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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이상한 나라의 DK

2004.05.07 23:0105.07

이상한 나라의 DK


해가 지고 있었다. 짧은 여행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DK는 붉게 반짝이는 하늘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차장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가늘고 긴 그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나는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오늘 아침 나는 수면제를 먹었어요. 창가에 눈을 고정시킨 채 DK는 말한다. 건조한 말투였지만 차장에게 나쁜 감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아니, DK는 차장을 좋아한다. 그는 DK가 이곳에 온 이후 쭉 함께 있어주었다. 단지 해가 뜨고 지는 사이의 시간이었지만 이제껏 보내온 그 어느 날보다 가치 있는 하루였다. 지금 자신을 위해 울어줄 사람을 하나 고르라면 주저 없이 차장을 택할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오늘 아침 나는 수면제를 먹었어요. 지난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말을 확인받으려는 듯 DK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오늘 아침 수면제를 먹은 것은 사실이다. 다섯 시 6분 경 최초로 눈을 뜬 DK는 그 후 10분마다 한 번씩 일어나다가 일곱 시에 마침내 침대에서 나왔다. 커피를 끓이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파란 방 안을 걸어 다녔다. 벽지는 #72C7F3의 맑은 하늘색이다. DK는 하늘을 좋아했다. 실제의 하늘을 본 것은 아주 어릴 적 일이다. 방에는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커다란 창이 있지만 그곳에도 #72C7F3의 커튼이 쳐져있다.
커피향이 퍼진다.
DK는 노슈거 비스킷을 우물우물 씹으며 신문을 보았다. 머리가 아프기 때문에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무너진 건물이 보이지만 어째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묘연하다. DK는 신문을 덮고 다시 방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자기로 마음먹는다. 알람시계는 스위치를 누른 후 현관 앞에 가져다 놓았다. 건전지를 빼고 쓰레기통을 열고 휴지 사이로 밀어 넣은 후 뚜껑을 닫는다. 약을 꺼내는 동안에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이제 겨우 마음이 놓인다. 침대에 가만히 몸을 뉘이자 천천히 잠이 왔다. 어쩐지 가위에 눌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그녀는 두 손을 쥐었다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졌다. 수면제가 이겼다.
가위를 눌리는 게 그렇게 끔찍한 일은 아니지. 정신이 들었을 때 DK는 장난감들 사이에 서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대체 나는 정신을 잃었던 주제에 무슨 정신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DK는 장난감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생각했지만 별다른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가위를 눌리는 게 그렇게 끔찍한 일은 아니지, 이런 말은 잠에서 깨어나면 쉽게 할 수 있어. 그녀는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게 내버려둔 채 장난감 제군을 훑어보았다. 놀랄 정도로 여러 종류의 장난감들이 DK 주위에 모여 있었다. 곰, 수달, 머쉬멜로우 해파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은 인형도 그 사이에 껴있었기 때문에 곧 기분이 나빠졌다. DK는 얼른 눈을 돌리며 이제 끝이야, 하고 입을 닫았다.
그래, 좋아. 빨간 줄무늬 천으로 만들어진 허수아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들었어(이때 DK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는 그만두라고 말했다). 잘 들었어, 그 보답으로 우리나라를 구경시켜주겠어.
피곤하다. 피곤하고 지치고 기력이 없다. DK가 이렇게 말하자 허수아비는 홍소를 터뜨리며 과소평가하면 곤란하지, 걸을 필요도 없고 달릴 필요도 없어,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직사각형 모양의 기차표를 DK에게 건넸다. 그것을 들고 DK는 장난감 사이를 빠져나왔다. 뒤를 돌아보자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은 인형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 있어요?
DK는 창문에서 눈을 돌려 차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트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좁은 통로에 서 있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검은 실크해트의 그늘에 가려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미소를 짓고 있다. DK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정말 부드럽고 다정하며 친절한 미소를 짓는다.
왜 그렇게 다정해요?
기차역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물론 장난감도 없고 단지 검은 열차 한 대가 서 있을 뿐이었다. 맨 끝의 입구로 들어온 DK는 기차를 끝부터 처음까지 훑으며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불고 휴지조각이 날린다. 첫 칸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별안간 경적이 울리며 이제 곧 출발합니다 하는 경고가 들렸다. 그게 기차가 내는 소리라는 것을 DK는 금방 알아차렸다. 그녀는 검은 화통을 한 번 흘겨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기관실을 들여다보니 한 남자가 맞은편에 기대어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가 하얀 피부와 검은 머리에 잘 어울렸다. DK는 손가락으로 창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남자는 눈을 뜨며 아아, 이런, 하며 웃었다. 그러고는 차장의 것이라기보다 마술사의 모자 같은 검고 높은 실크해트를 머리 위에 눌러썼다. 기차표를 주고 올라타세요. 이제 곧 출발합니다. DK는 첫 번째 칸 첫 번째 좌석 창가에 앉았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차장이 문을 열고 객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흔들며, 이 애 달리도록 설득하는 것은 정말 힘들어요, 이 나라에서 나 밖에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차장이에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기차는 꼬박 한나절 동안 달렸다. DK는 줄곧 창밖을 바라보았고 차장은 그녀에게 창밖으로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설명해주었다. 쾌활하고 명랑했던 그의 목소리는 날이 저무는 것과 더불어 조금씩 잦아들었다. 석양이 내려오자 완전히 멈추었다. 지금 차장은 시트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다. 눈은 초승달 모양으로 웃고 있다.
기차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 것 같다.
그것이 DK를 슬프게 만들었다.
#72C7F3.
커피, 커피향, 노슈거 비스킷, 신문, 알람시계, 알람, 알람을 끄기 위해 한 시간 일찍 일어나는 것, 나는 알람 소리가 싫습니다, 불면, 수면제, 가위 눌림, 나는 가위 눌림이 싫습니다, DK는 손을 뻗어 차장의 팔을 잡았다. 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손에 이마를 대며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하고 울었다. 차장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날 수 있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어째서 그렇게 다정해요?)
DK는 차장의 손에서 빠져나와 다시 창문을 보며 실은 파란 하늘을 보지 못했어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차장은 웃으며 말하자면 가는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며 방에 창문이 있지요, 틀림없이 아주 큰 창문이, 하고 말했다.
DK는 기차가 완전히 멈추기 전에 일어났다.
방안에는 아직 커피향이 감돌고 있었다. 틀림없이 먹었다고 생각한 수면제 두 알이 아직 손에 남아있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현관으로 향했다. 쓰레기통을 열고 쓰레기 사이에서 시계를 꺼내 약을 집어넣었다. 다시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째깍거리는 기계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방을 서너 바퀴 돌았다. 한 바퀴 더. 이윽고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두 뺨을 어루만졌다.
준비됐나, DK?
DK는 천천히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움켜쥐었다. 두꺼운 천 너머 따뜻하게 내리쪼이는 태양의 기운이 느껴진다. 준비됐나, DK?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그녀는 가슴을 펼치듯 커튼을 열어젖혔다. 그 순간 뜨겁고 강렬한 빛이 쏟아지며 그녀의 피부를 까맣게 태웠다.

DK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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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폐를 끼칩니다-
하지만 이런 걸 올려도 되는 걸까요(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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