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무한슬픔님과의 대담은 즐거웠다. 음식 이야기, 다이어트 이야기, 좋아하는 연예인 이야기까지... 오래도록 친하게 지내 온 친구와 즐겁게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떤 것 같았다. 무한슬픔님께서 워낙 이야기를 잘 하셔서 편하게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무한슬픔님은 황금드래곤 문학상 3회 때 “K-1004”로 단편 부문을 수상했다. 거울에는 12호부터 참여하셨으니 근 3년간 알아온 셈인데 이렇게 길게 오래 이야기한 건 처음이었다. 무한슬픔님의 글은 단순하다. 그 속에서 번득이는 재기와 재치가 보인다. 무한슬픔님도 글과 비슷한 인상이었다. 얼핏 평범하고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를 하는 듯 하는데도, 곱씹어보게 되는 이야기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편의상 무한슬픔님은 무한으로 표기했다.

오후 5시, 이대 근처의 한 커피점에서 녹음기를 켜고 대화를 시작했다. 무한슬픔님은 2년 간 담배를 끊었다가 최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수다처럼 편하게 진행된 인터뷰라, 수다처럼 편하게 옮겼다. 이 점 양해를 구한다.



무한 : 담배를 아예 끊지 않는 이상 끊었다 피는 건 차이가 없대요.
스트레스가 없어야 하는데 스트레스가 많다보니까...
진아 : 담배가 몸에 안 좋으니 해도 공기 맑은데서 살면 별 차이 없대요.
무한 : 근데 다 소용없어요. 30년만 지나면 지구가 멸망하기 때문에...
진아 : 30년 밖에 안 남았어요?
무한 : 몇 년 전에 50년 안에 오존층 파괴를 못 막으면 런던이 물바다가 된다고 했었어요. 그 때만 해도 50년이었는데 최근에 인터넷 뒤져보니까 10년 안에 해야 된다 그러더라고요. 안 그러면 30년 안에 잠길 데는 다 잠기고 기후 다 바뀌어서 사람이 못살 곳이 될 거래요. 그러니까 담배 끊어봐야 소용이 없어요.
진아 : 핑계셔요. ...


무한슬픔님이 가져온 필름 2.0에 실린 <누군가를 만났어>를 보며 잠시 담소를 나누다가 영화 이야기로 넘어갔다.


진아 : 저는 영화에서 서사가 약하면 별로 매력을 못 느끼는 것 같아요.
무한 : 영화는 영상으로 서사를 쓰잖아요. 대사가 없이 영상만 봐도 이게 무슨 이야기고 어떻게 진행되는구나, 라는 느낌이 오는 그런 영화가 좋아요.
영화 형사 같은 경우에는 초반 1/3 지점까지는 아, 이런 식으로 가는구나, 했는데 둘이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 뒤부터는 이야기가 진행이 안되더라구요. 한참 글 쓰다가 갑자기 묘사하는데 빠져가지고 묘사를 막 미친 듯이 하는 그런 기분 있잖아요. 그런 거 같았어요.

드라마는 잘 안 봐요. 한 편 한 편 독립된 드라마는 좋은데... CSI나 로 엔 오더 같은 거요. 로 엔 오더는 굉장히 좋아하는 드라마예요. 시즌 대부분을 다 봤어요. 제일 첫 시리즈가 90년대에 시작해서 분량이 장난이 아니에요. CSI도 여기서 온 거예요.
진아 : 히어로즈는 안 봐요?
무한 : 제가 긴 서사를 못 봐요. 장편도 잘 못 보고, 단편을 주로 봐요.
진아 : 그래도 장편 소설 하나 쓰셨잖아요.
무한 : 그거 한 권짜리였는데 늘린 거잖아요. 늘리래서.

진아 : 이건 추선비님께서 하신 질문인대요. 일전에 펑크 낸 추리소설, 언제 쓰세요?
무한 : (뭔지 생각이 안 나시는 듯) 어떤 거요?
진아 : 36호 특집호에 준비하시다가 펑크 내신 거 있잖아요, 왜.
무한 : 아... 그거요... (심드렁)
진아 : (약간 상처 받았다. 잊고 계셨나.) 요새 글 안 쓰세요? 단편 주신 지도 오래 되었구...
무한 : 생업에 시달리느라...


36호 특집호의 호러 부분에는 원래 무한슬픔님이 원고를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다 업데이트 하루 전날에 펑크 선언을 하셨다는 전설이 있다


날개님이 자유게시판을 통해 해 준 질문들로 넘어갔다.



진아 : 가장 영향을 받았거나 앞으로 받고 싶은 작가는 누구인가요?
무한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박애진 씨라고 하면 안 되요?
진아 : 왜요? (기쁘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무한 : 제가 글을 많이 읽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걸 반복해서 읽는 성격이라서... 대쉴 해미트의 ‘말타의 매’나 ‘피의 수확’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고 그랬거든요. 한 작품을 반복해서 읽다 보니까 아는 작가가 많진 않아요. 예전에는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백 번 정도 읽었구요. 요새 읽는 건 ‘왜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지?’ 여서 이 질문에 박애진 씨를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왔어요.
진아 : 기뻐요. ^^;;
무한 : 제가 쓰고 싶은 글이 문장이 단순하고 플롯은 느슨하면서도 그 자체에서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걸 읽는 자체만으로... 읽는 사람이 그걸 읽으면서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그런 글이거든요. 제가 쓰는 글은 플롯 밖에 없잖아요. 커피를 읽으며 놀라서 아, 그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갈원경님도 좋아해요. 문장이 단순하면서도 좋아서... 커피는 갈원경님 글보다 플롯이 느슨해서 반복해서 많이 읽었어요.

예전에는 하루키를 계속 읽다가 하루키가 챈들러 이야기를 해서, 챈들러만 계속 반복해서 읽다가, 챈들러를 읽다보니 헤밍웨이를 읽어야 할 것 같아서 그 뒤에는 헤밍웨이만 죽어라 보고. 어릴 때는 단순해서 이거저거 많이 봤는데 요새는 본 것만 계속 봐요. 어제 ‘말타의 매’를 또 완독하고. 다 같은 부류예요. 헤밍웨이, 대쉴 해미트, 하루키...

제가 홍콩영화 팬이에요. 특히 두기봉 감독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부산 국제 영화제에는 매년 작품이 출품 되는데도 본인은 안 와요. 너무 거장이 되어서 깐느, 베네치아, 토론토는 가는데 우리나라는 안 와요. 옛날에는 우리나라랑 합작도 잘 했는데, 홍콩영화가 시들해지면서 홀대를 받아서 악감정이 생겨서인지, 너무 거장이 되어서인지 안 오더라고요. 올 여름에는 담가명 감독이라고, 곽부성 나온 영화 찍은 감독이, 두기봉 감독하고 같이 작업하고 편집도 하는 감독인데, 왔거든요. 담가명 감독이 홍콩 뉴웨이브 감독이에요. 왕가위 스승이죠. 17년간 영화를 안 찍고 두기봉 감독 거 편집 맡아주고 그랬는데, 17년 만에 영화 찍고 부산 영화제에 와서 가고 싶었는데 못 가고... 아는 분은 가서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아오고 자랑하던데 부러워요.

홍콩에서 신작 dvd 나오면 사서 팬카페에서 자막 만들어서 올리고 그래요.

유덕화 팬이기도 해요. 유덕화는 한국에 자주 오는데... 묵공 개봉할 때도 오고. 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와서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 상도 받았어요.

진아 : 전 알란탐 좋아했었는데...
무한 : 알란탐 팬클럽 아직도 있어요. 새해 되면 한글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써서 팬카페에서 보내고 그래요. 팬들이 40대가 많고 50대도 있어요.
진아 : 역시 어딘가에는 다 모여 있다니까요.
무한 : 맞아요.

무한 : 요즘 ‘거침없이 하이킥’ 보는데 너무 재밌어요.
진아 : 드라마 잘 안 보신다면서요.
무한 : 사이클 타는 시간에 방영을 해서 보게 되었어요. 캐릭터에 매력이 있어서 재밌더라구요. 캐릭터가 재밌는 글을 좋아해요. 로 엔 오더도 추리물인데 수사과정보다 인간 군상의 여러 모습들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게 재밌어요. 그런 걸 쓰고 싶어서 추리물에 도전해서 자료 조사도 많이 하고, 구상도 했어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사람 성격이 다양한 만큼 이야기도 다양하잖아요. 그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면 거기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하려고 생각하면 이야깃거리가 떠오르는 게 아니구요. 원래 이야기는 많잖아요. 이야기는 이미 있는데, 이야기를 먼저 발견하는 자가 성공하는 작가라던가요. 스티븐 킹이 한 말 맞죠? ‘유혹하는 글쓰기’에서요. 이야기는 찾으면 되는 거라는 거죠.

로 엔 오더는 실제 미국에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예요. 90년대 걸 보면 90년대 시대상이 보이고 지금은 지금 시대가 보이고. 이야기는 반복되는데, 사람들이 반응하는 게 달라요. 거기서 시대가 달라졌다는 걸 느껴요. 그런 걸 글에서도 보여주면 좋은데.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도 PC 통신을 배경으로 했던 걸 개정판에서 인터넷을 바꿨잖아요. 그런 게 안 좋은 거 같아요. 작품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건데... 근데 그 작가가 이제 글을 안 써서...

진아 : 한 편 재밌는 거 쓰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연재 중단도 많고...
무한 : 그런 사람 너무 많잖아요. 진아님이 “변신!” 서문에도 썼듯이 살아남는 사람이 남는 거죠.
진아 : 미결된 것들 중 개인적으로 아쉬운 작품들이 있는 지라...
무한 : 저도 그런 게 있는데 “강호기행록”이라고. 그 작가분이 다른 책들은 쓰는데, 이것만 딱 3권까지 내고 안 내고 있는 거예요. 미칠 것 같아요. 1권 2권 읽어가면서 막 두근거리고, 이거 진짜 재밌구나, 하며 3권까지 가서 이제부터 시작되는구나! 했는데 1부 완결이라며 끝나는 거예요. 우연찮게 만날 기회가 생겨서 따졌죠. 언제 쓸 거냐고. 그랬더니 언젠가 쓰겠죠, 라고 했는데 그게 벌써 몇 년이 지나버렸어요. 하도 열 받아서 1, 2권은 샀는데 3권은 4권 나오면 사야지, 그러고 안사고 있어요. ‘미저리’의 심정이 이해가 가요. 이 사람을 잡아 놓고 “4권을 쓰란 말야!” 하고 싶어요. 이렇게 쓰면서도 안 쓴단 말이야, 싶은...
진아 : 그러게요. 시작이나 말지. 이미 본 우리는 어쩌라고........ OTL

무한 :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대는데 작가가 그 뒤를 이어갈 엄두가 안 나서 안 나오는 경우도 있고요.
진아 : ‘슬램덩크’ 2부가 그럴 것 같아요. 3학년들 다 빠지고 나서 이야기가 될 지...
무한 : 못할 거예요.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도 원대한 계획을 쓰면서 연대표 만들어 본 거 보고, 이 사람도 평생 완결 못 하겠구나, 싶더라구요.
진아 : 의외로 평생이 걸리면 완결할 지도요. ... 자기가 못하면 문하생에게 넘기겠다고 했다면서요.
무한 : 문하생이 할 수 있겠어요. 자기가 생각해둔 게 있는데...

무한 : 글은 매일 써야 하는 거 같아요.
진아 : 예. 하루에 한 자를 쓰더라도 쓰긴 매일 써야 계속 나와 주는 것 같아요.

무한 : 누가 저한테 읽어보라고 글을 하나 줬어요. 프롤로그를 읽는데 와, 엄청 재밌는 거예요. 근데 읽다 보니까 뭔가 이상해. 보다 보니까 남자가 남자를 덮치는 거예요. 글을 이렇게 잘 쓰면서 왜 이런 글을 쓰나 싶더라구요.
진아 : 뭐, 자기가 쓰고 싶은 거 쓰는 거죠. 근데 무한슬픔님은 뭐랄까, 그런 거 보낼만할 것 같아요. 편견 없이 봐줄 것 같은?

무한 : 두기봉 감독 영화도, 그 분들이 보는 시각은 달라요. 남자들이 득달같이 나와서 서로 진한 우정을 나누는 영환데... 저는 보면서 와, 감동했는데 그 사람들은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 같아요. 6, 70년대 무협영화를 보면서 그런 걸 떠올리다니...
진아 : 저도 요 몇 년 사이에 지존무상이랑 영웅본색이랑 다시 봤는데... 다시 보다 보니까... 이건 정신적인 야오이야! 싶은 부분이 있더라구요. ...
무한 : 저도 몰랐을 땐 그냥 넘어갔는데 이제는 저도 보다 보면 그게 읽혀요. 첩혈쌍웅도 예전에 봤을 땐 그렇게 생각 안했는데 요즘 와서 보면 아, 정말 저 둘이 뭔가 느끼는 게 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남자들간 의리나 협의를 그린 그런 영화를 찾아가다 보니까 60년대 영화까지 찾아가는 거예요. 적룡 아시죠? 영웅본색에서는 머리까지고 나이 들어 보이고 그랬잖아요. 근데 젊었을 땐 송승헌보다 더 잘 생겼었어요. 그리스 신화로 따지면 아킬레우스 같은 이미지예요. 젊었을 때 장철 감독 영화에 많이 나왔었는데 그 때 영화에서는 웃통 드러내서 몸매 과시하고, 나르시즘에 빠져서 잘난 척 하다가 적에게 창에 찔려 내장이 다 튀어나오거나 하는 식으로 처절하게 죽어요. 강대위랑 많이 나왔었는데 강대위는 어눌하지만 은근히 깡다구가 있는 캐릭터를 맡아서 보통 둘이 진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거든요. 형제처럼. 적룡이 그렇게 죽으면 강대위가 복수를 해요. 근데 복수를 한 뒤에 강대위도 사지가 절단당하거나 그런 식으로 잔인하게 죽는데, 거기에 어떤 에로티즘이 있어요. 둘의 관계가 되게 오묘해서... 관금붕 감독이라고 커밍아웃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장철 감독에게 계속 캐물은 거예요. 사실은 쟤들이 사귀죠? 뭐, 그렇게. 근데 장철은 계속 아니라고 했대요.

장철 조감독이자 제자가 오우삼이었는데 예전에 적룡을 잊지 못해서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랑 짝을 지어 준 거예요. 주윤발이 뜨니까 장국영을 데려다 짝을 지어주고. 오우삼이 미국으로 가니까 두기봉 감독이 남아서 남은 배우들, 주윤발이 주연일 때 악역을 했던 배우들이 몇 년 지나니까 연기파 배우가 된 배우들을 데리고 영화를 찍어요. 가끔 스타가 필요하면 유덕화나 여명 데리고 찍고. 이 배우들이 십대 때부터 서로 친한 친구들인데 서로 결혼하면 사회 봐주고 그런 사이에요. 그런데 항상 영화를 보면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복수를 하고, 옛날 장철 영화처럼 말이죠. 그러다 보니까 여성팬들(?)이 그걸 찾아낸 거예요. 난 위에 말한 식으로 오우삼, 장철, 이렇게 60년대까지 따라 간 건데, 그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60년대 영화까지 따라간 거죠. ‘조폭 마누라3’에도 적룡이 나오잖아요. 적룡이 진짜 잘 생겼었어요. 유럽에는 아랑 드롱이 있다면 홍콩에는 적룡이 있다, 그런 말이 있었을 정도예요.

진아 : 삼국지에도 유비가 공명을 그렇게 아껴서 한 침대에서 자고, 한 그릇으로 밥을 먹었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거 되게 묘한 말이에요.
무한 : 장철의 대표작이 수호전이에요.
진아 : 푸하하
무한 : 수호전에서는 떼거지로 나와요. 13인의 무사에서도 13명의 남자들이 서로 싸우고, 질투하고... 근데 그 중 한 명이 좀 여성스러운데... 다들 웃통 벗고 강물에 뛰어들어 노는데 얘-강대위-가 좀 머뭇거리면서 옷을 벗으니까 그 중 한 명이 “야, 너는 됐어, 그냥 들어와.” 그러는 거예요.
진아 : 으아;;;
무한 : 여성팬들이 그런 걸 잘 찾아내더라고요. 왜 여기서 강대위는 웃통을 안 벗고, 다른 형제들이 그냥 들어오라고 하느냐. 내가 보기엔 단순히 형제들이 그런 말을 했을 뿐인 건데, 그걸 가지고 감독의 의도가 뭐였을까 토론을 하더라구요.

영웅본색에서도 적룡이 다시 돌아왔을 때, 주윤발이 와락 끌어안으면서 “아직도 멋지군.” 그러잖아요. 근데 그게 적룡이 20대 때 멋졌던 걸 의도하고 나온 대산데, 그걸 주윤발이 적룡에 대한 마음을 잊지 못해서 그러고 있던 걸로 해석을 하더라구요.
근데 보다 보니까 저도 이해가 가더라고요. 그렇게 보이는 게.


날개님이 하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진아 : 글쓰기를 전혀 하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상상할 수 있나요?
무한 : 그럼요. 글 안 쓰고 다른 거 생각해도 되는데.
글이 머릿속에서 완성되면 쓰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구상하고 결말까지 머릿속에서 다 완성이 되어 버리면, 그걸 글로 쓰는 것 자체가 노동이 되어버리지 않아요? 왜 글로 써요? 이미 머릿속에 다 있는데. 오늘도 하나 완성했군, 이러고 끝나요. 근데 모호한 거, 이걸로 뭔가 하고 싶은데,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궁금해지면 써요. 쓰다가 어떤 결론이 나오면 아, 내가 이런 걸 쓰고 싶었구나, 하고 아는 거지, 이미 머릿속에서 완성된 건 안 써요. 쓸 필요가 없는 거죠. 글쓰기가 결국엔 자기만족으로 끝나는 일차적인 형태예요, 저는 아직.

진아 : 글을 꾸준히 정기적으로 쓰기 위한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다면요?
무한 : 노하우가 있으면 매달 마감을 해서 단편을 넘겼겠죠. 안 그렇겠어요? 'April Fool's Day'도 4월 1일에 맞춰서 해야지 했는데 그 때 못해서 다음 달에 겨우 했는데...

진아 : 이번에 외계인 앤솔러지 준비 중이잖아요. 한 편 쓰세요.
무한 : 떠오르는 게 없어요. 가릉이를 또 써먹을 수도 없고.
진아 : 저야말로 “가릉이가 가릉가릉”으로 한 편 써야겠어요. 내 거라고 찜을 해놓던지 해야지. ㅋ
무한 : 외계인은 안나오는 SF는 구상했는데... 배명훈님 SF 보다 보면 너무 잘 쓰셔서 빨리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이...


여기서 잠깐. ‘가릉이가 가릉가릉’은 제 msn 대화명이고, 가릉이는 제가 키우는 고양이 이름입니다.;;


진아 : 자기 인생 최고의 영화, 음반, 도서는?
무한 : 영화는 방축. 아는 사람만 알 거예요.


처음 듣는 영화라 찾아봤다. 두기봉 감독의 영화로 밀키웨이 느와르의 결정판이라는 말과 함께 깐느 영화제와 토론토 영화제에 공개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영화라고 한다.


진아 : 도서는 아까 이야기 하셨구... 새벽 4시에 불러내도 나올만한 친구는 몇 명이신가요?
무한 : 없어요. 새벽 4시에 왜 불러내요.

진아 : 로또가 된다면 무얼 하시겠습니까?
무한 : 뭘 할까요... 해외여행 가야 하나. 두기봉 감독을 찾아서 돈을 대주고 영화를 찍어달라고 할까 봐요.

진아 : 단편 ‘최민주가 왜 그랬을까?’를 떠올린 계기는 무엇이죠?
무한 : (정말 얼떨떨한 얼굴로) 없는데...... 아무 생각 없이 한 30분 만에 쓴 거라. 이번에는 뭔가 써야 할 것 같은데... 하면서... 가릉이가 가릉가릉이랑 연관된 글이라...
진아 : 가릉이는 단지 좀 심술 맞은 고양이일 뿐이에요. 자꾸 우주 괴물로 만들지 마세요(...)
무한 : 그건 진아님 생각이구요. 가릉이는 지금도 지구를 정복할 궁리를 하고 있을 거예요. 내가 구상한 가릉이 연대기에서는 가릉이는 이미 지구를 정복했어요.
진아 : 그래서 안 쓰시는군요. 머릿속에서 이미 완결을 해서.
무한 :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가릉이가 가릉가릉도 메신저 보다가 어라, 하고 쓴 거고, 최민주도 얼결에 쓴 거라. 가릉이가 무한가릉도 쓰려고요.
진아 : 그거 풀님이 쓰신 거죠?
무한 : 예.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가릉이가 무한가릉이라고 하고 로비님처럼 가릉이가 가릉가릉을 50번 쯤 붙여넣기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근데 로비님은 그런 실험적인 걸 해도 글로 보이지만 내가 하면 그냥 장난처럼 보일 거라서... 요새 단편 쓰는 게 글이 아니라, 글을 벗어나고 있어서... 최민주도 뒤에 사진을 넣으니까 인터넷 만화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최근에 쓴 글들이 글의 형식을 벗어난 게 많아서 장르에 맞는 걸 써야겠다, 하다가 가릉이 연대기를 생각한 거예요.
진아 : 장르에 좀 안 맞아도 재밌을 것 같은데요.
무한 : 글이라는 개념 자체를 벗어나면 안 되죠. 가릉이가 무한가릉을 제목으로 하고 가릉이가 가릉가릉을 붙여넣기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로비님은 뭔가 생각이 있으니 하겠지만 저처럼 형식 파괴 자체를 위해서 하면 그건 좀 아니죠. 정통적이고 기본적인 글쓰기를 해야 하는데 자꾸 생각하는 게 글에서 벗어나서... 그건 아니잖아요.
진아 : 형식 파괴를 위해서 글을 쓰면 안돼요?
무한 : 형식 파괴를 하는 이유가 없잖아요, 나는. 장난처럼 해버리니까. 꽉 짜이고 틀에 박혀있고 전형적인 느낌이 들더라도 전형적인 장르 소설의 느낌이 가득한 걸 쓰고 싶어요. 저번에 쓰다 만 것도 전형적인 추리소설을, 범인찾기를 쓰고 싶어서 시작한 글이에요.
진아 : 도입부 기대되던데 좀 써요. (36호 때 도입부만 쓰시고 펑크 내신 글을 말합니다.)
무한 : 그건 자료가 너무 부족해서 못 쓰고 있고요. 드래곤과의 3일에 나온 주인공을 가지고 각기 다른 장르의 성격을 가진 글을 시도하고 있어요.

장편은 호러를 쓰고 싶어요. ‘Welcome Back Mr. Charisma’를 장편으로 버전업 하려고 플롯이랑 구성을 짜고 있어요. 제가 대사 치는 걸 되게 못해요. 플롯을 위한 대사 외에는 캐릭터의 특성을 드러내는 대사를 못 써요. 캐릭터를 제대로 만들어야 장편이 나올 텐데 그걸 못해서... 그걸 위해 글쓰기 작법에 맞춰서 쓰고 있어요. 순서대로. 주제는 정하셨나요? 소재는 정하셨나요? 구성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구성까지 왔고 다음이 패러다임을 짜봅시다, 차례예요. 이런 기본적인 걸 못하고 형식 파괴만 하는 게... 좀... 웃긴 짓인 거 같아서. 아주 전형적이고 틀에 박힌 것도 쓰고, 밸런스를 맞춰서 쓰고 싶어요. 기본기가 없어서. 읽은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기껏 좋은 거 생각하면 머릿속에서 끝내 버리지. 그래서 기본기를 완성하고 싶어요. 그래야 거기서 비틀고, 더 나가고 그런 게 될 것 같아요.

진아 : 악플과 실명제에 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셨나요?
무한 : (특유의 멍한 얼굴을 잠시 하셨다가) ... 아무 생각이 없는데요.
... 악플은 있어서는 안 되고, 실명제는 부분적으로만 허용하면 좋겠다?

악플러가 실질적으로는 1500~2000명밖에 안 된대요. 우리나라 네티즌이 천만 명이잖아요. 진짜 네티즌의 몇 퍼센트도 안 된다는 거죠. 그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으면 영향력이 없어질 것 같아요. 길 걷다가 가끔씩 술 취하다가 미친 사람이 웩웩, 그러는 거 보면 그냥 피해가잖아요. 그런 것처럼요.

진아 : 거울 작가 중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 그 둘이 다르기도 하더라구요.
무한 : 여자 작가분들은 다 좋아해요. 남자 작가분들은 싫구요.
진아 : ...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니에요?
무한 : 마음에 들었던 글은 커피고요... 곽재식님 글도 흥미진진 재밌고, 배명훈님 글은 끝까지 읽고 나면 뭔가 뒤틀어 남는 게 있어서 좋고. jxk160님은 모니터로 보기가 너무 힘들어서 책으로 나오면 읽어요.

제가 글 쓰면서 생각했던 게 중학생들이 보고 좋아할만한 글을 쓰자는 거였어요. 돌이켜 보면 제가 좋아했고, 아직도 좋아하는 것들이 중학교 때 본 글들, 영화들이에요. 그 때 좋아했던 것들을 아직도 좋아해요. 그 때는 그냥 그러저러한 감독이었는데 지금은 세계적인 거장이 된 사람들도 있고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내 돈으로 사서 본 게, 셜록 홈즈의 귀환이었어요. 모리어티랑 싸우다 죽고 나서 돌아온 거요. 전 셜록 홈즈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에 본 게 셜록 홈즈의 최후였어요. 그리고 나서 셜록 홈즈 시리즈 더 찾아보고, 그러다 루팡 보고, 애거서 크리스티 보다가 SF와 호러를 만났고. 그 때 본 셜록 홈즈의 귀환이 아직도 머릿속에 있어요. 그 때는 또 번역도 어렵게 안하고 중간에 빼기도 하고 그래서 읽기도 쉬웠고. 지금 봐도 그 때 좋아했던 것들이 너무 재밌어요. 그래서 중학생이 보면 재밌을 만한 거, 게시판 댓글로 그냥 “댑따 짱이야!” 이런 댓글이 달릴만한 글. 그런 댓글이 좋아요. 보통 그런 댓글보다 진지한 평을 바라는데, 저는 그 친구들이 보고 “와~” 해주는 그런 느낌이 너무 좋아요. 제가 그런 걸 느껴봤으니까. 너무 어려워서 한 번 봐서는 이해 못하고, 다시 보면 좋은 그런 영화도 좋긴 한데. 어릴 때 봤을 땐 한 부분만 보고 우와~ 했는데 커서 다시 보니까 예전에는 몰랐던 또 다른 의미가 있더라, 그런 걸 발견하면 너무 좋아요.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게 가짜가 아니었구나. 그런 거요.

30대 중반들이 마징가 제트니, 아톰이니를 다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인 줄 알고 자랐잖아요. 한일전 때 아톰과 마징가 제트 주제가를 응원가로 부르기도 했었고요. 근데 그걸 일본에서도 불렀죠. 그 때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춘기 시작할 때 자신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게 자기 게 아니었구나. 우리나라 거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그런 배신감 같은 거 있잖아요.

제가 늘 생각하는 게 최대한 문장을 단순하게 쓰자. 항상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글 속에 숨겨진 의미는 그 다음 문제라는 거죠. 전형적이더라도 재밌으면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알아서 의미를 찾더라구요. 글에 성의가 없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뺄 거, 지울 거 다 없애버리고. 이리스님은 뼈대만 남은 글이라고 하지만, 진짜 그렇기는 하지만, 딱 일 분을 읽고 넘어가더라도, 재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물론 지금 봐서 좋은 글 보면 정말 좋고. 그런 글도 쓰고 싶은데 그러려면 제가 더 발전해야 하고.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진아 : 이제 커피 좋아하지 마세요. 너무 옛날 글이에요. ㅠㅠ
무한 : 제가 가려는 방향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는 글이라 그래요.
진아 : 개인지 낼 때 진짜 많이 고민했는데, 진짜 손을 못 보겠더라구요. 아예 다시 쓰든가, 내버려두든가 할 수 밖에 없더라구요.
무한 : 내버려둬야죠.
진아 : 네... 그럴 수밖에 없더라구요.
무한 : 근데 옛 작품이 최고일 때가 많아요. 링 감독이 링이 아시아 뿐만 아니라 미국에까지 히트를 쳤지만 그 사람 걸작은 따로 있어요. 두기봉 감독도 그렇구요. 상업적, 작품성 완성도에서 물론 링이 최고지만. 어두컴컴한 물 밑에서가 진짜예요, 제가 보기엔.
개성이랄까, 자기 스타일이랄까. 링 감독의 초기작에 카오스라는 것도 있는데 그것도 최고예요.

글 쓰는 게 달리는 거랑 똑같은 거 아세요? 하루에 두 시간 동안 쓰면 두 시간 동안 달린 것만큼 체력이 소모된다고 하네요.


잠시 초콜릿과 케이크에 대한 잡담을 나누다.


무한 : 하드에 있던 글이 다 없어졌어요. 포맷을 하면서 CD에 옮겼는데 CD가 안 읽혀요. 아주 러프한 초기 아이디어만 남았어요. 그걸 가지고 다시 쓰는 글이 있는데 미치겠어요. 썼던 걸 다시 쓴다는 게 힘들어요. 기억이 날 듯 말 듯하고, 여기다 무언가를 심었었는데 그게 뭐였더라. 뭔가 반전을 넣었었는데 그게 뭐였지?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트릭만 남고 다 없어졌어요. 기억이 안나요.

PC방에두 가서 CD를 읽어 봤는데, 구울 때 잘 못 구웠나봐요. 안 읽히더라구요.
거울에 올려놓은 것도 그 후 수정본이 있는데 다 없어졌어요. 작년에 글쓰기 기본부터 다시 해보자고 해서 원혼택시부터 살을 붙였거든요. 닉네임도 바꾸고, 풍성하게 다시 써서 올리려고 했는데. 블로그도 백업할 줄 몰라서 리뉴얼하면서 다 없어지고.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해요. 지금 남은 러프는 거울에 있는 러프랑 다른 2기가짜리 하드에 있던 아주 조금 밖에 없어요.  


정말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무한 : 자유 게시판에 닉을 바꿔 올려도 다 알아보시더라구요.
진아 : 그러고보니 궁금했는데 왜 닉이 무한슬픔이에요?
무한 : 6, 7년 전에 흑사라는 닉을 썼었는데, 그 때 여기저기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다녀서, 차분한 걸로 바꾸느라... 그 뒤 계속 써왔어요.
진아 : 무단슬픔은 뭐예요?
무한 : 오타였는데, 써보니까 괜찮아서 그걸로 다른 사람인 척 하려고 했는데 다들 알아보더라구요.

진아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거울 독자분들께 한 말씀 해주세요. ^^
무한 : life is killing time. 쉬엄쉬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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