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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도로가 질척해 택시는 좀체 속력을 내지 못했다. 미터기의 준마는 이를 비웃듯 기운차게 달리고 있었다. 조수석 남자의 초조한 시선이 말발굽의 잔상을 할금거리며 좇는 동안 기사는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을 허밍으로 따라 불렀다. 그러더니 불현듯 혀를 차는 것이었다.
  “쳇.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유난 떨 때부터 알아봤지, 내가.”
  기상 캐스터는 일주일 전부터 기압골 운운하며 은총을 내리듯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호언했다. 눈은 그러나 성급하게도 23일부터 내리더니 밤사이 멎어버렸다. 별로 쌓이지도 않은 눈은 급기야 녹기 시작해 성탄 전야에는 이미 하늘도 땅도 온통 잿빛이어서 그레이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손님도 아쉽겠어요. 예술의 전당에 혼자 갈 리 없겠고 애인 만나는 모양인데, 영 무드가 안 살겠어.”
  “아, 애인이라 할 사이는 아니고요….”
  오케이, 기사는 코를 벌름거렸다. 온종일 운전석에만 앉아 있으려면 몸도 몸이지만 입이 근질거릴 때가 적지 않다. 하지만 모든 승객이 말벗이 되어주지는 않는다. 목적지까지 조용히 가기를 원하는 이도 있는 것이다. 물론 점잖게 앉아 내심 말을 걸어주기를 기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다른 기사들처럼 그도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그는 라디오에 대고 혼잣말처럼 중얼대다가 슬쩍 빌미를 제공하곤 했다. 이번처럼 대화가 성사될 것 같으면 다행이고, 반응이 신통치 않더라도 다시 혼잣말로 돌아가면 된다. 만일 청년의 반응이 피식 웃는 정도로 그쳤더라면 그는 기압골 운운하며 슬그머니 라디오 채널을 돌렸으리라.
  어쨌거나 꽉 막힌 동부간선도로는 이제 덜 지루해질 참이었다.
  “아직 애인은 아닌데 크리스마스이브에 약속을 잡았다? 아하, 오늘 고백하시려고?”
  “네, 뭐….”
  기사는 옆에 앉은 청년을 힐끔 곁눈질했다. 청년의 표정에서 조바심이 읽혔다.
  “그렇담 보나마나네.”
  “네?”
  “결과는 이미 나온 것 아닌가? 이브에 만나자고 서로 약속을 했을 때부터 말이지.”
  기사는 슬쩍 말을 놓았다. 아무리 손님이라지만 자식뻘인지라, 함부로 대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듯싶었다. 역시나 청년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게 그러니까, 실은 만나기로 약속을 한 게 아니라 제가 무작정 찾아가는 겁니다. 퇴근 전에는 도착해야 할 텐데 길이 이래 막혀서….”
  “어흠흠.”
  단란했던 분위기가 도로 어색해질세라 기사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여자 분이 예술의 전당 직원인가 보죠?”
  “그건 아니고요, 그 앞에서 일합니다.”
  “에헤이, 명색이 고백하러 가는데 꽃이라도 한 다발 준비하지 그랬어요? 아닌 척 보여도 여자들은 꽃이라면 껌뻑 죽거든.”
  “그 분 직장이 꽃집이라 그건 좀….”
  이번에야말로 속수무책의 정적이 흘렀다. 찔끔찔끔이나마 구르던 차가 때마침 멈춰서는 바람에 정면을 보고 앉은 두 사내는 더욱 불편해졌다. 히터의 열기도 싸늘해진 분위기를 덥히지 못했다.
  기사는 애꿎은 기압골을 탓하며 손을 뻗어 슬그머니 라디오 채널을 돌렸다. 조증이 의심되는 디제이가 청취자와 전화 연결을 시도하고 있었다. 택시 안의 둘은 하릴없이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차분한 목소리의 여성이 어디 사는 누구라고 간단히 소개를 하고는 크리스마스에 얽힌 경험담을 시작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듣고 기분 좋으실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                    *                    *


  저희 오빠는 작년 오늘 죽었습니다. 네, 크리스마스 하루 앞둔 저녁이었어요.
  그날 남편은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내던 레스토랑을 예약했지요. 제가 스테이크, 스테이크, 하고 노래를 불렀거든요. 열두 달을 검소하게 살았으니 하루쯤은 사치를 누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남편 일 마치기를 기다리다가 우리는 밖에서 만났어요. 작년에는 이브에 눈이 내렸어요. 하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지요. 싸락눈이었으니까요. 눈이라지만 비에 가까운 그것이 얼면서 길이 몹시 미끄러워졌어요. 레스토랑에 가는 길에도 몇 번이나 휘청거렸는데, 남편은 그날 삐끗한 허리로 봄이 될 때까지 고생했답니다.
  여하튼 우리는 레스토랑에 도착했어요. 암만 메뉴를 들여다봐도 거기 나열된 스테이크들이 가격 말고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더군요. 그래도 우리는 들떠 있었어요. 그럴듯해 보이는 이름으로 하나씩 주문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관리비나 대출금 따위의 골치 아픈 얘기는 빼고요.
  아차,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었네요.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어요.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경박한 벨소리가 망치는 것 같아 황급히 핸드백을 뒤졌지요. 보통은 그런 델 가면 매너모드로 바꾸는데 하필 그날에는 그랬네요. 전화는 어머니한테서 온 것이었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저는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딱히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남의 생일을 덩달아 축하한다고 해로울 건 없잖아요. 그런데 어머니 주변이 좀 산만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어요. 이 시간에 누굴 만나러 가시나? 쉴 새 없이 뭐라고 하시는데 도무지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간신히 한 마디 알아듣긴 했어요. 그것조차도 되물어야 했지요.
  “네? 오빠가 어쨌다고요?”
  오빠가 자동차 사고를 냈다는 것이었습니다. 차가 무슨 기둥인지를 심하게 들이박았다는데 지금 중태라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어요. 혼비백산한 어머니에게 몇 번이고 확인하는 사이에 주문한 요리가 나왔습니다. 살짝 익힌 고깃덩이가 아주 좋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요. 서둘러 나와야 해서 우리는 결국 고기를 한 점도 먹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게 문제가 아니었지요.
  병원에 도착하니─남편의 허리가 삐끗한 건 이 무렵이었습니다─어머니가 벌써 와 계셨습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을 치진 않았으니 그게 어디예요.”
  저를 속물이라 하셔도 좋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제가 가장 안도했던 건 바로 그 문제였어요. 지금 갚을 돈도 버거운데 빚을 더 안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하지만 얼굴이 허옇게 뜬 어머니에게는 그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전신에 화상을 입은 오빠는 그날 자정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크리스마스에 사고를 당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죽기 일주일 전 새벽에 오빠는 제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남편은 회식 때문에 늦고, 저는 일찌감치 자고 있었어요. 그러다 벨이 울려서 저는 잠결에 전화를 받았지요. 직업상 오빠는 지방에 오갈 일이 많았어요. 밤이고 낮이고 휴일이고 평일이고 가리지 않고 물건을 배달했죠. 그러니 다른 건 몰라도 운전만큼은 베테랑이라고 해도 될 거예요. 그런데 그날은 무슨 일인지 몹시 당황한 것 같았습니다.
  “운전하다가 순록을 치었는데….”
  치었다는 소리에 잠이 확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순록이라뇨?
  “사슴 말이야? 사슴을 치었다고?”
  “사슴이 아니라 순록이야, 순록. 내가 순록을 치었다고.”
  순록이라는 동물이 우리나라에 사나요? 저는 모르겠네요.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확실하진 않지만 동물원에서도 본 기억이 없어요. 그건 더 추운 지방에서 살지 않나요? 하지만 오빠는 이미 공황 상태였습니다. 사슴을 순록으로 착각했다고 굳이 정정해줄 필요가 없었지요.
  “그래서… 죽었어?”
  “그게, 분명히 치었는데, 치었는데…. 없어졌어!”
  저는 불현듯 화가 치밀었습니다. 고작 그런 얘기나 하자고 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 내가 걸 땐 받지도 않으면서.
  “운전하다가 깜빡 존 거 아니야? 봐봐, 지금 시간이….”
  짜증 섞인 목소리에도 오빠는 완강했습니다.
  “아니야. 분명히 길바닥에 핏자국은 있단 말이야. 범퍼도 찌그러져 있고.”
  확실히 그건 이상했어요. 하지만 그걸 제게 말한다고 뭘 어쩌겠어요? 무슨 말을 해 줄까요?
  “그렇다면 뭐, 어슬렁거리는 루돌프라도 치었나 보지. 우리 오빠 올해는 선물 못 받겠네.”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자 오빠도 제가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는 다시 잠을 청했어요. 한밤의 해프닝이었지요. 그런데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 만에 사고를 내고 죽은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어쩌면 경찰이 말하는 것처럼 전방 부주의였는지도 모르지요. 스팸문자를 확인하느라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는 자꾸 그 새벽의 통화가 떠오릅니다.


*                    *                    *


  “별 시시한 이야기를 다 듣겠군.”
  기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크리스마스랑 저주는 도대체가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지. 안 그래요?”
  기사는 코웃음을 쳤지만 청년은 도리어 심란해졌다. 크리스마스 저주라는 게 정말로 있다면, 이렇게 길이 막히는 것이 자신이 겪을 저주의 전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기사가 묻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옆 좌석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었으므로 머쓱해진 기사는 버튼을 눌러 앞 유리에 워셔액을 분사했다. 와이퍼가 좌우로 움직이며 뽀드득 소리를 냈다.
  시끌벅적한 광고가 끝나자 디제이는 다음 사람과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안녕하세요, 어디 사는 누구세요? 그러나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다시 시도하였으나 통화는 성사되지 못했다. 디제이는 다른 사람과 전화 연결을 해 보았는데 모두 통화 중이거나 받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꼬이니 디제이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게 저주든 무엇이든 간에 방송에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순간적으로 디제이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것은 올해 크리스마스에 그가 가장 잘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도 크리스마스에 얽힌 사연이 있네요. 전화 연결이 될 때까지 그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잠시 해보겠습니다.”


*                    *                    *


  중학교 때 저는 불량한 그룹에 몸담은 적이 있어요. 불량한 그룹이라고 하면 으레 폭력서클 같은 걸 떠올리시겠지만 그런 건 아니고 그저 멋 부리기를 좋아했을 뿐이에요. 소위 날라리였다고 하면 금세 이해하시겠죠? 모든 관심사가 옷이나 신발 같은 것들이었지요.
  저와 어울리는 친구들은 달마다 새 옷을 입고 새 신발을 신었어요. 그런 친구들이 저는 늘 부러웠지요. 저희 집은 자식에게 좋은 옷 사 입힐 형편은 못 되었거든요. 아니, 형편이 있었다 해도 부모님은 제가 멋 내는 것에 보탬이 되지 않으셨을 겁니다. 자꾸 겉도는 저를 이해 못하셨어요. 오히려 별종 취급하셨지요.
  가을이 끝날 무렵이었을 거예요. 친구들 사이에서 큰 이슈가 된 신발이 있었어요. 신제품 농구화였는데, ─사정상 상표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에어 마이클이었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자태였지요. 특히 그 에어쿠션, 일단 신기만 하면 지면과 영영 작별케 해주겠다고 보장하는 듯한…. 아아, 학교 앞 사거리 매장에서 그걸 처음 본 이후로 밤마다 눈앞에 어른거렸어요.
  하지만 농구 황제가 신는 농구화를 살 돈도 사줄 사람도 제게는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그 신발을 사는 것을 보는 일은 너무도 괴로웠지요. 까딱 마음을 잘못 먹었더라면 진짜로 폭력서클에 가입해서 코 묻은 돈이나 뜯어대며 엇나간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기적절하게도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게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였어요.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자…. 저는 허벅지에 바늘을 찔러가며 인내했습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오니 청취자 여러분은 따라하지 마세요.
  “선물은 농구화로 사주세요.”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부터 그렇게 못을 박아두었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에 어머니는 기가 막혀 하셨습니다.
  “선물이라니?”
  “크리스마스 선물.”
  “너도 이제 중학생이잖니.”
  중학생이 되어 제가 가장 먼저 잃은 것은 어린이날이었습니다. 여름 잠바를 사달라는 저를 아버지가 따로 불러 타이르셨죠. ‘너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다.’ 거기에 또 이렇게 덧붙이셨고요. ‘하지만 엄마랑 아빠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어버이란다.’ 어른의 논리 정연함에 저는 어린이날을 그저 박탈당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지요.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크리스마스까지 압수당할 처지였습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어린이만 선물 받는 거 아니잖아요?”
  24일 밤, 저는 아버지가 퇴근하시자마자 달려가 매달렸습니다. 참으로 애처로운 항변이었지요. 아버지는 외투를 벗으며 말씀하셨어요.
  “너, 산타가 있다고 생각하냐?”
  “아뇨.”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양말에 선물을 넣어주는 건 누구라고 생각해?”
  “엄마랑 아빠가요….”
  “그냥 줘도 될 걸 왜 몰래 그럴까?”
  “글쎄요. 산타가 한 것처럼 보이려고 그랬겠죠.”
  5월에 그랬던 것처럼, 저는 다시금 말려드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거대한 손아귀로 저를 움켜쥐려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너는 산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 그래서요…?”
  “그렇다면 엄마랑 아빠가 굳이 선물을 줄 이유가 없지 않겠냐?”
  아… 저는 대답을 하는 대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제 방으로 돌아가 문을 잠갔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동생과 함께 쓰는 방이긴 했지만 저는 혼자 있고 싶었어요. 밖에 나가기도 싫었지요. 생각해 보세요. 과연 친구들이 무슨 신발을 신고 나오겠어요?
  고립된 크리스마스이브는 잔인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었어요. 컴퓨터요? 휴대전화가 다 뭡니까? 말도 마세요. 그 시절엔 아무 것도 없었어요. 거실에서는 식구들이 텔레비전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더군요. 저는 스탠드를 켜고 일기를 썼어요. 평소에는 펼치지도 않는 일기장이지만, 저는 이날을 두고두고 기억했다가 나중에 복수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어요.
  분명히 책상에서 잠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있더군요. 이상한 것은 그뿐 아니었어요. 베갯맡에 상자가 하나 있었는데, 초록색 트리와 빨간색 별이 점점이 찍힌 포장지가 그것을 감싸고 있었는데, 상자의 크기가…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은 게, 마치 운동화 상자만 한… 자세히 살펴보고 자시고 할 겨를이 어디 있나요. 저는 포장지를 북북 뜯었습니다. 이상한 기대감이 차올라 손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포장을 벗기는 데만도 한참 걸렸어요.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정상 상표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에어 마이클의 신상 농구화였지요. 그래요, 꿈에 그리던 그것이었습니다. 야호!
  그럼 이제 이 이야기에서 이상한 점을 한 가지 말씀해 드리지요.
  분명히 저는 문을 잠갔습니다. 하지만 제 방에는 당연하게도 굴뚝이 없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완벽한 밀실이었다는 얘기죠. 제가 잠든 사이 누군가 들어와서 농구화를 선물하고는 이불까지 덮어주었어요. 식구들을 추궁해 보았지만 다들 깜짝 놀랄 뿐이더군요. 부모님도 동생도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올 정도의 무뢰한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식구 중에는 아무도 선물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지요.
  과연 누구의 소행일까? 키다리 아저씨가 내 재능을 알아보고 농구화를 사준 게 아닐까? 저는 이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오컴의 면도날 이론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전에도 몇 번 말씀드렸던 것 같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해드리지요. 말인즉, 어떤 현상을 설명하고자 할 때 여러 개의 주장이 있다면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한 것이 답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렵지 않게 범인을 찾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고수해 오던 전제를 수정하니 시야가 확 트이더군요.
  친애하는 청취자 여러분, 산타는 존재합니다. 조금 전 이야기처럼 루돌프가 작년에 교통사고로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산타는 있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운동화는 제 발에 꼭 맞았습니다.


*                    *                    *


  택시 안의 두 남자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차는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굴러가고 있었다. 앞에서 사고가 나서 정체된 모양이었다. 택시는 사고 현장을 유유히 지나쳤다. 찌그러진 자동차 두 대가 차선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길 통과하자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스피커에서는 북 치는 소년이 라팜팜팜 북을 두드려댔다.
  헛웃음의 연대감 때문이었을까, 기사가 한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산타가 있다느니 루돌프가 죽었다느니 하면 나잇값 못한다는 소릴 듣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나는 크리스마스의 기적만큼은 믿어요.”
  정체가 풀림과 동시에 긴장도 풀린 청년이 관심을 보였다. 기사가 계속 이야기했다.
  “작년 이브였지. 아까 라디오에서도 그랬지만 확실히 그날 싸락눈이 내렸거든요. 그때도 나는 택시를 몰고 있었어요. 불황인지 개 콧구멍인지, 손님이 하도 없길래 몇 블록만 어슬렁 맴돌다가 퇴근해야겠다고 마음먹었거든.”
  그는 짐짓 심각한 척 음성을 낮추었다.
  “교차로에서 신호가 걸려 멈춰서 있는데 전화기가 드르륵 울리는 거야. 딸내미가 저녁 먹자더니 집에 벌써 왔나보다 하며 얼른 전화기 폴더를 열었지요. 문자 메시지가 한 통 와 있더라고요. 그걸 확인하느라 어느 새 신호가 바뀐 줄도 몰랐지 뭐야. 뒤에선 성미 급한 운전자들이 빵빵거리고 난리도 아니었지. 그 소리에 소스라쳐 얼른 운전대를 잡았어요. 그런데 때마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야. 악셀을 밟기 직전에 내 왼편에서 트럭 한 대가 쫘악 미끄러지면서 돌진하는 게 아니겠어요? 신호가 바뀌는 걸 미처 못 봤겠지. 도로가 이래 미끄러운데 브레끼가 금방 들 리가 있나. 트럭이 내 차 바로 앞을 쏜살같이 지나쳤어요. 그 찰나가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그러더니 저기 앞쪽에 있는 고가를 들이받더라고. 차는 운전자가 미처 빠져나올 틈도 없이 폭발했어요. 뒤에 뭘 실었는지는 몰라도 시커먼 연기가 확 솟아오르는 게, 어휴, 지옥이 따로 없더라고. 어! 그게 혹시 아까 그 여자 오빠였나? 아무튼 나는 출발도 못 하고 이 자리에 멍하니 앉아 그걸 보고 있었지. 뒤에서 재촉하던 차들도 일시에 경적 소리가 멎었어요. 심장이 두근거려서 혼났어. 내가 제때 출발했더라면 모르긴 몰라도 지금 택시를 몰고 있진 않을 거야. 아, 그땐 정말 죽다 살았지 뭐요.”
  “과연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네요.”
  “그렇지!”
  청년의 맞장구에 기사가 운전대를 탁 쳤다.
  “그런데 괜히 기적이 아냐. 메시지를 딸내미가 보낸 거였더라면 그냥 운이 좋았거니 하고 말았겠지. 절체절명의 그 순간에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였을지 짐작해 봐요.”
  “설마 산타라고 하시려고요?”
  그 말에 기사가 껄껄 웃었다.
  “천만에. 모르는 사람이 보낸 거였어요. 생전 처음 보는 번호가 메시지를 보낸 거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그게 내 목숨을 구했고!”
기사를 빤히 쳐다보던 청년이 불현듯 폭소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모르는 전호로 메시지를 받으셨다고요? 하하! 정말로 그걸 기적이라고 생각하세요?”
  “기적이고 말고!”
  청년이 웃음을 멈추지 않자 기사는 조금 언짢은 기색으로 반문했다.
  “그게 그렇게 웃긴 일인가…?”
  “아아, 그날 저는 그런 문자메시지를 여든다섯 통이나 받았거든요.”
  청년의 대답에 기사는 정색했다.
  “쳇, 설령 스팸 메시지였다 해도 그게 내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지.”
  이쯤 되니 청년도 애써 웃음을 거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뇨, 그 때문에 웃은 게 아닌데… 죄송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예요. 저도 기사님이 말씀하신 게 소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거든요.”
  청년이 설명했다.
  “작년 크리스마스는 제게 좀 힘든 시기였어요. 임용고시에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아무런 의욕이 없었지요. 그래도 집에서 눈치 살피느니 독서실에서 빈둥거리는 게 나을 것 같아 무작정 집을 나섰어요. 스탠드 조명 아래서 책을 펼쳤는데 글자들이 머리에 들어오기는커녕 온갖 잡생각들이 스멀스멀 차오르더군요. 아무리 노력해도 결실을 맺지 못하니 몇 년 동안 그저 허송세월을 보낸 것만 같았어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서도 불안해졌어요. 끝없는 사막에 저만 홀로 내던져진 기분이었지요. 공부를 시작했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외로울 줄 몰랐어요. 저는 말동무가 필요했어요. 누구라도 좋으니 제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지요. 심지어 독서실 총무도 어딜 갔는지 자리에 없더군요. 그래서 제가 무얼 했을까요?”
  기사는 라디오를 껐다. 캐럴이 중간에 뚝 끊겼다.
  “뭘 했는데?”
  “문자메시지를 보냈어요. 마땅히 보낼 사람이 없었으니 수신자란에는 아무 번호나 찍었지요. 내용은 간단했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이걸 저는 백 명에게 보냈어요.”
  택시가 간선도로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자면… 나한테 메시지를 보낸 게 바로…?”
  “모르죠, 저처럼 외로운 인간이 또 있을지. 하지만, 네, 아무래도 저였던 것 같네요. 그날 저는 여든다섯 통의 답장을 받았어요. 제가 다시 기운을 차리는 데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고요.”
  기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만난 것도 일종의 기적이라 할 수 있겠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을 가다듬고 그들은 새삼 인사를 나누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멀리 예술의 전당이 보였다.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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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길윤 16.12.23 23:22 댓글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훈훈한 글이네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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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밀원 16.12.24 18:45 댓글

    저도 지금 모르는 사람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찍어보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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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이나경 16.12.28 15:09 댓글

    앗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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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 17.01.19 16:53 댓글

    이 글을 크리스마스에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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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031 0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9735 0
2356 단편 미궁 우환 2017.01.17 70 0
2355 단편 어느 역사학자의 일기 김상우 2017.01.13 93 0
2354 단편 더 원 / 오렌지3 제프리킴 2017.01.05 205 0
2353 단편 할 수 있으면 할 수 있다. 니그라토 2016.12.29 78 0
2352 단편 유딩 우가우가 니그라토 2016.12.28 70 0
2351 단편 오멜라스의 진실 니그라토 2016.12.28 113 0
2350 단편 바람의 푸가 하밀원 2016.12.24 108 0
단편 메리 크리스마스4 이나경 2016.12.23 231 0
2348 단편 가난한 죽음 이도 2016.12.16 115 0
2347 단편 크리스마스 그리고 좀비 이도 2016.12.16 116 0
2346 단편 팔과 다리는 장식이죠. 캣닙 2016.12.16 124 0
2345 단편 제타크라임(ZetaCrime) 조나단 2016.12.04 123 0
2344 단편 코스모스 아뵤4 2016.12.01 71 0
2343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저승 혹투성이 창고지기 니그라토 2016.11.25 90 0
2342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조현병자의 황천 니그라토 2016.11.25 95 0
2341 단편 토끼의 집 김정명 2016.11.08 89 0
2340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뱀파이어, 인신족과 격돌 니그라토 2016.11.03 72 0
2339 단편 음악, 외침 IMAC 2016.11.02 92 0
2338 단편 디도의 영주 김정명 2016.11.02 103 0
2337 단편 한심해씨의 유쾌한 특허 百工 2016.10.28 1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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