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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죽음, 환상

2009.08.08 14:4408.08

죽음, 환상


종종, 내 몸을 커다란 칼로 찔러 벽에 고정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큰 출혈에 온 몸이 피에 젖어, 그런 모습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내 모습을, 문득 생각하고는 했다. 나는 이상성욕자는 아니다. 메저키스트는 아니지만 종종 죽고 싶다고 생각할 때, 나는 나의 그런 모습을 떠올려버린다. 어딘가의 매체에 물들어 멋부리는 인간이라고 된다면, 스스로 유감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그 것이 일정부분 신화와 같은 곳에서 차용된 망상이기는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그런 것에 취해 춤추는 꼭두각시라는 데엔 동의할 수가 없다. ‘죽음’을 치욕적으로 맞이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연쇄살인범’이란 자들은 이기적이다 못해 파렴치하고 절대 악에 가까운 자들이었다. 특히 ‘쾌락’을 위한 살인범은 내게 있어서는 멀쩡한 죽음을 누릴 가치가 없는 인간들로 여겨졌다. 나에게 죽음은 고귀해야만 하고, 특별해야만 한다.  

모든 사람이 처음을 중요시할 때, 나의 중요함은 마지막이었다. 깨끗한 이별, 추억, 더럽게 시작한 것도 어떻게든 무난히는 마무리 지어야한 것이었고 마무리가 이상할 것 같으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인생도 그 내부의 규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것은 할 수 없었으므로 죽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내 마음대로 하고자 했으며, 내 상상이 현실과 너무 괴리가 있을 때에는 그저 환상을 품고 비슷한 류의 것으로 끝내리라 생각했다. 나와 같은 사람의 개인적이고 별난 의사에 보통의 사람이 사회의 통념과 규율에 어긋나가면서까지 내 죽음을 도와주리라는 것은 망상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현재 나는 감옥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일 이 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기억이 더 날 때 써두고자 마음을 먹어, 틈이 날 때는 곧 펜을 꺼내들었다. 쓰고 있는 지금에도 나를 말할 수 있다. 죽음에는 환상이, 그리고 의지가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수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지금도 그 비난은 여전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그 생각때문에 나는 그런 짓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감옥에 들어온 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얼마 전만 해도, 나는 바깥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일반인이었다. ‘아직’이라고 명명할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의 사고는, 며칠 전과 완전히 똑같다.




“미쳤구나.”

몇 달 전 일이었다. 옅은 바람이 흘러가고 있었고 가로등 불빛이 죽은 것처럼 엷게 퍼져있었다. ‘종종 칼에 찔려 죽는 상상을 해.’라고 말했을 때, 그의 첫 번째 대답은 ‘요즘 피곤한가봐.’이었고 ‘아니, 자유롭게 죽고 싶어서.’라고 했을 때 두 번째 대답은 위와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공원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이정훈. 그는 장난기가 적고 차분하고 사려깊은 성품으로, 놀기엔 어려운 상대였지만 생각이 깊어, 천천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농담이라도 그러지 마라. 미친 인간으로 보인다.”
“흠.”
“사회생활을 하려면 감춰야할 말도 있는 거잖아. 진심이든, 진심이 아니든 그런 말을 하면 시선이 좋아지지 않아.”

밤향기가 짙었다. 안개의 내음이 저 먼 곳에 있는 하늘을 뿌옇게 가렸다. 그는 앉아있었고, 나는 뽑아든 캔을 들고 의자주변을 서성거렸다. 나는 별로 말하지 않았다. 정훈은 다시 말을 꺼냈다.

“그 애는 요즘 어때?”

난데없었지만 그 애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나와 사귄지 1년 정도 되었을까. 처음에 이 친구는 나와 그 사람이 사귀는 것에 대해서 크게 반대를 했었다. 지금 와서는 포기한 것인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종종 그 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여전히 눈빛에 염려가 섞이고는 했다. 하긴 나 역시 그 사람을 생각하면 여러가지로 염려가 되고는 하는 것이라, 그가 그러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사귀고 있는 그녀는 평범의 궤도에서 조금은 벗어난 사람이었다.

“그렇군. 요즘은 자주 만나질 못했어. 집에나 가볼까. 같이 갈래?”
“지금 9시가 넘었어. 내가 가면 실례일텐데.”
“상관없어. 어차피 나 혼자가도 실례인 건 마찬가지니까.”
“무슨 소리야? 너는 애인이잖아?”
“별로, 환영받지는 못해. 예고없이 찾아갈 땐 말이지. 그래도 연락없이 종종 찾아가지만, 그렇게 찾아가면 가끔은 접시를 던지거든.”
“사귀는 사이는 맞는 거냐?”
“아마도.”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긴 그는 더할나위 없이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이란 것에 가까운 건전한 청년이었기에, 이해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성싶었다. 그는 성실했고 학창시절 공부도 잘했으며, 현재에도 미래가 창창한 청년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그의 조용한 성품 외에, 그가 그녀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접점을 없지않을까-라고 나는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공원에서 일어나,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근처에 있는 버스를 잡아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우리는 금방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애인의 자격으로, 내가 몇 번 벨을 눌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내 옆의 그는 ‘없는가본데.’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결국 지니고 있던 열쇠를 꺼내들었다.

“이봐.”

그러자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정훈이 말을 꺼냈다.

“분명히 접시를 던질 정도로 화낸다고 했는데, 그 열쇠는 왜 가지고 있지? 무단침입 할 수도 있잖아. 그 정도의 사람이면 열쇠는 절대 주지 않을 것 같은데.”

정훈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의문을 말했다. 나는 대답했다.

“말하지 않고 찾아오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말을 하면 언제든 들어가도 괜찮아.”
“뭐냐, 그게.”
“이벤트같은 걸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돼.”
“지금은 무단침입이잖아.”
“응. 무단침입이지. 어쩌면 주거침입죄로 쫓겨날 지도 몰라.”

익숙하지 않은 범법적인 일에, 정훈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언가 법도나 규칙을 어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녀석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는 나와 그 애가 사귀는 것은 알고 반대했지만, 그 애가 지닌 이미지와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만 알 뿐, 구체적인 것은 자세히 몰랐다. 정훈이 그 애를 본 것도 한 서너번 정도 될까. 그 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그렇게 그녈 싫어했던 것도, 다분히 감정적인 것으로 그도 나중에 그에 관해서 사과를 했던 것이다. ‘왠지 어두운 기운이 싫어서, 내가 편견을 가진 것같다.’라고 정훈은 말했었다. 나는 문을 열면서 물었다.

“미정이와는, 오랜만이지?”
“뭐, 잘 알 지 못하니까. 못 본지는 6개월쯤 된 것 같은데.”

정훈은 그렇게 말하며 발을 들이다 흠칫 놀랐다. 나도 제법 놀라 주머니에 손을 꼽고 제자리에 서있었다. 미정과 사귄지는 꽤 되었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 내가 먼저 발을 들였다.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방은 평소와 같았지만 군데군데, 병이 깨져 굴러다니고 파편을 치우지 않아서 도저히 사람이 사는 곳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중얼거렸다. 거실 안의 난잡함도 평소보다 약간 더했다. 발치에 책이 걷어차인다. 현관의 어지러움은 신발을 둘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고 방바닥은 늘 그렇듯 쓰레기나, 책, 수첩, 물감통등으로 몹시 어질러져있었다. 익숙한 만큼이나, 나는 성의없이 발로 책을 밀어놓고서 철로 된 현관문을 무겁게 닫았다. 주변을 살폈다. 방은 적막이 감돈다.

“너, 이런 사람하고 사귀냐?”
“내 애인 욕하지마.”
“질린다. 질려. 임마, 방이 이게 뭐야? 이건…… 아무튼 어떻게 봐도 정상이 아니야.”
“평소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야. 그 녀석 나름대로 깨끗한 부분에선 무척 깨끗하고…….”

창가엔 이젤이 놓아져 있었다. 근처에는 기름 냄새가 묻어있다. 옆에는 유화물감이 바싹 말라 있었고 붓이 보이질 않았다. 완성되지 않은 그림이 묘한 사나움을 띄고 꿈틀댄다. 그림을 그린 천에는, 그린 지 오래된 듯 먼지가 약간 묻어있었다. 광경 자체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없어진 것처럼, 변하지 않던 공간에서 시간만이 흘렀다. 마치 독신자의 죽음처럼.  

이상한 내음이 났다. 썩는 것이 아닌, 마치 삭은 것의 냄새였다. 후각을 곤두세워 추적하자, 작은 컵이 눈에 띄었다. 그 것은 언제 적에 따른 것인지 모를 우유였다. 거의 고체가 되어 바닥에 들러붙어있다. 자연적으로 발효된 것 같다. 냄새를 맡으니, 꿀을 좀 탔었던 것 같다. 힐끗 고개를 돌려, 부엌쪽을 보자, 부엌만은 싱크대와 모든 것이 아주 깨끗하다.

챙!

그 때, 깨지는 소리가 난다. 갑작스런 소리에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챙, 챙, 챙!’ 소리는 연달아 이어지고 있었다. 소리가 난 곳의 방은 문이 닫혀있다. ‘챙그랑!’ 소리가 더 커지고 있다. 멈칫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으아아아아악!”

소리가 높아 나는 움찔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훈은 표정은 더더군다나 혐오에 가까웠다. 내가 먼저 방으로 뛰어들어가자, 의외로 방문은 벌컥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낯익은 사람이 마치 귀신과 같은 상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할 지 몰라, 그저 보고 있었다. 낯익은 그 사람은 인상이 일그러지더니, 살기를 띠었다.  

“나가!”
“잠깐,”
“나가!”

병같은 것이 벽에 와 깨어졌다. 유리 파편이 튀어 팔로 얼굴을 가렸다. 살기가 놀라우리만큼 날카롭게 다가온다. 나는 그 사람에게 묻은 피가 당황스러워, 다가가려했지만 유리조각이 나를 위협했다. 나는 몇 번 머뭇거리다가 결국 방문을 닫고 나오게 되었다. 방문을 닫자, 그녀는 조용해졌다.

다시금 방문을 열었다. 나를 막아선 문에 부딪혀 병이 깨지는 소리와 진동이 전해져온다. 나는 다시 문을 닫고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보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나는 사람이 단 하나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열었다. 늘 가슴이 쓰리고 아프지만, 내가 아닌, 그녀가 마음을 주는 단 한 사람. 휴대폰을 열기 전에 정훈이 내 어깨를 잡았다.

“임마, 이게 뭐야?”
“뭐냐니.”
“너 미쳤어? 임마.”

나는 정훈의 말을 잠깐 귀 뒤로 하고 방문을 조금 열었다. 조금 열었기 때문인지, 방 안은 조용했다. 미정에게 말을 걸었다.

“왜 이랬냐. 내 말은 안 들을 거지? 너.”
“…….”
“언제부터 이랬어?”
“나가!”
“멋대로 온 건 미안하지만 말이야. 너,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방 건너편에서는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일방적으로 말을 건넸다.

“지현이 부른다.”

그 사람을 부르기로 하자, 새삼 스스로가 얼마나 도움이 되지 않는지 깨치고 서글퍼졌다. 아무래도 미정은 정신과에서 받아온 약복용을 중단한 모양이었다. 갈수록 상태가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약을 끊은 줄은 몰랐다. 정훈은 평소보다도 심하게 어질러진 방 안을 둘러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지현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는 곧 연결되었다.

“누구세요?”
“나 아민인데.”
“미정이가 무슨 일 냈어?”
“응. 일이라고 할까. 지금 엉망이야. 와줄 수 있겠어?”
“뭐야, 부부싸움을 한 걸로 부른 거면 아작날 줄 알아. 이 것들 염장질이 갈수록.”
“아니……, 그런 게 아냐. 지금 심각하다. 너 오면 119부를 거야. 이 상태로 나오게 하면, 안될 것 같아. 엉망이야. 지금 베여서 피나는 것도 같고.”
“뭐야, 대체 무슨 일인 거야.”
“미정이랑, 최근에 만난 적 있어?”
“최근이라 봤자, 1, 2주 됐지. 아마.”

내가 미정을 못 본 지는 약 3일. 3일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방 밖을 서성이다가 식탁에 놓인 약봉지를 보았다. 봉지는 두툼했다. 역시 약을 먹지 않은 모양이었다.

“빨리와.”

나는 전화를 끊고 정훈을 보았다. 정훈은 당황한 상태였다. 이 광경에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기껏 같이 오자고 해서, 이런 상황이 되어 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나도 이런 건 처음이고.”
“…….”

정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한참동안 말하지 않아, 나는 망설이다가 어렵게 말을 뗐다.

“우울증이야. 아무래도 사이클이 돌아와서 최근 증세가 심해진 것 같아.”
“헤어져라.”

정훈은 무겁게 한 마디를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너 미쳤냐?”
“아, 전화왔나보다.”

나는 정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지현의 목소리였다. 어디어디로 가고 있으니, 10분 안으로는 도착할 거라는 설명이었다. 정훈과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 우리는 식탁의 의자에 멍하니 앉아 어둠 속에서 시계가 째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잠그지 않은 현관문에서 탁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어서서 지현을 맞이했다. 지현은 방을 휘휘 둘러보더니, 딱 한 마디를 했다.

미친 년.

지현이 방 문을 열자, 여전히 병이 날아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미정은 짐승처럼 상당히 난폭한 상태였다. 감히 들어서지 못한 그 아수라장에 지현은 과감히 들어가 미정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119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 ……인데요, 사람이 다쳤습니다. 유리조각에…….’



미정은 입원했다. 외상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지만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한다는 것이 병원측의 의견이었다. 지현은 나 대신에 그녀와 몇 가지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정신병력이 드러나 정신병원에의 입원도 권유받았지만 답은 주지 않았다. 병원은 자유에의 상실이며 그 것이 미정의 우울증에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녀 임의로 약복용을 중단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애매한 일이었다. 면회시간은 하루에 2시간이어서, 나는 병원에 매일 찾아갔다.

“왜 그랬는지, 안 말해줄 거냐?”
“…….”
“말해줄 생각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하겠냐만.”

답답해서, 들고 온 간식을 혼자 먹었다. 미정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무단으로 미정의 집을 찾아간 때면, 늘 삐져서 일주일 즈음은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러는 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일단 가장 화나는 건, 이 여자가 나를 ‘연인’의 위치로 취급해주기는 하는 건가-에 대한 것이었다. 마음을 조금이라도 허락하고는 있는 것인지,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미정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약은,”
“먹기 싫어.”

미정은 단호히 대답했다. 나도 긍정했다.

“그래.”
“…….”
“지현이랑 무슨 얘기했어?”
“…….”
“너, 나한테는 아무런 말도 하기가 싫어? 내가 싫어? 뭐라고 좀 말을 하라고. 여차저차 1년을 사귀었는데, 그거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지. 까놓고 묻자. 내가 지현이보다 못하냐?”
“…….”
“답답해 미치겠네.”

‘헤어질까’란 말이 목에서 맴돌았지만 일단 참아냈다. 그녀는 섬세한 인간이었다. 그 말을 했다가는 관계가 엉망으로 헝크러질 것은 분명했다. 정말로 헤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가 그다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 미정은 기묘한 사람이라, 처음에는 대단히 재미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그 안에 어둠이 나를 잠식해와,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은 내가 없으면 안된다.’라고. 그래서 떠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외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현이 나보다 더 빈 곳을 채워준다면, 떠나도 괜찮지 않은가, 란 생각도 최근에 들고 있었다. 다소 부담스러운 무게였다. 나는 미정을 좋아하지만, 그 쪽은 티끌만한 마음도 없어보이는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떠나고 싶었다.

“뭐라고, 욕이라도 좀 해봐.”
“씨발.”

물음은 효과적이어서 곧 욕이 튀어나왔다. 나는 한숨을 쉬며 턱을 괴었다.

“……그래. 그대로 계속 말해봐라.”
“……살고 싶지 않아…….”

미정은 나직하게 토해냈다.

“이대로, 죽었으면…….”
“약을 먹으면 조금 나아질 거야. 기분도.”
“아니야. 누가 나아진단 말이야. 매일매일이 지옥이야. 시간의 무게에 눌려 뼈들이 바스라지는 것같지. 거기에 진한 안개가 스며서 난 꼼짝도 하지 못해. 시간이 언제끝날까만을 기다리며 기약없는 매일매일이 이어지지.”

미정은 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웅크렸다.

“지겨워……지겨워……지겨워……. 이제 됐잖아.”
“…….”
“죽여줘.”
“살게 되면, 잘 살게 됐다고 할 날이 있겠지. 나중에 우울을 극복하고 삶을 이어나가서 다행이라고 하는 사람은 꽤 많아.”

내가 손을 어깨에 올리려고 하자, 미정이 내손을 탁 쳐냈다. 거부받은 느낌이라 쓸쓸했다. 미정은 울지 않았다. 그러나 웅크린 자세에서 비척하니 다 죽어가는 혈색은 스스로 새장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고 굶어죽는, 한 마리의 새가 떠올랐다. 나는 답답함이 북받치고 울컥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게.”
“아민아.”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날 죽여줘.”
“…….”
“……너 밖에 없어.”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로 돌아 밖으로 나섰다. 세상의 쓸쓸한 향이 숨이 막힐 듯, 안으로 몰아쳐왔다.



“그 새끼, 좀 놀더니만 그 부잣집 놈하고 친구가 되선 말이야, 지금 무역사업을 한답시고 발발거리며 바쁘더라. 말아먹진 말아야 할텐데. ……넌 요즘 뭐하고 지내?”

정훈은 공원 의자에 몸을 턱 기대어 물었다. 남는 시간에 잠깐 보기로 하고 만난 것이었다. 정훈은 내게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나는 캔맥주를 따서 정훈에게 주었다.

“그럭저럭.”
“이번에 동창회 열리는 것 알지? 정민이랑 태현이도 온다고 하는데.”
“그래?”

정훈은 내 대답에 망설이다가 말을 했다.

“그래…… 그 애랑은, 너.”

역시 그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맥주를 넘기며, 말을 끊었다.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 병원 일이 바쁠텐데. 아직 인턴이고. 험하게 다뤄지지 않아?”

말이 끊기자 약간 감정이 상한 듯한 표정을 지은 정훈은 그 일에 대해서 더 말하지 않고 대답했다.

“할만 해. 그럭저럭, 재미있는 일이 많아.”
“예를 들어 어떤?”
“나는 사설병원에 있으니까 말이지. 최근에 환자가 응급실에 왔는데, 마취를 해달라는 거야. 그 때 나처럼 견습간호사가 있었거든. 그런데 그 간호사에게 ‘정맥에 주사를 놔달라.’ 그랬다는 거지. 정맥에 놓으면 약효는 3초 안이니까. 그리고 한 통으로 부족하다고, 한 다섯통 정도 달라고 했다지? 그런데 간호하는 애가 처음이니까 마약사범인 줄 언뜻 모르고, 일단은  안된다고 했는데, 병원에 대해 욕을 마구 퍼붓고 다른 병원 어디냐고 마구 그러다가, 결국 우리가 갈 때쯤 도망쳤어.”
“마약사범?”
“그렇지. 붙잡진 못했지만……. 재미있는 일이었어.”
“병원에서 쓰는 건 모르핀 아니야?”
“헤로인을 쓰지는 않지. 모르핀이 쾌감은 덜할 테지만, 뭐, 급했나보지.”

‘모르핀…….’ 나는 궁금증이 들어 물었다.

“그런데 사람이 죽을 정도면 어느 정도나 써야돼? 그거.”
“그건 왜? 사람의 체중에 따라 다르겠지.”

정훈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말했다.

“다섯통이나 맞으면 죽지 않아? 어느 정도 양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료용으로 투약되는 양은 적으니까.”
“나중에 견학 좀 시켜줘. 재미있겠는데…….”
“난 바쁘다, 인마.”


정훈과는 별로, 미정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내가 별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하는 탓이, 아마 클 것이다. 보호자의 자격은 없었기에 병원에서 밤을 새울 수는 없었지만 나는 매일 미정이 입원한 곳엘 찾아갔다. 영양실조와 정서불안으로 한 달여간은 입원해 있기로 결정이 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조금 안정된 이후부터, 자주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죽여줘.’라는 말을. 한 때의 변덕이려니 하고 있었지만 미정의 팔엔 점점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자해의 흔적들은 우울의 상징이라기 보다는, 분노의 것에 가까웠다. 어느날과 같이 찾아가서, 낮잠을 자고 있는 미정에게 물었다.

“넌 대체 뭐에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거야.”

물음이라기보다는 중얼거림이었다.

“뭐가 그렇게 너를 망치지.”

자는 사람은 말이 없었다.

“정말 삶 자체를 증오하니.”

삶을 사랑하는 수많은 우울증 환자들이 있다. 그러나 미정은, 우울증을 떠나 무언가…… 감히 내가 말하기는 어렵지만 무언가…… 어딘가의 정서가 망가져있었다. 물론 이렇게 심한 적은, 내가 겪은 것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이전에는 여전히 냉소적이고 성급했지만 잘 놀기도 했었다. 비록 그 때에도 그 조용함 뒤에서 여전히 분노를 하고 있었던 것이 기억나지만 그 때는 미정 스스로를 향하지는 않았더라고, 나는 기억했다.

“제기랄.”

나는 먼지가 쌓여 흐린 창 밖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죽여줘.”

매혹적인 죽음의 여신이 속삭이는 듯한 그 말. 미정은 옷깃을 붙잡고 아무도 듣지 못할 크기로 낮게 중얼거렸다. 빵을 씹을 때, 뭉개지는 소리가 내 귀 안에만 들리듯, 그런 소리였다. 며칠 째, 그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며칠 째, 너는 지금 심한 우울증일 뿐이야.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상태가 나아지면, 곧 그런 생각도 없어질 거라고, 나는 매번 말했다.

“어떻게 장담하지?”
“죽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어디있겠어. 하지만 살아나가면 좋은 일도 많겠지.”
“나는 병원에 나가면, 곧, 죽을 거야.”
“진심이야?”
“진심이야.”
“너는 죽고 싶은 게 아니야.”
“…….”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사는 게 힘들 뿐이야.”
“아니.”

미정은 부인했다.

“그 반대야.”

그리고 미정은 내 쪽으로 쓰러졌다.

“그 반대야…….”

그녀가 되뇌이는 그 말에, 나는 미정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현재 어떤 상태인지 더욱 혼란스러워져,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하나 아는 것이 있다면, 이 사람이 애타게 죽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것으로, 그녀는 서서히 어둠의 그 쪽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가타부타 생각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직설적으로 물었다. 남에게 들릴까 두려웠기에 종이를 꺼내 필담을 했다.

-언제부터 죽고 싶었지?
-아주 예전부터. 가깝게는 고등학교 때부터.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죽지 않았어?

“그러게.”

그 대답에 나는 더 이상 어떻게 말해야할 지 몰랐다. 나는 작게 물었다.

“죽고 싶어?”
“응.”
“정말로?”
“미안.”
“…….”
“미안해.”
“왜 사과를 해?”
“이런 걸 말하면, 다들 싫어하는 걸 알고는 있어. 그리고 이게 나 혼자의 문제란 것도. 언제나 미안하게 생각해.”
“나는…… 남이냐?”
“아니니까…… 말하고 만 거겠지. 미안해. 언제나.”
“…….”

왜 미안하다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조금 혼란스러웠다. 나는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늘 말하려고 했던 건데, 헤어져도 괜찮아.”
“정말이란 말이지.”

나는 흘끗, 미정을 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이 방향이 맞을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그 동안 생각했던 것에 맞추어보면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죽음에의 의지. 그건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나는 그 사람의 눈을 보았다. 언제나 어딘가의 허공을 응시하는 그 눈동자가 이 삶에 전혀 미련두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 날은 병원에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퇴원 날짜가 곧이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말했다. 어느새 시간이 꽤 흘러있었다. 미정은 그 동안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꽤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병원측도 안심을 했다. 어질러진 방을 정리한 단정함이라기 보다는, 접시에 담긴 요리를 전부 다 먹어버린 듯한 깨끗함이었지만 그녀의 분노는 많이 사그라들어 있었다. 내가 아는 미정으로 드디어 돌아온 것 같았다. 오히려, 그 적보다 더 차분한 모습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응.”
“다행히, 퇴원을 바라고 있는 것 같네.”
“응.”
“죽으려고?”
“…….”

대답이 없었다.    

“도와줄까?”
“…….”

나의 제안에도 역시 대답은 없었다. 미정은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무언가 비어있는 목소리로 처연하게 말했다.

“죽음 중에서도 자살은, 신기해. 자신의 죽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하고 그래서 자살을 꿈꾸는 사람도 있지만, 그 방법은 타살보다 매우 간단하고, 상상력을 초월할 정도로 바보같이 단순해. 목매기, 투신, 독약, 가스, 익사, 총. 이 정도가 전부거든. 참, 별 것 아닌 일이야.”
“특별한 죽음을 원해?”
“아니.”

미정은 고개를 저었다.

“단정한 죽음……을 원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지.”
“있잖아. 나는 진심이야.”

나는 신중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나도 진심이야.”
“…….”

그 말에 나는 침묵했다.

“아민아.”
“왜.”
“고마워. 하지만 네가 떠맬 필요는 없어.”
“이제까지 부려먹고는 잘도.”
“그 동안, 네게 너무 의지했었던 면이 많았던 것인지도 몰라.”
“…….”
“태어나서부터 줄곧, 죽은 채 살아온 기분이 들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보다 맞는 표현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미정은 분명히 알코올이 다 날아간 술과 같은 모습이었고, 나도 하나의 결심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 와서, 하루에 2시간 정도이긴 했지만 오랫동안 ‘말’을 통해서든 그렇지 않은 것을 통해서든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단 하나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혼자 사는 집에 가서 유리창을 깨어부쉈다. 손에는 온통 유리가 박혀 피가 철철 넘쳤다. 그런 채로 어둠이 짙게 내린 밤의 거리를 걸었다. 병원의 문은 닫혀있었다. 고통으로 움츠러든 팔을 겨우 펴, 응급실로 문을 똑똑 두드리자, 간호사가 놀란 눈을 했다. 응급처치를 받으며, 나는 진통제가 있는 곳을 물었다.

“평소에 많이 다치곤 해서 그러는데, 얼마간 구입할 수 있을까요?”

내가 묻자, 간호사는 곤란한 웃음을 띠었다. 호기심이 많은 환자를 가장해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주사기가 있는 곳과 진통제가 있는 곳은 대충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간호사에게 다소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들고 온 과도를 꺼내 위협했다. 비명이 울렸다. 뒷걸음질로 급히 진통제들과 주사기를 챙겨 도망쳤다. 창문을 타넘고 도망치자, 소란이 퍼졌지만, 뒤쫓아오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나는 급히 그 곳에서 벗어났다.

밤이 제법 깊은 냄새를 풍겼다. 질리도록 차갑고 탁한 밤의 향에서, 나는 숨가쁘게 미정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숨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조용히 병원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제법 큰 곳이어서, 저녁에도 방문하는 사람은 많았다. 방학철이 아니었기 때문에, 입원한 사람도 많지 않아서 그럭저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미정은 자고 있었다. 나는 망설였다. ‘이래도 되는건가.’에 대한 의구와 ‘정말로 죽음을 원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에 대한 의구였다. 나는 한 동안 가만히 있었다. 망설임의 끝에,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참 막연하고 객기서린 철없는 사람의 생각으로 팔에 주사를 놓았다. 다친 팔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덜덜 떨렸다. 게다가 어두워서 쉽지 않았지만 미정은 정맥이 도드라지게 나와있는 편이어서 그나마 제대로 놓을 수 있었다.

“…….”

어둠 속에서 작은 말이 들려왔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놓기 직전에 미정이 깨어서 나를 보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놓는 순간이었기에, 그 때 어떻게 행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둠이라서 내 착각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조금, 웃고 있는 듯 보였다. 착각, 일지도 모른다.

나는 도망쳤고 얼마지나지 않아 붙잡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도망쳤는지 그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다. 그 때 내가 상당히 겁에 질려 있었다는 것은 분명했고, 다소 이성이 미비한 상태였다는 것도 분명했지만 다시 잡힐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도망친 내 행동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잘 납득되지 않았다. 아무튼 붙잡힌 나는 살인미수의 혐의를 받았지만, 나의 인정으로 인해 곧 살인자로 취급받게 되었다.

“말려야 됐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면회를 온 정훈은 안색을 완연히 굳히며 말했다.

“정아민. 미쳤냐? 너 머리가 돌았어?”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음 아닌 물음을 건넸다. 나는 별 표정 없이 정훈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할 지, 잘 알 수 없었다. 이제 이 놈과 친구인지 아닌지도 스스로 잘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하고도 이야기해봤었는데, 그 때 그…….”

정훈은 머릿속의 기억이 저장된 회로를 열심히 분석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훈의 생각하는 표정에서 짐작해 말했다.

“지현?”
“응. 분명히 그 이름이었어. 그 사람이, 그 여자와 친구지?”
“그렇지. 미정이와 꽤 친하다고 알고 있어.”
“그래? 너는 아직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여자, 친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라고 말하면 심한 거 아니냐? 지현이랬나? 그 사람이 그러더라. 너 불쌍하다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말하더라. 이해하기가 힘들고 가끔 무섭대. 너는 미친 년하고 사귄거야. 넌 인생을 망쳤다고.”
“그 사람이 그렇게 얘기해?”

나는 픽 웃었다. 정훈은 사뭇 심각한 표정이었다.

“임마, 왜 웃어? 열받아도 모자랄 판에.”
“그 녀석은 나보다도 지현이란 녀석을 더 믿었었어. 정신적으로 더 의지하고, 믿고, 찾았지.”
“무슨 헛소리야.”
“그 애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는 짐작조차 가지 않아.”

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별로 좋은 표정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 역시 무어라 할 말은 없었다. 찾아와준 것은 고맙지만 기묘한 일을 하면 믿음이 사라진다. 이 사람도 남의 눈을 의식하는 하나의 사람인데, 나의 적으로 돌아서지 않을까. 세상에 혼자된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정훈이 물었다.

“됐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선 말하지 말자. 그건 됐고, 변호사는? 잡아놨어?”
“필요없어.”
“진심이냐? 감방 갈거야?”
“죗값은, 받아야겠지.”

나는 설핏 웃었다.

“진심이냐?”
“내가 죽인 건, 사실이고 그건 내 의지였으니까.”
“네 의지가 아니야. 임마.”
“내 의지가 아니면 뭐냐. 내가 악마라도 씌었었다고 하고 싶어?”
“그런 건지도 모르지.”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건 아니야. 하지만 사실 모르겠어. 이제 뭐가 뭔지……. 그런데 내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건, 알아.”


그녀와 나의 마지막이, 내가 바라던 대로 깨끗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외부의 시선을 보면 그보다 더 더러울 수는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마지막에 원하는 것을 주었다는 것이, 나의 악한 행동에의 조그만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지금, 솔직히 아직 후회하지 않는다. 타인의 생명을 앗는 것은 분명히 죄이지만 미정은 그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스스로의 의지에 맡겨두는 편이 나나 그녀를 위해 훨씬 좋았을 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의지도 커다란 사회문제, 혹은 죄악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그렇게 놓아두었다면 적어도 내가 이 곳에 있을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나를 악마로 보든지, 혹은 그녀를 악마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그녀가 악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를 보고 있자면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막히는 공허와 어둠이 엿보였다. 슬픔이 있는 악마를 퇴치해야한다면, 이미 악마가 악마를 퇴치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미정 외에 나는 어쩌면 악마인지도 모른다.

흔히들 사람들은 타인의 절망을 15분 이상 보지 못한다고 한다. 공감되지 않는 절망따윈 너무도 지리하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내가 미정에게서 떨어지지 못한 채 맴돌았던 것은, 그 절망이 내게 지나치게 공감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것처럼 살아온 그 외로움 같은 건, 어쩌면 많은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게끔 할 것이었다. 그 절망이 매혹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반했다.

죽음에는 환상이 있다. 나는 종종 칼에 찔려 죽는 환상을 꿈꾼다. 죽는 방식에의 자유를 꿈꾼다. 그런 사고가 나를 이 감옥에 오게끔 일조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에 환상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부인한다. 그녀의 죽음은 환상으로 찾아온 죽음이 아니었다. 더없이 현실에 가까운 지독함이 나를 범법하게끔 했다. 내가 후회하지 않는 이유는 그 것이 환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이기에, 나 또한 냉혈인간처럼 담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글을 마치려고 하는 이 찰나에, 내 눈가에 고이는 것이 진실이라면, 나는 아마 슬픈 모양이다. 나는 슬퍼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었다. 마음은 담담하다고 하는데, 이가 악물어졌다. 이윽고 엎드리며, 절규를 터뜨리는데- 나는 여전히 내가 왜 이러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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