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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askalai님과의 대담

2006.04.28 22:1204.28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닉네임만 바꿔도 누가 누구인지 알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거울 필진들에 대한 독자들의 호기심을 풀어주기 위해 시작한 인터뷰, 그 열 번째는 askalai님과 함께 하게 되었다.
askalai님의 본명은 이수현으로 장편 “패러노말 마스터”로 제4회 한국판타지 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멋진 징조들”, “빼앗긴 자들”, 브라운 신부 5권 “스캔들” 등 다수의 판타지/SF/추리 소설을 번역했다. 여러 해를 알고 지내왔음에도 불구하고 askalai님이 대학원생인지라 논문을 쓰느라 바빠 인터뷰는 메신저 상에서 이루어졌다. 내심 최초로 오프라인 인터뷰를 시도해볼 생각이었던 지라 아쉬운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먼저 그간 거울에 올라온 단편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2004 거울에 실렸던 감정세공인은 반응이 좋았던 작품으로 다른 글과 느낌이 많이 달랐다. 기존 다른 작품들에서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달까, 등장인도 자기감정을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정적인 것을 깔아두기는 하되 그걸 전면에 내세운 건 거의 없었다. 감정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실제로 내가 쓰는 글은 대부분 문제에 직접 맞닥뜨리는 것을 피해온 면이 있는데, 감정세공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게 아주 성공적이었다. 오 성공적이었나?

개인적으로 askalai님의 몇몇 글에서 느낀 2프로 부족이 안 느껴진 글이었다. 실제로 <2004 환상문학웹진 거울> 판매 후 비평도 꽤 좋은 편이었다. 문제는 스스로도 감정세공인이 어떤 전기가 되었다고 생각했음에도 그 뒤에 쓴 글을 보면 결국 나에게 제일 편한 방향으로 돌아가 버렸다는데 있다. ‘나와 그녀와 죽음’도 그렇고 깨뜨리지 못했다, 고 생각하고 있다. 뭐 그래도 여전히 ‘나와 그녀와 죽음’은 실패하긴 했어도 예전 단편보다는 감정세공인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시간의 잔상 askalai님의 게시판에 게재된 단편은 글을 쓴 순서와는 다르다.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면 쓰레기 나라의 왕, 서로 가다, 감정세공인, 출근길에 좀비와, 안개 속에서, 나와 그녀와 죽음이다.
  

음.. 그래도 내가 보기엔 “감정세공인”과 다른 단편들을 양쪽으로 갈라놓으면 “나와 그녀와 죽음”은 다른 단편에 더 가깝다. 그런가...

몇몇 글들은 글을 쓴 이가 자기 글에 대면하지 않고 회피해버렸다는 느낌을 준다. 새삼 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느냐를 돌이켜보면, 나는 쓰고 싶은 이야기보다 쓰고 싶은 장면과 스타일이 먼저였다. 사실 난 쓰레기 왕이나 좀비, 어쩌면 나와 그녀와 죽음까지 그런 스타일로 글 쓰는 것 자체를 굉장히 즐긴다. 사실 지금 말이지만 아주 직접적으로 '나'에 대해 다룬 글들은 영원히 어둠 속에 묻어버리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고 지금도 못 보여준다. 그게 소설을 쓰는 방식에서도 드러날 수밖에 없달까. 감정세공인의 경우... 감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줬다고 읽혔다는 것이 묘한 게 사실 난 그 글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회피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게 '감정'이든 뭐든, 그 글에서 써졌어야 할 부분을 건너 뛰어버린 느낌은 나만 받은 건지, askalai님이 글을 쓰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있다. 전부 다는 아니고... 음... 사실 쓰레기, 좀비, 안개 속에서는 스스로는 회피한 부분이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아니 좀비는 좀 있다. 그런데 내 안에서 느끼기로는 좀비에서 쓰지 못한 부분과 나와 그녀와 죽음에서 넘어가지 못한 부분은 종류가 다르다. 앞의 것은 이야기를 충분히 끌어내지 못한 거였고 뒤의 것은 내 안에서 뭔가 제동이 걸려버린 경우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내 글은 모두 걸림돌을 아예 돌아서 가거나 넘어가 보려다가 걸려 넘어진 글밖에 없는 것 같다.

“돌아서 간다”는 말은 오해의 여지가 많아서 풀어보자면, 잘 표현하기 위해 돌아서 가는 경우와 피하기 위해 돌아서 가는 게 다른데 지금 말한 경우에는 후자가 맞는지 후자 맞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 게 자기 단점을 고치려고 아무리 노력해 봐도 성공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대부분 작가들도 단점이 '보이지 않게' 하는 법을 터득하는 거고. 내 경우엔 물론 그 경지까지 가지 못했지만(...) 단점에 매달릴 때마다 그 시간에 차라리 장점을 강화하는 게 낫다는 말을 듣는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askalai님이 바라는 방향은? 사실 난 스스로 단점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둘 중 어느 방향이냐를 결정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단점을 완전히 파악한다면 돌아가는 것이 더 이상 회피를 위한 회피가 아니게 되겠지.

완벽하진 못하나마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 글의 단점은? 이제까지 계속 말한 대면...의 문제는 글의 문제일 뿐 아니라 내 자신의 문제고 가장 큰 단점이겠지만 글에 있어서 만으로 국한시킨다면 지금 1차 목표는 구성력 향상이다. 즉흥적으로 쓰는 편이다보니 늘 구성에 구멍이 있다.
아 이런 질문 받으면 원래 '나에게 단점 따윈 없다!'고 말해야 하는 건데 실수했다;;;
"제 책을 읽으신 분들은 저 발언을 잊어주세요"

(웃음)

쓰고 싶은 이야기보다 쓰고 싶은 장면과 스타일이 먼저라고 말했는데, 장면과 스타일은 만족하게 썼는지. 흐음. 만족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쓴 듯.
다른 얘기지만 번역에 있어서도 이건 정말 잘했어! 라는 종류의 만족이나 도취를 느낀 적이 별로 없다. 심지어 전에 언젠가 "이제까지 한 번역 중 제일 잘한 건 뭐라고 생각해요?"라는 질문을 받고 "전에 한 건 다 마음에 안 드는데요."라고 대답해서 그러면 안 된다는 말까지 들었다..-_- 책 산 사람들에게 실례라(먼산) 하지만 그때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했다.

한동안 신작이 없다. 커헉... 음. 한동안은 번역에 열중해 있었고 지금은 또 졸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매달려 있는지라 신경이 글에 쏠리지 않아서라는 게 제일 큰 이유인 듯... 실제로 글을 잡았을 때 쓰는 속도 자체도 몇 년 전에 비해 너무나 느려지기도 했고. 하필 지금 그 문제를 대면하려니 "난 과연 소설을 더 쓸 수 있는 걸까?"라는 어두운 생각마저 드는데 -_-;

지금 그 문제라면 아까 말한 대면의 문제? 겸사겸사.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단편이든 장편이든,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 상태에 대해서 초조함을 느끼지 않게 됐다. 쓰게 되면 쓰겠지, 라는 태평한 마음가짐-_-이 생겼달까. 그런데 몰아세우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글이 분명히 있다.

태평한 것 자체는 별 문제가 없는데, 글이 쓰게 되면 쓰는 거지 닦달한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이렇게 태평해도 글이 나올까가 고민되는 건가? 고민이랄 것도 없이 요새는 소설 생각을 워낙 안해서;;; 그래서 그런 생각을 잠깐 해본 것. 아마 몇 달 뒤면 또 달라지겠지. 다만... 장편의 경우에는 좀 더 그런 위기감이 있다. 지금까지 장편이라곤 덜렁 하나밖에 안 썼는데 꼭 쓰겠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없어져가고 전과 다른 방식으로 장편에 힘을 모으기엔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 같은 시간을 들이면 공부하거나 번역하는 게 훨씬 남는 장사다보니. ㅎㅎ
그래서 이러다 장편을 쓸 수 있는 걸까 생각하곤 한다.

그러고 보니 “게시판에 열리면 글을 쓸 지도”라는 말을 하며 장편 게시판 열어달라고 해볼까, 라는 이야기를 했던 게 생각난다. 오래 전 일이다. 으하하; 뭐... 그렇다고 포기한 건 아니니까(...)

장편 “패러노말 마스터”는 원래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에서 오랜 시간 연재하던 글로 알고 있다. 완결을 보기 얼마 전, 판타지 문학상이 열려서 그 쪽에 새로 연재하게 되면서 상당부분 이야기에 손을 봤다던데 전체적으로 서너 번은 다시 썼다. 마무리에는 여러 모로 아쉬움이 남지만 운이 좋았다(먼산)

어떤 아쉬움? 사실 패러노말 마스터야말로 아까 말했던 써야 할 부분이 써지지 않은 단점이 심하게 나타난 소설이라서 내가 그 점을 가장 잘 아니까 아쉽지.


번역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느니만큼 번역 이야기로 넘어가자. 어떤 글을 제일 재미있게 번역했는지 '빼앗긴 자들'이 첫 번역이라 제일 몰두했던 것 같고  제일 신나서 달린 건 디스크월드. ‘디스크 월드’랑 ‘멋진 징조들’은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이 좋아하고 아닌 사람들은 많이 안 좋아하고 그러더군. 크립토노미콘도 그렇다 참.


askalai님은 번역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askalai님이 번역한 작품으로는 코난 도일의 “마라코트 심해”, “브라운 신부 5권 - 스캔들”, 헤인 시리즈 “로캐넌의 세계”, “유배 행성”, “환영의 도시”, CSI 소설판 “무덤의 증언” 등등이 있다.


‘멋진 징조들’에 보면 두 작가의 말 뒤에 그 말을 비슷하게 쓴 번역자의 말이 있다. 내가 본 중 제일 재미있는 옮긴이 이력이었다. 그 뒤 번역료 올랐는지. 오르긴 했다.


멋진 징조들을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부연 설명하자면 멋진 징조들은 테리 프래쳇과 닐 게이먼이 함께 쓴 소설이다.
멋진 징조들의 테리 프래쳇 작가 소개를 보면 “프레쳇은 사람들이 바나나 다이커리를 사주는 것을 좋아한다(사람들이 작가 약력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라고 적혀 있다.
닐 게이먼 부분에는 “바나나 다이커리에 대해서는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지만 보는 눈이 있는 팬들이 돈을 보내주는 데에 대해서는 언제나 무척 기뻐한다(게이먼은 테리 프래쳇의 약력을 읽었고,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심하고 있지만 아무려면 어떠냐고 생각하고 있다).” 라고 적혀 있다.
마지막으로 askalai님이 쓴 옮긴이의 약력에는 “바나나 다이커리에는 관심이 없고 팬들이 보내주는 돈은 기대하지 않으나, 이 책으로 번역료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한다(옮긴이는 테리 프래쳇과 닐 게이먼의 이력을 읽었고, 역시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적혀있다.



많이는 안 올랐나? 아직 더 올리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그 때 이후 번역을 많이 안 하기도 해서.

긴 시간 나눈 이야기를 접어야 할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거울에 합류한 거야 내가 잡아서이고... 거울에 합류하면서 좋았던 점은?일단 이쪽 계통에서 단편을 쓰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볼 수 있었던 게 제일 좋았고 1년에 한번씩 단편집을 만든다는 점이 특히 좋다. 거울을 통해 새로운 작가도 알게 되고 느슨한 듯 보이지만 꽤 애착이 가는 곳이랄까. 질리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 다가올 거울 3주년 축하한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계속되길 바란다.


askalai님은 창간호부터 함께 해왔다.


전에 언젠가 판타지 SF 다 좋아하지만 SF 책은 나오면 참지 못하고 다 산다, 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즉, 읽는 걸 더 좋아하는 건 SF 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창작은 판타지 쪽인 듯? SF도 요새는 나오는 걸 다 사진 않지만 ^^

정말 많이 나와 다 사기 어려울 정도다. SF 걸작들은 읽고 나서 정말 포만감이 느껴지는데 판타지는 오히려 뭔가 허기진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판타지를 쓰고 싶어진 걸지도.
SF라고는 해도 르귄이나 젤라즈니는 양쪽에 걸쳐 있지만. 최근에 가장 사랑하는 작가는 역시 르귄인 것 같다. 르귄 같은 글을 쓰고 싶은데 너무 멀다.

르귄 같은 글이라면? 말 그대로 르귄이 쓰는 소설 같은 글. 뭐 흔히들 얘기하는 장점은 넘어가고 내가 가장 반한 부분은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 같으면서 결국에는 마음을 찌르는 표현들, 좁아 보이는 세계에 담아내는 엄청난 스케일,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완벽한 이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깊이, 일까나.
하지만 내가 쓰고 싶다! 고 외치는 작품은 오히려 초기작들이다. 가장 뛰어난 걸작들이 아니라. 로캐넌의 세계, 유배 행성, 환영의 도시 같은 글. 그런 거 쓰고 싶다. 읽으면서나 번역하면서나 끔찍하게 공감했다. 번역하면서 도취되었었달까, 초고 수정하면서 "헉. 이 부분은 맛이 가서 번역 했구나,“ 싶은 부분이 꽤 되었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책 사주세요. 기왕이면 인세가 제게 돌아오는 놈으로(...).

어떤 책이 인세가 들어오는데? 어지간한 책은 사주시면 다 좋다. ^^

인터뷰에 응해주신 askalai님께 감사드립니다.


36호 인터뷰 예고 - 창간 3주년 기념 특별 인터뷰!
그간 안팎으로 혹독하다는 평을 받아온 거울 독자우수 단편단, 그 베일을 벗깁니다!
독자 우수단편 선정단 인터뷰 많은 기대 바랍니다.
독주 우수단편 선정단에게 하실 질문은 자유 게시판에서 5월 15일까지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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