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연은 방을 뒹굴 거렸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뒤척인다. 무엇을 해야 할까. 뒤척인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입술 끝으로 탄내가 지독하게 남아있다. 돌아온 집으로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뜯었던 엄마의 손이 끝끝내 자신을 밀어내었다. 만약 걔가, 그 아이가, 장난감 왕국의 왕자가 엄마를 만난다면 그럼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상상 속 가족의 모습엔 여전히 자신이 보이지 않았다. 뒤척이다 못한 연은 자신의 머리로 베개를 감쌌다.

 

나도 가족이 필요해.

 

턱에 받쳐 허덕이는 연은 어느의 존재가 필요했다. 곁으로 채워줄 어느의 존재가. 연은 아직 어렸지만 다시 혼자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 바깥은 저녁이었고 늦게까지 하란과 왕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연은 필요했다, 그저 그 뿐이었다.

 

돌아왔어.

 

하란과 아이가 돌아왔다. 연은 짐짓 대수롭지 않은 척 굴려 하였다. 그 애가 돌아온 것을, 연은 묵묵히 맞았다.

 

저기.

 

아직 호칭도 익숙하지 않은 둘이 마주로 선다. 연은 꼴깍 침을 삼키었다. 누나라고 불러.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어째선지 단어들은 꼬리를 감춰 도망치기에 바빴다.

 

엄마랑 아빠가 보고 싶어요.

 

연의 눈썹이 움찔한다. 뭐라고.

 

엄마라는 사람은 어떤 주인인가요.

당신처럼 좋은 사람인가요.

 

연의 가슴이, 심장이, 아니 그보다 더 깊이. 그녀의 어느 깊숙한 곳이 그만 가득 단어들로 쏟아져 아득히 메어졌다. 너무도 가득이, 너무도 아득히. 그녀가 들으며 자라난 수이 많은 단어들이 쏟아져 그만 그녀를 덮는 해구가 되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연의 입술이 자근 씹힌다.

 

제게도 가족이 있죠?

당신도 그 중 하나이죠?

 

정말 그 여자를 보고 싶어?

 

연의 목은 낮게 깔려 방안으로 시간이 늦은 땅거미로 졌다. 조금 아이의 목이 떨린다. 그렇지만 소년은, 장난감 왕국의 왕자는 궁금하였다.

 

네, 보고 싶어요.

제 가족을.

 

그래.

 

연이 왕자의 손목을 세차게 잡아끌어 현관으로 질질 잡아당겼다.

 

으아아아앙.

 

겁을 먹은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야, 이 연!

뭐하는 거야!

 

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하란은 윽박을 질렀다.

 

으아아앙.

 

연은 어금니를 물었다. 애초에 자신은 동생을 잃은 최악의 인간이었다. 지울 수 없는 죄를 지은 인간 말이다. 소년을 발로 걷어차 현관 밖으로 쫓아 보내었다. 나동그라진 아이가 혼신을 다 해 울음을 운다.

 

이 연, 미쳤어.

애한테 뭐하는 거야!

 

쾅!

 

문이 닫히고 너머로 아이가 울고 있다. 연은 알고 있었다. 그래, 애초에 기대를 하면 안되는 것이 있다. 특히 가족 같은 것들.

 

하란은 그런 연을 두고서 문을 열어 소년을 받으러 갔다. 연은 홀로 남았다. 가족이 보고 싶다니. 연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쫒으려 하지 않았다. 잡을 수 없는 손에게로 뻗으려 하지 않았다. 연이 무너진다. 그토록이나 그녀는 허덕였다.

 

얘!

 

하란이 복도로 나와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아주머니 한 분의 손에 잡혀 울음을 죽이고 있었다.

 

학생, 이 애 누나야?

 

그게.

 

밑으로 경광등이 짧게 끊어지고 경찰관과 익숙한 그림자로 여자 하나가 층을 올라왔다. 하란은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로 물러섰다. 여자가 걸음을 좁히며 얼른 다가와 하란의 뺨으로 손을 날린다.

 

짝!

 

붉게 열이 오른 하란은 말없이 고개만 떨구었다. 누군가 울고 있는 아이로 신고를 하였고, 실종 전단을 받은 경찰관은 소년의 엄마와 함께 동행하였다. 여자는 소년을 데리고 경찰차를 탄다.

 

으아아아앙.

 

울음은 그치지 않았고, 하란은 남겨져 떠나는 차의 붉고 푸른빛의 번쩍임을 바라만 봐야 했다. 하란이 방으로 돌아온다. 연은 방의 창으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하란이 묻는다.

 

그 애, 너 동생이었다며.

 

연의 등으로 던져진다. 하란은 짜증보다는 어느의 화로 연에게 툭 말들을 던지었다.

 

네 멋대로, 그딴 식으로 굴지 마.

보는 나도 짜증나니까.

 

하란은 잔잔하게 성을 내었다.

 

잡아야 할 건 좀 잡아.

병신같이 밀어내지 말고.

 

그러곤 하란은 집을 나가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연은 남아 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주먹을 쥐었고, 너무도 쥐어 쥐가 내릴 지경이었다.

 

하란은 그 다음 날의 아침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연은 빈 손을 주억거렸다. 모두 보내버렸다. 이대로 죽기만 한다면 완벽한 계획일까. 연은 하란의 집을 나와 정처 없이 걷기로 하였다.

 

포도나무 넝쿨 다리.

 

다리가 놓아져 있다. 어디로 생긴 다리가 여기저기로 넝쿨이 흔들린다. 다시 그 세계로 가는 걸까. 다시 도망을 칠 수 있을까. 연이 다리로 가 닿는다.

 

 

 

 

 

정한아.

 

이름이다. 낯선 여자의 목소리다.

 

너 정말 정한이니?

 

빛이다. 그리고 곧이어 어둠이 덮어져 온다.

 

너 정말 우리 아들이니?

 

목이 뻐근하다. 다리 사이로 파묻힌 고개가 또르르 주위를 둘러본다. 목소리와 바람 소리 사이로 흐느끼는 울음이 비어져 나온다. 왕자는 더욱 몸을 움츠렸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난 어디에 있는 걸까. 손 하나가 다가오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우리, 우리 아들.

 

그러곤 한참을 쏟아지는 것이다. 무릎 맡이 축축해지고, 듣는 귀가 얼얼해지는 그런 아픔. 왕자의 맞은편으로 여자는 폭포가 되어 있었다. 왕자는 눈을 빠끔 내밀고서 조용히 물었다.

 

당신이 엄마인가요?

 

 

 

 

 

 

연이 건너 간 곳은 좁은 초목길이 우거진 곳이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내렸고 멀리로 파도 소리가 부서지는 곳이었다. 돌과 풀밭을 건너가자 해변이 닿은 돌담길이 주욱 이어졌다. 연은 낯선 공기를 맡았고, 낯선 이들의 소리를 들었다. 돌담길을 따라 걷다 허리 높이의 작은 철문에 막힌다. 연은 문을 쓰다듬었다. 녹이 끼어 있었고 까만 페인트가 조금씩 벗겨져 있다. 연이 철문을 조심스레 열어본다.

 

Wer ist das?

(누구야!)

 

투박한 호흡. 거친 말투. 딱딱한 구두 굽 같은 말들이 연을 깜짝 놀래키었다. 노인이 소리를 지르고 있다.

 

(누군데 함부로 들어와!)

 

연은 놀라 등이 꼿꼿이 펴졌다. 노인이 괴성을 질렀고 연은 얼른 달아나려 하였다.

 

앗.

 

포도 넝쿨이 다리를 가린다. 다리가 모습을 감춘다. 연은 넝쿨을 해치고 초목을 발길질하지만 다리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만 연 혼자만 놔두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봐!)

 

노인이 등 뒤로 서서 연을 잔뜩 노려보았다.

 

그게.

 

(어디서 온 거야, 응?)

(또 우리 정원을 망치러 온 게야?)

 

노인과 연이 마주 서서 서로를 쏘아본다. 햇살은 느즈막이 몸을 덮어 달빛을 무대로 올리고 있다.

 

 

 

제복을 입은 경찰이 자판을 두들기다 다시 고개를 젓는다.

 

(영감님, 이 애가 정원에 있었다고요?)

 

(그래.)

 

경찰관이 연을 본다. 연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낯선 언어와, 낯선 피부색. 길과 도로가 전부 자신이 아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난 이제 모르겠소, 그 애를 삶아먹든 튀겨먹든 내 알 바 아니오!)

 

노인은 역정으로 문을 차 휙 나가버린다. 경찰관이 연을 본다.

 

(넌 어디서 왔니?)

 

연은 답하지 않는다. 아니, 답하지 못한다. 생판으로 떨어져 면식 없는 벽안의 도화지에서 그녀가 그릴 수 있는 건 겁을 먹은 까만색뿐이었으니까. 그녀는 낯선 마을의 끝자락에 닿은 경찰서의 사무실에 잠을 청하였고, 그녀를 찾은 건 어제의 그 노인이었다.

 

(아직도 그 애가 있소?)

 

(그렇네요, 영감님.)

(독일 국적은 아닌 거 같아요.)

 

경찰관이 어깨를 으쓱하였다.

 

(난민일지도 모르죠.)

 

(상관없소.)

 

노인이 연이 있는 사무실로 다가간다.

 

(워, 영감님.)

(모든 일에는 절차라는 게 있지요.)

 

노인이 얼굴을 찡그리지만 경찰관은 친절하게 묻기로 하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 정원을 망쳤소!)

(난 내 정원을 돌봐야하오!)

 

경찰관이 사무실을 돌아보며 한숨을 쉰다. 아직 아이의 국적이나, 신분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난감하였지만 그 애를 잡아둘 수 있는 이유도 부족하였다. 그녀가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었으니까. 잘못이라면 이 영감에게 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하나님. 저 아이의 신변을 잠시 저 영감님에게 맡겨도 좋겠죠. 저 분은 정원을 돌보기를 원하고, 저 불명의 아이는 당장 기댈 곳이 필요하니까. 경찰관이 선뜻 자리를 비켜준다.

 

(흥!)

 

노인이 사무실로 문고리를 억세게 잡는다. 경관이 노인의 등으로 잊지 말라는 듯 경고한다.

 

(단, 사흘입니다.)

(그 전까지 아이를 돌려줘야 해요, 아시겠죠?)

 

노인이 억세게 성을 내며 문을 열어 젖혔다.

 

(알 거 없잖소!)

 

연은 망가진 울타리와 파헤쳐진 두더지 굴 혹은 동네 악동들이 발길질을 해놓은 적양파 밭으로 가야 했다. 망치를 들고, 삽을 들고, 모종 씨앗도 함께 말이다.

 

(이리와라!)

 

노인은 거칠게 말을 하였고 연은 그런 그의 말에 끌려 다녔다. 무어라 반박을 놓고 싶었다. 난 집으로 가야 해요. 갑자기 떨어지게 됐어요. 포도나무 넝쿨이 얽힌 나무다리 하나가 있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 다른 곳으로 닿게 되요. 난 집으로 가야 해요. 연은 삽을 들고서 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생각해보니 돌아갈 집조차 그녀에게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까.

 

적어도 이곳은 아니야.

 

(뭐하는 게야!)

(밭으로 와, 어서!)

 

연은 움찔거렸다. 노인이 성을 낸다. 한시도 빠짐없이.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잠깐, 잠깐 노인의 고성에 놀라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하늘과 밭내음으로 나는 집 생각에 시선이 멀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연이 울타리를 엉성하게 이어놓았을 즘 노인이 그녀를 불렀다.

 

(이리와, 어서!)

 

주춤거리는 자욱으로 가니 그가 연에게 접시 하나와 컵 하나를 건넨다. 곡물 빵 한 덩이와 노오란 호박 수프. 컵으로는 우유가 담겨 있다.

 

(먹 거라.)

 

연은 빵을 잘게 뜯어 수프로 찍어 넘겼다. 입으로 진한 가을 향이 넘친다. 수프가 연의 입가를 데웠고, 짙은 향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연은 저도 모르게 울었다. 뺨에서 턱으로. 어쩌면 억하고 울어야 할 시절들로. 하지만 지금의 연은 울고 있던 자신의 마음을 몰라 허겁지겁 접시를 비워야했다.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노인이 흔들의자로 앉아 책을 핀다. 노을이 번지고, 가을이 온다. 여름이 끝난 계절들이 분다. 춥지만 춥지만은 않은, 햇살을 머금은 가을바람이 연을 맞는다.

 

(네 이름이 무어냐.)

 

연은 쿨쩍, 코와 눈가를 닦고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은 노인의 말을 몰라 빈 접시로 생각을 정리하여야 했다. 노인은 짐짓 그녀의 출생과 처지를 짐작하려 하였지만,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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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키미기미 23.01.14 02:24 댓글

    극 중 연이 닿은 곳은 독일입니다. 독어로 번역을 해야하는데 아직 의뢰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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