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2017.04.29 02:3504.29

  1

  비쳐드는 햇살에 먼지가 반짝였을 뿐이었겠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런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피아노 건반을 하나하나 꾹꾹 눌러가는 가을의 손끝에는 빛이 깃들어 있는 듯 보였고, 그 광경이 아름다웠기에 그걸로 충분했던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뚫어질 듯 악보를 노려보며 연주를 이어가는 모습은, 서툰 기색이 있었지만 동시에 그림처럼 아름답기도 했다. 연주는 조금 느린 템포로, 하지만 끊어지는 일 없이 이어졌다. 눈을 감고 듣기도 하고, 가을의 표정을 관찰하기도 하며 듣는 사이 연주는 끝이 났다.

  유가을이란 사람을 만나게 된지 겨우 한 시간정도 지났을 뿐이지만, 괜찮은 인연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그날 남해에 위치한 그 섬을 찾아간 것은, 섬을 찾은 당일로부터 한 달 쯤 전에 받은 이메일 한 통 때문이었다.

  ‘얼마 전 형의 콘서트에 갔었어.’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메일은, 몇 줄 더 읽어보니 곧 친척동생이 보낸 메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그를 나는 옛날부터 눈여겨봤었다. 내가 학생일 시절은 물론,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내 친척동생은 상당히 똑똑하던 애였던 것이다. 걔가 고3이 된 이후로 쭉 만나지 않은 후 그 이메일이 첫 연락이었다. 대학은 이미 몇 년 전에 졸업했을 나이인데, 요즘 뭘 하면서 사는지는 하나도 모른다.

  답장을 보낼 때 근황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메일을 마저 읽었다.

  친척동생이 보낸 장문의 편지는, 여러 부연 설명을 빼놓고 요점만 보자면, 대학교를 졸업한 후 쉬고 있는 한 여자애의 피아노 레슨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그 여자애는 남해의 외딴섬에서 살고 있어서, 이 섬으로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파일도 첨부되어 있었다.

  메일을 받은 후부터 한 달쯤, 어떡할까 갈팡질팡하다가 일단 움직이면서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섬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을 때까지도 명확한 결단을 내린 상태가 아니었다. 이대로 섬에 도착해서, 바로 발길을 돌릴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섬의 선착장에 도착하고 나서도 가을의 집까지 걸어가는 데에 걸리는 시간도 있었다. 그동안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최후에는 초인종을 눌러놓고 뒤돌아 도망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건 무례한 짓이긴 하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긴 한 것이다.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하며 , 여자애가 살고 있다는, 집 평수보다 넓은 정원도 있는 집이라기보다는 별장으로 보이는 목조주택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어쩐지 가을이라는 여자애가 돈 많은 부모 밑에서 버릇없이 자란 그런 애면 어떡해야 하지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를 맞아 준 건 두 사람이었다. 친척동생도 반가웠지만, 우선 이 만남의 주역이자 첫 대면인 여학생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전체적으로 선명하다는 느낌을 주는 여자애였다. 입고 있는 하얀 프릴블라우스의 음영과 갸름한 턱선이 창으로 들어오는 자연적인 렘브란트 조명에 의해 유독 도드라져 보여 그런 인상을 받은 것 같다. 뒤로 넘긴 갈색 머리카락을 날개 뼈까지 내려오게 길렀고, 귀하게 자랐다는 게 드러나는 단정한 용모는 곱슬거리는 앞머리를 이마가 보이게 오른쪽으로 넘기고 있어서 더 잘 드러나 보였다. 아무런 설명이 없었지만, 이 학생이 내가 가르쳐야 할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얼핏 보기만 해도 열의가 느껴졌다. 10년 동안 피아노를 쳤다는데, 분위기만 보면 피아노의 세계에 갓 발을 들여놓은 사람 같았다.

  나를 쳐다보며, 긴장한 듯 뻣뻣하게 굳어 있는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어, 나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곧 커피를 내오겠다기에, 오는 길에 많이 마셨으니 차가 있다면 차를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간 얘기를 나누다가 할 말이 떨어지는 것 같아 가을의 연주를 듣기 시작했는데, 몇 곡을 듣다가 바로 그녀를 가르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재능이 보이고, 역시 다년간 배웠던 사람인만큼 실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내가 유독 끌린 것은 그녀의 연주 스타일이었다. 원곡과는 안 어울릴 수도 있는 해석이, 정석과는 조금 다르지만 자기가 추구하는 느낌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리고 연주를 하는 자세와 표정의 섬세함 부드러움이, 과연 내가 가르쳐주게 되면 우리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가 어떤 결과로 맺어질지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의 재능이건 겉모습이건, 얼마간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몇 가지 다른 분야에 대한 취향이건 모조리 마음에 드는 걸 보니, 나는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듯 했다. 일단은 일주일에 두 번씩 내가 와서 가르치기로 얘기가 끝났고, 이틀 뒤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집에 돌아오면서 그날은 가을에게 뭘 가르쳐야 할지 고민하며 밤을 지새웠다.

 

  3

  나는 기본적으로 여가시간이 많은 사람이다. 친구도 많지 않고, 그 많지 않은 친구와도 그다지 자주 연락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몸이다. 그래서 가을을 위해 얼마간 거주지를 옮기기로 했다. 섬에서 가까운 도시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로 가을을 만났을 때는 집안에 가을과 나 단 둘만 있었다. 가을은 몇 마디 인사말 후에 곧장 피아노를 봐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잠시라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번에 봐서 알고 있듯 1층에 있는 문이 닫힌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방들 중 한곳에 피아노가 있다.

  그녀가 연주를 하면 나는 박자가 틀린 부분이나 기호를 제대로 못 읽고 연주하는 부분들을 바로바로 지적했다. 그녀는 그때마다 연주를 멈추고, 잘못한 부분을 고쳐서 다시 연주했다. 그렇게 하는 것 외에 쉬는 시간이 되면 나는 내가 읽은 책이나 재밌게 본 영화 얘기를 했다. 또 글을 쓰면서, 여행을 다니면서 감수성을 북돋고 식견을 넓힐 것을 권장했다. 예술 전반은 서 다른 예술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훌륭한 연주를 하는 데에는 감정적 영감이 필요하다. 한창 날씨가 좋은 때에 밖에 있지 않으면 손해다. 그렇게 말하며 피아노 연습은 멈추고 길을 나섰다. 봄이었고, 푸른 잎사귀 사이로 물결치는 빛살에 걸음을 내딛는 사이 어느 순간부터 먼 곳에서 푸른 빛깔이 어른거려 우리 둘은 그 온화한 빛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푸른빛의 실체는 바다였다. 바다를 둘러보고, 잡초들의 이름을 궁금해 하며 마을 외곽을 거닐었다. 레슨 첫날부터 이러는 게 당혹스럽기도 하려건만, 가을은 의문을 얼굴에 띄우는 일 없이 순전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그녀에게 피아노만 쳐도 먹고 사는데 걱정 없도록 가르쳐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산책을 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을은 무심코 빨라진 내 걸음을 쫒느라 그런지, 홍조가 올라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질 무렵에 가을을 집에 데려다준 후 발길을 돌려 배를 탔다. 집에 도착할 때면 해가 완전히 넘어갈 것이다. 석양에 물든 바다와 잔물결의 하얀 반사광을 바라보며 나는 턱을 괴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4

  새로 머물 곳에서의 짐정리가 어느 정도 끝난 후, 사흘 뒤인 목요일에 다시 그녀를 찾았다. 뭘 하고 있었느냐고 묻자, 거실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고 했다.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편안해 보이는 나무 의자가 보였고, 그 옆 테이블 위에는 방금 전까지 읽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The Secret Garden'. 비밀의 정원? 무슨 책이었던가 생각하는데, 버넷의 비밀의 화원이에요, 라고 가을이 말했다. 알고 보니 영문학 전공자였던 어머니로부터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선생님이 책을 읽으라고 권해주셔서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감정의 움직임 이라는 의미에서의 '감동'은 작곡이 도움이 된다. 연주에서도 마찬가지고. 책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촉매가 될 수 있으니 가까이 하는 게 좋다. 감동은 영감이 되고, 영감이 함께하면 자신의 한계와 틀을 넘어설 수 있다. 그래서 재능이 대단찮거나 성격이 추악하다 싶은 사람도 아름다운 곡을 작곡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 내 자신의 연주에 감격해서 울면서 연주하기도 해. 마음속에 있던 얘기들을 신나서 떠들다보니, 예전에 겪었던 그 감동들이 되살아나 내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말을 멈추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마음속에서 떠돌았다. 그래, 음악만 있으면 되겠구나, 그런 생각.

  말을 쏟아내는 동안 가을은 시선을 돌리는 일 없이 잠자코 내 말을 경청해주었다. 그 덕분에 더 울컥했던 것 같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가을도 내말에 동조되어 덩달아 감정이 북받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시 연습을 시작하고,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킬 때 가을이 잠시 기다리라더니 방을 나갔다. 물이라도 마시고 오나 했는데, 얼마간 돌아오지 않아 나는 가을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가을이 연주하던 악보를 보며 음표들을 하나하나 건반으로 옮겨갔다. 이 곡은 잘 모르는 곡이었다. 가을이 고등학생 시절 친구의 결혼식 때 연주를 하게 되어, 그때 연주할만한 곡을 추천해 달래서 같이 고민하다 문득 제목이 떠오른 곡이었다. 어떤 곡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났지만 결혼식에 어울리지 않을까싶어 꼽은 곡이었다.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의 '헌정(Widmung)'이다.

  슈만이 자신의 신부인 클라라(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에게 결혼식 전날 바친 미르테의 꽃 스물여섯 곡의 가곡 중 첫 번째 곡이다.

  정확히 이르자면 내가 치고 있는 것은 리스트(Franz Liszt)의 피아노 독주곡 버전이다.

  초견으로 치는 거라 사실 국어시간 때 하는 받아쓰기와 다를 바 없었다. 창에서 쏟아지는 바다의 푸른빛이 어린 햇빛에 비춰 악보를 읽으며, 가을이 앉았던 자리에서 이렇게 연주하고 있자니 어쩐지 지금에서야 헌정의 정서를 알게 된 것도 같다.

  Du meine Seele, du mein Herz,

  Du meine Wonn', o du mein Schmerz,

  Du meine Welt, in der ich lebe,

  Mein Himmel du, darein ich schwebe,

  O du mein Grab, in das hinab

  Ich ewig meinen Kummer gab.

  Du bist die Ruh, du bist der Frieden,

  Du bist vom Himmel mir beschieden.

  Daß du mich liebst, macht mich mir wert,

  Dein Blick hat mich vor mir verklärt,

  Du hebst mich liebend uber mich,

  Mein guter Geist, mein beßres Ich!

  당신은 나의 영혼, 당신은 나의 심장

  당신은 나의 환희, 오 당신은 나의 고통

  당신은 나의 세계,

  ……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가을이 문가에서 조용히 멈춰 서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들고 있는 커다란 접시 위에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있는 복숭아가 물기를 머금은 뽀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을은 내가 그녀를 보면서 연주를 멈추자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선생님처럼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별로 잘 친 게 아니야."

  가을은 방 한 가운데에 하나 있던 탁자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작은 탁자였다. 접시에 얹어놓은 포크의 손잡이가 탁자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가을의 말을 돌려서 부정하기는 했지만, 내심으로는 이 연주에 꽤 번뜩이는 부분이 있는 듯해 흡족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나는 칭찬에 인색한 편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사실 자주 나 자신에게 놀라기 때문에 남겨놓은 감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남들 앞에서 이런 자화자찬을 하다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누가 핀잔을 준 적이 있다.

  가을은 접시를 올려놓은 탁자를 탁자 채로 들고 내 옆에 갖다 놓았다. 드세요, 라고 말하며, 자기도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가을이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쳐주시면 안 될까요?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악보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건반 위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가을은 내 옆에서 허리를 곧게 편 채, 내 연주에 집중하려는 듯, 혹은 내면에 침잠해 있는 듯한 눈길을 허공에 던지고 있었다. 그런 가을을 일별하고 연주를 시작했다.

  같은 건반 하나를 쳐도 선생님 같은 분이 치면 소리가 다르네요.

  연주가 끝나자 가을은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이번 연주가 그렇게 좋았던가 의문이 생길 정도로 가을은 눈을 빛내며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나는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해도 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처럼 저도 피아노를 잘 치고 싶어요. 그리고……. 더 말을 이어가려던 가을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너무 말이 많았다는 듯 죄송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살폈다. 나야 물론 괘념하지 않았다.

  그때 가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문득 방금 전에 가을이 한 말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감탄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자기도 잘 치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있던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방금 전의 한숨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의 연습은 지금 공기처럼 미적지근했다. 시간이 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생각은 아까 전 그 순간에 멈춘 채 끊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이후, 그저 멍하니 앉아있는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좋았을까. 욕망인지 열정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갈 길 잃은 상념에 무력하게 휩쓸려 버렸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지만, 드럼을 배우던 친구의 권유로 같이 사람을 모아 밴드를 시작하고, 내가 작곡한 곡이 히트를 치면서 어느새 그 시절을 벗어날 수 있었던 자신을 자각하고 있었다. 나는 평온하지만, 마음의 평온을 얻는 법 같은 것은 모른다. 몰라서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사실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나는 그래도 가을을 위해 계속 고민해보았다.

 

  5

  다음 날, 레슨 날이 아니었지만, 어제 일 때문에 왠지 이대로 별 도움이 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시 바다를 건넜다. 가을은 어제의 기분이 내 착각이었던 양 배 위에서 바라봤던 바다의 푸른빛처럼 평온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 있었다. 그 빛을 보자 말해주려고 준비했던 말들이 아래로 들어갔다. 나름대로 마음을 정리한 모양이다. 다행이긴 하지만 새벽녘까지 고민했던 일이 허무해져서, 가을이 조금만 더 고민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어떤지 평가해달라며 곧장 피아노 앞에 앉았다. 겨우 하루사이에 눈에 띄게 일취월장할 리는 없는 터라, 당연하게도 크게 나아진 점은 없었다. 다만 손에 망설임이 사라지기는 했다.

  "악보가 대강 손에 익었나 보네."

  "네, 결혼식이 겨우 이틀 뒤니까요."

  빨리 잘 칠 수 있게 돼야 할 텐데. 뒷말은 혼잣말이었다.

  이틀 뒤라, 사실 나는 가을에게 다른 연습을 시키고 싶었던 터라, 이틀만 참으면 되겠구나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 마음을 속에 갈무리하고 가을의 연주를 봐주는데 집중했다. 일단 기본은 악보에 적힌 데로 정확하게 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 그녀는 속주에서 템포가 조금씩 어긋난다는 단점이 있다. 사실 일반의 귀로는 메트로놈을 갖다놔도 모를 수준의 문제긴 하다. 그래서 조급해할 것 없이 느긋하게 가르쳐갔다. 내가 배웠을 때처럼 윽박지르며 가르치기엔 가을이 너무 연약해 보인다는 게 더 큰 이유긴 했지만.

  그리고 예정되었던 결혼식 날짜가 다가왔다.

  가을은 식 전날 묵을 곳을 정하랴 그 뒤에 뭐하랴 할 예정이라 며칠 집을 비우게 됐기 때문에, 나에게 일주일이라는 자유시간이 생기게 되었다.

  이메일을 확인하다, 예전에 받았던 친척동생의 메일을 보고 그 녀석에게 시간이 된다면 이번 주 안에 만나자고 써서 보냈다. 이 과정에서 꽤나 망설였는데, 그건 자조적으로 말해서 내 인간관계가 파탄나버린 원인 중 하나와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할 일도 없는데 굳이 뭔가를 하기는 귀찮다는 것이었다. 내가 먼저 약속을 잡는 건 꽤나 의지가 필요한 일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일단 메일을 보내고 나니 마음은 편해졌다.

  그 후 가을이 잘 연주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가을이 연주하기로 한 곡을 천천히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나는 슈만처럼 후대에 이름을 알리 수 있을까 의문이 떠올랐다. 애초에 슈만에 대해 잘 모르는 입장인데 가을 앞에서 너무 떠들어 댄 게 아닌가, 별의 별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의 흐름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서, 그냥 끝장을 보자는 심정으로 거리를 걷기로 했다. 이 도시를 다 둘러보기 전에는 이 생각이 멈추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6

  이튿날 친척동생을 만났다. 나는 식당에서나 만나 밥 먹으며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그 녀석이 답장에서 자기 집으로 오라며 주소를 알려주었다. 막상 가보니 처음 보는 여자가 나를 맞아주기에 집을 잘못 찾아온 건가 어리둥절했는데, 뒤이어 녀석이 나와서 설명해주었다.

  알고 보니 녀석의 누나였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나에겐 친척누나인 셈이다. 남매가 같이 독립해서 산다는, 흔한지 어떤지 모를 그런 경우였다.

  나로서는 못 알아본 게 무안했지만 솔직히 친척누나인 걸 알고 봐도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이라 별 수 없는 일이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얼핏 어린 시절에 이런 친척누나와 놀았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7

  일주일 후 섬에 찾아가니, 가을이 없었다. 한참 집 앞에서 기다려도 가을이 오지 않았다.

  그날 섬에서 나와 공중전화로 가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니, 결혼식 때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그 참에 동창회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틀 후에 돌아올 예정이라며, 그 말에 이어서 혹시 섬까지 헛걸음을 하신 게 아닌지 물어왔다. 나는 아직 집이라고 말했다.

  이틀 후에는 먼저 섬에 있는지 확인한 후 섬으로 향했다. 얼굴을 안 본지 10일이나 지나서인지, 게다가 그 10일이 별 일 없이 빈둥대며 지루하게 보낸 시간이라 체감 상 30일은 지난 것 같아서인지 가을의 얼굴은 새로워 보였다. 나는 의례적으로 결혼식이랑 동창회는 재밌었냐고 물었는데. 가을은 얼굴에 화색을 띄우곤 지난 며칠 동안의 일에 대해 즐거운 듯 얘기를 풀어나갔다. 여태까지 왜 잊고 살았지 싶은 특이한 애들이나, 학생일 때는 그다지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친해지게 되어 서로 앞으로 연락도 하기로 한 선후배들 얘기였다. 몇 년 못 본 사이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 애도 있다는 얘기는 나도 얼마 전에 비슷한 일을 겪었기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결혼한 친구가 사교성 좋고 인간관계가 넓은 친구라서 다행이었어요. 가을이 회상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못해도 1년은 같이 지냈던 사람들일 텐데, 저는 너무 많이 스쳐지나 보냈던 것 같아요. 이런 게 인연인데 말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에 외로움이 묻어나왔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고독을 경험해봤다. 천성이 역마살이 낀 건지 사람에 대해 무관심해서인지, 나는 친구가 없었던 적은 없지만 그 관계가 끈끈해서 오래 이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다. 몇 년을 같이 일 해온 밴드 멤버들과도 지금으로선 그다지 만나고 싶은 기분은 안 든다. 이대로 밴드를 탈퇴해버려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물론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딱히 그 생각을 부정할 마음은 없다. 어렸을 적부터 내 성격이 이랬으니까.

  그나저나 정말 밴드에서 탈퇴한다면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가을이다. 우선은 이 섬에서 쭉 가을을 가르치며 살고 싶다. 가을은 재능이 있으니 잘 가르치면 몇 년 안에 나보다 실력이 좋아질지도 모른다. 청중의 입장인 나를 놀라게 하는 연주나 작곡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고 난 이후는 어떨지 상상이 가질 않지만, 그건 그때 가서 눈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결론 내리고 보니, 문득 나는 내가 가을과의 오랜 교류를 생각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가을과는 십년 후에도 알고 지내고 싶다. 이런 바람은 나에게 신선한 것이었다. 어쩌면 한 개인에 대해 그런 생각을 품은 건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리어 가을에 대한 호감을 깨닫고 보니, 지금 가을이 내게서 멀어질 조짐이 보인다는 걸 더욱 선명히 깨닫게 되었다.

  가을이 옛 친구얘기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는 모습을 보니 금세 울적해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는 그 사람의 가장 좋아하는 사람일까.

  아닐 것이다. 가을 같은 사람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더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관계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그건 무지하게 쓸쓸한 자각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얘기를 참고 듣는 것도 슬슬 피곤해져서 나는 잠시 가을의 말을 끊고 연주는 어땠냐고 물었다. 가을은 잠시 먼 곳을 쳐다보다 그냥 잘 친 것 같다고 했다. 하긴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게 아니고서야 일주일 쯤 전의 연주가 또렷이 기억날 리 만무했다. 가을도 자기 대답이 석연찮은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괜히 가을에게 미안하면서도 가을의 친구들에게 질투심 같은 감정을 더 느끼지 않게 됐으니 된 거라고 자조했다.

  "좀 걸을까."

  아무 말 없는 것도 어색해 먼저 말을 꺼냈다. 가을이 고개를 끄덕였기에 우리는 집을 나섰다. 20분 정도 말없이 걸었다. 아까 전 일이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혹시라도 기분이 상한 게 아닌가 걱정이 들어, 혹시 기분이 풀릴까 하는 생각에 친구들은 어떤 애들이 있냐고 먼저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투명한 마음으로 듣기로 했다.

  가을은 손가락을 꼽으며 과거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파도소리를 배경으로 가을이의 목소리가 허공에 또렷이 울려 퍼졌다. 비교적 차분한 상태로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니, 가을에게도 어렸을 적이란 게 있구나 하고, 어쩐지 감탄하고 말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 자라 있는 상태라. 애처럼 구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몇 주 전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가을의 모습이, 나에게 있어선 가을의 전부였다. 그건 당연한 소리이긴 하지만, 지금 나에겐 그 의미는 좀 더 깊은 울림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분이 들뜬 그때, 가을이 고개를 숙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옷자락이 머리카락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머리카락에 가려 가을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저, 선생님."

  망설이듯 가을이 마침내 말을 뱉어냈다.

  "저랑 여행 떠나지 않으시겠어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어, 머리카락 너머 가을의 얼굴이 어떤 기색을 띠고 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8

  오늘은 가을을 내 집으로 초대했다. 요리를 대접해줄 생각이었다. 이 부근에서는 어느 집이 맛있는지 몰라서, 외식보다는 만들어서 대접하자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건 내가 구상하는 계획 중 일부분일 뿐이다. 앞으로 외식할 일이 많을 것이기에 시작은 색다르게 하고 싶어졌다.

  나는 피아노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취미도 거의 없지만, 요리만은 예전부터 즐겼다. 그러나 내 요리를 다른 사람에게 대접하는 일은 드물어서, 내 솜씨를 아는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딱히 대접을 꺼렸던 건 아니고, 요리를 시작한 계기부터가 먹는데 쓰는 돈을 아끼자는 그런 궁핍한 이유라 다른 사람의 배까지는 채워줄 여유가 없었다는 정황이다.

  시작은 먹고살자고 하던 일이지만, 여유가 생긴 뒤론 잠깐 동안이나마 학원도 다니며 본격적으로 배웠다. 맛있을 거라는 자신감은 물론 있고, 대접한다는 데에 의미를 둔다는 핑계에 가까운 이유도 있기에 입맛에 안 맞다 한들 별로 신경 쓰지 않을 뻔뻔함도 준비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요리를 하는 과정이 좋아서 하는 것이므로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가을이 맛있다고 해주는 쪽이 좋긴 하다.

  TV를 뉴스채널에 맞춰놓고, 요리의 진행이 전체 과정 중 절반 이상을 지났을 때 벨이 울렸다. 나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문을 열었다.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집이 찾기 쉬운 곳에 있네요, 하고 칭찬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말을 하며 가을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와보는 만큼, 신기한지 이곳저곳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마냥 가을의 반응만 관찰하고 있을 수 없어 눈앞의 요리에 다시 정신을 쏟아 붙기로 했다. 등 뒤에서는 가을이 채널을 돌리는지 TV소리가 맥락 없이 몇 번 바뀌는 게 잠시 귀안에 들려왔다가 금방 잊혀졌다.

  여행 어떨까요? 가을이 입을 열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저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을까. 그 이전에 좋다는 것, 즉 내가 바라는 지향점은 무엇인가. 금방 생각해내지는 못했다. 진즉에 을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해둘 걸 그랬다. 나는 무난한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베토벤의 생가를 구경할 것이라던가, 슈만이 투신자살을 기도했다던 라인 강에 갈 거라던가, 이번 여행의 테마는 명명백백하게 '클래식'이다.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거장들이 살아오고 감성을 키워왔던 장소에 가보는 건 괜찮은 경험이 될 것이다.

  며칠 전 섬을 둘이서 걷던 그때, 가을이 여행을 가자는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며 고민하다 흔쾌히 수락했다. 사실 그때는 고민했던 게 아니라 마음을 진정시키기 온 정신을 쏟았다.

  문제는 가을도 그저 무작정 여행을 가고 싶었던 거지, 딱히 어디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둘은 어디로 여행을 갈지를 같이 의논해야 했다.

  그리고 의견은 별다른 걸림돌 없이 하나로 모아졌다. 음악가들이 살던 곳으로 떠나자는 것이었다. 가을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기에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 그다지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 해도 솔직히 나만 빼면 이번 여행 일정은 전혀 나쁠 게 없었다. 그리고 여행일정은 순조롭게 잡혀서, 내일 아침 일찍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가을이 이렇게 내 집에 머물게 됐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나는 가을을 침대에 재우기로 하고, 내가 잘 바닥에 이불을 미리 깔아두었다. 그리고 계속 시간을 때우는데, 자정에 가까워져도 가을은 침대로 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알았는데, 가을은 잠이 적은 편이었다. 내 책을 빌려 읽기 시작하더니, 분위기만 보자면 책을 다 읽기 전에는 잠들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가을이 고른 책은 내가 사놓고도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이라 그다지 할 얘기가 없다는 게 아쉬웠다. TV를 키거나 하면 소리 때문에 가을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나도 가을이 앉은 소파 맞은편에서 같이 책을 읽었다.

 

  9

  얼마간 책을 읽다가, 툭 하고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심코 눈을 뜨자, 소리의 실체가 바닥에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덕분에 펴고 있던 책장이 덮이며 어디까지 읽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잠깐 동안 눈앞이 깜깜했다.

  책을 읽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잠들었단 걸 깨달았다. 재빨리 책을 주워들고 가을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졸았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가을에게서 표정의 변화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못 알아차렸을 리가 없었다.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 배려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추측을 뒷받침 해주듯 가을은 책에 시선을 두고 있지만,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몇 분이 지나도 페이지는 넘기지 않은 채 얼마간 가만히 있더니, 이내 책을 덮었다. 이제 자는 게 어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 괜히 안 자다가 오히려 부담감만 주게 된 셈이었다. 가을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기도 하고, 왠지 내 의지와는 달리 눈꺼풀이 자꾸 감기기에, 가을의 뜻에 감사히 따르기로 했다.

 

  10

  눈을 떴을 때는 집안에 나 혼자만 남아있었다. 눈을 뜨니 적막한 공간만이 남아있어, 가을을 찾아 방들을 돌아다녔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있을 리는 없으니, 가을은 이 집안에 없다고 봐야 했다. 어디 잠시 편의점에라도 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식탁 다리에 무릎을 박았다. 허리가 반사적으로 접혔다. 무릎을 움켜쥐고 문지르고 있는데, 식탁 위에 쪽지가 하나 놓인 게 눈에 들어왔다.

  '간밤에 어머니께서 응급실로 이송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운전사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번 여행에는 따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지평선 쪽에서 희미하게 푸른빛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문지르고 있던 무릎을 보자, 바닷빛처럼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가 가을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라는 존재에게 타인이란 섬과 같다. 내가 찾아가던, 섬에서 살던 가을은 실은 섬 그 자체여서, 그 섬이 마음에 깊게 자리하는 순간 내 마음은 바다처럼 시퍼렇게 멍들어버렸던 것이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도, 섬을 마음에 품는 순간 그것은 정말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원인과 결과로서 나에게 작용한다. 지구에서 바다가 장구한 세월동안 존재하는 것처럼 영속에 가까울 섭리인 것이다.

 

  11

  가을과는 당분간 연락이 오가질 않았다. 가을의 어머니는 위험한 고비는 넘겼지만 한동안 요양이 필요할 거라는, 그런 얘기로 끝이었다.

  사고 직후 가을이 본가로 돌아가면서 내가 섬 근처로 이사 온 게 무색하게 우리 둘의 거리가 멀어졌고, 가을로서도 레슨을 받고 있을 기분이 아닌 것인지 별 말이 없어 그렇게 연락이 끊긴 것이다. 예전 친구들 생각이 났다. 이런 식으로 다른 친구들처럼 연락이 끊기겠지. 그런 자조에 어깨 힘이 떨어진다.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일상의 한 축이 사라졌다. 축이 있던 자리에 구멍만 남아있어, 허탈한 공기가 그 구멍으로 드나드는 듯한 느낌에 사라 잡힐 때가 많았다. 뭘 해도 의욕이 생기질 않아서, 강경책으로 집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어딘가 오지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린 시절처럼 조용한 시골에서 살다보면 우울한 기분이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집을 구하고, 필요한 짐을 택배로 부치고, 몸만 가면 되는 상황에서 기차에 몸을 실었을 때 쯤 우울증이 사라져 시골행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충청도 쪽으로 가볼까 생각했다. 여러 가지 알아볼 겸 인터넷을 켰는데, 습관적으로 로그인을 하고 보니 새로운 메일이 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주소록에 없는 아이디로, 제목을 봐도 누가 보낸 건지 알 수 없어 본문을 띄웠다.

  '선생님, 저 가을이에요. 메일 어드레스는 물어물어 알게 됐습니다. 꼭 연락드리고 싶어서요. 선생님…….'

  또다시 입가에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나는 메일을 두 번 읽고 신나서 답장을 썼다. 그러는 사이 마음속 바다가 아득히 멀어지며 곧 사라질 듯한 어렴풋한 푸른빛이 되었다. 그리고 예감대로 곧 눈에 보이지 않게 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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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옛날에 썼던 건데 피아노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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