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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증위팔처사

2016.07.16 12:2807.16


- 증위팔처사 贈衛八處士 -
 

 멀리, 늑대가 운다.

 
"늑대는 항상 무리를 지어. "
 
 정막이 말한다.
 
"외로운 늑대라고 하던데..."
"말이지 실제가 아냐. 늑대는 무리를 지어. 그러다 늙을 적에는 무리에 나가서 혼자 죽는대."
 
 정막은 덧붙인다.
 
 "그리고 암컷은 꼭 한마리만 취한대. 난 그게 우스워. "
 
 무엇이 우스운지는 묻지 않는다. 이 사내는 말보다 표정으로 많은것을 말한다. 그것은 정막이 기다린 질문이 아닐거라는 생각이 든다.
 칼을 손질한다. 시리게 차가운 칼의 물결이 꺼져가는 화톳불에 반사된다. 천천히 칼을 손질 할수록 지루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나흘 전에 정막을 만났다. 항주의 무슨 촌. 별 볼일 없는 시골의 주막에서였다.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 고량주를 마셨고 만두를 몇 개 씹었다. 산채 냄새가 나는 질긴 만두를 뜯을 때, 나는 품안에 지닌 은자가 십분의 일 줄어든 것이 아팠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고향을 밟을 수 있을 은자의 양을 가늠해 보았다. 서른 냥의 은. 오천리가 넘는 귀로에는 그 만큼의 은자가 소요될 것이었다.
 그러니 고향은 희망일 뿐 구체적인 계획은 될 수 없었다. 
 적어도 정막을 만나기 전까지는.
 
 "내 고향은 북방이오. 당신은?"
 
 먼저 말을 걸어온 이는 정막이었다. 나는 고향의 이름을 말했다. 
 
 "행화촌杏花村은 산에 있지. 작은 호수가 있어. 두강주가 유명하고 봄에는 복사꽃이 눈부시게 피지. 그리운 곳이군."
 
 정막은 웃으며 나의 고향이 그의 고향에서 닷새거리라 했다. 그는 여섯 사람의 이름을 말했고, 그 중 두 사람은 내가 아는 이름이었다. 
 
 "나도 여간해선 모르는 이에겐 말을 걸지 않아. 아까 형제의 말씨를 듣고 동향사람인걸 알았지. 솔직히 반가웠어. 이쪽에서 동향사람을 만나는 일은 드물거든." 
 
 우리는 몇 근의 두강주를 주문했다. 기분 좋은 취기가 금세 가슴께까지 올라왔을 때였다.
 정막이 이상한 질문을 던져왔다.
 
 "형제는 사람을 죽여본 일이 있나?"
 
 그렇다고. 어렵게 답했다. 정막은 답을 들은 뒤에도 내 얼굴을 뜯어 볼 뿐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형제의 여비가 부족하다면 우리가 해볼 만한 일이 있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낙河落 제일의 거부는 백박귀白迫鬼다. 올해로 여든을 먹었다. 몰락한 유생의 집안에서 태어나 농사꾼으로 자랐다. '유생의 아들이 소를 끈다.' 비웃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그는 묵묵히 밭을 갈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그는 마을의 처녀와 혼인했다. 착실한 여자였다. 놀랍도록 죽이 잘 맞았다. 여자는 인색한 남편에 맞춰 살뜰히 집안을 꾸려나갔다. 
 백박귀의 살림은 그때 부터 불어났다. 가뭄이 든 해마다 전답이 넓어져갔다. 굶주린 사람들은 고작 두어 말의 밀이나 쌀알에, 한마지기의 땅을 잡았다. 그의 전답이 천마지기가 넘었을 때, 하낙의 촌민들은 백박귀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백박귀는 머리를 조아린 사람들에게 저리로 쌀을 빌려주었다. 
 
 "그리 나쁜 사람 같진 않군요."
 
 정막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두강주를 나의 잔에 따라주었다. 
 
 "좋은 사람에겐 귀라는 별호가 붙지 않아."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네. 묵은 것일수록 좋아지는 것은 술 뿐이지." 
 
 정막은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예순이 되던 해에 백박귀의 아내가 죽었다. 백박귀는 곡기를 끊고 사흘간 눈물을 흘렸다.
 첫 첩을 들였을 때 사람들은 백박귀를 손가락질 하지 않았다. 두 번째의 첩을 들였을 때 까지 그랬다. 셋, 넷, 다섯. 백박귀는 그칠 줄을 몰랐다.
 첩이 불어났다. 춘궁기의 이자가 높아졌다. 백박귀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사람들은 백박귀의 뒤에서 침을 뱉었다.
 
 "어지간히 원성을 산 모양이군요. 그를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는 것을 보면."
 
 정막이 잔을 내려놓는다. 먼 데서 바람 소리가 들린다. 이런 무거운 침묵이 힘겹다.
 
 "죽일 사람은 백박귀가 아니야. 백박귀의 일곱 번째 첩년이지."
 
 망설여졌다. 나는 아직 여인을 죽여본 일이 없다.
 
 "어떤가."
 
 정막의 낮은 목소리가 재촉해왔다.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아직 알려줄 수 없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얼마를."
 "은 백 냥."
 
 
 
 복사꽃은 봄에 핀다. 가을이 되면 행화촌의 복사꽃이 그리워진다. 꿈에 당신을 보는 일이 잦아진다.  
 간밤 당신의 꿈을 꾸었다. 꿈속 당신이 예전과 같았다. 당신의 긴 속눈썹이 아름다웠고, 정 많아 보이는 눈이 투명했다. 발아래 사박거리는 낙엽의 느낌이 너무도 생생했다. 
 내가 걸어가면 당신이 나를 따라왔다. 그만 돌아가라고 내가 말했다. 함께 돌아가자고 당신이 말했다. 나는 당신의 손을 뿌리쳤다.
 나는 복수를 해야만 했다.
 한 걸음을 걸을 때 마다 내가 늙었다. 열 걸음을 걷기도 전에 당신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두려워졌다.
 
 "힘이 괜찮군. 생각보다 실력이 뛰어나."
 
 정막의 칼은 실전적인 초식들로 이뤄져 있었다. 공격을 할 때 생겨나는 빈틈들을 적시에 선점해왔다. 상단을 치면 한걸음 물러나 하체를 베어오고, 하체를 노리면 손목을 찔러들었다. 나는 그의 칼을 막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형이야말로 어디에서 그런 기술을 익힌 겁니까?"
 
 정막은 별반 대꾸를 하지 않고 묵묵히 칼집에 칼을 꽂아 넣었다. 
 
 "내일 하낙에 출발할거야. 형제도 준비해두게."
 
 이때 여자가 죽어야하는 이유를 듣지 못했다는 생각이 났다.
 
 "형. 백박귀는 대체 왜 제 첩을 죽이려는 겁니까?”
 “그년이 임신을 했어.” 
 
 선뜻 이해가 어려웠다. 
 
 “백박귀의 자식이 아니랍니까?”
 “통정을 한 사람이 그 집의 일꾼이라더군.” 
 “저라면 첩을 죽이느니 차라리 일꾼 놈을 죽이겠는데요.” 
 “그래 통정을 한 사내랑 같이 다닐 때가 많대. 여자가 자주 절에 다니는데 그때 일꾼 놈도 같이 빠져 나온다는거야. 인적이 그리 많지는 않은 절이니까, 길목에 며칠 숨어서 기다리면 될 거야. 그러면 죽일 사람은 둘이 될 수도 있어.”
 “만약 둘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땐 한사람 씩 맡아 죽이면 되겠지. 둘을 죽이면 은자 백 냥을 더 주겠다는군.”
 
 

 다시, 늑대가 운다.
  
 새벽이 밝았다. 나는 일어나 타다 남은 화톳불을 비벼 껐다. 
 
 “형제는 어째서 여기에 오게 된 건가?”
 
 갑자기 어려운 질문이다.
 
 “복수를...”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은 기억이 아니었다. 
 
 “누구의 복수였지? 선친이신가?”
 
 하지만 정막이 계속 물어왔다.
 
 “두 분 모두의.”  
 “그럼 자네는 복수에 성공했나?”
 “...네.”
 
 열여덟에 나는 원수를 쫒았다. 칼을 가르쳐 줄 사부를 찾아내는데 일 년이, 놈을 죽일만한 검형劍形과 검세劍勢를 익히는데 삼년이 걸렸다. 추적에는 사년이 소요되었다. 놈은 그만큼 먼 곳에 있었다.
 팔년이 걸려 운남에 도착 했을 때 원수는 살아있지 않았다. 놈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놈의 어린 아들이 울면서 제 아비의 위패를 가리켰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가 없어서 팔년을 쫒아온 것인데, 같은 하늘 아래 있지를 않았다.
 내가 아는 기술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 죽은 사람을 살려내 죽이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복수를 해야만 했다.
 
 “형은 어째서 고향을 떠나 오셨습니까?”
 “나는...”
 
 대답하려던 정막이 쉿, 입에 손을 올렸다.
 
 “사람이 오는 것 같다.”
 
 우리는 엎드렸다. 복면 탓인지 숨이 더웠다. 까슬까슬한 풀잎이 가슴팍을 긁었다. 
 두 명이었다. 수풀 사이로 남자와 함께 오솔길을 걸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배가 튀어나온걸 보아 백박귀의 첩이 맞았다.
 
“내가 먼저 나가서 여자를 잡을게. 자네는 사내를 맡아. 놈이 나를 공격하면 자네가 뒤를 쳐. 도망을 가면 잡아야해.” 
 
 정막이 속삭였다. 나는 내가 죽일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시시각각 그들이 다가왔다.
 
“지금이다”
 
 정막이 먼저 나갔다. 여자를 잡았다. 정막의 칼을 본 사내는 잠깐 망설이더니, 덤비지 않고 뒤로 돌아 도망쳤다. 
 내가 사내를 쫒았다. 도망치기에 그는 둔했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사내의 다리를 벨 수 있었다. 엎어진 사내는 한 바퀴 굴러 나를 보았다. 눈이 절망으로 물들어있었다. 이런 눈을 보는 일이 싫었다. 나는 눈을 피하며 칼을 쳤다.
 
 “기다려!”
 
 사내의 목젖 아래서 칼이 멈췄다. 정막의 목소리였다. 그는 여자의 몸을 결박한 뒤였다.
 
 “저 여자와 정을 통했나?”
 
 다가온 정막이 질문했다. 
 
 “무슨 소리야? 누가 너희를 보낸 거지?”
 “저 여자와 통정을 했나?”
 “그게 무슨 말이...”
 
 정막이 사내의 팔을 베었다. 흡. 사내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영감이 보낸 사람이냐?”
 “저 여자의 배에 든 것이 네 씨인가?”
 
 손에 쥔 칼자루가 축축하게 젖어 왔다. 곧 사람이 다닐 시간이다. 여자의 배에 든 것이 누구의 씨이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형. 빨리 칩시다.”
 
 정막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무슨 소리야?... 나는 그 여자의 몸에 털끝도 건드린 적이 없는데.”
 “시치미 떼지 마라. 그럼 왜 이런 새벽에 함께 다니나?”
 
 사내는 힘없이 웃었다.
 
 “영감이 시킨거야. 임산부를 혼자 보낼 수 없다고.”
 “백박귀는 네가 통정 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그 말을 믿나? 정신이 나간 영감이야. 오래전에 노망이 났어. 제 씨를 싸지르고 제 씨인지도 몰라. 마누라가 죽은 뒤부턴 늘 그랬어. 그 영감의 첩들이 모두 비슷하게 생겼다는 아나?” 
 “모르겠다.”
 “너는 정말 내가 그년을 취했다고 생각하나? 나는 정말...”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다.”
 
 그제야 정막이 눈짓했다. 빠르게 칼을 그었다. 남자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팔을 들어 목의 벌어진 부분을 막으려했다. 잠깐 애쓰던 남자가 곧 일어나지를 못했다.
 
 “목소리를 낮춰. 크게 말하면 죽인다.”
 
 끄덕이는 여자의 눈이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정막은 여자의 재갈을 풀었다. 여자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살, 살려주세요. 어르신, 제발 살려주세요...”
 
 정막이 복면을 벗었다. 여자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드디어 니년을 잡았다." 
 
 정막이 말했다. 
 
 "니년을 잡기위해서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아?”

 정막이 칼을 여자의 목에 댔다.

 “...당신에게, 당신에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
 
 울면서 여자가 말했다.
 
 “당신은... 당신이 없던 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아?”
 
 여자는 계속 울었다.
 
 “우리? 우리라고? 돌아오니까 애들은 다 죽어있었어. 둘 모두. 그게 니년이 한짓이야.”
 “그래. 죽었지. 애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애들이 뭐라고 하면서 죽었는지를 알아?”
 “입 닥쳐! 네가 무슨 할 말이 있어?” 
 “애들이 죽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어? 나는 아이들 곁에 있었어. 당신은 아무데도 없었고.”
 “있을 수 없었지! 나는 전쟁터에 있었으니까. 내가 뭘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내가 뭘 어떻게...”
 “그래! 당신이 없었잖아. 전쟁터에 있었잖아.”
 “적어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야 했어.”
 “기다리고 있었어, 오년을 넘게 기다렸어. 나도 죽을 것 같았어, 나도...!”
 
 여자가 소리를 지르려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을 모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여자의 입을 막았다. 
 
 “죽어라 이 년!!”
 
 놀랐다. 여자의 불룩한 배에 빛이 번뜩인다. 정막의 칼이다. 젖은 손바닥으로 경련하는 여자의 얼굴이 느껴진다.
 
 “못된 년! 이 못된 년!”
 
 정막이 계속 칼을 넣었다. 여자가 이빨로 내 손가락을 깨문다. 견뎠다. 견뎌야했다. 뻘게진 여자의 눈이 나의 눈과 마주쳤다. 
 차츰 여자의 몸이 무거워졌다. 나는 여자에게서 손을 뗐다.
 정막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당신은 도망쳤어... 자식을 죽이고 지아비를 버리고, 도망쳐 남의 첩년이 된 것은 당신야.” 
 
 사위가 환하다. 완전히 날이 밝았다. 나는 여자를 수풀로 끌고 갔다.
 
 “형! 뭘 하고 있습니까? 시간이 많이 지났어요. 언제 사람이 올지 모릅니다.”
 
 정막은 내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모아 여자의 얼굴 위에 덮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남자를 끌어와 여자의 곁에 놓았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형 일단은 하낙을 뜹시다.”
 “하낙을 벗어나? 왜? 나는 아직 할일이 남아 있는데.”
 “일단은 도망쳤다가...”
 “나는 도망치지 않아!”
 
 정막이 울고 있다. 
 
 “백박귀를 죽이러 갈 거야. 그놈이 내 아내를 첩으로 삼았어. 어쩌면 아내의 배에든 것이 그놈의 씨였을지 몰라. 나는 그 놈도 죽여야 해!”
 
 문득 나의 복수가 떠올랐다.

 원수가 죽었지만 나는 살아있었다. 나는 복수를 해야만 했다. 
 원수의 대를 이을 세 아들은 칼을 몰랐다. 알기에 어렸다. 부모의 목을 친 원수와 달리, 놈들의 몸이 허점투성이였다. 거기엔 아무런 형形이 없고 세勢도 없었다.  
 가장 어려웠던 놈은 서너 살 먹은 막내 애였다. 쉬워야 할 일인데 어려울 게 없는일인데, 칼을 칠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복수를 했다. 이제 삼년이 지난 이야기다. 
 
“이걸 가지게, 백박귀가 내게 준거야.”
 
 정막이 뭔가 건넸다. 백냥이 적힌 전표였다.
 
 “난 그놈의 돈을 받고 싶지 않았어. 주막에서 형제를 만났을 때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네.”
 “제발...”
 
 핏발 선 정막의 눈이 나를 보았다. 나는 말릴 생각을 버렸다. 
 
 “...몸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여비가 생겼으니, 이제 형제는 고향으로 가겠지?”
 
 전표를 갈무리 하는데 정막이 물었다. 
 나는 망설였다.
 
 “형제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을 건가?”
 
 계속 망설였다. 답하기가 어려웠다. 품안에 지닌 전표의 무게가 내겐 너무 무거웠다.

 복사꽃이 봄에 피기에 나는 가을이 되어서야 행화촌의 복사꽃을 그리워했다. 매년 가을의 초입에 고향에 갈 서른 냥의 은을 모았다. 은자를 모으는 동안에 가을이 지나고 첫 눈이 내렸다. 소담스런 눈이 북방으로 가는 길을 막아버리면 나는 이듬해 봄까지 귀로를 미룰 수 있었다.
 무너져 내린 집과 담벼락을 보는 일이, 잡초가 내린 부모의 무덤을 찾는 일이 두렵지 않다고 변명할 수 있었다.
 십 일 년을 늙은 내가 십 일 년을 늙어버린 당신을 마주할 일이 두려워서가 아니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지난 삼년간 서른 냥이 넘는 은자를 가져 본 일이 없었다.
 만약 올해도 서른 냥의 은자를 모으지 못했더라면, 나는 종내 당신의 꿈을 꾸며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의 봄날을 기다릴 수 있었으리라.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오기 마련이니, 봄에는 여기에도 행화촌의 복사꽃이 필터였다.
 
 그랬던 내게 백 냥의 은자가 생겨 버렸다. 
 
“이봐! 형제. 형제는 고향에 갈 건가?”
 
 답하지 않고 그냥 떠나려는데 정막이 재촉해온다.
 
 “백박귀를 죽이고 나면 형은 고향에 가실 겁니까?”
 
 정막도 답하지 않는다.
 
 
 
fin
 

 
*증위팔처사(贈衛八處士)   위팔처사에게      
                                
                                          두보
 
今夕復何夕 (금석부하석)   오늘 저녁이 어떤 저녁인가 
共此燈燭光 (공차등촉광)   이 등촉의 빛을 함께 하는구나 
少壯能幾時 (소장능기시)   우리네 젊었던 시절이 언제적 얘기련가  
鬢髮各已蒼 (빈발각이창)   귀밑머리털이 세어버렸으니 
訪舊半爲鬼 (방구반위귀)   옛 친구 찾으래도 반은 귀신이 되었다. 
 
焉知二十載 (언지이십재)   어찌 알았으랴, 이십년 지나서야 
重上君子堂 (중상군자당)   다시 그대의 집에 오게 될 줄을  
昔別君未婚 (석별군미혼)   헤어질 때 그대 아직 혼인하지 않았었는데 
兒女忽成行 (아녀홀성항)   어느새 자식들이 줄을 이루었네
問我來何方 (문아래하방)   물어오기를, 당신은 어디에서 오셨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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