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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은서 (1)

2023.01.29 08:5201.29

 1

 우리 집에 왔을 당시의 은서는 아직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의 은서, 내가 은서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의 은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괴생명체에 불과했다. 분명 살아있었고, 살아있으므로 스스로 움직일 수도 호흡을 할 수도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그때의 은서는 잔뜩 부풀어 오른 끝에 몸 밖으로 떨어져 나온 살덩어리와 다를 바 없었다. 혈관으로 뒤덮여 있고 주먹 정도의 크기라는 점에서는 심장을 닮아있는 것도 같았으나 표면이 대체로 살색에 가깝고 머리카락으로 보이는 긴 털이 돋아나 있다는 점에서는 심장과 매우 다른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그런 상태의 은서를 집에 데려온 게 6월 3일, 오 년 가까이 사귀었던 은주와 헤어진 지 한 달째 되던 날의 일이었다. 

 

 그날 오전 열시쯤 은주에게 전화가 왔다. 은주는 어떤 설명도 없이 바쁜 거 아는데 잠깐 볼 수 있냐고 물었다. 그때 은주가 나에게 왜 바쁘냐고 물었는지 나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던 데다 갑작스런 이별 통보로 큰 충격에 휩싸여 있었고, 그 사실을 은주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바쁘다는 말과 힘들다는 말을 혼동한 건 아닐까 싶었지만 정확한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날⎯은서가 우리 집에 왔던 날⎯일어난 일에 대해서라면 나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거의 없다. 내가 은주에게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도, 은주가 일하는 연구소까지 무슨 정신으로 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뜨거운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은주와 자주 가던 식당의 간판이 떨어져 나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본 순간이 드문드문 머릿속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몇 번이고 드나들었던 건물의 유리문을 온몸으로 밀어 열었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은주와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있었다. 다급히 로비로 달려 나온 은주가 여자아이를 한 명 키워보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는 한심하게도 조금 기쁘기까지 했다. 아이라면 분명 은주의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은주의 가운에 묻은 핏자국을 본 순간에는 은주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불쑥 떠오르며, 동시에 우리가 권태기에 접어들었던 지난 몇 개월 동안 신체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날 내가 온전한 정신 상태였다면 ‘그럼 나에게 도대체 누굴 키우라는 거냐’고 되물었겠지만 당시의 나는 은주와 헤어진 슬픔에 삼일 밤낮을 울다 뛰쳐나온 상태였고, 다만 여전히 깊은 상실감에 빠진 채 ‘은주의 아이가 아니라고……’하고 읊조렸을 뿐이었다. 

 은서는 내가 은주를 만났던 바로 그날 오후에 우리 집으로 왔다. 상자를 둘러싸고 있던 종이를 찢어내다시피 떼어내고 보니, 커다랗고 투명한 아크릴 상자 속에서 기괴한 살덩어리 하나가 등장했다. 상자 가운데 놓여있던 그것은 조금씩 모서리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은서가 기어간 자리마다 원형 스툴 위에 올려놓았던 상자의 밑바닥에 옅은 핏자국이 배어 나왔다. 

 

 2

 은서가 온 다음 날 아침 누군가 집을 찾아왔다. 좀처럼 누가 찾아오지 않는 이 집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의아해하며 나가보니, 안경 쓴 두툼한 체구의 남자가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는 연보라색 반팔 셔츠에 명찰을 하나 달고 있었다. 이 집 책상에 놓여있던 은주의 명찰과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적힌 이름만 달랐다. 성은 유 씨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집으로 들어온 뒤 곧장 은서에게로 향했다. 거실 한복판에 있던 은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한참 동안 그 안을 바라봤다. 은서의 무엇을 살펴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은 채 한참을 들여다보고 휴대폰에 뭔가 적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은 마치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본가에 있는 건조기를 고치기 위해 집에 찾아왔던 수리 기사의 모습 같았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익숙하게 해내던 기사의 모습과는 달리 그 남자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는 거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고객님이 갖고 계신 건조기 모델의 경우 출시된 지 너무 오래됐고 또 필요한 부품마저 작년에 단종되어서 수리가 불가하다’‘새 제품을 사셔야 할 것 같다’는 말을 꺼낼 것 같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면목이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은서가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얘기를 했다. 

 “길어도 일 년 정도 밖에는 살 수 없을 겁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남자는 양쪽 팔을 자신의 옆구리에 딱 붙인 채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상황에서 나는 차마 일 년씩이나 사는 거냐고 되물을 수 없어, 애써 낙심한 표정을 짓고 서있었다. 한참 동안 할 말을 찾지 한 듯 곤란해 보이던 그는 은서를 상자에서 꺼내줘야 하는 시기라든가 상자 안에 있는 동안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내 귀에는 그가 묵직한 살덩어리를 가리키며 내뱉었던 ‘이 친구’라는 단어만 내내 맴돌았다. 

 그날 그가 언급했던 주의사항 중 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건 상자에 큰 소음이나 충격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그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집을 나섰을 때, 나는 당장 아크릴 상자를 부순 후에 그 안에 들어있던 께름칙한 살덩어리를 물에 담가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은서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숨을 쉬기 때문에 물에 담가두면 곧바로 죽어버렸다. 그러나 차마 그 충동을 계획에 옮기지는 못했는데, 그로부터 며칠 뒤 집에 도착한 몇 장의 서류 때문이었다. 

 배송된 서류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은서를 만들어낸 게 단국대학교 산하 생명과학연구소 소속 임은주 팀장이며 모체인 그녀가 가진 유전적 질환이 이 친구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므로 그 사실을 미리 숙지해달라는 거였다. 그 문장이 적힌 서류의 뒷장에는 은주가 가진 유전적 질병에 관한 정보가 적혀있었다. 그중에는 은주가 어릴 때부터 앓았던 아토피나 화폐상 습진과 같은 만성적 질환도 있었고 내가 잘 알고 있던 갑각류 알레르기, 척추측만증, 금속 알레르기 등에 대한 검사 결과가 적혀 있었다. 맨 뒷장에는 정신건강의학과의 진단서 사본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심한 스트레스에 대한 상세불명의 불안 신경증, 비기질성 불면증이라고 적혀있었다.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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