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기억의 조각

2004.04.26 14:0904.26

                                        


            "아우, 짜증나!"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정원은 신경질을 마구마구 냈다.

            "꽤 힘들었구나."

            난 짧게 말했다.

            "남자애가 그렇게 바람을 펴대면, 응? 나같으면 옛날에 헤어졌다. 뭐
           야, 도대체. 뻑하면 헤어지니 마니 하지만. 결국 못 헤어지잖아. 이번
           이 처음도 아니고."

            대화의 대상이 되는 아이는 최미영. 우리과 같은 학번이다. 미영이는
           소개팅에서 만남 남자애와 꽤 진지하게 사귀고 있는데  남자애가 은근
           히 다른 여자애들도 만나고 하는 모양이다.

            "저런 애랑 어떻게 결혼까지 한대?"

            양가 부모님께 인사도 다 드렸고, 졸업하면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아까 말했듯이 남자애의 바람기였다. 미영이가 술자리에  데리
           고 와 소개시켜줬던 그 남자애에 대한 내 인상은,  저 애는 한 사람만
           보고 살기가 천성적으로 힘든 애라는 거였다.  분명히 매력은 있었다.
           자유분방해 보였고, 쾌활하고, 뭐랄까, 영화 리플리에 나왔던 쥬드 로
           같은 느낌이었다.

            "냅둬라, 하루이틀이냐. 난 이미 포기했다."

            수희가 한 마디 거들었다.  미영이는 남자애가 한 번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친구들을 돌아가며 울고불고 하소연을 하곤 했는데 이번  상대
           가 정원이었다.

            "미영이 걔가 뭐라 그랬는지 알아? 내가 그런 애 왜 만나냐고,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니까,  상대의 단점도 다 이해해주는 것이  사랑이니,
           어쩌느니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었겠지만 남자애가 돈도  잘
           쓰고, 라고 하더라. 참 나, 결국 돈 때문이라는 거 아냐?"

            "글세, 걔가 하루이틀 그랬고, 그런 애가 한 둘이냐. 정미도 봐.  부
           모님이랑 살기 싫다고 그 난리를 하지만, 정 그렇게 싫으면 집 나오라
           그래. 요새 월셋방 싼 것도 있고.  죽어라고 아르바이트하면 못  나올
           것도 아닌데 결국 못하잖아. 걔 얘기 계속 듣다보면 고민을 가지고 있
           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니까. 어차피 뛰쳐나오
           지도 못할 거, 불평은 왜 그렇게 해대는데?  그리고, 막말로 걔네  집
           정도의 문제가 없는 집안도 있냐?"

            수희가 손까지 휘저어가며 말했다.

            "사람들은…그냥…길들여지는 것을 좋아하니까."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아주 잠깐 주위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럴 수도 있지. 혜영이 말인데, 걔 뼉하면 사는게 힘들다, 어쩐다,
           하는데, 진짜 고민이 있다기 보다는 그냥 고민을 위한 고민을 하는 거
           같다니까. 특히 시험때면 더 하잖아. 공부 안할 핑계거리 같다니까."

            "야야, 관두고, 술이나 먹자. 좋은 얘기 하면서."

            "그래그래, 근데 너 리포트 썼냐?"

            "그게 좋은 얘기야!"

            화제는 다른 곳으로 옮아갔다. 수희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야, 담배 좀 끊어!"

            정원이 질색을 했다.

            "너도 펴봐. 그럼 좋은 거 알테니까."

            수희가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짙은 담배 냄새.  나도 모르게  그 애가 했던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오랫 동안 그 애를 잊고자 노력해 왔었는데...

            수희는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담배 냄새가 묘하게 자극적으로 느
           껴졌다. 그 애와 함께 있을 때처럼.


            그 애에게선 언제나 흐릿한 담배 냄새가 났다.  그 앤 언제나 줄담배
           를 피워대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공원이나 놀이터나 어쨌든 그 애
           가 맘편히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에서 만나곤 했다. 나중에 미성년자
           냐고 묻지 않고 담배를 피워도 아무말 하지 않는 카페를 찾기  전까진
           말이다.

            그렇게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 걸 보면 학교에서는 어떻게 참는지  신
           기할 정도였다. 그 앤 숨을 깊이 내쉬고 담배에 마치 수천가지의 맛이
           있어서 그 중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되는 양 느리게 숨을 내뿜곤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담배를 피우는 그 애의 모습을 보는 걸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뭘 어쩌자는 건지."

            난 두 손으로 턱을 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앤 가만히 날 보면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항상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과 똑같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런데 계속 싫다, 바꾸고 싶다, 고 말하는 거야. 이렇게 해보면 어때?                  
           라고 말하면 뭔가 표정이 묘해져. 그리곤 그래, 그래야지, 라고 말하는
           데, 정말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가 않아.  그러고 다음에 이야기하면
           또 같은 말의 반복이야."



            중고등학교 때 나는 꽤 성격이 좋은 편이었다. 누구와도 편하게 이야
           기했고, 그래서 반 아이들, 심지어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촌오빠나
           언니들의 고민도 종종 들어주는 편이었다.

            난 대체로 해줄 말이 없었다. 누군가가 고민을 이야기할 때 가장  좋
           은 방법은 그냥 들어주는 것이다. 그 사람을 위한 조언을 해준다고 해
           도 그것은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문제의 해결방법을 누구보
           다 잘 아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실천이다.

            하지만 가끔은 문제가 실천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뻔한 개선
           방법이 보이는데도, 실천이 문제라기 보다는, 그냥 고민이 있는 것 자
           체를 심하게 말하면 즐기는 것 같아 보일 때도 있었다.

            그 애에게 대충 이러한 말을 하자 그 애는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그냥… 길들여지는 것을 좋아하는군…."

            "…응? 무슨 말이야?"

            "고민 자체에 길들여져 버리는 거야. 그 고민이 없으면 할 게 없어져
           버리는 거지. 그 고민이, 그 문제가,  그 고통이  지금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데 그게 없어져 버리면, 뭘 해야하지?"

            그 애는 또박또박 말을 끊어가며 말했다.

            "…알 듯 말 듯해."

            그 때 그 앤 그냥 흐릿하게 웃었던 것 같다.



            "넌 진짜 말이 없어."

            상념에서 깨어났다.

            "너랑 친해지는 거 어려워하는 애들이 꽤 많더라."

            수희가 말했다.

            "그래? 난 별로 그런 생각 안해봤는데."

            정원이 스스로를 약간 과시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미영이가 너한테도 한 번 이야기하려 했었다며? 그 때 네가 난 그런
           이야기들을 생각없다고 잘라 말했다며? 미영이가 어떻게 그런 애가 다
           있냐고 펄펄 뛰더라."

            수희가 정원의 말을 일부러 모르는 척  하며 말했다.  말들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의 편린.



            고등학교 때까지 난 유쾌한 성격이었고, 모든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 앤 늘 말이 없었고,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 애는 묘한
           느낌의 중성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단발머리.  이
           렇다할 특징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보이쉬한 것도, 여자애 같은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중성적인 분위기. 조용해서 눈에 안 띌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사람의 시선을 끄는. 그리고 한 번 시선을 준 이 후에는  도
           저히 다른 곳을 볼 수 없게하는. 아니, 그렇게 느낀건 나뿐이었을지도.

            그 애와 처음에 어떻게 말을 하게 되었고, 어쩌다가 친해지게 되었는
           지는 이상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중에 몇 번이고 돌이켜서  생각
           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우린 어느 순간엔가 단짝이 되어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

            우리 집에 사람이 없을 때면 난 그 앨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우린
           종종 입맞춤보다  조금 더한 애무를 나누곤 했다.  그 애의 마른 듯한
           목덜미와 어깨 선, 호리호리한 허리의 감촉, 그 모든 것을 아직도  하
           나하나 기억할 수 있다.



            대학 친구들과 헤어져서 집으로 오면서 편의점에 들려 그 애가  좋아
           하던 하이네켄을 샀다. 빌어먹게도 오늘이었다. 떠오르고 말았다.  그
           애는 3년 전 오늘 죽었다.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그 앤 자살했다.


            그 애가 죽고 1년 정도 지나 내가 대학에 들어온 후 우리 집은  이사
           를 했다. 그 애와 늘 가던 공원은 아니었지만, 집 근처 놀이터로 가서
           맥주캔을 땄다. 네모난 비닐의 촉감. 난 그 애가 즐겨피던 담배를  사
           서 옆 자리에 놓았다. 필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그냥,  나도 모르게
           손이 가 버린 것 뿐이다. 빌어먹을.


            장례식장에서 그 애의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 애가 아르
           바이트를 하면서 몰래 돈을 모아놓은 통장을 아버지가 발견했다. 아버
           지는 그 애를 발로 걷어차고, 두들겨 패고, 통장을 빼앗아갔다.  비밀
           번호를 말했어야 할 그 애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애는  그
           밤, 학교로 왔고,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학교 건물의 현관문을 따
           고 옥상으로 올라갔고, 뛰어내렸다. 그게 다였다.  내게 한 마디의 말
           도 없이.

            그 애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원망하며 펑펑우는 걸 봤다. 그 애의  아
           버지가 술에 취해 소리지르는 걸 들었다. 저 둘은 헤어지지 않을 거다
           . 왜인지 모르지만,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왜 그랬어야 했니, 왜!"

            몇 번을 돌이켜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앤 늘 여행을 가고 싶어했
           다.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했다. 그 돈은 그 애가 언젠가  떠날거라
           고 말하며 모으던 돈이었다.

            다 좋다. 그래, 좋아. 다 좋아, 왜 날 찾아오지 않았니, 왜!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그 이후 난 언제나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정
           신을 차려보면 난 항상 울고 있었다.

            엉망으로 취해 집에 돌아왔다.  다행히 식구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마지막 남은 맥주 캔을 땄다. 빌라 4층. 여기서 떨어져도
           죽을까?

            창턱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창밖에 보조창이 있어 떨어지기 쉬운 구
           조가 아니다.

            왜.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프고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창문을 열고
           술을 반은 쏟고 잠들어있던 날 발견한 건 오빠였다. 오빠도, 어머니도
           내가 일단 몸을 추스리고 나면 야단을 치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
           다. 머리가 몽롱했고,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왜. 왜. 왜.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신이 없고, 눈앞이 아득한 가운데 어디선
           가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마르고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손이 내 이마를 쓰다듬었다. 난 이
          손을 알고 있다. 내 온몸이 기억하고 있다. 난 그 손을 잡았다.

            "왜 그랬어?"

            "세상에 길들여지고 싶지 않아서."

            보이진 않았지만 그 애의 목소리로 그 애가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넌 바보야."

            "그래, 난 바보야."

            "널 사랑했어."

            "나도 널 사랑했어."

            격한 내 말투와 달리 그 애의 목소리는 화가 날 만큼 부드러웠다.

            "난 길들여지지 않을거야."

            울음때문에 목이 메여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 넌 길들여지지 않을거야."

            "너같은 방식을 택하지도 않을거야."

            "너라면 잘해낼거야."

            "가지마……."

            그 애가 내 손을 잡았다.  그 애의 입술의 감촉이  이마에 느껴졌다.
           언제나처럼 메마른 입술.

            그리고 사라졌다.

  


            담배와 함께 하이네켄을 샀다. 이번엔 라이터도 샀다.  하지만  불을
           붙이진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은가.
            무엇을 하면 좋은가.

           해답은 아무 곳에도 없었고 아직도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포장지를 찢고 불을 붙였다.

           기침이 터져나왔다.

           난 길들여지진 않을거야.

           단지 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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