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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겁의 과실

2016.09.11 19:2509.11

[단편] 겁의 과실



 "'많은 사람이 간과하지만, 꽃은 식물의 생식기예요. 그러니까 꽃을 꺾거나 따는 행위는 거세나 다름없지요. 꽤 잔인한 처사예요.'

 많은 대화를 나눴건만, 유별나게 기억에 남은 건 그런 말이었다. 아마 그녀의 말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뒤이어 이렇게 생각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식물의 성기로 다발을 만들어 축하하거나 청혼하고, 귀나 머리에 꽂고, 나아가 관으로 만들어 머리에 쓰는 것이란 말인가?
 머릿속의 이미지가 꽃이 아니라 남성기였던 것이 화근이었겠지. 괜히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건 뭐랄까……. 악질적이네요.'

 겨우 그렇게 대답했다.

 '네. 악의적이죠.'

 메르디는 쓸쓸히 웃었다. 머리에는 그 미소처럼 식물의 생식기가 활짝 피어 있었다.
 겉머리의 코르사주. 그녀의 상징이자, 그녀의 정체성이자, 그녀의 표징이었다.
 언제나 화려했다. 그때도 그랬다. 가슴께 부근의 하얀 실밥 같은 꽃 모양 프릴과, 팔부터 손목 부근까지 둘러싸여 있는, 붉은 장미가 수 놓인 실크. 잘록한 그녀의 허리선을 달라붙듯이 내려와 마침내 꽃망울이 터지듯 화사하게 펼쳐진 드레스는 아마릴리스를 뒤집어놓은 것 같다.
 금방 했던 말 때문인지, 메르디의 온몸이 정욕으로 뒤덮여있는 것만 같았다. 꽃을 단순히 예쁜 피조물로 보는 사람이 이런 차림을 한다면 그런 감상은 품지 않았을 테지. 눈앞의 여자는 꽃을 그런 시각에서 볼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몸을 생식기로 도배해 놓았다. 당시 나는 그 사실에도, 눈앞의 광경에도 아연했다.
 지금이라면 그녀가 그런 말을 한 저의를 알 것만 같다. 그녀는 분명 꽃을 무척이나 싫어했을 테고, 꽃으로 치장한 자신의 모습에 언제나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메르디는 그 말을 내게 해서는 안 됐다. 내 머릿속에 상처처럼 남은 그 말이 제동장치가 되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려는 내 손을 억지로 멈춰 세웠기 때문이다.
 물론 다 변명이다. 나는 변명하고 싶어서 이 글의 첫머리에 그녀와 나눴던 대화 중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이라 거짓말하며, 사실은 예쁘다고만 생각했던 그녀의 모습을 구역질 났었다는 표현으로 고쳐가며, 과거를 바꾼 것이다.
 과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같은 경험을 하고, 다른 과거를 소유한다.
 그렇다면 괜찮겠지. 나는 그녀의 모습에 질렸다. 그렇게 해 두자. 겁쟁이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여 손을 거둔 것이 아니라, 꽃을 꺾는다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꼈다는 것으로 해 두자. 모든 일의 책임을 가여운 꽃의 요정에게 돌려버리자.
 나는 겁쟁이니까."



 "그래, 나는 겁쟁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죽 그래왔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겁'이라고 불렀다. 겁쟁이가 아니라, 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두려운 정도가 너무 심하기 때문인 것 같다. 누가 먼저 그렇게 불렀다기보다는, 어느샌가 모두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눈을 뜨고 마주하는 모든 것에 겁을 내는 얼간이. 어둠이 두려워 눈조차 다시 감지 못하는 멍청이. 그렇다고 시선을 돌릴 용기조차 없는 머저리.
 숨 쉬는 것조차 두려워했고, 사람과의 접촉을 무서워했고, 숨을 못 쉬게 될 것을 상상하며 떨었다.

 '너는 아무것도 못 할 거야.'

 반박하는 것조차 무서웠다. 그리고 그 말대로였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나에게 면박하는 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도 없어서, 누가 나에게 욕을 하든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떨면서 살다가 죽을 운명이겠지.
 나는 이미 체념했고, 낫을 든 신의 사자가 내 목을 베어가는 걸 두려워했다. 이 세상에는 무서워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삶도, 죽음도, 결국 두려움의 연장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의 호출이 있었다. 드디어 나는 내쫓기는 거야. 나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길러봤자 의미 없다는 걸 어른들도 깨달아버린 거야. 사자의 낫이 목에 걸려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울면서 걸어갔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방. 시설에서 외부의 손님이 오면 안내되는 곳이었다.
 뿌옇게 번진 시야에 한 남성이 자리 잡았다. 항상 시선을 피했던 내가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던 건, 시계가 흐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 차라리 시력이 좋지 않았다면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내게 눈앞의 남자가 말했다.

 '네가 '겁'이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도, 저을 수도 없었다. 남자는 손수건을 꺼내 내 눈을 닦아주었다. 회복된 시야는 남자의 눈을 담아냈다. 눈동자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빛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 시선이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자는 끔찍한 모습을 하지 않았고, 충격적인 모습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안 무섭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었다.

 '내가 네 양부가 되어주마.'

 그렇게 시설을 나오게 되었다."



 "남자는 자신을 '후회'라고 부르라 했다.

 '네가 겁이 많아서 '겁'이라면, 나는 '후회'겠지.'

 그가 그렇게 말했지만, 실상 그를 그렇게 부를 일은 많지 않았다. '후회' 따위보다 그를 지칭하는 적절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그는 멋쩍은지 귀밑을 손가락으로 긁고는,

 '그래, 아들아.'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아버지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촌에서도 구석진 숲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생계는 약초를 캐거나 사냥을 하거나 나무를 해서 꾸려나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사냥을 배우고, 나무하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는 약초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겠다고 완고하게 못을 박았다. 어렴풋이 그가 말했던 '후회'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일을 배우고, 동물의 사체를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자연스레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가능해졌다. 아마도, 피와 피 냄새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성인이 되던 날, 드물게도 아버지는 술을 끼고 귀가했다.

 '술은 용기의 한 형태란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술잔을 나누었다. 처음 먹어보는 술은 썼다.
 아버지는 말이 많아졌다. 아마 말할 '용기'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병치레가 잦은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딸아이를 낳고 죽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딸 또한 병치레가 잦았다. 항상 무언가가 결핍된 것처럼 골골 앓았다. 창백하고, 몸을 떨고, 울고.
 아버지는 약초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어떤 걸 어떻게 조합해서 약으로 만들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했다. 멀리 있는 도시의 의원을 만나러 가기도 했지만, 별 방도가 없었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런 약, 저런 약, 이런 약초, 저런 약초, 이런 약재, 저런 약재를 시험했다. 소용없었다. 딸은 드러누웠고, 아버지는 그저 딸이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러던 중 어떤 수상한 곳에서 수상한 씨앗을 얻었다. 이것을 먹으면 아마, 딸은 나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고민했다. 수상한 씨앗은 수중에 있었고, 딸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갔다. 씨앗을 복용해도 안전한 것인지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딸은 씨앗을 먹었고, 다행히도 상태는 호전되어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죽어버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이야기를 일단락했다. 석연치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아버지가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말하지 않은 부분에, '나를 양자로 받아들인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에, 그걸 알게 되면 아버지에게 실망할 것만 같았기 때문에 나는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미 실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쨌거나 미숙했던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치 아버지의 이야기 속 딸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버지는 며칠 후 죽었다.
 집 뒤뜰 커다란 메타세쿼이아 밑에서 꽃에 둘러싸여 편안한 미소를 지은 채 죽음을 맞이했다.
 아마 이 모습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백골과 함께 무너지는 살이나, 피비린내가 짙은 시체와는 달리, 향기까지 나는 죽음이었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죽음은 드물었기에.
 나는 꽃째로, 아버지를 땅에 묻었다. 메타세쿼이아의 밑이다."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꽤 화려한 차림이다. 숲 속에서 살면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다. 숲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화려함이었으니까.
 아버지는 화려함을 독이라고 했다. 눈에 띄기 쉬우면, 표적이 되기 쉽다고. 색에 민감한 동물도 있는 법이라고.
 여인은 후각적인 화려함마저 있었다. 짙은 꽃내음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녀는 문을 두드렸고, 나는 문을 열었으며, 그녀는 내 어깨너머로 방 안을 기웃거렸다.

 '안대가 정말 멋지시네요.'

 나는 사냥을 하다가 다쳤다고 얼버무렸다.

 '그건 참……안된 일인가요? 멋진 일인가요?'

 당시에는 그걸 나에게 묻지 말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꽤 용감한 분이신가 보네요.'

 그 말에는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야생동물과 사투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라도 한 것일까. 용감하다는 말은 나랑 가장 어울리지 않은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 여인이 무슨 일로 방문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아……. 혹시 여기에 사시던 분은 어떻게 되셨는지요.'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의 지인이었다.
 안 그래도 몇몇 찾아오기는 했었다. 나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고는, 여인을 뒤뜰 메타세쿼이아로 안내했다.
 거대한 나무는 밋밋했던 모습을 버리고 마치 새로운 생물처럼 바뀌어있었다. 땅을 뚫고 나온 많은 꽃이, 담쟁이처럼 줄기를 타고 올라와 있었다. 마치 아버지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마련하려는 것처럼.

 '아름다운 나무네요.'

 그녀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둥글게 흙으로 덮어놓은 봉우리는 누가 보아도 무덤이다. 나도 옆에서 기도할까 생각했지만, 역시 오랜 지인과의 재회라면, 비켜주는 게 상책이다.
 몇 시간 정도 지난 뒤, 문 앞에는 다시 그녀가 있었다. 눈이 약간 부어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메르디에요.'

 화려한 차림의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도 겉머리의 코르사주는 활짝 피어있었다."



 "메르디는 자주 집을 찾아왔다. 그녀의 말로는 아버지와 자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라고 한다. 못 나눈 말이 많다고 하면서.
 아버지도 참 그렇다. 내가 말을 걸 때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면서.
 그런데 메르디는 아버지와 무슨 관계일까. 겉보기에는 나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데.
 아버지와 함께 이 집에서 살아가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다. 물론 내가 아버지 곁에 항상 있었던 것도 아니니, 내가 없을 때 만나는 지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나보다 어렸던 나이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소리인데.

 '아버지, 였어요.'

 마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메르디는 말했다.
 거짓말. 아버지는 딸이 죽었다고 했었는데.

 '당신도 석연치 않았었잖아요?'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걸까.
 메르디는 자신의 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가위 모양으로 쥔 손으로 가위질 흉내를 내고 있었다.

 '볼 수 있거든요. 마음의 형태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덜컥거리며 심장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당황하게 해버렸네요.'

 메르디는 넉살 좋게 말했다. 나는 내 마음을 읽힌다는 두려움과, 짐작일 뿐이지만 그녀의 소재지를 알아버렸다는 두려움과, 두려움과, 두려움과, 두려움에 질렸다. 척 보기에도 내 마음의 형태가 일그러져있는지 메르디는 얼굴을 찡그렸다.

 '네. 당신과 같은 곳에서 왔어요.'

 시설.
 눈이 욱신거렸다."



 "그곳은 가능성의 장소였다. 가능성을 실험하는 장소였다. 실험의 가능성을 재는 장소였다. 장소는 가능성의 실험이 있는 곳이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손으로 적어 내려가면서 나는 그곳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굉장히 고민했다. 아, 그곳을 표현하는 더 좋은 말이 있잖아. 고민 끝에 적기로 했다.
 그곳은 지옥이다.
 온갖 죽음을 볼 수 있는 장소였다. 묘사하기에도 추악한 것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뽑아서 겁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하지만 뽑을 용기는 없다.
 그 끝에 입양되어, 도망칠 수 있었는데.
 어째서 또 찾아온 거야.

 '당신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에요. 그냥,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어요.'

 메르디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대화는 이어졌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마음의 형태가 보이니까요. 너무 혼란스러워하면 단어가 뒤죽박죽되어버리니까 진정해주실래요?'

 진정할 수 있을까 보냐. 나는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니까, 보호자가 없어져 버렸으니까, 시설에서 다시 나를 회수하러 온 게 아닐까. 다시 그 지옥으로 나를 끌고 가려는 게 아닐까.

 '안 끌고 가요. 당신은 '사람'이 되기를 선택했잖아요?'

 메르디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갔다. 진정하면 다시 오겠노라고 부언하며.
 나는 메르디를 부정했다. 아니다. 나는 무언가를 선택한 적이 없다. 눈앞의 선택지에서 도망쳤다.
 어쩌면, 그녀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는지도."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메르디는 집을 계속 찾아왔다. 다른 곳으로 도망칠까,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내가 아는 곳은 시설과, 숲의 집이다. 마음을 기댈 장소가 비좁다.
 어느 순간부터 메르디는 내가 사냥을 갈 때마다 따라다녔다. 가끔 돈을 쥐여주고 사냥감을 뺏어갔다. 이 돈이면 차라리 가공된 고기를 사는 게 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메르디는 말했다.

 '시설의 임무예요. 알고 싶으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무언가 끔찍한 일에 써대려는 거겠지.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메르디는 가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둘의 공통 화제는 시설이 아니면 아버지가 다였으니까. 시설 이야기는 싫다.
 메르디가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버지가 했던 이야기와는 조금씩 달랐다.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아버지는 도시의 의원을 찾아다녔고, 막대한 빚을 지었으며, 그 빚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고 한다. 빚이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커졌을 즘에 시설에서 접촉해왔다.
 시설, 수상한 곳.
 시설에서는 수상한 씨앗을 넘기며 말했다.
 이 씨앗이 병을 치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증된 약은 아니다. 임상시험에 협조해준다면 빚을 갚아주겠다.
 강요된 선택지였다. 사방이 막혀있었고, 유일한 출구는 바닥에 난 구멍이었다. 그렇다면, 걸어 들어가는 그곳이 지옥이더라도, 인간은 움직인다. 가만히 있는 것은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다행히 메르디의 병은 치료되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침상에 누운 딸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드는 위화감.
 혹이다.
 겉머리에 혹이 나 있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수상한 씨앗을 먹고, 수상한 징후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걱정했고, 현실은 무참히 그 걱정을 실현했다.
 머리에서 싹이 핀 것이다.
 아버지는 시설로 달려가서 당장 설명하라고 외쳐댔다.

 '아. 성공했군요.'

 뭐가 성공이냐. 메르디가 무슨 상태인지 당장 설명하라고.

 '그녀는 선택받았습니다. 자격을 얻은 거죠.'

 무슨 자격.
 시설의 사람들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고, 아버지를 내쫓았다. 망연자실한 채로 쫓겨난 아버지는 자신의 손이 비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딸이 없었다.
 시설은 딸을 돌려주지 않았다.

 '계약서에 분명 관련 사항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사항은 없었다. 분명 꼼꼼히 읽어보았다. 아버지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계약서를 읽었다. 그리고 눈을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이해하신 것으로 알고.'

 무슨 장난을 친 것인지. 그곳에는 없었던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다. 귀하는 씨앗의 복용 결과 머리에 혹, 혹은 싹이 난다면, 임상 인원을 시설에 맡긴다는 사실에 대해 동의함.
 아버지는 자책하고 후회했다. 이제 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다. 딸이 건강해졌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어떤 실험에 이용되어서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 곁에서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둘 걸 그랬다. 그리고 딸이 죽으면, 뒤따라 죽었어야 했다. 너무나도 쉽고, 너무나도 안일하게 생각했다.
 후회하던 나날, 시설에서 다시 접촉해왔다. 아버지는 접촉해오는 인원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죽일 수 없었다. 시설이 다시 선택을 강요했으니까.

 '딸아이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런 게 거래조건이라면, 아버지는 어떤 것도 내어줄 수 있었다. 목숨까지도.
 그래서 맡게 된 게, 겁이 많은 '겁'이었다.
 메르디보다 한 살 적은 나이의.
 나였다.

 '결국 아버지는 저를 보시지는 못했지만 말이죠.'

 쓴웃음을 짓고, 메르디는 덧붙였다."



 "그녀의 머리에는 꽃이 피어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장신구나 조화 따위가 아니라, 생화임을 알았다. 그 꽃은, 그녀가 마음의 형태를 보는 원천이자,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기능하게 하는 심장이었다. 인간이었을 적의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녀는 자주 넘어졌다. 머리 위의 심장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다리가 제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시설 안에서는 이렇게 화려하게 입지 않아요.'

 그녀의 화려한 복장은, 눈속임이었다. 시설 밖으로 나올 때, (배경과의 위화감은 차치하고) 위화감이 들지 않도록 복색을 갖추는 것이었다. 그 복색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져 버렸다.
 메르디는 어느샌가 인근 마을에서 유명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숲에는 꽃의 요정이 산다. 마치 마음을 읽듯이 원하는 것을 알고, 웃음이 예쁜.
 그 누구도 그녀의 심장이 뛰지 않고, 그 누구도 그녀의 피가 붉지 않고, 그 누구도 그녀의 손이 차갑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만이 알고 있었다.
 메르디는 분명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닌 무언가다. 초월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벗어났다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이든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질투 비슷한 것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묘소에 가서 자주 한탄하듯이 말했다.
 나에게는 애정 같은 거 가지지 않았겠지.
 딸을 만나기 위한 수단이었으니까.
 그런 '수단'에 불과한 꼬마에게 아버지라고 불리면 어떤 기분일까.
 역겨우려나.
 아버지의 심정을 상상하기가 무서웠기에 그만뒀다.
 줄기를 넘어 나뭇가지 끝까지 뻗어 나간 꽃들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마치 여전히 딸을 그리워하노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괜히 심술이 났다.
 나는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다. 번민했다."



 "'도망칠까요.'

 깊은 겨울 숲을 걷고 있자니 옆에서 메르디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부축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래 걷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녀와 사냥을 나가는 날이면 거의 이런 모습이 되어버린다.
 나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대꾸를 포기했다. 메르디와 있을 때는 아무 말도 안 해도 된다. 그녀가 알아서 읽고 알아서 대답해주니까.

 '시설에서 말이에요. 뭔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없어진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시설은 무서운 곳이다. 딱히 내가 겁이 많아서 그곳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모두가 무서워하는 곳이다. 메르디 또한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터였다.

 '아뇨. 무섭지는 않은데요. 제 목적은 이제 이룰 수 없으니까. 하다못해 시설에 엿이라도 날려주려고요.'

 메르디는 용감하네. 태평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런 생각은 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눈에 띄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을까, 그런 것만 생각하는 남자였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별안간 메르디가 떨어져 나갔다. 부축을 풀은 그녀는 비틀비틀 서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당황해서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그녀는 내 손을 쳐냈다. 명백한 거부의 몸짓. 기분 탓인지 눈이 싸늘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이 겁쟁아. 너는 아무것도 못 할 거야.'

 그건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다. 끔찍한 장면만 계속되는 지옥 같은 곳에서 들었던 말 같다.
 그리고 눈앞은 지옥이 되었다.
 어느샌가 커다란 곰이 다가와 가녀린 꽃을 육중한 팔로 내리찍었다. 꽃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붉지 않은 수액을 흩뿌리며 눈 위에 쓰러졌다.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화려함은 독이다. 눈에 띄기 쉬우면 표적이 된다.
 메르디에게서는 화려한 향기가 난다. 위험한 향기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무사한 게 신기할 정도다.
 곰이 이제야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눈치챈다. 나는 활을 집어 던지고 허리춤의 도끼를 꺼내 들었다. 곰의 두꺼운 발톱을 종잇장 차이로 피하고, 눈을 노려 도끼를 작렬시킨다. 단지 한 번 부딪쳤을 뿐인데 도낏자루가 아작났다. 손에 통증이 달린다. 신의 사자가 목울대에 낫을 들이댄다.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아니다. 차라리 죽어서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후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엉망진창이 된 채 살아남았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아있다. 거울이 있다면 만신창이가 된 내 모습을 생생히 묘사할 수 있었겠지만, 있었어도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볼 수 없으니까.
 안대가 벗겨졌다.
 수년간 쓰지 않았던 눈이 별안간 들어오는 빛에 저항하여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나는 엉망진창인 몸을 끌고 메르디를 들쳐 매어 집으로 향했다. 메르디의 꽃내음이 더 강해진 것 같아 불안했다. 곧 있으면 해도 져버린다. 이 이상 노려지면 진짜 죽는다. 반걸음 뒤에서 신의 사자가 함께 걷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집에 도착하여, 메르디를 침대에 누이고, 날이 저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에 침투하는 빛이 적어지니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렇기에 볼 수 있었다.
 메르디의 죽음을 볼 수 있었다.
 익숙한 형태의 죽음을 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겁……?'

 메르디는 힘겹게 눈을 뜨고 내 이름을 말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동요했다.
 어째서. 왜. 메르디는.
 이렇게 죽는 거지?

 '그렇……군요. 제가 죽는 모습…… 봐 버렸군요…….'

 부정하려고 해도 생생한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쉽게 인정할 수도 없었다. 인정해버리면, 무언가가 박살 난다. 반드시 박살 나 버린다.

 '저는…… 아버지처럼…… 죽나요?'

 메르디의 말은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마지막 변명선을 돌파하여, 나로 하여금 현실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내 눈앞에는, '죽음을 보는 눈' 앞에는, 꽃에 휩싸인 채 죽음을 맞이한 메르디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평화로운 미소를 띤, 향기까지 나는 죽음.
 아버지가 그렇게 죽었다.
 나는 여분의 안대로 황급히 눈을 감쌌다. 생각을 차단하고, 재빨리 메르디의 상처를 치료했다.

 '이런 거, 소용없는데…….'

 메르디가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메르디 또한 말이 없어졌다. 모든 처치가 끝난 뒤, 나도 메르디도 한참을 잠에 빠졌다. 현실에서 도피하듯이."


 "메르디는 당장 죽지는 않았다. 곰은 팔 휘두르기 한 번으로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메르디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 꽃이 시들지 않으면 살아있는 것이다.
 눈으로 그녀의 죽음을 목도한 덕에 죽어버리는 줄 알았다.

 '곧 죽을 거예요.'

 그런 내 심정을 읽고, 메르디는 단박에 부정해버렸다.

 '그러고 보면, 제 꽃에 대해서는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심장을 대신한다는 사실만 알고 계셨죠.'
 
 메르디는 침대에 몸을 누인 채로,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들을 수밖에 없었다.
 메르디의 몸에 심어진 식물은, 사람의 몸에 기생한다. 사람의 신체가 발휘하는 기능을 서서히 정지시키고, 식물이 그 기능을 대체해간다. 그 끝에 사람은 죽고, 온전한 식물이 된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건, 그 과정에서 생겨난 부차적인 능력이다.
 
 '저는 이미 죽었어요. 심장이 멈췄으니까, 인간이 아닌 셈이죠.'
 
 그럼에도 그녀가 인간처럼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지닌 특이한 체질 덕분이었다. 잦은 병치레, 원인을 알 수 없고, 치료법도 알 수 없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병.
 깊숙이 숨어있는 원인균이 최소한의 항체가 되어 완전한 인격의 소멸을 막는다. 인간과 식물의 기묘한 균형점을 잡아낸다.
 시설에서는 그러한 실험체를 하나 갖고 있었지만, 놓쳐 버렸다. 도망쳐 버렸다. 귀중한 샘플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시설은 그 샘플이 아이를 낳았고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버지에게 접근하여, 구슬리고, 꾀어서 실험체를 되찾았다.
 실험체, 메르디.
 메르디를 확보한 시설은, 아버지에게 '겁'을 맡긴다.
 
 '정말 질투 나요. 아버지는 저보다 당신을 선택했으니까요.'
 
 시설은 아버지에게 제안했다. 암꽃을 피웠으니, 수꽃을 피워내라고. 수꽃을 피워내기 위한, 특이체질을 가진 아이를 준비했노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에게 씨앗을 먹이지 못했다. 어쩌면 아이가 허물없이 부른 '아버지'라는 단어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버지는 또 한 사람을 죽여버릴 뿐이라고 깨달은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았다.
 그런 걸 원하지 않았다니.
 그런 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버지에게 직접 들었어요.'
 
 메르디는 그렇게 말했다.
 뒤뜰. 꽃에 휩싸인 메타세쿼이아.
 아버지는 시설이 맡긴 아이 대신, 씨앗을 집어삼키고, 꽃에 휩싸여 죽음을 맞이했다. 사람으로서의 죽음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디가 찾아왔고, 메르디는 한 줌의 인격이 남은 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했다. 왜 자신을 버렸느냐고. 왜 자신이 아니라 저 겁쟁이를 선택했느냐고.
 아버지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네 동생을 지키거라.'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메르디는 한참을 울었다.
 이제 남은 씨앗은 없다. '겁'은, 내 아들은 안전하다.
 메르디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 겁쟁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망만 치는 소인배가, 내 동생일 리 없다. 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인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죽었다. 돌이킬 수 없다. 시설에는 '겁'이 죽었다고 보고했다. 왜 그랬는지는 메르디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시설은 '겁'의 시체를 회수하라 지시했지만, 땅에 묻혀있어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새로 지령이 내려왔다.
 그 꽃을 키우라.
 메르디는 꽃을 키웠다. 짐승의 고기와 피를 땅에 흩뿌리며, 높다란 메타세쿼이아가 흐드러진 꽃으로 잠길 때까지.
 
 '저는 복수를 하려고 했어요. 어디에 대한 복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당신에 대한 복수인지, 시설에 대한 복수인지. 다른 사람의 마음은 잘만 알겠는데, 제 마음만은 모르겠지 뭐에요.
 그렇게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채로 세월을 보냈지요. 저도 결국 당신처럼 선택을 못 하는 겁쟁이였던 거겠죠.
 그런 제가 선택을 결심했어요. 당신을 지키자고.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자고.
 왜인지 아세요?'
 
 메르디가 웃었다.
 
 '당신이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거나, 자신을 '수단'이라고 생각했다고 멋대로 착각해서는 토라지고 번민하고 겁먹고. 그 사실이 너무나도 화가 났어요. 아버지는 그토록 당신을 사랑하는데, 그토록 당신을 위했는데, 그 끝에 죽음에 이르렀는데 당신은 아버지에게 화를 냈으니까요.
 아버지가 얼마나 슬퍼하실까, 생각해봤어요. 이 오해는 나만이 풀 수 있다 생각했지요. 그래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늦어버렸네요.'
 
 정말이지. 늦어버렸다. 메르디는 죽어가고, 아버지는 죽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말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현실에서 벗어나 버렸다. 이상의 이야기다.
 그리고 메르디는, 그렇게 도망치려던 나를 단숨에 현실로 붙잡아 끌어내렸다.
 
 '이제, 시설에 엿을 먹이려고 해요.'
 
 메르디는 계획의 개요를 설명했다. 그것은 알기 쉽고,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곧 있으면, 메르디의 인격은 소멸하여 완전한 식물이 된다. 그 꽃은 떨어지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 열매가 시설의 목적이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의 꽃을 꺾어버리고, 집을 불태워버리라고. 메타세쿼이아를 도끼로 무너뜨리고, 불로 한껏 지져버리라고.
 남은 씨앗은 없다. 종자가 될 꽃도 없다. 그러면 시설은 지금까지 연구해온 모든 자료를 생으로 날려버린다. 그야말로, 시설을 주춤하게 할 작전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꽃을 꺾어버리면.
 
 '저는 어차피 죽어요.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부탁해요.
 그 이후 그녀는 잠에 빠졌다. 잠이 드는 빈도가 늘어났다. 깨어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리고는 일어나지 않게 됐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메르디가 바라는 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겁쟁이이기 때문이고, 겁이기 때문이고, 언제나 도망치는 머저리이며, 언제나 울부짖는 얼간이이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은 메르디의 심장을 꺾는 것은 불가능했다.
 뒤뜰에 나가니 아버지께서 대신 변명해주셨다. 들릴 리 없는 환청이다.
 누나를 지키거라.
 그리고 곧 자기혐오에 괴로워했다. 아, 나는 이다지도 비겁하고, 무력한가.
 그러는 사이 꽃은 지고, 열매를 맺는다.
 메르디는 미약한 숨을 거두었다. 눈에 비친 그녀는, 꽃에 휩싸이지도 않고, 꽃향기도 내뿜지 않았다. 그저 시체만이 고요히 있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결과였다."
 
 
 
 겁은 울고 있었다. 울면서 글을 쓰고 있었다. 이제 이 근방에 사람이라고는 자신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죽고, 메르디가 죽었기 때문이다. 겁은 꼴사납게도 누이의 유지를 실행하지 못했다. 겁이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다못해, 지금이라도 그녀의 의지를 존중하고 싶었다.
 겁쟁이에, 비겁하게 도망치는 자신을 결별하기로, 늦게나마 결심했다.
 그래서, 집을, 근방의 숲을 태워버릴 재료를 만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써낸 글과, 약간의 기름과, 불씨. 이 정도면 충분한 재료가 될 것이다.
 겁은 열매를 안고, 집을 나섰다.
 곧 불길이 일어났다. 뜨겁지만, 따뜻했다. 부디 아버지와 누이가 따뜻한 채로 이승과 결별해주길.
 
 
 
 겁은 걸었다. 끊임없이 걸었다. 이렇게나 멀었나 싶을 정도로 여정은 험악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세상을 나왔을 때는,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저 땅만을 보고 걸어갔다.
 지금은 아니었다. 사람이 사는 마을. 사람이 깔아 놓은 도로. 사람들의 모습. 안대를 벗어버린 눈에는 마을이 폐허가 된 모습과, 도로가 갈라진 모습과, 사람들이 죽어버린 모습이 보였다. 지옥이었고, 실로 지옥이었다. 이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걸음 끝에 도달한 곳은 시설이었다.
 품에는 소중하게 껴안은 '열매'가 있었다.
 겁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겁은 완강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열매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강제로 빼앗을 수는 있었지만, 사람들은 겁의 모습을 두려워했다. 눈이 미쳐있었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항상 겁을 먹던 대상이, 겁을 주고 있었다. 누구도 접근할 생각을 못 했다.
 그러던 도중, 겁은 한 방으로 안내받았다. 겁에게는 잊을 수 없는 방이었다. 아버지를 만난 방.
 육면체의 방. 육면체가 전부 거울로 도배된 방. 무슨 조화인지 이곳에 들어오면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외부손님이 오면, 항상 이곳으로 안내받는다. 겁은 알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으니 흰색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은 이 시설의 책임자이자 관리자이자 주인이었다. 겁은 알고 있었다.
 노인은 자리에 앉아 겁을 응시했다.
 
 "이거……. 놀랍도다. 혹시 그 열매는 본인이 생각하는 그 열매인가."
 
 노인이 말했다. 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메르디가 아니다. 메르디처럼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 그런 걸 물어봐야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노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딱히 대답을 듣고 싶어서 물어봤던 게 아니었다. 겁은 알고 있었다.
 
 "죽었다고 보고받았는데, 살아있었느냐."
 
 겁은 노인의 모습을 응시했다. 죽음을 보는 눈으로 응시했다. 그 눈은 애석하게도 노인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바였으나, 상관없었다. 겁은 노인을 죽일 수 없다. 죽일 생각도 없었다. 그런 건 겁쟁이에게 무리였다. 겁은 알고 있었다.
 노인은 잠시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겁은 생각했다. 분명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과 거래할 때, 침묵을 지키다가 상대방이 초조해하면 말을 꺼냈다. 우위를 점하는 기본적인 화술이었다. 겁은 그런 것을 알고 있었다.
 
 "알려줘."
 
 겁은 그것만이 자신의 목적이라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노인은 얼굴을 찡그리더니, 곧 겁의 의중을 눈치챘다.
 
 "알려준다면 그 열매를 넘기겠느냐."
 
 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방. 노인은 대답에 만족하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겁의 아버지와 누이를 각각 죽음으로 몰아넣은 열매에 대한 것이었다.
 
 "그 씨앗은, 생명나무의 씨앗이다. 먼 옛날 낙원에 있었을 때 봐둔 것을 어떻게든 재현해낸 것이지. 수많은 불확정성에 기대어 겨우 나온 물건이다. 한 쌍의 씨앗을 만들어낸 것을 기적이라고 해야겠지. 다시는 만들 수 없어."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의 열매를 먹고 낙원에서 추방당했지. 지혜를, 이지를, 지성을, 인류는 손에 넣었건만, 정작 그 인류는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언젠가 튼튼한 육체는 노쇠하여 땅에 묻힐 것이고, 정신은 소멸하여 무가치한 공기로 전락할 것이다."
 
 노인은 눈에 힘을 주었다. 언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생명나무의 열매가 있다면, 인류는 위대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어. 지혜의 열매를 먹어서 지성을 가진 동물이 되었다면, 생명의 열매를 먹어 영생마저 거머쥔 신이 될 수 있다고!"
 
 겁은 무심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 이제 네가 들고 있는 그 열매의 가치를 알았느냐? 그러고 보면 너는 실험의 결과를 미리 판별하는 역할이었지. 하도 많은 죽음을 본 끝에 망가져서 밖으로 방출했다만. 수많은 끔찍한 죽음을 눈에 담아왔을 것이다. 괴로웠겠지. 그 열매가 있다면, 더는 그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겁은 침묵했다. 노인 또한 침묵했다. 노인은 할 말을 마쳤다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이제 가만히 있으면 열매를 내놓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겁은 노인에게 익숙한 감상을 품었다. 왠지 모르게 노인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메르디처럼 능숙하고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한 느낌이 있었다.
 지금 노인은 두려워하고 있다. 겁먹고 있다. 수천 년에 걸쳐 이제야 겨우 도달한 결과가 한순간에 사라질 가능성을 무서워하고 있다.
 겁은 노인의 겁을 알아차렸다. 겁은 항상 겁의 근처에 있었기에, 눈치챌 수밖에 없다.
 겁은 주머니에서 묵직한 금속 물체를 꺼냈다. 곧바로 노인의 눈에 경계하는 눈빛이 서린다. 총이다. 작지만, 무거운, 모델명조차 없는 조잡한 불법 수제 총기다. 걸어오는 도중에 적당히 훔쳐왔다. 본래대로라면 이 방으로 안내될 때 몸수색을 당했겠지만, 아무도 겁의 몸을 수색하려 들지 않았다. 노인 또한 괜찮을 것이라고 언질을 줬으리라.
 겁은 총구를 노인에게 향하지 않고, 자신의 관자놀이로 향했다. 그리고 노인의 이름을 꺼냈다. 겁은 알고 있었다.
 
 "아담, 제안 하나 해도 될까."
 
 노인, 아담은 겁의 의중을 꿰뚫어보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틈이 있다면, 그리고 아담이 조금이라도 겁을 먹지 않았더라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겁은, 겁쟁이는 빈틈없이 떨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무서워하는 상대를 눈앞에 두면, 사람은 방심하는 법이다.
 
 "무슨 제안인가."
 
 "이 열매를 넘겨주면, 너는 또 다른 실험체로 실험하겠지?"
 
 순전히 겁의 추측이었지만, 아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절대로 자신이 먼저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남자는 언제나 그래왔다. 지혜의 열매를 먹을 때도, 누군가가 먹은 다음에서야 먹었고, 이 생명의 열매를 먹을 때도 분명 그러하겠지. 겁은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겁쟁이다.
 
 "그렇다면, 당장 내가 실험대상으로 지원해주지."
 
 "무슨 속셈이지?"
 
 "나는 죽기 싫다고. 아버지도 메르디도 죽어버렸어. 지금까지 수많은 죽음을 보고 두려워했어. 그러니까 나는 죽음이 두렵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아. 나는 죽고 싶지 않아. 그러니, 죽지 않는 열매에 대한 실험에 자원하게 해 줘."
 
 "그리고, 그러기 위해 준비한 총인가."
 
 아담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겁은 죽기 싫고, 죽음을 봐왔고, 실험에 자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곳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방. 그러므로 아담은 겁이 한 말이 진실이라 판단했다.
 
 "좋다. 지혜의 열매의 권능에 속한 특이체질을 가진 네놈이라면 유의미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겠지. 씨앗이라면 그 열매 속에 있을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겠군."
 
 그 말을 듣고, 겁은 열매를 먹었다.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형체가 남지 않을 때까지 먹어치웠다. 노인은 느긋이 관찰했다. 열매를 먹음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하며.
 그리고 마침내 다 먹었을 때, 겁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머리가 터져나가고, 그걸로 끝이었다. 살이 제멋대로 붙거나, 재생하거나 하면서 부활하지 않았다.
 하지만 죽지도 않았다. 심장은 계속 뛰고 있었고, 몸도 움직이고 있었고, 죽음을 보는 눈 또한, 거울을 통해 겁의 죽음 아닌 죽음을 보고 있었다.
 
 "호오……. 죽지만 않는 건가. 이건 특이체질 탓인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판단할 수 없군."
 
 아담은 그저 그렇게 감탄했다.
 겁은 그런 아담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아직 몸에 붙어있는 입이, 불쾌하게 웃음 짓는다.
 
 "아담, 엿은 좋아해?"
 
 손에 남아 있던 씨앗을 입안에 털어놓고, 와그작 와그작 와그작 와그작 와그작, 빈틈없이 씹어 삼켰다.
 말릴 수 없었다. 아담은 겁에게 달려들어 절규했다. 경솔한 자신을, 겁먹었던 자신을 저주했다. 지혜의 열매로 인해 어쭙잖은 미래를 엿볼 수 있었던 자신을 저주했다. 그 사내에게 씨앗과 소년을 넘기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정작 그 열매를 손에 넣지 못해서야 의미 없는 일이었다. 겁은 웃었고, 웃었고, 웃었다.
 이후 겁의 몸은 살아있는 채로 실험장에 내던져지지만, 아담은 의미 있는 데이터를 얻어낼 수 없었다. 더욱이 씨앗을 재복제해낼 수도 없었다. 그 씨앗을 다시 얻으려면 또다시 불확정성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담은 과연 자신의 남은 날 동안 씨앗을 얻어낼 수 있을지 암담하기만 했고 실제로 다시는 같은 씨앗을 보는 일 없이 죽었다.
 먼 훗날, 아담이 죽고 난 다음, 세계는 무너져내려 신으로부터 한 계단 더 멀어지게 된다. 인류는 낙원에서 쫓겨난 이래로 계속 추락하고 있다. 예정된 죽음을 볼 수 있다든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든가, 그런 체질의 인간들이 점점 사라져간다. 따라서 시설 또한 역사와 신화 속에 파묻히게 된다.
 겁의 시선 속에서 항상 폐허였던, 이제는 그 모습 그대로의 폐허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그 나무는 어떤 열매의 씨앗과, 어떤 겁쟁이의 몸을 양분으로 자라났다. 결코 죽지 않는 몸을 양분으로 삼은 그 나무는 끝없이 자라났고,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종을 번식하기 위한 생식기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었다.
 꽃이 없는 나무에는, 세피로트의 나무(생명의 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END>
2016.09.11
EP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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