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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크리스마스

2007.12.20 22:5712.20

arisnan@gmail.com애클 라우스 19세는 어김없이 내 가게를 찾아왔다. 19세라니 무슨 귀족 나부랭이 같은 이름이지만 그는 19대에 걸친 사슴 농장을 기적적으로 꾸리며 근근이 살아가는 순박한 남자였다. 내가 열두 살이고 그가 스무 살 때 마을 제일의 미인이었던 마리아와 결혼한 이후로 삼십 년 동안 우직하게 한 길만 고집하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음, 지나치게 성실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이것은 그에 대한 평가에 오점이 될 수 없었다.
내가 출세하겠답시고 도시로 뛰쳐나가 패가망신만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이 장난감 가게를 연 것이 십오 년 전의 일이다. 별 볼 것 없던 구멍가게가 지금은 재개발의 여파로 마을이 번화한 덕에 몇 지역에 체인점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애클은 내가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단골 손님이었다.
그는 365일 중 단 하루만을 빼고 모두 일과 술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틈틈이 내 가게에서 추천하는 장난감을 잔뜩 사 갔다. 한달 전 이 맘 땐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묻길래 중국에서 수입한 짝퉁 전자 게임기를 소개시켜줬다. 요즘 아이들이 워낙 이런걸 좋아해서 말이죠. 물론 중국산이라서 성능 불량이 좀 잦긴 해서 그 부분은 일단 비밀로 했지만. 애클은 싱글싱글 웃으며 아주 대량으로 주문을 넣었다. 올 해의 사슴 농사가 참 잘됐다나 어쨌다나. 언제나 그렇게 많은걸 사서 어디다 쓰냐고 물어도 그는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릴 뿐이었다. 음, 조금 양심이 아픈걸.
오늘 주문한 물건이 모두 당도했다고 연락을 하니 아주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그가 주문한 물건은 트럭에 다 실어놨고, 이제 결제만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언제나와 달리 애클은 현찰로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워낙 대금 액수가 컸기에 현찰이면 서로 곤란했다. 그는 내키지 않는 손으로 몇 번이고 낡은 소가죽 지갑을 만지작대더니 꽤 규모가 큰 은행의 현금 카드를 꺼내놓았다. 아주 사용하지 않은 티가 역력한 새 카드였다.
어째 이런 거랑은 친하지 않아 보였는데 의욉니다. 너스레를 떠니 역시나 웃음으로 무마하고 넘어가버렸다. 더 이상 캐묻진 않았다. 그는 성실한 남자였고, 아내에게 충실한 남자였으며, 가끔 정체불명이긴 했지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내 가게의 아주 소중한 단골이었다. 손님의 기분을 맞추는 건 장사의 기본이다.
애클은 카드 계산서에 서툰 손놀림으로 서명을 하고 영수증을 받아갔다. 가게를 나가는 뒤뚱거리는 발걸음이 평소보다도 가벼워 보인 건 착각만은 아니리라.
그가 중국산 게임기가 잔뜩 실린 트럭을 타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배웅하고 돌아왔다. 며칠 전부터 내린 눈은 잔뜩 쌓여 있었다. 추워서 재채기가 났다. 가게 안의 온방을 크게 틀어놓고 전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였다. 장난감 가게의 대목 시즌이라 한참 바빴더니 정리하지 않은 전표들이 쌓여있었다.
정리하던 중 문득 애클의 계산서를 살펴보았다. 사인도 아니고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놨다.

애클 라우스 19세 (Acl Laus XIX)

그러고 보니 그의 풀 네임을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희안한 이름이라 생각하고 스케쥴 표에 정리 일정을 적으려고 한 순간 나는 그 이름을 어디선가 보았다는 강렬한 데자뷰를 느꼈다. 어디였을까.
답은 생각 외로 간단했다. 크리스마스 시즌 한정으로 발매되는 내 스케쥴 표 한 구석에는 앙증맞은 산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 I Love You! Santa Claus! ] 아, 그래. 그렇군.

나는 뒤늦게 애클의 사슴 농장 이름이 루돌프 농장이며(잠깐, 순록 농장이었나?) 그가 쉬는 날이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 이런. 맙소사.
애클, 만약 그 짝퉁 중국산 게임기가 무슨 문제라도 일으켜서 아이들이 당신을 원망 하더라도 날 너무 미워하진 말아요. 진작 알았으면 그런 물건 소개 시켜 주지도 않았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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