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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단단한 세계

2013.01.10 12:4601.10

아흔일곱.

나는 다시 벽돌을 센다. 아직 맨 위 두 칸이 비었지만 완성되면 일 미터 높이의 피라미드가 될 벽돌이다. 거실에 흐르는 웅장한 음악의 선율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하나씩 손가락으로 지휘하듯 벽돌을 센다. 아흔일곱 개의 붉은 벽돌. 흰 벽뿐인 거실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벽돌의 모습은 마치 견고한 탑처럼 단단해 보인다. 문득 나는 이 모습이 마음에 들어 벽돌을 쌓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내밀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 팔을 뻗어 손안의 벽돌을 탑의 맨 꼭대기 위에 더해 놓는다. 아흔여덟.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사라진 지 아흔여덟 번째 날이었다.



                                                       †

아침의 정원은 벌써 한여름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제만 하더라도 다리에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로 쌀쌀했는데 이제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잔디에서 튀어 오르는 물이 제법 상쾌했다. 높은 담장을 따라 촘촘히 심어진 측백나무에서 새의 울음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지고, 그 아래로 교묘한 불균형의 미를 이루며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녹음을 더했다. 담장 너머로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그 자체로 평화로운 여름을 상징하고 있는 듯한 풍경. 나는 지난 한 달 내내 근면한 노예처럼 정원 손질에 몰두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하나의 그림처럼 잘 정돈된 완벽한 정원의 모습이 수고를 보상해주는 듯했다.

들고 나온 쟁반을 조심스레 탁자에 내려놓았다. 익숙한 동작으로 쟁반에 담긴 음식들을 꺼냈다. 먼저 인스턴트 미트볼이 담긴 흰 접시를 탁자 안쪽의 선에 맞춰 가운데에 놓았다. 그다음 티슈에 쌓인 포크를 접시의 오른쪽에 평행하게 두었다. 초록색 맥주병과 큼지막한 양각 로고가 새겨진 유리잔은 탁자의 왼쪽 가장자리에 맞춰 세어 놓고, 담뱃갑은 탁자 오른쪽 가장자리 끝 선에 맞춰 놓았다. 담뱃갑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맞춰 라이터를 올려놓은 뒤 마지막으로 집게손가락으로 선에서 어긋난 것들을 조심스레 정리했다.

의자에 앉아 탁자 위의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책 속의 주인공은 이제 총을 든 괴상한 소년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천천히 미트볼을 씹으며 주인공이 옥수수 밭에 몸을 숨기는 대목까지 읽어 내렸다. 뜨겁고 매콤한 육즙이 입안 가득히 퍼졌다. 두 번째 미트볼을 입에 밀어 넣으며 책장을 넘겼다. 문득 소설을 좋아하던 친구가 술에 취해 한 말이 떠올랐다.

책 속의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지. 그리고 그게 바로 끊임없이 부패하는 이 세상보다 책이 훌륭한 점이라고.

책이 세상보다 얼마나 훌륭한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분명 그 친구가 지금 어딘가에서 세상과 함께 부패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과 함께 부패하고 있을 친구와는 상관없이, 나는 지금 식사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텔레비전도 신문도 없는 세상에서 홀로 식사를 하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 시간으로 정해놓은 식사시간을 바꾸는 건 더욱 어려웠다. 최근 나아지기는 했지만, 나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강박증이 시작된 건 세상 사람들이 사라지기 얼마 전부터였다. 정확히는 오 개월 전, 칠 년 동안의 긴 연애가 끝난 뒤부터 시작됐다. 이별은 여자 친구의 일방적인 전화통보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됐어, 미안해. 미안하다고 말은 했지만 실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때 나는 은행에서 마지막 실업급여로 막 월세를 입금한 참이었다. 나 역시 담담한 목소리로 아니야, 내가 미안해, 하고 대답했지만 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원해진 관계를 위해 잠시 떨어져 지내자던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과 그 남자가 소설을 좋아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시시한 신파극 같은 현실. 왜? 라는 나의 물음에 여자 친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단지 너보다 모든 면에서 나을 뿐이야.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 나는 유령처럼 흘러 집으로 돌아왔다. 뱃속 깊은 곳에서 자괴감과 분노가 어지럽게 끓어 구토를 할 것만 같았다. 괴로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청소를 했다. 하지만 청소를 마친 뒤엔 가구의 위치를 모두 바꾸었고, 잠시 뒤엔 방바닥 장판의 무늬에 맞춰 가구를 다시 옮겼다. 그다음에는 책상 위의 물건을 다 치워버리고 싱크대에 있던 모든 물건들을 크기순대로 수납장에 정리했다. 한 달쯤 지난 뒤에는 선에 어긋나 놓인 물건은 참을 수가 없게 되었고 분 단위로 계획표를 짜고 정해진 시간 내에 일을 마치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밤마다 먼지 하나 없는 좁은 방에 앉아 통장의 잔액과 그날 피운 담배 개수와 먹은 반찬의 이름 따위를 노트에 적으면서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면 수신 정지된 여자 친구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대답하지 않는 긴 세월을 천천히 되짚어 보며 이대로 세상이 끝장나 버려도 정말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때에 비하면 지독히 외롭기는 해도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구리밥이 떠 있는 작은 연못, 정문 옆에 서 있는 관상용 소나무, 담쟁이넝쿨로 덮인 커다란 이 층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끝나버린 세상이 준 값비싼 선물. 마치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했던 것처럼 저택에는 모든 게 갖춰져 있었다. 집수처리시설과 태양열 발전기, 다섯 개의 방에 가득 찬 고급가구, 서재에 꽂힌 방대한 책과 영화 디브이디, 지하창고에는 비상식량과 구급약, 심지어 여러 종류의 채소 씨앗까지 있었다. 집주인은 안전에 대한 강박증을 앓고 있던 게 확실해 보였다. 나는 침실에 걸린 사진 속에서 가족과 함께 웃고 있는 집주인의 얼굴을 보며, 세상에 홀로 남게 된 내가 같은 강박증환자의 집에 살게 된 우연에 대해 곱씹어보곤 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고약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시계를 확인했다. 자리를 정리해 일어났다. 집안으로 들어가 식기세척기에 식기들을 넣고 곧바로 차고로 연결된 지하계단으로 내려갔다. 차고의 어둠 속에 은색 세단과 까만 지프가 나란히 서 있었다. 리모컨으로 지프의 시동을 걸었다. 운전석에 올라타 전날 밤 적어둔 쇼핑목록이 적힌 메모를 꼼꼼히 확인했다. 티셔츠와 반바지 다섯 벌, 목장갑, 콩 통조림 스무 개, 맥주 한 상자, 원두커피, 슬라이스 햄 다섯 봉지, 생수가 있다면 모두 챙길 것. 나는 보름에 한 번씩 근처의 백화점에서 필요한 만큼의 식량과 물품들을 골라 집으로 가져왔다. 썩는 음식물냄새가 지독하긴 했지만 홀로 카트를 끌며 내키는 대로 물건을 집을 때 드는 근사한 기분 때문이었다.

천천히 차고의 문이 열렸다. 지프의 육중한 엔진 소리가 골목길의 고요를 채웠다. 아주 잠시 어두운 차고에 머물렀을 뿐인데도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언덕을 따라 빠르게 차를 몰아 시내로 내려왔다. 거리 곳곳에서 개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무리의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커다란 검은 개가 웅덩이에 고인 물을 핥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가 접근하자 검은 개는 흰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자신이 더 이상 누군가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듯한 몸짓. 개가 짖을 때마다 목줄에 매달린 낡은 플라스틱 이름표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나는 속도를 올리며 개들이 금세 자신의 본성을 찾아가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에 반해 점점 더 자신을 잃어갔던 스스로의 모습이 뒤따라 떠올랐다. 거리 곳곳에 바위처럼 서 있는 차와 사람들이 증발해버린 자리에 남아있는 옷과 구두, 군데군데 창문이 깨진 고층 빌딩의 도시. 나는 그 속을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미친 듯이 헤맸다. 수백 통의 전화를 걸고, 한 블록의 아파트를 모조리 뒤지고, 외국으로 이메일을 보내고, 텅 빈 공항에서 홀로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남아있는 건 사물의 시체들뿐이었다. 문자 그대로 사람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신의 장난인가? 수백 번도 넘게 자문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내게 필요한 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마지막에는 여자 친구의 원룸에 찾아가기도 했다. 미처 돌려주지 못한 열쇠를 꺼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당연하게도 여자 친구는 없었지만 방안의 모습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크림색 커버가 씌워진 침대, 침대 앞의 조그만 화장대, 외투가 빼곡히 걸려있는 벽걸이 옷걸이, 그 아래 수납장을 채운 책과 시디들. 함께 밥을 먹곤 했던 식탁 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식탁에 앉아 먼지를 소매로 훔쳐냈다. 반쯤 마시다 남은 커피잔을 가장자리에 맞춰 옮겼다. 그러자 갑자기 긴장이 풀리며 저항할 수 없는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대로 쓰러지듯 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고요한 방에서 깨어난 나는 기묘한 서글픔을 느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찰나에 그때까지 꾸었던 즐거운 꿈을 잃기 싫어 다시 자보려고 애쓰지만, 그 애타는 노력 때문에 오히려 더 말똥말똥해져서 결국 꿈을 잃고 말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내 삶의 모든 의미들이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과도 같았다. 친구의 말처럼 책 속의 이야기와 달리 끊임없이 부패하는 이 세상에는 내가 찾아 헤매야만 할, 변치 않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을 리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날 오후, 여자 친구의 집을 나서며 나는 이제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차는 이제 큰 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오늘 가져올 목록들을 점검했다. 그때 거리 앞쪽에서 무언가 몰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의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몰려오는 것들의 정체는 개들이었다. 그런데 무언가에 쫓기는 듯 달리는 모습이 이상했다. 나는 개들이 뛰어오는 방향을 자세히 살폈다. 거리의 끝에서 거대한 검은 연기가 올라 퍼지고 있었다. 몇 주 전부터 시내에서 평소보다 자주 연기가 올라오던 모습을 무심코 지나친 기억이 떠올랐다.

시계를 확인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십분 뒤에 백화점에 도착해야 했다. 브레이크를 밟으며 계획을 바꿔 확인해볼지 고민했다.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개들의 모습에서 어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단순한 화재가 아닌 것 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불길함이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나는 불편한 기분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했다. 별다른 일이 없는지 확인만 하고 돌아오면 될 일이다. 빨리 움직이면 일정에 맞출 수 있다. 급하게 방향을 꺾어 연기가 올라오는 장소를 향해 차를 몰았다. 매캐한 냄새가 짙어지는 걸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 같았다.

불이 난 곳은 국립도서관이었다. 도로에서 백 미터 정도 안쪽에 위치한 도서관은 거대한 잿빛 연기에 싸여 어딘가 무너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불길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큰 화재였다. 나는 하늘을 덮은 새까만 연기와 강렬한 오렌지 빛에 압도되어 망연히 불길을 지켜봤다. 아름다움과 공포가 혼재된 광경. 언젠가 여자 친구와 갔던 전시회의 그림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 불타는 성을 배경으로 강을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된 그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눈앞의 모습이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트럭을 발견한 건 차를 돌리려 하던 때였다. 도보에서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계단 오른편에 서 있는 푸른 색 트럭이었다. 트럭 주변에는 수십 개의 흰 플라스틱 통이 널려 있었다. 나는 순간 몸 안에 감도는 싸늘한 기운을 느끼며 지난번 이곳을 지나쳤을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있다! 하지만 반가움과 동시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누구인가? 왜 불을 지른 것일까? 혼자인가, 여러 명인가? 한꺼번에 이는 의문 탓에 나도 모르게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담배를 꺼냈다. 대시보드에 담배를 두드리며 차분히 생각을 해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재난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사건에 뛰어들었다가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의 모습. 내가 영화 속의 인물이라면 지금 즉시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그러나 상대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사람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는 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폐 속 깊이 연기를 들이마셨다. 거대한 도시에서 두 존재가 마주치지 않고 살아갈 가능성에 대해 따져 보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시동을 걸어둔 채로 차에서 내렸다. 조심스럽게 트럭으로 다가갔다. 재를 뒤집어쓰기는 했지만 한눈에도 새 트럭임을 알 수 있었다. 차 뒤편의 적재함은 텅 비어있었다. 창을 통해 운전석이 비어있는 걸 확인한 나는 트럭에 올라탔다. 시동스위치에 차 키가 꽂혀 있었다. 차 키를 돌려보았다. 거친 진동과 함께 시동이 걸렸다. 배터리 방전기간을 고려해볼 때 최소한 지난 열흘 내에 누군가 트럭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는 뜻이었다. 다른 단서를 찾기 위해 차 안을 꼼꼼히 뒤졌다. 시트 뒤의 공간과 조수석의 글러브 박스를 확인하고 문 양쪽의 작은 수납공간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운전석 위의 햇빛 가리개를 내렸다. 그러자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계속될 리가 없잖아?

집어든 종이는 관광지 엽서였다. 해질 무렵의 리조트 사진 위에 굵은 매직으로 휘갈기듯 계속될 리가 없잖아? 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분명 읽기는 했지만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어 잠시 얼어붙은 듯 멈춰 엽서를 바라봤다. 도망가는 개들을 보았을 때처럼 강력한 불길함이 다시 한 번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황급히 트럭을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조용한 거리와 녹슨 자동차 몇 대뿐이었다.



                                                    †

차고에 차를 세우고 나서야 악 다물고 있던 턱에 힘이 빠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다섯 시였다. 온종일 시내를 돌아다닌 터라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나는 조수석의 지도를 집어 붉은 표시가 되어있는 지역을 확인했다. 내가 사는 지역 근처에만 불에 탄 도서관이 다섯 개가 넘었다.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모든 도서관에서 하얀 플라스틱 통을 발견했다. 정체불명의 존재는 분명 의도적으로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측면에서 상황은 좋지 않아 보였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쥔 채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흥분과 짜증이 섞인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어쩌면 그 사람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꾸 엽서가 마음에 걸렸다. 계속될 리가 없잖아? 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반 말투의 문장에서 알 수 없는 적대감이 묻어났다. 왠지 일종의 경고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말 때문에 종일 가로수의 숫자를 세고, 일분에 다섯 번도 넘게 주유계기판을 확인하고, 아무 의미 없는 길거리 간판의 이름을 서른 개도 넘게 외웠다. 불안 때문에 강박증이 다시 심해지고 있었다.

엽서를 주머니에 넣었다. 어쩌면 그렇게 걱정할 일이 아닌지도 몰랐다. 냉정하게 보면 그저 불탄 도서관에서 쪽지를 발견한 것뿐이었다. 나는 수첩을 꺼냈다. 지금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적으며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 층 서재에 둔 소총이 떠올랐다. 지난달, 혹시 모를 짐승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군부대에서 챙겨온 것이었다. 사람 때문에 총을 쓸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지금은 우선 스스로를 보호할 대책이 필요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때 위층에서 소리가 났다. 뭔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마치 누군가가 바닥에다 여러 장의 접시를 떨어트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나 말고 이 집에 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 겨우 진정되었던 불안이 다시 살아났다. 어쩐지 내가 집 안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빠르게 차에서 빠져나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구석에 파이프렌치가 놓여있었다. 나는 파이프렌치를 한 손에 꼭 쥔 채 거실로 올라갔다. 숨을 크게 들이켜고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거실은 평상시처럼 조용했다. 어쩌면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곧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텅 빈 거실 한가운데의 벽돌이 폭격을 맞은 것처럼 무너져 있었다. 붉은 벽돌들이 파편처럼 거실 전체에 흩어져 나뒹굴었다. 게다가 모양이 바뀌어 있었다. 피라미드가 아니라 담벼락이 무너진 듯한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이 집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온 집안이 공포의 공간으로 변했다. 나는 얼어붙은 듯 파이프렌치를 치켜든 채 집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고요가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었다.

총을 챙겨야만 한다.

거의 졸도할 것만 같은 기분 속에서 가까스로 총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총을 둔 서재는 이 층의 계단 바로 옆에 있었다. 나는 거실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바닥 위에 핏자국처럼 널브러진 붉은 벽돌을 피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덜덜거리는 턱이 멈추지가 않았다. 전신이 부르르 떨리고 어깨가 쑤셔왔다. 거실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계단에 도착한 나는 죽을힘을 다해 뛰어 올라갔다. 정신없이 뛰는 와중에도 삐걱대는 목재계단의 소리를 상대가 들을까 등골이 오싹했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재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소총은 제자리에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총을 장전했다. 총을 몸에 꼭 붙이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문 뒤에 몸을 숨기고 동태를 살폈다. 상대가 누군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분명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다니는 존재와 연관이 있어보였다. 이렇듯 갑자기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날 리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게 계획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집에서 나온 시각에 맞춰 불을 질러 관심을 끌고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집으로 온 것이 확실했다. 어쩌면 상대는 그동안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 집을 찾아낸 것도 설명이 되었다.

나는 문 앞에 섰다. 언제까지 서재에 숨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선뜻 나가기가 망설여졌다. 머리는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공포에 젖은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긴장 때문에 다리의 근육이 팽팽해졌다. 나는 물밀 듯 밀려오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나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신 복도에서 희미하지만 평상시와 다른 냄새가 풍겨왔다. 그러자 지난 몇 달 동안 수도 없이 지나다닌 복도가 마치 처음 와보는 장소처럼 낯설어졌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서재를 빠져나와 침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순간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너무 놀라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가 가까스로 멈추었다. 사람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침대 맞은 편 벽에 걸린 집주인의 사진이었다. 온몸에 돋는 소름에 진저리를 치며 황급히 침실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침대와 그 옆의 동그란 탁자에 놓인 흰색 램프, 작은 나무의자, 테라스로 연결된 넓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속에 먼지들이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있었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사진 속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주인의 표정이 무슨 호들갑이냐는 듯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원과 지하까지 모두 확인한 뒤에 나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다. 상대는 내가 집으로 돌아오기 전 떠나버린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방의 식탁에 앉았다. 의자에 닿은 등이 축축했다. 긴장 탓에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허벅지에 기댄 총열을 쓰다듬으며 상황을 정리해보려 애를 썼다. 도대체 뭘 하고 간 것일까? 거실의 벽돌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의문만이 꼬리를 물고 증폭될 뿐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 좀 나아질 것 같아 냉장고를 열었다. 가운데 칸에 열을 맞춰 세워진 맥주 중 하나를 꺼내 다시 식탁에 앉았다. 하지만 목으로 넘어가는 맥주는 기대와는 달리 미지근했다. 문득 무언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차고로 뛰어 내려갔다.

나는 차고의 구석에 있는 철제문 앞에 섰다. 발전기와 집수 시스템이 있는 창고로 연결된 문이었다. 떨리는 손길로 서둘러 빗장을 열었다. 차고 안에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금속의 소리가 불길한 예감을 더욱 부추겼다. 창고 안의 모습은 예상보다도 더욱 엉망진창이었다. 마치 커다란 짐승이 난동을 부린 듯 파이프가 깨지고, 스프링이 튀어나오고, 끊어진 전선의 잔해가 바닥에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기계는 손도 댈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망가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거친 욕을 뱉었다. 아마도 이 집에 온 뒤 처음인 것 같았다.



                                                     †

잠시 뒤, 나는 커다란 가방 두 개를 던지듯 트렁크에 밀어 넣었다. 가방에는 옷가지와 물, 조리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음식 따위가 들어 있었다. 급하게 짐을 싸느라 빠트린 게 없는지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최대한 빨리 집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머물렀던 저택의 모습을 뒤로 한 채 페달을 힘껏 밟았다.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여섯 시 반. 평소라면 저녁을 먹고 운동을 할 시간이었지만 나는 지금 도망치듯 허겁지겁 집을 떠나고 있었다. 머릿속에 오늘 아침 푸른 하늘과 청명한 공기 속에 서 있던 저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끝장나 버린 세상으로부터 단단하게 나를 지켜주었던 저택. 하지만 그 저택은 이제 언제든 상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부아가 치밀었다.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도 결코 삶은 내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 아니, 오히려 더 짓궂게 심술을 부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오디오 전원버튼을 눌렀다. 음악을 들으며 앞으로의 계획에 집중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나는 이제부터 불을 쫓을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불을 지르는 상대를 쫓아 담판을 지을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다른 도시로 달아나 버릴까도 고려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했다. 왠지 이번만큼은 그대로 물러서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어쩌면 그 이유는 나를 희롱하는 듯한 쪽지 때문인지도 몰랐다. 상대를 만나게 되면 묻고 싶었다. 도대체 뭐가 계속될 리가 없다는 건데? 지금 조수석에 놓인 총을 들고 묻는다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시내에 진입한 나는 타워를 향해 차를 몰았다. 오늘 밤은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타워에서 보낼 계획이었다. 타워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다 불길이 보이면 곧바로 달려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았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여자 친구와 함께 타워에 갔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냉정해져야 할 때란 걸 알면서도 타워에 가까워질수록 여자 친구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발밑에서 붉고 노란 색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야경을 쳐다보고 있던 표정. 커다란 사진기를 내밀던 작고 흰 손. 내 팔을 꼭 잡은 채 사진을 확인하던 크고 가느다란 눈. 그때 나는 그 모습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나는 여자 친구와 친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하지만 내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세계에 있는 둘은 이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관념처럼 멀게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세계가 끝나버릴 줄 알았더라면 그래도 그들은 나를 배신했을까.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런 세상이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이 몰려왔다. 너무도 크고 가차 없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는 손안의 핸들을 쥐어짜듯 꼭 움켜쥘 수밖에 없는 그런 상실감이었다. 마치 모두가 천국에 가버렸는데 나 홀로 남아 세상을, 아니 지옥을 헤매는 듯한.

왜 이렇게 된 거지?

나는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새삼스레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아 현실을 되짚어 보았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유령의 도시에서 나는 홀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평생 누군가를 때려본 적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내가 지금 총을 들고 도시 한복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상실감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설명할 수 없는 아득하고 먹먹한 기분이 들어섰다.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세계의 짐이 될 뿐이라는 자괴감.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질식해버릴 것만 같아 나는 오디오로 손을 뻗었다. 다른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듯했다. 그러나 시디체인지 버튼을 누른다는 게 그만 실수로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무언가 지독하게 엉켜있는 듯한 새까만 잡음이 금세 차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나는 라디오를 끄는 대신 운전석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멀리 희미하게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산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도로의 중간쯤이었다. 연기의 위치로 보아 상대가 불을 지른 곳은 정상 근처에 위치한 도서관이 분명했다. 나는 이곳에서부터 걸어갈 작정이었다. 굳이 자동차를 끌고 가서 상대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총구를 앞으로 겨눈 채 무거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리 양쪽으로 커다란 은행나무들이 무성한 잎을 드리우고 있었다.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은 수풀이 도보 여기저기를 섬처럼 점령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도로 오른편의 언덕 아래로 쓰러지듯이 내리깔리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밑으로 정지된 도시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낮잠을 자는 것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 문득 그 속에 존재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인적을 찾을 수 없는 침묵의 도시에서 홀로 총을 들고 걷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는 이제 곧 산 정상에서 펼쳐질 최후의 결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 내 모습이 꼭 시시한 대중소설의 주인공처럼 느껴져 쓴웃음이 났다.

그처럼 비현실적이고 우습기까지 한 느낌 속에 빠져 걸은 지 십여 분만에 언덕의 끝에 다다랐다. 이제 코너만 돌면 도서관이었다. 바람을 타고 오는 매캐한 연기에서 석유냄새가 났다. 상대는 분명히 이곳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벼운 흥분만 느껴질 뿐 별다른 긴장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이 모든 상황이 실재하지 않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가시지 않아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나는 정신을 차려야 할 때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되뇌며 도서관 입구에 있는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얼굴을 살짝 내밀어 동태를 살폈다.

도서관 앞 주차장에서 누군가가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구석에 세워 놓은 트럭 앞에서 한 남자가 양팔을 하늘로 뻗은 채 체조를 하듯 제자리에서 계속 뛰고 있었다. 그러면서 불길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댔다. 게다가 등에 멘 빨간 배낭을 제외한다면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예상보다 체구가 훨씬 작았는데,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가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덮여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 꼭 압축기에서 빠져나온 산업폐기물 같아 보였다.

나는 남자의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는 이제 거의 정신착란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불 속에 석유통과 책들을 던져 넣으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내가 거의 스무 발자국 정도까지 다가갔는데도 나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나는 트럭 뒤에 몸을 숨긴 채 좀 더 자세히 남자를 지켜보았다. 산업폐기물 같아 보이던 검은 얼굴이 실은 군용 방독면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자의 옆으로 귀가 커다란 흰 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개는 주인의 이상한 행동에 완벽히 익숙해졌는지 다리를 턱에 붙인 채 무관심하게 누워있었다.

조심스레 트럭 뒤에서 빠져나왔다. 완전히 미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나는 소리쳐 남자를 불렀다. 하지만 남자는 등을 돌린 채 계속 불길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공이치기를 당기고 다시 남자를 불렀다. 개만이 무심한 듯 고개를 돌렸을 뿐 남자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나는 허공에 총을 한 발 쐈다. 그 소리를 듣고 개가 짖기 시작한 뒤에야 남자가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나의 등장에 당황스러워한다기보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유 있고 어딘가 연극적이기까지 한 몸짓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몸을 훑었다. 방독면 아래로 어깨까지 흐르는 긴 머리카락, 고행자를 연상시키는 여위고 빳빳한 몸, 마지막으로 축져진 남자의 성기를 보았다. 미친놈.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져 나왔다. 하지만 나의 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남자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꼭 누군가를 환영하는 몸짓처럼 양손을 들고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새카맣게 탄 피부와 그 위에 얼룩처럼 묻어있는 땟자국, 검은 방독면이 어울려 괴기한 박력과 예감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위협을 느낀 나는 멈춰! 라고 외쳤다. 남자가 내 말을 못 들은 척 계속 거리를 좁혀왔다. 나는 총구를 남자 쪽으로 겨눈 뒤 다시 한 번 멈추라고 소리쳤다. 그제야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당신 누구야?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이제는 마치 일광욕을 하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뒤로 불길의 연기가 흩어지면서 빛을 받아 다시금 선명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위협을 하기 위해 허공에 총을 다시 쏘았다. 총성이 울려 퍼지다 천천히 사라졌다. 개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 누구냐고? 왜 도서관에 불을 지르는 거야? 남자가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방독면 탓인지 소리가 잘 들리지가 않았다. 남자는 허리에 양손을 올리곤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곤 방독면의 정화통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네.

나는 남자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완벽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이가 제법 든 듯한 목소리, 게다가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침착한 어투였다. 마치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듯한 몸짓과 말과는 달리 적의인지 반가움인지 알 수 없는,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태도. 문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상대에게 휘둘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의 당황스러움을 알아차렸는지 남자가 으르렁거리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왜 도서관에 불을 질렀냐고? 글쎄, 그럼 자네는 왜 벽돌을 쌓았지?

그리고선 남자는 땅 위에 내려놓은 플라스틱 통을 트럭에 싣기 시작했다. 우리 사이에 맴돌고 있는 팽팽한 긴장감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마치 내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묵묵히 자기 일을 했다. 주인 옆에 꼭 붙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개만이 겨우 나의 존재감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왜 벽돌을 쌓았느냐고? 남자의 기습적인 질문에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남자는 어느새 트럭 뒤편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제 겨우 두 걸음 정도의 거리 안이었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 당신 누구야?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묻는 말에 대답해. 죽여 버린다.
….
또 누가 더 있지?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빨리 대답해!
크게 상관없잖아? 어차피 세상을 떠난 인간들이 남긴 쓰레기일 뿐인데.
닥쳐! 너 누구야, 이 새끼야! 말해, 아니면 쏘겠어!

나는 정말로 쏠듯이 총을 치켜들며 외쳤다. 아닌 게 아니라 마치 나를 깔보는 듯한 말투에 점점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 대신 개가 갑작스레 덤벼들었다. 순간 손에 불에 덴 것 같은 통증을 느낀 나는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와 함께 내 손에 매달려 있던 개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핏줄기가 울컥 솟아 얼굴에 튀었다. 개가 헐떡대며 바닥에 걸레처럼 축 늘어졌다. 그러자 남자가 고함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가슴팍으로 파고든 남자가 내 어깨를 붙잡고 그대로 넘어졌다.

나는 남자에게 깔린 채로 바닥에 강하게 부딪쳤다. 본능적으로 총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내 가슴 위에 올라탄 남자가 총을 빼앗으려 잡아당겼다. 작은 체구와 달리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총을 팔로 휘감고 버티었다. 아직 멍한 상태에서 손을 살폈다. 손의 상처가 커다란 입술처럼 벌어져 있었고, 그곳에서 피가 흘러 팔 전체에 흐르고 있었다. 나는 팔을 쳐다보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이해해보려고 애를 썼다. 뜨거운 물을 부은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지는 통증과는 달리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총을 당기던 남자가 방향을 바꿔 총을 내 목 쪽으로 밀어붙였다. 안간힘을 쓰며 버티었지만 점점 총이 목을 졸라왔다. 남자가 내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듯 붙인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괜찮아, 곧 끝날 거야. 어차피 계속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세계는 늘 그래왔잖아? 그러다 남자가 서서히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방독면을 타고 흘러나오는 남자의 웃음소리는 마치 동물의 울음소리 같았다. 소름 끼치는 웃음. 그렇지만 동시에 왠지 꿈속에서 울리는 듯한 아득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산다고 해서 정말로 괜찮아지건 아니잖야?

그 말과 함께 남자는 이제 웃음도 울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흘리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들썩거리는 남자의 밑에 깔린 채 나는 숨이 막혀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 가고 있었다. 모든 게 희미해져 남자의 말이 질문인지 비난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눈과 코, 입에서 알 수 없는 분비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어쩌면 나는 지금 단지 악몽을 꾸고 있는 것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 누군가 내 옆에 있다면 이 지독한 꿈에서 깨어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이라는 걸 알았지만 꿈이라면 나를 깨워줄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

다시 한 번 남자가 내뱉은 알 수 없는 소리에 나는 왠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남자의 팔에 갑자기 힘이 빠지고 있었다. 방독면을 쓴 남자의 숨이 급격히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총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남자에게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틈을 노려 기합과 함께 남자를 몸을 밀쳤다. 남자의 몸이 균형을 잃은 사이 왼발을 모아 힘껏 걷어찼다. 나는 누운 채로 총을 집어 들었다. 신음과 함께 나가떨어졌던 남자가 괴성과 함께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소리를 지를 뿐 남자는 마치 울먹이듯 몸을 떨며 천천히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남자의 몸이 그대로 내 몸 위로 고꾸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의 피가 흘러 다리를 따듯하게 적셔왔다. 나는 무거워진 사내의 몸을 치우고 일어났다. 온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뒷걸음질을 치고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움찔거리던 남자의 움직임은 이제 완전히 정지되었다. 나는 손을 무릎에 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헛구역질이 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피식 알 수 없는 웃음이 났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마치 졸다가 어느 한순간 갑자기 깨어난 것처럼 몸 안이 싸늘하게 갠 느낌이 들었다.

나는 회색 아스팔트 위에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알몸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허리를 숙여 남자의 방독면을 천천히 벗겼다. 얼굴의 구멍에서 흘러나온 온갖 분비물들로 뒤덮여 있긴 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 남성의 모습이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이 남자를 다시 마주친다면 기억하지 못할 게 분명한. 그때 한 가지 장면이 머릿속에 스쳤다. 침실에 걸린 사진, 그 속에서 가족과 함께 웃고 있던 주인의 얼굴! 나는 잠을 자듯 눈을 감은 남자를 보며 지독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그 모습이 진짜인지 아니면 내가 어떤 상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벽돌처럼 무표정해진 남자의 얼굴 뒤로 여전히 매섭게 타오르는 불길의 열기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

나는 방을 살핀다. 갈 곳을 알 수 없어 도시를 헤매다 흘러들어온 여자 친구의 방이다. 손안에 쥔 전등의 흰 불빛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어둠을 깎아내듯 방 안 구석구석을 살핀다. 크림색 커버가 씌워진 침대, 침대 앞의 조그만 화장대, 외투가 빼곡히 걸려있는 벽걸이 옷걸이, 그 아래 수납장을 채운 책과 시디들. 함께 밥을 먹곤 했던 식탁 위에는 여전히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남자의 알 수 없는 말들을 떠올린다. 문득 남자는 일부러 내 손을 빌어 죽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남자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 나는 안고 있던 개를 침대 옆 바닥에 내려놓는다. 침대에 누워 붕대로 감싸놓은 개의 등을 어루만진다. 희미한 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오늘은 아흔여덟 번째 날이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다. 그것을 잊지 말자. 내일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사라진 지 아흔아홉 번째 날이고, 아무 탈이 없다면 그다음에는 백 번째 날이 올 것이라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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