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그 집은 빨간 봉숭아꽃들이 피어있는 곳이었다. 담벼락을 따라 늦은 저녁 살들이 부딪혀 노오란 볕씨 색들이 났다. 담쟁이 넝쿨로 덮인 푸른 문을 열자 발간 지붕과 하얀 회벽이 왕자를 반긴다. 왕자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조심조심 마당을 걸었다. 누가 있으신가요, 하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도 화단의 상추들과 봉숭아들만이 머리를 흔든다.

 

이곳의 주인은 어디 있을까.

 

그리고. 그 단어를 수줍게 옹알대며 왕자는 집안을 보았다. 너른 대청마루 위로 가을바람이 드는 그곳으로. 왕자의 눈가로. 그 사람이 닿는다.

 

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에서 눈물을 흘리던 사람. 침대 위에서, 자신이 휘말린 소동에서 눈을 감던 사람. 그 소동의 바깥에서 저 혼자 말을 동동 굴리던 사람. 그녀는 허리를 구부린 채로 주저앉아 바람을 맞고 있었다. 왕자가 아오 씨를 꼭 잡아 쥐었다. 그녀의 뺨으로 눈물자욱이 말라붙는다. 그의 품으로 봉제 인형이 꼭 안긴다.

 

저기.

 

왕자는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리다 금방 등을 보인다. 그녀는 왕자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왕자의 품으로 봉제 인형이 더욱 품에 안긴다.

 

모두가 궁금해 해요.

 

왕자는 용기를 내어 말을 하였다. 가을 녘과 바람이 자꾸만 왕자의 등을 떠민다.

 

숲의 아이들이 기다려요.

당신은 어쩔 셈이죠?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에겐 주인이 필요해요.

주인분들의 흔적이 필요해요.

 

그녀의 등이 그에게로 말을 한다.

 

당신이 말했잖아요!

 

돌아가라고 말한다.

 

주인분들이 아이들을 잊지 않았다면서요!

 

그녀의 손이 주먹을 쥔다.

 

당신이 약속하셨잖아요!

 

왕자는 너무도 커져 몸을 터뜨린 제 입을 막았다. 목소리가 너무 컸을까. 왕자는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나에게도 필요했어.

 

네?

 

왕자가 귀를 밀었다. 그 사람은,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조곤조곤 왕자를 타일렀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라면 어떨 것 같아?

 

등으로부터 그녀가 왕자에게 말을 건다. 왕자는 조심조심 마루를 밟고서 밖으로 트인 그녀의 곁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신으로 흙가루들이 자국자국을 만든다. 왕자가 그녀에게로 선다.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서 물었다.

 

넌 가족이 그립지 않니?

보고 싶지 않니?

 

왕자가 제 손을 본다. 언제고 잡았었던 그 기억 너머로 자꾸만 멀어진다. 손이 감긴다. 왕자는 그 온기를 알고 있었다. 제 손을 잡고서 함께로 있던 그 손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왕자가 그녀의 질문으로 대답을 한다.

 

보고 싶지만, 꼭은 아니에요.

전 이미 가족이 있는 걸요.

 

하얀 고양이 보넷 씨. 호위 기사들. 마을의 아이들과 선대 국왕이셨던 개구리, 구르구리 씨까지. 그는 외롭지 않았다.

 

거짓말 하지 마!

 

그녀가 벌떡 일어나 왕자의 팔을 덥석 잡아올린다. 키가 훨씬 컸던 그녀의 손에 잡혀 왕자는 낑낑거렸다. 그녀가 소리 지른다.

 

그 장난감들이랑 인형들이 네 가족이라고?

걔들이 언제까지고 널 지켜줄 것 같아?

걔네들은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왜냐면 걔들은!

 

거칠게 잡아당겨지는 왕자의 팔. 그녀의 몸부림에 왕자는 제 품으로 안고 있던 아오 씨를 놓치고 만다. 봉제 인형이 마루 위를 구른다. 그녀가 왕자를 내려다보고서 울부짖는다.

 

걔들은 인간이 아니니까!

넌 인간이고 걔들은 그저 장난감일 뿐이야!

 

왕자가 그녀의 손을 뿌리친다. 마당을 달려 나가 문 밖으로 뛰쳐나간다. 저녁놀이 진 마을은 어두웠고 숲과 논밭들은 모두 밤이 되었다. 왕자는 그 깜깜한 어둠 속을 해쳐 도망을 쳤고 그녀는 홀로 남아 울음을 울었다.

 

네 가족은 여기 있어.

 

울음을 울었다. 바닥을 뒹굴던 아오 씨에게로 달빛이 든다.

 

 

왕자는, 그 아이는 흙 밭으로 주저앉았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밤하늘로 달랑거리는 노란 빛에 기대었다. 무릎을 끌어당긴다. 얼굴을 파묻는다. 무릎 언저리와 뺨이 후끈해진다. 축축이 젖어 끈적해진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다. 왕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왜 그녀가 그렇게 화를 내었는지. 왜 그렇게 가족이라는 단어에 집착을 하는지. 그리고 그런 얘기를 왜 자신에게 하는지. 왕자는 그저 제 눈가로 넘치는 물방울들이 멈추기만을 바랐다.

 

왕자가 주저앉은 가로등으로 그녀가 선다. 다행히도 그는 할머니 집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녀가 아오 씨를 쥔다.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아오 씨를 건넨다. 왕자는 그런 그녀의 화해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화가 풀리지 않은 작은 왕자는 고개를 한껏 돌려 울먹임을 삼킨다.

 

뺨으로 바람이 분다. 눈물이 말라 제법 시원하다. 조금은, 아주 조금 정도는 기분이 나아진다. 자신을 찾아와준 그녀의 걸음으로 왕자는 조금은, 아주 조금 정도는 안도감이 든다. 왕자와 조금 떨어져 그녀는 얌전히 쭈그려 앉았다. 함께 별과 바람을 맞는다. 여름이 끝나가는 계절의 문턱에서 별은 총총거렸고 벼의 이삭들은 사각사각거렸다. 왕자는 고개를 돌린 채 말한다.

 

업어줘요.

 

그녀가 머뭇거린다. 자신보다 몇 살이 어리더라. 그의 체구를 한바퀴 훑어보고는 말없이 등을 돌린다. 그녀의 등으로 왕자가 와 안긴다. 그녀는 기합을 주고는 번쩍 그를 업어 올리었다. 무겁다.

 

무거워요?

 

그녀는 담담한척을 하려 애를 썼다.

 

아니, 괜찮아.

 

왕자가 그녀의 등으로 얼굴을 묻는다. 그녀는 그를 업고서 작게 소곤거렸다.

 

미안해.

 

소곤거렸다.

 

미안해, 전부 다.

 

사각거리는 이삭들의 소리가 자신의 목소리를 가려주기를 기도하며.

 

사과할게.

 

등으로 묻은 그의 얼굴이 돌아간다. 그 애의 작은 코가 등을 콕 찌른다.

 

사실 누나한테 동생이 있었어.

남자아이인데, 꼭 너만 하단다.

 

그 아이의 손이 그녀의 어깨와 목에 감기어 온기가 전해진다. 등 아래로 흘러내린 그를 한 번 튕겨 올린다.

 

아주 어릴 적에 잃어버리고 말았어.

나도 모르는 새에 손을 놓쳐버린 거야.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등으로 새근거리는 콧바람을 내었다. 그녀는 가로등이 없는 빈 둑길로 별을 따라 걸었다.

 

엄마, 아빠는 아직도 그 애를 찾고 있어.

 

새근새근. 그의 호흡이 그녀의 뒤로, 그녀가 남기는 발자욱을 따라 하나하나 함께로, 함께로 세어간다. 할머니의 집은 이미 지나 둘은 마을의 이랑과 밭 사이를 거닌다. 그녀가 망설인다. 오래전 잃어버린, 지금도 그의 그늘에 벗어나지 못한 두 분. 엄마와 아빠의 그리움을 모두 가져가버린 그 아이. 손끝으로 남아있는 그, 그 아이, 왕자.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허파가 기지개를 피고는 움츠러든다. 그녀가 말한다. 건넨다. 묻는다. 어쩌면 홀로, 홀로. 돌아올 것은 기대도 않고서.

 

그 애도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엄마, 아빠. 그 애를 잃어버린 범인. 외따로 떨어지게 된 나. 그리고 할머니 집. 그 범인이 목을 움츠린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봐. 숨을 죽였다.

 

새근새근. 그리고 사근사근. 혹은 고로롱.

 

왕자는, 그 아이는 얌전히 그녀의 등에 안겨 숨을 쉬었다. 고개를 묻고는 눈을 감은 듯하였다. 가만히 기다려도 보았지만 다행히도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를 등에 업고서 마을 위를 걸었다.

 

다행히도 그 애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주어서.

다행히도 마을 바람이 따뜻하게 불어와 주어서.

다행히도 이삭들이 조용히 흔들려 주어서.

다행히도 밤하늘이 밝게 길을 비추어 주어서.

 

두 아이가 함께로, 함께로 길을 걷는다. 어화둥둥, 어화둥둥 함께로 잠에 든다.

 

 

 

 

 

 

 

 

 

 

 

왕자는 가슴을 펴 크게 숨을 들이 마시었다. 철길 위를 다니는 커다란 철재 상자가 바람을 일으킨다. 소란스러운 음악 소리도 나돌고 구둣발과 바스락거리는 옷자락들도 한데 모여 이리저리 흩어지고 모여든다. 왕자는 귀를 기울였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소리가 섞여 어지러웠다. 왕자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혼자였다면 분명 무서웠을 것이다. 애초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왕자는 발뒤꿈치를 들었다. 파도처럼 승강장으로 기차바람이 풍성하게 주위를 훑어 올라간다. 왕자는 간질이는 바람결로 저 혼자 쿡쿡 웃는다.

 

얘, 여기 있어.

 

왕자가 손을 들어 물건을 받는다. 제 손바닥만한 종이 한 장이 들린다. 소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똑딱똑딱 거리는 바늘을 올려다본다. 소녀는 입술을 물었다. 왕자는 종이에 적힌 글씨를 읽기 위해 애를 썼다. 몇 개의 글자는 너무 어려웠고 몇 개의 글자는 오래전에 잊어버린 것들이었다. 왕자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누나라는 소리에 소녀가 움찔한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주인분들을 찾으러 갈 거야.

 

소녀는 계속 손톱을 뜯고 다리를 떨었다. 그녀의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 왕자는 싫었다. 그는 누나의 다리를 안고서 매달렸다. 그의 얼굴이, 그 천진한 얼굴이 소녀에게로 가 닿는다. 그녀는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러고서 왕자의 머리칼을 제 손으로 천천히 넘겨주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전철이 들어오고 두 아이가 탄다. 어느의 마을로 전철이 달린다. 두 아이를 싣고서 바삐도 달린다. 소녀와 아이는, 누나와 왕자라는 기묘한 조합의 두 사람은 역 개찰구에서 나와 낮은 구월의 바람을 맞았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소녀는 왕자의 손을 잡아 밖으로, 밖으로 끌었다. 대답을 할 수 있었지만 선뜻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누나는 그저 묵묵히 불어오는 바람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소녀는 돈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이름 모를 장난감의 주인을 찾기 위해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소녀의 팔과 다리가 꼿꼿이 펴지다 구부려지길 반복한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녀의 솔직한 감상이 물결 쳐 앞으로 몰아친다.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소녀의 손을 왕자가 꼭 잡는다. 소녀가 왕자를 내려다본다. 그의 품으로 인형이 꼭 붙들려 있다. 그도 함께 떨고 있을까. 소녀는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두려워하는지도 모르는 채. 떨고 있는 자신을 따라 함께 주저하고 있는 어린 소년을 보았다. 소녀는 눈을 꼭 감고서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 왕자가 소녀를 올려다본다. 소녀가 말한다.

 

먼저 집으로 가자.

 

누구의 집을 말하는 걸까. 오래전 자신을 잃은, 고아가 된 집. 아니면 동생을 잃어버려 세상의 모든 증오를 집어삼킨 집. 소녀는 왕자의 손을 잡으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적어도 그와 함께라면 두렵지는 않지 않을까. 소녀는 집의 앞으로 왕자를 붙잡았다. 그와 눈을 맞추고 무릎을 구부렸다. 진지한 눈빛과 목소리로 이른다.

 

절대 들켜선 안 돼!

누구도 널 보아선 안 돼!

특히 엄마 아빠는 더욱더!

 

엄마, 아빠?

 

소녀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세차게 저어 보인다.

 

아무튼 내가 올 때까지.

꼼짝 말고 기다려야 돼.

 

응!

 

소녀는 왕자를 이웃집 담벼락에 세워진 낡은 옷장 속에 감추어 두었다.

 

쉿!

 

장의 문을 닫으며 누나가 손가락을 세워 잔뜩 얼굴을 찡그린다.

 

쉿!

 

동생도 그녀를 따라 얼굴을 찡그리고는 재미있다는 듯 쿡쿡거린다. 소녀가 힘차게 일어난다.

 

좋아!

 

현관을 열고서 심호흡을 들이킨다. 벌컥 문을 연다. 너머로 고요함이 돈다. 짧은 현관의 뒤로 거실이 든다. 햇살이 맞은편 건물에 가려진 집은 우중충했고 그늘이 잔뜩 너울거렸다. 현관의 신발장과 마루 바닥, 거실의 탁자와 부엌의 식탁에까지 똑같은 종이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쌓여있다. 소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주눅이 들고 숨이 가빠졌다.

 

‘아이를 찾습니다.’

 

수 백 장의 실종전단지가 십 수 년째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집과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주 아기일 적의 사진이 한 켠으로 쌓여있다. 소녀는 전단지들을 피해 살금살금 자신의 방으로 향하였다. 자신의 방은 상자로 가득하였다. 자신의 짐들이 멋대로 상자에 담겨 있었고, 멋대로 박스테이프에 의해 봉해져있었다. 소녀의 뺨으로 방울방울 눈물 자욱이 흐른다.

 

후우-.

 

애써 숨을 뱉고서 눈가를 훔치었다. 상자들을 풀며 찾고 있던 물건들을 하나 둘씩 꺼내었다. 왕자의 인형들의 주인들을 찾기 위한 물건들. 소형 노트북과 약간의 돈. 수첩과 펜. 연락처와 사진첩.

 

아.

 

소녀 자신이 찍혀있는 사진. 그 사진이 상자에 봉해져 버러져 있다. 소녀는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새삼, 새삼 물들어 발치를 간질였다. 소녀는 이를 악물고서 가방까지 찾아내어 물건들을 담아내었다. 가방끈을 꽉 쥐고서 방을 둘러보았다. 골판지 상자들이 소녀의 흔적들을 제 입에 게걸스럽게 감추어, 잔뜩 비고 휑하였다. 소녀는 등을 돌렸다. 미련을 두고서 혹시나 하는 마음 역시 두고서 발길을 돌렸다. 제 방을 나온 소녀의 옆으로 방 하나가 기웃거린다. 소녀는, 누나는 그 방을 보았다. 닫혀진 그 문을, 어쩌면 평생 열어볼 일이 없을 거라 여기던 문을. 적어도, 적어도 자신만큼은.

 

문을 열었다. 작은 침대와 장난감들. 동화책이 꽂힌 책장들과 잘 다려져 걸린 옷가지들까지. 옷은 아이가 돌아올 나이에 맞추어 매일 새로 구입되고, 정돈되어 있다. 소녀의 손이 더욱 억세게 가방끈을 쥔다. 소녀는 뛰쳐나가듯 몸을 돌렸다.

 

짝!

 

어디선가 날아온 손아귀가 소녀의 얼굴을 내친다. 뺨이 달아올랐고 눈가가 핑 돌았다. 한쪽 얼굴을 묻고서 고개를 바로 올린다. 어느새 돌아온 여인이 소녀를 향해 비명을 지른다.

 

이게 어디라고 돌아와!

 

소녀의 울분 역시 터진다. 걷잡을 수 없었고 붙들고 있을 수도 없었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 뜯는다. 여인 역시 소녀를 붙들었고 세상이 휘청거리며 두 사람이 엉킨다. 서로를 토하고 토한다. 너무도 토하여 그 뒤집어진 속이 자신들의 세상을 암울이 가릴 때까지 엄마라는 여인의 손톱이 소녀의 뺨을 할퀴고, 딸이라는 소녀의 주먹이 여인의 가슴을 내려친다. 액자들이 바닥을 뒹굴며 박살이 난다. 한 명이 나동그라지면 상대를 덮치고 가슴팍을 내리눌렀고, 쓰러지면 악에 받혀 울부짖고 버둥거렸다. 여인과 소녀는 한동안 거센 풍파 사이의 배 두 척이 되어 한 쪽이 난파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수 십의 자상과 수 백의 타상으로 엉망이 된 둘은 현관의 바깥에까지 굴러 떨어져 사나운 울음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소녀는 숨을 몰아쉬며 뒤늦게 옆을 돌아보았다. 길가로 작은 왕자가 다소곳이 서있다. 그 아이는 겁을 먹고 있었다. 두려운 눈을 말똥말똥 뜨고서 여인과 소녀를 번갈아 보고 있다. 소녀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만약, 만약 소녀의 억하는 가슴으로 수면이 물결친다. 여기 그 아이가 있는데 혹시, 혹시나. 여인이 일어난다.

 

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녀는 왕자의 손목을 잡아 달음질을 쳤다. 등의 뒤로 고함이 날카롭게 쫓아오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쉼 없이 내달렸다. 동네의 구멍가게 안으로 숨어 들어가 가판대 아래로 털썩 주저앉는다. 소녀의 손아귀로 왕자는 숨을 헐떡이고 있다. 세차게 내달린 둘의 머리로 초가을의 바람이 분다.

 

만약, 만약에 말이야.

 

소녀가 묻는다.

 

정말 네 진짜 가족을 찾았다면.

그러면 어떨 것 같아?

 

왕자는 변함없이 답하였다.

 

제 가족들은 왕국에 있어요.

 

그럼, 그럼 말이야.

 

소녀의 숨이 턱으로 받혀 얕게 번진다. 숨이 차다.

 

만약 널 정말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를 여전히 잊지 못해서

아직까지 괴로워하고 있다면

 

소녀의 밭은 숨으로 자꾸자꾸 울먹임들이 흘러내린다. 봄으로 이슬비가 내리듯 따듯하다.

 

그러면 어떨 것 같아?

 

왕자는 답하지 못한다. 저 어린 아이에게 몹쓸 질문을 한 것 같아 소녀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만 일어나자. 어서 장난감들의 주인을 찾으러 가자.

 

약속할게요.

 

소녀와 맞잡은 손으로 왕자가 말한다.

 

꼭 다시 만날 거라 약속할게요.

 

소녀가 왕자를 감싸 안는다. 울음을 울고 싶지 않아 소녀는 왕자의 품을 더욱 끌어 힘껏 안아 주었다. 소녀는 왕자에게 더 묻지 않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가 몇 해의 왕국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소녀 역시 그저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자상한 아오 씨를 쥐고서 왕자는 말하였다.

 

주인분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소녀는 쓴 침을 삼켰다.

 

글쎄.

 

희망에 차 아무렇게 뱉어낸 말이 난감하게 돌아왔다. 소녀는 고민에 빠졌다.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장난감들의 주인을 찾는 명탐정이나, 사물의 과거를 읽는 초능력자 역시 없다. 소녀가 입술을 깨문다. 혹시.

 

혹시 네가 타고 다니는 다리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왕자는 자신 없는 얼굴이었다. 그가 입을 연다.

 

다리는 여러 곳들을 보여주어요.

하지만 그게 꼭 자신이 바라는 장소를 보여주는 건 아니에요.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기도 해요.

 

소녀와 왕자의 눈이 서로를 맞는다. 두 눈동자가 얼키설키 엉키어 자꾸 다른 곳으로 가려 한다. 왕자는 소녀의 바람을 들어줄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소녀가 두 눈을 질끈 감아 부탁한다.

 

그래도, 부탁할게 제발!

 

왕자가 난처한 얼굴이 된다.

 

이번 한번만!

 

둘은 숨어있던 가게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서 살금살금 도망을 친다. 소녀는 이를 물었다. 그 여자가 자신들을 보지 말아달라 기도한다. 조심스러운 발자욱들이 주욱 기차역까지 이어진다. 다시 할머니 집으로 가야 한다. 소녀가 왕자의 팔을 끈다.

 

앗!

 

왕자가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누군가 왕자의 어깨를 잡아 큰 목소리로 소리친다.

 

이봐, 여기서 뭐하는 거야!

 

헐렁한 점퍼를 둘둘 두른 남자 하나가 왕자를 붙잡고서 놓아주지 않는다. 소녀가 악다구니를 친다.

 

뭐하는 거예요!

당장 놔요!

 

남자가 소녀의 외침을 들은 체 만 체 왕자를 제 몸으로 끈다. 그가 품으로 종이 한 장을 꺼내 읽는다.

 

네가 실종자 아이로구나.

엄마가 전화했어.

 

소녀의 두 귀가 떨린다. 남자와 왕자 사이를 갈라놓으려 애쓴다. 남자가 아랑곳하지 않는다. 성가시다는 듯 소녀를 떨어트리자 왕자가 몸을 뒤틀었다.

 

안돼요!

 

왕자가 소리를 지르자 세찬 바람이 남자와 소녀의 위로 날아들었다. 바람의 줄기들에 휘청이다, 왕자의 눈으로 여인이 들었다. 잃어버린 어느의 조각. 잊어버리고 있었던 어느의 손과 발. 여인의 눈가로 왕자가 든다. 남자가 일어나 왕자의 손을 끌었다. 소녀는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왕자의 손을 억지로 끌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왕자가 엄마의 품으로 돌아간다면, 그 후엔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안녕하세요.

 

왕자는 꾸벅 인사를 건네었다. 여인이 머뭇거린다. 얼어붙은 몸이 이제야 녹아들 듯, 천천히 나아간다. 소녀는 이를 꽉 물었고, 눈을 꼭 감았다. 끝이야. 그런 생각이 들 참이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누나를 봐주어서.

 

어리둥절한 사람들의 틈으로 왕자는 천진하게 말하였다.

 

누나가 날 찾아 올 수 있게 도와주어서,

감사해요.

 

왕자가 다시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전철역으로 걸어갔다.

 

이봐!

 

남자가 막아선다.

 

잠깐!

 

여인이 남자를 말리며 왕자를 불렀다.

 

네가 정말 내 아이니?

 

왕자는 여인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 거렸다. 그가 오직 기억하고 있는 건, 자신이 왕국으로 떨어진 그 날, 함께 잡고 있던 누나의 손길뿐이었으니까. 너무도 오래되어 바랜 사진첩으로 여인이 울고 있다. 왕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신을 가족이라 부르기엔 왕국에서의 시간은 너무도 길었다. 왕자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서 다시 인사를 꾸벅 건네었다.

 

여인을 두고서 왕자는 역참으로 걸어갔다. 소녀가 그의 뒤를 따랐고, 여인은 혼자 남아 주저앉고 말았다. 역으로 기차가 들어온다. 소녀와 왕자는, 누나와 동생은 다시 할머니 댁으로 향하였다. 기차 안으로 왕자는 소녀의 품에 안겨 얼굴을 묻었다.

 

그 여자는 누구인가요?

 

왕자가 묻는다. 소녀는 답을 하지 못하다 겨우내로 입을 열었다.

 

엄마야, 너를 낳고 길러주신 엄마.

 

소녀의 품으로 왕자가 어리광을 부린다.

 

그럼 당신도 있나요.

그 가족에.

 

소녀는 답을 하지 못한다.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말, 이 아이가 돌아와 엄마, 아빠와 함께 있게 된다면 난. 난 용서 받을 수 있을까. 아님 다시 버려지게 될까. 그래도 잠시는 고민해주지 않을까. 닿도 않을 아주 미약한 희망으로 소녀는 기도하듯 말하였다.

 

그럼, 그럼 우린 함께 있을 거야.

 

누나의 품으로 얼굴을 묻은 그. 그가 잠에 들 듯 고개를 떨어트리고, 소녀의 옷이 조금씩 젖어든다. 뜨거운 것들이 닿아 자꾸만 번지어 간다.

 

아파요.

 

남동생이 누나에게로 속삭였다.

 

이상해요,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누나는, 소녀는 더욱 그 아이를 끌어 제 품으로 꽉 안아주는 것이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794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7 키미기미 2023.01.14 0
2793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6 키미기미 2023.01.14 0
2792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5 키미기미 2023.01.14 0
2791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4 키미기미 2023.01.14 0
2790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31 키미기미 2023.01.14 0
2789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2 키미기미 2023.01.14 0
2788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1 키미기미 2023.01.14 0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다음 장으로 키미기미 2023.01.14 0
2786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8 키미기미 2023.01.14 0
2785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7 키미기미 2023.01.14 0
2784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6 키미기미 2023.01.14 0
2783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5 키미기미 2023.01.14 0
2782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4 키미기미 2023.01.14 0
2781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3 키미기미 2023.01.14 0
2780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2 키미기미 2023.01.14 0
2779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1 키미기미 2023.01.14 0
2778 단편 종말의 마라토너 정우지 2022.12.28 0
2777 단편 궤도 위에서 임희진 2022.12.27 2
2776 장편 몰락한 신, 1회 - 장군 소집 반신 2022.12.15 0
2775 단편 사과를 먹어봤어 김성호 2022.12.13 0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