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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및 진행 : 권, 룩스
사진 : 권, 진아

 2007년 1월, 행복한 책읽기의 작가의 발견 선집 2권 [누군가를 만났어](배명훈 외, 행복한책읽기, 2007년 1월)가 출간되었다. 작가의 발견 선집은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외국 작가나 국내 신인 작가를 발굴한다는 야심찬 기획으로 1권은 아토다 다카시의 [시소 게임](아토다 다카시, 행복한책읽기, 2006년 10월)이었고, 2권은 배명훈, 김보영, 박애진 3인의 중단편을 모은 [누군가를 만났어]이다.

 배명훈은 스마트 D로 2005년 과학기술 창작문예 단편부문을 수상했다. 과학소설 전문 무크 [Happy SF] 2호에 {스윙 바이}를, [과학기술 창작문예 수상작품집] 3호에 {모}를 수록했다. 거울에는 30호부터 시간의 잔상 필진으로 합류해 거의 매달 1~2편의 단편들을 발표해왔으며 [변신! 2006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에 {연애편지}와 {다이어트}를, [혈중환상농도 13%]에 {냉동인간과의 인터뷰}를 실은 바 있다. [에스콰이어] 2007년 1월호 “The newest:2007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중문화 예술의 첨병 14인”에 선정되었다.

 김보영은 2004년 {촉각의 경험}으로 제1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중편부문을 수상했다. 2005년 북토피아에서 전자책 [멀리 가는 이야기]를 출간했으며, 2006년 웹진 ‘크로스로드’에 {땅 밑에}를, [Happy SF]2호에 {진화 신화}를, [과학기술 창작문예 수상작품집] 3호에 {우수한 유전자}를 수록했다. 거울에는 19호부터 시간의 잔상 필진으로 참여했으며, [변신! 2006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에 {몽중몽}을 실었다.

 박애진은 2001년 이매진 단편 공모전에서 {왜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지?}로 판타지 부문을 수상했다. 2004년 북토피아에서 전자책으로 [아도니스]를, 같은 곳에서 개인 단편선 [신체의 조합]을 출간했다. 2003년 진지한 작가 정신과 장르 문학의 조화를 꿈꾸며 ‘환상문학웹진 거울(http://mirror.pe.kr)’을 창간, 편집장이자 작가로 참여하고 있다. [2004 환상문학 웹진 거울 중단편선]을 시작으로 거울 대표 중단편선을 기획 발간하고 있으며, 2004년 작품 모음집인 [가연 단편선 - 신체의 조합]을 출간했다.

 3월 18일 일요일 화창한 오후에, 배명훈(이후 명훈), ida(김보영, 이후 이다), 진아(박애진, 이후 진아)와 권, 룩스가 신촌에 있는 한 카페에 모였다. 오늘 만남의 목적은 배명훈, 김보영, 박애진의 인터뷰였다. 질문 및 진행은 권과 룩스가 했다.




먼저 세 사람에게 공통 질문을 했다.

   세 분 모두 이미 거울에서 인터뷰한 경험이 있지요? 룩스님도 인터뷰해서 저만 빼고 다 있네요. 그리고 인터뷰어는 2명, 인터뷰이는 3명, 왠지 인터뷰어가 불리하게 느껴지는 걸요. (웃음)
시장에 출간되는 SF의 대부분이 번역 소설이기는 하지만 그나마도 올 들어 나온 신간은 [누군가를 만났어]뿐이네요.

진아  이 책 ――― 누군가를 만났어 ――― 나온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요? 2월에 나왔지 않나요?

   1월 말에 나왔어요.

명훈  날짜는 1월 말로 되어 있고, 깔린 건 2월이에요.

   아무튼 [누군가를 만났어]이후로는 신간이 하나도 없어요. 뭔가 하나 나온 게 있기는 한데 이미 나왔던 책 재간이에요. 왜 신간이 안 나오는 건지. 우울해요.

여기서, 권님의 멘트가 사실 대본처럼 준비해 왔던 것임이 밝혀졌다.

진아  아, 대본이 있었구나. 사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되게 고민하고 있었어요.

모두 웃음

이다  이거 녹음되고 있는 거죠, 지금?;;

   (머뭇거리면서) 이것저것 준비하긴 했는데

명훈  대본대로 하세요.

모두 웃음

모두 권님 파이팅!!!

   아아 민망해요. ㅠ.ㅠ

진아  전 이걸 한두 번 해본 줄 아세요? 빨리 하세요. (웃음)

거울 작가 인터뷰는 대부분 진아가 질문과 진행을 맡아서 해 왔다.

   (대본을 보고 말한다.) 일단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드러나는 독자의 편이 아주 좋더라구요. 알라딘에 올라온 독자서평들은 모두 별 다섯 개. 심지어 별 네 개 조차 없어요. 기분이 어떠세요?

이다  다 아는 사람이어서가 아닐까요? 다 눈에 익은 아이디… (웃음)

진아  그것보다 저는 행복한 책읽기(이하 행책)에서 무크지2호를 상품으로 걸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요.(웃음)

이다  그렇죠. 다섯 명 준다고 했는데 다섯 개에서 딱 끝났잖아요. 더 이상 올릴 필요가 없는 거죠. (웃음)

   그래도 나쁘다는 평은 없었어요. 그런 걸 보면 기분이 좋지 않나요?

명훈  (머뭇머뭇) 기분은 좋죠.
기분은 좋아도… 뭔가… 공산당 같다는… (웃음) 밀어주려고 쓴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고. 단점은 알고 있는데…

진아  (명훈님이 머뭇거리자 바로 묻는다.) (단점이) 뭔데요?

명훈  좀 야하구요.

모두 웃음

명훈  (마이크에 가까이 입술을 대더니 진지하게) 원래 그럴 생각 없었거든요, 저.
     저는 예술을 위해서 그냥 그렇게 한 거예요.


이다  오, 이런 대본 멘트

명훈  (계속 교과서 모드) 예술을 위해서라면 벗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벗는다는 게 아니라 캐릭터들을 벗길 수 있습니다.


진아  예술을 위해서라면 벗길 수 있다는 말? 그게 더 야한 거 아니에요?

명훈  (교과서 톤으로) 표현의 한계는 어디까지 인가요?

다들 정신없이 웃느라 잠시 인터뷰가 중단되었다.

   이번에 과학기술 창작 문예가 없어진다고 하더라구요.

이다  공식적인 발표는 없던데요.

   없어진다는 신문 기사를 봤어요.

진아  안 열면 그만인지… 부정적인 기사를 일부러 내보낼 것 까진 없으니 그럴 지도요.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든다는 거잖아요. 그런 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다  이게(과학기술 창작문예) 없어지면 다른 게 생기지 않을까요. 장르 문학 공모전이라는 게 워낙 생겨났다 사라지고, 생겨났다 사라지니까…

   장르문학 공모전으로 하나의 전통이 될 것처럼 하다가 없어지니까 그게 아쉬워요.

진아  3회 공모전은 특히, 당선작 작품집을 낼 때 3회 당선자들 작품만이 아니라 지난 수상자의 신작을 실었다는 게 좋았는데, 그래서 다음번에는 더 멋진 게 나오겠구나, 기대하게 된 순간에 끝나서 그게 아쉽기는 한데… 행책에서도 무크지를 또 준비하고 있고, 판타스틱도 창간 준비 중이고 하니까…

   월간지에 대해서도 하실 말씀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명훈  두고 봐야 아는 거겠죠. 어떤 컨텐츠들이 들어갈지도 봐야하고. 과학기술 창작문예는 등용문의 의미가 있었다면, 월간지는 아예 이름 없는 신인을 등용시키는 역할은 힘들지 않을까요.

   잡지 자체에서 신인을 찾기는 힘들겠죠.

명훈  처음부터 신인을 찾긴 힘들겠죠. 일단은 유지가 관건이고. 좀 지나면서 잘 되어야 신인도 찾는 거고…

진아  사실 과학소설 작가 중에… 듀나 씨 외에 신인이 아니라고 말할 만한 사람이 있나요?  듀나 씨 외에는 SF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도 없고…
레디앙 인터뷰를 보니까 이영도 씨나 만화가 중에서 기성 작가를 끌어들이던데…

   일단 소설 쪽에서는 검증된 사람만 끌어들이는 것 같아요.

명훈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선에서 모집하는 것 같아요.

   잘 팔리고 자리가 잡혀야…

이다  박상준 씨도 계속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셨으니까, 신인발굴은 인색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근데 판타스틱이 망하면 SF계가 몰락할 지도 모른다는 그런 위기론이 좀 있는데, 너무 그렇게 가는 것도 안 좋은 것 같아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죠.

진아  글쎄요. SF를 정식 계약하고 시리즈로 기획해 출간했던 첫 시도가 시공사의 그리핀 북스라고 알고 있는데, 많이 팔리진 않았다고 들었거든요. 그게 잘 안 팔렸다고 SF 계에 위기가 찾아왔다거나 그런 건 아니잖아요.

이다  더 이상 몰락할 곳이 없기 때문에… (웃음)

   여기서 더 바닥으로 내려가면 고사하는 거죠.

명훈  뭐까지 무너져야 무너지는 거죠?

이다  아예 쓰는 사람이 없어져야 무너지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진아  읽는 사람이 없어져야 아닐까요? 쓰는 사람은 지금도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아예 번역 자체도 잘 안 되고 그래야?

이다  읽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은데요, 뭐.

명훈  SF가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인식이 퍼져야? (망하는 걸까요?)

진아  도덕적으로 나쁜 거 많이 팔리잖아요. (천연덕)

명훈  아 맞다

폭소

진아  다들 나빠나빠 그러면서 보는 거 있잖아요. (웃음)

   음… 일단 넘어가서 (대본을 확인하며) 고양이 좋아하세요?

진아  와, 되게 열심히 준비하셨군요.

   아니 그냥… ^^:;

명훈  저는 그냥 그래요.

이다  저는 애완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어서…

   저는 키울 여건이 안 되서…

이다  왜 여건이 안 되시는데요?

   아, 저는 아파트에 사는데다가…. 헉, 근데 왜 제가 대답하고 있는 거죠?

진아  자아,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마이크 의식하지 마시고 편하고 자연스럽게…

명훈  처음엔 다 그래요.

일동 폭소


▲ 열심히 대본을 준비해 오신 권님

잠시 다이어트에 대한 잡담이 오갔다.

   다이어트 자꾸 하다보면 우주로 날아가게 될 지도 몰라요.

이다  외계인이 찾아와서 데려갈 지도 몰라요.

   몸속에 갇혀 있던 외계인이 나타날 지도 몰라요.

진아  아니죠. 외계인이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이어트를 하는 거죠.

이다  안에 있는 외계인을 말려 죽이는 거군요.

진아  전에 S님이랑 이야기하다가… 다이어트는 성욕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밤에 뭐뭐뭐뭐가 먹고 싶어요, 근데 살찔까봐 못 먹겠어요. 그랬더니, 선비님께서 “그냥 드세요. 다이어트는 성욕이고, 성욕이나 식욕이나.” 하시더라고요. 왜 그러느냐면 다이어트를 한다는 건 예쁜 몸매를 갖고 싶다는 거고, 그건 누군가를 나에게 반하게 하고 싶다거나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성욕이라고… 성욕이나 식욕이나…

룩스  글쎄요. 다이어트는 이제 식욕에 가까울 수도 있죠. 살이 빠져야 취직이 잘 되잖아요?

이다  살이 찌는 것은 인간관계를 거부하고 싶은 무의식에서 나온다는 이론도 있어요.

명훈  {다이어트}에서도 걔가 좌절을 겪은 다음에 살이 찌는 거거든요. 살이 찐 걸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아, 얘는 인생을 포기했구나, 하는, 그런 식의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진아  다음 질문은 뭐예요? (대본을 들여다보며)

   책에 실린 글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글을 꼽으신다면요? 책에 배명훈님이 제일 앞에 있어서 그런지 명훈님에게 계속 먼저 물어보게 되네요.

명훈  저는 임대전투기가 제일 좋아요.

이다  왜요?

명훈  왤까요? 제일 재미있게 쓴 글 같아요. 쓰면서도 재밌었고, 읽는 사람들도 재밌게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깊이 있는 이야긴지 아닌지, 그런 걸 떠나서 리액션이 즉각적으로 와서요.

   이다님은 여쭤보기가 좀… 두 편이라…

진아  미래로 가는 사람들을 네 편으로 나눠요. 종의 기원과 기승전합 중 고르신다면?

이다  제가 미래로 가는 사람들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래서 공개 안하고 숨기고 그랬었는데.

   지난 인터뷰 보니까 좋아하는 글이라고 하셨던데요.

이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데, 남들 눈에는 이상한 글로 보일 거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왜 그러세요. 저는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봤는걸요.

이다  출판사에서 마음에 들어 하기에 그런가보다, 하고 실었거든요. 독자가 무얼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명훈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배명훈님이 {누군가를 만났어}에서 제일 앞에 들어가신 이유는… 코드가… (머뭇)

진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코드라서? (웃음)

   에로에로한 코드가 제일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이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욕구 중 하나니…

진아  그 여자를 생각해서 지구에는 안 팔겠다니, 뭐야, 이건, 뭐, 이런 게 다 있어!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란 말이냐! (웃음)

   그럼 뭐해요. 이미 (지구에) 다 들어와 있는데…

진아  그건 남자가 찍은 것만이지, 이 여자랑 찍은 건 아니잖아요.

이다  아주 비싸게 팔아주는 것으로,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야, 하는…

명훈  그런데 그 남자의 생각으로는, 이 여자가 마음먹고 데뷔하려고 하면, 전 우주적인 스타가 될 수 있는 건데 이 여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니까 아직은 제의를 안 한 상태죠.

   예,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죠.

이다  나름대로는 해피 엔딩…

   진아님은요?

진아  전 선물이요.

룩스  이유는요?

진아  가장 최근에 쓴 거라서요.

   그거 쓴 이후부터 글빨이 사셨잖아요.

진아  어, 아닌데요. 선물 쓰고 나서도 한 1년은 제대로 된 걸 못 썼어요. 최근 들어서야 몇 편 쓴 거죠.

이다  (선물) 발표는 좀 늦게 하신 거죠?

진아  아뇨. 선물은 쓰고 나서 거울에 바로 올렸어요. 암튼, 그나마 여기 있는 글 중에서 제일 최근 글… ^^;;

   그 이후 쓴 것들은 거울에 올리신 게 없죠?

진아  예, 아직 거울에 업데이트 하지는 않았어요.

   거울에 원고가 없을 때를 대비한 비축분인가요?

진아  아, 그건 아니구요. 아직 조금씩 다듬고 있어서요. 2007에는 반드시 작품을 실을 거기 때문에 그(2007 마감) 전에는 반드시 거울에 올릴 거예요. 2006에 작품을 못 실은 게 너무 아쉬워서요. 한 해 동안 쓴 게 선물 밖에 없었거든요.

명훈  뭐가 제일 애착이 가느냐고 물으면… 깨물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는…

진아  하지만 더 아프고 덜 아픈 손가락은 있죠. 언젠가 설문조사를 하나 봤는데, 부모님이 우리 형제들을 편애하는 것 같다라는 질문에 60퍼센트던가가 그렇다, 라고 답했어요. 그리고 부모에게 솔직히 자식들 중 더 예쁜 자식이 있다, 라는 말에 또 60퍼센트 정도가 그렇다, 라고 답했고요. 만약에 부모님이 편애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사실일 거예요. (웃음)

명훈  하지만 깨물고 싶지는 않아요.

진아  뭐, 일부러 깨물 것 까지야. ^^;;




룩스님의 질문으로 넘어갔다.

룩스  선작에 만족하세요? 어떤 의도로 뽑으신 건지…

명훈  저는 일단 어디 안 묶이고, 어디 인쇄 안 된 글 중에서 마음에 드는 글 뽑았어요. 아무래도 행책에서 제의를 받은 거라서 처음에는 되도록 SF로 맞추려고도 하니까 또 제약이 오고. 그렇게 하다보니 고를 글이 많지 않더라구요.

이다  저도 뽑을 게 없었어요. 남은 것도, 분량이 되는 것도 없어서… 출판사에서 되게 고민을 많이 했어요. (편집) 들어가기 하루 전 날까지 고민을 했으니까요. 제가 또 대부분 중편이다 보니까요. 그래서 나중에는 겉으로 보기에 다섯 개로 보이는 걸로 하자, 가 된 거죠.

명훈  조삼모사라고… (웃음)

룩스  순서는 어떤 의도였는지요? 종의 기원이랑 미래로 가는 사람들의 순서는 나름대로 이해를 했는데… 긴 걸 뒤로 뺀 거니까… 다른 순서는 어떻게 된 건지요.

진아  아, 작품 순서는 출판사에서 정했어요.

   선작은 출판사에서 다 한 건 아니고요?

이다  예, 선작은 작가의 뜻에 많이 따랐어요.

명훈  저희가 고르긴 했는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고를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었어요.

이다  사장님이 좋아하는 순서였을 지도… (웃음)

진아  저도… 그다지 작품을 고를 선택의 여지가 많지는 않았어요.

룩스  저는 선물과 다른 네 편의 글은 진아님에게 있어서 같은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다섯 작품을 고른 게 특별한 이유가 있는 지 해서요.

진아  행책에서 아도니스는 너무 판타지 같고 - 현실과 접점이 약하고 - 심연은 너무 판타지성, 장르성이 없어서 빠지고, 그래서 현실하고도 맞닿아있는 환상소설이라는 의미로 그 다섯 편이 골라진 거 같아요. 거기 실린 글은 다 제가 좋아하는 글이고… 단지, {완전한 결합}이나 {… 네므}는 좀 오래 전에 쓴 글이라… 제가 개인지를 냈을 때 의도가, 여기까지는 내 지나간 글이야, 이러고 묶고 치우려고 한 거거든요. 근데 정식 출간 제의가 들어왔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긁적) 망설이긴 했지만 기쁘게 넣었습니다.


▲ 룩스님

룩스  글을 쓰실 때 특정한 독자를 생각하시는지… 연령대라거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거나…

명훈  쓸 때 마다 조금씩 다르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는… 글쎄요. 이웃집 신화 같은 건, 거울에 들어와서 얼마 안 되서 쓴 건데, 그 때 쯤에, 처음에 SF를 써서 공모전에 들어오니까, 계속 듣는 이야기가 장르 이야기, 여기까지는 이 장르, 저기까지는 저 장르,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정리한 거예요. 장르 독자들이 읽었을 때 그 함정에 빠지게끔 썼다고 해야 할까요. 여기까지 읽으면 호러로, 여기까지 읽으면 판타지로 보일 수 있게 연구하면서 쓰긴 했어요. 임대전투기 같은 것도, 그(이웃집 신화) 이전에 쓴 건데도 그 의도는 있어요. 두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가는 거잖아요. SF 이야기랑 SF가 아니게 풀어갈 수 있는 이야기. 이 쪽으로 읽는 사람, 이런 식으로 읽는 사람, 그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을 다 염두에 두고 썼달까요. 근데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다고 딱 정해져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룩스  이 질문을 드리게 된 게… 무한의 리바이어스 아세요? 일본 애니메이션인데, 그것도 SF거든요. 몇 년 전에 읽은 감독 인터뷰가 기억에 남았거든요. 감독이 인터뷰에서 23살 이상인 사람은 굳이 안 봐도 좋겠다고 했던 걸로 기억해요. 그 놈들은 이런 거 보지 말고 알아서 해라, 그런 말을 했거든요.

이다  정말요? 이제 보면 안 되나요? ;ㅁ;

룩스  (그 인터뷰를 보고) 의도를 가지고 있는 글이라면, 계층을 노리고 쓰는 게 효과적인 경우가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노린다기보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사실 가정하고 쓰고 있을 수가 있겠죠. 예컨대… 또 다르게 말하자면 장르 센스가 있는 독자들을 주로 가정하고 쓴다거나, 무엇에 관해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는 독자들을 가정하고 있다거나.

명훈  그런 경우에는 작가가 어떤 독자층을 가정하고, 그 사람들에게 뭔가 말을 하겠다고 노리고 들어갔을 때 그렇게 쓰는 거 같아요. 글이 다 그런 건 아니라, 어떤 글들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자체가 모양을 만들어 갖추기 위해서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에는 독자를 정해놓고 쓰게 되진아 않고요. 뭔가 야심차게 한 마디를 하고 싶을 때가 있죠. 쓰다보면. (웃음)
굳이 따지자면 저는 아주 매니아들에게 맞춰서 쓰지는 않아요. 제가 혼자서 계속 쓰고 습작하고 할 때 주변 사람에게 읽히게 되잖아요. 근데 주변 사람들에게 읽히기 힘들잖아요.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도 재밌게 읽힐 수 있는 걸 쓰자, 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이다  아,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 분위기 난감해. 앞이랑 비교되고 앞에서는 이렇게 말했는데,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웃음)
저는 글을 쓸 때 독자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글을 누구에게 읽히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나 혼자만 볼 것이다 생각을 하고 써야 한다고, 글은 온전히 작가 자신의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요즘 자꾸 의뢰를 받고 쓰게 되니까, 독자를 생각하게 되고, SF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서, 그걸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여전히 아무에게도 안 읽힌다는 생각으로 쓰는 게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제 친구들도 제 글 전혀 안 봤는데 이번에 책이 나와서야 봤어요. 제가 공짜로 주고 볼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니까… (웃음)

진아  누군가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닌 거 아니에요?

이다  읽어주길 바라긴 하지만 그건 글이 나온 다음의 이야기고, 쓸 때에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자를 생각하다보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달까요. 그럴 가능성이 큰 거 같아요.

명훈  독자를 의식한다는 게, 즐겁게 쓰기 위해서 쓴다는 게 아니라 의식을 하게 되니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식에 안 묶여 있을 거야, 빠져나갈 거야, 그런 의식이 생겨요. 나는 나를 위해서 쓰는 거니까. 그럼 나를 위해서 쓰는 건, 남을 위해서 쓴다는 건 뭔지, 의식하게 되잖아요.
거울에 들어와서 쓴 것들은 처음에 쓴 것들은 그런 것들이 있었어요. 스마트 D를 되게 힘들게 썼거든요. 지난 해 작품집 찾아보고, 거기서 심사평 보고, 아, 여기 사람들은 뭘 좋아하는 구나, 그런 걸 연구해서 쓴 건데, 그렇게 공식에 맞추는 훈련을 하면서 힘들게 쓰고 나니까 그걸 벗어나고 싶어요. 그걸 벗어나야 다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버릇이 되어 버리니까 타성이 되어 버리면 내 글이 안나오고 막히는 것 같아요.

진아  글을 쓸 때, 독자층을 의식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거 같아요. 그냥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왔을 뿐이고, 공개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사람은 누구나 다르면서도 다 같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한 가지 이야기를 하더라도, 거기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명훈  그게 보여요. 진아님 글 속에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자기 세계에 대한 룰이 있어요. 집착은 아니고. 글 안에서도 세계와 내가 충돌하더라도 주인공들이 자기의 생각, 이야기 그런 걸 안 버리려고 하는 게 보여요.

진아  예전에 절영님이 가연 단편선 리뷰 써주신 것 보고 되게 감동받았는데, 가연 단편선(종이책 가연 단편선, 전자책과는 실린 책이 조금 다르다.)에 실려 있는 것들은, 루운은 빼고, 나머지는 비슷한 시기에 쓴 것들인데, 그 때 제가 글을 쓰는 방식은 그냥 하나의 이미지를 얻어서 쓴 거지, 어떤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의식이 없었어요. 무의식속에는 있었을 지도 몰라도요. 근데 그걸 저는 나중에서야 아주 막연한 거나마 제가 그 때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어했구나, 하고 알았는데, 절영님은 그 글만 보고도 그걸 알아내시더라고요. 그래서 절영님 리뷰를 보고 나서 아, 그런 거였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 그래, 이걸 보고 나니 나도 그런 게 있었던 거 같아… 라는… (난처한 웃음)
지금은 예전보다는 뚜렷한데, 예전에는 막연한 한 장면에 대한 이미지로 글을 썼다면,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할 거야, 혹은 이 문장을 반드시 넣을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쓰는 정도로는 진보해서 글을 쓰는 거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내버려두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로 글을 쓰는… 그런 느낌?

명훈  근데 돌아보면 뭔가 계속 의도해온 게 있는 것처럼 이어지는 느낌이 있잖아요.

진아  예, 있긴 있더라구요.  글을 쓰면서 내가 나에 대해서 알아가고, 글을 쓰면서 내가 세상을 이런 식으로 인식하는 구나, 라는 걸 알아가는 것 같아요. 글을 쓰는 것 자체가 거창하게 말하면 저에게 깨달음을 주는… 순간이 있는 것 같아요.

   글을 쓰면서 열반에 이르시는 거예요.

진아  와, 재밌겠다. 우리 글을 쓰면서 열반에 이르는 단편을 써요.

이다  글을 쓰다 눈을 떠 보니 안드로메다에 있고…

   글을 쓰다 눈을 떠 보니 우주선에 있고…

진아  예전에는 작가들이 인터뷰 할 때 영감이니, 뮤즈니, 그런 이야기 하는 거 되게 웃겨 보였거든요. 나는 이 장면을 쓰면서 이 캐릭터에 대해서 이해했느니 어쨌느니 하는 걸 보면, 소설 속 캐릭터라는 건 소설가가 상상해서 만든 것임에도 남처럼 이야기하는 거 보면서 아, 거 되게 폼 잡네, 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그런 게 있더라구요. (웃음)

이다  근데 그게 정말 맞아요. 그게 쓰는 사람만이 아는 것 같아요.
안 쓰는 사람들은 그게 뭔 헛소리야, 할 텐데… 내 머리가 쓰는 게 아니라 (손을 가리키며) 이 안에서 쓰는 것 같아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 자기 의도대로 가지 않고 멋대로 행동한다고 하잖아요.

이다  저도 절영님 이번([누군가를 만났어]) 리뷰 보고 감동을 받았거든요.

진아  절영님 리뷰는 가슴을 치는 무언가가 있어요.

   놀라운 통찰력이랄까요.

이다  (절영님 리뷰를) 읽고 나서 소설을 다시 보게 되더라니까요.

진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냐, 맞아, 그 말 다 내 글에 적용돼, 하고 싶어지는… (웃음)

이다  절영님 리뷰는 늘 그래요.



   책에 작가의 말이라든가 후기, 혹은 책을 내는 감상 같은 게 들어가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누군가를 만났어]는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인터뷰를 빌어 하고 싶은 말이라든가 책을 내고 난 감상, 감사드리고 싶은 분 등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진아  출판사에 감사하죠. 이런 책이 나올 수 있도록 해줬으니까요.

명훈  작가의 말을 안 넣으라고 해서 정말 다행이었는데요.

이다  사진 안 넣으려고 그 난리를 쳤는데… 놀라운 설득력에 밀려서… 이번에 깨달은 게, 익명으로 책을 내거나, 사진을 내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로 대단한 분들이시라는 거예요.



   인터뷰하면 꼭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서 물어보던데 이걸 물어 볼 수 없어서 아쉽네요. 예전 인터뷰에서 다 했던 질문이라서요.

배명훈 인터뷰 보러가기
이다(김보영) 인터뷰 보러가기
진아(가연) 인터뷰 보러가기

이다  전 누구라고 했더라… 그 동안 바뀌었을 수도 있어요. (웃음)

   그럼 명훈님 부터…

명훈  저요? 전 이다님이요.

이다  이러지 마세요! 그럼 전 배명훈님 할 거예요!(웃음)

   이게 바로 외교학과의 힘?

이다  그러고보니 외교학과셨죠.

명훈  사실 언제 누가 물어보더라도 이 사람이다, 라고 말할 만큼 좋아하는 작가는 없어요. 닮아야겠다, 그런 작가도 없고요. 그래서 누가 물어볼 때 대답용으로 마련해둔…

이다  대답용으로 누구를 마련해두셨어요?

진아  이다님이요. 방금 대답하셨잖아요. 근데 명훈님 너무 정치적이시다. (웃음)

명훈  좋아하는 작가 물어본 질문에 나오는 대답 보면 대부분 외국 작가들인데, 뭔가 외국 작가를 좋아한다고 해야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모르는 작가도 많고. 국내 작가들이 그렇게 떨어지는 것 같지도 않고요.

   이다님은 헤세라고 대답하셨었네요.

이다  헤세님♡

   진아님은요? 지난 인터뷰 기록에(인터뷰 기록을 한참 뒤지다가)좋아하는 작가가 안 보이네요.

진아  전 너무 많아서… 그 때 그 때 튀어나오는 순서에 따라 달라져요.

   그럼 진아님이 나중에 정리하시면서 직접 적어 넣으세요. (웃음)

진아  싫어요! 그런 게 어딨어요! 꼽을 거야. 어슐러 르 귄, 코난 도일, 존 그리샴, 파트리크 쥐스킨트, 마이클 크라이튼, 필립 K. 딕…

   한국 작가도 해봐요.

진아  배명훈, 김보영

(폭소)

명훈  역시 안목이 있으시군요. (웃음)

룩스  한국 작가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잖아요.

진아  송경아, 김영하…

룩스  전에 박상륭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진아  박상륭 건 [평심]을 봤어요. 굉장히 강렬하고 인상적이었죠. 박상륭이나 최인훈 같은 대가들은… 제가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좀 모호한 게 있어요. 보고 감탄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고, 그거랑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건 좀 다른 거 같아요. 거대한 높은 산맥 같아서 좋아한다는 표현을 쓰기엔 좀 부담스러운…



   독자들이 자유 게시판에 댓글로 달아준 질문으로 옮겨갈게요.

정대영님 - 당신은 지금 매우 목이 마릅니다. 마침 탁자 위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잔이 보입니다. 안에는 얼음물이 들어있습니다. 너무나 시원해보이지만, 어쩐지 위험한 예감이 들어 선뜻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 위험한 예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이다  제가 이걸 보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각난 게, 진아님이 뒤에서 다다다다 달려와서 절 밀치고 물을 빼앗아 마시는 모습이 연상되었는데…

진아  어머, 제 이미지가 왜 그 모양이죠? 전 상냥하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오해해요.

이다  (수줍) 알아요… ♡

하트는 이다님 요청으로 들어갔습니다.

명훈  이 질문에 대답하면 뭔가 함정에 빠질 것 같다는…

   위험한 예감이라는 게 이 질문이 함정이라는 건가요?

명훈  이 얼음물은 함정이다. 라는…

진아  물방울이 맺혀있다는 걸 봐서 컵이 미끄러울 것 같고 떨어뜨려서 깨질 것 같아요.

   은림님이 하신 질문이에요. 무인도에 갈 때 가져갈 다섯 가지와 그 이유

이다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법, 무인도에서 탈출하는 법, 그리고 배 하나, 조명탄.

   하나 더.

이다  음… 그거면 되지 않을까요? 나와야죠, 다음 날.

명훈  전 별 생각 없어요.

진아  돌아올 배 편?

이다  낙하산을 가져가래요. 낙하산을 펼쳐 놓으면 멀리서도 아주 잘 보인다고.

명훈  GPS 발신기나 위성전화기 (웃음)

   자가발전기도요.

이다  노트북도요? (웃음)

진아  모든 게 갖춰져 있는 크루즈면 되지 않을까요?

이다  타이타닉? (웃음)

   미소년 안 데려 가세요?

진아  미소년은 하늘에서 떨어질 거예요. (웃음) 진짜 옛날에 미소년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나무에서 열리고, 강물에서 나오는 그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어요. 흐흐

명훈  침대 광고 있잖아요. 하늘에서 남자가 떨어지는…

진아  노래도 있잖아요. 하늘에서 남자가 비처럼 떨어진다면, 할렐루야~! 흐흐

명훈  저는 왜 공수부대가 연상이 되죠? ^^;;

진아  군대를 갔다 온 분과 안 갔다 온 분의 차이가…

이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명훈  공군요

진아  그래서 {플레인 요구르트}를 쓰셨군요.

   정말 플레인 요구르트를 드신 거군요!

명훈  네, 그럼요. 맛있어요. 케이크도 플레인 치즈 케이크.

명훈님은 이날 커피와 플레인 치즈 케이크를 주문했다.

진아  이 케이크 맛은 어땠어요? 플레인 맛이 나나요?

명훈  이건 좀 아니에요. 중국산에 양식인 듯… (웃음)

   다음은 미소짓는독사님의 질문이에요. 초보작가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 글을 쓰시는 개인적인 스타일

이다  저도 초보작가라 뭐라 말씀드릴 입장이 아닌 것 같아요.

명훈  음… 뭐라고 할까요. 건필하세요?

진아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확고하다면 형식이나 문체는 따라오는 게 아닐까… 근데 글을 쓰기 위해 절대적인 방법이나 정도는 없는 게 아닐까해요.

   글이라는 게 정규 교육과정을 거쳐서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소설은 어떤 전문 과정이 없기 때문에… 물론 문창과가 있긴 하지만…

명훈  저는 객관적인 시선이랄까, 남들의 눈이랄까, 그런 걸 피해서 내 공간으로 가려는 과정이 있었어요. 뭔가 인정을 받았다 싶은 순간, 상을 받았다 싶으면 막혀서 글이 안 나와요. 그 다음에는 공백기간이 필요하고, 그걸 뚫어주는 글이 나와 줘야 다음 글이 나오는데, 그런 글들은 내 이야기를 하는 내 글들이고… 그걸 찾기까지 오래 걸려요. 내 공간을 만들기.
(사이) 항상 싸우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보는 눈에 도취시켜야 글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내 구멍을 또 만들어야 하고. 그래서 계속 쓸 수밖에 없어요. 쓰면서 글이 막힌 걸 뚫어주는 건 결국 글이거든요. 나에게 영감을 주는 내 글이 나와주는 거. 남의 글을 보고도 영감을 받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다음에도 계속 내 글을 쓰게 해주는 건 내 글인 것 같아요.

(사이)

초보작가, 기성작가 나누기도 애매한 게, 저도 제가 작가라는 이름을 가져도 되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작가가 무엇이냐, 하는 걸 가지고 고민을 했었어요. 어디 등단하면 작가냐, 책을 내면 작가냐,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하다가 인터넷에서 우연찮게 어떤 말을 봤는데 자기가 작가라고 생각하면 작가다, 라는 거였어요. 일반론이고 흔한 말이지만 제일 어려운 말 같아요. 자기가 초보 작가라고 생각하면 초보 작가고,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 까지 포함하는 것 같아요. 내가 날 작가라고 생각한다면 작가인 거죠. 그런 자존심 같은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사이)

마음을 먹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알약처럼 먹으면 딱 되면 좋겠지만… (웃음) 삼켜야 하는 무언가를 삼켜야 하는 것 같아요.

무한슬픔님이 따로 몇 가지 질문을 보냈다.

――― 어떤 식으로 소재를 정해서 이야기를 꾸며 나가시나요? 자신의 작품 하나를 예를 들어서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명훈  앗, 영업 비밀을…
소재만 정해진다고 이야기가 꾸며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고, 거기에 주제, 인물, 잡다한 장면들 등등이 다 만들어지고 나야 아 이정도면 이야기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소재는 그냥 살다보면 떠오르는 이런저런 아이디어들인데요, 그게 딱 떠오른 순간에 바로 쓰기 시작하면 아마 두세 페이지쯤 가고 나면 힘이 떨어지더라구요. 숙성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일단 떠오른 소재는 당장 써먹지 말고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어 두었다가, 그러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지나면 거기에 주제나 인물 같은 것들이 조금씩 붙어서 덩어리가 되거든요. 하나하나 장면에 들어가는 통찰 이런 것까지 합하면 한 40가지쯤 생각이 덩어리가 되어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 더 될라나. 두 개의 덩어리가 붙어서 하나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이때 중요한 건 이 덩어리들의 온도인데요. 다른 사람한테 말해버리거나 종이나 모니터에 옮겨버리거나 하면 덩어리들이 서서히 식어간다는 거예요. 근데 식어서 굳어버린 덩어리들은 다른 덩어리하고는 잘 안 붙거든요. 이건 진짜 영업 비밀이겠지만, 되도록이면 머릿속에서 따끈따끈한 상태에 둬야 재미있게 잘 붙어요.
이 부분이 진짜 제일 중요한 건데요! 집필은 충분히 큰 덩어리를 모은 다음에 되도록이면 빠른 시간에 해치우는 게 나은 것 같아요. 생각이라는 게 종이가 닿으면 프스스스 소리를 내면서 꽤 빨리 식거든요. 식어버리면 어떻게 하냐구요? 버리거나, 아니면, 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흠. 그런 것까지 가르쳐주면 우리는 뭐 먹고 살라고…
에잇, 쓰는 김에. 가열한 다음에 망치로 두드리면 다시 뜨거워지면서 말랑말랑해져요.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생각의 망치로 두드려야 하는데, 이거 오래 하면 무지하게 힘 빠지거든요. 그래서 저는 돈이 걸린 일이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이 짓은 안 하는 편이죠. 이 지경까지 오면 이건 즐거운 일이 아니라 노동이니까,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만 노동을 한답니다.
제 글을 예로 들기까지 하면 이건 진짜 영업비밀 공개니까, 딱 여기까지만.

이다  어떤 생각이 하나 떠오르면, 또 그 생각에 빠져들다 보면 거기에 살이 붙어가요. '종의 기원' 같은 경우는 제일 처음 이야기가 떠올랐던 게, 은하철도 999(^^)에서 메텔이 했던 말이었어요. '인간에게 있어 아름다운 환경이라는 건 기계인간에게는 가장 끔찍한 환경일 수도 있어.'

진아  {왜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지?}랑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는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 소모임 데카메론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쓴 글이에요. 보카치오의 소설 데카메론이 매일 주제를 정해 그 주제를 가지고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 형식이었다는 점에서 착안해, 참석자들은 매달 소재를 정해 그 소재를 가지고 글을 써야 했지요. 데카메론 프로젝트의 첫 달 소재가 차(tea, 커피 포함)였습니다. 당시 차도, 커피도 전혀 마시지 않았던 터라 소재에 대해 아는 게 없어 굉장히 난감했더랬어요. 소재를 받아 글을 쓰는 것도 처음이었고요. 차와 커피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도 하고, 한 보름쯤 조금 과장하자면 자나깨나 생각하며 고민했었어요. 약속이 있어서 홍대로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정말 이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데, 갑자기 커피 속에서 미소년이 튀어나오는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유레카! (웃음) 그 때 부터 머리 속에서 이야기가 춤을 추기 시작해,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노트와 펜을 사고 약속장소인 카페에서 일행이 올 때 까지 정신없이 썼던 기억이 나네요.
{…네므…}도 데카메론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어요. 그 달 미소년, 보석, 인형을 가지고 어느 걸로 할 지 투표를 했는데, 결국 낙찰된 게 셋 중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소재를 정하는 회의가 끝난 후 “미소년과 보석과 인형이 나오는 글을 써야지.”라고 생각해서 나온 게 {… 네므…}고요.
{누가 나의 오리…}는 낙서를 하다 튀어나왔어요. ‘나의 오리 벤쟈민 프랑크프루트가 살해당했다. 내가 자고 있는 사이 누군가 우리를 부수고 나의 오리를 훔쳐가서 뼈까지 남김없이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어쩌구저쩌구 몇 줄 더 썼던 것 같은데(네, 이 때만 해도 오리는 진짜 오리였습니다. ^^;;), 이걸 all theme라는 단편 창작 모임에 낼 글을 위해 본격적인 이야기로 만든 거였지요. all theme는 플롯을 가지고 소설을 쓰는 모임이었어요. 역시 참석자들은 같은 플롯을 정해 글을 썼었죠. 오리는 “구출”이라는 플롯이었습니다. 플롯에 아주 잘 맞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건 글을 한 편 쓴다는 거였으니까요. [누군가를 만났어]에 실린 {…오리…}는 그 때 쓴 글과는 다릅니다. 그 글은 너무 미숙해서 고민하다가 데카메론 프로젝트에서 “내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다.”라는 문장 미션이 주어졌을 때 다시 수정해서 지금 버전이 나온 거지요.

――― 글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는 반복적인 주제나 이야기가 있으시나요? 혹은 의도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정하고 글을 쓰시나요? 아니면 쓰면서 이야기가 드러나나요?

명훈  지나가고 나서 보면 반복되고 있는 주제가 있어요. 쓸 때는 몰랐지만. 그걸 알아챈 건 {철거인 6628} 때였어요. “폭발”이라는 테마가 있었거든요. {냉동인간과의 인터뷰}나 {연애편지}나 {모} 같은 글들. {임대전투기}처럼 거울에 안 실린 글들에도 몇 개 더 있으니까 역사가 꽤 있는 테마인데요, {철거인 6628}에서 끝장을 본 뒤에는 좀 꺾였어요. {누군가를 만났어}에서는 일본 폭탄 제거팀이 폭탄을 결국 제거해버리잖아요. 의미는 잘 모르겠어요. 제 무의식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 다음은, 서술 방식에 대한 실험. 이건 의도적으로 하고 있는 거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거의 모든 글에 다 들어가 있는 게 있기는 한데, 한 번 찾아보세요.

이다  몰랐는데, 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은 대부분의 작가가 그럴 거예요. 그런데, 그것 참 슬픈 일이라고 생각해요. 반복된 주제를 이야기한다는 것. 물론, 헤르만 헤세도 일생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신 분이지만, 그분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생각이 자라나는 것이 느껴지거든요. 그분은 정말로 소설을 통해서, 그리고 한 가지 주제를 일생동안 생각하고 고민하시면서 구도의 길을 걸으신 분이지요.
그렇게 되면 정말 좋은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계속 같은 자리에서 동어반복을 하게 돼요. 전 제 주제가 계속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살아가면서 계속 변화하기를. 멈춰 있지 않기를. 같은 주제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다음에는 다른 식으로 말할 수 있기를요.

의도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때도 있고, 쓰다가 이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구나 하고 깨닫는 경우도 있고요.

진아  있는 것 같아요. 음… 의도한다기 보다는 쓰면서 이야기가 드러나는 쪽입니다.

――― 특정 장르를 인식하고 글을 시작하시나요? 아니면 이야기에 맞춰 장르를 정하시나요?

명훈  장르에 맞춰서 글을 쓰지는 않아요. 앞에서 말한 그 생각의 덩어리를 만들 때 장르도 같이 붙여서 만들게 되죠. 처음에는 아예 장르를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어요. 나는 그냥 무슨 장르인지 생각도 안 하고 글을 쓰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자꾸 SF라고 그랬었죠. 요즘도 비슷해요.

이다  장르는 작가가 아니라 독자가 정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진아  저는 단지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쓸 뿐이고, 그게 때로 특정 장르의 형식/문법 등과 겹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 창작자로서 영향을 받은 음악, 영화 기타 장르가 있으시나요?

명훈  음악은 즐겨 듣는 편이 아니에요. 특히, 지적재산권 문제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본 후로는 음악은 사서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더 안 듣게 됐죠. 사실 다른 장르를 좋아했으면 글은 안 썼을지도 몰라요. 어느 날 보니까 뭐 할 줄 아는 게 없는 거예요. 악기를 다룬다든지, 영화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한다든지 그런 거요. 그림도 못 그리고. 그래서 결국 쓰게 됐죠. 어렸을 때 다른 것을 익혔으면 그런 걸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영화는 반대방향으로 영향을 미쳤어요. 나는 이미 글쓰기를 고르고 말았는데, 압도적으로 우세한 건 영화고. 그래서 영화화할 수 없는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어요. 글맛이라는 게 있잖아요. 글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 영화로는 따라하기 힘든 거.
흠. 또 영업 비밀이 나오는데… 글로만 만들 수 있는 미학이라는 건 주로 서사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영화화할 수 있을 것 같은 장면은 되도록 간략하게 넘기고 이야기를 빨리 진행시켰어요. 스틸 컷을 최소화했죠. 이런 것도 있어요. {Smart D}를 보고, 특히 마지막 장면 때문에 영화화하기 좋은 글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 그건 절대 외국어로 번역하거나 영화화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글이었어요. ‘ㄷ’을 빼고 쓰는 부분들 때문에요. 그 부분을 쏙 빼 놓고 영화화하거나 외국어로 번역한다는 건 글을 확 죽여 놓는 거니까.
앞에 한 이야기에 이어서, 덩어리를 굴리다가 어느 순간에 쓰기 시작하느냐. 저는 문체가 정해지는 순간이거든요. 저에게 문체를 정한다는 건, 이 잡동사니 덩어리를 대하는 나의 태도를 정한다는 건데요, 요즘은 기발한 소재나 시각적으로 훌륭한 장면이나 매력있는 캐릭터나 기막힌 마지막 문장 같은 게 아니라 ‘문체’가 떠오르는 순간에 영감이 떠올랐다고 생각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입니다.

이다  온 세상이 제게 영향을 줍니다. ^^

진아  음… 좀 쑥스럽지만 ^^;; DW라고 답하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배우의 이름 약자예요. (본명은 비밀♡) 어느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던 날 우연히 그의 영화를 보게 되었어요. 나름 인지도가 있는 배우였는데, 전 그 때 처음 알았어요. 도저히 더 이상은 글이 나와 주지 않아 데카메론에서도 탈퇴하고, 한 동안 글이 안 써져 버벅버벅 거리고 있었는데, 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글이 써졌어요.

※ 인터뷰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2편을 읽으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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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ppysf 07.04.13 16:53 댓글 수정 삭제
    인터뷰 재미나게 읽었고, www.happysf.net에도 링크 걸어두었습니다.
    DW는 혹시 덴젤 워싱턴이 아닌가 하고 짐작해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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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아 07.04.14 12:04 댓글 수정 삭제
    덴젤 워싱턴,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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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04.16 12:40 댓글 수정 삭제
    덴젤 워싱턴... 우하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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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하 07.04.30 19:15 댓글 수정 삭제
    이미 아는 입장에서는 이다님처럼 우하하하 웃을 수밖에 없네요. 덴젤 워싱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