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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음악, 외침

2016.11.02 23:2911.02

음악, 외침

 

 

연이 하늘을 날았다.

초록색과 푸른색으로 칠해진 연은 바람을 타고 날아갔고, 알록달록한 꼬리가 공중에 나부꼈다. 연은 잠시 동안 공중에 체류하다가, 숲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연이 떨어지고 있어!” 나이든 목소리의 소년이 외쳤다.

연줄이 팽팽해졌다. “내가 잡았어!” 더 어린 목소리가 말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개러드 맥스윈은 마지막 남은 커피를 홀짝이며,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을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행복한 나날, 온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의 시선은 연을 날리며 뛰놀고 있는 아들들에게 가서 멎었다. 아들들. 새처럼 재잘거리며, 고사리 같은 손을 주억거리고는, 가끔씩 자기들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는 멕코이. 아직 초등학생인 멕코이를 보살피며, 당당하게 큰 형 역할을 하는 릭. 릭은 동생과 달리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개러드는 그런 표정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제 철이 들 때가 됐지. 연날리기는 접을 때가 된 거야.

저 멀리 집에서, 에일린이 파이가 다 되었다고 소리치자, 아이들은 와 소리와 함께, 집을 향해 돌진했다. 졸지에 주인을 잃은 연은 하늘에 떠오르더니, 하나의 점이 될 때까지 숲 쪽으로 날아갔다. 개러드도 멋진 파라솔 의자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는 휘파람을 불었고, 노래를 흥얼거렸지만 필요 이상으로 가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공기는 적당히 상쾌하고, 적당히 맑았다. , 전원 행성의 상쾌함이란. 벌써 수십 번째지만, 그린 힐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의 별들은 그에게 너무 과분했다.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고, 그 속에 뛰어들어 살아가는 것은, 그의 성미에도 맞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저 별들 사이에서는 세 살 배기 애들도 사용한다는 성간 통신과 웹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집은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작은 오두막이었다. 공상이 그 집을 설계했고, 기술이 그 집을 가능케 했다. 고전적인 스타일의 원형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쩝쩝거리며 고기와 햄을 먹어치웠다. 마지막 햄 조각을 씹고 있는데, 릭이 갑자기 말했다.

이번 주에 거인들이 온대요.”

얘야. 입에 뭘 넣은 채 말을 하면 안 되지.”

개러드는 아이의 눈에서 기묘한 불꽃이 튀기는 것을 감지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는 햄을 한 조각 더 썰어 입에 넣었다.

“‘거인들이요. 못 들으셨어요? 은하계에서 가장 유명한 헤비메탈 밴드에요. 수백 개의 항성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대요. 우리 보러 가자요. ?”

.”

문이 열리더니, 소젖 짜는 장갑을 낀 에일린이 들어왔다. 멕코이는 먹다 만 햄을 입에 문 채, 엄마를 향해 달려갔다. 에일린은 릭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갈색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그녀는 방금 짠 슈퍼-우유를 아이들의 컵에 가득 따랐다. 그러면서 그녀는 개러드에게, 마치 다음 주에 태풍이 온다는 식으로 말했다.

여보, 이번 주에 거인들이 온대요.”

당신도 그 소리군. 도대체 거인들이 뭐야? 다들 아는데 나만 모르는 건 견딜 수가 없어. 내가 세상 물정에 어두운 건 알아. 견딜 수가 있어야지. 릭도 그 소리, 당신도 그 소리. 설명 좀 해봐.”

아빠가 식사 중에 말하는 건 무례하다고 했어요.”

, 아빠가 말하는데 끼어드는 거 아니다.”

에일린이 중재에 나섰다.

얘야. 어른에게 말할 때는 예의를 지켜야지. 그리고 당신도. 릭에게 너무 뭐라 그러지 마요. 그저 애잖아요. 아빠인 당신이 이해해야죠. , . 말해보렴.”

완전 끝내주는 밴드에요. 연루된 소송은 셀 수 없이 많고, 수많은 범죄 혐의가 있다는 말도 있어요. 온 학교가 밴드 얘기로 떠들썩해요. 제 친구들도 보러 가겠다고 난리에요. 우리도 보러 가자요. ?”

안 돼.”

여보.”

개러드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아내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난 이 행성이 좋아. 드넓은 목초지. 평화롭게 풀을 뜯는 가축들. 느리고 안락한 전원 행성의 삶. 놈들은 그걸 파괴하려는 거라고! 별들 너머의 문화로 우리의 삶을 오염시키고, 잘못된 사상을 불어넣고,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들을 타락의 길로 빠져들게 하는 거라고.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아이들이 원하는 일이잖아요. 릭은 앞으로 공부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거예요. 한 번 거나하게 놀아주는 것도 좋잖아요. 안 그래요? 저도 당신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요. 불건전한 음악. 머리를 물들이고 피어싱을 한 아이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릭과 멕코이는 그런 애들이 아니니까요. 그렇지, 얘들아? 멕코이도 한 마디 해보렴.”

저희는 그런 아이 아니에요.”

멕코이가 작게 웅얼거렸다. 에일린은 손뼉을 짝하고 쳤다.

그럼 이제 된 거에요. 이야기는 끝났어요. 전 가서 공항 표나 알아볼게요.”

에일린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꿀꿀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서, 개러드는 서둘러 집에 단 하나밖에 없는 단말기 앞으로 갔다. 누가 훔쳐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재빨리 자리에 앉고는, 한 쌍의 검지로 더듬더듬 자판을 누르면서 불건전한 행동피어싱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었다. 가축들의 울음소리가 낮은 숨소리로 잦아들고, 풀벌레 소리가 조용하게 울릴 무렵, 개러드는 곤히 자고 있는 아들들을 불렀다. 그는 눈을 비비는 릭과 멕코이를 식탁 의자에 앉게 했고, 자기는 널따란 소파에 앉았다. 그는 아이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자식들마저 나쁜 길에 빠져들게 할 수는 없었다.

너희들은 나쁜 길로 빠져들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니? 궁금해서 그러는 거다.”

네에.” 멕코이가 대답했다.

물론이죠.” 릭이 말했다.

오늘은 뭐 할까? 보드게임이라도 할까?”

보드게임은 지루해요. TV라도 보는 건 어때요?”

그냥 자러 가자꾸나.”

개러드는 졸려 죽어가는 아이들을 침대로 이끌었다. 아이들이 잠이 빠지자, 그는 밖으로 나왔다. 선선한 바람이 콧등을 간질였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발길 닫는 대로 걸었다. 지구의 달보다는 작지만, 여전히 밝은 달빛이 공동 목초지와 언덕과 계곡들을 환히 비췄고, 달빛 아래에서 그린 힐은 단잠에 빠져있었다. 저기에 그의 이웃들이 있었다. 목가적이고, 정이 넘치며, 푼푼한 마음씨를 가진 이웃들. 헤비메탈 콘서트 같은 곳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을 사람들.

그는 교회 옆을 지나다가,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정중하게 노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교회 안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연단 부분에는 작은 초가 밝혀져 있었다. 개러드를 본 교회 목사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방해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괜찮네. 밤중 기도는 쌀쌀하거든. 차 한 잔 하겠나?”

목사는 신도석 옆에 난 문으로 들어가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을 가져왔다. 개러드는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고는, 옆에 물려놓았다.

목사님, 고해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지. 내가 지구-성서를 가져옴세.”

목사는 가죽장정이 된 두꺼운 책을 가져왔다. 개러드는 책에 손을 얹었다.

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가 선서했다. “나는 수십 년도 더 전에, 비행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린 힐 에서가 아닌, 다른 시간, 다른 행성이었죠. 나는 간음을 하고, 방종을 일삼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일들을 자행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뉘우쳤습니다. 제 죄는 사해졌습니다. 그렇죠?”

그렇지. 진심을 다해서 속죄를 했다면,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는 법이니까.”

목사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앞으로 새 사람으로 살고, 다시는 나락으로 빠지지 않겠다고 맹세했죠. 제 자식들만은, 절대로 제가 걸어왔던 길을 밟게 하지 않게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그 맹세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거 참 이상하군. 자네는 오래 살고 싶지 않은 건가? 요양 행성에서의 삶은, 별들 사이에서의 삶에 비해선 시체나 다름없지 않은가. 실제로 일찍 죽기도 하고. 그린 힐에선 장수 유전자 요법도 받을 수 없고, 자네도 50년만 있으면 흙으로 돌아갈 텐데. 자네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저와 제 아이들은 늙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군. 그게 바로 그린 힐의 정신이지. 짧은 생도 나름 괜찮다네. 그 밴드에 대한 소문은 들어본 적 있지. 모두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저 멀리 감마 프라임에 내 친구인 폴 뒤레 신부가 살고 있네. 아니, 살고 있었네. 감마 프라임이 거대한 묘지로 변해 버린 것은 알고 있나? 어마어마한 화재가 행성을 일곱 달이나 불태웠다고 하네. 그리고 화재가 일어나기 전에는, 은하계에서 가장 거대한 밴드의 공연장이었다고 말하지.”

개러드는 숨을 들이켰다. “세상에.”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재수 없는 우연의 일치겠지. 잡념이 짙어지고 있군. 정신을 환기하려면 성서 구절이 제일이지. 어디 보자.” 목사는 책을 열고 페이지를 급하게 넘겼다. “여기 있군. 묵시록 312. 그리하여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큰 붉은 용이 나타났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고 머리마다 왕관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난 개인적으로, 이 구절이 현재의 은하계 문명에 대한 경고라고 생각하네. 이 구절에서 붉은 용은, 문명이 가져다주는 쾌감, 욕망, 헛된 망상을 상징하지. 이런 구절도 있네.”

개러드는 목사의 말을 들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목사는 참을성 있게 성서를 읽었다. 그는 수마에 빠지면서, 목사가 책을 읽으며 중얼거리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다.

“.....그리하여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가족은 극초음속 여객기를 타고, 반나절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공항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아니었다. 어떤 여자는 입술에 고리를 10개는 끼우고 있었고, 60대처럼 보이는 노인은 가발처럼 보이는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었다. 10대 후반처럼 보이는 소년들은 맨살보다 문신의 비율이 더 높았다. 문신은 대체로 비슷한, 그러니까 그린 힐에서는 용납하지 못할 내용들로 가득했다. 어디서나 시끌벅적했고, 어디서나 음악이 들려왔다. 릭과 멕코이는 인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손을 꼭 붙들어야 했다. 사람들이 너무나 운집해있어서, 땀으로 안개가 일어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조만간 땀으로 이루어진 소나기라도 내릴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을 보면 안 된단다.”

왜 안돼요?” 멕코이가 물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우리가 아끼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란다. 저들은 푸르른 목초지를 없앨 거야. 자기들이 보기 싫으니까. 그 대신, 아편굴과, 매음굴과, 도박장을 세우겠지. 왜냐하면, 그러고 싶으니까. 저들은 평화로이 풀을 뜯는 가축들을 도살해서, 자기들 바비큐 파티에 올려놓을 거야. 왜냐하면, 그러고 싶으니까. 나도 한 때 그러고 싶어 했던 시기가 있었단다. 너랑 네 형은 아직 어려. 너희들은 좋은 환경에서 커야 해.”

아빠도 저랬던 때가 있었어요? 진짜로?”

그 뭐냐.....” 개러드는 얼버무렸다.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는 법이란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겠니?”

어쨌든, 아빠도 비행청소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거잖아요. 외우주에서 그랬겠죠? 오래 사는 기분은 어땠어요? 막 힘이 넘치고 그래요?”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구나.”

몰려드는 사람들은 이제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거대한 강이 범람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엉망으로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렸고, 어설픈 기타 연주가 그 뒤를 따랐다. 통속적인 음이었지만, 그 음악을 듣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저런 음악을 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까마득히 오래 전의 일. 마리화나를 피우고, 본드를 빨고,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던 나날들. 더 이상은 안 돼! 릭과 멕코이도 그러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는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군중들이, 두 무리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첫 번째 분류의 사람들은, 어디서 대충 한 것 같은 문신에, 나름 멋있게 보이려 차려입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복장, 사악하게 들리려 노력하지만 오히려 통속적으로 들리는 곡들을, 양치기 습관을 못 버렸는지, 온화한 음색의 통기타로 연주했다. 공항에서 보았던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렁차게 떠들어댔고, 대화 내용은 앞으로의 공연에 대한 기대가 대부분이었다. 출신은 안 봐도 뻔했다.

두 번째 무리의 사람들은, 뭔가 좀 달랐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법도 없었다. 죽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얼굴을 하얗게 칠했고, 눈 주위에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정색 분칠을 했다.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그들 앞에서 비켜섰다. 방금 전에 죽어나빠진 시체가 되살아나, 멀쩡히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작자들이었다,

차량들이 경적 소리를 내며 줄지어 나타났다. 튼튼해 보이는 외관에, 스프레이로 각종 저속한 말들이 쓰여 있었다. 차들이 귀청 떨어지는 마찰음을 내며 멈춰 섰고, 로켓탄도 막아낼 것 같은 문짝들이 벌컥 열렸다. 군중들은 서로를 밀치며 차 안에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안전요원처럼 보이는 사내가 소리쳤다.

차 한 대 당 스무 명! 거기 당신, 애 좀 잘 간수해요!”

개러드는 아이들을 꼭 붙잡고 차 안에 들어갔다. 누군가가 구토라도 했는지 역한 냄새가 가득했고, 머리를 총천연색으로 물들인 몇몇 여자들이 유령마냥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퍽 소리와 함께 비명이 조용해졌다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개러드가 중얼거렸다. “저들은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있어! 왜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는 거지? 역한 매연으로 대기를 오염시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곁에 감돌던 침묵을 도살하고 있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해.”

어이, 거기 아저씨. 조용히 해.” 뒷자리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맞아. 그냥 닥치고 있어.”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고통스러운 여정이 지나고 자동차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아이들을 꼭 붙들었다.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그는 안전요원의 지시에 따라 계속해서 움직였다. 안전요원들! 이들은 깔 맞춤한 푸른색 제복을 입고 있었고, 속이 꽉 찬 것처럼 보이는 안전봉에서 손이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깡패에 제복만 입혀 놓은 것처럼 보이는 작자들이었다.

이봐요. 뭐 좀 물어봅시다. 전 어디로 가야 하죠?”

개러드는 자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애지중지 감춰든 표를 내밀었다. 안전요원은 눈썹을 찌푸린 채 표를 보고는, 안전봉으로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행렬들 중 하나를 가리켰다.

아빠. 발목이 아파요.” 멕코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발목을 내밀었다. 빨갛게 부어올라있었다.

조용히 좀 해. 너까지 신경 쓸 틈 없어.”

아빠! 형이 저보고 뭐라고 해요!”

. 동생에게 그게 무슨 말이니.”

전 그냥, 우리가 늦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는 것뿐이에요.” 릭은 돌멩이를 걷어찼다. “늦으면 다 쟤 책임이에요.”

형 말 들었지?” 개러드는 할 수 있는 한 다정하게 말했다. “자칫하다가는, 너희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공연에 늦을 수도 있단다. 그러면 기분이 나쁘겠지?”

그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건 간에, 그의 사랑스러운 자식들인 것이다. 이런 고생을 하며 보러 갈 정도로, 가치 있는 공연이란 말인가? 멕코이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빨리 가자요. 이러다 늦겠어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릭은, 멕코이를 부축하는 개러드를 제치고 앞장서서 달려갔다. 그들은 힘겹게 대열의 맨 끝에 합류했다. 사람들은 설탕과자를 앞에 둔 개미처럼 걸었고, 부자(夫子)는 뒤처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나 점차 힘이 빠지면서, 아이들의 걸음걸이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때, 웬 사내가 아이들을 부축해 개러드에게 이끌었다. 사내는 머리카락을 모히칸 모양으로 짧게 치고, 그린 힐에서는 보기 힘든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지적인 두 눈은, 안경 너머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있었다. 하얀 얼굴이었다.

안녕, 얘들아. 조심해야지. 넘어지면 큰일 난단다.”

릭과 멕코이는 마치 죽은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저씨 말도 할 줄 아네요.” 릭이 마침내 말했다. 얼굴에는 핏기가 가셔 있었다.

물론 말도 할 줄 알지. 우리 순례 팬클럽이 아무리 말하기를 꺼린다지만, 말도 할 줄 아냐고 묻는 건 너무한 처사 아니니? 혹시 내가 벙어리일 수도 있는데.” 사내는 자기 목젖을 두드렸다.

그게, , 죄송해요.”

괜찮아. 처음 겪는 일도 아닌데. 너희도 쇼 보러 가는 거니? 가족끼리 보러 갈만 한 건 아닌데.”

아저씨도 본 적 있어요?” 멕코이가 활기찬 어조로 물었다.

그래, 세 개의 태양으로 유명한 베타 프라임. 감마 프라임, 안티가 프라임에서 봤었지. 태양계 순회공연도 빠짐없이 참석했고. 목성의 공중도시 공연이 백미였지, . 정말이지, 하나같이 끝내줬어.”

잠깐만요. 그러니까 항성 간 공간을 넘나들면서까지 거인들을 쫓아다녔다고요?” 릭이 끼어들었다. “그거 대단한데요.”

열성적인 팬이라면 누구나 그래. 정말로 열성적인 팬들, 그러니까 저기 저 얼굴에 분칠한 작자들은, 장장 수백 광년을 걸쳐서까지 쫓아다닌다고 들었어. 난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지만. 그린 힐 행 좌석을 얻는데 일 년치 연금을 모두 써버렸다는 건 부인하지 않겠어. 여기 우주공항들은 앞으로 다시없을 호황을 누리고 있을걸.”

하지만, 적어도 연금을 200년은 받잖아요.” 릭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래, 너희들도 참 불쌍하구나. 짧은 생이 무슨 재미가 있겠니? 요양 행성이라니. 이 행성은 사회부적응자들의 모임에 불과해. 아이들이 자라기는 나쁜 곳이지.”

난 항상 그린 힐이 조용한 곳이라 생각했소.” 개러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항상 무형적인 불가침성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고 믿었지. 고요, 평화, 안락함 같은 힘들이 말이오. 내 생각이 틀렸었나 보군. 하지만, 당신은 누구요? 보기에는 지적으로 보이지만, 외양이 그것을 부정하고 있소.”

퀀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때는, 대학 교수였던 시절도 있었죠. 이제는 하루하루 연금을 타먹으며 지내고 있지만. 대학 교수로 일하던 시절에는, 나는 항상 욕망을 절제하며 살았소. 도덕률이라는 환상을 믿으며. 하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마음껏 분출시킨다오. 음악에 맞춰 머리를 흔들고, 소리를 질러대지. 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인데.” 그는 웃었다. “음악이 참 여러 가지를 변하게 한다니까.”

난 변하지 않을 거요. 내 아들들도 그렇고.”

그러시든지. 내 이름은 퀀 젭이라 하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공연 도중에라도 잘 지내봅시다.”

개러드는 마지못해 그 손을 잡았다. 차가우면서도 끈적거리는 느낌에, 그는 얼른 손을 빼고 싶었다. 퀀은 오랫동안 손을 놓지 않았다.

별들 사이에서는 이름을 그렇게 짓나요?” 릭이 물었다.

아니, 아니. 그냥 유행이란다. 내가 말했잖니, 원래 이름은 아니라고." 퀸은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메탈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면, 너도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될 거란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결코.”

그들은 안전요원의 지시에 따라 구불구불한 능선을 걸었다. 개러드는 군중들 사이에서, 뭔가 격렬하면서도 무형적인 열기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뭔가 아주 멋진 것을 기대하는 느낌, 자신도 어렸을 적에 느꼈던 것이었다. 개러드는 고개를 저었다. 잠깐 동안 유혹에 휘말리다니. 아버지로써의 의무는 어떻고, 릭과 멕코이는 또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들은 계속해서 걸었다. 멀리서 본 그들의 행렬은, 마치 전쟁을 피해 떠난 피난민 행렬 같았다. 지친 사람들이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지막이 욕설이 오고갔다. 햇빛이 내려쬐는 곳에 잡초나 시냇물은 보이지 않았고, 어떠한 살아있는 것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고, 거대한 공동처럼 열린 하늘과 땅 사이에, 거북이 등딱지처럼 보이는 벙커들이, 해변 위의 조약돌처럼 널려 있었다.

군중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각자의 벙커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며, 먼저 들어가려고 갖은 애를 썼다. 모두 벙커 안으로 들어가자, 안전요원들은 핵 공격도 버텨낼 것 같은 문으로 입구를 봉쇄했다. 곧 어두워졌지만, 누추한 조명이 빛을 밝혔다. 벙커 안도 조명과 마찬가지로 누추했다. 방금 전에 타고 온 지프차만큼이나 퀴퀴한 냄새가 풍겼고, 의자는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가 전부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군중들이 어찌나 열광해있던지, 무슨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군중들과는 대비되게, 하얀 얼굴들은 장례식장이라도 온 것처럼 계속해서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퀀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 말없는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순식간에 분칠한 얼굴과, 어깨와, 손 사이로 녹아들었다. 개러드는 퀀을 찾아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특정한 사람을 분간하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꽤 정상적으로 보였었는데, 개러드는 생각했다. 사람의 성격을 분간하기란 어렵기도 하지. 특히 오래 산 능구렁이 같은 외우주인은 더더욱.

군중들의 열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 조명이 꺼졌다. 그와 동시에 벙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빠, 이제 시작하는 건가요?”

그런 것 같구나.”

해가 저물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개러드는 자세를 바로잡다가 누군가의 발을 밟았고, 그와 동시에 상대방의 눈먼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낮게 욕설이 들렸다. 릭은 의연한 표정으로 겁먹은 멕코이를 타이르고 있었지만, 그 자신도 겁먹은 티가 역력했다.

이 때가 가장 기대되는 부분이죠.” 뒤에서 퀀의 목서리가 들렸다. 개러드는 의자에서 펄쩍 뛰었다.

하마터면 심장마비가 올 뻔했소.”

이 정도로 심장마비가 올 정도라면, 첫 연주가 끝날 쯤에는 이미 한 줌의 먼지로 변해 있겠군. 제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지만, 가끔씩 지겨울 때도 있는 법이니까. 당신과 어울리는 게 더 재밌을 것 같더군요. 신도 약간의 일탈은 허용해 줄 거라 믿소.”

당신, 신을 믿소?”

내가 믿는 유일한 신은 음악이요. 잠깐, 조용히 좀 해 보시오. 조용. . . . 들린다. 들려. 이제 시작한다!”

그는 그르렁거렸고, 얼굴 표정이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개러드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그 끔찍한 변화를 지켜보았다. 지적인 가면은 사라지고 없었다. 정신병동에서 막 탈출한 환자처럼 몸을 들썩이고, 손을 미친 듯이 쥐락펴락했다. 발을 굴렀다.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다른 하얀 얼굴들도 똑같이 행동했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그린 힐 토박이들도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당황한 토박이들의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옷자락이 계속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들자, 개러드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멕코이가 겁먹은 표정으로 한 손으로 옷자락을 당기고, 다른 손으로는 창 너머 바깥을 가리켰다.

아빠! 보세요!”

멕코이가 외쳤다. 그는 아이를 나무라려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 유성우가 내린다는 소식은 없었다. 그린 힐 궤도에는 우주쓰레기를 발생시킬 정도의 충분한 인공위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밤하늘을 지우개로 박박 문질러 지워 버린 것처럼, 별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긴 꼬리를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대관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문득 그린힐의 동네 목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곧바로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아니야. 그건 터무니없는 소리에 불과해. 그건.

‘.....그리하여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별들은 긴 꼬리를 그리며 낙하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는 문득,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벙커가, 시끌벅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린 힐 토박이들은 하늘에 일어난 일 때문에 공포에 질려 울부짖고 있었다. 그들은 나가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보려고 벙커 문을 두들겼다. 몇 명은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고, 다른 몇 명은, 이제 완전한 광란 상태에 빠져있는 하얀 얼굴들에게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얀 얼굴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머리를 흔들고, 어깨를 미친 듯이 들썩였다. 새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개러드는 릭과 멕코이에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음악이 폭발했다.

음악.

그것은 음악이 아니었다. 보통 통상적인 소리에게는 울려 퍼졌다라는 형용사를 쓰지만, 이 음악은 폭발했다라는 말이 더 걸맞았다. 그것도 폭죽 정도가 아니라, 핵폭탄 무더기가 동시에 폭발하는 소리였다. 하얀 얼굴들의 기쁨에 찬 비명도 앗아가는 소리였다. 모든 침묵을 도살하는 소리였다.

그 끔찍한 소음은, 개러드의 침묵마저도 도살했다. 잘게 썰어 하찮은 물건처럼 내다버렸다. 멕코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릭은 두 주먹을 꽉 쥐고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의 앙다문 입술 아래로, 목의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곧이어 연속적인 비프음이 폭발하자, 소음은 두 배로 끔찍해졌다. 아마 베이스 드럼인 것 같은 소리가 공기를 두들겼다. 하얀 얼굴들은 미친 듯이 해드뱅잉을 했다. 유리조각을 긁는 것 같은 일렉트릭 기타 소리가, 다른 모든 소음을 압도하고 높이 치솟았다. 사람들이 고통에 겨워 절규했다. 아니면, 자신의 입에서 나온 절규였나? 막 쓰려지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퀀이 말했다. 그는 거의 소리지르듯 말해야 했다. “우주적 메탈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 마련이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세요. 음악은 당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합니다.”

애들은?”

어린 쪽은 엄마를 찾으며 엉엉 울고 있고, 큰 쪽은 그나마 잘 버티고 있소. 내 짧은 소견으로는, 아이들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괜찮겠소?”

.” 개러드가 중얼거렸다. 릭은 여전히 앞만을 바라보고, 입을 헤벌리고 앉아 있었다. 꽉 쥔 주먹에서 실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는 힘을 있는 대로 쥐어짜, 릭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 여긴 위험하다. 동생과 함께 아무데나 피하렴. 어서.”

싫어요.” 개러드는 아들의 입에서 두꺼비라도 튀어나온 듯이 바라보았다. 릭은 개러드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이제 지긋지긋해요!” 소년이 악을 썼다. “그린 힐에서의 삶! 웹도 제대로 되지 않고, 변화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는 데다, 그나마 흥미로운 일이라고는 이웃집 소가 병에 걸린 것 말고는 없고, 그 이야기도 일주일 이상을 오르내리죠. 공공시설이라곤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고, 보이는 거라고는 나무나 풀이 전부고. 이젠 싫어요. 이젠 싫단 말이에요! 연 날리기도 지긋지긋해요. 난 더 나은 삶을 누리고 싶어요. 수백 년 동안 변화가 가득한, 흥미진진한 삶을 누리고 싶단 말이에요! 난 오래 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하지 않으면 안 돼요.” 아이는 고개를 팩 숙였다.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퀀은 개러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제가 처리하죠. 안전요원!” 눈 깜짝할 사이 푸른색 상하의를 입은 안전요원이 나타났다. “저 애들을 무소음실에 데려가요.” 그가 명령했다. “어떤 소리도 듣게 해서는 안 됩니다.”

소년이 악을 쓰는 소리와, 잠깐 몸 다툼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전요원이 릭을 장난감처럼 질질 끌고 나왔다. 소년은 계속해서 힘없이 발버둥을 쳐댔다.

고맙네.” 개러드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이들마저 저럴 줄이야.”

아이들은 자극에 민감하오. 더 나은 세계를 갈망했겠지.”

이 밴드에 소송을 걸 거야. 쓴맛을 톡톡히 보여줘야지. 내 아들을 그런 꼴로 만들다니, 당해도 싸.”

거인들은 지금 그런 소송을 수천만 건은 접수한 상태요. 그리고 밴드 활동에 지장이 가는 일은 여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요.”

곧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개러드는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아비규환이 그를 둘러쌌다. 산더미 같은 음악에 묻혀버린, 소리 없는 아비규환이었다. 광란의 축제로 변한 벙커를 바라보면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말해주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거인들이 언제, 어디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소. 하지만 우리가 아는 우리 중에서, 그러니까 당신이 하얀 얼굴이라고 부르는 팬클럽 중 몇몇은, 거인들이 실제로 지옥으로부터 올라왔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대한 경전 비슷한 책도 있소. 진짜로 믿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오.”

그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난 신경 쓰지 않소. 거인들이 지옥에서 기어 나왔든, 텅 빈 허공에서 떨어졌든, 뭐가 대수란 말이오? 멋대로 신화적인 탈을 씌우는 건 당신 자유요. 애초에 노리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까 별들이 떨어진 거 있잖소. 초대형 홀로그램 프로젝터로 한 거요.” 그는 징그럽게 웃었다. “당신 얼굴 꼴이 볼 만 하더군.”

독이라도 삼킨 기분이군.” 개러드가 투덜거렸다.

곧 있으면 즐거워질 거요.” 퀀이 자신 있게 말했다.

소음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철판을 두들기는 것 같은 기타 반주가 급격하게 상승하더니,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딱 멈췄다.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연이 끝난 건지, 아니면 방금 전의 연주가 단순한 사전 연습이었는지, 구분이 안 가는 모양이었다. 웅성거림이 번졌다. 개러드는 퀀 젭을 돌아보았다. 퀀 젭은, 자기 머리만한 왕사탕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군중 속에서, 안색이 창백한 어떤 남자가 소리쳤다.

끝났어! 드디어 끝났다고! 드디어 끝났...”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 개의 태양을 터뜨린 것처럼 눈부신 섬광이 번쩍였다. 잠시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미처 눈을 감지 못해 보라색 반점이 어른거렸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눈물을 닦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대한 형체들이 지평선 부근에서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형상들은 별 없는 밤하늘을 다 가릴 정도로 장대했고, 산처럼 거대했으며, 각각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형상들은 총 일곱이었다. 그 순간, 개러드는 거인들이라는 밴드명이, 단순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자 그대로 거인들이었다. 일곱의 거대한 거인들. 머리는 구름을 가릴 정도로 컸고, 두 눈에서는 달처럼 빛이 뿜어져 나왔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퀀은 입이 찢어질 정도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마치 그거 봐요. 내가 놀랄 거라 했잖아?’ 라고 말하는 것처럼.

다른 거인들보다 월등히 큰, 리드 싱어처럼 보이는 거인은, 마천루 크기의 가시들이 고슴도치처럼 박힌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다른 거인들도 각자 기괴한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도시 구획 크기의 일렉트릭 기타, 몸통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언덕만한 드럼, 어마어마하게 긴 코트 자락이 밤하늘을 가렸고, 발을 옮기자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천하가 들썩였다. 그리고 거인들의 머리 꼭대기에는, 왕관처럼 생긴 빛나는 발광체가 환히 빛나고 있었다. 문득 목사의 말이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그리하여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발광체가 단말마라도 하는 것처럼 두어 번 빛을 내뿜었다. 유원지 놀이기구 크기의 금속 징이 박힌 손이, 현수교 케이블 굵기의 기타 현을 튕겼다. 드럼 채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일렉트릭 기타는 목이 졸려 죽어가는 사람이 낼 법한 신음을 쏟아냈다. 개러드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창가에 다가갔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꿈틀댔다. 붉은색이고, 계속해서 뜀박질하는 뭔가가. 쿵쿵. 그는 창에 손을 댔다. 쿵쿵. 창은 차가웠고, 밀려오는 음악의 파도에 맞춰 계속해서 진동했다. 쿵쿵. 그의 몸도 함께 진동했다.

쿵쿵. 쿵쿵. 쿵쿵. 쿵쿵.

파노마라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더없이 다정하고 가정적이었던 부모님을 뿌리치고 집을 나가서, 뒷골목 깡패들과 어울리며 보내던 나날들. 거친 시절이었다. 그가 제일 좋아했던 밴드는 주로 술집에서 연주했었다. 뒷골목 술집의 꾀죄죄한 밴드였지만, 사람의 심장박동처럼 생생한 활력을 갖추고 있었다. 토사물 범벅인 술집 바닥을 뒹굴며 놀던 나날들. 멋진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좋은 시절은 아니었다. 세상에,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람? 멋진 시절이라고? 이제는 부끄러울 기억일 따름이었다.

리드 싱어 거인이 앞으로 나섰다. 발광체에서 뻗어 나온 조명이 리드 싱어에게 집중되었다. 음악이 고조되었다. , 아니, 그것이 외쳤다.

외침.

당신은 내 얼굴이 보이나요?’

무아지경의 드럼 소리. 심장 고동.

내 얼굴은 말라 비틀어졌어요.’

발광체가 명멸했다. 끝없이 펼쳐진 그림자가 온 주위를 가득 메웠다.

주름이 지고, 이빨이 빠졌어요. 내 손은 주름투성이에요. 내 다리는 후들거려요.’

벙커가 짧게 흔들렸다.

문명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

갑자기 어떤 이미지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도시가 불타고 있었다. 하늘은 짙은 검은색이었고, 수백 미터의 화염 폭풍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도시와 그 안의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건물들이 나무처럼 불타 스러졌고, 도로가 끓어 넘쳤다. 갈 곳 없는 비행기들만이, 생존자라도 건져 볼 심산으로 애타게 도시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연기 때문에 엔진이 막혀서 날개 뽑힌 새처럼 추락하는 비행기도 있었다. 완전한 혼돈, 일곱 개의 거대한 형체가 불길 속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문명이 나를 불태웠어요. 장작처럼 활활 타오르게 했어요. , 맙소사. 장작처럼 활활 타오르게 했어요.’

불타는 도시는 점차 희미해졌고, 일곱 개의 거대한 형체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거인들. 음악을 뜯는 그들의 머리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목성의 적란운처럼 소용돌이쳤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들은 단지 음악에 맞춰 머리를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음악만이 나를 치유할 수 있어요. 음악만이 나를 되살릴 수 있어요. 무의미한 고름 덩이에서. 부활. 쪼그라든 고깃덩이에서. 움찔거리는 손가락. , 맙소사.’

그는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것이 느꼈다.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던 것이, 이제는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온 몸의 피가 하얀 불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 ! 피가 몸을 휘감고 돌았다. 불길이 몸을 휘감고 돌았다. 그는 불이 되었다. 리드 싱어가 절규했다.

난 오로지 비명 지를 뿐이에요. 나를 불태웠던 때와 같이. 모두가 불타고 있어요. 모두가 불 속에서 춤을 춰요. , . 세상의 종말이에요.’

역겹군.” 그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짜내어 말하고는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개러드는 소음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람들의 환호도 머뭇머뭇 거리고 있었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아쉬움마저 느껴졌다. 아쉬움이라니! 그 전의 맹세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들은 자신의 삶을 약탈하러 온 침략자들이었다. 어쩌면 자식들조차 약탈해 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퀀 젭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저 스피커 산맥은 여러 개의 플루토늄 반응기에서, 행성 몇 개분의 전력을 공급받는다고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의 재충전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개러드는 음악이 잦아들었다는 기쁨보다도, 그린 힐에 원자력 발전이 들어섰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린 힐에 원자력 발전이라고? 기형아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문득, 그는 자신의 걱정이 지금 상황에서는 의미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퀀 젭이 말했다.

그건 근거 없는 소리요. 고대 지구의 원자력 발전도 방사능 노출은 극히 드물었소.”

자네는 항상 낙관적이어서 좋겠군. 방금 전에 보았나?”

뭘 말이오?”

도시가 불타는 거.”

아니. 하지만 이건 말할 수 있겠군. 당신은 지금 피곤한 상태요.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고 있기도 하고. 그리고 머리는 시종일관 경종을 울려대고 있을 거요. 안 봐도 알 수 있지. 당신에게는 휴식이 필요하오. 연장자로써의 말이오.”

그거 아나? 객관적으로 보면, 자네는 내 나이의 절반도 채 안 돼. 하지만 내 나이는, 실제 자네 나이의 절반도 채 안 되겠지.”

당신들이 이상한 거요. 요양 행성이라니. 사회부적응자를 몰아넣기 위해 만든 곳이라는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소?”

개러드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뭘 찾으려는지도 모르는 채.

여기서 나가야겠어.”

불가능하오. 공연이 끝나기 전 까지는 나갈 수 없소. 그게 규칙이오.”

개러드는 무력한 분노를 담아 의자를 걷어찼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즐기시오.”

마음 같아서는 자네 목이라도 조르고 싶지만, 무익한 행동이겠지.” 그는 무력감을 느끼며 털썩 주저앉았다. 당장이라도 먼지로 분해될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불타는 도시의 풍경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몸은 땀범벅이 되었고, 심장이 거세게 펄떡였다. 음악이 심장을 붙잡고, 과즙 압착기마냥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쥐어짜는 것 같았다.

그는 일어서려다가 균형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머나먼 이국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희미했다. 퀀 젭이 비켜요. 비켜. 이 사람을 무소음실로 데려가요.’ 하는 소리도 들렸다. 누군가가 그의 어깻죽지를 잡고, 질질 끌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어지럼증과 구토기를 느끼며 일어섰고, 귀가 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깜짝 놀랐다.

소리를 전달하는 매질 자체가 먹통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소리가 없다! 그는 가만히 누워 침묵을 만끽했다. 근육이 이완되면서 긴장이 풀렸다. 그제야 자신이 어디 있는지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무소음실은 정적 그 자체였다. 벽에는 방음재처럼 보이는 흰색 쿠션들이 발라져 있었고, 똑같은 재질의 소파들이 벽을 따라 늘어서있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은, 잡지를 뒤적이거나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개러드는 릭을 찾다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작은 형체를 발견했다.

얘야그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조용히 해야 돼요.” 릭이 자그맣게 말했다. “여기서는 작게 말해야만 말이 통해요.”

개러드는 목을 가다듬고는 최대한 조용하게 속삭였다.

너 괜찮니?”

아빠 덕분에요. 참 고맙네요.”

개러드는 마침내 폭발했다.

이 배은망덕한 놈. 네가 어떤 꼴을 하고 있었는지 알기나 하니? 다 널 위해서였어. 널 위해서였다고.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공연을 보니, 어떤 생각이 들더냐? ? 좋던? 기쁘던? 아주 그냥 목에서 힘줄이 튀어나오고, 눈은 눈구멍에서 탈출하기 일보 직전이었고, 거기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했어야 했니? 너를 별들 사이로 보내라고?”

굳이 살아가는데 의미가 필요하겠어요?”

오호라.” 개러드는 추악한 승리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넌 그저 오래 살고 싶은 거지? 그렇지?”

릭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그것 봐라. 퀀 젭은 아마 백 살은 될 거다. 얼굴 분칠한 그 인간 패거리도, 항성 간 우주선 티켓을 구할 만큼 충분한 돈을 모으려면, 대충 그 정도 나이는 되겠지. 너도 그렇게 늙고 싶니? 밴드 뒤꽁무니나 쫓아다니고, 은하계에 얼마 남지도 않는 한적한 전원 행성이나 망가뜨리고 싶니? 다 널 위해서 말하는 거다.”

아빠가 그렇게 자식들을 생각한다면, 멕코이는 어디 있어요?”

뭐라고?”

내 동생 말이에요! 내 동생!” 어조가 높아지면서, 마지막 말은 턱 막혀버렸다.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예요? 아빠가 제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돼요?”

맙소사, 아들 말이 맞아. 내가 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지? 벙커 안으로 밀려 들어가고 나서부터, 멕코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그건 변명에 불과했다. 그 자신이 음악에 맛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들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자신이 오히려 정반대의 길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가서 찾아와야겠어.” 그는 멍청히 되풀이했다. “가서 찾아와야겠어.”

빨리요. 아빠가 기절한 지 1시간이 넘었다고요.”

“1시간!” 개러드가 외쳤다. “그럼 그동안 넌 뭐하고 있었어!”

무소음실의 소음 한계치를 아슬아슬하게 겉돌며, 개러드는 역겨움과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마치 책임을 덜어버리려고 하는 것처럼. 마침내, 릭이 울먹였다.

무서웠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어요. 모든 게요.”

곧 돌아오마.”

꼭 돌아오세요. 꼭이요.”

그는 방폭문 같은 방음문을 넘어, 다시금 완벽한 혼돈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벙커는, 굳이 비유하자면, 광란의 도가니가 따로 없었다.

사람들은 쾌락에 찬 비명을 지르고, 머리를 흔들고, 거머리처럼 유리창에 달라붙으려 기를 썼다. 그 모습에, 수십 년 전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보였다. 오랜 수명이 주는 넘치는 에너지에 취해, 방탕하게 굴던 자신. 그 옛날의 기억이, 그 옛날의 외우주인이었던 자신이, 자꾸만 바깥으로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먹이를 앞에 두고 쇠창살에 가로막힌, 탐욕에 찬 짐승처럼.

음악은 이제 인식의 범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이라도 들이킨 것처럼,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거인들. 사람들이 유리창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보이지 않는데도,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마치 폭풍을 앞둔 사람처럼, 포효의 경계를 한참 넘어선 외침이, 살과 피로 이루어진 연약한 몸을 뒤흔들었다. 군중들의 환호성이 어렴풋이 들렸다. 개러드는 무아지경에 빠져 흐느적거리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팔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환희에 찬 뒤틀린 얼굴들이 풍선처럼 둥둥 떠올랐다. 색채들이 눈앞에서 폭발했다. 개러드는 주저앉았다. 죽고 싶었다. 죽어서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아니면 그대로, 저 군중들의 품에 섞여들거나. 저들처럼 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뒷골목 술집의 시큰한 냄새가 풍기는 듯 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손바닥 안에서 펄떡였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불타는 도시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불 폭풍이 도시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녔고, 비행기들은 돌멩이처럼 뚝 하고 지옥의 아궁이 속으로 떨어졌다. 그 사이에서, 일곱 개의 거대한 실루엣이 다시금 떠올랐다. 달처럼 불타는 눈이 전조등처럼 사방을 훑었다. 심금을 자극하는, 지극히 서정적인 외침.

, . 세상의 종말이에요. 모두가 불길 속으로 떨어져요.’

불길이 더욱 더 거세게 타올랐다. 건물들이 버터처럼 녹아내렸고, 도로는 부글거리는 검은 강으로 변해 흘러내렸다. 철골 구조물이, 끼익 소리를 내며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박물관처럼 보이는 대리석 건물이, 마침내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 짧은 순간에도, 번쩍이는 명판이 뚜렷이 보였다. ‘감마 프라임.’

불길 속으로 끌어당겨져요. 불길 속으로 걸어가요. 불길 속으로.....’

일곱 개의 형체는, 이제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붉은 용으로 변해 있었다. 용이 꼬리를 휘두르자, 별의 삼분의 일이 떨어져 내렸다. 또다시 꼬리를 휘두르자, 나머지 삼분의 일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또 다시 꼬리를 휘두르자, 오로지 공허만이 남았다.

다가올 파멸을 예고하듯이, 마주친 두 개의 지각 판처럼 울려대는 드럼.

칠판 긁는 소리를 내며 히스테릭하게 울부짖는, 현수교 크기의 기타.

마찬가지로 히스테릭하게 울부짖는, 그 자신.

나를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져요. 공허 너머로 이끄는 힘이 느껴져요. 그 힘은 우리 모두에게 스며들어요. 불태워야 해요. 재만 남도록. 불태워. 불태워. 불태워어어어어.’

군중들은 목에 펌프라도 달린 것처럼 헤드뱅잉을 했고, 머리카락이 경기장 응원도구처럼 온 사방에 휘날렸다. 개러드는 군중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퀀 젭. 그는 이제, 전에 보았던 학식이나 교양은 모두 벗어던진 채,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개러드는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사실, 그의 몸 전체가 북처럼 진동하고 있어서, 흔들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내 친구, 개러드!” 퀀 젭이 고개를 들자, 환희에 찬 뒤틀린 얼굴이 얼핏 드러났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몸은 괜찮은 거요?”

내 아들. 어디 있어?”

당신 아들? 그 조그만 애? 스스로 잘 해낼 수 있을 거요. 나중에 우리 팬클럽의 일원이 될지 누가 알겠소?”

개러드는 퀀 젭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는 어리벙벙한 표정을 안면에 남긴 채, 그대로 넘어졌고, 지네처럼 많은 발들이 그 위를 덮었다. 개러드는 집단적인 린치가 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군중들은 그를 무시하고 유리창을 향해 밀물처럼 밀려갔다. 수많은 손들과 무릎과 팔꿈치들이 뒤에서 떠밀었고, 개러드는 해변을 향해 밀려가는 파도처럼, 속수무책으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곧 아들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들만은 내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한, 절대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답습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인파의 앞, 유리창에 맞닿아 있는 곳에 작은 형체가 얼핏 보였다. 발광체의 빛에 잠깐 비친 얼굴은, 틀림없이 그의 아들의 얼굴이었다.

멕코이!” 개러드가, 음악과 비교했을 때 극히 미약한 목소리로 외쳤다. “멕코이!”

그는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아들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그때, 발작적인 일렉트릭 기타 소리가 채찍처럼 그를 강타했고, 그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지만, 필사적으로 아이를 뒤쪽으로 끌고 나왔다. 품 안에 든 아들의 몸이 이상할 정도로 축 늘어져 있었다.

얘야?” 가장 끔찍한 가능성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면서, 개러드는 아들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갔다댔다. “일어나렴.” 숨을 쉬지 않았다. 세상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아들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원망과 비애를 가득 담아 군중들을 향해 돌아섰다. 마음속 깊은 골짜기에서, 여태까지 잊고 있었던 분노가, 풍선 터지듯 탁 터졌다. 혈관에 불길이 타올랐다. 이건 분노의 불길인가, 아니면 음악이 주는 흥분인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모두 지옥에나 떨어져라!” 그가 외쳤다. “이 말똥 같은 자들아. 이 구더기 같은 자들. 이 근본도 없는 자식들아. 이 후레자식들. 내가 톡톡히 맛을 보여주고 말겠어. 듣고 있어? 듣고 있냐고?”

사람들은 관심조차 주지 않고, 앞으로 몰려가기만 했다. 이제 그는, 벙커 뒤편에서 덩그러니 홀로 남아있었다.

그는 분노를 표현할 적합한 말을 찾아 더듬거렸다. “, ,” 하지만 그 말들은, 한참 전에 묻어버린 과거에서나 쓰던 말들이었다. “, ,” 저만치 구석에서 안전요원이, 속이 꽉 찬 안전봉을 쓸 타이밍을 고민하고 있었다. “, ,” 그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은 더 이상 복구될 수 없는 지경으로 잘게 쪼개졌고, 시간은 한없이 길게 늘어졌다.

영원과도 같이 긴 시간이 흐르고, 멕코이를 내려놓았던 곳에서, 조용히 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들어봐요. 이거 정말 끝내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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