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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발화인간

2013.09.15 18:4409.15

발화인간

1.

암세포 정복. 모든 세대가 잘 먹고 오래 사는 생물학적 업적은 인구증가비를 포화상태까지 치닫게 했다. 도시 마다 불법체류자들이 들끓고 치안력도 그에 비례해 약해졌다. 과격분자들이 외치는 인종청소까지는 아니어도, 각 국가들은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주거지 부족 문제해결을 명분 삼아 보호 받지 못하는 고아들을 시범대상으로 1세부터 19세까지 냉동배양 프로젝트를 시작 한다는, 한국을 포함한 OECD 결정을 맹렬히 비난 했었다. 그러나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이다. 2079년 현재 비약적으로 발전한 뇌과학에 비해 사멸 당하다시피한 인문심리학자 손승철이 한국 최초로 냉동배양 중인 이진아와 황민우의 정서관리직이 되리라 누가 알았겠나. 작년 출범한 새 정부 정책의 영향으로 5평 전월세 5000/300 이라는 살인적인 폭리에 못이겨 굴복 해야만 했다. 신념 때문에 굶어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가난을 이기는 도덕군자가 아니었다.

냉동배양아들은 특수 설계된 캡슐 속에서 무의식 상태로 성장 한다. 시스템은 자동적으로 냉동액 농도를 조절해가며 배양아들에게 영양소를 공급 하고 신체발육을 돕는다. 다만 정신적인 관리만은 사람을 써서 수동적으로 해왔는데, 이 작업은 배양아들의 뇌에 생체회로를 연결해서 그들의 기억정보를 토대로 구현한 가상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1년 마다 해당 관리자가 직접 가상현실에 동기화 해서 다양한 분야의 학습정보 주입 및 정서적 안정 상태를 점검 하는 것이다. 최종배양년인 19년을 1년 앞둔 올해가 그 마지막 점검이었다.
이 중대하신 작업을 나같은 부정적 이력자에게 맡긴 이유는 반대여론 심리에 정통한 내 심리학자로서의 능력과 처절한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뒷조사 한거라 추측한다. 접선해올 때만 해도 실감이 없었다. 영화에 나오는 요인납치는 몰라도 꼴은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국정원씩이나 되는 곳에서 내가 쓴 웹칼럼에 비공개 댓글로 같이 일하자고 하면 보통은 댓글 삭제를 누를텐데 말이다. 역발상 보안법이 따로 없었다.

터치패드를 조작해 냉동액 농도를 살핀다. 3%가 더 떨어져서 농도가 50%가 되면 나도 가상공간으로 들어가 두 아이의 의식과 심리상태를 관찰 하게 된다. 냉동배양 반대언론에게도 거부감이 없도록 대중적인 입맛을 강조 하며 정서상태를 점검해달라는 게 프로젝트 총괄자의 뻔뻔한 주문이었다. 그새 긴장했나. 몸이 뻣뻣해졌다. 기구를 매개체로 타인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무의식 속에서 자라난 18세 아이들의 정신상태가 어떨지는 예상 하기 어려웠다. 내 전임자였던 뇌과학자가 불미스러운 일로 퇴출 됐다는 소문도 있고 말이다.
타원형 캡슐 속에 발가벗고 누워 있는 아이들은 겉보기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한 쌍이다. 자신들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격렬하게 돌아갔는지도 모르겠지. 무기력한 원망에 빠진 사이 아이들을 뒤덮은 냉동액이 절반까지 떨어졌다. 이진아와 황민우라,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해도 상대적으로 읽기 쉬운 남자아이의 심리부터 들여다 보기로 하고 나는 가상현실 기구에 누워 스위치를 눌렀다.

<이 편지가 선전포고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너란 여자는 비겁하다. 아니, 10대 여자라는 너와 네 종족 자체가 그렇다. 화요일 오전11시 지하철 10호선 1-3칸에는 대체로 사람이 없었다. 남들 사정 따위 내 알바 아니지만 이 시간 이 자리는 본래 그런 세계였다는 이야기다. 너는 2주 전부터 갑자기 나타나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성역을 침범 했다. 내가 느꼈을 당혹감은 감히 상상도 못했을테지. 
열차 플랫폼에서 너와 처음 조우했을 때 나는 어리석게도 네가 평범한 10대 여자인줄만 알았다. 요란한 머리와 짧은 교복 스커트. 적당한 칸에 섞여서 터치폰이나 두드릴 차림새라 방심하고 말았다. 예상을 뒤엎고 너는 하고 많은 수송칸 중에서 1-3칸, 거기서도 내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의 위빠사나 명상을 방해했다. 오해 할까봐 말해두겠다. 위빠사나 명상은 승려들 말고도 내면에 심취할 목적을 가진 모든 사색자들의 제례다. 어감이 낯설다고 무례하게 웃지 않기를 희망한다.
돌이켜서 나는 그 시간에 명상에 빠져 내 주변을 추상화 시켜야만 한다. 전동차 바퀴와 레일의 마찰소리, 문틈으로 파고드는 매미 울음, 자동차 경적, 어느 머저리가 두고간 신문, 빈 깡통, 바닥에 떨어진 벌레, 날아다니는 벌레, 모든 시청각들과 공명하는 내 감정들을 한 자 한 자 입으로 발해서 이름표를 붙이는 게 매주 화요일 2교시 조퇴 후 병원으로 향하며 마음을 추스리는 나만의 중요한 의식이었다.

2주 전 나는 평소 그대로 명상을 마친 뒤 눈을 떴다. 음. 보통 때 보다는 목소리가 컸다고 인정한다. 사람도 없는 칸이라 주파수가 높건 낮건 상관 없었으니까. 문제는 네가 아무도 모르게 1-3칸으로 들어와 내 앞자리에 앉아서 그 의식을 모조리 빠짐없이 남김없이 지켜봤다는 사실이다. 아아, 떠올리면 지금도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다. 철지난 초소형 뿔태 안경 너머로 눈웃음 짓는 그 큰 눈을 피해 시선을 내렸더니 요망하게 꼬아댄 다리에 치이고 허벅지에 맞아서 다시 위로 튕겨 올랐다. 10초 남짓 되는 시간 동안 내 눈은 초고속으로 튕겨대는 네 손바닥 안 탱탱볼이었다. 고의든 아니든 남을 공황상태로 빠트린 주제에 너는 무책임하게 다음 역에서 내렸다. 내리기 전에는 문 앞에 서서 풉. 하고 웃기까지 했다. 텅빈 1-3칸 가운데서 나는 정거장을 일곱개나 지나치도록 뇌내 조각모음에 전념해야했다.

여기까지 읽을 즈음이면 너는 어쩌라고. 라며 한 마디로 일축 시킬지 모른다. 하지만 네 행동이 물리적, 법률적으로 비저촉 된다고 책임을 회피 할 수는 없다. 상식이나 과학으로 규명 하지 못하는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를테면 나와 내 전담의가 명명한 비선형 신경성과민증반응이란 증상이 있다. 각종 공포증이 특정 장소나 물건에 병적인 사고장애를 일으키듯 나는 내 예상범위를 뛰어넘는 현상들과 마주하면 과민반응이 나타난다. 이 말인 즉슨, 네가 내 병의 원인제공자 중 하나가 됐다는 이야기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너에게 위해를 가할 의도는 없다. 너 역시 고의적으로 나를 괴롭히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하루빨리 이 쓸데없이 꼬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내 위빠사나 명상의 소재가 너라는 여자로 점철 됐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명상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리면 발 끝에서 머리끝까지 너를 구성하는 모든 이미지를 의미불명의 방언으로 쏟아내는 내 처참한 몰골을 발견한다. 한 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에 올리고 그 위에 팔꿈치를 올려서 턱을 괴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건너 보는 너의 공격적인 자태가 머리를 헤집어놔서 불면증이 생겼다. 길가던 여자들이 옆머리를 넘길 때면 네 빨간 귀걸이와 그 밑의 목선이 떠올라서 경미한 신경쇠약까지 느낀다.
더 이상의 분쟁이 심화되는 걸 멈추자는 의미에서 15일 토요일 오후 2시 예지역 5번 출구(빌딩입구) 앞 카페 27번 자리(2층임)에서 10호선 11시 열차 1-3칸의 패권과 너라는 여자의 정체에 대해 논의할 것을 제안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선전포고다. 사적인 만남을 위한 어줍잖은 권고 따위가 아님을 강조한다.>

발칙한 연애편지로다. 자의식과잉으로 인한 강박증 증상이 보이긴 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이 아이들의 뇌에 주입된 상위 배경정보는 인구증가 문제가 대두 되기 한참 전인 2011년도 경기도의 한적한 신도시로 설정 돼 있기 때문에 이정도 스트레스 자극은 역으로 정서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다. 그 시대의 악습 중 하나인 수학능력평가도 없애뒀는데 이정도 쯤이야. 그나저나 감수성이 풍부한 녀석이다. 가상현실 공간 상에서 이진아와 황민우를 제외한 모든 NPC들은 외모든 성격이든 평범 하고 수동적인, 최대한 자극성과는 동떨어진 1차원적인 유형 일색일텐데 잘도 거기까지 감정을 이입했다. 나는 순조로운 출발에 긴장이 풀어져서 곧바로 이진아의 의식으로 들어갔다.

<"푸핫!" 한 시간 일찍 카페에 도착해 편지를 다시 읽으면서 몇 번이나 웃었을까. 이 유령도시 같은 촌구석에도 요런 참신한 또라이가 있을 줄이야. 생긴 건 얌전하게 생겨 가지고 희한한 구석이 있네. 위빠사나 어쩌구 명상법도 웃기지만 뭐 선전포고? 지하철 입구부터 빌딩 카페 내부까지 손그림으로 그려서 친절히 만나달라고 애원 하는 구애포고겠지. 날 의식할 거라 예상은 했다. 그렇게 대놓고 빤히 보는데 아무렇지 않으면 수컷이 아니지. 꼴에 수컷이라고, 반응이 하도 웃겨서 서비스로 치마자락 좀 올려줬기로서니 한 방에 넘어가서 이런 편지를 보내 놓다니. 내가 1-3칸에 안 탔으면 어쩌려고 그랬니.
약속시간을 3분 남기고 역 입구에 보라색 체크셔츠에 흰색 반바지로 코디한 촌발 날리는 소년이 출몰했다. 2시를 칼같이 맞추려고 일부러 2분 동안 밖에서 대기까지 하신다. 나도 화답해주려고 그 애가 쪼르르 올라와서 자리에 앉아 물만 홀짝 거리도록 예의상 20분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무표정 하면서 깊게 그 애 얼굴을 응시했다. 나름의 결심이라도 있었나. 오늘은 퍽 근엄해보인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게 강한 척 해봤자 다소곳한 매무새와 가련한 몸매를 가리지는 못했다.
"왜 가만 있어. 할 말 있어서 부른 거 아냐?"
"너, 너는 무슨 이유로 내 자리를 침범했지?"
내가 먼저 말을 걸면 그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침범이 뭐야 침범이. 
"침범이라니. 내가 내 돈내고 내 자리에 앉겠다는데."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결국은 평소 그 모습이 나온다. 삐질삐질.
"왜 그 많은 자리를 두고 하필 내 앞에 앉아서"
내 눈을 피하면서 또 삐질삐질. 귀여운 반달눈썹이 춤을 춘다.
"지금처럼 거슬리게 쳐다보냐는 말이다."
나한테 무슨 죄를 졌길래 그렇게 어쩔줄 몰라 하실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온몸으로 주도권을 떠넘겨주면 입꼬리가 올라 갈 수 밖에.
"애시당초 넌 뭐하는 여자냐!"
나는 빨아당기듯이 얼굴과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서 직접 알아보라며 도발적으로 쏘아본다. 아무리 작고 약한 수컷이라도 궁지에 몰리면 으르렁 대는 건 똑같다. 동족혐오를 일으키는 그들의 고함소리나 다혈질 성향도 이 강아지 같은 남자아이에 한해서는 오히려 정복욕을 자극한다. 왜일까. 왜 그에게만 끌릴까. 길거리에서 그를 처음 보고서 미행의 미행을 거듭해 같은 지하철 칸에 탈 때까지 수도 없이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남경여고 이진아. 넌?"
"…하, 한선고 황민우."
그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려서는 자그맣게 말했다. 완전히 압도 당한 꼴이다. 무슨 생각을 할까. 편지에 적힌 그 명상법처럼 나에 대한 느낌들에 라벨을 붙이느라 한창일까? 당황스러움, 부담스러움은 넘겨버렸으면 좋겠다. 중간 과정 따위는 생략 해버리고 지금 당장 내게 끌리는 감정을 가졌으면 좋겠다. 처음은 우연이었으나 두번 째부터는 너를 의식해 내가 11시 차 1-3칸 앞자리에 앉은 것처럼, 이렇게 마주보는 동안 네 마음 속에도 나만의 자리를 만들어줬으면 해.>

이게 뭐지? 왜 둘의 의식이 서로 연결돼 있는 거지? 황급히 패드를 조작해 가상현실 설정자료들을 훑었다. 기술적인 문제로 둘의 의식이 같은 시스템 상에서 배양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정상 사는 동네도 학교도 다르고 친인척도 아닌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날 수가 있는 건가. 조작된 가상현실에서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지금 본 두 아이의 의식은 2주일 전 자료다. 관계가 거기서 더 관계가 진행 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떤식으로든 아이들의 정서안정에 실패 하면 배양은 중지 되는 게 원칙이다. 그리고 어린나이의 연애는 감정의 변화와 그 폭이 특출나게 심한 관계다. 냉동배양의 부작용 때문인지 이진아는 남성혐오 강박증까지 가졌고 황민우도 정상이라 보기 어려운 심리상태다. 첫단추를 잘못 끼운 연애는 안 좋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기본적인 교육 정보를 제외 하고는 유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온실속 화초처럼 온화한 정서상태를 유지 하게 돕는 것이 내 일인데, 이래서는 곤란하다. 두 아이의 의식이 이어져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직렬접촉 된 두 명의 의식을 동시에 관리 하라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배양실을 나서서 총괄자의 개인실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업무시간 지났다는 잠이 덜깬 스피커에 "당장 문열어요!" 고함 치고 들어가서 파자마 차림으로 멀뚱히 나를 올려보는 중년 남자의 눈에 이진아와 황민우의 의식이 저장된 영상패드를 들이밀었다. 작게 뜬 총괄자의 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2.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이진아의 의식이 황민우를 침식 했다니. 무슨 텔레파시도 아니고, 그게 헛소리라는 건 문외한인 나도 알겠네요."
"현 상황으로는 그렇게 밖에 해석 할 수가 없소. 자세한 건 배양캡슐 이너박스 책임자가 와야…"
"내 전임자가 뭔가 사고 치고 나간 거 아니예요? 그런 소문이 있던데."
"일단 진정 좀 하시고…"
"진정은 얼어죽을. 생계가 달린 문젠데 진정하게 생겼어요 지금. 난 계약직이라고."
만약에라도 프로젝트가 전복 되서 반대파들이 참여자 명단이라도 뒤지다 내 이름이 나오면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뒤늦게 도착한 이너박스 담당자가 오밤중에 이게 뭔 난리냐며 인상을 찌푸렸다. 연구팀이라는 작자들이 왜이리 건성들이야. 총괄자란 인간도 힘 다빠진 노인네처럼 빌빌 거리기나 하고. 전체적으로 연구실 분위기도 풀어진 꼴이, 어찌된게 최근에 합류한 내가 제일 심각한 것 같다. 배양캡슐 밑에서 꾸물 거리던 이너박스 담당자가 흑빛이 된 얼굴로 총괄자한테만 귓속말을 했다. 그말을 들은 총괄자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제 눈으로 이너박스 내용을 확인 하더니 그대로 주저앉는 게 아닌가.
"아이고 맙소사. 우린 이제 망했어."
"뭐라구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말을 해봐요 말을!"
나는 공황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총괄자의 뺨을 후려쳤다. 총괄자는 울상이 된 얼굴로 상황을 실토했다.
"배양아들의 냉동액이 뒤섞여 버렸습니다… 프로젝트는 실패할 겁니다. 우린 망했습니다."
"아이들 의식이 서로 엮인 것도 그 때문입니까? 냉동액이 섞이면 어떻게 되는데요."
"신체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동일한 냉동액을 사용 하니까요. 단지 뇌의 모든 정보들이 혼자가 아니라 둘을 기준으로 상호작용을 시작한다는 게 문제겠지요."
"아니, 잠깐."
곰곰히 따져보면 그렇게 큰일인가 싶다. 내가 심각한 거야 위에서 아이들 정서가 혼탁해지지 않게 하라고 지시한 거니까. 밥줄과 연관 되는 문제니까 그런 거라 치고. 냉동배양을 총괄 하는 입장에서 아이들의 정서가 연결된 게 그렇게 죽었네 살았네 땅이 꺼질만한 문제인가? 가상현실이라고 해봤자 주입된 정보에 불과하다. 그냥 초기화 시키면 되는 것 아닌가. 둘이 만나기 이전으로 되돌리면 나도 좋고 저 인간도 좋은 거잖아.

"그… 아이들 의식 정보를 롤백 시키면 되는 거 아닙니까?"
회심의 한 마디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총괄자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말하면 안 되는 정보라도 되는양 그는 끙끙 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이들의 몸 속에는 카프스 세포라는 것이 들어가 있어요. 냉동액과 양성반응을 일으키는 특수한 세포인데, 서로 떨어트려 놓으면 다시 붙으려는 강력한 성질이 있습니다. 완전히 접촉을 차단 시켜버리면 세포자살이 일어나기 때문에 물리적으로는 두 아이를 따로 관리하되 의식적으로는 가상현실 상에서 같은 공간에 붙여두었던 겁니다."
"냉동액이 섞여서 그 카프스 세포라는 게 서로 붙었다. 그거죠? 어떻게. 원인이 뭔데요."
총괄자는 말없이 이너박스를 가리켰다. 직접 원인을 확인 하려고 렌즈에 눈을 대면 배양캡슐 시점으로 젊은 과학자가 캡슐 관리 버튼을 잘못 눌러서 냉동액 급수 대상이 뒤바뀌는 어처구니 없는 장면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놈이 내 전임자였음이 분명했다. 문제가 생긴 날짜가 언젠데 이지경이 되도록 아무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 여기가 국가기관 연구소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게 붙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애초에 그 세포가 대체 뭡니까."
"저도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릅니다.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예요. 정부독단으로 외국에서 들여온 거죠. 냉동배양이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원천 물질이라는 것, 자체적으로 전류성을 가지고 나아가 세포증식을 통해 발화작용을 일으킨다는 것 외에는 구성도 구조도 공식규명이 안 된 불가사의한 세포 입니다."
"아니 국가에서 자체적으로 규정도 못한 물질을 실제 인간한테 투여 했단 말입니까? 그것도 영아들한테?"
"요즘 같은 주거지 대란 시대에 고아들 생계까지 신경 쓰는 여론은 약했으니까요. 게다가 이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불치병을 타고나서 냉동배양을 통해 치료 한다는 명목도 있었고… 어쨌든 처음부터 우리가 하는 일은 정부에서 지시한 메뉴얼에 따라 이 세포에 맞는 특수 냉동액을 생산 하는 것 뿐이었어요. 냉동배양 권한도 책임도 전부 정부관할 입니다. 당신도 정부 사람 아닙니까."
이런 양심도 자의식도 없는 총괄자와 연구소가 사람의 생명을 관리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냉동배양을 지시한 정부나 그 밑에서 단물을 마시려한 나는 또 어떤가. 자괴감이 들었다. 불안했다. 이 상황을 해결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세포증식이 충분히 이루어지면 냉동액을 녹일만큼 자연발화가 일어날 것이고… 그러고 나면 배양아들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 위험한 물질이 들어간걸 어떻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아 그래서 세포가 증식하기까지 예상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정부에서는 뭐래요."
"연락은 했습니다. 사람을 보냈다고요. 그래봤자 지금부터 헬기를 타고 날아와도 3시간은 걸릴텐데. 지금 같은 증식속도면 길어야 아침까지도 못버틸 겁니다…"
해가 뜨기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남짓. 그 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냉동, 발화, 10대, 연애. 피상적인 상념들이 머릿속에 흐르다가 한 가지 단어를 만들어냈다. 강박. 이진아와 황민우 모두 강박증을 가지고 있었다. 이진아는 남성혐오, 황민우도 자기 인식 범위를 벗어나는 이진아라는 대상을 병적으로 의식하고 있었다. 둘을 떨어트려 놓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생긴 강박증을 역이용 하면 어떨까. 강박증은 원인을 인지 하고도 쉽게 고치기 힘든 병증이다. 나는 총괄자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가상현실 내에서 아이들 의식 정보. 실시간으로 조작할 방법은 없습니까?"
"그야 가능 합니다만… 아무 소용 없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든 서로 결합 되려 할테니까요. 최종성장까지 1년 앞둔 지금이 그 욕구가 가장 왕성할 시기입니다. 프로젝트도 배양아들도 동결 시키는 게 유일한 답입니다."
동결은 무슨. 여기까지 와서 해보지도 않고 주저 앉을 수는 없다.
"됐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나는 생각을 정리해 총괄자에게 전했다.

3.

나른한 봄날의 정오. 나는 내 이름을 따 만든 손승철 정신과의원의 진단실에서 환자로 찾아온 이진아와 5미터 거리를 두고 상담치료 중이었다. 양갈래로 머리를 묶고 짧은 치마에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서 도발적으로 멋을 낸 차림새가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뛰쳐나갈 것처럼 상기된 분위기다. 상담 뒤에 무슨 일정을 잡아뒀길래.
"내가 저번에 쌤한테 말했잖아요. 다른 남자들은 5미터 안으로만 가까이 와도 야구배트로 무릎뼈를 박살내고픈 충동이 솟구친다구요."
기존의 이진아가 인식한 의식정보에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나는 그녀의 남성혐오를 훨씬 강하게 설정했다. 이진아의 자의로 황민우를 차단 시켜주길 바라서였다. 잠잘 때 화장실 갈 때 외에는 24시간 야구배트를 등에 매고 다니는 극단적인 남성혐오자가 되고 말았다.
"근데 얘는 달라요. 구역질 나는 수컷 냄세도 안 나고, 생긴 것도 원숭이 같지 않아요. 보고 있으면 커피 크림거품처럼 훈훈 하면서도 망가뜨리고 싶어져요."
그런데 카프스 세포의 영향인지 이진아도 그에 대응해 의식의 진화를 이루었다. 황민우만은 예외로 남성혐오 집합군에서 제외 시켜 버렸다. 가상현실이라고 깨닫고 내 임의조작에 대항한 것도 아니다. 무의식 속의 무의식이라는 소름 끼치는 작용이었다.
"어떡하죠 쌤? 내가 어딘가 이상한 걸까요? 난 정말 남자가 싫은데."
"제가 보기에는 진아씨가 그분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 뭐예요? 난 걔만 보면 가까이 가고 싶고 괴롭히고 싶고 그런데."
"일종의 강박증이죠. 진아씨는 지금 남자들이 싫다고 말하지만 강박증이 심한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정한 내면의 주제로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이고 자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한데 그 황민우라는 분은 다른 남성들이 고루 가진 특성들에서 벗어나는 외모와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강박증에서 벗어났다고 진아씨 스스로 착각 하고 있는 거죠."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그거랑은 다르다는 표정을 짓는 등 이진아는 헷갈리는 기색이다. 한층 강하게 몰아붙여야 한다.
"전담의로서 권고 드리는데, 그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에 대한 감정이 불명확한 상태에서 관계가 가까워졌는데 나중 가서 진아씨의 강박증이 그분에게도 적용될 경우에는 상극의 관계로 변질 될지도 모릅니다. 부정적으로요."
"쌤 말대로면 내가 언젠가 민우 다리를 분지를지도 모르겠네요."
"…그정도 까지는 아니겠지만 위험한 건 사실이겠죠. 혹시 그분도 진아씨가 다가가는걸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습니까?"
"맞아요. 진짜 잘 아신다. 요샌 나만 보면 도망 갈라고 해요."

자기표현에 거침 없는 솔직한 성격일수록 타인의 조언에 휩쓸리기 쉽다. 시냅스네 뉴런이네 어쩌고 해도 사람들은 결국 논리와 감정의 결정체인 무의식적 통찰로 행동 하고 그 행동을 감당 하는 동물인 것이다. 카프스 세포라는 것이 외계에서 날라온 정신기생체도 아니고, 사람 대 사람으로 충분히 해결 할 수 있는 문제라고 난 믿는다. 그렇게 생각 하며 희망을 갖고 이진아의 결론을 기다렸다. 그녀는 고개를 치켜올려서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민우가 죽으면 나도 따라죽지 뭐."
…제정신인가? 목소리나 태도에 망설임이 전혀 없다. 병리적인 증상이 아니라 이진아는 제정신으로 말하고 있다.
"나 이제 병원 안 나올래요. 내가 왜 이런지 알면 재미없을 거 같아. 쌤이랑 얘기하고 나서 깨달은 건데요. 난 그냥 민우한테 이유없이 끌리는 그 이유없음이 좋은가 봐요. 아, 벌써 11시 되가네. 학교도 빼먹고 종일 스토킹 하러 나왔는데. 그럼 쌤. 안녕!"
"진아씨!"
붙잡기도 전에 이진아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처음 보았던 그녀의 의식 속에서도 그랬지만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여자애다. 이렇게 되면 믿을 쪽은 황민우 뿐이다.

나는 가상현실 관리자 권한을 이용해 11시에 1-3칸에서 이진아를 만나게 될 황민우를 내 공간으로 빼냈다. 황민우의 상담예약이 오늘로 잡혀있다는 일정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의식정보를 잘못 조작 하면 두 아이들이 눈치를 챌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상현실 자체가 뒤틀릴 가능성이 있다. 내가 관리자 라고 해도 이 세계는 그들의 뇌내정보를 기초로 쌓은 것이기 때문에 감정이 폭주하는등 급격한 심리변화에 따라 자신들도 모르게 내가 정한 법칙을 무시할지도 모른다. 내가 관리자로서 가상현실로 들어오기 전에 총괄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진아와 황민우의 감정수치 변화 폭이 크고 넓어질수록 카프스 세포의 증식도 따라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미 물리적으로는 증식여건이 모두 갖춰진 상태이고 두 아이 모두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수치가 정상인의 70배를 뛰어넘은 수치예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으니 당신이 감당 하지 못하겠다고 판단 될 때는 여기 이 강제동결장치의 버튼을 누르셔야 합니다. 그때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우리들을 위해서도 강제동결 하는 것만이 마지막 대책이니까요."
총괄자 그 자식이야 프로젝트가 중지 되도 강등 당하고 말겠지만 나는 잘해야 무보수 해고. 잘못 되면 한통속으로 맛이 간 정부가 내 책임으로 뒤집어 씌울지 모른다. 결정적으로 전자든 후자든 이번 달까지 월세를 못내면 길거리에 내앉는다는 현실이 기다린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수차례의 정신상담 이력을 지닌 황민우라면 이진아 보다는 이해도가 높을 것이다. 일시적으로라도 황민우 본인 스스로가 이진아를 강하게 거부 하면 어떻게든 내 손으로 개연성을 만들어서 황민우의 세계에서 이진아를 떼어놓을 수 있다. 상당량의 시간을 벌게 되는 것이다.

똑, 똑. 하고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민우씨! 어서 와요."
반갑게 환대 하면서 쇼파 쪽으로 편안한 자리를 권했다. 황민우는 그동안 심하게 시달렸는지 눈밑이 검다 못해 멍들어 보였다. 사소한 잡음에도 움찔 하는등 극도의 긴장상태였다. 눈높이를 맞추고 얼굴에는 미소를 걸치면서 미리 타둔 녹차를 건냈다. 긴장을 풀어주는 게 우선이었다. 상담은 녹차를 거의 다마신 뒤에야 시작됐다.
"박사님. 하루하루가 머리에 총을 겨누고 사는 기분 입니다. 엇 하면 탕 하고 고꾸라질 것 같아요. 그 미친 여자가 제 삶을 쥐어짜고 있어요. 박사님이 가르쳐주신 위빠사나 명상도 통하질 않습니다. 이젠 아무 창문만 봐도 그 여자가 날 감시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니까요."
"자자, 민우씨. 여기는 제 허락없이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으니 안심 하세요. 저번에 왔을 때가 이진아라는 분과 처음 대면한 뒤였죠? 그 후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긴 그렇죠. 이 자리에서 그 여자 냄세가 나는 건 제 착각이겠죠?"
"그럼요, 그럼요. 하하하."
나는 천연덕스럽게 쇼파 테이블에서 이진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황민우는 크게 한숨을 들이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첫대면은 시작에 불과 했습니다. 가벼운 노출증 좀 있는 기 센 여자라고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말입니다 박사님. 그 다음주 화요일 1-3칸에서는 앞자리가 아니라 내 옆자리에 앉지 뭡니까! 저리 가라고 해도 말도 안 통하고요. 내 볼에 잡아당기고 머리를 쓰다듬질 않나 팔짱을 끼질 않나. 나를 자기 장난감 취급 하더라고요."
"얕보여서 그런 건 아닐까요? 강하게 거부해 보시지 그랬어요. 의사표현도 분명히 하면서요."
"박사님. 저번에 말씀드린 내용 잊으셨어요? 이상하게 그 이진아라는 여자애만 앞에 있으면 가슴 떨리고 다리가 후들 거려서 진정이 안 된다니까요. 그리고 그 여자 힘이 무식하게 세요. 키도 나보다 크고."
처음 의식을 들여다 보았을 때는 단순히 황민우의 여자 면역력이 약해서라고 생각 했었다. 카프스 세포가 서로 끌어당기는 성질이라는 걸 몰랐던 것이다. 그 성질이 주도권을 가지고 황민우의 의식을 침식한 이진아 뿐만 아니라 황민우 자신에게도 존재 하는 건 같은 세포 보유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비선형 신경성과민증이라는 황민우의 상상 속 강박증이 만들어내는 거부반응이 아니었다면 둘은 진작에 하나로 붙어버렸겠지. 그 강박증을 이용해야한다.
"정리해 보자면 민우씨는 그 이진아라는 분이 못견딜만큼 싫은 거군요?"
내가 묻자 그는 몸을 배배 꼬고 머리를 싸매면서 그렇긴 한데, 하지만 속마음에 다른 캥기는 감정이 있는데, 어떻게 말할 방법이 없다는 심리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함락직전이냐. 속으로는 벌써 넘어갔잖아. 이거 안되겠다. 극단적인 방법으로라도 조치를 취하고 봐야겠다.
"그러면요, 민우씨. 앞으로 그분을 만날 일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머릿속에서 그분의 이름과 생김세를 지워내는 겁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제 일거수 일투족을 꿰고 있습니다. 저도 눈뜨나 감으나 자꾸만 그 여자가 떠오르고요."
"하하, 민우씨. 상상입니다 상상. 일단 한 번 제 말대로 해 보세요. 자, 눈을 감으시고. 제가 셋을 세면 시작하는 겁니다."
못미더운 눈치지만 황민우는 눈을 감고 내 말에 따르려고 노력 했다. 그 사이 나는 그의 의식정보를 조작 했다.
"하나, 둘, 셋." 동시에 그는 최면에 빠진다.
"민우씨의 행동패턴을 이진아라는 분과 만날 여지가 없도록 수정해 드리겠습니다. 민우씨는 더 이상 11시 차 1-3칸에 타지 않습니다. 학교는 졸업 했고 부산으로 이사 해서 집안 일을 돕습니다. 비선형 신경성과민증은 완치 됐으며 당신은 저희 손승철 정신과의원에 나오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네."
황민우의 정서상태가 조금씩 안정수치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4.

가상현실 시간으로 3주가 지났다. 현실 기준으로 2시간 30분에 해당 하는 짧은 시간 동안 이진아와 황민우는 서로 격리된 상태다. 황민우의 의식정보를 뒤틀어놓는 위험한 선택으로 시간을 벌게된 셈이다. 현실에서 총괄자가 보낸 메세지에는 곧 정부 요원이 도착할 예정이고 이진아의 정서상태가 심상치 않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 하던 목표물이 자신의 세계에서 증발해버렸으니 오만생각이 다 들겠지. 만약 이진아가 황민우를 만나서 최면이 풀리면 물거품이 되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희박한 가능성만 막으면 되는 일. 나는 가상세계를 내려다 보는 신과 같은 관리자 시점이 되어 방황 하고 있을 이진아의 상황을 엿보기로 했다. 그리고 한숨 돌린줄 알았던 내 멍청함을 저주했다.
이진아는 3주 동안 전국에 거주 하는 모든 황민우의 연락처를 찾아내 일일히 전화 해서 O.X 리스트 만들었다. 가상현실이라서 대한민국 총인구가 주요 배경인 경기도를 포함 해도 1만명도 안되는 탓에 부산으로 내려간 황민우 본인을 찾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도 목소리만 듣고 끊어서 자기 정체를 숨기는 용의주도함까지…

나는 우선적으로 태풍이 닥쳤다는 허위정보를 흘려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교통선을 차단 시켰다. 그러자 이진아는 굴하지 않고 면허도 없는 주제에 차를 끌고 내달렸다. 급한데로 고속도로에 지진을 일으켜 길을 막았더니 국도 따위 무시 하고 지도만 보고 남쪽으로 달렸다. 난감했다. 마음 같아선 번개 라도 내리꽂아 버리고 싶은데 가상현실 속에서라도 이진아가 죽어서 의식이 끊겨버리면 냉동배양 자체에 문제가 생긴다. 나는 방법을 바꿔서 폭우를 내렸다. 이진아도 사람인 이상 지치고 짜증날 때까지 교묘히 괴롭히도록 했다. 때마침 진흙탕에 바퀴가 빠져서 이동이 정체 됐다. 이제야 뭐가 좀 되는군! 이진아는 비를 맞으면서도 차를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우는 소리를 기대 하고 화면을 확대해 보았다.

"황민우 그 새끼. 감히 나만 놔두고 도망을 가? 잡히면 다리를 확 그냥, 뼈도 못추리게 접어줘야지. 그리고 방 안에 가둬서 평생 사육 시킬 거야!"
기대와 다르게 분노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가히 초인적인 의지였다. 카프스 세포가 뭐길래 인간을 이 지경으로 만들까. 그녀는 차를 포기 하고 안에서 종이 한 장만 꺼내서 밖으로 나왔다. 종이 왼쪽 위에 적힌 다섯글자는, 혼인신고서였다. 의지의 매개체와도 같은 혼인신고서를 접고 접어서 주먹 안에 쥐고 이진아는 무작정 달렸다. 셀 수 없이 많은 논두렁을 밟고 빗속을 헤치면서 먹구름 밑을 미친 듯이 달렸다. 거기서 부산까지 거리가 자그맣치 379킬로미터인데 뭘 믿고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됐다.
쉼없이 펌프질 해대는 심장박동처럼 그녀의 정서상태도 최극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제발 그만 하자. 포기해. 너희는 만나면 안 돼! 나는 그녀가 멈추기만을 바라고 체력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내 바람이 역으로 작용한 것일까. 풀충전 된 배터리처럼 지치지도 않고 달리던 끝에 이진아의 몸이 과열된 엔진처럼 붉게 변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며 내 눈을 부정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속력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마치 달리는 인간탄환처럼 엄청난 속도로 지면을 질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걸 쏟아부어서 그녀를 멈추는데 전념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하늘에서는 번개가 떨어지고 지나는 경로 마다 토네이도가 돌아가고 국지성 지진까지 퍼붓는데도 그녀는 그 모든걸 뛰어넘어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정신적으로 녹초가 되서 가만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야!"
태평한 하늘 아래서 밭을 갈던 황민우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이진아가 서 있었다. 넝마 같은 옷을 걸치고 바람 맞은 머리에 등 뒤로는 열이 덜 식어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무시무시한 몰골이었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 황민우의 최면은 풀려버렸다. 그는 3주만의 해후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숨을 곳을 찾다가 발견한 느티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는 황민우에게 이진아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냥 잡힐래, 아님 내가 잡을까."
황민우는 포식자를 만난 햄스터처럼 얼어붙었다. 이진아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대로 황민우의 입술을 빼앗았다. 마치 마취독을 찔러넣는 거미처럼 입을 막아놓고 허물 같은 옷을 벗겼다. 무기력한 먹잇감이 된 황민우를 밀쳐서 넘어트리고 그 위로 올라탔다. 반쯤 정신이 나가서 중얼 거리는 황민우의 입을 다시 자기 입술로 포개어 놓고 밑에서는 교태스럽게 허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원없이 욕망을 발산 하기 시작했다.

실패였다. 그들이 하나가 되는 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나는 가상현실 속에서 빠져나왔다. 배양실 스피커에서 버튼을 누르라고 소리치는 총괄자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나는 동결장치를 내려다 보면서 이걸 누를지 말지 고민했다. 후일을 기약 하려면 눌러야 한다. 프로젝트가 동결 된 이후의 일이야 저들이 알아서 할테고, 더 이상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면 누르는 게 맞다. 하지만 이 아이들을 동결 시킨다고 해결 되는 문제일까? 가상현실 속에서 받은 충격 때문인지 이 방법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가슴을 지배했다. 계속 지켜보다 싶다는, 불가사의한 세포의 힘이라 해도 잠재의식 속에서도 그토록 뜨겁게 서로를 갈구 하는 그들을 막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라는 감성이 앞섰다.
망설이는 사이 참다 못해 달려온 총괄자와 연구원들, 요원들이 배양실 문 밖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총괄자가 내게서 동결장치를 빼앗아 지체없이 버튼을 눌렀다. 초저온 냉동액과 온갖 특수물질들이 아이들을 뒤덮는다. 캡슐은 하얀 결빙으로 가득 채워지고 아이들의 얼굴은 이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 순간이었다. 얼어붙었어야할 캡슐이 해동 되고 있었다. 확인 하려고 달려간 연구원들이 캡슐을 만지려다 비명을 질렀다. 내부에서 발생 하는 고열이 결빙은 물론이고 캡슐까지 녹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고치를 찢고 나오는 열 여덞 살로 태어나는 다른 생물체 같았다. 먼저 깨어난 이진아는 우리한테 눈길도 주지 않고 옆자리로 가서 황민우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뜨겁게, 뜨겁게 키스했다.

이진아와 황민우가 깨어난 이후로 그들의 몸 속에서 카프스 세포라는 물질은 자취를 감추었다. 정부측에게는 배양과정에 결함이 있었다는 증거가 자동적으로 인멸 되는 호재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이들을 외국기관에 넘기네 마네 갑론을박이 오간 모양이다만 결국 이진아와 황민우는 예정대로 최초의 냉동배양아로서 대중들에게 공개 됐고 폭발적인 조명을 받았다. 배양된 아이들은 불치병 대신 늙지 않는 신체를 타고났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연인으로 정해진 것처럼 뜨겁게 사랑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암울한 미래에 봉착한 동시대 인간들에게는 희망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국적을 불문 하고 추종하는 세력들이 생겨났고, 이진아와 황민우는 추종자들의 보호 아래 세상 각지를 여행 하며 10년 째 허니문을 즐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 하는 모국의 구속이나 인체실험, 폭력조직의 납치, 암살 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발적인 보호와 감시도 있겠지만 나는 그 아이들이 보호 받아야할만큼 약한 존재라고 생각 하지 않는다. 특히 이진아는 정글에 던져 놓아도 생존할 아이다.

21세기가 저물어가는 지금 냉동배양은 지구촌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새로 개발된 냉동액은 카프스 세포라는 위험물질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신 최초의 배양세대 같은 끝없는 젊음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인구증가 문제의 해결책으로 냉동배양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무의식 정서상태를 관리해주는 새로운 직종을 얻었다. 월세 빼면 남는 돈도 얼마 없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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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루터비 13.09.17 16:12 댓글

    좋은 소설이네요. 캐릭터가 아주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캐릭터를 빌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간접적으로 설명하시는 것도 좋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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