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어느 재즈바에서.

2004.05.30 02:0105.30

첫 키스는 상큼한 살구 맛이었다.

그 후, 집에 돌아가면서 밥을 먹을 때나 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나는 아무생각을 하지 못한 채, 입술이 품고 있는 얼얼함만 느끼기만 했다. 잠자리에서도 눈은 졸려와 따가운데 잠은 이르지 못하고, 멀뚱멀뚱 눈을 뜬 채. 밤을 지새웠다. 내 뒤통수 통증을 이겨낼 정도로 강렬한 맛이었다. 달콤하면서도 너무 달지 않고, 싱큼하면서도 진하지 않지만 온 몸을 뒤흔들 만큼 짜릿한 그 맛은 지금의 나도 습관적으로 키스를 하게 만들 정도로 산듯했다. [그날] 이후 1주일간 나는 어디를 가든지 멍하게 있는 경우가 많아졌고, 혼자서 은밀히 입술의 감촉을 즐겼다. 입술 곁에 살구 향이 미세하게 묻어 있었다. 아니 꼭 그 애가 계속 내 아랫입술 끝을 살며시 깨물고 있는 듯 한했다. 그런 느낌을 즐길 때면 자연스레 걔 얼굴이 떠올랐고 빠져들었다.

혜경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 온 나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고 했다. 언제나 다름없는 5월의 아침에 선생님을 앞세우고 반에 들어올 때, 내가 교실 문을 넘어서는 그 순간부터 좋아했다고 말했다. 2년 동안을 우리는 친구로 지내다가 졸업하기 1주일 전 혼자 있는 내게 다가와 갑자기 <좋아해> 라고 말했다. 고백을 듣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왔다.  얼굴은 후끈 달아올랐으며, 머릿속엔 주위에서 누가 보지 않았겠지 걱정뿐이었다. 당시의 나는 이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는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아이였었다. 소동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다음날 걔는 대담하게 집에 전화하였다. 그리고 내가 아닌 어머니와 통화한 후 태연히 우리 집에 놀러왔으며 자연스럽게 나와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그 얘는 5학년, 5월, 내가 전학 온 날부터 2년 동안 은밀히 친구로 가장한 채 나에게 접근해 와 우리 집 전화번호를 따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우리 누나와 친해진 것이었다. 그렇게 한 달간 시달리다가 끝끝내 나는 대답해 주었다. 반 강제로 사귀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 때의 나는 사춘기가 아직 오지 않았고, 서로 다른 중학교를 가게 된 혜경이와 나는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다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그건 크나큰 오측이었다. 나도 혜경이를 좋아하게 돼 버렸다.

혜경이는 피아노를 잘 쳤다. 나도 피아노를 초등학교 1학년부터 쳐 왔었지만 피아노엔 흥미가 없었고 진척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혜경이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좋아했다. 내가 혜경이 집에 가거나, 같이 우리 집에 왔을 때, 단둘이 있게 되면 나는 걔에게 피아노 소리를 들려 달라고 졸랐다. 혜경이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난 꼭 그 얘 왼편에 붙어 앉아서 피아노 치는 그 모습을 바로 옆에 앉아 보았다. 우아한 손놀림부터 진지한 표정, 숨결, 채리맛 향기까지, 피아노 소리를 듣고 싶다는 건 핑계일 뿐이고 달라 보이는 그 얘만 보기 원해서 옆에 붙어 앉았다. [그날]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담히 피아노 치는 혜경이 허리를 내 오른팔로 슬쩍 감싸 안았다. 걔는 놀라서인지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더 놀랐다. 오른팔을 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애가 말했다.

그리고 [Fly me to the Moon]을 피아노 반주에 마쳐 불러주었다. 아직도 이 순간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걔는 영원히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분명히 서투른 연주에 곱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어리숙한 음(音)은 따뜻한 물보라안의 꽃 안개처럼 두 사람만의 공간을 형성해 나갔다. 시간은 정지되어 내 오른팔을 혜경이 허리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연주를 마치고 꿈에서 깨어날을때 그 애는 다시 태연히 나를 쳐다보았다. 난 걔 얼굴을 보자 깜짝 놀라 정신이 확 돌아왔다. 그리고 우물쭈물 하자

내 입술을 훔쳤다. 난 여전히 혜경이 허리를 힘없이 감싸 올렸을 때, 그 애가 빠르게 내 품에 들어와 서툴게 도둑질을 할 때, 걔 몸에 밀려 긴 의자에서 같이 떨어 졌을 때, 내가 밑에 깔려서 움직일 수 없을 때, 난 두 눈 뚜렷이 뜨고도 당했을 때, 혜경이는 다시 고개를 든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키스를 나누었다. 이번엔 눈을 감았다. 내 뒷머리의 아픔도 잊은 채......

어느 날, 난 식탁의자에 앉아 요리하는 혜경이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입술 맛이 마치 살구 맛같다고 했다. 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Fly me to the Moon]도 나를 위해 연습했다는 고백을 들었다. 그 얘 표정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걔는 돌아보지 않고 계속 요리를 했다. 우린 같이 밥을 먹었고 자연스레 키스를 했다.

두 번째 키스는 김치와 된장 맛이엇다.

나는 울보였다. 어릴 때부터 자주 울었고, 어느 정도 철이 들 중학교 때까지 운 기억이 있다. 어릴 나이에 무엇이 그리 서글펐는지 지겹게 울어서 눈물샘이 마르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울 때마다 어머니에게 <남자가 왜 이리 많이 울어?>, <고추 없냐?>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우는 나를 머리를 쓰다마 주시던가, 꼭 안아주시며 달래주셨지만 내 나이가 점점 들자 혼내 주셨다. 그래도 나는 많이 울었다. 내 또래 아이들은 매번 우는 나를 자주 놀렸다. 친구들의 놀림 받는 게 싫었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내 의지와 다르게 톡하면 눈물이 나왔고 하번 나온 눈물은 깊게 새어나왔다. 그래서 남 몰래 숨어서 혼자 울었고, 내방에서 자주 울었다. 내가 왜 자주 울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릴 가슴에 이름 모를 슬픔 스미어서 조붓한 심장이 그 슬픔에 동정해서 이었을까?
어느 날, 나는 몸이 아파 조퇴를 하고 집에 일찍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내 방에 들어가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울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구 울었다. 소리 내어 울었다. 눈물을 훔치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어머니도 내 울음을 아셨는지 저녁때까지 나를 깨우지 않으셨다. 창밖에 어둠이 질 때쯤 방문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그제야 나는 누나 꿈에서 깨어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혜경이는 조퇴한 내가 걱정되어 병문안을 왔다고 했다. 난 혜경이에게 눈물로 불은 내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혼자 있고 싶다고 했지만, 걔는 문을 닫고 문 앞에 서있을 뿐이었다. 전등을 키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침대에 상반신만 일으켜 세운 채 사뿐히 다가오는 혜경이를 부끄럼이 올려다보았다. 창피했다. 그 애는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를 힘껏 안아주었다. 난 당황했지만 곧 머리를 걔 가슴에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실컷 울었다. 걔는 내 머리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 날은 우리 누나가 죽은지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 애는 늦게까지 같이 소리없이 울어주었다. 혜경이는 내 눈물로 인해 교복이 다 젖어 할 수없이 내 옷으로 갈아입고 되돌아갔다.

지금의 나는 울지 않는다. 지금을 살면서 많던 눈물은 사라졌고, 눈물샘은 메말랐다. 죽은 누이를 회상할 때도 울지 않고, 혜경이 생각할 때도 태연하다. 수많은 여자와 만났지만 울지 않는다. 이별에 익숙해졌고 익숙한 이별 뒤엔 언제나 새로운 만남만 생각한다. 세상이 나를 바꿨다는 변명만을 할 뿐.
어제였다. 가볐게 만난 여대생과 함께, 적당한 술과 감미로운 속삭임으로 밤을 같이 할 심산으로 어느 재즈 바를 찾았다. 그녀와 같이 재즈 바에 들어서자 희미한 어둠이 재즈 음률이 우리를 맞이했다. 고요하면서 달콤한 재즈 노래가 바 안쪽 무대에서 흘러나왔고 오붓한 어둠을 더욱 빛나게 했다. 재즈 바 곳곳에 연인들이 보였다. 행복에 빠진 연인들은 제 각자 서로를 마주보며 앉아, 칵테일을 음미하며 품위 있는 노래를 감미했다. 그런 연인들로 인해 재즈 바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그런 분위기를 즐기며 나와 그녀는 서울의 밤을 바라볼 수 있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마주 앉아 음식과 샴페인을 주문했다. 우린 정식을 먹었고, 약간의 알코올로 서로를 축복하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예감이 좋았다.
샴페인 한 병을 다 비울 때였다. 무대에서 귀에 익숙한 피아노 선율이 들려왔다. 어느 여가수가 마이크를 잡았고, 그동안 잊었던 -그리웠던 노래 [Fly me to the Moon]을 듣게 되었다. 난 순간 내 앞의 그녀도 잊은 채, 재즈가 흘러나오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닮았다. 내 머리는 [그날]를 생각했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무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가 나를 부르더니 입가심으로 사탕 하나를 권해주었다. 난 노래를 집중하고 싶어서 대충 사탕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 퍼져나가는 살 구향에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왜 울어요?>
그녀 말을 듣고 내 두 뺨에 따뜻하고 끈적끈적한 액체를 느끼게 되었다. 메말랐던 눈물이 거칠어진 눈 밖으로 솟아났다. 지금의 내가 울고 있다니……. 울지 않던 내가, 냉정해진 내가, 이별에 익숙해진 내가 울고 있다니……. 난 급히 자리를 떴고, 계산을 치룰 후 차안에 돌아왔다. 그리고 마구 울었다. 옆에 항상 있어주었던 그 얘, 따뜻하게 안아주었던 그 얘, 함께 울어주었던 그 얘는 이제 내 곁에 없다. 내 옆자리는 항상 비어있었고 그 외로움에 다른 여자를 찾았지만 그 얘 빈자릴 채워주지 못했다. 난 그 얘를 그리워했지만 가슴속에 깊숙이 감추어서 나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혜경이에게 [좋아해]라고 말을 안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기억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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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와렐름이란 폐인 양성 사이트에서 올린 글입니다. 파와렐름에서만 글을 올릴려고 했지만, 욕좀 먹고싶어서 이 곳에도 같은 글을 올립니다. 마음껏 돌을 던져주세요. -죄가 있는 사람만 돌을 던.....(퍽퍽 이런 뜻이 아니고)

진짜로 비평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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