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수안아......"

사령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수안은 자신보고 직접 조사를 하러 원정을 떠나라는 사령관의 명령에 몹시 기분이 상해있던 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령관도 그의 기분을 알고 있는지 굳이 그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말을 계속했다.

"세상에는 말이다......보통 사람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비밀스럽게 일어난단다."그가 어두운 얼굴로 무겁게 말했다."너에게 뭐라고 얘기해야할 지 모르겠구나. 한가지만 묻자. 넌 그 소형전함에 누가 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그건......"

그렇다. 수안은 그것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해보지 않았다. 지나친 우월감에 휩쓸려 가장 중요한 걸 간과한 것이었다. 누가 타고 있었을까......수안은 몰랐다. 사령관의 입에서 그 질문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그는 그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이렇다할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머뭇했다. 명색이 수석 보좌관인 그가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언급조차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는 사실에 어찌나 황당하고 창피했던지 그는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XX'라는 글자의 뜻이 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수안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이미 알고 있을 게다. 본국과 나머지 두 세력이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때를......"

"그건......40년 전의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수안의 되물음에 사령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당시는 우주 해적들의 기세가 워낙 등등했던 시기라 세 세력은 방대하게 퍼져 활동하는 그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지. 그들은 웬만한 군대를 능가하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우주 개척지들을 관리해야 하는 세 세력은 도저히 각자의 힘만으로는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힘을 모으기로 했고, 그 때부터 손쉽게 우주 해적들을 소탕할 수 있었지. 여기까지는 너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

사령관의 말에 수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의 일은 가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대 사건이었다. <연방의 역사>((연방 훈련대 교과목))에서는 간단하게 다루고 있었지만, 수안은 자신이 알고 있는 재미있는 사건들 중 적대적인 세 세력간의 협력을 제법 인상적인 사건으로 분류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령관의 말을 금세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특히 영향력이 큰 가문일수록-그 일을 매우 치욕스럽게 여겼다.

"당시 나도 너처럼 수석 보좌관이었다. 나는 사라니고 사령관을 모시고 우주 해적을 소탕하는 일에 앞장섰지......모두들 우주 해적의 씨를 완전히 말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나는 그 자를 만났지. 우주의 하얀 악마라 불리는, 모든 우주 해적들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는 그자를 말이다......존 말콤! 이게 바로 그 자의 진짜 이름이다."

"존 말콤? 정말 그 자가 우주의 하얀 악마란 말입니까?"

수안은 무척 놀란 듯 격앙된 어조로 외쳤다. 대관절 그가 어떤 인물이 길래 수안이 이토록 놀라는 걸까?

우주의 하얀 악마......우주 해적의 황금기를 몰고 온 전설적인 악당이었다. 워낙 대담한데가 두뇌가 비상해서 그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때에는 단 한 차례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너무나 잔혹한 성격의 소유자라 자신에게 대항했던 자들의 눈을 뽑아 내거나 귀를 잘라내서 기념품으로 삼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시안 연방, 유로 연합, 아메리카 자유국......이 세 세력이 협력해 우주 해적 타도를 외치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결국 강성했던 그의 더러운 왕국도 너무나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다. 공적에 눈이 뒤집힌 자들은 서로가 우주의 하얀 악마를 죽였다고 주장해댔으나, 이렇다할 증거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항간에서는 너무나 손쉽게 우주 해적을 소탕할 수 있었던 건 우주의 하얀 악마가 갑자기 자취를 감춰 버렸기 때문이라고 떠들어댔다.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우주의 하얀 악마가 뒤에서 지휘하는 우주 해적들치고는 단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와르르 패배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안은 그 전설적인 악당의 이름이 존 말콤이라는 건 처음 알았다. 악당이라고는 하지만 확실히 그의 전투적 능력이 천부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수안은 훈련생 시절에 불법적으로(우주의 하얀 악마는 잔혹한 살인자인데다가 저주받을 악인이기 때문에 모든 세력은 그를 반국가적 인물로 정했다.) 그에 대한 얘기를 다룬 책을 몇 권 읽었는데, 대부분 그를 깎아 내리거나 비난하는 식의 내용을 다루고 있었지만, 오직 리푸얀만이 그의 관해서 아주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수안은 리푸얀이 쓴 <하늘이 내린 불우한 천재>라는 책을 수 십 번이나 읽었는데도 전혀 질리지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수안이 이만한 배포를 가지게 된 데나 아버지만큼이나 냉혹할 정도로 결단력을 가지게 된 데에 아버지의 영향만큼은 못하겠지만, 그 책의 영향이 결코 적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수안은 사령관이 우주의 하얀 악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그런데 아버지는 우주의 하얀 악마가 존 말콤이라는 걸 어떻게 알고있는 걸까......수안은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냐하면 방금까지도 수안은 그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비단 수안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만큼 어둠의 장막 속에 가려진 아주 비밀스런 존재였다.

"너는 내가 어떻게 그 더러운 자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무척 궁금할 게다."사령관이 말하는 동안, 수안은 침을 꿀컥 삼켰다. 우주의 하얀 악마라 불리던 존 말콤이라는 존재는 오래 전부터 그의 호기심을 유난히 자극하는 매력적인 요소를 듬뿍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나는 그를 직접 만났었지. 어떻게 놈을 잊을 수 있겠는가? 'XX'는 놈의 상징적인 표식이다. 놈의 부하들은 모두 그런 표식을 가지고 있지. 그 표식을 아는 사람은 나와 절친했던 동료들 몇 몇 뿐이었다. 네가 회의장에서 그 표식을 보여줬을 때, 내가 무척 놀란 건 그 때문이다. 그 표식에서는 내가 전에 겪었었던 그런 무서운 뭔가가 느껴졌다. 나는 그 때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후, 하늘이 나에게 큰 기회를 주었지만 나는 그 때 놈을 죽이지 못했다. 그것이 천추의 한이다. 내 말은 여기까지다. 그만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이미 너와 같이 갈 대원들을 뽑아 네 방으로 모이라고 명령했다."

사령관은 무척 심란한 듯 각진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수안은 그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속으로 무척 실망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우주의 하얀 악마를 직접 만났었다는 얘기를 직접 들은 것은 큰 소득이었다. 그리고 'XX'라는 영문글자의 의미도 알게 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좀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싶어했다. 어떻게 해서 아버지가 존 말콤을 죽일 뻔했는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그의 심정이 얼굴에 그대로 들어 났는지 사령관이 갑자기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존 말콤에 대해서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그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인간이다. 나는 더 이상 너에게 과거지사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아직 모든 게 확실히 밝혀진 건 아니니까......나는 그저 불길한 생각이 들어 너를 직접 그곳에 보내려는 거다. 어림잡아도 그는 지금 칠순이 넘어가는 나이일 테니 과거 같지는 않겠지. 그저 조사만 하고 오라는 거다. 그 더러운 악마에게 어떠한 관심도 갖지 말거라. 그는 사람의 심리를 아주 잘 이용하지. 나조차도 놈에게 속아넘어가 놈을 결국 본의 아니게 도망치도록 도와주고 말았으니까. 그건 내 최악의 실수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놈이 정말 살아있다면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말아라. 절대로......"

사령관은 이렇게 말하고는 머리까지 편안하게 받혀주는 등받이에 나른하게 등을 대고, 의자를 홱 돌려 다시 창 너머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행동이 뭘 뜻하는 지 잘 아는 수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존 말콤에게 흥미가 있다는 걸 아버지가 눈치챈 이상, 사령관 집무실에 더 이상 머물 수는 없었다.

"결국 내 평생에 지우지 못 했던 그 하나의 실수가 결국 오늘 같은 일을 부르는구나. 부디 나의 이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기를......"

수안이 거수경례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사령관은 몹시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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