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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아름다운 헬레나

2013.08.31 00:5508.31

아름다운 헬레나

 

정도경


0.

찬바람 부는 계절이 다가오니 우리 모두 치정을 논해 보도록 하자. (심각)

물론 계절 변화와 치정 사이에 뚜렷한 인과관계는 없다. 그냥 편집장님이 이번 호는 어째 기획기사 꼭지가 좀 한산할 것 같으니 뭐라도 써 달라는 특명을 내리셨을 뿐이다. 그런데 그 특명을 받은 시각이 마감 당일 저녁 약 7시경이었던 관계로 마감을 다섯 시간 앞두고 초 긴급하게 쓸만한 주제가 생각이 안 나서 잘 모르겠으면 치정, 이라는 원칙대로 (?) 밀고 나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헬레나다.



1.

카렐 차펙의 [R. U. R.]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다. 원제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Rossum’s Universal Robot) 혹은 그냥 로봇으로, 그 유명한 단어를 처음 사용한 바로 그 전설의 고전이다. 저자 차펙에 따르면 희극적인 서막과 3막으로 구성된 집체극이라는데, 요즘 한국 독자들이 읽어보면 서막이 뭐가 어째서 희극적이라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서막에서 유니버설 로봇 공장이 있는 로숨의 섬에 신문사 사장의 딸 헬레나 글로리오바가 찾아오는데, 헬레나를 보자마자 유니버설 로봇 공장의 모든 남자들이 일시에 사랑에 빠진다. 헬레나를 처음 맞이한 대표이사 도민은 희곡의 지문에 따르면 넋을 잃고 쳐다보거나 황홀하게 바라보며”, 괜히 자세히 설명을 하려 들고 그러면서 슬그머니 헬레나 옆에 가서 앉는다. 도민만 이러는 게 아니라 헬레나가 로봇 생산 공정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길게 머무르겠다고 말하자 법률자문인 부스만은 아이고 하느님, 이렇게 좋을 수가!”라고 외치고, 건축가 알뀌스뜨는 제일 좋은 방을 준비해 주겠다고 수선을 떤다. 그리고 서막이 끝날 무렵, 그러니까 헬레나가 로숨의 로봇 공장에 도착한지 한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도민이 청혼을 한다. 길 출판사에서 2002년도에 출간된 김희숙 번역 판본에 의하면 15페이지에서 처음 만났는데 도민이 52페이지에서 청혼을 하니까 한나절 고사하고 만난 지 한두 시간 만에 결혼하자고 덤벼드는 것이다. 여기에 헬레나가 말도 안 된다고 항의하자 도민은 태연자약하게 공장의 모든 사람들이 헬레나와 사랑에 빠졌으니 아마도 차례로 청혼이 들어올 것이며, 그러므로 자신과 결혼하지 않아도 다른 다섯 명 중에서 누군가와 결혼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제 1막으로 넘어가면 헬레나는 도민의 아내가 되어 결혼 십주년을 맞이한다! 서막과 제 1막 사이의 시간 차가 십 년으로 설정이 돼 있으니 헬레나는 로숨의 로봇공장에 괜히 찾아왔다가 그 날로 발목 잡혀 버린 것이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그리고 이런 초스피드 결혼이 뭐가 그렇게 웃겨서 차펙은 희극적인 서막이라고 못을 박은 것일까?

 


2.

서양 문학에서 원조 헬레나는 트로이의 헬렌이다. 호머(Homer)의 일리아드(Iliad)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그 헬렌이 맞다. (그리스식 발음으로 하자면 헬레네라고 한다.) 헬렌은 신들의 왕 제우스와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고 (일설에 의하면 제우스와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 사이에서 낳았다고도 한다) 형제로는 별자리 중에서 쌍둥이 자리의 주인공인 카스토르와 폴룩스, 그리고 자매 클리템네스트라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헬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서 결혼할 나이가 되자 온 세상의 왕과 왕자들이 다 몰려들어서 구혼을 했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구혼자 숫자를 다 합쳐보면 45명이라고 하니 굉장하다. 이 중에서 실제로 헬렌과 결혼을 한 사람은 미케아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우스였다. (참고로 실존인물이다. 1929년도에 그리스 미케아에서 왕궁터가 발굴되어 1990년대까지 발굴 작업이 계속되었다.) 메넬라우스가 어떻게 40명이 넘는 다른 구혼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헬렌을 쟁취했느냐 하면 다름 아닌 제비 뽑기를 해서 이겼기 때문인데 (뭐 이딴 식으로 결혼을 하다니…) 그렇게 남편뽑기(!)를 하기 전에 구혼자들이 모두 모여서 제비 뽑기에서 누가 이기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의리를 지켜서 이 남편감을 보호해주기로 맹세를 했다고 한다. 결과에 승복 못하고 구혼자들끼리 싸움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는데 나중에 이 맹세가 트로이 전쟁에서 메넬라우스에게 유리하게 이용된다.

참고로 메넬라우스의 동생 아가멤논은 헬레나의 자매 클리템네스트라하고 결혼해서 겹사돈이 된다. 근데 클리템네스트라는 나중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원한을 품어서 남편 아가멤논을 죽여버린다. 한편 헬렌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홀랑 반하는 바람에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다. 자매가 둘 다 흠좀무. 이 문제의 파리스 왕자는 스파르타에 외교적인 임무를 띠고 뭔가 일하러 오는 척했다가 메넬라우스가 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궁을 비운 사이에 헬렌을 납치해서 트로이로 데리고 와 버린다. 격분한 메넬라우스는 결혼하려고 제비 뽑기(…) 할 때 자신을 보호해주기로 맹세했던 자기 마누라의 전 구혼자들을 불러모아서 트로이에 전쟁을 선포한다.

일리아드의 내용을 상세 분석하는 것은 본 기사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쯤에서 요약을 하자면 권세는 있지만 나이가 많은 남편, 그 남편과 애정 없는 정략결혼을 해야 했던 젊고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그 아내와 불타는 사랑에 빠진 젊은 남자라는 삼각구도가 중요하다


Helen_2004.jpg   Menelaus.jpg

(2004년도 영화 Troy에서 파리스와 헬렌 그리고 불만에 가득 찬 헬렌의 남편 메넬라우스)


사실 이런 삼각관계는 어느 치정극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해빠진 구도이긴 하다. 유럽의 중세 로망스에도 이런 관계가 종종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et Iseult)가 있는데, 여기서는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사랑에 빠지지만 이졸데는 트리스탄의 삼촌인 마르크 왕과 정략결혼을 한다. 오래 된 이야기이고 원전이 켈트족 전설인데 프랑스로 건너가서 시로 쓰여진 만큼 버전도 구전 버전과 시 버전 등등 여러 가지가 있어서, 마르크 왕이 트리스탄의 삼촌이라는 설도 있고, 그런 혈연관계 없이 그냥 주군이고 트리스탄은 기사라는 버전도 있다. 어쨌든 마르크 왕이 트리스탄이나 이졸데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며 이졸데와 트리스탄이 금지된 사랑에 빠진다는 진행은 비슷하다. 다만 여기서는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그냥 오다가다 사랑에 빠진 게 아니고 트리스탄이 아일랜드까지 이졸데를 데리러 갔다가 돌아오는 배 안에서 마술의 약을 먹고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본격 약빨고 눈맞은 관계 왜냐하면 아일랜드의 공주인 이졸데에게 영국 콘월의 지배자인 마르크 왕과 그의 기사 트리스탄은 국가적으로 원수에 가까웠고, 그래서 여러 버전에서 이졸데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반항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시적으로 이졸데의 마음을 돌리려고 사랑의 묘약을 먹는다는 버전도 있고, 약기운이 3년 간다고 그래서 먹었는데 평생 가더라는 버전도 있다. 어쨌든 그렇게 데려온 이졸데와 정략 결혼한 마르크 왕은 또 알고 보니 좋은 사람이라서 이졸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주기 때문에 이졸데는 깊은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영국의 아더왕 전설에서도 기사 란슬롯이 왕비 기네비어를 연모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다만 아더왕의 경우는 본인이 전설의 주인공이다 보니까 워낙 영웅적으로 묘사가 돼서 기네비어보다 딱히 나이가 많다고 강조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이렇게 금지된 사랑 이야기는 어느 나라, 어느 언어권에서나 대중문화에 흔하게 나타난다. 그 이유야 뭐 다들 아시겠지만 당사자 두 사람 사이의 낭만적인 사랑이 반드시 결혼의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개념은 서양에서 19세기 이후 비교적 근대에 정착되었고, 그 이전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역사의 아주 긴 세월 동안 사랑이라는 감정과 결혼이라는 제도는 크게 상관이 없었으며, 특히 왕이나 귀족 등 상류계층일수록 재산이나 신분 등의 물질적, 사회적 자원을 지켜내고 증진시켜 후계자에게 물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결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과 헬렌의 차별점이 뭐냐 하면 바로 전쟁이다. 헬렌은 그 미모가 너무나 빼어났기 때문에 단순히 삼각관계 치정극에만 휘말려 든 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트로이가 멸망했다. 그리고 정작 헬렌 자신은 나라가 하나 망하고 여러 사람 죽게 된 원흉이었지만 멀쩡하게 살아남는다. 이것도 버전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남편 메넬라우스가 드디어 헬렌을 찾아내서 분노에 불타서 칼을 치켜든 순간 헬렌이 울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메넬라우스가 일거에 화를 거두고 다시 받아들였다는 버전도 있고, 우는 장면 빼고 그냥 헬렌을 다시 만난 순간 너무 예뻐서 모든 걸 다 용서했다는 버전도 있다. (이런 바보가 왕이니까 전쟁이 나지…) 그렇게 남편에게 다시 돌아갔으니 사실은 스파르타의 헬렌이어야 맞지만 역사에 지금까지 트로이의 헬렌으로 더 유명하게 남은 걸 보면 헬렌은 얼굴로 나라 하나를 무너뜨린 인물로서 동양의 경국지색(傾國之色)에 정확히 들어맞는 위험하고 부정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참고로 헬렌은 그 미모로 일천 척의 배를 출범시켰기 때문에 배 한 척을 출범시키는 미모는 1000분의 1이라서 밀리헬렌(millihelen)이라고 한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헬레나의 원형은 그러하다.

 


3.

트로이 전쟁을 노래한 서양 영웅서사시의 양대산맥이 그리스 시인 호머의 일리아드와 로마 시인 비르길리우스 (Virgilius, 버질 Virgil)의 아에네이드 (Aeneid)이다. 이로부터 약 1800년 정도 세월이 흐른다. 유럽은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를 지나 인본주의로 회귀하는 르네상스를 거쳐서 인간의 이성을 최고로 치던 계몽주의에 이어 감정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 시대에 접어든다. 이제 문학은 왕이나 영웅을 찬양하거나 교훈과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서 사람의 마음 기쁨, 슬픔, 분노, 공포, 사랑 등을 노래하게 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괴로워하며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내는 감상주의 소설이 발전한 것도 바로 낭만주의 초기 무렵이다. 1790년대에서 1800년대 초 정도 생각하면 된다. 바꿔 말하면 연애소설, 소위 멜로드라마라는 장르가 지금은 대표적인 통속 장르로 어디 가서 예술 취급도 못 받지만 사실은 낭만주의의 전신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낭만주의가 인간의 강렬한 감정을 주로 다루었고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 진리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곁다리로 발전한 것이 호러 장르이다. 장르 문학의 효시는 그러니까 낭만주의 시대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리고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산업 사회가 발전하여 유럽에서는 태생이 귀족이 아니더라도 글을 배울 수 있고 돈을 벌어서 문화를 즐길 여유가 있는 계층이 생겨나자 즐기기 위한 오락으로서의 문화예술도 함께 발달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제목에도 차용한 아름다운 헬레나이다.

[아름다운 헬레나] 혹은 프랑스어 원어 발음대로라면 [아름다운 엘레느] (La belle Hélène) 19세기 중후반 유럽에서 대히트를 쳤던 코믹 오페라의 제목이다. 원작자는 쟈끄 오펜바흐 (Jaque Offenbach, 1819-1880)라는 독일 태생의 프랑스 작곡가인데, 흥겨운 음악을 배경으로 그리스 신화에서 왕과 영웅이었던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등장시켜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때까지 세간에서 가지고 있던 고급 문화예술로서 오페라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고도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엘레느]의 기본 줄거리는 트로이의 헬렌 이야기에서 따왔기 때문에 젊고 아름다운 엘레느가 늙은 꼰대 남편(…)에게 불만이 많아서 젊은 남자와 바람이 난다는 구도인데 트로이의 헬렌과의 공통점은 딱 여기까지다. [아름다운 엘레느]에서는 파리스가 엘레느에게 접근하기 위해 목동으로 변장을 했다가 얼떨결에 넌센스 단어 게임을 하는 대회에 나가서 말도 안 되는 단어를 만들어내고 상을 탄다거나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탄다), 엘레느가 침실에서 버젓이 애인과 여러 가지 19금 활동을 하는 걸 남편 메넬라우스가 발견하고 화를 내자 오히려 당당하게 지금 바쁘니까 나가라고 쫓아내는 등, 영웅도 없고 비극도 없이 원형을 비틀어낸 이야기가 뜬금없고 풍자적이고 익살맞게 전개된다. [아름다운 엘레느] 1859년 프랑스에서 처음 공연하자마자 즉각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어서, 당시 기록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 미국과 러시아까지 거의 세계를 일주했고 지금도 여전히 무대에 오르고 있어 현재 700회 공연을 달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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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963년에 영국 런던에서 공연한 "아름다운 엘레느" 사진. 나의 아름다운 헬레나는 저렇지 않아)


러시아의 경우 1868-69년도 시즌에 처음 선보였는데 도입하자마자 폭풍같은 인기를 얻어 당시로서 기록적인 42회 연속 공연을 했고 1881년까지 총 132회 공연을 했다. 그러니까 초연 이후 13년 동안 평균 일 년에 한 번은 반드시 공연을 했다는 이야기다. 곁다리로 덧붙이자면 여기서 영향을 받은 문학가 중 한 명이 러시아의 극작가 안똔 체홉이고, 그리하여 체홉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는 자기 아버지뻘 되는 퇴직 교수와 결혼한 아름다운 옐레나가 등장하여 극중 모든 남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그 때문에 막 괴로워한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오펜바흐의 코믹 오페라가 유럽 전역에서 인기몰이를 하면서 헬레나” (혹은 그 변형인 헬렌Helen, 엘렌Ellen, 엘레느Hélène, 옐레나Елена 등등등)늙다리 꼰대 남편을 둔 젊고 아름다운 요부의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름 앞에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가 들어가거나 극중에서 아름답다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면 100%. 그리고 오펜바흐 덕분에 헬레나는 젊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자의든 타의든 반드시 남자 여러 명이 그 미모에 반해서 졸졸 쫓아다니며 여러 가지 바보짓을 저지르게 만드는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그 영향은 19세기를 지나 20세기 초중반까지도 남아 있었다. 본 기사의 초입에 언급했던 [R.U.R] 1920년 작품이므로, 오펜바흐의 코믹 오페라가 인기몰이를 하던 시절로부터 적어도 30-40년이 지났고 세기도 바뀐 시점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헬레나는 오펜바흐가 묘사한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어서, 그 이름을 가진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고 게다가 그 여주인공이 젊고 아름답다는 묘사가 이어지면, 차펙 시대의 독자들은 자동적으로 이 아름다운 헬레나뒤를 남자들이 줄줄이 쫓아다니면서 넋을 놓고 얼간이 짓을 할 것이라 기대하고 즐거워했던 것이다. 20세기 초는 물론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인 시대였으므로, “아름다운 헬레나는 말하자면 아는 사람만 알아듣는 농담이었고, 차펙은 통속 막장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 와서 장난을 조금 친 것이다.

그러나 코믹한 분위기는 서막에서 끝나고, 1막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헬레나는 통속극의 여주인공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나서 아이를 원하는데 낳지 못하는 비극적 여주인공으로서 후손의 출산이라는, 인간과 기계의 가장 큰 차이점에 대해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4.

폴란드의 볼슈틴(Wolsztyn)이라는 마을에 증기기관차 박물관이 있다. 볼슈틴은 폴란드 서남쪽에 있는데 인구가 다 합쳐서 만 사천 명이 좀 안 되는 조그만 마을이다. (2011년 현재 13723명이라고 한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시골 동네인데 단 한 가지 관광수입원이 바로 증기기관차 박물관이다. “박물관”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딱딱한 이미지와는 달리 볼슈틴에서는 현재까지 증기기관차를 정기적으로 운행하며 기관사 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2주 과정인데 무사히 마치면 기관사 제복과 함께 자격증을 준다고 한다. 아무렇게나 주는 가짜 자격증이 아니고 볼슈틴 증기기관차 박물관은 엄연히 폴란드 국영철도 화물노선에 속해 있기 때문에 진짜 증기기관사 자격증이라고 한다. 물론 관광객이 이 과정을 이수해서 폴란드 국영철도에 전격 취직했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못 들었지만 어쨌든 기관사 과정 끝날 때 졸업기념(?)으로 증기기관차를 직접 몰고 실제 운행 노선 중에서 일정 거리를 달려볼 수 있다. 유럽 전역에서 아직까지 진짜 증기기관차를 실제로 운행하는 곳은 여기 볼슈틴 외에 독일과 러시아까지 다 합쳐도 현재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그 중에서도 별다른 선수과정이나 자격요건 없이 누구든 찾아가서 기관사 과정을 직접 이수할 수 있는 곳은 볼슈틴이 아마 유일할 것이다.

이 증기기관차 박물관에서는 1917년형부터 1957년형까지 여러 가지 모델의 증기기관차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중 폴란드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한 1936년형 증기기관차의 별명이 “아름다운 헬레나” (Piękna Helen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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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헬레나 칙칙폭폭 버전)


볼슈틴 홈페이지에도 폴란드어 위키백과에도 이 이름에 대한 설명은 따로 없고 기관차에 대한 설명만 있다. 내가 볼슈틴에 찾아간 게 2005년쯤이었는데 그 때도 기관사장 아저씨가 관광객들을 이끌고 설명을 해주면서 “아름다운 헬레나”가 폴란드에서 직접 생산한 모델이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소개하셨으나 이름 자체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아마 아저씨도 모르셨을 것이다. 

서양에서 배나 비행기, 기차, 자동차 등 탈것은 여성으로 지칭하는 관습이 있다. 이중에서도 증기기관차는 구조상 기관사, 조수, 화부(火夫), 이렇게 최소한 세 명이 반드시 기관실에서 함께 일을 해야 운행을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기관사는 대부분이 남성이고, 그 중에서도 증기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 100% 남성이다. 여성으로 지칭되는 교통수단 중에서도 반드시 남자가 여러 명 쫓아다니면서(?) 낑낑 일해야 간신히 움직여 주시니까, 증기기관차에 “아름다운 헬레나”라는 농담 섞인 이름을 붙인 것은 모델이 처음 개발된 1936년도에는 상당히 재미있고도 자연스러운 작명센스였을 것이다. 


2000년 역사를 지닌 고전의 원형은 이렇게 여러 가지 변형을 거쳐 아직도 남아 있다. 비록 좀 엉뚱한 곳에 남아있고 그 흔적이 무척이나 희미할지라도.



5.

이런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과거와 현재도 많이 다르지만 동양과 서양은 정말 다르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중국의 양귀비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고 조선 시대 장희빈이 수백 년 지나서도 꾸준히 재해석되듯이,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인물들도 여전히 서양 문화예술 곳곳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이런 원형을 재발견하여 장난치고 가지고 놀고 재미있게 변형하며 즐기는 사람은 언제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때로는 원형 자체도 흥미롭지만, 그 사소한 변이 과정을 깨알같이 따라가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트로이의 헬레네 입장에서 2000년이 지나 "막장의 헬레나"로 이미지 변신을 당한 것이 반갑지는 않을 것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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