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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야간 순찰

2007.12.20 23:0312.20

mh_bae@hotmail.com옛날 옛날 어느 깊은 산골에 조그만 비행장 하나가 있었어. 조그맣다고는 해도 작은 비행기가 뜨고 내릴 정도 되는 활주로가 있었으니까 아주 작다고는 할 수 없었지. 수직이착륙을 못하는 비행기들 착륙할 수 있는 것 치고는 제일 작은 규모였고 그만큼 이용료가 쌌기 때문에 가난한 여행자들한테는 꽤 인기가 많은 비행장이었어. 있을 건 다 있었거든. 관제탑, 여관, 술집, 간단한 정비 시설에 주유소까지.
크리스마스였어. 전쟁이 끝나고 5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지. 문명이 지나간 다음이었고 아직 다음 문명이 돌아오기 전. 나는 그날 당직 근무를 서게 돼서 기분이 안 좋았어. 원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리저리 떠넘기는 바람에 결국 만만한 내가 떠맡게 된 거였거든. 5시가 되자마자 사람들은, “애인도 없다며!” 하고는 비행기를 몰고 휙 날아가 버리는 거야. 술독에 빠져 있을 거니까 다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찾지 말라더군. 막내 관제사 하나 빼고는 정규직 직원은 죄다 튀어버린 거지. 그래서 그날 밤 나는, 여관 계약직 회계원으로는 최초로 우리 비행장 당직 지상 작전 참모가 된 거야. 물론 막내 관제사가 공중 작전 참모로 남아있기는 했지만, 지상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들은 죄다 내 관할이었어. 하지만 역시 기분은 별로였지. 애인만 있었어도 그런 꼴은 안 당했을 텐데.
나는 경비실에 들러서 거동 수상자가 나타나면 연락하라고 지시를 하고는 기지 외곽 순찰을 나갔어. 이런 날은 도둑놈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거든. 경비실 박 영감이, 산타클로스가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묻기에, 일단 포박해서 연행하라고 농담으로 맞받아주고는 활주로 외곽 쪽으로 걸어갔어.
은경이는, 전쟁 통에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어.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때는 전쟁이 끝난 뒤였는데도, 사람들이 실종된 사람들을 다시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거든. 핵전쟁을 겪은 뒤였으니까. 실종이 실존보다 흔할 때였으니까. 정비사들은 맨날 그렇게 놀려 댔어. “실종 좋아하네. 핵전쟁에서 실종된 것도 실종이냐. 잊어. 끝난 거야. 같이 즐기자고.”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어. 엄밀히 말해서 은경이는 애인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냥 친한 친구였다는 말이야.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고백하기 이틀 전에 전쟁이 나 버려서, 그래서 그럴 수가 없었어. 딴 여자를 만날 수가 없었어. 내 마음이, 고백하기 이틀 전에 동결이 돼 버려서.
눈이 살짝 내리고 있었어. 활주로는 언제나 깨끗한 상태여야 했기 때문에 눈이 쌓이면 한밤중에라도 주정뱅이들을 깨워서 눈을 치워야 되거든. 그래서 마음이 조마조마했어. 기상대에 들러서 눈이 얼마나 왔는지 물었더니, 기상대 둘째 아들놈이 글쎄 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서 적설량을 자로 재고 앉아있는 게 아니겠어.
주정뱅이들을 깨우기로 마음먹고 작전실로 올라가는데 경비실에서 무전이 오는 거야. 진짜로 산타클로스 꼴을 한 도둑놈이 나타나서, 시키는 대로 연행해 뒀다고. 나는 눈이 더 급하니까 그쪽은 알아서 하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박 영감이,
“미친 놈. 당직 완장 채워 줬다고 진짜로 너더러 비행장을 다 책임지라는 건 줄 아냐? 오늘 같은 날은 활주로도 잠 좀 자게 놔두고 산타클로스 잡아 놓은 거나 보러 와 얼른!”
하고 소리를 빽 질러대는 거야. 나는 기분이 나빴어. 근데, 사실 그 소리도 틀린 소리는 아니잖아. 그런 날 밤에 누가 이런 촌구석을 찾아오겠어. 문제가 생긴다고 쳐도 자격 미달인 계약직 여관 직원을 세워 놓고 도망간 정규직들 책임이지 내 잘못은 아니잖아. 그래서 나는, 어느새 포근포근하게 쌓여만 가는 눈을 밟으면서 경비탑으로 올라갔어. 꼴에 크리스마스라고 산타클로스 꼴로 담을 넘는 놈이라니! 별 미친놈이 다 있다 싶었지.
나는 어깨며 머리 위에 쌓인 눈을 부르르 털어 내고는 경비탑 문을 휙 하고 열었어.  
“일 터지면 아저씨가 책임지세요.”
하면서 말이야. 그러자 거기 서 있던 산타클로스가 고개를 휙 돌리는 거야. 웃으면서. 포박되어 있지도 않았어. 나는 지상 작전 참모의 품위를 잃고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어.
“오랜만이야. 나 알아보겠어?”
산타클로스가 그렇게 묻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지 뭐야. 거기에 은경이가 서 있었고,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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