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연구소에 내에 마련된 술집은 언제나 그렇듯이 흥청거리고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불규칙적인 강렬한 음이 섞인 노래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이들의 목소리와 함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음?”

과실주로 가볍게 휴식 시간을 보내려던 카이라 소어 수석 연구원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한 채 조용히 호박 빛 액체만을 음미하는 헤레티네 연구 주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구 주임의 눈동자는 멍하게 물든 채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것 같은 상념에 깊숙이 빠져있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다가가 말을 걸고 싶은 기분이 든 그는 한 손에는 붉은 빛으로 찰랑이는 액체가 담긴 유리잔을 든 채 그 테이블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혼자 술을 즐기시나 보군요?

헤레티네 연구 주임은 깊고 깊게 뻗어나가던 자신의 생각을 일순간에 깨뜨린 그 무례한 누군가를 아주 살짝 노려보며 그 놈이 어떤 녀석인지 잠시 고민했다.
곧 자신의 앞에 선 채 싱글벙글 웃어대는 멍청한 녀석이 종종 기술 실증기 제작 및 연구 협력 같은 업무상의 이유로 만난 적이 있는 카이라 소어 수석 연구원임을 떠올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했다.

“카이라 소어 수석 연구원이로군. 흠, 무슨 일인가?”

헤레티네 연구 주임은 예의상 그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뜻하는 손동작을 취했고 수석 연구원은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아하하, 그게 아무래도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는 엄지손가락 마디만큼 남아있는 호박 빛 액체를 뒤흔들며 퉁명스레 말했다.

“자네 말대로 아주 깊고 깊은 공상과 상념 속에서 고차원적인 정신적 유희를 행하고 있었지. 그걸 알고서 나에게 찾아왔는가?”

연구 주임이 낮게 그르렁대는 소음이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카이라 소어 수석 연구원은 싱긋 웃으며 과실주를 한 모금 마셨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혹시 저에게도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연구 주임님을 사로잡은 그 고차원 정신 유희를 저도 조금이나마 함께 공유하고 싶군요.”

“흠!”

헤레티네 연구 주임은 날카로운 쇳소리를 발하며 조금은 풀어진 기분으로 생각했다.
아주 조금은 현명한 녀석 같군.

“그렇다면 내 자네에게만 특별히 설명을 해주도록 하지. 한 번 생각해보게. 우리들이 처음에는 하찮은 생명에서 출발해 이렇게 두 다리를 딛고 선 채 도구를 사용하고 지성을 가지게 된 점 말일세.”

“음, 그러니까 진화와 발달에 대한 과정 말입니까? 그에 대해서는 선조들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죠. 선조들이 노력해준 덕에 다른 야생의 짐승들을 제압할 육체와 행성을 유일무이한 지적 지배자로 거듭난 지성을 우리들은 손에 넣게 되었으니 말이죠.”

헤레티네 연구 주임은 두 손을 딱 맞부딪치면서 지적 경탄에 가득 찬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연구 주임의 입 역시 흥에 겨운 듯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맞아. 우리들은 무수한 시간의 궤적을 걸어오면서 이렇게 진화를 이룩해냈네. 그렇다면 자네는 우리들, 아니 우리들의 다음 세대들은 어떠한 형태로 진화를 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가?”

“어...음, 그 말씀은?”

카이라 소어 수석 연구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는 두 손을 번쩍 들며 학문적 열정에 찬 걸걸한 목소리로 거의 고함을 내지르듯이 외쳤다.

“궁극적 진화를 말하는 걸세! 궁극적 진화!”

다른 장소였다면 다른 이들의 주목을 단번에 휘어잡았겠지만 다행히도 술집인 탓에 그러한 불유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카이라 소어 수석 연구원은 그의 앞에 놓여진 유리잔 안의 액체 양을 대충 가늠해보며 어느 정도 취했는지 대강 추측해보았다.
결론은 아무래도 꽤 취한 것 같았다 였다.

“궁극적 진화라.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에 저희들은 더 이상 우리들은 자연적 진화를 이룩할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물론 저희들이 지식이라던가 지능은 더욱더 발전하겠지만 저희들은 두뇌 자체는 아마 그대로일 것 아닙니까? 저희들의 육체 또한 이미 더 이상 변화하기에는 더욱더 완벽한 발달 체계를 이룩해낸 것이라 봅니다만.”

그 설명에 헤레티네 연구 주임은 한쪽 입 꼬리를 올린 채 경멸이 뒤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실망이로군. 아주 실망이야.”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뒤통수를 아주 부드럽게 긁어내리며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잠시 고민해하던 그는 머리 여기저기에서 떠오른 정보들을 조합해 다시 연구 주임에게 이야기해보았다.

“음, 저희들의 육체를 보다 강력한 기계의 몸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유전적 처리를 통한 보다 발전한 인공 육체라던가 말입니다. 두뇌 또한 기계와의 조합으로 더욱더 고차원적 진화를 이룩해낼 수 있겠군요. 네, 인위적 진화라면 좀 더 여러 가지 진화의 방향을 이룩할 수는 있겠군요.”

묵묵히 카이라 소어 연구원의 말을 듣고 있던 헤레티네 연구 주임은 강렬한 웃음을 떠뜨리기 시작했다.
그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왜인지는 몰라도 약간은 오싹한 느낌을 주었다. 근처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누군가가 아주 잠깐 혀를 날름이며 노려보았다가 그 웃음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시선을 회피해 자리를 이동해버렸다.
곧 웃음을 딱 그치고 아주 담담하면서도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연구 주임이 조금은 부드럽게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자네는 자연적 진화는 이제는 끝이라고 보는군. 내 말이 맞나?”

“네, 그렇습니....”

“멍청한 소리! 아주 멍청한 소리야!”

카이라 소어 연구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말을 딱 자르며 울부짖음에 가까운 고함을 내질렀다.
헤레티네 연구 주임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아주 강하게 내려치며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자네는 이 하잘 것 없는 육체에 대해 계속 얽매이고 있군. 만약 우리들이 이 육체를 벗어 내던질 수만 있다면! 그렇기만 한다면 우리들은 신에 가까운 위치에 선 채 궁극적 지적 생명체의 형태로 우주의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지식을 탐구할 수 있을 거야!”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그제야 반쯤 취한 채 주절 주절대는 늙은 연구 주임이 하는 말의 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일명 정신 생명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직 정신이라는 무형적 요소로만 이루어진 새로운 형태! 개개인의 인격과 기억, 지식 같은 정보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나약한 육체의 제약을 받지 않은 그 궁극적 생명 형태야 말로 우리들이 이루어야할 생명 진화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는 거야! 바로 그거지! 정신 생명체의 길!”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조금은 쓰게 웃으며 남은 과실주를 한 번에 넘겼다. 입 안으로 느껴지는 달콤한 맛 아래 숨겨진 쓴 맛이 느껴졌다.
정신 생명체라. 육체를 벗어 던진 채로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궁극의 진화형이라고?
너무 허황된 면이 컸다. 오직 정신만을 지닌 채 사고하고 존재하는 생명체라.
터무니없는 이야기 같았고 또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한 와중에도 헤레티네 연구 주임은 열변을 계속 토해내고 있었다.

“정신 생명체야 말로 우리들이 목표로 해야 할 길이지! 이러한 나약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와 비교하면...아니,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진화의 정점이야. 지금이라도 그 진화의 계단을 밞아나가기 위해 정신적 수련과 명상을 모두에게 의무적으로 권유해야 할 필요성이.....”

이제는 복잡한 이론 단계에 접어들어 한참을 떠들어대던 연구 주임의 설명을 가로막은 것은 술집 내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기계 합성음이었다.

-경고! 복합 반응성 타입 리액터 시작기가 설치된 실험실 113호에서 강렬한 에너지 반응이 감지되고 있음. 리액터의 폭주 가능성이 크며 곧 폭발할 것이라 봄. 실험실 113호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모든 연구원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주길 바람. 컴퓨터로 예측한 113호의 폭발 예측 범위는 반경 35미터 정도이며 오차 범위와 미확인된 에너지성 질병까지 예측할 경우 반경 50미터까지의 이들도 대피할 것을 권고함. 폭발까지 정확히는 5분 13초가 남았다고 예축됨.-

방송이 끊기면서 모두는 충격과 공포에 빠진 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일부 술이 좀 과하게 취한 이들에게 술집 관리인이 술 깨는 약을 나눠주고 있었다.
이 술집은 실험실 113호의 반경 45미터라는 꽤나 미묘한 거리의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거의 모두는 그냥 좀 더 멀리 도망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이런 제기랄!:”

하레티네 연구 주임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생명에 위협을 느낀다기보다는 중간에 설명을 그만두게 된 것에 강한 불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떤 멍청한 놈들인지! 대체 어쩌다가 이런 머저리 같은 실수를 저지른 거야!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아주 박살을 내주지!”

연구 주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장 위의 스피커가 웅 하는 소음과 함께 다시 작동하더니 기계 합성음이 추가로 울려 퍼졌다.

-더불어 실험실 113호는 안전을 위해 자동으로 봉쇄 및 격리되었으며 폭주 사고의 원인이라 추정되기도 하는 113호실의 연구원 3명이 갇혀 있음, 모두는 이들에게 애도 및 명복을 빌어주길 바람-

무감정한 목소리의 방송이 끝나자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씁쓸한 웃음과 함께 연구 주임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주임님을 만나기도 전에 박살이 날 것 같군요.”

연구 주임은 혀를 강하게 차며 중얼거렸다.

“쯧! 멍청한 놈들!”


리액터에 내장된 3개의 에너지 결정체가 반응을 일으키며 푸른 폭발을 일으켰고 외부에 연결된 외장형 원자로가 연쇄 폭발을 일으키면서 113호실을 한순간에 뒤흔들었다..
그 폭발은 분명 치명적이고 강력했지만 연구실 통합 관리 컴퓨터 시스템이 예측한 것보다는 피해 및 폭발 범위가 낮았다.
그 강력했던 폭발 에너지의 상당수가 모두는 눈치 챌 수 없는 현상에 집중이 되었던 것이다.
폭발의 피해가 113호실에만 국한된 것임을 깨달은 연구원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이 이해할 수 없는 물리적 현상에 의아해했다.
결국 113호실에서 벌어진 불운한 사고의 희생자는 당초 실험실에 있던 3명의 연구원들뿐이었다.
그들의 영혼과 육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고 모두는 그들이 죽었음에 한 치의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니, 눈을 떴다고 생각했다.
아직 살아있는 것인가? 하지만 어떻게?
거대하게 휘몰아치는 파도와도 같이 자신과 동료들을 덮쳐오던 그 푸른 폭발을 떠올리며 그는 몸을 떨었다.
여기는 병원인가?
온 몸이 알 수 없는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정신이 흐릿했다.
그는 주변을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보았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노력하면 될 것도 같았다.
시간 감각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던 그였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분명 오랜 시간을 기울였고 결국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이라고는 흐릿한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자신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또 한 번 비명을 질러댔다.
그의 비명이 멈춘 것은 눈앞에서 보여 지는 반투명한 형상의 양 팔이 거의 녹아내리는 것에 가깝게 그 형상이 무너지는 끔찍한 모습에서였다.
이제는 더 이상 팔을 팔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의 형태를 띤 채 마치 하등 생물의 수족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 맙소사. 이건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말도 안돼.
그는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시킨 채 기괴한 형상으로 흐느적거리는 그것을 노려보았다. 손가락과 팔의 형태를 아주 세심하게 떠올리면서 그는 끝없이 중얼거렸다.
나오지 않는 헛된 목소리였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천천히 솟아나기 시작했다.
아주 좋아. 그래, 조금만 더!
천천히 솟아난 그것의 끝부분에 몇 개의 돌기가 아주 조금 부풀어 올랐다.
그 다음....그 다음은....그러니까....
그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지금 이러고 있는 거지? 나는 에너지 폭발에 휘말려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려고 했다. 혼란스러웠다
기껏 만들기 시작한 한쪽 팔이 다시 무너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대체 뭐지? 나는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반투명한 형상이었지만 마치 푸딩처럼 뭉개지는 것 같은 그것은 분명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채 그 모든 것을 쳐다보았다.
거울! 거울을 보여줘! 거울!
그는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어떤 형태로 무너져 있는 지, 아니 제대로 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 부정하고 싶은 가능성이 슬금슬금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다른 녀석들은? 다른 녀석들은?
그는 분명 에너지 폭발 사고에 휘말려 죽었다. 그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갈 수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은 전혀 알 수 없는 곳에서 무너지는 흐릿한 형상의 팔을 노려보고 있었다.
죽었지만 지금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결론은 단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아니야! 맙소사! 난 유령이 아니야! 난 저주받은 방황하는 영혼이 아니야! 오, 신이시여!
그는 허공에 시선을 돌린 채 필사적으로 외쳐댔다.
신이시여!
누군가가 절규하는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누가 있는지 전혀 신경을 쓰지도, 누군가 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누군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바삐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주변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중소 규모로 발달한 도시였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그는 도시가 보여주는 여러 가지 구성체와 풍경을 당혹스럽게 관찰하고 또 쳐다보았다.
그 모습들이...너무나 고전적이잖아?
마치 과거에 온 것 같았다. 도시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구성원들이 걸치고 있는 의복 역시 줘도 안 입을 정도로 낡은 디자인에 촌스러운 갈색으로 물든 옷이었다.
그나마 괜찮은 옷을 걸친 데다가 꽤 부유해 보이는 일행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원시적 자동차에서 내리더니 그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건 대체....
그는 자신이 허공에 떠있다는 사실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그 모든 광경들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벤치에 느긋한 자세로 앉아서 신문을 보는 누군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신문과 같은 활자 매체는 천만다행으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끈질기게 사람들 속에서 살아남은 고마운 존재들이다.
자신이 아주 정상적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벤치로 접근해 신문을 훔쳐보았다.
맙소사!
날짜와 연도를 확인한 그는 흡사 단단한 몽둥이로 머리를 강하게 강타당한 충격을 느끼며 몸을 비틀대기 시작했다.
맙소사!
그는 당혹해했다.
그냥 죽어버린 채 아무도 몰라주는 유령 비슷한 존재로 변해버린 것도 모자라 거의 10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의 과거에 내던져진 것이다.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이건 자신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특별한 지옥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는 끈적이는 젤리나 씹다가 만 껌처럼 변형된 한 때 팔이었던 형체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신이시여, 제발!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처음 봤을 때보다 더 흐릿해진 느낌이었다.
설마....설마....
햇빛마저 그대로 통과하는 반투명한 그 형체가 기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억측인지는 몰라도 그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터무니없는 생각 같았지만 지금 이 유령 비슷한 무언가로 변해버린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렇게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맙소사!
틀림없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소멸되고 있었다.
그래, 분명한 사실이야.
그는 벤치에 앉아 있는, 신문에 열중해 있는 과거의 존재를 노려보았다.
자신은 육체가 필요했다. 그는 지금 정신 자체는 분명 살아있었다.
만약, 만약에 저 놈의 뇌 속으로 들어가 그 육체를 장악할 수만 있다면!
그러면 자신은 살 수 있었다. 죽음보다 못한 이 비참한 신세에서 다시 한 번 육체를 얻어 살아갈 수 있었다.
그는 살고 싶었다.
이건 살인이 아니야.
신문에 열중해있는 그의 머리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면서 그는 끝없이 자기 합리화했다.
어차피 이 놈은 100년 전의 과거에나 존재했던, 과거에 태어났다가 과거에 죽은 과거 속의 유령이었다.
정신은 죽는다 하더라고 새로운 정신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니 엄밀히 말해 죽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흐릿한 정신은 천천히 이제는 새로운 자신의 육체로서 살아갈 그 불운한 녀석의 머리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랐지만 하리라 마음먹고 다가가니 그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마치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아주 손쉽게 되었다.
마치 신이 자신을 도와주는 것처럼 너무나 손쉽게.

“커억!”

막 신문을 다 읽고 접으려던 그는 신음성을 한 번 토해내더니 두 눈을 강하게 뜨면서 거칠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이건 말도 안 돼!
두뇌 안으로 침범한 그는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무언가 잘못됐어!
전혀 처음 보는 이들의 얼굴이 그의 정신 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인생과는 전혀 다른 기억의 파편들이 복잡기괴하게 뒤섞인 하나의 정보 덩어리로 그의 정신 여기저기로 굴러들어왔다.
크아아악!
그는 또 한 번 소리 없는 비명과 내지르며 정신을 뒤흔드는 원초적 고통에 절규했다.
누군가가 그의 눈앞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누구지? 너는 누구지?
기억에 전혀 없는 인물. 아니 이제 막 유입된 기억의 편린에서 그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기억났다.
맙소사! 오, 신이시여!
기억과 기억이 뒤섞이고 있었다. 정보와 정보가 엉망으로 뒤엉킨 채 날뛰고 있었다.
벤치 위의 누군가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코와 입에서는 붉은 피가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야수의 울부짖음보다 더한 괴성을 입에서 토해내더니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와 같은 기괴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균형을 잃고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여보! 어머니! 아버지!
타인의 정신을 집어삼킨다는 생각을 한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너무나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는 자신을 태어나게 해주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부모님들을 끊임없이 찾았다.
어렸을 때 만나 지금까지 같이 지내온 아름다운 그녀를, 인생의 반려자를 그는 필사적으로 불렀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흐릿한 모습의 존재들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틀렸어! 그 얼굴이 아니야!
그는 절규했다.
누군가가 역시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푸른 바다에 뛰어드는 누군가를 자신은 격려해주고 있었다. 머리를 쏙 내민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처음 보는 여자였다.
그런데 너무 아름다웠다.

“크아아아악!”

모래 범벅이 되어 바닥을 뒹구는 그에게 주변을 걷던 이들이 서둘러 도와주러 달려왔다.
여보! 어머니! 아버지!
그는 필사적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그의 정신을 구성하던 정보들은 기존의 정보와 뒤섞여 엉망진창이 된 채 흘러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힘내라고 응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죽여 버리겠다고 외치며 달려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정신은 점차 붕괴하고 있었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별개의 정신 두 개가 맞부딪치면서 생겨나는 것이라고는 폭풍우와 같은 끔찍한 한순간의 혼돈, 그리고 무였다.
여보! 어머니! 아버지!
전혀 새로운 인격이 태어날 아주 희박한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끔찍하게 맞물리고 결합된 그 모든 인격과 기억의 집합체들은 그 작은 희망을 찾기도 전에 모두 소멸해버렸다.

“여....”

병원으로 실려 가던 그의 입이 아주 조금 움직이다가 멈추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입술의 아주 작은 움직임을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한 생명이 끊어졌다.


여기는 어디지? 맙소사! 여기는 어디지?
그는 쉴 새 없이 외쳐댔고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뜻은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제기랄, 내가 죽은 건가?
그는 자신의 몸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흐릿하게 반짝이는 반투명한 몸체가 자신을 반겨주고 있었다.
이런 젠장!
그 흐릿한 형상은 이제는 원래의 형태라기보다는 마치 구름처럼 기기묘묘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는 고뇌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죽은 것 같기는 한데 설마하니 정말로 유령이 존재하고 자신이 유령이라는 비현실적 존재로 탈바꿈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참을 이 빌어먹을 상황에 고민하던 그는 이 유령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한 번 제대로 알아보기로 마음먹고는 차츰 눈에 들어오는 주변 광경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에!
그는 놀라 거리 여기저기를 바쁘게 걸어가는 이들의 면면을 쳐다보았다.
건물 같은 도시 형태는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문제는 전혀 다른데 있었다. 도시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모습이 전혀 처음 보는 괴상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종족의 공통적 특징인 매끄러운 녹색 빛 피부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고 창백한 흰 피부색과 누런 피부, 그리고 검게 탄 피부색을 가진 괴상한 녀석들이 골고루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얼굴도 이상하군. 구토가 날 지경이야!
머리의 윗부분에는 너나할 것 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재질의 실을 아주 풍성하게 달고 있었다.
왜 털을 머리에 일부러 달고 다니는 거지?
더군다나 얼굴 한가운데 기형적으로 솟아나있는 코하며!
역겹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들이었다.
그는 깊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살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생물에서 기원한 지적 생명체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에너지 폭발 사고에 휘말리면서 단순히 죽은 것에 그친 것 뿐만 아니라 죽으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워프한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어라, 잠깐만?
그는 자신의 가설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굳이 유령이 된 마당에 왜 신이 내 영혼을 원래 세계가 아니라 이런 더러운 놈들이 득실대는 괴상한 곳으로 보내버린 것이지? 이 세계에는 이 세계만의 유령도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의 정신은 사고하고 또 사고했다. 한참을 깊은 사고 행위에 몰두하던 그는 곧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시 재정의 내렸다.
자신은 유령에 가까운 형태이긴 해도 오컬트적 요소에 해당하는 유령은 아닌 것에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린 그는 이내 그렇다면 지금 여기 육체를 잃은 채 흐릿한 형상으로 존재하는 나는 대체 누구인가? 하는 고민에 다시 빠져들었다.
침착하자. 좋아, 나는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신봉하는 과학자의 일원이야.
그는 과학적으로 이 모든 상황을 생각해보았다. 너무나 끔찍한 실수로 인해 리액터가 폭발했고 중심부에서 가장 먼저 폭발한 에너지 결정체의 푸른 폭발이 그들을 향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달려드는 것이 떠올랐다.
그 푸른 폭발. 그 기이한 폭발이 무언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것임에 틀림없다.
차원과 차원을 초월시킬 힘이라면.....
그는 큰 충격에 휩싸인 채 다시 한 번 자신의 흐릿한 몸을 쳐다보았다.
육체는 소멸할지라도 두뇌에 깃든 정보들을 하나의 집합체로 재구성해 이동시킬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는 자신이 육체는 없지만 오직 정신만이 살아있고 그 정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붏노불사의 새로운 차원의 생명체로 거듭났음을 깨달았다.
놀랍군! 아주 놀라워!
그는 다른 녀석들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서야 이룩할 수 있는 초월적 경지를, 우연한 사고이기는 해도 그가 획득했다는 것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정신 생명체로의 급격한 진화에 곧 절망감과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영원히 살 수 있다고는 해도 이러한 상태로, 그것도 지금까지 느끼고 만지고 먹고 자는 등등의 그 모든 감각과 감정의 마음껏 느끼며 살아가던 자신이 이런 형체로 영원히, 그것도 평생을 혼자 살아가는 것은.....
그는 음울하게 생각했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지옥이 아닌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계인 중 하나가 그가 절망 비슷한 생각에 빠진 채로 우두커니 떠있는 곳을 그냥 지나갔다.
자신의 반투명한 정신체의 몸을 무심하게 통과하는 그 놈을 쳐다보던 그는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정신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정신 생명체였다. 그렇다면 다른 녀석의 육체 안으로 들어가 그 몸을 장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생각했다. 만약 육체가 있었더라면, 아니 거울이 있었더라면 얼굴에 해당하는 부분이 비릿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했음에 틀림없을 사악한 생각의 발현이었다.
어차피 이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느니 한 번 시도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나?
그는 즉각 방금 자신을 통과하고 지나간 이계인인지 외계인인지 알 수 없는 놈의 머리 속으로 달려들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지만 거의 본능에 가깝게 그 모든 것을 그는 할 수 있었다.
흥미롭군, 이것도 정신 생명체의 진화에 따른 부수적 결과물이란 말인가?
보통 때라면 구역질이 날 두뇌 덩어리의 모습과 그 주변에서 안개처럼 퍼져 있는 희뿌연 형체들이 보였다.
역시나 자신은 두뇌 속에 존재하는 정보들의 전자기적 집합체라는 것을 그는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새로운 몸을 얻으러 가볼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찝찝함이 계속 확신에 대한 의심을 품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두뇌로 침범하기 전 조금 더 주의 깊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급할 것도 없었으며 시간은 많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몇 초도 되지 않아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만약 육체가 있었더라면 이마를 탁 치며 유쾌하게 웃어댔을 노릇이었다.
그가 강탈하려는 저 두뇌에는 자신처럼 별개의 인격과 기억, 그리고 정보를 담고 있는 정신이 존재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침입했다가는 저 정신과 자신의 정신이 충돌하면서 전혀 새로운 정신체로 거듭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혼돈으로 거듭나 자아를 인식하지 못하는 백치아가 되버릴 수도 있었다.
그의 정신 생명체에 해당하는 모든 전자기적 신호들을 신경계로 침범시키기 전에 두뇌를 아주 깨끗하게 청소해줄 필요가 있었다.
망설일 필요는 전혀 없었다. 어차피 이 작자는 자신과는 유전적으로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차원의 짐승이었다.
아무리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그는 정신을 집중했다. 허공에 떠도는, 신경 세포와 같은 여러 세포들에서 느껴지는 전기 신호의 편린들을 느끼기 위해 그는 고차원적 명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시냅스에서 쉴 새 없이 피어로는 스파크들을 탐욕스럽게 쳐다보았다.
여기저기서 번쩍이며 타오르는 푸른 불꽃의 향연.
영혼이라 정의내릴 수 있는 전자기적 정신체의 실체를 그는 하나하나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생명으로, 풍성한 기억과 감정으로 타오르던 그것들은 점차 그 힘을 잃고 소멸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든 것이 깨끗하게 백지화되었다고 확신한 그는 안심하고 그의 정신 하나 하나를 두뇌로 옮기기 시작했다.
  
“흠, 흥미롭군.”

갑자기 길거리 한복판을 걷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한 30대 남성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다시 벌떡 일어나더니 양손을 차례차례 움직여보았다.
그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폈다 쥐었다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아주 흥미로워. 하하하, 성공이야! 하하하!”

기쁨의 웃음을 과장스럽게 토해내던 그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외쳤다.

“내가 다시 살아났다! 하하하!”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공기의 퀴퀴한 맛과 거리에서 느껴지는 왁자지껄한 분위기.
싸구려 향수의 냄새와 싸구려 음식의 냄새가 뒤섞인 냄새의 향연.
그는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전...그리고 지폐라.”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 살펴본 그는 신분증에 해당하는 카드를 꺼내 살펴보았다.
전혀 처음 보는 언어였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무의식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

“황...호태?”

이상한 이름이로군.
다시 지갑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그는 별 목적 없이 시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가판대에서 빵과 빵 사이에 햄과 야채를 집어넣어 파는 샌드위치라는 음식으로 대충 배를 채운 그는 서점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 세계의 문명 수준은 원래 자신의 세계와 엇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이 그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호?”

그는 서점 입구에 설치된 큼지막한 거울을 쳐다보았다.
거기에 비춰지는 자신의 새로운 육체, 그리고 새로운 얼굴이 그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괴상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로군.
서점 내부는 시원하게 냉각된 공기와 은은하게 들려오는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로 자신을 반겨주고 있었다.
그는 벽에 걸린 달력을 한 번, 그리고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돌아가는 원통형 시계를 한 번 쳐다보았다.
시간관념은 대강 비슷해보였다.
그는 서점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이 세계에 대한 정보 획득에 알맞은 백과사전 류의 서적 혹은 과학 서적을 통해 정보를 수집을 해나갔다.

“포유류 기원 생명체라. 놀랍군.”

자신들을 인류라고 정의 짓는 이 지적 생명체들의 조상은 아무래도 자신의 고향에서는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었던 원숭이 비슷한 녀석들로부터 진화된 결과물 같았다.
아무리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고는 했지만 해괴망측한데다가 굉장히 불쾌할 정도였다.

“커억!”

거의 오후 7시 정도가 되었을 때 그는 고통을 느꼈다. 처음에는 뇌를 관통하는 것 같았고 그 다음에는 몸 전체를 뒤흔드는 끔찍하고 잔인한 고통의 향연.

“제기랄! 내가...이건 대체....”

무지막지한 고통이 엄습하는데다가 몸 여기저기서는 고열로 달아올라있었다. 그 탓인지 그는 아무래도 환각을 보는 것 같았다.
마치 몸 전체가 눈부신 백색광으로 빛나는 초현실적 환각을.
팔뚝의 피부가 거칠어지면서 뿔과 같은 돌기가 서너 개 솟아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고로 잃어버리기 전의 과거 육체에 비슷한 형태로, 이 세계에서는 파충류의 발톱 형태로 변화하고 있었다.

“내...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입 안에서 날카롭게 돋아나는 무언가가 느껴지고 있었다. 혀 또한 길게 늘어나면서 끝 부분이 갈라지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그는 비명을 질렀지만 나오는 것이라고는 야만적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괴성이었다.
육체는 격렬한 유전적 변화에 대한 쇼크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이러다가는 정말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꼈다.
저 멀리서 제복을 걸친 누군가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한 손으로는 권총을 겨눈 채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한쪽 눈은 격렬한 압력으로 모세혈관이 터져나가면서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완벽한 짐승의 눈동자로 변해버린 남은 눈동자가 파충류 특유의 동공으로 그 경찰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두뇌에서 다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절대 볼 수 없는 어두컴컴한 안개의 존재가 귀, 코, 입과 같은 온갖 구멍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크...크르르르...커어어...”

두 개의 이질적 유전 인자가 뒤섞이면서 변이된 육체는 이제는 이지를 상실한 채 게거품을 뿜어내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육체를 버리고 다시 정신 생명체의 형태로 회귀한 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다가오는 그 경찰관의 머리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의 정신 집합체가 다시 한 번 두뇌에 있던 전자기 신호 등을 지워나가면서 동시에 두뇌에 다시 안착하기 시작했다.
비록 육체는 잃어버린 형태였지만 그의 정신 생명체에는 파충류 기원 지적 생명체였을 때의 정보 형칠이 분명 남아있었다.
그 정보는 그의 정신과 인간의 육체가 결합하면서 육체의 유전자 구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불완전한 변이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단지 육체와 정신의 부적합성 정도로 이러한 거부 및 쇼크 반응과 육체의 기이한 변형을 이해할 뿐이었다.

“크아아아악!”

새로운 육체로 갈아타더라도 운이 좋으면 23시간 정도가 최대한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는 끊임없이 육체와 육체를 바꿔가면서 간절히 소망했다.
제발 이번에는. 제발 이번에는!
그러나 그것은 헛된 희망이었다.
그의 모든 부분에는 그 근원적 기억이 조금씩 들어가 있었다. 그의 유전적 기억 형질을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점차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이제는 매스컴이 주목할 정도로 반은 파충류처럼 변해버려(몇몇 언론은 공룡 인간의 출현이라고 표현한)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수가 점차 많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는 그 모습에 일종의 바이러스성 질병으로 생각했고 과학자들 역시 그 점에 중점을 두고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크아아아아!”

그는 또 한 번 울부짖었다. 이번에는 결합한지 겨우 6시간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지만 발작이 일어났다.
정신 생명체의 형태로 있을 때에는 시간관념을 느낄 수 없었다. 오직 육체라는 굴레에 얽매였을 때에만 그는 하나의 지적 존재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는 너무나 순수하게 그 빛을 발하고 있는 하얀 빛에 휩싸인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손톱이 날카롭게 자라나고 있었다. 매끈한 피부가 비늘이 뒤덮인 끔찍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었다.

“새...새로운 육체가 필요해...”

그 목소리는 뱀이 사냥감을 덮쳐들 때 질러대는 괴성과 공존하며 간신히 나타났다.
어느새 입을 움직이기조차 버거워지고 있었다. 차가운 얼음처럼 빛나는 송곳니가 입술을 엉망진창으로 찢어발기며 드러나고 있었다.

“크...크케에엑...”

말끔한 회색빛 군복을 차려입은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키도 크고 놀랍도록 잘생긴 청년.
눈이 잘 안 보일정도로 앞머리가 긴 점과 머리카락 색이 어두운 청색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총알이 이마 정중앙에 박혀들었다.
그는 비웃음에 가깝게 입을 일그러뜨렸다.
이미 육체의 죽음은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정신을 두뇌에서 분리시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육체에서 너무나 절실하게 느껴지는 고통의 감각들뿐,
그는 당혹해하는 눈초리로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해보았다.
아니, 잠깐만.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했더라?
그는 혼란해했고 총을 쏜 그 정체불명의 군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 정신 생명체로의 능력은 발휘하지 못할 겁니다. 당신은 이제 육체와 동일화되었을 뿐입니다.”

그는 점차 흐려지는 의식과 통제가 안 되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느끼며 그 군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금은 살아있지만 곧 죽을 겁니다. 맙소사, 당신의 생존을 위해 이 세계의 인구를 절반 이상이나 죽여 버리다니! 정말 끔찍하군요.”

내가 이 세계의 절반 이상이나 되는 수의 지적 존재들을 죽여 버렸다고? 내가 그만큼이나 오랫동안, 그만큼이나 많은 이들의 육체를 강탈해왔단 말인가?

“아, 한 가지 더. 미안하지만 당신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너지 폭발로 발생한 타임 슬립 현상에 휘말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뿐, ”

그 마지막 말을 그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총살한 시간 보호군의 제라드 중령에게서 정말 핵심적 말 역시 듣지도 못한 채 그 모든 정신적 정보를 잃고 죽어버렸다.
그는 하나의 세계를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지경으로 몰고 갔다.
인구의 대폭적 감소.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병의 유행과 돌연한 죽음에 대한 집단적 공포, 이에 따른 내부적 갈등. 국가와 집단, 그리고 가치관의 붕괴.
세계는 결국 멸망이라는 이름의 종언을 맞이했다.
그 멸망의 잔해 아래 새로운 생명들이 지성을 얻고 태양계 제 3행성의 지배자로 거듭나 문명을 세웠다.
그렇게 하나의 생명이 끊어졌다.


그는 왜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좋았다.
마치 몸 안이 수소 같은 기체로 가득 차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그 느낌은 그에게 너무나 편안함을 안겨다주었다.
그는 푸른 폭발이 자신의 코앞까지 밀려올 때 질끈 감았던 두 눈을 아주 천천히 떠보았다.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 지내 왔던, 그리고 어쩌면 늙어 죽기 전까지 평생을 같이 지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품어온 그의 소중한 육체는 온데간데 없어져 있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흐릿하면서도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 덩어리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발전기의 폭주. 누군가의 실수. 그리고 컴퓨터의 자연스러운 경고음.
에너지 결정체가 하나하나 깨져나가면서 느껴지는 압력과 파동.
그리고 푸른 폭발.
아아, 그렇구나.
그는 허탈한 심정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난 죽었구나. 그래, 지금 난 죽은 채 영혼 상태로 변해버린 것이야.
부모님의 영향 탓에 사후 세계를 믿는 종교 관념에 적당히 익숙한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고는 당황감과 함께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는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도시를 위를 걷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구조물들의 집합체들.
그 모양도, 그 크기도 다 제각각인 금속체들이 도로라고 밖에는 추정이 안 되는 곳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계라고 하기에는 그 형태가 너무나 인공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형상들이었다.
몇몇은 공중에 떠있었고 아름다운 결정 모양의 몇몇은 바닥에 바짝 붙은 채 차갑게 빛나는 은빛을 뽐내며 부드럽게 활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와 살이 흐르는 생명체는 그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두려웠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풍경은 지금 너무나 돌아가고 싶은 도시의 모습과 유사했지만 이질적으로 일그러진 곳이었다.
오직 은빛으로 빛나며 다양한 결정 형태들이 거대하게 솟아나있는 탑들 아래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탄식했다.
만약 거울이 있다면 분명 자신의 얼굴에 해당하는 부분은 공포와 경악, 그리고 분노와 절망과 같은 온갖 추잡한 감정으로 일그러져 있을 것이라 그는 확신했다.
푸른 폭발이 다시 떠올랐다. 그 이미지를 회상하는 순간 온 정신이 차가워졌다.
그 사고에서 분명 자신은 죽었던 것인가?
단순히 도시라고 간단히 정의를 내리기에는 너무 이상했다.
그는 은빛으로 빛나는 세계를 다시 살펴보았다. 아주 강한 인위적 느낌과 정밀함, 마치 자로 잰 것과도 같은 규칙적 움직임으로 돌아가는 그 알 수 없는 장소.
그렇군.
그는 자신의 의식 너머로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가 마치 목이 메이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나는 지옥에 떨어졌구나. 이 끔찍한 지옥의 차원에서 영원의 고통을 받는 형벌을 신에게 받은 거였어.
그는 거의 미친 것처럼 낄낄대며 웃어댔다. 광란으로 발작질 하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왜?
웃음이 점차 끝나가면서 그 의문이 그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대체 내가 왜?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왜 빌어먹을 신이 자신을 이 젠장할 지옥으로 보내버린 것일까?
자신은 나름 착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동정심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틈나는 대로 자신보다 못한 존재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어렸을 적에 아무 것도 몰랐을 때만 뺀다면 그는 이 유령 비슷한 형태가 되기 전까지 일생을 아주 모범적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대체 왜!
그는 절망과 비통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 누구도 들어주지 못할, 오직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유령의 울부짖음을 그는 지칠 때까지 외쳐댔다.
그는 정처 없이 도시를 떠돌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도시에는 아무런 생명이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도시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거대한 탑을 노려보았다. 하늘까지 치솟아 그 끝이 보이지 않으며 역시 누군가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은빛 금속 구조물.
우주를 바짝 겨눈 채로 그것은 육체는 상실하였으나 정신적 피로로 지친 그를 잔혹한 신 마냥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그는 실로 초월적 향취마저 풍기는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저 안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강렬한 이미지와 함께 그의 온 정신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한 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과연 저 안에는 누가 기다리고 있을까?
은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수정 악마?
죽기 전의 기억에 따라 그는 그 구조물을 빌딩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정신 한 구석에 처박혀있던 하나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모든 교육 과정을 끝마치고 처음으로 취직에 성공한 날.
모든 꿈과 희망을 가슴에 안고 출근하던 그 날이 화려한 감각적 환희와 함께 떠올랐다.
황금빛 햇살과 함께 빛나는 빌딩 앞에서 그는 순수와 열정에 가득 찬 눈동자로 그 빌딩을 바라보았다.
2년도 채 되지 않아 모종의 사고 책임을 뒤집어써 해고당해 거의 3년 후에야 간신히 연구소에 취직하는 운명도 모른 채 패기 넘치던 그 때의 그는 빌딩으로 그 발걸음도 힘차게 걸어 나갔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변은 은빛으로 반짝이면서 여러 결정체와 아주 날카롭게 다듬어진 여러 장식들로 가득 차있었다.
맙소사.
그는 너무나 아름답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비현실적 광경 모두를 최대한 자세히 쳐다보려 노력했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주변을 떠도는 전혀 이질적 기억의 느낌들을.
그는 점차 강렬해지는 푸른빛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감미로운 유혹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빛이 존재하는 근원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빛이 하나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빛의 의식 일부마저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전혀 이질적이면서 그 근원은 자신들과 유사한 그 자신에게 당황해했지만 이내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행성의 새로운 지배 집단이며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 의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계 지성체들은 자신을 환영하고 있었다.
빛은 잠시 수축하는가 싶더니 폭발하듯 부풀어 올랐다.
그의 눈앞에는 표준적이고 특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문 하나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회색빛으로 칠해진 문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그냥 그 안으로 향하기만 하면 저절로 열리는 일종의 이미지를 그들은 자신에게 투영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완벽한 암흑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 공간의 정체가 무엇이든 절대로 고요와 정적에 휩싸여있지는 않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푸른빛이 여기저기서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수십, 수천만개의 의식들이 그의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살아있는 것과 같은 생동감 있는 움직임과 함께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복잡한 기하학적 궤적을 그리며 그가 인식하기에 자신 주변을 천천히 둘러싸면서 그 빛들은 다가오고 있었다.
맙소사.
그 빛은 이제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신이 폭발에 휘말리기 전의 형태를 빛은 흉내 내고 있었다.
그는 그 형상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기억의 모든 그리운 이들을 읽어내고 또 기억해냈다.
모두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빛을 향해 다가갔다.
전혀 처음 느껴보는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자신을 반겨주고 있었다.
입이 분명 미소 짓고 있었다. 손이 그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어떤 때도 느낄 수 없었던 행복감과 함께 그의 정신은 점차 그 빛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창백한 푸른빛의 한 가운데로 그는 점차 빠져 들어갔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의 생명이 또 다른 지적 생명과 결합했다.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조금은 낡아 보이는 기계 앞으로 다가갔다.
누군가가 두뇌 수련용이라는 명목으로 망한 카지노에서 가져온 간단한 도박 머신이었는데 그렇게 인기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주머니를 뒤져 약간은 거무튀튀한 느낌의 동전 하나를 꺼내들었다.
술집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그 특유의 웅웅 거리는 울림과 함께 일레트로닉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음 것보다는 좀 더 깨끗한 은백색으로 빛나는 동전을 다시 집어넣은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곧바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찰칵하는 경쾌한 금속성 소음과 함께 정팔면체가 그려진 칩 두 개와 정육면체 하나가 튀어나왔다.

“흠....”

그는 낮게 신음했다. 카이라 소어 연구원이 미련 없이 그 도박 기계로부터 등을 돌린 때와 거의 동일하게 술집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가 재빨리 걸어 들어왔다.
헤레티네 연구 주임이었다. 어제의 비극적 사고의 여러 뒤처리 탓에 밤을 연구소에서 꼬박 세운 듯 눈이 피로로 잔뜩 부어있었다.

“오, 자네는!”

자동으로 술을 지급해주는 일종의 로봇 바텐더로부터 흑갈색 액체가 가득 담긴 술잔을 건네받은 그는 카이라 소어 연구원을 약간은 서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헤레티네 연구 주임은 술잔을 반 이상 들이키며 어제 앉았던 그 테이블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으며 그를 불렀다.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어제의 이야기를 계속 할 모양이로군.

“어제의 사고 수습은 무사히 끝내셨습니까?”

“아, 물론이지. 꽤나 피곤한 문제들이었고 아직 미처리된 절차가 남아있기는 하지만...뭐, 그럭저럭 끝났다고 봐도 이제는 무방하다네.”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그 말에 숨겨진 그 특유의 오만함과 자신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서요? 참, 끔찍한 일입니다.”

연구 주임은 술잔을 다시 입에 대려다 말고 혀를 가볍게 찼다.

“그게 좀 이상한 일이었지. 113호실 내부는 분명 폭발로 엉망이긴 했어도 시체가 먼지 한 톨 하나 없이 소멸할 정도는 분명 아니었어. 만약 시신 3구가 아주 완벽하게 사라질 정도의 폭발이었다면 113호실은 흔적도 없이 녹아 내렸어야 마땅한 일이야.”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흥미에 찬 눈동자로 물었다.

“호, 그럼 결국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하셨습니까?”

연구 주임은 벌컥 화를 내며 술잔으로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쳤다.

“지금 자네 날 어떻게 보는 건가?  아주 간단한 추정과 그에 따른 수학적 계산, 그리고 아주 약간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도움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지. 그들은 분명 에너지 결정체의 폭발 시점에 아무 것도 모른 채 핵심 에너지 동력로 아주 가까이 위치해있었음에 틀림없네!”

“흠, 그 말은 폭발할 때 발생한 에너지 대부분이 그 불쌍한 세 녀석들을 덮쳤다 이 말입니까?”

헤레티네 연구 주임은 흥이 절로 나는 듯 기분 좋게 웃었다.

“바로 그거야! 그걸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지! 왜 폭발 규모에 비해 피해가 그렇게 아주 소규모로 국한되었냐는 점 등. 폭발한 핵심 에너지 대부분을 이 세 녀석이 일종의 방패막이로 막아버렸기 때문에 외장형 원자로의 폭발까지는 아주 가까스로 번지지 않은 거야.”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내심 그들에게 감사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우연이긴 해도 이 연구소를 구원한 영웅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그 영웅들을 위해 건배해주어야겠군요!”

“아, 물론이지! 우리 연구소 차원에서도 마땅히 사후 보상을 하기로 이미 상층부에서 결정을 내렸네. 물질적 보상은 물론이고 빛나는 명예까지...”

연구 주임이 말끝을 흐렸지만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그 의미를 간파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는 정말 기뻤다. 비록 당사자들은 죽어 없어졌지만 이제 그들의 업적은 적절한 보상으로 정당하게 평가받았으며 모두에게 길이 빛나게 될 것이 아닌가?

“아주 잘 됐군요!”

“호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술잔 안에 든 액체를 이제는 몽땅 입 안에 털어 넣은 헤레티네 연구 주임은 굉장히 냉소적이면서 또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어조로 물었다.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연구 주임은 상당히 취한 기색으로 허공에 주먹을 흔들어대며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돈! 명예! 그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제 그들은 없네! 육체는 물론이오 우리 자신이 살아있다는 정의의 가장 핵심인 정신마저 사라진 채 죽어버렸단 말이네!”

“아, 네. 그렇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는 결국 죽게 됩니다.”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적당히 맞장구쳐주었다. 그는 연구 주임의 연구소 내에서의 막강한 영향력과 이제 얼마 안 있으며 인사 개편이 있음을 애써 상기하며 그 모든 고통을 감수하기로 결의했다.

“바로 그거야! 젠장, 내가 어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들은 궁극의 진화를 이룩해내야 되네! 거추장스러운 육체는커녕 오직 순수한 정신만이 영원한 시간과 함께 이 우주의 지식을 탐구하는 신의 단계로 말이네!”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그의 말에 집중하는 척하며 이 빌어먹을 탁상공론이 대체 언제나 끝날 것인가 대강 짐작해보았다.

“우리들 종족이 그러한 존재로 일어선다면! 그건 분명 신이라 정의해도 무방하겠지! 분명 그렇다네! 지금부터라도 이러한 진화 이룩을 위한 준비 작업을 종족 차원에서 해야 마땅한데 저 상층부의 멍청한 놈들은 다른 하찮은 것들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야!”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아주 자연스럽게 시계로 시선이 가려는 자신을 애써 억누르며 그 모든 헛소리들을 들어주었다.

“내 분명 말하지만 정신 생명체야 말로....진정한....궁극의....완벽이라는 단어의....”

이제는 졸리기까지 했다. 밤을 꼬박 세웠다는 영감탱이가 뭐가 그렇게 힘이 넘치는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문득 갈증을 느꼈다. 차갑게 식힌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가장 기초적 시뮬레이션....기억 하나하나를 데이터화해서...”

하품이 나오려고 했지만 만약 하품을 해버렸다가는 이 인고의 시간을 보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자신이 승진하면 타게 될 월급의 액수를 떠올렸다.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한 번 상상해보게! 아무런 기계의 도움 없이 우주와 우주를 누비는 우리 종족의 빛나는 미래를! 다시 한 번 설명하지만 현 기술로 초석을 다지....”

카이라 소어 연구원은 싱글벙글 만면에 웃음을 지은 얼굴로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날 월급으로 무엇을 살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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