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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산타의 선물

2007.12.20 22:5512.20

summer.cats@gmail.com일년 중 단 하루, 성탄. 크리스마스.

상희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근무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애인에게 전화했다. 크리스마스 당일에 만나자고 속삭이자, 그는 올해 크리스마스 이브도 함께 보내지 못하느냐고 투덜거렸지만 매년 있는 일이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마찬가지로 이브는 혼자 지냈다. 애인이 있던 때에도, 없던 때에도, 벌써 10년째다.

상희가 ko-02-138-950 구역을 담당하는 산타이기 때문이다. 자원봉사하는 수백만의 산타들은 일년 중 단 하루,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에 수백만의 루돌프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접으며 선물을 주러 다닌다. 하룻밤만 주어진 특권이자 의무다.

항상 그랬듯, 내년에는 봉사를 그만둘 테니 함께하자고 투덜거리는 애인을 달랜 후, 저녁을 든든히 먹고 자원봉사 센터에 들렀다. 상희가 받은 선물 보따리는 매우 묵직했다. 선물의 무게는 부탁의 무게다. 세계의 어떤 어른은 아이에게 선물을 부탁하고, 어떤 아이는 다른 아이를 위해 선물을 부탁한다. 아이들은 누군가 타인의 부탁으로 선물을 받는다.

크리스마스 밤은 춥다. 상희는 이마를 찌푸리며 루돌프의 고삐를 꾹 쥔다. 양말에 선물을 찔러 넣거나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놓아두면서, 상하는 먹을거리 선물은 냉장고에 넣어두는 센스를 발휘하며 상희는 언 뺨이 녹을 틈도 없이 바쁘게 시간을 접고, 공간을 접는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하룻밤 새에 선물을 전부 전달할 수가 없다.

선물 보따리가 절반쯤 비었을 무렵 상희는 한 아이에게 선물을 주러 갔다가 엉뚱한 아이를 발견했다. 공간을 잘못 계산해서 접은 탓에 발견한 아이였다. 팔이 부러진 채 고열로 누워있는 남자아이였다. 상희는 잠깐 고민하다가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구역장님, 아이가 아파서 누워있는데, 이 아이, 병원에 보내는 것도 선물에 해당될까요?"

"선물이 없는 아이에요?"

"네, 부모도 일하러 나갔나봐요. 아이 혼자 열이 팔팔 끓어요."

구역장 산타는 좀 고민하다가, 이만한 아이를 둔 엄마답게 선선히 대답했다.

"선물에 해당될 것 같지만 그 정도는 내가 해결하죠. 병원에 데려가세요."

상희는 아이를 감싸안았다. 마르고 작은 그녀가 열 살 가량 되어보이는 남자아이를 안아올리는 것은 상당히 버거웠다. 하지만 어쨌든 상희는 아이를 들어서 루돌프의 썰매에 실었고, 시간과 공간을 접어 응급실에 데려갔다. 갑자기 나타난 산타를 보고 병원 응급실은 깜짝 놀랐지만 곧 아이를 침대에 눕히면서 다시 분주함 속으로 돌아갔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병원 응급실은 여전히 아비규환이었다.

권한을 발휘해서 아이의 부모를 알아내고, 연락을 하고, 부모는 금방 가겠다면서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아이의 곁에 잠시 앉아있던 상희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남아있는 선물을 다 돌리려면 동이 틀 때까지 5분도 못 쉬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달려가고 있었다. 앓고 있는 아이에게 선물을 사주기 위해.

기차가 달리는 작은 마을. 눈이 소복히 쌓여 있고, 역장이 깃발을 흔든다. 역을 나서면 산타를 썰매에 태운 루돌프가 달려가고, 그 달려가는 길의 끝에 조그맣게 서 있는 작은 집 몇 채. 신나서 달려나오는 어린 아이.

상희는 작은 마을 모형을 아이의 머리맡에 가만히 놓아주었다. 시간이 없어서 달려온 탓에 숨이 가빴다. 다시 산타 모자를 쓰고, 루돌프를 찾아서 오늘 밤의 본분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뜨거운 손이 상희의 차가운 옷자락을 쥐었다. 미약한 힘이 작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상희는 아이를 돌아보았다. 열이 올라서 어지러운 눈으로 아이가 웃고 있었다.

"우와, 산타 아줌마."

상희는 호칭을 정정해주려다가 그럴 시간도 아깝다는 걸 깨닫고 그저 뛰어오느라 얼어붙은 손을 아이의 이마에 얹었다. 이마가 절절 끓었다.

"학교가면 자랑할래요. 짜식들, 루돌프 타고 하늘 날아본 건 나밖에 없을 걸!"

고열로 앓는 와중에도 아이는 그저 그 생각에 신났다. 상희는 웃으면서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선물 잘 받길 바란다."

"우와...!"

그제서야 머리맡의 선물을 발견한 아이의 눈이 커졌다.

"산타 아줌마! 우와!"

상희는 키득거리면서, 공간을 접었다. 아이의 탄성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밤새도록 선물을 돌리고 파김치가 되어 녹진녹진한 몸을 이끌고 상희는 센터로 돌아갔다. 임무를 마친 산타들이 저마다 택시를 타고, 혹은 마중 온 가족이나 보호자의 차를 타고, 혹은 전철역으로, 버스정류장으로 터덜터덜 걸어서 돌아가고 있었다. 상희는 봉사 종료 보고를 마치기 위해 구역장 산타를 찾아갔다. 그녀도 자신의 할당량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면서 쉬고 있었다.

"아, 상희씨. 커피 마실래요?"

상희는 구역장 산타 곁에 주저앉아서 보고를 마치고 커피를 받아들었다.

"저, 좀 바보 같아요."

"네?"

"전 선물을 딱 한 번 받아봤거든요. 어릴 때. 그 때 세상이 전부 내 것 같았어요. 근데, 내가 주는 선물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하기 싫었나봐요."

구역장 산타가 상희를 물끄럼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 아이한테 선물이 됐죠?"

상희는 마주 웃었다.

"네, 아주 큰 선물이던데요. 규칙 어긴 걸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한 10년 쯤, 봉사를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상희는 웃으면서 생각했다. 그럼 그 뒤에는? 그 뒤에 다시 하기 싫어지면? 모르겠다, 그 땐 저런 아이가 또 나타날지, 혹은 나타나지 않을지. 그건 그 때 생각하자. 지금은 일단 한 10년 쯤은,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안할 것 같다는 게 아주, 중요하니까.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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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12.21 11:09 댓글 수정 삭제
    역시, 산타들도 일 끝나면 담배 뻑뻑 피면서 "이짓도 못해먹겠네" 하겠네요. 호주 전국에 산타클로스 수백 명을 파견하는 무슨 고용 알선회사에서, 호호호 하고 웃지 말라 그랬대요. 애들 겁먹는다고. 하하하 하고 웃으랬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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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선비 07.12.23 12:05 댓글 수정 삭제
    ...헉;; 하하하 웃으면 겁을 먹지 않는 건가요 그게 더 무섭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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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a 07.12.23 14:47 댓글 수정 삭제
    역시, 혼자 하는 건 아니었군요. 어쩐지...(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