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보물찾기

2009.08.16 23:0108.16

어떤 해. 8월 어느 날의 이야기.


저는 이 자리에서 새로운 사실 하나를 고백하겠습니다. 저에 관한 사실입니다. 저는 몇십 시간 전에 제가 모르던 중요한 존재 하나를 눈치챘습니다. 항상 입에 담아가며 떠들던 그 말이었습니다만, 이렇게 알고 나서 혼자 뇌까릴 때의 그 느낌은, 그 존재가 개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지요. 아차, 뇌까렸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렇게 불쾌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뜻이 불분명하게 전해지고 있군요. 그것은 사람의 감정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반짝 드는 그 느낌을 미친 듯이 메모장에 적어가며 제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을 때, 그것은 제 안에서 이미 흘러넘칠 것만 같았었습니다. 저라는 작은 인간쯤은 머리끝까지 담가버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인류 모두를 품어낼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확실합니다. 슬픔 속에서 확인해버린 그 감정은, 그 모두가 자기 혼자서 끌어안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소중하게 속삭였습니다. 그가 그녀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깨닫고 나서 돌아서며 그와 함께 대화하며 속으로 웅얼거렸습니다. 머릿속에 뿌옇게 본질이 자리 잡으려고 할 때, 그것은 너무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저에게 소중한 그것을 속삭일 때마다, 그것이 너무 진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그걸 혀로 계속 굴리고 있다는 것이 약간 부끄러워질 것도 같았습니다. 여태 그 감정은 욕망이라는 흐리멍덩한 범위 안에서 일축된 채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파묻혀진 그것을 파냈을 때, 소중함은 넘쳤습니다. 그래서인지 눈가가 약간 젖어 있었습니다. 유사 이래로 그것을 자신이 가졌음을 깨달은 현인들이 그것을 글로 표현한 것을 보고도, 저는 겉모습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 화려하게 분칠 된 겉모습을 뚫고 속을 보았을 때, 그것이 너무 따듯했고 반짝였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너무 사랑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가장 소중한 감정입니다. 그것은 시작하는 감정입니다.
저는 잠시만 그것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오래 걸리지 않으니 졸며 라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말해도, 당신들은 제가 옛날에 했던 것처럼 겉모습만 겉돌 뿐일 테니까요. 그 소중한 감정을 말로 표현해봐야, 그 순수함이 변질하지 않은 채로 전해질 거로 생각하진 않으니까요. 그래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아주세요. 그게 지식으로 남더라도, 그 지식은 소중함과 만나 풍요롭게 피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것이 더럽다고 생각하던 과거의 제가 있었기에, 그 소중함을 모른 채로 살아가는 당신을 지켜볼 수는 없으니까요. 그것의 겉모습이라도 아는 것은, 당신에게 더욱 큰 소중함을 안겨줄 등불이 되어줄 테니까요.

지금 저는 고등학생 3학년입니다. 공부란 것이 가장 중요할 때인데, 이런 감정을 논하고 있으니 당신들에게는 할 일을 마저 하지 않은 채로 낭만에만 빠진 청소년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제가 화려함에 빠져 그것을 광신하는 것이면 좋겠습니다. 너무 쓰라리니까요. 깨어난 감정이 가슴에 있고, 그 감정은 갈 곳을 잃은 채 저를 계속 찌르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모르는 저를 상상하긴 싫습니다. 광신하더라도 알고 있기를 바랍니다. 저 자신만의 자폐적인 상념이라 해도 좋습니다. 잊는다니,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입니다.
아, 제가 그와 그녀가 함께하고 있던 그 순간을 본 것은 얼마 전의 일입니다. 수능이 100일 남은 그 날입니다. 바로 그저께입니다. 예, 길거리에 술에 취한 채 걷는 청년들을 보았다면, 아마 그들은 저와 같은 3학년생일 것입니다.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날의 일이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전에, 제가 그녀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잠시 서술 해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남들에게 이 감정을 말한 적이 없기에, 그 얘기를 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는 뜬금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순간입니다. 1학년 때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며 쑥스러운 마음에 짝꿍과도 아무런 대화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알고 있던 남자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한 대화를 할 뿐. 남자 중학교를 나와서인지, 여자와는 대화하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순진한 소년의 시기였습니다. 환상 속에 헤어 나오지 못했고, 그 환상 때문에 여자들과는 벽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벽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 벽의 바깥에 유난히 빛을 발하는 게 하나 있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벽의 가장 높은 부분은 항상 빛으로 물들어 있었으니까요. 분홍빛이 쑥스럽게 물든 벽이었습니다. 제가 그 벽을 환상으로 칠했습니다. 하지만, 그 벽에는 창문이 없었습니다. 그 빛을 발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벽에 가려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녀는 화려한 채로 저에게서 멀어진 채 보존되었고, 저에게 있어 여자들은 모두가 화려했고, 그렇기에 그들을 동경하는 저는 점점 더 자신을 더럽게 했습니다. 동경하기만 한 저는 여자들 모두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저를 더럽게 봤고, 그래서 저는 익숙한 남자들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남자들과만 어울렸고, 그 환상 속에서 빠져나올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습니다.
이미 그때는 성욕과 동경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에 들어서서는,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사랑은 이미 욕망의 일부분일 뿐이었습니다. 남들이 사랑에 대한 노래를 들으며 열창하는 모습은, 동떨어진 이국의 풍경화 같았습니다. 동감할 수 없는 감정들 속에서, 그녀는 저에게 있어 동경의 대상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녀는 저의 자의에 의해 멀리 떨어졌습니다. 이미 그녀와 저를 가른 벽은 두꺼워졌습니다. 가끔 그 벽에 망치질해 보았습니다만, 건너편까지 소리가 전해지지도 않는 듯했습니다. 저의 힘이 부족했는지, 그 벽엔 금조차 가지 않았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명확해진 구분 선을 따라 겉돌았습니다. 저는 그 모든 욕망과 구분 지어진, 동성 간의 친분만을 찬양하였습니다. 욕망을 마약과도 같은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맛본 저에게는, 마리화나처럼 삽시간의 행복을 줬었습니다. 순간 극도의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눈송이가 됐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이 지나치고 나서는, 그것이 통념에 의해 받는 취급을 재차 깨달았었습니다. 이성의 손바닥에 닿아 삽시간에 녹아버린 아름다움 뒤에는, 자신만 만족하게 되어버렸다는 추악한 상념만이 남았었습니다. 그 추악함은 곧 욕망의 밀물에 침수되어 묻혔었고, 이내 쾌락 속에서 정자를 배출해낸 저의 뒷모습 속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욕망을 향해 침 뱉으며 다시 깨어났습니다. 그 반복 속에서 답을 찾아내지 못한 저는 결국 조울증과도 같은 환영과 거부가 수초 간격으로 반복되었고,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 친구들과의 웃음만이 저의 붕괴를 막아주었습니다.
벽 너머에서 그녀는 경계선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욕망이란 늪 위에 있었는지, 동경이란 이름의 화려한 성 위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 두 판단의 사이를 오가며 저를 혼란케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에 대한 감정이 동경임을 확신시키기 위해 저에게 발악을 요구했었습니다. 사랑은 욕망이기에, 특별하게 느껴지는 그녀는 동경의 대상임이 틀림없다는 자기최면적인 보루였습니다. 그 보루는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최후의 최후까지 몰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상태로 고등학교 3학년생이 되었습니다. 지평선 너머로부터 밀려오던 의무의 물결은 어느새 파고가 높아졌습니다. 주변에서 불어대는 바람에 더욱 요동치는 그것은 재난영화의 해일을 방불케 할 정도로 거대하게 변해 태양마저 가려버렸고, 제 이성이 안정을 복구하는 작업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내 붕괴시켰습니다. 그 거대한 벽에 작은 구멍이 뚫렸습니다. 벽 너머에서 시작해 밤하늘까지 하얗게 칠할 정도로 빛나는 그 존재가 누구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답답한 감정 속에서 벽 너머를 봤습니다. 그리고 빛을 발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3년째 그녀와 같은 반이라는 사실 하나만이 저에게 위안거리가 되었습니다. 다만, 그녀와 제대로 대화한 적은 손에 꼽아봐야 슬플 것 같아 더 슬퍼지기도 했습니다. 집이 가깝다는 것이 이리도 슬플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워 봐야 제가 가까이하질 못하니, 눈앞의 그녀를 바로 놓쳐버리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동경하는 그녀가 고개를 돌려 저를 보길 바랐습니다.
여러모로 고민거리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숨도 못 쉬도록 이미 저를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쳐 버렸습니다. 검게 칠해진 그 건물 속에서 제 손에 잡히는 것은 문제집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쌓인 불만은 욕설로 빠져나왔습니다. 난폭하다는 평은 저에게 있어 당연한 수식어가 되었습니다. 억눌린 감정들이 답답하게 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치고받고 뛰어다녔습니다. 하지만, 제가 날뛰는 도중에도 그녀가 절 보며 소소한 웃음이라도 지어주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교실 구석에서 바라보는 교실의 전경은 넓습니다. 평소 좁은 집에서 바라보던 정경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 넓은 공간 가운데, 그녀는 눈에 띄었습니다. 그녀가 그 모든 광경을 메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저께 일입니다. 그렇기에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여름의 잔인한 폭염 속에서, 저는 땀을 흘리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휘몰아치는 의무의 격류는 저에게 피로만을 주었습니다. 저와 함께 귀가하던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집을 향해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눈앞에는 그녀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욕정으로는 이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단지 동경일까요. 그때 처음으로 의심했습니다. 집이 가깝다는 사실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며 우연히 듣게 되었지만, 그때처럼 집에 함께 가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같이 집에 갔다고 하기보단, 우연히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이었겠지만 말이죠).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릴 것 같았습니다. 욕망은 일지 않았지만, 망상은 일었습니다. 어떤 오해를 받을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손이 머리를 만집니다. 분명히 꼬여있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만, 이리저리 다시 꼬았습니다. 당연히 머리는 더 꼬였고, 저는 그녀를 보지 않으며 머리를 계속 만지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산만해진 정신은 1+1부터 다시 시작하게 했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가던 중, 잠시 이웃어른을 뵈게 되어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여쭈는 등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다시 인사를 하고 그녀를 향해 돌아섰는데, 그녀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가슴에 돌이 떨어진 걸까요. 심장이 멈췄을까요. 심장병이란 것은 이런 것을 말하던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기엔 좀 이상했습니다. 양 가슴이 동시에 답답해오는 것이, 뭔가를 바란다고 안쪽에서 소리치며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몰랐었습니다. 뭐라 불러야 하는 것인지 몰랐었습니다. 그냥 허탈한 마음에 그녀가 갔을 길을 따라갈 뿐이었습니다.
2분쯤 신발 끈이 끊어지도록 쳐다보다가 앞을 봤더니 그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있었습니다. 오랜 친구는 아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즐거운 웃음을 준 친구입니다. 지금도 친구입니다. 어제도 친구였고, 고등학교 1학년 이래로 그와 저는 항상 친구이길 바랐습니다. 헌데, 왜 그가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일까요?
동경의 대상인 그녀가 그와 함께하는 모습을 본 저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었습니다. 분노요? 아뇨, 그건 아니었습니다. 학교에서 그녀가 다른 남자아이들과 잡담을 나누는 광경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때는 분명히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었습니다.
그럼 뭘까요? 당시의 저는 몰랐었습니다. 남자가 등 뒤에 포장된 무언가를 숨긴 채 여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수줍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여자도 당황해서 여기저기 딴청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저도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괜히 주변을 살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왔습니다. 나무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다리에서 힘을 살짝만 풀어도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어지러워졌습니다. 뜨겁게 빛을 내려 보내던 태양은 지구의 구름에 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태양이 보고 싶었습니다. 다리가 떨렸습니다. 그녀는 그와 아무런 대화도 나누고 있지 않았습니다. 구겨진 옷깃 사이에 그늘이 짙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이 거추장스러웠습니다. 눈에 근접하게 흐른 땀은 또르르 굴러가다 땅을 향해 힘없이 몸을 던졌습니다. 머리를 얻어맞은 듯이 눈앞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심장이 쿵쾅하고 뛰는 소리는 목과 팔과 머리를 타고 들렸습니다. 느껴졌습니다. 모든 게 떨리는 느낌에 한숨도 내쉴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게 무거워진 느낌에 눈꺼풀을 드는 일조차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눈을 뜨는 일은 포기했습니다. 그 당시엔 제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몰랐었습니다. 단지 그들을 지나치려 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대화를 하는 지 들을 수 있는 거리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호흡조차 멈춰버릴 것 같았습니다. 잠시 그녀를 봤습니다. 점점 더 심장이 박차게 뛰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뛸까 했었습니다. 더 이상 보고 있으면 심장이 먼저 달아나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습니다. 구원을 바라듯이 조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지나가려던 저를 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눈치 채지 못했었습니다. 저 외에 움직이고 있을 사람은 없을 텐데, 옆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삽시간에 갖게 된 온갖 상상들을 떨쳐내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숨을 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두 번 들렸습니다. 그녀는 다행이라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억지웃음이었습니다. 잠시만 더 그런 상태로 있었다면 울어버렸을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보고 흔들던 손은 금방 멎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그는 멍하니 있다가 저를 보고 쓰게 웃었습니다. 반가워하는 모습으론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남은 한 한숨의 주인공은 그였습니다. 그 이외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두 손을 뒤로 진 채 어설프게 웃었습니다. 저도 맞아 웃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표정을 찡그렸습니다.
“공부는 잘 되어가니?”
그녀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고등학생 3학년끼리 흔히 오가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제되던 의무는 당연한 느낌이 들었었습니다. 그래도 그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잔인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저는 황홀감에 젖어버렸습니다. 신과 부모님께 그토록 간단히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손을 잡진 않았지만, 귀갓길을 함께하는 기분은 환상적이었습니다. 그 누구나 할 경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곤 아까 느낀, 분노가 아닌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건 질투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깨닫고 난 후에 불어오는 뜨거운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또 몰랐습니다. 개인이 감당하기에 너무 큰 그것을, 벽을 둘러쳐 버린 제가 알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막막해진 느낌은 저에게 분노 또한 주었습니다.
셋이서 아무 말도 없이 걷기를 몇 분. 그러다가 그는 떠났습니다.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애정은 타인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그와 함께 떠났습니다. 저도 그에게 억지웃음을 지었고, 그녀는 그가 사라지자 다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은 정리되었습니다.
저는 대강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후, 다행이다. 고마워. 조금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그녀는 꽤 고마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꽤 큰 봉변이라도 당했을 것이라는 말투였습니다. 힘든 듯이 웃기에 잠시 가슴이 설렜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억에서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괜찮아. 그냥 지나가던 길인데, 뭐. 그나저나, D가 뭐라고 하던 거야?”
대충 알 것 같았습니다. 그의 얼굴에선 제가 거울을 볼 때 발견할 수 있었던 수줍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닮은 감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나는 봄의 향기는 어찌할 수 없이 풍겼고, 저에겐 익숙한 냄새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맞췄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머쓱하게 웃었습니다.
“아 맞다, 내일 시간표가 어떻게 되더라?”
그녀는 평소처럼 웃으려고 했습니다. 화제를 전환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약간 말을 더듬기도 했습니다. 얼굴을 보니 아직 붉었습니다. 이미 다 알았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난 ‘야다’의 ‘그대는 모를겁니다’라는 노래를 좋아해. 어째서인지 알아?”
평소 해본 적 없는 노래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저는 사랑노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감동한번 해본 적 없는 그 노래는 이미 저의 노래와 다름없었습니다. 머릿속을 흘러가는 가사가 저에게 눈물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뜬금없는 저의 말에 그녀는 모르겠다는 듯이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나의 그대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야. 작년까지는 나도 몰랐었지만, 이제 확실해진 내 감정을 그대는 모르고 있지. 이렇게 확실하게 보일 때까지 나는 상상조차 못했었어. 장담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그녀가 질문을 하려 했지만, 제가 계속해서 말을 해서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확실해. 동류는 서로를 알아본다지. D는 K,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건 너도 알 거야. 그가 등 뒤에 감추려 했던 선물상자를 너는 봤을 거야. 보지 못한 척을 했을 거야. 못 봤다고 말한다면, 이렇게 가르쳐 줬으니 알게 되었을 거야. 있잖아. 사람들이 어째서 답을 요구하는지 알지? 과학이 어떤 식으로 발전했는지 말이야. 질문에 맞는 답을 구하고, 그것에서 또 답을 구한거지.”
전 타이르듯이 말을 시작했습니다. 역시 그녀에겐 뜬금없을 뿐입니다. 사실 미칠 것 같은 것은 저였습니다. 설교를 듣고 싶은 사람은 저였습니다. 그녀는 5분 전 그의 앞에 있었을 때보다 더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째서 사랑을 그토록 안쓰럽게 노래하는지 알아? 상대에게 그토록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노래하는 거지. 사람은 어떤 행동에 대한 응답을 바라기 마련이야. 상대가 답을 모른다면, 아는 상대를 찾거나, 내가 답을 내는 거지. 그가 상대를 사랑하는데 상대가 싫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답은 구해진 거지. 하지만 말이야…….”
잠시 쉬었습니다. 겁이 났었습니다. 6분 전 그가 하던 말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목이 타올랐습니다. 이마에서 흘러 눈을 거쳐 입으로 들어간 땀은, 낯설지 않았음에도 낯선 맛이었습니다. 눈물을 흉내 낸 땀 앞에서 눈물은 부끄러워 고개를 내밀지 못했었습니다. 분명 눈물은 처음으로 정체를 알아낸 감정을 보곤 당황하고 있었겠지요.
“D의 고백에 네가 대답하지 않으면, 그것만큼 잔인한 일은 없지 않을까. 그건 D에게만 잔인한 일이 아냐. 너도 불분명하게 뚝 끊어버린 사랑에 고심할 거야. 그렇게 불편하게 끊어져버린 관계는 친구로도 회복할 수 없지 않아? 이렇게 아픈 채로만 끝낼 수는 없잖아. 고민할 시간을 달라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을 거야. D는 기다려줄 수 있었을 거야. 네가 싫다면 싫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내면 돼. 좋다면 좋다고 말하면 돼. 적어도 너와 내가 알던 D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남자야.”
“그, 자, 잠깐만……. 난 갑자기 들어서, 좀 당황해서, 그러니까…….”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녀에게 저는 MP3와 이어폰을 빌려주었습니다.
“너희 둘은 어울려. 분명 행복할 수 있겠지. 네가 싫다면 싫다 그래. D는 일주일 안에 실연의 상처 따윈 떨쳐낼 수 있겠지.”
그러면 슬퍼하는 너를 내가 만나러 가겠어. 저는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커져버린 감정의 연료로 삼켜버렸습니다. 저는 간단히 단정지어버렸습니다. 책으로만 봤던 이야기를 해버렸습니다. 그녀는 아직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떨 것 같이 어깨에 힘이 빠져있었습니다. 곧 울 것같이 추위에 떠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녀를 따스하게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할은 일단 남에게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저로부터 행복해야만 그 행복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독선적인 생각 따윈 하지 않았습니다. 그 둘이 어울린다는 말은 진심이었고, 그렇기에 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지만, 저는 가슴에서 흘러넘치려 하는 감정을 안고 도망쳤습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고민하며 걷고 있는 그녀를 보았습니다. 노래를 듣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랑노래를 불렀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들었지만, 그건 제 노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집에 들어갔습니다. 한 가지 사실이 너무 명확해진 나머지 다른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들르면 일단 화장실부터 가겠다던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저녁을 먹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습니다. 넘쳐나는 감정의 색을 진심으로 마주할 수 있었기에, 허기짐을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그 뚜렷한 사실을 정리하고 싶었기에, 저는 메모장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아낸 사실을 써내려갔습니다.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흘러넘치는 이 감정을 늦게 알아차린 제가 미칠 정도로 미웠습니다. 그래서 슬펐습니다. 손에 흐르는 땀을 닦지 않은 채 떨어뜨린 연필을 다시 잡았습니다.
-그들이 우울증에 걸리는 이유를 알았다. 우울하지 않으면 이 슬픔이 어딜 향해 갈 수 있단 말인가. 슬픔이 어디에 호소할 수 있을까? 그들이 폭식하는 이유를 알겠다. 이렇게 남의 감정이 고픈데, 어떤 것이라도 채워 넣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굶어죽을 듯이 슬픔만 나와 가슴을 쥐어짜는데. 당장 채울 방법이 없는데. 보통 먹는 걸로는 그 감정의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을 것인데. 그들이 실어증에 걸리는 이유를 알겠다. 비어버린 심장에서 나오는 말은 슬픔뿐이기 때문이다. 슬픔만을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슬픔에 놀라 멈춘 심장이 다시 뛰기 전까지 슬픔을 자기 안에 가둬둘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슬픔은 남을 우울하게만 할 뿐이기 때문이고, 남이 말로 표현한 슬픔을 제대로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로 어찌하여 사람들이 감정을 노래했는지 알겠다. 이렇게 소중한 감정인데, 혼자 안고 있으면 흘러넘치는데, 자기 혼자만 감싸고 있으면 이렇게도 버거운데. 혼자 잡아두고 보내지 않으면 썩어 자신도 죽어버릴 텐데.
미친 듯이 써내리다가 손에 쥐가 나서 잠시 풀어줬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썼습니다.
-이 감정을 이렇게 부른다는 사실을 몰랐다. 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감정을 착각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픈데, 어느 누가 이것을 가장 따스한 감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나. 남이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이렇게 요동치는 감정을 어찌 다스릴 수 있겠는가. 혼자 버티면 분명 삼켜져버릴 것이다.
-그래도 이것은 알아차리면 너무나도 포근한 것이다. 누구나가 노래한다. 그것을 너무나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감한다. 그들도 그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르던 것은 나뿐이 아니었을까? 너무 부끄럽다. 그래도 이제나마 알아서 다행이다.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몸을 사렸다. 지금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이 따스함이 저 냉기에 식어버리면 그만큼 냉혹한 일이 없을 것이다.

어딜 갔었느냐고요? 죄송합니다, 샤워 좀 하고 왔습니다. 물론 따듯한 물에 몸을 맡기기도 했었습니다. 몸 안에 있던 외로움이 위안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왜 지금 씻느냐고요? 하긴, 좀 늦긴 했군요. 그래도 아직 밤은 덥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하다 보니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도 있어서 정리도 할 겸 씻었습니다.
아, 벌써 늦었네요. 슬슬 먼저 자러 가보겠습니다. 끝까지 들어주신 분. 감사드리고요, 다음 기회에 또 뵙길 바랍니다.

그렇게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 중요한 존재의 이름을 말입니다.
가슴에 항상 담아두고서도 벽으로 둘러쳐 욕망으로 불렀던 그 이름을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제 알아갑니다. 저와 당신을 모두 품어내는 따듯함을.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 소중한 경험은 노래를 부르며 영원히 제 속에 각인시킬 것입니다. 뼈에 새긴 감정을 또다시 다른 것과 혼동하지 않기 위해, 먼저 알아갈 것입니다. 경험하지 않아 이해하지 못한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제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미 벽은 없으니, 내일 학교에서 그녀에게 인사라도 건네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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