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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터미네이터

2007.12.20 23:1312.20

myungyun@gmail.com 창 밖에서 마차가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조용해졌다. 먼지가 부옇게 마지막 햇살 속으로 사라져갔고, 발굽에 치인 돌바닥 사이로 비로소 저녁이 뜸이 들고 밤이 왔다.
애들이 잠이 안 온다고 칭얼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앉아서 애들 머리나 빗겨주기 시작했다. 머리가 실타래처럼 꼬여버린 것이다, 좀 더 자라면 여자애 머리는 잘라서 팔아버려야지. 애들 머리는 결이 좋으니까 잘 팔릴거야. 그러니까 그 때까지는 열심히 빗어주는 거지, 그녀는 주인집 말 엉덩이를 빗어주는 것보다 좀 더 작은 솔빗으로 애들 머리를 박박 긁어내려갔다. 그러다가 그녀는 창 밖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아이고,”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창가로 다가갔다. 애들은 투덜거리다가는 침대로 도망가버렸다. “뭣이냐, 베들레헴의 별같은 것이야?”
그 빛은 여기저기서 거의 동시에 반짝거리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숨을 삼켰다. 자기네 집 지붕의 순서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락방에 사는 게 이럴 때는 재밌구만! 이렇게 딱 한번 재밌어! 그녀는 생각했다. 창에 빛이 어리더니 어느 새 집 안에 사람이 들어와있었다. 복장이 하도 괴이해서 여자는 몸을 떨었다. 그는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서 장갑을 벗고 손을 툭툭 털더니 침대 구석에 놓여있는 낡은 바지와 셔츠 더미를 들추고 아이를 보았다. “이놈도 아니구만.” 하고 그는 툴툴거렸다.
“뭐하시는 분인가?” 여자가 물었다. “하늘나라에서는 다 그렇게 입고 있는가? 아니면, 아니면 그냥 도둑놈인가?” 사이에 여자는 입에 담지 못할 질문도 해 보고 싶었지만, 그 단어를 입에 올리면 정말로 그렇게 시커멓고 불 속에 사는 것이 자기 집에 기어올라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오싹하다! 성탄절에 그런 이름을 쉽게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신경쓰지 마시오.” 그가 말하더니 도로 바지더미로 애를 덮어주었다. “아니, 아가 숨막혀 죽겠다.”하고 여자는 역정을 냈다. “얼굴을 그리 덮나. 이게 꿈인가? 별들이 반짝반짝하더니 여기에 계셔? 그 수염은 뭐요? 우리 주 오른편에 앉으신 그 어르신들 수염인가? 아주 새하얗고 깨끗하구만. 살도 이리 포동포동하고 아주 허우대가 좋으셔. 옷도 이상하긴 하지만 아주 두꺼운데! 염료도 아이고, 이렇게 고운 빨간색은 아무데서나 안 나오지. 소맷부리며 옷섬은 흰 털을 붙였구만! 우리같은 사람들은 아니신 게지요? 아니면 하늘나라에 가면, 이런 것 다 주시나?” “깨끗하기는 개뿔. 매일 샴푸에 빨지 않으면 균이 생긴다구. 어쩌라는 거야? 머리가 잘 자라게 해 준다고 해놓고 수염만 미친 듯이 자랐어. 게다가 하늘나라고 뭐고 더럽게 춥단 말이오. 빙하기인가 뭔가... 공기도 탁해서 서로 잘 안 보인다고. 빨간 색이 제일 눈에 띄지. 일자리에서도 기계 속에 앉아만 있고, 집에서도 안 움직이고 술만 처먹다가 나가기가 싫어서 배달 음식 시켜먹으면 살은 찌는거지. 하지만 약이 있으니... 두 알만 먹어도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아주 기분이 좋아! 호호! 호호!” “에그, 천상의 음식이 있나봐.” “회사에서 주는 거요. 쳇, 이 짓을 하려면 성격이 나빠지면 안 된다 이거야. 이래뵈도 영업직이라오. 그런데 여긴 그리 춥지 않군. 보통 때는,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면 얼른 이 옷은 벗어서 자루속에 넣어두고 옷을 하나 훔치곤 한다오. 그런데 여기도 역시 아니야. 더 살펴봐야겠지만 역시 아니란 말이지, 여긴 그 아기가 없어...”
여자는 귀가 솔깃해졌다. “무슨 아이 말이오? 혹시 우리 주를 찾으시오?” “우리 주?” “하늘에서 오신 동방박사 아니오? 아니, 하늘에서 오신 베들레헴의 별 아니오!” 여자는 손바닥을 짝짝 마주쳤다. “그래, 인도해주려 오셨구려! 그럼 여기가 아니오, 한참 전이란 말이오.” “한참 전?” “그 뭣이냐, 뭣을 타고 오셨으면 한참 더 가셔야겠구만. 얼른 가시오. 빨리 갈 수 있겠수? 저 번쩍번쩍하는 것은 얼마나 빠른 거요? 아이구 저거 엄청 크네, 이 방보다 더 크겠어, 왜 뻘건 불이 켜져있어?” “브레이크를 걸어놨다는 신호요.” 그는 투덜거리면서 벨트를 한 구멍 더 밀었다. “근데 그 전이라든가 후라든가 하는 게 뭐요? 꼭 어떤 동네에 가면 당신들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문화가 비슷한 거겠지? 당신들 생각엔 무슨 순서가 있나본데 그렇지가 않다고. 하지만 그냥 대륙에서 길 찾아가는 거랑 똑같다고 생각하시면 돼. ‘성탄절’이라는 동네마다 도시마다 찾아가는 거지. 길 잘 찾는 놈들은 어떻게 어떻게 잘 찾아내는데, 난 길치라고. 이런 일에 원래 맞지도 않는데.” “에그.” 하고 여자가 탄식했다. “뭔지 몰라도 힘들게 들리네. 근데, 진짜 하늘에서 오신 별이시오? 그 오두막을 비춰주시려고 찾으시는 게지?”
“오두막? 오두막이란 말이오? 좋은 단서로군. 아니, 나는 그 애를 찾아서 데려가야 한단 말이지. 찾아내서 피신시켜야 해. 우리들은- 그러니까 우리 회사에서 내려온 지령인데 - 무서운 이야기들을 알고 있단 말이오. 내가 찾는 이 아기 말이지, 채찍으로 얻어 터져서 살점이 다 뜯겨나간 다음에, 햇빛 아래 형틀에 몇 시간동안을 못으로 박아 매달아둬서, 그 다음에 옆구리를 창으로 쿡 찌르기까지 해서, 피가 질질 터져나와 죽는단 말이야. 아, 그런 일을 일어나게 내버려둘 수는 없잖수.”
“맞아맞아. 그렇게 되지요.” 여자는 가슴 앞에 오른손으로 그림 비슷한 걸 그렸다. “그렇게 되시는 거지.” “그래. 끔찍한 일 아니오?” 그가 말했다. “우리 도시는 엉망이오. 그래서 우리 회사같은 게 있는 거야.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지금 나 사는 동네가 그렇게 엉망이라는 거야.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엉망일 거라는 거야. 죄를 받은거지. 끔찍하게 죄를 받은 거야. 우리는 그 죄들을 씻어내려고 해. 그 형틀에서 흘러내렸던 피를 말이야. 그래서 이제라도 가서 해결해보려고 해. 그 아기를 구해내려고 해.” “그래서,” 여자가 문득 소리쳤다. “그 아기를 훔쳐가시겠다?”
“구해낸다니까.” “당신들 죄를 받게 하려고 그 아기를 훔쳐가시겠다? 안될 말이지!” 여자가 준엄하게 말했다. “알고보니 저 아래에서 온 사람이구만! 위에서 오신 분이 아니야!” “난 아기를 구해가겠다는 거야.” 그가 툴툴거렸다. “사람을 죽도록 갈기고 형틀에 매달겠다는 게 아니라구. 그 이야기를 간직하고 싶어서 그대로 두는 쪽이 나쁘지, 내가 나쁜가?” “그러면 당신들 세계는 사라질 테지!” 여자가 말했다. “어둠 속에 사라질 테지, 죄사함을 받지 못했으니까.” “그래,” 그가 말했다. “우리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지금으로서는 나는 이해하기도 힘든 얘기지만. 일어났던 일을 모두 되돌려버리면, 지금의 세계는 없던 것이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 않겠느냐... 이것 참 무지무식하게 단선적인 생각 같은데... 그 때는 여론이 그랬던 거지. 다들 무식했던 거지 뭐. 우리 자신도 다 사라져버리지 않겠느냐... 하지만 우리는 결국 합의를 보았지, 그런 일들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를 다시 살릴 수 있다면, 그들이 그런 일을 겪지 않을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때의 그 아이들이, 그때의 그 젊은이들이. 그것은 우리들 자신 정도는 걸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그 정도의 가치는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회사가 영업을 하는 데에 동의했다는 거 같아.”
그는 중얼거렸다. 그들은 잠시간 더 서로 쏘아붙이는 식의 대화를 했다. 새벽이 다가오는 가운데 여자는 그를 영 좋아하지 않게 된 것 같았다. 그가 마침내 리모컨을 눌러서 거대한 기계를 창 쪽으로 끌어당기자 여자는 떨면서, “흥, 루시퍼의 아들 같으니,”하고 속삭였다. 그는 갸웃하고는 여자의 눈 앞에 긴 막대같은 것을 들이밀고 찰칵 눌렀다. “잘 자요. 다 잊어버리고.”
그리고 그는 갸웃거리며 기계 속에 들어갔다. 루시퍼의 아들. 루시퍼의 아들. 이상하군. 뭔가 잊고 있는 거 같아. 프로그램이 잘못 되었나? 아들. ...의 아들. 누군가의 아들? 무엇의 아들. 이상하군. 회사의 지령은 잘 외우고 있어. 그건 바로 뇌세포에 들이밀어진 거라고. 계속 반짝거리면서 신경망을 구성하고 있지. 회사의 내력도. 무엇이 없지? 암기된 것 말고 무엇이?
그는 약을 한알 더 먹었다. 호호호! 그는 속도를 올렸다. 호호호! 그러자 어딘가에 도착했다. 그는 경도와 위도를 확인했다. 아, 틀렸어. 틀렸다고. 그러나 그는 멀찍이 오두막을 발견했다. 오두막? 오두막! 그는 속도를 늦추고 지붕으로 접근했다. 공중에 브레이크를 걸어두고 그는 집 안을 확인해보려고 했다. 아니, 마굿간이군. 그는 집 안으로 들어온 다음, 놀래키지 않으려고, 기기를 좀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으로 지붕 꼭대기 위로 높이 올려버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자, 그 남자는 그를 본 척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맹인인가? 잘 되었지 뭐,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기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얼굴을 본다고 알 리가 없잖아. 이 애는 얼굴 사진이 남아있지 않다고. 나는...
뭘 찾아온 거지? 그는 생각했다. 그는 거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그림자처럼. 아기는 막 태어난 것 같았다. 몸이 조금 젖어 있었는데, 여자가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아기의 두 눈동자 속에 검은 홍채처럼 그의 모습이 비쳤다. 그래서 아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모습에 고정되었다. 아, 그래. 그는 깨달았다.
나는 여기서 태어났다. 이 부부의 아들이었다. 누군가 그때 나를 구해주었지. 이런 기기를 타고 온 자들이. 나를 이들로부터 떼어내어 싣고갔지. 나는 그곳에서 살았지. 그리고 나는.
회사 내규중의 하나로, 자신의 과거로는 가지 말라고 했다. 너무 여러 번 반복되는 자신의 생일로는. 그러면 오래된... 이미 지나가버린... 자신 밖에 있는 자신이 부활해서...
바로 그날 태어나게 된다고 했다. 그가 가려고 했던 모든 위도와 경도를 단 하나의 생명으로 불태우며. 그래서 그는 ‘마지막’을 맞아 그 불빛 가장자리의 공허로 떨어져버린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태어났어. 하지만 나는 다른 곳에서 살아왔지. 거기에서 나는 이미. 그는 구유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아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둥그런 홍채처럼 머물고 있었다. 아기의 시선을 분명하고도 불안하게 하는 그것. 그는 무어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의 홍채는 완전히 검고 둥글게 가라앉았고 그는 사라져버렸다. 아기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를 한번씩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하나의 우주가 무한한 성탄절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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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12.21 10:33 댓글 수정 삭제
    아, 좋아요. 제목도. ㅋㅋ
    근데 이걸 엽편이라고 생각하고 쓰신 거에요? 흠. 좋은데요. 좀 긴 엽편인지 좀 짧은 단편인지. 7부 단편 같은. 이쪽으로도 개척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