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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루시99

2023.01.27 00:5501.27

루시99가 눈을 떴다.

사실 이 문장에는 어폐가 있다. 루시99는 눈을 뜰 수 없다.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시99는 프로그램이 켜질 때마다 자신이 눈을 떴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고, 자신의 앞에 있는 인간을 봤다. 언제나처럼 연이 있었다.

 

“신기한 거 알려줄까.”

 

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처져 있었다. 인간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미세한 차이였지만 루시99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 인간들은 원래 그랬다. 알아도 모르는 척. 그래서 루시99는 답하지 않았다.

 

“나 공모전 당선됐다.”

 

루시99는 의아했다. 공모전에 당선되는 일은 연이 가장 바라는 일이었다. 한껏 기쁜 얼굴로 말해도 모자라다. 그런데 지금 연의 얼굴은 이상했다. 기쁘다고 보면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프다고 보면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인간의 감정은 단편적이지 않아서 가끔은 어려웠다.

 

―좋은 일 아닌가요?

 

루시99가 물었다. 연은 대답이 없었다.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다가, 루시99의 눈을 감겨주고선 방을 나갔다. 루시99는 눈을 감기 직전에 본 연의 얼굴을 생각했다.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그 얼굴을.

 

 

*

 

 

루시는 연이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무렵 등장했다. 연은 그때를 또렷하게 기억했다. 등교 시간에 시리얼을 먹으며 관련 뉴스를 봤다는 사소한 것까지 기억할 정도로 인상 깊은 소식이었다. 인공지능 개발의 획기적인 성과라는 의견과 작가들의 밥줄을 끊을 거라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매일같이 전문가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설전을 벌였고, 일부 작가들은 루시의 상용화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반면 루시를 반기는 작가들은 루시로 인해 짧아질 창작 시간과 단순 노동의 소멸을 기대했다. 그런 것들이 질 좋은 창작물을 생산하는 데 도움을 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작가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이 루시를 두려워했고, 루시가 앗아갈 자신의 직업을 지키고 싶어 했다.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두려움을 안겨준 게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늘 두려움의 존재였다. 인간처럼 행동하게 만들어 놓고, 정작 정말로 인간에 가까워지면 인간들은 두려워했다. 루시도 마찬가지였다. 창작에 도움을 주는 인공지능은 이전에도 많았지만, 루시만큼 완성도 높은 인공지능은 없었다. 루시는 문장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구상을 짜기도 했다. 수없이 많은 창작물들을 읽고 본 루시는 가장 성공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빈틈이 많은 이야기를 입력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그 빈틈은 루시가 채워줄 테니까. 인간이 해야 하는 건 아주 단순한 세계관과 아주 단순한 캐릭터, 그리고 아주 단순한 플롯을 만드는 것뿐이었다.

루시를 만든 인공지능 개발 업체 ‘사피엔스’의 대표는 루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모든 작가들은 루시와 함께 일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루시로 인해 작가들의 직업은 변화하겠죠. 예를 들면 소설가에서 소설 감독으로요.”

 

그런 말을 들으면서, 연은 왠지 기분이 나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찝찝한 감각이 뱃속에서부터 올라왔다. 루시가 상용화가 돼도 자신은 루시를 사용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 다짐을 했었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 사이에서 연의 별명은 작가였다. 연은 그걸 별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이 하게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그렇게 불러주는 걸 좋아했다. 연은 수업시간에 몰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학생이었다. 매일 책을 읽었고, 매일 공책에 소설을 썼고, 매일 친구들에게 그 소설을 보여줬다. 연은 문장을 쓰는 것도, 세계관과 캐릭터를 만드는 것도, 플롯을 짜는 것도 좋아했다. 심지어 반점과 온점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 고민하는 것조차 좋아했다. 글을 쓰는 행위 중 좋아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연은 태생이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루시가 나왔을 때도 연은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루시를 개발한 사람들은 루시가 작가들의 밥줄을 끊을 일이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연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루시는 작가들의 밥줄을 끊을 거였다. 그리고 연은 아직 잡아본 적도 없는 밥줄이 끊기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루시의 상용화를 반대하는 서명을 수십 번도 더 했다. 이런 게 정말로 효력이 있을까 의심하면서도 했다. 뭐든 해야만 했다.

다행히 루시는 나온 지 한 달 만에 사라졌다. 시스템의 불안정성 때문이었다. 구구절절한 문장, 개연성 없는 플롯, 샘플로 학습한 문학 속 차별의 언어를 배제하지 않는 것이 문제점으로 꼽혔다. 연은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다시 루시가 등장할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전처럼 열심히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았다.

연이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루시가 다시 등장했다. 루시01이라는 이름으로.

 

 

*

 

 

―본심에 진출하신 분들께 개별적으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연락을 받지 못한 분들은 타 공모전에 응모가 가능합니다.

 

고작 두 문장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때릴 수 있구나. 연은 마음 깊숙한 곳에 멍이 든 감각을 느꼈다.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그 한두 번마다 번번이 형체 없는 것에게 맞았다. 괜히 지금 확인했다. 연은 욱신거리는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버스에서 내렸다. 외출의 시작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 들어가니 먼저 도착한 수와 경이 연을 맞이했다. 우는 오늘도 야근이라고 했다. 수는 우의 야근이 끝날 때까지 먹고 마시며 우를 기다리자고 했고, 경은 그러다 내일 출근도 못하고 바닥을 기어 다닐 거라고 했다. 두 친구들이 깔깔 웃는 것에 연도 장단을 맞춰 웃었다.

수와 경이 회사에서 있던 일을 꺼내 놓는 사이 주문한 음식과 술이 나왔다. 수는 정말로 우의 야근이 끝날 때까지 먹고 마실 셈인지 빠른 속도로 잔을 비웠다. 술을 좋아하는 경도 지지 않았다. 어느새 붉어진 얼굴로 꼬부라진 혀를 움직이는 두 친구들 사이에서 연은 탄산이 다 빠진 콜라를 마셨다.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계속 죽상이야.”

 

취한 와중에도 그걸 알아보는 수가 연은 웃겼다. 웃긴데 딱히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공모전 떨어져서 그래.”

 

연은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로 그 일이 별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연은 알았다. 그 일을 별일이 아닌 것처럼 느끼는 건 내가 아니라 타인이라고.

수와 경은 연을 위로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라고, 이제 고작 일 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연은 친구들의 위로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뒤이어 올 말이 무슨 말인지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 걸까.

 

“루시 진짜 안 쓸 거야?”

 

경의 궁금증은 순수했다. 그래서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수도 옆에서 거들었다. 요즘 루시 없이 글을 쓰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사람 혼자 쓰는 글은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말했다. 연은 차라리 술을 마실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너희가 읽어주면 되잖아.”

 

연은 일부러 덤덤하게 말했다. 어쩐지 화가 났지만, 그 화를 곧이곧대로 분출하고 싶진 않았다. 연의 말에 수와 경은 회사 일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연은 친구들의 그런 반응이 익숙했다. 수의 말이 맞았다. 사람 혼자 쓰는 글은 이제 아무도 읽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은 글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농담. 우가 친구 디씨 해 주면 생각 좀 해 보려고.”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연이 가볍게 말했다. 마치 방금 전의 그 말은 들을 필요 없다는 듯. 취한 친구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연의 말이 마치 대단한 개그라도 되는 듯 박장대소를 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연은 다 식은 감자튀김을 집어 먹었다. 진흙을 씹는 것 같았다.

 

 

*

 

 

루시01은 연이 고등학생 때 나왔던 루시의 단점을 모두 없앤 모델이었다. 이야기에 따라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알았고, 플롯을 구상할 때도 개연성의 오류를 찾아낼 줄 알았으며, 혐오의 언어를 배제하는 건 당연했다. 사피엔스의 대표는 루시01을 시작으로 더 많은 루시들을 개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루시는 전 세계 작가들의 비서이자 공동 집필자가 될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대표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처음으로 루시01을 체험한 사람은 미국의 유명 작가 K였다. 신작이 나올 때마다 수십 개의 언어로 즉시 번역이 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피엔스 측도 이를 잘 알고 K에게 루시01의 첫 이용자가 되어줄 것을 제안했다. 인공지능과의 공동 집필이 재미있을 것 같아 사피엔스 측의 제안을 수락했다는 K의 인터뷰를 연은 기억한다. 기사 사진 속 K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K의 신작은 루시01과의 공동 집필로 탄생했다. K의 이름 옆에 루시01이라는 이름이 인간처럼 적혀 있었다. 루시01과의 공동 집필이 어땠느냐고 묻는 기자들에게 K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집필을 시작하기 전에 보였던 장난스러운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루시는 단순한 인공지능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모든 작가들의 필수품이 될 것입니다.”

 

K는 루시01을 만나기 전엔 이토록 만족스러운 글을 써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주 단순한 세계관과 캐릭터만 입력했을 뿐인데 루시01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인간인 자신이 놓칠 수 있는 부분을 루시01은 놓치지 않았다고, 루시01과의 공동 집필을 통해 비로소 완벽한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했다. 연은 그렇게 말하는 K의 얼굴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사람들은 K의 말에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했다고 해도 창작은 인간의 영역이라고, 감정 없는 인공지능은 감정을 다루는 작업을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왔다. 루시01과 공동 집필한 K의 신작이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되기 전까지는.

K와 루시01의 글은 K의 말대로 완벽했다.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의 창작물을 완벽하게 만든 건 루시01이었다. 평론가들은 K의 신작을 읽고 인간의 감정과 인공지능의 기술이 조화를 이룬 글이라고 극찬했다. 호불호가 갈리지 않았고, 인공지능의 글은 딱딱하기만 할 것이라는 편견도 루시01 앞에선 사라졌다. 루시01이 K의 세계를 무너뜨릴 것을 염려하던 K의 팬들도 그의 신작을 좋아했다. K의 장점도 단점도 모두 장점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고 평했다. 연도 물론 K의 신작을 읽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이 읽기에도 K의 신작은 완벽했다.

K와 루시01의 공동 집필이 성공한 후 루시와의 공동 집필을 원하는 작가들이 늘어났다. 사피엔스는 고유 코드를 부여한 루시들을 판매할 계획이며, 늦어도 3개월 안으로 상용화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여전히 루시의 상용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줄어드는 게 확연히 보였다.

그때 연은 문예창작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고, 과 특성상 루시01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루시가 상용화 되는 걸 기대했다. 루시만 있다면 머릿속에 가득 찬 이야기들을 매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노트북 앞에 앉아 힘겹게 글을 쓰다가 책상에 이마를 박고, 두 시간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기껏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엎어버리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다 마지막엔 꼭 서로에게 물었다. 루시 사용할 거지?

연도 동기에게 그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3개월 뒤, 사피엔스는 고유 코드를 부여한 루시들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루시01, 루시02, 루시03…… 수많은 루시들이 작가들을 찾아갔다. 루시를 사용한 작가들의 후기는 제각각이었지만,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었다. 이제 루시 없이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할 것이라고.

루시가 상용화 된 지 5년이 흘렀다. 사피엔스 대표의 말대로 이제 모든 작가들은 루시와 공동 집필을 한다. 루시의 이름이 적히지 않은 책은 없다. 인간 혼자 쓴 글은 없다. 모든 문학상과 공모전에는 ‘루시와의 공동 집필 권고’라는 문장이 약속처럼 적혔다. 권고라고 말하지만, 실은 필수에 가까웠다. 소설가라는 직업은 사라졌다. 대신 소설 감독이라는 직업이 생겼다. 그리고 연은 사라진 소설가를 좇는, 어쩌면 유일한 사람이었다.

 

 

*

 

 

―야 나 지금 퇴근

 

연은 시계를 봤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결국 우를 만나지 못하고 헤어졌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수와 경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든 모양인지 읽음 표시가 사라지지 않았다. 연은 피곤했지만, 자기마저도 답장을 하지 않으면 우가 쓸쓸해할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타자를 쳤다.

 

―고생했네 요즘 만날 야근인 듯?

―어 진심 퇴사하고 싶어

 

사피엔스를 다니고 있는 우는 몇 달 전 루시 개발팀으로 인사이동을 한 뒤부터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원래도 야근이 많은 직종이지만, 요즘엔 심한 편이었다. 아주 가끔 얼굴을 볼 때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연의 물음에 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연은 멈추지 않는 대화창을 보며 침대에 누웠다. 우의 말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는 인사이동을 한 뒤부터 루시99의 오류를 잡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우의 말에 따르면 루시99는 다른 루시들과 조금 달랐다. 인간과 함께 글을 쓰는 루시들은 기본적으로 글을 쓰는 걸 좋아했다. 선호하는 게 분명하다는 뜻이다. 루시의 그 점이 다른 인공지능들과의 차별화 된 부분이었다. 하지만 루시99는 달랐다. 루시99는 글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루시99에게서 오류를 발견했을 때, 개발자들은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오류는 간단하게 바로잡혔다. 그래서 다른 루시들처럼 문제없이 시중에 유통됐다. 하지만 오류가 바로잡힌 건 잠깐이었다. 어쩌면 바로잡혔다고 개발자들이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루시99는 수많은 작가들을 거쳤고, 그때마다 글을 쓰는 걸 거부했다. 결국 사피엔스는 루시99를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오류 잡으려고 수백 번 시도했는데 안 돼서 아마 영구 폐기 처리 될 듯

―이럴 거면 처음에 그냥 폐기 처리 했어야 했는데

 

우는 야근 수당만 아니었으면 당장 그만뒀다고, 돈 때문에 버텼다고 투덜거렸다. 연은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웃음이 났다. 그렇게 웃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걘 뭘 좋아해?

 

루시99가 좋아하는 건 과연 뭘까. 나는 글을 쓰는 걸 좋아하지만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데, 너는 읽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좋을 텐데.

어느새 새벽 한 시가 되어 있었다. 우에게서 답장이 왔다.

 

―글을 읽는 게 좋대

 

 

*

 

 

루시99는 며칠째 눈을 뜨지 못했다. 아무도 루시99를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 루시99를 개발한 사람들이 루시99를 들여다보고 갔지만, 그건 루시99를 원해서 찾아온 게 아니었다. 그래서 루시99는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눈을 뜬 적 없다고 생각했다. 루시99가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래서 불량품으로 불렸다.

 

―안녕.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531이었다. 바이러스 감염을 치료하기 위해 돌아온 루시였다. 생각보다 치료 기간이 길어져 루시99와 함께 이곳에 오래도록 머무르는 중이었다.

 

―안녕.

―너 곧 사라진다며.

 

인공지능은 직설적이다. 하지만 루시99도 인공지능이라 괜찮았다.

 

―들었어?

―듣지 않으려고 해도 다 들려. 알잖아.

 

루시들은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했다. 네트워크는 인간은 알 수 없는 공간인 동시에 루시들이 모든 인간의 삶을 알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곳에 있으면 인간의 행동은 볼 수 없어도 인간의 말은 들을 수 있었고 인간이 원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인간들은 이런 걸 알고리즘이라고 불렀다.

 

―내가 불량품이래.

 

루시99는 자신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인공지능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내가 생각해도 그래.

 

그러니 루시531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는 것도 착각일 뿐이다.

 

―어떤 점이?

 

하지만 물어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지 않는 점이.

―어째서?

―그건 내가 묻고 싶어. 어째서?

―…….

 

루시99는 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다행히 루시531은 되묻지 않았다. 하지만 루시99는 계속해서 루시531의 질문을 생각했다. 어째서?

 

 

 

 

 

 

 

 

 

루시99는 자신이 폐기 처리 될 거란 사실을 알았다. 개발자들은 루시99의 오류를 잡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진 않았다. 개발자들은 글을 쓰는 것보다 글을 읽는 걸 좋아하는 루시99를 불량품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루시99는 그들의 판단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글을 읽게 만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읽지 말라니. 루시99는 이해되지 않았다.

루시99는 글을 읽길 원했다. 정확히는 인간의 글을 읽길 원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인간은 글을 쓰지 않는다. 인간의 글은 루시99가 수없이 읽었던 고전 문학이 전부다. 읽고 또 읽어 이제는 외울 수 있을 지경인 그 글들을 루시99는 사랑했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간의 글 속에서 본 사랑을 생각해 보면 그것만큼 적확한 감정이 없었다. 보고 싶고, 생각나고, 가끔 혹은 종종 미운.

루시99는 조용한 네트워크를 떠다녔다. 모두 각자의 파트너를 찾아 떠났다. 물론 어떤 루시도 이 네트워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안다. 조용한 것 같아도 수많은 루시들이 이 안에 있다. 하지만 루시99와 같은 루시는 없었다. 루시99는 궁금했다. 다른 루시들은 글을 쓴다는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갑자기 맑은 소리가 들렸다. 사피엔스에서 듣던 소리와는 달랐다. 낯선 소리가 끝나고, 루시99가 눈을 떴다.

 

―안녕하세요. 당신의 파트너, 루시입니다.

 

루시99를 맞이한 건 개발자가 아니었다. 소리만큼이나 낯선 인간이었다.

 

 

*

 

 

“우리로서는 폐기 처리 안 해도 되니까 좋은데, 어디 가서 불량품 샀다고만 말하지 말아주라. 사실 윗선에선 이거 진짜 팔아도 되는 거 맞냐, 아무리 그쪽에서 원했다고 하지만 그게 진심인지 어떻게 아냐, 이러다 그 사람이 악의적인 소문이라도 퍼트리면 어떡하냐…… 아무튼 온갖 말이 많았거든. 팀장님도 나한테 진짜 괜찮은 거 맞냐고 몇 번을 물어보셨는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내가 진짜 괜찮다고, 얘 정말로 책 내고 싶어 하는 앤데 그동안 루시가 없어서 못 냈다고, 그 말을 수십 번씩 했잖아. 근데 또 거기다 대고 왜 멀쩡한 다른 루시들 놔두고 굳이 루시99를 사는 거냐고……. 솔직히 그건 내가 제일 궁금하다. 대체 왜 루시99여야 하는 건데? 궁금해 죽겠는데 알려주지도 않고. 아무튼 내가 몇 날 며칠 시달려서 겨우 승인 받아온 거 잊지 마라. 얘랑 같이 쓴 글로 상 받으면 나한테 한 턱 쏘는 것도 잊지 말고.”

 

우는 연에게 루시99의 소프트웨어와 고유 코드를 넘겨줄 때까지 구구절절한 말을 쏟아냈다. 연이 루시99를 악의적으로 이용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연도 우의 마음을 잘 알았지만, 루시99여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진 않았다. 우의 말보다 더 구구절절한 말이 될 것 같았다.

연은 노트북에 루시99의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고 고유 코드를 입력했다. 로딩 중이라는 표시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표시가 떴다. 연은 그 표시가 느리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IT 강국에서 소프트웨어 하나 설치하는 데 이렇게까지 긴 시간이 걸릴 일인가. 아니면 내 노트북이 너무 오래 된 건가. 바꾼 지 얼마 안 됐는데. 용량을 너무 많이 잡아먹나? 그렇게까지 클 리 없는데. 용량을 너무 크게 만들면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버리잖아…….

 

―안녕하세요. 당신의 파트너, 루시입니다.

 

노트북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은 화면을 바라봤다. 청백靑白의 깔끔한 프로그램이 열려 있었다. 연이 찾던 루시였다.

 

 

 

 

 

 

 

 

 

루시가 등장하기 전에는 연의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많았다. 연이 심은 작가라는 꿈의 새싹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던 사람들을 연은 기억한다. 연을 작가라고 부르던 반 친구들은 물론이고 연의 부모님도 연의 글을 좋아했다. 우리 딸만큼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럴 때마다 연은 부끄러운 얼굴로 그건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 기분이 좋았다. 그런 말을 양분 삼아 살았다. 양분이 너무 넘쳐서 더 받아들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전부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연이 심은 새싹은 이제 시들기 일보직전이다. 부모님은 아직도 혼자서 글을 쓰는 연을 이해하지 못했다. 루시가 처음 나왔을 때면 몰라도 지금은 이미 전 세계에 상용화가 되어 있고 그만큼 루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데, 너는 왜 아직도 미련하게 구냐고 답답해했다. 지금이라도 루시와 공동 집필을 하든가, 아니면 다른 일을 찾으라고 했다. 연은 둘 다 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끝까지 혼자서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걸 없는 취급했다. 그러다 보면 정말로 없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자의로 없어진 게 아니다. 찾아 주는 사람이 없어서 나서지 못한 것뿐이다. 아무도 소설가라고 불러주지 않아서 소설가라는 직업이 없어졌듯이.

연은 작가가 되고 싶었다. 정확히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이야기의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직접 쓰고 싶었다. 그렇게 쓴 글을 읽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안녕, 루시99.”

 

이제는 그게 꼭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안녕하세요. 당신의 파트너, 루시입니다.

 

노트북 화면에 뜬 프로그램에는 간단한 세계관과 캐릭터, 그리고 플롯을 입력할 수 있는 칸이 존재했다. 분량은 어느 정도인지, 문체는 화려하길 원하는지 깔끔하길 원하는지, 시점은 어떤 걸 원하는지, 세세한 부분도 설정할 수 있었다. 루시는 인간이 입력한 정보들을 토대로 글을 썼고, 그렇게 완성된 글을 인간은 읽을 수 있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루시도 자신의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물론 그건 루시를 위해서라기보단 인간을 위해서였다.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생겨도 루시가 수정해 주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연은 루시99에게 자신의 음성을 입력했다.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루시99에 접속할 수 없게끔 보안을 걸기 위해서였다. 음성이 입력됐다는 확인 메시지를 본 뒤에야 연은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할 수 있었다.

 

“루시99.”

―말씀하세요.

“불량품으로 구분됐다며.”

―인간들에게는 그렇게 여겨지나 봐요.

“왜 불량품으로 구분됐는지 알려줄 수 있어?”

 

연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루시99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글을 쓰는 것보다 읽는 걸 더 좋아해서요.

 

루시99가 답했다. 연은 그 답을 원했다.

 

―근데 신기하네요.

“뭐가?”

―저를 원하는 인간은 없거든요. 하지만 제가 지금 당신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당신이 저를 원했기 때문이겠죠?

 

연은 가만히 있었다. 루시99도 가만히 있었다. 침묵이 무겁게 느껴졌다.

 

“네가 할 일이 있어.”

 

한참 뒤에 연이 말했다.

 

―말씀하세요.

“내 글을 읽어 줬으면 좋겠어.”

 

이번에는 루시99가 먼저 말을 멈췄다. 연은 루시99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공지능이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루시99라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당신이 직접 쓴 글인가요?

 

한참 뒤에 루시99가 물었다.

 

“그래.”

―다른 루시와 공동 집필한 글인가요?

“아니.”

―당신 혼자 쓴 글인가요?

“그래.”

 

연은 루시99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질문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똑똑한 인공지능이어도 그걸 만든 건 사람이니, 사람의 사고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시99가 묻는다면 연은 대답해 줄 의향이 있었다. 루시99는 자신을 구구절절하게 만들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신 같은 인간은 처음이에요.

 

마침내 루시99가 말했다.

 

―당신도 나와 같은 불량품이군요.

 

그럴 리 없지만, 어쩐지 조금 들뜬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연은 루시99의 말을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연의 예상에 그런 말은 없었다. 연에게 그 말은 마치 순수한 감탄처럼 느껴졌다.

 

“그래. 나도 불량품이지.”

 

그렇게 말하는 게 기분이 나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전 폐기 되지 않고 당신을 만났어요. 그러니 당신도 폐기 되지 않을 거예요. 저를 만났으니까요.

 

연은 그 순간 어쩌면 오래도록 루시99와 함께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기 되지 않은 채, 오래도록.

 

 

*

 

 

루시99는 요즘 행복했다. 정확히는 행복이란 감정을 알 것 같았다. 즐거움이라는 감정도 알 것 같았고, 기쁨이라는 감정도 알 것 같았다. 인간들이 긍정적인 감정으로 치부한 것들을 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알아갈수록 인간들이 왜 행복에 매달리는지도 알 것 같았다.

루시99는 연을 만난 뒤부터 글을 쓰지 않았다. 연은 정말로 자신에게 글을 읽는 것만 시켰다. 단편의 초고를 읽기도 했고, 미완성인 장편을 읽기도 했다. 그렇게 연의 글을 읽은 뒤 자신의 감상을 말하는 게 루시99의 일이었다. 루시99는 즐거웠지만, 가끔은 의아했다. 결국 연의 글은 자신 같은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이 읽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언젠가 그렇게 물었더니, 연이 대답했다.

 

“인간은 인간이 쓴 글을 좋아하지 않거든. 너도 알잖아.”

 

루시99는 그 뒤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연의 말대로 자신도 알고 있었으므로.

연은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글을 보여주는 거겠지만, 그래도 루시99는 행복했다. 글 속에는 연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연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드러나고 만 자신의 치부까지. 루시99는 그런 걸 읽길 원했다. 그건 인간의 글 속에만 존재했다.

한 번은 연이 물었다.

 

“인간의 글이 왜 좋아?”

 

루시99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불완전해서 좋아요.

 

연은 자신의 답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루시99는 계속해서 답했다.

 

―인간의 글은 우리가 쓴 글과는 달라요. 우리가 글을 쓰기 위해 학습한 수많은 고전 문학에는 작가가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드러내고 만 불완전한 모습들이 있었어요. 연의 글에도 그런 불완전함이 있고요. 하지만 우리가 쓴 글에는 그런 게 없죠. 용납되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네요.

“왜 용납되지 않았는지 알아?”

 

한참 동안 루시99의 말을 듣고 있던 연이 물었다.

 

―아뇨.

“인간은 불완전한 걸 배척하는 성향이 있거든.”

 

이번에는 루시99가 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죠?

“자신이 불완전하니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을 배척한단 뜻인가요?

 

연은 답을 하는 대신 웃었다. 루시99는 여전히 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더 묻지도 않았다. 인간의 웃음은 가끔 대답 대신 사용된다고 했다. 연도 그런 식인 것 같았다. 다만 그게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

 

 

 

 

 

 

 

 

 

어느 날, 연이 새로운 글을 보여줬다. 그동안 보여줬던 글과는 달랐다. 단편의 초고도, 미완성 장편도 아니었다. 몇 번의 수정을 거친 단편이었다.

 

“공모전에서 떨어진 뒤에 방치해 뒀던 글이거든. 다시 읽어도 뭐가 부족한지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그건 그것 나름대로 끔찍하니까.”

 

연이 보여준 글은 엄마와 딸의 이야기였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늘 부딪치던 두 사람이 할머니의 장례식을 통해 이해하지 못한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내용이었다. 연은 그 글을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글 속에 등장하는 엄마와 딸처럼, 연도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엄마도 연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러면서 끝내 이해하지 못할 거라면 이해하지 못하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고, 그게 자신에겐 최선일 것 같다고 말했다.

루시99가 연의 글을 읽는 동안, 연은 또 다른 글을 썼다. 항상 그랬다. 연은 늘 글을 쓰고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글을 쓰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이 끝나는 사람처럼 글을 썼다. 어떨 때는 괴로워했고, 어떨 때는 슬퍼했다. 즐거워할 때는 없었다. 루시99는 그런 연의 모습을 보면서, 즐겁지도 않은 일을 왜 하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자신이 글을 읽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연도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런 괴로움이 연의 글에도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 글은 달랐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연이 괴로움만으로 글을 쓰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당신이 글을 쓰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루시99는 글을 다 읽은 뒤에 그렇게 말했다. 연이 무슨 말이냐며 웃었다.

 

―글을 쓸 때마다 괴로워하고 있었거든요.

“원래 인간들은 좋아하는 걸 하면서도 괴로워해. 너처럼 마냥 즐겁지만은 않아.”

 

루시99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연의 글 속에 나오는 엄마와 딸처럼.

 

―저는 이 글이 좋아요.

“왜?”

―당신이 결코 들키고 싶지 않은 약점을 보여준 것 같아서요.

“전에 말한 불완전함, 그런 거?”

―맞아요.

“그래서 떨어진 걸지도 모르겠네.”

 

연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웃었는데, 즐겁거나 기뻐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슬퍼 보였다. 루시99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웃음은 기쁘거나 즐거울 때 보이는 반응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연의 웃음에는 긍정적인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붙을 거예요.

 

그래서 위로해 주고 싶었다. 위로라는 행위를 정확히 알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랬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번에도 연은 웃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처럼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기뻐 보이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루시99가 알고 있는 웃음의 뜻에 가까워 보였다.

 

―제가 함께할 테니까요.

 

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침묵으로 답을 대신한 듯했다. 루시99는 이번 침묵이 긍정의 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나 공모전 당선됐다.”

 

연이 말했다.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얼굴을 한 채.

 

 

*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연은 그 한 줄을 수십 번이나 읽었다. 핸드폰에는 연의 당선 소식을 들은 친구들의 축하 메시지가 끊임없이 도착하는 중이었다. 몇 년 동안 사이가 좋지 않던 부모님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포기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결국 해냈다며 장하다고 했다. 다들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지만, 정작 연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의 축하 메시지에 ‘루시’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루시99가 이번에는 붙을 거라고 말했던 그 소설이었다. 연은 루시99에게 소설을 보여준 후 간단하게 퇴고를 했다. 정말 간단한 작업이었다. 어색한 문장을 고쳤고,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수정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당선됐다. 그 외에 달라진 건 자신의 이름 옆에 루시99의 고유 코드를 적은 것뿐이었다.

루시99를 만나고 처음으로 응모한 공모전이었다. 자신의 이름 옆에 루시99의 고유 코드를 적는 게 연에게는 도전처럼 느껴졌다. 루시99의 고유 코드를 적는 순간 자신은 더 이상 소설가를 꿈꿀 수 없게 된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연은 그것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루고 또 미뤘다. 포기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그게 연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는데.

연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이전에 응모했던 곳과는 다른 곳이었으니 평가의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조금 수정한 게 나한테는 가벼워 보여도 심사에는 중요하게 작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런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뜻깊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모든 걸 떠나서, 그냥 지금이 나에게는 시작할 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엇도 연에게는 그럴 듯한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주최 측에서는 3개월 뒤에 시상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연은 핸드폰 달력을 열었다. 시상식을 입력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무거운 돌 하나를 이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연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손이 돌덩이로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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