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술을 언제 처음 마셨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끔찍한 두통을 느끼며 24시간 술집을 문을 비틀거리는 움직임과 함께 걸어나왔다.
아직 덜 깬 술 탓인지는 몰라도 주변 여기저기에서는 시간 보호군이라 불리어지는 초월적 군사조직의 구성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 치들이 내 마음 속에 품어둔 계획을 알 리 없겠지만 순간적으로 나는 불안해졌고 제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먼저 그들의 정체를 이야기하자면 그 명칭은 너무나 간단하게도 그냥 시간 보호군이었다.
그들은 시공 연속체의 연속적 붕괴와 전 우주의 종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재앙을 막기 위해, 그리고 인류의 ‘오리지널’ 역사선과 시공간선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영원의 군사조직이라고 자신들을 설명했다.
타임 슬립 현상이라는 괴이한 자연 재해로 인해 벌어지는 역사 개변을 방지하기 위해 시공 여기저기를 넘나들며 무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하는데 내가 그렇게 자세히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걔네들이 여기에 왔냐고?
내가 태어난 후 9번째 생일이 막 하루 지났을 때 도착한 그들이 말하길, 이 시공간대가 가장 중요한 몇몇 시공간대와 연결해주는 타임 홀 생성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는 것이다.
다른 시공간대에서는 안 나타나는 몇몇 핵심 타임 홀이 여기서만 나타난다나?
결국 그들은 은밀하게 활동하던 것에 특별히 벗어나 우리들 앞에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협력을 요청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시간 보호군의 출현은 사람들 모두에게 크나 큰 충격과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빈약한 무장에, 제대로 된 전술 전략은커녕 이 세계를 재건설한 선구자들이 남긴 허술한 교범만 계속 훈련한 군대가 소집되었고 정치가들은 격렬한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우리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향유하고 자신들의 것이라 생각하던 시간이 누군가의 손에 관리된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알 수 없는 불쾌감을 가져다 준 것이다.
결국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구호도 생겨났다.
우리의 시간은 우리의 것이다!
시간 보호군은 이 모든 반발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이 세계를 이끄는 고위 인사들과 협상을 했다.
사람들의 불만은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시간 보호군이 요구한 몇 가지(땅의 임대, 군사 기지 구축, 모병 및 훈련 활동 등등)는 그들이 우리들에게 그에 대한 대가로 제시한 것과 비교할 때 꽤나 사소해보였다.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물론 종종 뼈저리게 체감할 정도로 나빠질 때도 분명 있다고 아버지는 이야기했다) 않게 흘러가던 우리 사회는 순식간에 윤택한 경제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황금기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시간 보호군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지 않을까?


처음에는 분명 역사적 연구를 위한 학술적 의미였다.
그리고 누군가가(아마 방송국 사람이었겠지만) 이 역사 기록이라는 것이 매우 뛰어난 엔터테이먼트적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크나큰 문화적 충격과 함께 깨달았다.
역사 기록이 우리들에게 방송되기 전까지 TV와 쌍방향 전자통신 네트워크에서 서비스되던 프로그램들은 시시하기 짝이 없던 것이었다.
시간 보호군 역시 이 역사 기록이라는 것이 자신들의 이미지 및 긍정적 여론 구축에 있어 좋은 역할을 해줌을 확실히 깨달았다.
곧 무궁무진한 역사 기록이 다양한 형태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각 방송국의 실권자들은 가장 인기 있는 역사 기록의 한 부분, 그리고 가장 많은 방송권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애를 써댔다.
우리들은 전혀 알 수 없었던 과거의 기억들은 읽을거리와 눈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는 흑백과 영상 기록물, 그리고 실제 사건을 연속된 그림으로 모방해내 기록한 특이한 기록물 등등.
나 역시 어렸을 적에 우스꽝스러운 박쥐 복장을 걸친 한 남자가 악당들을 무찌르는 기록물을 아동용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분명 과거에 그 기록을 자체적으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축약, 검열한 저연령용 재현 기록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내가 나중에 좀 더 크고 난 후 극장에서 본 그 박쥐 남자의 기록은 아주 어두우면서도 폭력적이었고, 또 음울한 매력이 넘치는 놀라운 기록물이었기 때문이다.
뭐, 크게 상관은 없는 문제였다.
시간 보호군이 제공해주는 역사 기록물은 이제는 거의 전 세계적 영향력을 끼치는 막강한 사업체로 발전해 있었다.
우리들은 그 모든 것이 없어서는 더 이상 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시간 보호군이 역사 기록물을 제공해주기 전에 공공연하게 이야기되던 우리들의 원천적 권리에 대한 박탈 논쟁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 아무리 무모하고 급진적 정치인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감히 시민들이 좋아하는 그 모든 것들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정치인들 역시 그 모든 역사 기록물에 푹 빠져들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시간 보호군이 혹시나 영상 기록물에 대한 제공을 중단하면 어쩌려고?
친 시간 보호군 정책을 펼치는 정치인이 인기를 끄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시민들 역시 역사 기록물을 제공해주는 시간 보호군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호의적 감정을 품게 되었다.
누군가가 이렇게 주장하기는 했다. 이 모든 기록물이 시간 보호군에서 만들어낸 가짜라는 이야기.
솔직히 우리들은 시간 보호군이 제공해주는 그 기록물들을 빼고는 과거를 알 수는 없었으니 그러한 의구심이 드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우리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주 까마득한 옛날에 이 세계를 구축한 선각자들의 옹알대는 것에 가까운 일부 음성 기록과 아주 조금 남아있는 금속 조각들이었다.
나머지는 폐허에서 새로운 유토피아를 구축할 때 많은 돌덩어리들과 함께 잡동사니로 치부되어 아주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 자유 의지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라 해도, 그 아무리 놀라운 예술적 성취를 이룩해낸 예술가라 하더라도 이제는 아무런 주목을 대중으로부터 받지 못했다.
그 모든 경탄은 역사 기록물들이 대중에게 선사하는 황홀한 쾌락에는 전혀 비교할 수 없었다.
정치인들과 의회 및 일부 부처에서만 나름대로 그들을 포상해주고 원호해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들은 일반인들로부터의 지지와 환호를 잃어버렸다.
연예 산업은 종말 해버렸다. 이제 그들은 얼마 안 되는(그리고 점차 사라져가는) 노인 팬들에 의지하거나 역사 기록물을 모방하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역사 기록물은 우리의 모든 일상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가장 대중적이면서 인기 있는 기록물의 주인공들이 입는 패션, 그들이 먹는 음식의 모양, 헤어 스타일.
그리고 그 독특한 언어에 심취하여 일상 생활에 섞어 사용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었다.


나는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의 첩보원의 기록물을 개인적으로 좋아했다. 그는 놀랍게도 과거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 과대 망상적 인물이나 집단으로부터 몇 번이나 세계를 구한 영웅 중에 영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놀랍도록 푸르른 하늘에 나는 어두운 입체 상영관에 앉은 채 시원한 공기와 쾌적한 좌석의 느낌을 만끽하며 세 번째로 얼굴이 바뀐 본드(제임스 본드의 얼굴이 영상 기록물에 따라 다른 이유로는 정체 노출을 막기 위한 정기적 성형술과 007과 더불어 제임스 본드라는 전설적 코드네임을 계승한 일종의 일대기라고 보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의 활약상에 푹 빠져있었다.
생각해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과거의 인류가 망쳐놓은 폐허 아래 새롭게 일어난 우리들 신인류는 이 행성의 문명을 그 자신들의 손으로 망쳐버린(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과거의 망령에 심취해 있었다.
머나먼 과거에서 온, 예정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젊어진 채로 당도한 손님이 은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타워 구조물의 한쪽 면이 비추는 모니터에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날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일반인들에게 최초로 공개된 역사 기록물이 극장에서 상영된 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어린 마음에 신나하며 따라갔던 때.
그리고 우리들 모두에게 큰 문화적 충격을 안겨준 그 역사 기록물의 화려한 영상 속에 푹 빠져들었을 때 나는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혔다.
이 모든 광풍이 한낱 유행에 지나지 않으며 곧 수그러들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람은 역사 기록물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를 늘어놓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역사 기록물을 제공해주는 시간 보호군은 내가 생각하기에 상당히 교활했다. 그들은 무궁무진한 기록물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아주 조금씩, 감질맛 나는 것과 같이 내놓고 있었다.
시간 보호군이 사람들의 심리와 취향적 차이 및 공통점을 놀랍도록 상세히 꿰뚫어보고 있음에는 분명했다.


과거의 역사 기록물이 보여주는 꽤나 지저분하고 혼돈스러운 사회 구조상은 우리들 모두에게 신선한 재미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들의 세계는 왜 멸망했는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쑥대밭이 된 폐허 아래 소수의 생존자들이 다시 문명을 재건해낸 것에 출발했다.
그 탓인지 우리들은 항상 서로 협력하고 또 도와주었다. 그렇게 깨끗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사 기록물이 보여주는 사회상과 비교하면 상당히 밝게 빛나는 순수하고 지루한 세계에서 우리는 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고 역사 기록물을 접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희석되고 붕괴되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이른바 유토피아에 가까운 사회에 여전히 살고 있었다.
피와 살이 튀기는 끔찍한 대규모 전쟁은 전혀 모르고 살았던 우리들은 과거의 역사가 보여준 그 피 튀기는 전쟁의 현장에 열광해댔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조금씩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은 최초의 차가움과 굳건함을 잃은 채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회색빛 복장의 사내가 뭔가 길쭉한 막대기를 겨눈 채 5, 6명은 족히 될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얼룩덜룩한 초록빛 차림의 그들은 절망에 찬 표정으로 힘없이 대열을 이룬 채 걸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주 가볍게 혀를 차며 그 모든 광경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 장면을 이해하게 된 것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나서였다. 그리고 나는 나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그 장면을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목도하게 되었다.
무모하게 역사를 바꾸려다 시간 보호군에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힌 채 강제로 원래의 곳으로 송환되는 과거의 군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영상 기록물에서 보던 과거의 세계, 과거의 사람들의 모습과 비교할 때 그 분위기라던가 현실성에 있어 큰 차이가 있음을.
하지만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과거의 군인들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범죄자이자 패배자들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곧 그들에게서 관심을 거두어버렸다.
시간 보호군에 제공해주는 영상 기록물과 더불어 그 모습은 곧 우리들에게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과거의 사람들은 대단했다.
태양계를 벗어나 외계 지성체와 접촉하기도 했고 공간 이동을 통해 식민지까지 만든 것 같다.
특히나 사이버트론이라는 행성의 기계 생명체들이 지구에서 벌인 그들만의 전쟁 이야기는 모두를 경악시킬 정도였다.
우리들은 이제 겨우 우주 정거장에 달 식민지 건설 정도였다. 과거의 조상들이 이룩한 찬란한 업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종종 맥이 빠지게 만들었다.
이미 옛날에 이룩한 일을 왜 우리가 하릴없이 애써서 따라가야 되는 것이냐?
발전은 정체되고 있었다.


나는 화가 났다. 너무나 화가 났다.
지금까지 쓰이던 동력 에너지 리액터보다 훨씬 더 진보하고 더 발전된 발견이었다.
모두가 놀랄 발명이었다.
물론 과학자들은 놀랐다. 정부 기관에서는 크나큰 칭찬과 함께 금빛으로 반짝이는, 과학을 상징하는 여신 모양의 트로피를 나에게 선사해주었다.
나에게 직접 그 영광의 여신상을 건네준 과학부 장관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만든 신개념 에너지 동력로. 예전에 역사 기록물에서 그 비슷한 것을 봤네. 역시 그걸 보고 영감을 얻은 것인가? 축하하네. 잊혀진 과거의 유산을 다시 밝혀냈군. 하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손아귀에 쥐어진 여신상은 입가에 그 뜻을 알 수 없는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기술은 곧 일반에게 적용될 것이다. 이제 모든 시민들은 에너지의 부족으로 불편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고안해낸 이 에너지 동력로 몇 기가 아주 정밀한 이론에 근거한 부지에 설치되고 에너지 전송망이 완벽하게 구축만 된다면 이제 우리들은 더욱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아무도 환호해주지 않았다.
그저 내 주변의 아는 사람들, 나와 비슷한 직업의 이들만이 축하해주고 이 발견에 기뻐해주었을 뿐.
그건 내 생일날 축하해주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이 역사적 발견과 업적을 위해 동료들이 열어준 파티가 끝난 텅 빈 나의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생각했다.
이건 마치 생일 파티와 다를 바 없다고.


시간 보호군은 발전된 과학 기술 일부 역시 우리들에게 전해주었다.
물론 전부 다 전해주지는 않았고 아주 약간 발전한 수준의 이론과 완성품 등을 자신들의 자체적 기준에 따라 골라내어 비정기적으로 전해주는 것뿐이었다.
대부분의 협력에 대한 대가는 역사 기록물과 더불어 보다 물질적 가치를 가진 것들이었다.
미래의 어딘가에서 채굴해온 귀금속과 자원들.
결국 우리 신인류의 발전은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었다. 이 시공간대가 시간 보호군이 절대 알려주지 않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힘으로 발전을 이룩해야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자유의지로 미래로 향하는 토대 하나를 완성해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에게 환호해주지 않았다.


나는 프로토타입 동력로에서 핵심 구동 장치에 해당하는 결정체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푸른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 파동을 담고 있는 결정체.
나는 그것을 황홀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것이 폭발한다면,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폭발한다면 사람들은 나의 업적을 알아주겠지?


멋도 모르고 까불대던 청소년기에 새롭게 개발해낸 생명 공학 기술로 식량 생산에 있어 놀라운 업적을 이룩한 과학자 한 명이 자살했다.
물론 식량 생산에 있어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업적을 몰라주었다.
식량의 경우 시간 보호군이 시설 대여 및 협력에 대한 대가로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 그 과학자를 비웃었다. 유서에는 허무하고 외롭다는 문장 하나가 적혀있었다.
친구들과 철없이 낄낄 대던 그 당시의 나는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정신 각성제를 마구잡이로 복용하고 폭발이 난무하는 과거의 전쟁 기록물이 선사하는 ‘죽여주는’ 광경에 푹 빠져들었다.
시간 보호군이 우리들에게 식량 공급을 점진적으로 축소하여 궁극적으로는 중단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 이유로 시간 보호군은 우리들이 대량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한 점을 들었다.
우리 모두는 수긍했다. 시간 보호군은 이제는 우리들이 썩어 빠져나갈 정도로 만들어낼 수 있는 무가치한 식량 대신 다른 것을 제공해주었다.
모두는 기뻐하며 시간 보호군이 제공해준 영상 기록물을 보러 극장으로 가거나 집으로 향했다.


서점에는 과거의 유물들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해 써댄 결과물들이 온 서가를 메우고 있었다.
몇몇 전문서적과 개인 에세이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과거의 기록에 그 바탕을 두고 있거나 직간접적을 영향을 받고 있었다.
시간 보호군은 너무 발전된 과학 기술을 전해주지 않는 이유가 우리들의 자체적 발전을 저해할 가능성과 아무리 필요불가결하며 이 시공간대에 불필요한 영향과 변화를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써낸 과학 저술은 사람들이 잘 보지도 못하는 맨 아래에 꽂힌 채 푸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미 시간 보호군은 우리들에게 큰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았던가?
과거에 열광하는 미래의 인류를!
과거에 패배감을 느끼는 미래의 물리학자를 만들어냈으니!


오후의 나른함을 즐기며 나는 야외 카페에 홀로 앉아있었다.
저 멀리서 거대한 무언가가 보인 것은 불성실한 종업원이 민트커피가 아닌 블랙커피를 갖다 주었을 때였다.
카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탄성과 함께 그 거대한 존재를 쳐다보았다.
나 역시 그것을 쳐다보았다. 인간을 흉내 낸 거대한 병기가 두 눈을 붉게 빛나며 일어서고 있었다.
그 거대한 기계 노예의 양손에는 철없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고정된 채 기쁨의 함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장식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것은 그 모습도 당당하게 서서 금속 특유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멋지군.”

아직 초짜 연구원 시절이던 나는 기지 개방 행사라고 추정되는 시간 보호군의 그 특별 이벤트를 아주 잠시 쳐다보았다.
사람의 얼굴에 해당하는 부분이 검고 굵은 연속된 수직선으로 채워진 그것의 두 눈과 순간적으로 마주쳤을 때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곧 나는 흥미를 거두고 새로 나온 아르센 뤼팽의 역사 기록물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표지에 그려진 아름다운 미녀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초록빛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았다.
정확히는 그 목적을 분명히 한 채 걸어 나가고 있었다.
분명 지금 거울을 본다면 내 얼굴은 아주 엉망진창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나 자신조차 입에서 풍기는 그 끔찍한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폭염으로 모두에게 불쾌감을 안겨다주었던 유년기의 여름이 생각났다.
이제 12살이 되었던 나는 남몰래 마음을 품고 있던 안경 쓴 여자아이와 함께 역사 기록물을 보러 갔다.
영화가 끝나고 돌아올 때 그녀는 수줍은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우리들 앞에는 흉흉하게 으르렁거리며 짐승의 잔혹한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야생 짐승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짐승이 무슨 종류의 녀석인지 잘 모를 노릇이었다.
한동안 괴물이라 생각하다가 조금 머리가 굳은 후 야생 들개라고 생각했지만 그 어떤 개도 그 때 본 그것과는 닮지 않았었다.
하여간 그 짐승이 막 우리들에게 달려들 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안도하며 나는 아주 살짝 눈을 떴다.
누군가가 그 짐승을 아주 간단하게 제압한 채 우리들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봐도 정말 잘생겼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 준수한 외모를 지닌 그 청년은 정말 잘 어울리는 어두운 청색 머리카락을 가볍게 휘날리며 다가왔다.
조금 길다싶은 앞머리 때문에 눈동자가 보일듯 말듯 했지만 그 점이 더 매력적이었다.
그 청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얘들아, 괜찮니?”

그의 따뜻하고 큰 손바닥이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 나는 결국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시간 보호군이 종종 대와 개방 행사로 애용하던 기지의 철조망 앞에 나는 서있었다.
로봇을 처음 봤던 그 기지였다.
나는 연구실에서 몰래 챙겨온 에너존 크리스탈을 떨리는 손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왠만한 충격에는 별 문제 없지만 아주 강한 충격을 받으면 그 즉시 크리스탈 안에 내재된 에너지를 방사하면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거의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위험한 물건.
보다 안전하게 처리된 물건을 가져올까 잠시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위력이 줄어들었다.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이건 모두 시간 보호군의 잘못이었다.
너희들 때문에 나는 제대로 된 평가와 사람들의 찬사를 잃어버렸어.
나는 이를 악물며 에너존 크리스탈을 힘껏 던질 준비를 했다.
분명 이 멋진 녀석은 기지의 아주 일부나마 폭발로 쑥대밭을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곧 출동한 시간 보호군에 의해 체포당하겠지.
상관없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온갖 매체를 통해 시간 보호군에게 감히 테러를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자로 알려져도 상관없었다.
덩달아 내가 이룩한 위대하고 또 위대한 업적도 알려지면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이건 테러가 아니었다. 나는 주저하는 마음을 다시 진정시키기 위해 나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잃어버린 나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 뿐.
나는 사건 후 나에게 벌어질 모든 것들을 상상해보았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죄송하지만 체포되셔야겠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
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뭔가 허전한 느낌.
맙소사! 손 안에 있던 에너존 크리스탈이 온데간데 사라져있었다.

“이...이건 대체!”

내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내지를 때 옆구리를 통해 큰 충격이 전해졌다.
위 아래가 뒤집히는가 싶더니 나는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채 제압당해있었다.
아직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나에게 잔인한 절망감을 안겨주는 잿빛 군복만큼은 알아 볼 수 있었다.
시간 보호군!

“안 돼....안 돼! 오, 신이시여!”

나는 절규했다.
아직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시간 보호군의 군인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거의 울부짖음에 가깝게 필사적으로 질문해댔다.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가에 대해.
미래의 기록을 보고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체포한 것이냐고.
군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 목소리에서 절망과 함께 그가 왜인지는 몰라도 애매하게 웃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건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당신은 우리들에게 있어 꽤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입니다. 당신이 다루고 있는 연구라던가 최근에 이룩해낸 업적이라던가. 이러한 점들은 우리들의 깊은 관심을 가지기에 충분한 것이지요.”

나는 거의 눈물을 흘리며 미친 듯이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저 전지전능한 시간 보호군님은 이 하찮은 나를 인정해주는 것이로군!

“너무 자신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아주 약간의 안정과 심리적 치료를 거친다면 당신에게 충분한 도움이 될 겁니다.”

그 군인은 나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두 손은 단단한 무언가에 구속당해있었다.
나를 체포한 시간 보호군의 군인은 여전히 이런저런 말을 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오, 맙소사.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렇게 큰 처벌은 받지 않을 겁니다.”

나는 아직도 그 날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눈을 감지 않아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 날.
우리들을 짐승으로부터 구해준 그의 얼굴을 처음 본 날.
그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곧 울음을 터뜨릴 내가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그의 푸른 눈동자가 빛나던 그 순간의 추억을.
그 푸른 눈동자가 지금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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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 단편 죽음, 환상 가리새 2009.08.0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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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 단편 방구석, 버려진 검은색 과속딱지들 Vino 2009.08.05 0
1401 단편 이런 변이 있나!1 clancy 2009.08.03 0
1400 단편 죽음은 비와 함께 찾아온다 2009.08.02 0
1399 단편 김 진사네 셋째 딸 2009.07.31 0
1398 단편 잉여의 입맞춤 dcdc 2009.07.31 0
1397 단편 이혼송사3 clancy 2009.07.31 0
1396 단편 하나가 둘이다12 dcdc 2009.07.28 0
1395 단편 토크쇼4 한켈 2009.07.2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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