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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idasa@gmail.com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환한 빛에 정신이 들었다. 조용히, 천천히 손발에 감각이 돌아왔다. 눈을 살짝 떠 보았지만 한동안 하얀 불빛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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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문제는 아니었다. 유전자 보관시설 중 하나의 온도가 정상 범위에서 살짝 벗어났다는 게 이유였다. 컴퓨터는 호들갑스럽게 기술자 다섯 명을 깨웠고, 우리는 십오 분 만에 문제를 해결했다. 어차피 똑같은 시설이 선단 여기저기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 정도 망가지는 건 큰 문제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너무 예민하게 설정했나봐….’ 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나는 잠들어 있는 수만 명 사이에서 깬 채로 며칠을 보냈다. 함께 깨어난 동료가 넷이나 있었지만 그래도 약간은 으스스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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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희연의 생각이었다. 희연은 선단의 항행 상태를 점검한 후 잠시 단말기를 두드리더니 앞으로 몇 시간 후면 지구 시간으로(좀 더 정확히는 한국 시간으로) 크리스마스가 되니 파티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만 기분이 찜찜했던 게 아니었는지 다들 찬동하고 나섰다. 누군가가 어디선가 케잌과 와인을 들고 나왔다. 나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었다.
‘한 시간 십이 분 남았어.’ 희연의 말에 케잌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까지라고?’
‘선내 시간으로 사십 오 분 정도.’
‘스무 배도 넘잖아. 우리가 그렇게 빠른가?’
‘거의 광속에 가까우니까. 그나저나 지구도 꽤나 시간이 지났겠다. 아직도 크리스마스가 있을까?’ 마지막 부분의 질문에는 다들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아무려면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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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사, 삼, 이, 일!’
‘메리 크리스마스!’
잔이 부딪히고 케잌이 엉망이 되었다. 다들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크리스마스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다가올 수백 번의 크리스마스는 차가운 수면실에서 보내야 할 팔자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조용히 일어섰다.
‘어디 가? 아직 십 분이나 남았다고!’ 지훈이 날 잡았다.
‘금방 올게.’
‘그래. 올해 안에는 꼭 돌아와야 돼.’ 시시한 농담이지만 다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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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복도를 손전등에 의지해 걸었다.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훈련을 받았는데, 처음 보는 곳 같았다.
‘이래서야 정말로 낯선 곳에서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덜컥 들었다.
하지만 그 때는 수많은 동료들이 이 적막함을, 내 용기를 채워 줄 것이다.
그리고 가족도….

*
‘다열 삽십 이, 삽십 삼….’
하얀 빛이 차례로 창백한 얼굴을 비추자 소름이 돋았다.
‘삽십 칠. 찾았다.’ 듣는 사람은 없지만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소름이 사라지고 마음이 포근해졌다. 습관적으로 잠든 딸의 얼굴을 쓰다듬으려던 손이 유리에 막혀 멈칫했다.
나는 아쉬워하며 양말 속에 넣은 선물을 딸의 머리맡에 올려놓았다. 수백 번의 크리스마스를 의식도 하지 못하고 보낸 후에야 비로소 깨어나 즐거워 할 딸의 모습에 미소가 나왔다.
‘메리 크리스마스~. 네가 잠든 사이에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갔단다.’

*
내가 돌아오니 파티는 끝이 나 있었고, 희연이 지시 사항을 전달하고 있었다.
‘17시간 후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다시 동면에 들어갈 거야. 물론 그 전에 장을 깨끗이 비워야 하는 것 잊지 마.’
지훈이 가장 괴로워했다. 나와 다른 동료들은 ‘그러게 작작 좀 먹지.’라고 말하며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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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언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이민 선단은 다시 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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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12.21 10:51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이번 크리스마스와 연말까지만 보내고 딱 5년만 자다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때까지 크리스마스가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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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자 07.12.21 23:19 댓글 수정 삭제
    그래도 장로님이신데 크리스마스는 남아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