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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아메리칸 드리머

2023.02.24 00:4302.24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입안은 바싹 말라있었다.

“이상한 꿈을 꿨어 오늘도. 아주 이상한.” 내가 말했다.

"무슨?" 윤이가 물었다. 손은 나의 배 위에, 시선은 TV에 둔 채로.

"꿈이 이어지고 있어." 내가 말했다.

윤이는 채널을 마구 돌려댔다. 이 드라마에서 저 드라마로. 다시 저 드라마에서 이 드라마로. 늘 그렇듯, 내 이야기에는 두어 마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다.

"이어진다는 건, 그러니까." 윤이가 리모컨을 TV를 향해 찌르며 가리켰다. "저 드라마처럼?"

"그래, 저 따분하기 짝이 없는 드라마처럼 내 꿈도 그래. 배경은 1990년대의 미국. 나는 백인 버스 드라이버고, 귀여운 쌍둥이 딸이 있고, 잔디 마당이 있는 집에 살고, 폭스바겐 골프가 들어가 있는 차고도 있어. 실크 벽지를 물어뜯는 못돼먹은 프렌치불도그도 한 마리 있고."

"거기선 어떤데?" 윤이가 물었다.

"사는 건 다 똑같지."

"아니, 나 말이야. 자기 꿈에서 나는 어떤 여자냐구."

윤이는 조금 흥미가 생긴 듯 자세를 고쳐잡고 내 인중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지, 꿈속의 아내는 일본인이야.” 나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따지고 보면 미안할 일도 아니었다. “미국인이라고 반드시 미국인이랑만 결혼하란 법은 없잖아. 이를테면 존 레넌처럼."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어쨌든 일본인이고 인도인이고 간에, 난 아니란 거잖아?"

"그렇지."

"어째서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윤이의 손은 이미 내 배 위에서 떠나갔다. 무표정, 웃지 않을 각오가 된 얼굴. 상대방을 미치고 펄쩍 뛰게 만드는 그런 얼굴.

"뭐야, 그러니까 여태 꿈속에서 다른 여자랑 추저분하게 놀아난 거잖아? 자그마치 3년 하고도 6개월이란 시간 동안 나를 속인 채. 그 꿈이란 것도 모두 일본 여자의 구속된 주체성에 집착하는 자기의 포르노그래피적인 욕망이 투영된 거고. 내가 정확히 맞혔지? 일본 여자한테 필요 이상으로 환상을 품는 작자들은, 자기 딸을 감염된 면도 칼로 할례 시키는 놈들 다음으로 끔찍한 인간들이야."

"말이 심하잖아. 추저분하다니. 게다가 일본 여자랑 할례는 당최 무슨 엉뚱한 소리야. 프로이트도 울고 가겠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그저 꿈이잖아.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일상의 꿈."

그때 갑자기, 불에 달군 인두로 옆구리 살을 지지는 느낌이 났다. 윤이가 내 옆구리를 있는 힘껏 꼬집은 것이다. 살의를 품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하게. 그러더니 불쑥 내 몸 위로 올라탔다. 그러고는 동생의 물건을 빼앗는 심술궂은 누이처럼, 막무가내로 내 파자마 바지와 속옷을 단숨에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매장이라도 당하는 듯 압도되어 몸을 한치도 꿈쩍할 수 없었다. 그리고 뱀이 생쥐를 집어삼키는 것과 같은 야만적인 삽입이 이어졌다. 윤이의 창백한 육체는 작두 위에 올라탄 무당처럼 광적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런 쓰레기들 한둘쯤 없어져도 괜찮다고. 안 그래?” 윤이가 입꼬리를 찢으며 새된 소리로 깔깔 웃었다.

나는 소름이 끼쳐 비명을 질렀다. 목젖이 잘린 사람처럼 악을 써도 바람 새는 소리만 나왔다. 아아아아아아, 육각면체의 밀실 속에 갇힌 나의 비명은 무성의 메아리를 쳐댔다.

얼마나 지났을까, 경련이 그치고 살갗에 닿는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윤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 어깨를 마구 흔들어댔다.

그래, 어서 모두 장난이었다고 말해줘.

아니, 이건 윤이가 아니잖아? 윤이는 영어를 할 리 없으니까.

 

“유 오케이, 허니? 와츠 롱. 해브 어 배드 드림?”

미치코였다. 그래, 나의 상냥한 일본인 아내 미치코. 그녀가 손등으로 식은땀에 젖은 내 옆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이츠 오케이, 허니. 돈트 워리."

나는 축축한 인중을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댔다. 이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체취.

그렇고말고, 난 미국인이야. 그러니까 존 레넌처럼 일본인 아내가 있는, 낮에는 버스를 몰고, 이 층엔 쌍둥이 딸이 곤히 잠들어있고, 프렌치불도그가 벽지를, 아무튼 빌어먹을 한국 땅은 밟은 적도 없지. 식은땀을 흥건히 배출한 몸이 위스키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허리를 일으켰다. 묵직한 두 발을 바닥에 디디면서 왜인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웃옷을 들춰 옆구리를 확인했다. 악마의 입술 모양과도 같은 새카만 피멍 자국, 방화처럼 지글거리는 통증. 황급히 뒤돌아서 미치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은 거꾸로 돌아가있다.

해브 어 배드 드림? 해브 어 배드 드림? 해브 어 배드 드림? 해브 어 배드 드림?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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