신 거라고 생각했어요.

명훈  생명의 정의를 내리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생명체만이 할 수 있는, 생명체의 특성이 아닐까요.

전원  오…!

   원래 {종의 기원} 처음 발표하셨을 때 제목은 {회색 도시}였는데 그걸 [누군가를 만났어]에 실으면서 {종의 기원}으로 제목을 바꾸셨죠. 이유는 뭔가요?

이다  충동적으로요. (웃음)

진아  {종의 기원}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려요.

   {회색도시}보다 더 임팩트도 있고, 내용도 더 와닿고요.

진아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의도적으로 따오신 거예요?

이다  예.

룩스  생명에 대해서 사고하다가, 인간에게 있어서 로봇이 타자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논의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로봇이 생명이냐 아니냐보다도, 인간에게 로봇이 타자가 될 수 있을 지에 대해서요.

이다  인간에게 로봇이…?

룩스  타인이 될 수 있겠느냐는 거죠.

   인간에게 로봇이 어떠한 동등한 대상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세요?

명훈  자신을 인식하려면 타인을 봐야 나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게 있는데, 거기에 관련되어 하는 질문인가요? 나를 인식하려면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해야 그것이 나를 인식하게 된다는 거기서 나온 타자인가요?

룩스  몰라요. (귀여운 척)

진아  때릴까…;;;
인간이 로봇을 정말로 감정과 사고를 가진 존재로 인정/인식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이신가요?

룩스  말을 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 때, 사람이 하면 명제가 아니고 진술인데, 로봇이 같은 행동/말을 할 때 그것을 진술로 인정할 수 있느냐… 는 식으로도 얘기해볼 수 있을 거 같고. 로봇이 하면 늘 명제일 뿐이라고 여길 수가 있죠.

이다  정확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도 사람들이 그런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차를 우리 애마, 내 애인이라고 많이들 부르잖아요. 컴퓨터 보면서 오늘 고생했구나, 하기도 하고. 컴퓨터나 차도 그런데, 사람처럼 생긴 로봇에게 애정을 안 가질 수 있을까요. 살아있는 존재로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아  타자로 인식한다는 게, 로봇도 나를 타자로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으냐는 질문이에요?

명훈  공존하는 다른 존재로 볼 수 있느냐는….

이다  별 거 아닌 인형에도 그런 거 느끼는 사람 많다고 생각해요. 네비게이션 하고도 대화하는 사람들 있는데… 네비게이션이 “오른쪽으로 가세요.” 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명훈  타자 이야기는, 부연 설명을 해 드리면, 동양인들이 언제부터 자기를 동양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느냐면, 서양인이 나타난 걸 발견하고 난 후부터거든요. 쟤는 서양인이야, 그러니까 나는 동양인이야, 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 전 세계관에서는 동양인/서양인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을 그냥 인간이라고 지칭했기 때문에, 그 밖의 경계에서 오는 사람들은 야만인이라고 했어요. 서로. 그런데 서로 만난 이후부터 서로를 인간으로 인지하고, 그 후에 동양인/서양인이라고 인식을 하고 지칭을 하게 된 거죠. 그걸 로봇에게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거 아닌가요. 인간의 관점에서 로봇을 보면, 인간을 위에 두고 로봇을 아래에 두고 본다면, 로봇의 입장에서 로봇들이 인간을 아래로 놓게 보게 되는 건데, 대등하게 서로를 볼 수 있다고 하는 건지.

룩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이다  인간 자신의 자아라는 것도, 결국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기가 정말 존재하는지, 프로그래밍 된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철학적인 문제죠. 어찌 보면 자기라는 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룩스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기가 로봇을 생각할 때는 아래에 놓고 생각하게 되잖아요.

이다  인간끼리도 사실 다른 인종을 인간취급 안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잖아요.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

룩스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취급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취급을 안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다  토론이 되네요. ^^;;

(사이)

사회에 따라 도덕적으로, 그 사회의 기준이 로봇을 따뜻하게 대해줘라, 라는 도덕관이 존재하는 사회라고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진아  로봇을 따뜻하게 대해주라는 도덕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건, 로봇을 학대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잖아요. 아무도 학대 안하면 그런 도덕이 왜 필요하겠어요.

명훈  백인이 노예들에게 잘 대해주라고 말했을 때, 노예라는 등급 자체를 낮게 보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그 단계를 넘어서야 참정권도 줄 수 있죠. 얘들한테도 그런 게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다른 형태의 존재인데 우리와 공존할 수 있는 자아를 가진 존재로…

이다  가능하다고 이야기해야 하나?

진아  이다님의 생각을 이야기하세요. ^^

명훈  글에서는 가능한 것처럼 쓰셨어요.

이다  로봇의 반응이 인간과 똑같다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진아  이렇게 나가면 인간의 반응과 똑같다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웃음)

   그만해요. 머리가 아파지고 있어요. ^^;;;

진아  재밌어지고 있는데…

이다  ‘잊어버린다’는 문제도 굉장히 고민했어요. {종의 기원}에 나온 애들이 잊어버린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로봇이 잊어버리는 걸 쓸까말까 고민을 하다가, 잊어버려야 사람답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이 정말로 사람 같은 로봇을 만든다면 잊어버리는 기능을 넣었을 것이다, 라고.

진아  컴퓨터도 오래된 파일 삭제하실래요? 안 쓰는 바탕화면 정리하실래요? 하고 물어보잖아요. 그걸 만약에 조금 능동적으로 한다면 잊어버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요.

이다  생물이 잊어버리는 이유가, 정보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잊어버리는 기능을 갖는 쪽으로 진화한 거거든요. 정보하나에 달려있는 정보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처리속도를 위해서는 필요 없는 정보를 잊어버려야만 해요. 컴퓨터는 단위로 기억하기 때문에 활용을 하지 못하죠. 그렇기 때문에 또 잊지 않고 많은 양을 기억할 수 있는 거고. 사람은 단위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관계랑 계보로 기억해요.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처음 보고 무심결에 기승전결인줄 알았는데, 보니까 기승전합이더라구요. 어째서 기승전합이라 하셨나요?

이다  기승전합도 있어요. 같은 말이에요.

   … 그랬던 거예요?

진아  … 그랬던 거예요?

이다  네이버 검색해보세요.

진아  명훈님 알고 계셨삼?

명훈  저도 처음 알았어요.

진아  룩스님은요? (… 집요하다.;;)

룩스  저는 그냥 합쳐지니까 합이구나… 라고 생각… ^^;;

명훈  저도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이다  기승전합있습니다, 여러분. (웃음)

진아  감사합니다. ^^;;

   내용상 기승전결보다 기승전합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을 했는데… 기승전합이 있다는 거 처음 들었어요.

이다  네이버 지식인을 검색해보세요, 여러분. (웃음)

진아  네이버 지식인 못 믿을 거 많다던데.

이다  맞습니다. 반은 믿지 마세요. 이의제기를 보세요. (웃음)

화제 전환

   성하를 주인공으로 장편을 써주세요!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이다  끝난 이야기라서… 더 쓸 게 있을 지…

   중간중간 다른 에피소드가 있으면 재밌을 것 같아요.

룩스  새로운 이야기로 장편을 쓰세요.

진아  이다님 글은 편견에 대한 저항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우수한 유전자도 보면 도시적이고 깔끔하게 사는 사람들이 농촌을 보면서 쟤네들이 되게 못 사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면 반대고, 종의 기원에서도,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가 진화의 정점에 있는 신체잖아요. 그런데 종의 기원에서는 그 가장 인간형이 가장 나약하고, 가장 안 좋은 모습으로 그려지고, 땅 밑으로 도, 밑으로 간다는 게 위로 올라간다는 역설 같은 거.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안 그랬지만…

진아  미래로 가는 사람들도 그랬죠. 미래로 가는 사람들도 설정을 보면 세계의 끝으로 간다는 게 반대로 한 바퀴 돌아서 현재로 돌아온다는 걸 의미한다거나, 우리가 종교의식, 절차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도 누군가가 흘려놓은 별 것 아닌 것일 지도 모르는 거라는 거나, 그런 면이 굉장히 많이 보여서 좋아요.

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멀리 가는 이야기는 생각의 흐름에 따라 쓴 거라서, 우수한 유전자와 종의 기원 사이에 들어간 주제가 편견이고요, 종의기원 끝에 떠오른 생각은 신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래서 {미래로 가는 사람들}에 그 주제가 이어진 거고, 앞에 작품(촉각의 경험, 다섯 번째 감각)은 또 감각에 대한 거였고요.

진아  전 {촉각의 경험}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얘는 아무 것도 못 느낄 거야, 라고 생각했던 모든 사람의 생각을 깨준 거잖아요.

이다  {우수한 유전자}랑 {종의 기원}은 편견에 대해서 쓴 게 맞는데… 그러다 보니까 그 느낌이 강한 거고, 다른 작품은 그다지 의식하지는 않았어요.

진아  저는 사고의 전복이나,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거, 편견을 깨는 거, 그런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예전엔 그런 글을 많이 쓰고 싶었어요.

룩스  진아님 글은 편견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걸 찌질찌질 안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여줘서 좋아해요.

진아  명훈님이랑 이다님 저랑 지향점이 달라서 재밌어요.

명훈  이다님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데요,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세상에 대한 정보 같은 거요. 성하가 여행을 하다가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는데, 이 시대의 우주관은 이렇구나 하고 그 사람의 머릿속에 든 우주를 이해하잖아요. 절대적인 우주가 아니라. 이다님 글에서는 독자가 이 글의 세계는 이런 거야 하고 짐작할 수 있는 힌트들을 던져 주시고는, 그 힌트들이 다 적용이 되지만 사실은 독자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반전이 나오고 거기에서 카타르시스가 나오는 것 같아요.
거기에 비하면 진아님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속에서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는 자아의 이야기를 하시는데, 자아의 이야기를 판타지적인 해법으로 푼다고 할까요. 판타지적으로 푼다는 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아니라 뭔가 규칙이 하나씩 바뀐 세계 속에 놓여 있는 자아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의미인데요, 실험할 때도 실험군 대조군 두 가지를 놓고 조건을 딱 하나만 바꿔 놓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관찰을 하잖아요. 판타지로 이야기를 한다는 건 조건을 하나 바꿔놓은 상태에서 사람을 집어놓고, 얘는 이렇게 되더라, 하고 결과를 얻는, 그런 방법으로 자아의 이야기를 그려내시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그림 뽀

――― 박애진
 * 관계를 차갑고 날카로운 얼음 비수로 도려내는 듯 했다. 관계를 도려내고 난 속살의 빛깔 같은 글들이었다. 책장을 덮고 평소의 습관대로 책의 제목과 저자 등의 서지정보와 책 입수 경로, 읽은 기간을 노트에 옮겨 적는 동안 계속해서 찡한 아픔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신체의 조합}은 세계가 부서지는 듯한 얼얼함이 인상적이었다. 분신과 같이 여기던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잃어버릴 수밖에 없음을, 그로 인한 성장을 그린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 양성이 아닌 삼성의 관계를 조망해봄으로 인간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완전한 결합}. 처절하리만치 섬짓한 소유욕이 투영된 {누가 나의 오리 벤쟈민 프랑크프루트를 죽였나}.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선물}이었다. 큰 기교를 부리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조명해나가는 모습이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여느 소설들과 달랐다. 미세한 두통이 가슴으로부터 올라와 머리를 울렸다.


선물
신체의 조합
누가 나의 오리 벤쟈민 프랑크프루트를 죽였나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
완전한 결합


   진아님 질문은 엉뚱한 것만 써놨어요.

진아  (냉큼 원고를 뺏어다 읽는다.) 상관없는 소리 띠지에 실린 사진보다 책 안에 실린 사진이 훨씬 예쁘게 나왔어요. 물론 실물이 더 예쁘지만, 괄호 열고 쓰잘떼기 없는 소리로 시작해서 아부로 끝난다, 괄호 닫고. (웃음)

이다  그런 말 정말 써있어요?

진아  네. 정말 써 있어요. 저도 알아요. 실물이 좀 더 많이 예쁘죠. 훗- (머리를 뒤로 넘긴다.) 미모가 어디 가겠어요.

   근데 왜 고양이가 등장하는 글이 하나도 없어요? 하나쯤 있을 법 한데, 하나도 없더라구요.

진아  안 그래도 무한슬픔님 때문에 “가릉이가 가릉가릉”으로 한 편 쓰려고요. 그거 내 거야! (웃음)

   제가 준비한 질문들이 다 이래요. (원고를 보며) 선물은 영화하면 재밌을 것 같아요, 이런 거. 이건 질문이 아니야!(절규)

진아  감사합니다. ^^

   (원고를 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글을 많이 쓰시는데, 평소에 그런 생각을 많이 하십니까. (고개를 들고 멋적게 웃으며) 이런 것들. ^^; 이게 다예요.


▲ 진아

룩스  [누군가를 만났어]에 실린 진아님 글은, {선물}과 다른 네 편이 들어가 있는데, 선물은 다른 네 편과 시기적으로 떨어진 최근 글이고 그 전 글들에서 {… 네므}는 칼로 난도질해서 피가 질질 나고, {치누아}(가연 단편선 수록작)는 불쌍한 애 제물로 매달고, 오리도 총 쏘고 강간하고, 피도 나고, {신체의 조합}이 젤 잔인하지, 막 신체 뜯어 발기고, 핏국물이 흐르고… 왜 그래요, 사람이?

진아  (열심히 듣다가) 아, 그게 질문이에요? ^^;;;

이다  진짜 그게 질문이에요? “왜 그래요, 사람이?” 가? ^^;;

진아  아, 답변할게요. 저는 친절하고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에요. 저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

   (이다님을 보며) 어떤가요?

이다  (다소곳하게) 네, 맞습니다.

명훈  글 안에서 그렇게 쓰는 걸 인식하고 쓰시는지를 질문하신 거 아닌가요?

룩스  그러니까 그렇게 쓰다가 {선물} 이후에 쓰신 {조화}나 {무대}나. 이제 그렇게 안 쓰잖아요. 뭐가 변했어요? 노골적으로 피가 튀길 만큼, 그런 걸 보여줘야 하는 무언가가 없어진 것 같아요.

이다  제 생각에는… 더욱 더 잔인해지신 것 같아요. 좀 더 노골적으로 잔인해지신 것 같아요.

룩스  그렇진 않은데…

이다  신체의 잔인성이라는 건 피상적이거든요. 내성의 잔인성이라는 게 더욱 더 본질적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거든요. 신체의 조합에서 신체가 잘리고, 오리에서 오리 죽이는 거, 강간하는 거 그건 육체적인 잔인성이잖아요. 육체적인 잔인성은 피상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내성의 잔인성으로 들어가면, 그게 좀 더 노골적으로 들어가는 거라서 더 잔인하게 느껴져요.

룩스  음, 더 깊이 들어갔다고는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므로 독자가 이쪽이 더 잔인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진아님이 ‘잔인하다’라고 말하고 싶어하는가의 이야기예요. 작자가 자극적인 걸 보여주고 싶어 할 때 사실 신체상해를 많이 보여줘요. 이건 잔인한 거다! 라고 확실하게 말해야만 할 때 아무래도 그런 피칠갑을 한 걸 보여줘요. 예컨대 자해하는 사람들이 나는 이만큼 아프다고 말하고 싶어서 자해를 한다고. 꼭 물리적으로 그어버린다고. 그건 내가 아프다는 걸 노골적으로 말하고 자신에게라도 각인을 시켜야 하기 때문에. 신체의 조합 같은 건, 자극적이려고 노력하는 글을 쓰셨다고 생각해요. 그것 - 말하고자 하는 주제 - 가 이렇게 잔인하고 아픈 거야, 라고 보여주어야만 했다고 생각해요. 이젠 그런 말을 해서 드러내서 보여줄 필요는 없이, 이미 다 인정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그래도 괜찮은, 그런 상태로 들어갔다고 생각해서.

이다  처절함이라고 해야 하나. 잔인성이라는 표현은 그러고 보니 어울리지 않네요. 고통, 슬픔이라고 하는 게 좋겠어요.

명훈  저는 운현궁의 봄이라거나 일제시대 그 때 쯤 역사소설을 보면, 역모로 몰려가지고 고문당하고 고통 받는 선비들 그런 이야기 나올 때 항상 느꼈던 건, 세상과 몸과 정신의 관계에서 세상의 불합리를 몸의 고통으로 받아내는 걸 보여주면서 작가가 그리려고 한 것은, 선비들의 정신이 그만큼 꼿꼿했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거든요.
진아님 글들 같은 경우, 예전 글들은 세계가 고통스러운 곳인데, 세계가 주는 고통을 받는 건 몸이죠. 신체가 받고 있는데, 그때 정신들은 굉장히 말짱하다고 해야 하나, 신체의 조합 같은 걸 보면 되게 말짱하잖아요. 건전한 정신이라고 해야 하나, 그 정도로 해체되는 신체인데도 오히려 건전한 정신이라면, 최근 글들은 고통을 몸이 받지 않고, 정신에서 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몸을 통해 내 자아를 향해 밀려오는 걸 내가 받고만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색깔이 또 있어요. 진아님 글에는 나의 색깔이 있어서 이게 다시 몸을 거쳐 밖으로 나가는데, 세계가 나한테 들어오는 게 있고, 내가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하는 게 있는데, 그게 부딪치는 순간에 거기서 자꾸 아프고, 막 피가 나오려 그러고, 그렇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관점에서 저도 진아님 글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고, 또 세계는 이런데, 그 세계도 뭔가, 보통 세계와는 다른 하나의 설정이 있고, 나 자체도 색깔이 있어요. 보통 에스에프 같은 거 보면 나는 평범한 애를 넣어놓고, 세상은 특이하게 가는데, 진아님 글은 색깔이 있는 내가 그 세계와 만난다고 해야 하나. 특이한 세계와 나의 색깔(여기에서의 색깔은 미학적인 의미에서의 색깔)이 만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무대}에서는 뭔가, 하나의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게, 부딪치는 걸 풀어낼 수 있는 제 3자인 서술자가 생겼다고 해야 하나, 이건 이거야, 라고 쓸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하나의 경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다음 글도 쭉 쭉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

룩스  (진아를 보며) 지금 내 글이 그런 가보다, 하고 듣고 있죠.

(진아는 쓰러지고 일동 폭소)

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

   이건 답변을 할 게 아닌데요. ^^;;

명훈  제가 한 말은 질문이 아니에요. ^^

이다  진아님과 명훈님의 글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굉장히 다른 색깔을 가진 글을 쓰시는데도 불구하고 두 분 다 근원적으로 굉장히 따뜻해요. 그래서 두 분 글을 좋아하기도 하는데, 피가 난자하는 이야기를 하든, 전쟁이 나는 이야기를 하든, 세계 멸망 이야기를 하든, 정말 근원적인 따뜻함이 있어요.

룩스  정말이요? 전 명훈님 글은 따뜻하다고 느꼈는데 진아님 글은 아니에요.

이다  못 느꼈어요? 좀 더 파 보세요. (웃음)

룩스  명훈님 글은 분명히 언제나 따뜻함이 있는데 진아님 글은, 뭐랄까, 최악은 피했어, 같은…;

명훈  진아님 글은 아직 세상이랑 싸우고 있어요. 싸움이 아직 안 끝났어요. 그래서 언제까지 성장소설을 쓸 거냐고 전에 물었는데…

진아  (민망함에 머리를 숙이고)

명훈  싸움은 아직 안 끝났어요. 근데 저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자작인터뷰에도 썼지만, 진아님 글에 대한 리뷰들을 보면, 뭔가 읽어보면 뭔가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뭔지 그 말을 집어낸 사람들이 적어서 아쉬워요. 권님 질문도 그렇고요.

   그게 그렇더라구요.;;

   마지막 질문인데요. 무엇보다 책이 잘 팔려서 2쇄, 3쇄 마구마구 찍기를 기원하면서 끝으로 세 분의 신작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독자분들에게 한마디씩 해주세요.

명훈  기다리시나요? ^^;

   아, 너무 상투적인 마무리 질문이라서… 민망해요. ^^:;

명훈  이런 것 필요해요. ^^

진아  곧 신작을 다듬어 올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이다  작가의 발견 3탄도 거울 필진을 중심으로 나오기를… ^^

(다들 폭소)

명훈  신작 곧 나갑니다. 기다려주세요. ^^


 인생이 만남이고, 이야기가 만남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났어의 이야기들은 왠지 특별하게 느껴진아다. 만난 대상이 외계에서 보내온 그 무엇이기에, 새롭게 탄생된 생명이기에, 우리들의 곁에 있을 것만 같은 뱀파이어이기에 특별한 것이 아니다. 어째서 특별하게 느껴지는 지 직접 읽어보기 전에는 말로 전할 수 없을 것 같다. 세 명의 작가 모두 아직 젊기에 보여 진 가능성 보다 보여 지지 않은 가능성이 더 많을 것이다. 아직 보여 지지 않은 가능성을, 그들의 새 소설을 기다리게 됐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은가? 그렇게, 오늘, 누군가를 만났다.
댓글 3
  • No Profile
    날개 07.04.01 11:39 댓글 수정 삭제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좌담회였습니다. 'ㅁ' 다음 작품들 기다리겠습니다. :D
  • No Profile
    Jay 07.04.03 15:46 댓글 수정 삭제
    오오ㅡ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더 이상 여쭤볼 게 없다 싶을 만큼 자세한 인터뷰네요. 작가분들의 생각을 직접 들을 기회를 주셔서 고마워요-
  • No Profile
    세뇰 07.04.14 21:12 댓글 수정 삭제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수고해주신 다섯 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