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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chizedek@naver.com 단편을 읽으며 어딘가 끊어진 듯한, 미완성의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파국을 향해 가파른 곡선을 그리는 호흡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파국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작품 자체가 가지는 한계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약 작가가 이야기를 만드는 데 있어 현재 어떤 벽에 부딪혀 있다면 그것은 형식적인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단편에서 보여진 작가의 세계관은 절망이었다. 좌절이었다. 그냥 좌절이나 절망도 아닌, 침체되고 오랫동안 고여 있는 멈춰 선 절망이다.
가연의 단편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적당량의 완급조절이 아니다. 기승전결의 조화로움도 아니다. 진정으로 작가를 성장시키는 것은 세월이며 경험일 것이다. 지금은 침제 되어 있는 작가의 세계관이 언젠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때, 소설 또한 앞으로 한 단계 도약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작품도 좋지만 나는 그 이후가 더욱 기대된다. 아직 이 한 단편선으로 가연의 모든 것이 보여졌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과정이며 앞으로 도달할 곳을 향한 수단이 될 것이다.
-2005.4.29.[가연단편선:신체의 조합-상실과 부재에 대한, 흥미로운 斷片] M.절영-


그리고 가연이 돌아왔다.
길게 잡아 1년, 짧게 보아 석 달. 두 개의 소설을 연달아 선보이며 작가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거울에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해서 이 작가가 그간 잠잠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작가라면 신작으로 독자와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 그 동안 그가 잠적했었다고 치더라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신작을 거울에 올리지 않았었다.’ 다시 말해서 이만한 시간을 두고 발표한 글에서 의미심장한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해도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갈증/희망/무대/ 각각의 글은 다채롭게 반짝인다.
앞에 나는 부끄럽게도 나의 예전 글을 인용했다. ‘내가 그랬잖아?’라는 어투는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기 힘든 방식이지만 욕망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지금은 예전보다는 뚜렷한데, 예전에는 막연한 한 장면에 대한 이미지로 글을 썼다면,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할 거야, 혹은 이 문장을 반드시 넣을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쓰는 정도로는 진보해서 글을 쓰는 거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내버려두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로 글을 쓰는... 그런 느낌?
……글을 쓰면서 내가 나에 대해서 알아가고, 글을 쓰면서 내가 세상을 이런 식으로 인식하는 구나, 라는 걸 알아가는 것 같아요. 글을 쓰는 것 자체가 거창하게 말하면 저에게 깨달음을 주는... 순간이 있는 것 같아요.
-2007.3.31.[인터뷰/누군가를 만났어-배명훈,김보영,박애진을 만나다] 진아-


[갈증]까지만 해도 변화는 없는 듯하다. 과격한 설정, 하드코어적 표현 방식... 형식상의 차이가 있다싶지만 이 글에서는 예전의 가연이 느껴진다. 그는 빠져나가고 싶어 하지만 빠져나가지 못한다. 결국 과격함은 더욱 많은 피를 부르는 블랙홀에 불과할 뿐이다. 이대로 였다면, 실망했을 터이다. 절망은 여전히 멈춰서 있을 뿐이다.

이대로 내버려두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로 글을 쓴다고? 이미 작가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누군가 당신에게 자꾸 비틀려있고 허점이 있고 잘못이 있다고 말하고 있을 때 그것에 바르게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연 같은 작가야말로 성장하기 힘든 부류다. 이미 자신의 작풍을 이루어서 그것만으로도 인정받는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미완성을 보고도 호들갑을 떤다. 바로 나같이.
그러면 정체 자체가 대단함이다. 펜이 꺾이고 흔들리지 않은 것만도 훌륭함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꼭 사랑받아야 하는 거야?”
-2007.8.31.[무대] 가연-


그래! 이제 적어도 화자는 문제가 자신임을 발견한다. 관계가 아니다. 인간은 없다. ‘나’만 있다. 이제까지 가연의 소설을 수놓았던 것이 인간과 인간이었다면 이제 그것은 나와 타아의 문제로 치환된다. 때론 나조차도 희미하고(무대) 나 외엔 모두가 관객일 뿐인(희망) 내면 깊은 곳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때라고? 작가는 코웃음 친다. 화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한없는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진다. 화자는 어떤 식으로 침체된 절망을 빠져 나갔는가? 그는 더욱 깊게 침몰한다. 이런 작가라니! 이런 화자라니!

나는 너무 성급하게 펜을 들었다. 옳지 않았다. 계속 후회한다. 하지만 기다릴 수 없었다. 혹시 아는가, 이 작가가 언제 또 다른 안드로메다행 기차를 타버릴지. 그는 폭발하는 에너지를 가졌고 이미 폭발하는 중이다.

이 가학적인 엔진이 언제쯤 스토리를 가진 이야기에 장착될지 기다려봅니다.
-2007.7.28.[희망] 배명훈-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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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연 07.09.29 17:12 댓글 수정 삭제
    원고 받자마자 제목 보고 두근두근 하며 읽었다가 앉은 자리에서 열 번 읽었어요.
    절영님,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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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nn 07.09.30 00:41 댓글 수정 삭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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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영 07.10.01 21:16 댓글 수정 삭제
    가연/저두 사랑합니다.>_<(왠지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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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연 07.10.14 20:47 댓글 수정 삭제
    절영님과 저는 서로 사랑하는군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건 멋진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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