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소녀는 연이라고 불렸다. 그녀의 친구들이 대게 그러하듯 놀리는 이름이 따로 있었지만, 연은 그런 것 따위 까먹은 지 오래였다. 그녀의 옆으로 기대어 창을 보는 남자아이가 자꾸만 눈에 들어와 신경을 끌 수 없는 탓이었다. 먼 나라의, 자그마치 한 나라의 왕자라니. 상상 속의 나라와 같은 장난감들의 천국에서의 왕이었지만 연은 그를 따르기로 하였다. 어찌되었든 그녀 역시 그 나라에서 모험을 하다 왔으니까.

 

그 애가 자신을 잡는다. 연은 그가 보고 있는 창으로 함께 고개를 돌려보았다. 맑은 하늘로 올려진 마을이 눈에서, 눈으로 자꾸만 흘러간다. 아이는 신기한 듯 했다.

 

이런 건 처음 봐요.

 

그래.

 

아이의 천진한 얼굴을 연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을 잡기가 어려워 그저 눈으로 잡고 있다. 역이 도착한다. 한달음으로 달려와 연과 아이를 맞는다. 연은 아이를 불러 함께 역참으로 내려왔다. 플랫폼으로 아이는 물었다.

 

이제, 어쩌실 건가요?

 

잠깐만 기다려줘.

 

연은 전화를 들어 어디론가 번호를 눌렀다.

 

달칵.

 

누군가 연의 전화를 받았고, 그 누군가가 분명 그녀의 방문을 맞은 것이다.

 

이리와.

 

연이 아이를 데리고 마을의 시가지로 쏙 들어가 헤매었다. 연은 수중에 든 돈으로 모자 하나를 샀다. 아이의 머리에 씌우고서 검지를 들어 보였다.

 

꼭 쓰고 있어.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연은 바쁘게 사람들의 물결로 헤엄을 쳤다. 넘실거리는 시가지에서 그녀는 골목으로 피신하였고 또 다른 골목으로 아이를 끌어 짙은 남청색을 한 대리석 벽으로 몸을 붙이었다. 버튼을 누르고 말을 한다. 연의 목소리로 그 누군가가 짧게 답을 하였다.

 

들어와.

 

밝은 음색. 아이는 잠시도 맘을 놓을 수 없었다. 낯선 세계 속에서 그만이 오직 이방인이었으니까. 그런 그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은 그저 그의 이름만을 불러 끌었다. 빈손으로 이른 저녁 공기만이 맴돈다.

 

누군가의 집은 연의 친구 집이었고, 방안 가득 너저분한 공기들이 구석으로 몰려 파리가 꼬이는 집이었다. 부엌과 현관은 깨끗했지만 단 하나 뿐인 거실이자, 방은 쓰레기와 잡동사니들로 어질거렸다. 아이는 연의 뒤로 살포시 몸을 숨기었다. 인터폰으로 밝은 목소리를 낸 소녀가 아이를 내려다본다.

 

누구야?

 

연은 머뭇거렸다.

 

동생이야.

 

네 동생, 그 실종되었다던?

 

그래.

 

지금 찾은 거야?

 

응.

 

어디서?

 

장난감들의 왕국에서. 주인이 놓고 간 그리고 잃어버린 아이들의 천국에서. 연은 그 말을 목으로 넘겨 삼켰다. 아이는 겁을 먹은 듯 하였고, 연은 조금 지쳐있었다.

 

몸을 피할 곳이 필요했어.

 

흠.

 

콧소리. 그 소녀는 연의 방문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래, 늘 그래왔듯이 잘 왔어.

 

그러곤 아이를 향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리고 너도, 꼬마 친구!

 

아이가 자지러진다. 장난을 치는 모습으로 연은 조금 긴장이 풀렸다. 연이 거실로 몸을 뉘었고, 집주인 소녀 역시 바닥으로 널브러져 뒹굴거렸다. 바쁜 것은 오직 아이 뿐이었다.

 

이제 어쩌실 거죠?

 

아이의 말로 연이 고개를 든다. 집주인 소녀가 까르르 거린다.

 

너 말투가 원래 그러니?

웃겨!

 

숲의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아이의 고함. 꽤나 진중한 목청에도 연은 꿈쩍하지 않았다. 묵묵부답의 연을 두고서 집주인 소녀가 말을 묻는다.

 

저 꼬맹이가 뭐라고 하는 거야?

 

아이의 눈으로 연이 고개를 돌린 채 말을 흐린다.

 

그냥 놀이 이야기 하는 거야.

 

놀이?

 

그래 그냥 놀이.

 

아이는 빈정이 상했다. 속은 기분이 들었다. 또한 배신감마저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방으로 얕지만 고약한 내가 올라오듯, 티는 나지 않지만 아이는 불안에 떨었다. 집주인 소녀가 냉랭한 둘의 사이를 가로질러 가 부엌으로 가스불을 틀었다.

 

저녁은 먹을 거지?

볶음밥 먹을 거야, 불만 없지?

 

말이 없이 서로 등을 진 둘을 향해 집주인 소녀는 후라이팬을 휘적거리며 저녁 밥상을 차렸다. 저녁을 다 먹을 때까지도 연은 우걱거리만 하였고, 아이는 숟가락만 휘적대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

 

불쑥 일어난 연은 그대로 현관을 나가 버린다. 혼자가 된 아이는 다리를 모으고 목을 움츠렸다. 집주인 소녀는 그런 그를 향해 작게 소곤거렸다.

 

얘, 얘 이리 보렴.

 

손을 살래살래 저으며 쿡쿡 웃는다. 아이는 조금 진정이 된다. 아이가 몸을 소녀에게로 튼다.

 

너 정말 연이의 동생 맞니?

 

아이는 멀뚱히 제 발만 보았다. 심술이 났지만 왕국으로 떨어지기 전 잡았던 손의 온기는 분명했다. 하지만.

 

모르겠어요.

 

아직 누나의 손을 다시 잡아 본 적은 없다. 집주인 소녀도 다리를 모으고서 턱을 괴었다. 그녀는 아이가 도망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넌 여기 왜 왔니?

 

그건.

 

아이가 이내 입을 다물어 버린다.

 

믿지 않을 거예요.

 

고개를 묻는 그가 소녀는 아주 조금 가여웠다. 동생을 돌보는 마음으로 소녀는 아이에게 약속하였다.

 

절대 웃지 않을게.

그리고 네가 하는 말은 전부 믿을게.

 

아이가 조금 고개를 든다.

 

정말이야!

 

아이가 눈을 들어 소녀와 맞춘다.

 

정말, 약속할게!

 

소녀가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그리고 아이는 소녀의 새끼손가락으로 자신이 겪은 일들을 풀었다. 그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 그런 이야기를, 그는 난생 처음 풀어보였다.

 

음, 음, 그런.

 

짧은 답으로 천천히 아이의 말을 귀담아 듣던 집주인 소녀는 동화를 듣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래서 잠시 이 세계로 왔어요.

숲의 아이들에게 편지를 전달해줘야 해요.

 

주인분들의 편지들을?

 

네.

 

음.

 

제 말을 믿어요?

 

제 스스로 갸우뚱거리는 아이가 소녀는 그저 어여뻤다. 그저 한없는 어느의 동정으로 소녀가 슬쩍 제안을 하나 한다.

 

그럼 나도 도와줄게.

그 편지라는 거, 나도 함께 할게.

 

정말요?

 

그럼.

 

와. 아이가 웃는다. 기대로 무엇이 찼는지 방글방글 거린다.

 

대신.

 

소녀가 그 제안을 대가로 자신의 소원을 빈다.

 

너도 나를 도와줘.

 

아이에게로. 아이가 아이에게로. 한도 없는 어린 세계의 틈으로.

 

나도 주인 분들이 있어.

엄마랑 아빠라고 말이야.

 

소녀가 살며시 웃으며 손을 비행기로 만든다. 부웅.

 

그 분들도 나를 잃어버렸거든.

그래서 말인데.

 

부웅. 부웅. 자꾸 비행기가 흔들린다.

 

그 숲의 아이들에게 줄 편지라는 거.

다 찾고 나면.

 

아이의 눈으로 소녀의 비행기가 위로 오른다. 저녁이 늦었고, 거리는 어둑거렸다. 어서 집으로 가자. 어서, 어서. 놀이가 늦게 끝난 아이가, 회사에서 일이 끝난 어른들이 모두 모두 한데 모여 거리를 걸었다. 모두 집으로 가고 있다.

 

그 왕국에서 나도 주인 분들을 찾을 수 있을까.

 

아이가 살그머니 발을 모았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이가 소녀를 본다. 믿음직한 아이의 눈이 불안에 떨고 있는 10대 소녀의 눈으로 닿아 말이 된다.

 

만날지도 몰라요.

 

소원이 된다.

 

그래, 고마워.

 

아이에게로 소녀가 팔을 뻗어 악수를 청한다.

 

그럼 잘 부탁해, 이상한 소년.

난 하란이야.

하란 누나라고 부르렴.

 

네, 누나.

 

서로를 인사하는 곳으로, 그 지구 위의 아득한 왕국으로. 잃어버리고, 버림받은 아이들의 요람으로. 자꾸만, 자꾸만 하란이 만든 비행기가 추락하였다. 추락한 그 자리의 별똥별에서 그녀의 바람이, 아이의 약속이 소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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