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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여왕의 기사단

2011.06.08 11:0406.08

문장 주간작으로 선정됐네요.
아쉽지만 심사에서 제외 되어야겠죠;





1.

언제나처럼 그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실체 없는 공기와 같고 꿈의 영상을 거부할 능력이 없다. 9년전 실제로 겪었던 기억이 오늘밤도 악몽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에 땅거미가 지고 모든 동식물이 밤을 맞이할 시간, 황혼을 등지고 초라한 수도사 한 명이 지평선 끝으로 나타난다. 그 뒤로 족히 수십만이 넘는, 이제 곧 역사에 기록될 장대한 행렬이 이어진다. 그들은 군대가 아니다. 각국의 명망 높은 수도사들, 신심 깊고 평화를 갈망하는 민중들, 죄를 면제 받기 위해 이 행렬에 자처한 사형수들, 평화와 신의 이름이라는 명분으로 남녀구분 없이 모인 온갖 군상이 그들이다. 그들에게는 단 한 자루의 검이나 창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성문 바로 앞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군대'에게는 3배가 넘는 수적 열세 탓에 온 나라의 언어로 부르짖는 찬송가들이 마치 전장의 북소리처럼 들렸고 통일신 바요르를 상징하는 수천 개의 깃발들은 단죄를 상징하는 높이 솟은 창처럼 보였다. 자신들의 영토를 완전히 옥죄여오는 수십만 명의 인파는 그들이 군대가 아니라 해도, 다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해도 물리쳐야할 적이었다.

사령관은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우려해 눈을 감고 결단을 내린다. 저녁하늘을 검게 칠하는 화살비가 쏟아진다. 연이어 화살이 떨어져 내릴 때마다 수백의 생명이 스러져갔지만 어떤 단말마도 찬송가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걷던 이가 화살에 맞아 주저 앉아도 행렬은 멈추지 않는다. 위축되거나, 격분해서 달려가는 이도 없이 한결 같은 속도로 어느새 성문 앞을 방어하는 파수병들과 마주할만큼 가까이 왔다. 사령관에게는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보병들을 돌격 시켜 그들을 막아내야만 한다. 병사들은 두려움과 흥분으로 반쯤 미쳐버린 상태였다. 대열을 지키는 것도 잊은 채 자신들이 마주한 상대가 같은 군대가 아닌 순교자들이라는 사실도 잊고 무참히 그들을 도륙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렬은 멈추지 않는다. 병사들에게 베이고 또 베여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병사들은 마치 지옥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처럼 주저 앉아 울부짖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있었다. 다음 순간이었다. 전투가 무르익자 서쪽 너머로 나팔 소리가 길게 울린다. 중기병으로만 구성된 3만여명의 기사단이었다. 마치 구원군처럼 보이던 기사단은 넓게 포진한 상태에서 순교자 행렬과 성을 지키는 병사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분쇄 시킨다. 돌풍에 휘날리는 흙먼지처럼 수많은 인간들의 목숨이 보잘 것없이 흩어진다. 그 중기병 가운데로 내 모습이 보인다. 성 바요르 기사단을 상징하는 회색갑주와 순백색 망토. 그 어떤 것보다도 신의 뜻과 자신의 신앙을 따르는 아셰라드 왕국의 명예로운 기사들. 그들도 지상 위 모든 생명을 쓸어버리는 이 대량학살에 동참하고 있었다. 나와 내 동료들의 투구 안으로 흡족한 미소가 보인다.

"헉!" 스스로 내지른 소리에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주먹쥔 손아귀 사이로 피가 흐른다. 10년이 다 돼 가도록 같은 악몽을 꾸어서일까. 이전처럼 눈물이 흐를만큼 감정이 격양 되진 않았다. 이제는 깨어있는 시간과는 또다른 현실로 받아들였다. 시종을 불러 갑주를 끼워 맞추는 동안 거울 속 내 얼굴을 자세히 관찰한다. 어떻게 보아도 저 머리는 개머리였다. 돌출된 턱과 입, 크고 벌어진 콧구멍과 뾰족히 솟은 두 개의 귀가 그렇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렇게 보였다. 한 번은 시종에게 내 얼굴이 무엇으로 보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그저 '주인님 입니다.' 라고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내 개머리를 보고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2.

오전 일찍 궁정으로 나오도록 명을 어기고 조금 늦어버렸지만 왕과 대신들은 별일 아니라는듯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흠……. 잘될까?"

왕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왕좌라는 자리는 절대적이다. 국력이 강대하면 할수록 그 절대권력이 뿌리 깊게 뻗어나간다. 거기에 앉지 못한 이들은 뿌리가 옭아매는 속박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설사 그게 돼지라 해도 말이다. 왕좌에 앉게 되면 그게 누구던 권력을 휘두른다. 저 자리에 앉은 돼지는 결코 우리가 돼지라 부를 수 없는 존재, 우리들의 왕이다. 큰 입에서 흐르는 침과 땀이 뒤섞여 온 왕실 실내가 역한 내음으로 가득하다. 꿀꿀 거리며 콧김을 뿜어댈 때마다 구역질을 자아낸다. 이따금씩 이 자리에 익숙치 않은 시녀들이 참지 못하고 토악질을 하다 목이 달아났다. 물론 같은 짐승끼리는 그렇게 심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내 시종이 내 개머리를 보고도 개의치 않는 것처럼 주인이 사람이건 돼지건 노예나 다름없는 나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돼지가 왕좌에 앉아 있고, 그 주위로 뱀, 쥐, 갈까마귀, 하이에나 무리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놈들은 왕좌 주변에 둘러앉아 돼지가 흘리는 살기름을 받아먹는다. 자신들이 바친 백성의 피와 살로 배를 채운 돼지의 살기름이다. 돼지의 앞에서는 더러운 살기름을 핥아댈 뿐 어떤 공물도 탐하지 않으며 충절을 보이지만 자신들을 방해할 어떤 포식자도 없기 때문에 궁정에 들리는 일과만 끝내고 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나라 구석을 들쑤시며 백성들을 비틀어 짜낸다.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강력한 경고가 되겠지요."
"이 기회에 폴켄에게 본 때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왕과 대신들은 중립국 프레이드에 사절단으로 머무는 폴켄의 왕녀를 암살 시킬 계획을 모의 중이었다. 더 들을 것도 없이 왕녀의 이름은 제 1왕녀 벨 베나 일 것이다.
현 폴켄의 섭정파와는 반대 정파에 있는 순혈파로, 폴켄 내에서도 지독한 암투에 시달린다고 한다. 대신들이 왕녀를 암살하려는 이유는 추측컨데 폴켄 섭정파와의 내통이다. 폴켄은 웨이랜드에서 손꼽히는 초강대국 중 하나다. 강대국의 사절단 방문은 그 국가가 같은 강대국이 아니라면 이후의 침범을 권고하는 뜻과 같다. 그러나 폴켄에게는 굳이 자신들과 대등한 아셰라드의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프레이드를 취해야할 이유가 없다. 섭정파로서는 눈엣가시인 왕녀를 없앤다는 이득이 있고 아셰라드 대신들은 프레이드를 손에 넣어 국고에서 빼다먹은 재물을 충당시킬 속셈이다. 아셰라드 왕은 이 어떤 이해관계에도 괘념치 않는다. 왕 역시 대신들과 한통속으로 국고를 비우는 돼지니까.

"야크."

금수들 간의 협의가 벌써 끝난 모양이다. 이제는 개를 부를 차례였다.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려울 것도 없다. 멍멍 짖어주고 몇발자국 앞으로, 그게 전부인데. 가슴 한구석에 아직도 실낱 같은 반항심이 남아있다.

"이봐 야크."
"예. 장군."

교황으로 부터 직접 하사 받은 자애를 상징하는 순백색 갑주 위로 쥐의 머리가 붙어 있다. 뛰어난 감언이설로 아셰라드 국민들을 종용해 순교자로 가공하는 장군 이에고스다. 평화의 전도사 이에고스란 이름이 더 유명할 정도로 그의 연설은 웨이랜드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한 때 나의 상관이자 기사단장 직위에 앉아있던 자였다. 이제는 그 뛰어나신 언변으로 일개 기사단이 아닌 국가의 중추를 다루는 자리에 올라섰다.

"지금 즉시 프레이드로 가서 폴켄의 왕녀를 처리하게."
'…….'
"으음…? 왜 대답이 없는가."

이에고스는 뒷짐을 지고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 보았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정말 개의 머리를 하고 있다면 저 쥐머리를 물어 죽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물론 생각 뿐이다. 이에고스 한 명 죽인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설령 이 왕실 내 짐승들을 전부 베어버려도, 대신할 놈들은 얼마든지 있다. 무의미한 짓이다.

"알겠습니다."

프레이드 건이 해결 되자 다시 다른 나라를 먹을 작당이 한창이다. 표면적으로 아셰라드, 이스, 폴켄 삼국은 웨이랜드가 통일 되기 까지 서로 연합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다는 조약일 뿐이다. 비공식선에서 요인 암살이나 주요거점 습격등 암투로 인한 이권다툼은 계속되고 있다. 정국이 그렇게 흐르다보니, 가능한 소수의 병력으로 이런 일을 처리하는데 손꼽히는 집단이 기사단이다. 한 때는 굽힐줄 모르는 긍지로 대변 되던 기사들은 더이상 없다. 약소국의 땅을 범할 때 위압감을 조성하기 위해 과장된 무장을 하고 사절단 옆에서 병풍 역할을 하거나 은밀히 적국의 주요인사를 암살하는 순수한 '무력'으로만 이용되고 있다. 웨이랜드 전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성 바요르 기사단도 그렇다. 신념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불사하던 기사들이 사냥개로 전락했다.

깊은 밤. 간단한 채비를 마치고 몰래 준비해둔 말에 올랐다. 억지로 라도 따라오겠다는 동료 기사들을 피하기 위해서다. 혼자 행동하는게 편한 이유도 있지만 되도록이면 부하들의 손까지 더럽히고 싶지 않다. 내가 가진 상급기사라는 직위는 허울이다. 이에고스가 꼭두각시 노릇을 계속하도록 자신의 직속으로 끌어올린 것 뿐이다. 더러운 일이라면 차라리 내가 도맡아 하려고 직위를 받아들였다. 나는 이미 개가 돼 버린지 오래지만 아직 어린 기사들에겐 기회가 있다. 아직 신념과 타협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이라는 증거다. 나처럼 금수의 탈을 쓰기엔 그들은 푸르다. 만약 일이 잘못 돼 프레이드에서 내가 죽는다면 그것도 좋다. 그게 좋다.

3.

밤하늘의 별들이 만개해 있었다. 고뇌에 가득차있던 그날 밤 하늘도 이렇게나 아름다웠다. 이 길이 지나간 내 과거로 돌아가는 길이라면 좋을텐데. "하…." 쓴웃음 짓는다. 7년전 여름, 교황청에서 즉시 전쟁과 분쟁을 멈추어야 한다는 성명을 내렸다. 신의 계시, 전언이라는 명분이었다. 교황명은 절대적이다. 한나라의 왕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그렇듯 교황의 말은 모든 나라가 따라야만하는 강령이었다. 웨이랜드 대륙의 큰 물살로, 서로 이를 드러내며 싸우던 이스, 폴켄, 아셰라드 열강 3개국은 일시적이지만 즉각 휴전을 선언했다. 그들을 따라 세 종파로 갈라져 대륙 각지에서 일어나던 크고 작은 분쟁도 일순 잠잠해졌다. 3세기가 넘도록 전쟁이 끊이질 않던 웨이랜드에 거짓말처럼 평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랜 전쟁에 시달려오던 사람들은 신과 교황을 찬양했다. 강대국들은 더 나아가 종전을 선언했고 지상에 다시 없을 낙원이 도래한 듯 했다. 거짓말처럼.

하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여느 도시에나 있는 종말을 외치는 신세이어(sin sayer)처럼 거리로 나가 외치고 싶었다. '모두 다 거짓말이다!' 전쟁이 없는 세상이 정말로 계속 될 수 있을까? 교황에게 내린 신의 계시는 진실된 것일까? 신은 진정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싸워왔단 말인가… 내 가슴 속 심연에서는 세상을 향한 끝없는 의문과 부정만이 쏟아져 흘렀다. 그 당시에도 나는 아셰라드 내 조국의 기사였고 가문의 후계자였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런 내 생각이 불경하고 사악한 것인줄 알고 있었다. 화형 당해 마땅한 자신이 극도로 혐오스러웠다. 검을 휘두를 자격조차 내게는 없는 듯 했다. 주변은 온통 어둠 뿐이었다. 눈앞의 세상은 이토록이나 풍요로운데, 거리를 뛰노는 아이들의 얼굴엔 웃음만 가득한데,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어째서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깊은 고뇌만이 이어졌다.

종전선언 2년후. 답이 내려왔다. 교황은 열강 삼국을 일시적으로 연합 시켜서 웨이랜드 평화조약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알렸다. 분쟁의 뿌리를 뽑아내겠다는 명분으로 뿔뿔이 흩어진 국가들을 웨이랜드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결속 시키자는 내용이었다. '성지'라는 이름의 본보기로 웨이랜드의 중립국 중 하나인 아인스탄으로 연합의 평화사절단이 파견될 예정이었다. 나는 쾌제를 불렀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세상은 악의 구렁에 빠져 있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교황이 말하는 신의 계시라는건 헛소리다. 만인들이 원하는 평화를 미끼 삼아 중립국과 약소국들을 손에 넣기 위해 교황과 강대국들이 꾸며낸 거짓놀음이다. 신의 이름을 빌려 악행을 저지르려는 신성모독이고 음모다! 거기에 가담한 조국의 일그러진 탐욕과 교황청의 부덕함에 환멸감을 느꼈다. 평화조약 사절단이라 이름 붙인 살육행위는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기사 작위가 박탈당하고 가문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다 해도. 모든 걸 각오하고 당시의 이에고스 기사단장에게 내 다짐을 전했다. 그 역시 이름 높은 성 바요르 기사단의 수장이었다. 이해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나보군. 이건 무력침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평화 조약의 권고다. 사절단은 단 한 명의 무장한 병사도 없이 신심 깊은 수도사들과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들로 구성될 것이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인스탄은 아직 평화조약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만약 평화통일을 거부하고 아인스탄군이 반격해서 사절단을 공격한다면 연합군 역시 가만있지 않을 것이네."
"아인스탄군은 채 1만이 넘어가지 않는 약소국입니다. 10만이 넘는 사절단을 공격하지 않고 어떻게 거부한단 말입니까!"
"어차피 중소국가들은 언젠가 우리들 강대국에게 짓밟혀 사라질 것이야. 그렇게 되면 수백 수천만 인명들이 스러져가겠지. 다소의 희생과 교황이 내리는 신의은총으로 전쟁없이 웨이랜드를 통일할 수 있다면 그것이 평화시대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그날만큼 내가 태어난 조국을 원망해본 적이 없었다. 그날만큼, 신의 사도이자 정의의 전당이라는 교황청을 부정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모든 믿음은 산산히 부서졌고 국가를 향한 충성도, 기사로서의 신념도 다시는 건지지 못할 늪으로 던져버렸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만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평생을 지고 살아가야만하는 짐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신의 이름과 대륙의 평화를 위해 몸을 던질 무고한 사람들을 구해줄 힘이 없었다. 기사단의 제일검이 다 뭐란 말인가. 지금까지 적을 쓰러트리고, 시체를 밟고 피의 강을 건너면서도 굳건히 지켜냈던 나의 신념도 희생 당한 평화 사절단처럼 이용하기 좋은 허울에 불과했다. 나는 아무 힘도 없는 무력한 개였다.


4.

미리 준비된 접선책을 통해 프레이드 도성까지 단 이틀만에 도착했다. 아인스탄이 피의 성지가 된 이후로 대부분의 중소국 군대는 쇠약해진 상태다. 전쟁을 일으켰다간 교황명으로 단죄가 내리고 집행국은 웨이랜드 연합 강대국이다. 자연스래 군대는 축소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군비를 지원 받지 못하는 군대에겐 돈이 필요하다. 아셰라드에서는 빵 몇조각 살만한 적은 돈으로도 그들을 매수할 수 있었다. 지령서 내용상으로는 왕녀의 위치가 가장 바깥 성곽 초소라고 돼 있었다. 일반적으로 귀빈은 내성에 머물며 보호 받아야 한다. 그것도 연합 삼국의 하나인 폴켄의 왕족을 성곽 초소라니. 프레이드도 이번 암살에 압력을 받고 있는게 분명하다. 폴켄 섭정의 머리가 궁금해졌다. 사람의 얼굴은 아닌게 분명하다. 아무리 반대 정파라고 해도 어떻게 자신의 혈족을 이런 사지로 던져버린단 말인가. 결과적으로 그의 수족 노릇을 하게 되는 내 입장도 웃기는 노릇이다.
왕녀의 호위병으로는 직속 근위대가 2명을 한조로 총 3조가 순찰을 맡고 있다. 지령서에 성의 지도와 순찰병의 위치까지 상세히 적혀 있어 별 어려움 없이 침투 지점을 설정했다. 갈고리 로프를 타고 성벽을 오른다. 발소리를 듣고 가늠해서 두 명의 호위병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교차하는 순간까지 기다린다. 적당한 기회를 틈타 홀로 방치된 한 명을 기습하고 석궁으로 반대쪽 녀석까지 손쉽게 처리했다. 근위대라하면 적어도 중급기사와 필적하는 수준일텐데, 너무 수월한 감이 있다. 어쨌건 성곽 블록을 두 번만 건너면 왕녀가 있는 4번 초소다. 성 밑에서 보이도록 시체를 세워놓고 발소리를 죽여 3번 초소로 향한다. 초소 안에서 다른 순찰조가 무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한 놈은 석궁으로 처리하고 맞바로 달려들면 쉽게 갈 수 있을듯 보였다. 문 틈으로 석궁을 겨누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반대쪽 문이 열리더니 괴한 세명이 들이닥쳤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서 석궁을 접고 몸을 숨겼다. 안에서 몇차례 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상황파악을 위해 문틈 사이를 들여다본다. 그들은 가벼운 무장에 손잡이가 없는 검을 들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다른 암살자들이다. 이 암살건은 아셰라드와 폴켄의 내통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이 들어맞지 않은 모양이다. 프레이드가 폴켄의 사주를 받은 것인가. 하지만 프레이드와 폴켄에게 어떤 이해관계가 있단 말인가.

"……."

그들은 왔던 문을 다시 열고 4번 초소로 이동했다. 최대한 기척을 죽여서 뒤를 쫓는다. 놀랍게도 4번 초소 입구를 호위 해야할 순찰조들은 암살자들과 서로 우군 관계였다. 갈수록 미궁이었다. 대체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다섯명씩이나 되면 혼자 상대하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한 나라의 왕녀를 암살하는데 어중간한 놈들을 보냈을리가 없다. 한 명이 자물쇠를 여는동안 나머지가 주변을 살핀다. 게중 한 놈이 내 방향을 주시했지만 알아채지 못했다. 어떻게 할 건지 지금 판단해야한다. 놈들이 들어가면 왕녀는 반드시 죽는다. 그 사실만 확인하고 이대로 돌아가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왕녀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녀는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뭔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 자조스런 웃음이 나온다. 저들이 없었다면 내가 저 역할을 맡고 있을게 분명한데, 내가 그녀를 동정할 자격이나 있는 것인가. 암살자들은 내가 망설이는 사이 자물쇠가 열렸는지 서로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단숨에 문을 차고 들어가 해치울 셈이다. 막으려면 지금 움직여야 한다.

"제기랄." 석궁 화살이 빗나가서 초소 문에 박혔다. 놈들은 난데없이 사각에서 누군가 나타나자 당황했지만 정확하게 대처했다. 뒤에 두명이 나를 상대하려고 막아서고 세명이 문을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상황이 또다시 반전됐다. 초소 안에 다른 호위병이 있었다. 그것도 맹렬한 기세로 단 칼에 한 명을 처치하고 다른 두 명을 문 밖까지 몰아냈다. 감탄할 시간이 없다. 당장 내 앞의 적 두 명도 협공을 개시했다. 석궁을 재장전할 시간도 없어서 이대로 검을 맞대야 했다. 좁은 성벽이라 둘러쌓이지 않아 그나마 숨이 트였지만 1:2라는 상황 자체가 만만치 않았다. 둘이서 한 명을 상대로 어떻게 싸우는지 알고 있었다. 굳이 급소를 노리지 않고 막아내기 어려운 공격으로 천천히 압박해 들어온다. 벌써 어깨죽지와 허벅지에 칼집이 생겼다. 이대로 가면 상처가 벌어져 불리해질 뿐이다. "으아!" 큰동작을 취할 것처럼 두팔을 들어서 소리 질렀다. 다행히 놈들은 잠시 위축된듯 몸을 뒤로 젖힌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세를 낮춰서 앞으로 굴러 가장 가까운 발목을 잘랐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그놈을 가까스로 붙잡고 방패로 삼았다. 하지만 남은 녀석은 당황하지 않았다. 부상 당한 자신의 동료를 발로 차서 내 위로 포개버렸다. 일어나지 못하도록 발로 누르고 동료의 등을 관통해서 밑에 깔린 나까지 끝장 내려는 생각이다. 반격할 틈이 없다. 온 힘을 다해서 나를 깔아뭉갠 빌어먹을 놈을 밀어내 틈을 만들고 발을 올렸다. "큭!" 검이 등을 뚫고 내 발등에까지 박혔다. 날이 조금만 길어도 심장에 닿을 뻔 했다. 놈은 다시 검을 뽑아내려 했지만 운좋게도 내 발에서만 빠져나가고 등뼈 어딘가에 걸렸는지 빼내질 못했다. 하지만 내 검은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두 개의 가슴팍을 모두 뚫어냈다. "후우…." 팔다리가 욱씬거린다. 막아낸다기 보다 급소를 피하려고 발버둥친 셈이라 이정도 상처는 값싼 편이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주변이 고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목 옆으로 검날이 들어와 있었다.

"대단하더군."

이쪽은 힘이 빠질대로 빠져서 말도 잘 안 나오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듯 흐트러지지 않은 목소리다. 부드럽기까지 하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조심스럽게 고개를 비틀어보니 역시나 초소 안에서 뚫고 나왔던 근위대 갑옷색이었다. 혼자서 세 명을 연이어 쓰러트렸단 말인가. 근위대장 정도 되나보다. 그쪽이야말로 대단하시군. 차라리 홀가분해졌다. 오랜만에 외지에 나와서 그런지 아셰라드로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매일 아침 개가 된 내 얼굴을 보고, 개가 되어가는 동료들을 보고, 암살단이나 다름없는 기사로 살아가는게 이제는 힘이 든다. 지쳐버렸다.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왜 망설였지?"
"무슨 말이시오."
"굳이 나설 필요없이 지켜볼 수도 있었을텐데. 왜 자처해서 다섯명이나 되는 적을 상대하려고 한 것인지 묻고 있다."

기묘하다. 나도 그렇지만 암살자 다섯명 모두 기척을 죽일줄 아는 전문가였다. 바깥 상황이 보이지도 않는 문 안쪽에서 어떻게 내 상황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 그렇다면.

"처음부터 초소에 왕녀는 없었군."
"뭐 그런 셈이지."
"과연. 암살이 올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나."
"당연한 일이다. 얼마나, 어떻게 올 것인지에 대비하고 있었을 뿐이다. 어제만 해도 이런 놈들이 일곱이나 걸려들었으니까."

과소평가 했다. 그정도는 예측했어야 했다. 개가 된 이후로 머리까지 개가 돼 버렸다. 주인이 던진 뼈다귀나 물어오는 생활에 익숙해진 탓이다. 변방에 내몰린 왕녀라 해서 스스로 목숨을 포기했다고 누가 장담한단 말인가.

"왜 망설였는지 말해보아라."
"이제와서 무슨 의미가 있소."

칼날이 목젖 언저리까지 들어왔다. 대답에 따라 당장 죽일지 조금 더 살려둘지 정하려는듯 했다. 나를 조롱하면서 가지고 놀 생각인가. 하지만 그의 독특한 목소리와 어조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내 목숨을 위협하기 보다는 속내를 끌어내려고 하는 느낌이 강했다. 굴욕스러운 기분이 아니었다. 죽을 위기에 놓여 있지만 적지 않은 상대들과 검을 맞대본 나다. 어중간한 위협이라면 간파해 냈을 것이다. 말에 따르기로 하고 생각을 해본다. 동정심 같은건 아니었다. 그런건 오래전에 잊었다. 이 감정은…… 그렇다. 9년전 그날. 그리고 매일밤 악몽을 꿀 때마다 느끼던 감정과 닮아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에 가로 막힌 기분."

속으로 품은줄 알았던 생각이 입밖으로 나와버렸다. 본심이 드러난 것 같아 치가 떨리도록 창피했다. 비웃음이 쏟아질 것만 같다.

"자세히 들어보지."

들어주려는 것인가. 내 이야기를…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나는 9년전 아인스탄으로 출진해 씻을 수 없는 죄악에 동참했던 일. 그곳에서 느꼈던 감정, 그 어쩔 수 없는 무력함을 혼잣말이나 독백처럼 정신없이 쏟아냈다. 다 말하고나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의외로 내 이야기는 짧았다. 9년 동안 가슴속에서만 맴돌던 이 이야기가 사실은 이렇게나 짧고 보잘 것 없었다. 이런 시대다. 불의에 맞서지 못한 기사의 넋두리 따위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을만큼 흔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같잖은 반역자로 몰릴만한 치졸한 넋두리다. 처음 보는 인물에게 왜 이런 말을 꺼내버린걸까.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다. 단지 목숨을 위협받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죽음속으로 몸을 내던지며 살아왔다. 그는 어떤 얼굴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역시 내 자신처럼 나를 경멸하고 혐오할까. 탄식이 나왔다.
그가 내 목에서 칼을 거두었다고 깨달은건 상상도 못했던 대답을 듣고난 뒤였다.

"내 부하가 되어라."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대답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검을 다시 들어야할지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갈팡질팡 거린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어찌됐건 이제 내 목에 검은 없다.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검을 주워 몇걸음 물러서 섰다. 전투로 단련된 감각이 몸의 통증도 무시해버리고 다시 검을 들어올린다.
성벽 옆으로 거대한 보름달이 눈높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나를 농락하다시피한 상대를 마주 보았다. 달빛을 받아서일까. 다른 세상의 인간처럼 하얗고 보드라운 얼굴이 보인다. 붉은 눈동자와 길게 늘어뜨린 연푸른색 머리결이 흡사 신화속 인물과도 같이 매혹적이다. 두터운 갑주에 둘러쌓여있지만 숨길 수 없는 체형과 곡선은 영락없는 여성의 자태였다.

"당신이었군. 당신이 벨 베나 왕녀였군."

단 번에 내 앞에 선 상대가 왕녀 자신이라고 직감했다. 이제 겨우 성년식을 치른 듯한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외견인데, 시체 옆에 서서 검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형언키 힘든 기개와 기품이 느껴진다. 고집스럽게 내 대답을 종용할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갸날픈 여자아이에게서 그런 위압감이 나올수가 있단 말인가.  부담스럽게 달라붙는 보름달처럼 그녀는 대답 없이 나를 응시할 뿐이다. 눈앞에 서 있는 내 모습만이 아니라 더 먼 곳을 바라보는, 마치 나라는 인간 자체를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불편한 기분이지만 완전히 압도 당해버려서 어찌할지를 모른다. 이러다가는 어떻게 되버릴 것 같다.

"부하가 되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왜 구태여 당신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내 목숨을 살려준 거요! 동정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소. 이미 오래전부터 버린 목숨이오."

나는 따지듯이 물었다. 격양 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왜 다시 검을 들고 덤비지 않았지? 네놈은 기사다. 구원 받은 목숨의 가치가 네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걸 삶에 밴 기사도로 알고 있는 것일테지. 네 목숨은 내 것이다. 너는 이제부터 내 부하다."

한결같이 결연한 얼굴로,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넋을 잃었다. 짐승들로 가득찬 아셰라드 궁정에서는 볼 수 없었던 왕족의 태도였다. 타인의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가지고 있어야 응당한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었다. 아주 찰나이지만 이대로 저 왕녀의 부하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조국에 대한 충의 따위 져버린지 오래다. 이런 나라도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그를 따르는게 좋지 않을까.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설레임이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 생각하신 것 같소. 당신네 나라에서 궁지에 몰려있다는 정황은 알고 있지만 나같은 기사 한 명 있어봐야 도움 될 것 없잖소. 나는 모반에 뛰어들어 신념을 불태울만한 재목이 아니오. 나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그녀와 마주할 자신도 점점 사라진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도 이 성벽 보다도 더 큰 보름달도 부끄러운 내 내면을 비추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때였다. 콧등에서 쇠붙이 냄새가 나더니 시야가 돌아갔다. 몸이 휘청거릴만한 위력이었다.

"무례한 놈!"

아무리 경계를 풀고 있었다지만 눈 깜짝할 새 보기 좋게 왼쪽 뺨을 얻어 맞고 말았다. 평정한 호수 같던 그녀의 얼굴이 화를 이기지 못했는지 일그러진다.

"그럼 내 눈이 잘못 되기라도 했단 말이냐! 잘들어라. 겨우 그깟 패배감 때문에 잘못된 세상과 타협하는 한심한 네 놈을 내가 거두어주겠다는 말이다. 어째서 순순히 따르지 않는 게냐."
"……패배감이라 했소?"

왕녀의 기세에 눌려 두리뭉실하던 머릿속이 패배감이란 세글자에 확 깨었다. 이 왕녀는 아직 현실을 모르는듯 하다. 사리판단에 좋은 급진주의에 빠져 모반을 꿈꾸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고작 패배감 때문에 내가 이꼴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오. 평화시대의 부덕함이 정말 연합과 교황의 힘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시오? 묻겠소. 혹시 모반을 꾀해서 폴켄의 정권을 쥐고 다른 두 연합과 교황을 상대할 수만 있다면 시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그렇다. 정확하게는 내 조국부터다."
"하!"

그녀는 다시 침착한 얼굴이다. 눈앞에서 고함 쳤는데도 일말의 위축된 기색이 없다. 하지만 세상사 위풍당당으로만 해결 된다면 얼마나 좋겠나.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잇는다.

"나는 불과 열다섯살 나이에 아셰라드 성 바요르 기사단에 입단해 결코 적다고 말 못할 전장들을 헤쳐왔소. 비록 그때도 지금처럼 강대국들의 힘으로 국면이 좌지우지 되는 세상이었지만 싸우는 자 신념이 있었고 정복하는 자 관용을 베풀었소. 신의 이름을 팔아서 거짓된 평화를 외치는 성직자들도 없었거니와 무엇보다도 민중들에게 무엇이 참된 정의인지 볼줄 아는 눈이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어떻소? 썩은 귀족과 왕족들이 평화를 미끼삼아 자신들을 비틀어짜내는데도 그저 아무 생각없이, 자신들이 왜 당하는지도 모른채 기생충들을 몸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지 않소. 모반을 일으킨다 해도 그들에게는 그저 전쟁을 일으키려는 악의 축으로만 보일 뿐이오. 누군가 계몽을 알리려 위험을 자처해도 외면할 뿐이지. 정의는 투쟁으로서 얻어진다는 것도 그들은 잊어버렸소."
"그래서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했나?"
"명분이 없는 투쟁은 반역일 뿐이오! 그들이 우리가 싸워주길 원했다면 죽는 순간까지 그들을 위해 싸웠을테지만, 대체 누구를 위해 싸운단 말이오. 그들은 어디에 있다는 말이오."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리도 아니다. 자신의 좁은 세상에서 갓나와버린 느낌을 곱씹고 있는 거겠지. 왕족들은 살아가면서 밑바닥 백성들의 삶을 보지 못한다. 정파싸움에 휘말린 왕녀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반을 일으킨다면 민중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녀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고민하는듯 하더니 이내 결연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는 캄랜드인이셨다."

또 한 번 귀를 의심케하는 대답이었다. 당장 귀로 듣기에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제지할 마음보다는 이어질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폐하께서는 주변 대신들의 반대와 그녀의 불분명한 신분도 뛰어넘어 어머니를 왕비로 맞이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고향인 캄랜드를 잊을 수 없는 향수병에서 헤어나오질 못하셨다고 한다. 그 그리움은 많이 어렸던 내게도 기억으로 남을만큼 깊은 것이어겠지. 폐하께서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어머니를 유폐시켰다. 신뢰를 잃은 왕으로서의 모습도 되찾아야 했을테니까. 그렇지만 가끔씩 어린 내 손을 잡고 어머니가 갇혀있는 성으로 향할 때면 아직도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는 왕이 아닌 한 남자로서의 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왕족 다운 당찬 어조가 그녀 또래에 맞는 여자아이처럼 조금씩 작아진다.

"내가 열살이 되는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폐하께서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가 갇혀계시던 성에만 칩거하시고 국정을 돌보지 않으셨다. 누군가는 폐하를 대신해 짐을 져야했고 결국 내 숙부인 벨 칸트 백작이 내가 성인이 되는 해까지 국가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가 평화시대에 동참하겠다는 교황의 친서에 인장을 찍은 것도 그 해였다. 내 삶에,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과 이용하려는 자들이 나타난 것도 그때부터였지. 어머니와 함께 웨이랜드로 떠나온 캄랜드계 귀족들만이 내 편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성인식을 일년 앞둔 열 세살 나이에 섭정파의 공작으로 그들 마저 모두 스러졌다. 나는 붉게 물든 왕궁에서 도망쳐나왔다. 기나긴 도피와 불안의 밤이 이어졌다. 결국 왕녀가 아닌 평민 소녀로서 폴켄 남부지방의 작은 마을에 은닉했다. 거기서 나를 거두어준 노부부의 축복을 받으며 작은 성인식을 치루었지. 그 다음해 나는 어떤 귀인을 만나 궁정의 뜻있는 대신들과 함께 반대정파를 수립했다."

거짓말이 아니다. 섭정의 즉위년도와 평화시대의 도래, 폴켄 반대정파의 등장시기등 모든 정황이 맞아 떨어진다. 충격적이었다. 섭정파와 반대정파의 속사정도 그렇지만 왕녀의 태생이 캄랜드인이라는게 가장 놀라웠다. 폴켄의 캄랜드 귀족은 왕녀가 말한 6년전 그 사건으로 몰살 당했다고 들었다. 여자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인종 자체를 지워버린 것이다. 교황청이 그들을 이교도로 명명 하면서 이루어진 단죄 행위였다. 그런데 유일한 폴켄 국왕의 핏줄인 왕녀에게 그 캄랜드의 피가 흐른다니……
그녀는 자신을 과소평가한 내 아집을 끄집어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히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 증명했다. 경외감이 일었다.

"백성들이 전쟁을 원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들은 귀족들과 다르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댓가로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다. 생명보다 값진 신념을 요구하는건 그 생명의 존귀함이 보장 되는 인간들의 입장이다. 백성들은 그저 자신들의 가족이 전장에서 살아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기도할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검과 갑주로 무장한 너희 기사들 보다 한 발 앞써 투쟁을 일으키란 말인가?"
"하지만 그들의 도움 없이 어떻게 모반을 일으키겠단 말씀이시오. 설령 기적이 일어나 당신의 조국을 되찾았다고 한들 다른 두 강국과 교황은 무엇으로 막는단 말이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이거다. 폴켄의 세력 대다수를 차지한 섭정파의 무력을 어떻게 당해낼지가 문제다. 벨 베나 왕녀여, 이번에는 무슨 대답 할 것인가. 그녀는 대답을 미루고 고개를 돌렸다. 동이 트고 있었다. 성벽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보름달은 저만치 물러스고 태양이 떠오르며 지평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지평선 끝으로 뭔가가 움직였다. 착시현상인가 싶었지만 움직이는 것들이 하나둘 늘었다. 깃발이었다. 길고 뾰족한 창에 묶인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눈을 의심했다. 매일 밤 꾸는 악몽의 첫장면 같았기 때문이다.

"저들이 내 대답이다."
"무슨 소리요?!  저들은 대체 누구요?"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게다가 깃발들이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행렬의 집단 대부분이 깃발을 세우고 있었다.

"기사단이다. 국적도 신분도, 인종 마저 초월해서 단지 시대를 바꾸겠다는 일념하에 결속된 역사이래 유일무이한 나만의 기사단이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어림 잡아도 몇만명은 족히 돼 보였다. 저런 군대가 대체 어디에서 모였단 말인가. 그녀는 그들 전부가 기사라고 말했다. 시대에 거스르려하는 한 나라 왕녀의 모반에 동참하려는 기사들이 웨이랜드에 이렇게나 많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성벽 밑에서도 출진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수백기의 기병들이 엄청난 기세로 성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경비병들은 당황한 나머지 그들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프레이드는 이미 내 뜻을 따르기로 정했다. 프레이드 뿐만이 아니다. 피의 성지로 나라를 잃은 아인스탄을 포함해 다른 수많은 중소국가들의 기사들과 군대들이 내 밑으로 모이고 있다. 네놈처럼 길들이기 힘든 녀석은 처음이지만 말이다."

고작 몇만의 기사들만으로 폴켄과 연합의 군대를 이겨낼 수 있을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 시대의 어둠을 걷어내려 투쟁하려는 자들이 저렇게나 많이 있다는 사실만이 내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기사여. 이름을 말하라."

그녀는 마치 일국의 여왕처럼 검을 옆으로 세웠다. 나는 그녀의 발밑에 한 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야크 카서스 입니다."

검이 양쪽 어깨와 머리를 한 번씩 두드렸다. 상처가 난 어깨는 유난히 세게 두드린 느낌이다.

"일어나라. 내 기사가 되어라."

저만치 물러난 보름달처럼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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