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소금기 거품>

 

왕자가 내 몸을 부축하여주었다. 상처가 진정도 되지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흥분을 하고 말았다. 여태껏 혼자인 채로 살았던 내게 누군가의 기다림은 달달하고 괜한 여운을 주는 것이었다. 우리 둘은 내가 머물었던 홍감 기사의 여관으로 돌아갔다. 두더지 씨도, 홍감 기사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 걱정이 되어 나를 찾으러 나간 걸까. 그들과 엇갈리지 않기 위해 얌전히 기다리기로 하였다. 침보 위로 조심히 몸을 누인다.

 

윽.

 

나는 침보로 몸을 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온 몸이 쑤셔 꼭 할머니라도 된 것 같다.

 

저기.

 

왕자가 날 부른다. 걱정이 담긴 눈을 짓고 있다.

 

어쩔 셈이죠?

당신의 아이를 만나지 않으면 이곳을 떠날 수도 없을 텐데.

 

나는 머뭇거렸다. 네가 나의 아이야. 내가 잃어버렸던 소중한 나의 반 쪽. 평생의 죄책감에 시달리게 한 원흉이기도 하였지만 원망스러운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가 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나는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아 보았다.

 

그건 걱정하지 마.

꼭 방법을 찾을 테니까.

 

내 말을 듣고 그가 앉는다. 언제고 깨진 무드등이 자리하던 곳으로 동생이 가 몸을 기댄다. 입술이 근질거렸다.

 

정말 주인분들이 저 아이들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모른다.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지. 문득문득 그리워나 하고 있을지. 혹은 영영 잃어버렸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 왕국의 그를 본다. 차분히 눈을 감고 있다. 나는 뒷 말을 천천히 내어 보였다.

 

믿고 싶어, 난 믿을 거야.

분명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을 거야.

 

그가 웃는다. 너무도 살며시 웃어 자칫하면 놓쳐버렸을 웃음.

 

넌.

 

난 물어 보았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니?

 

그가 제 손을 높게도 뻗어 보인다. 그가 그의 손을 올려다보며 이른다.

 

모르겠어요. 얼굴도, 목소리도, 나이도, 계절도

어느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게 없어요.

기억나지 않아요.

 

그의 목소리는 슬프지 않았다. 아프지도, 그리워 밤을 지새우지도 않았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걸까. 혹여 나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가 알아챈다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나는 궁금했다.

 

그 사람을 보고 싶니?

 

제 주인님을요?

 

나는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나는 또박또박 그의 말을 고쳐주었다.

 

가족이라고 하는 거야.

네가 잃어버린 건 가족이야.

 

그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눈을 감는다. 이내 나를 향하여 눈을 맞춘다. 그가 말한다.

 

제 가족은 여기 있어요.

전 그저 궁금했을 뿐이에요.

오래전에 있었던 그곳이, 그저 궁금해요.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라니. 정말 그게 전부야? 그게 네가 갖고 있던 나에 대한 감정의 전부야? 난, 난.

 

그럼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상관없니?

 

나는 그 질문을 밖으로 꺼낸 입이 밉고도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꼭 알고 싶기도 하였다. 그의 대답이 나의 가슴팍을 찌른다.

 

네, 상관없어요.

이곳이 제 집이고, 가족이 있는 곳이니까.

 

그 애가 나에게로 작은 미소를 짓는다.

 

여기가 제 고향인걸요.

 

나는 내 얼굴 위로 일그러진 표정들을 정리할 틈도 없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그에게로 소리 지른다.

 

말도 안 돼, 난 네가 남긴 통로를 통해 이곳으로 왔어!

네가 날 불렀잖아!

 

돌아들 왔는가.

 

집으로 돌아온 홍감 기사와 두더지 씨가 깜짝 놀라 고개를 바짝 들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질렀던 고함 소리가 너무도 컸던 나머지 그는 겁을 먹어 얼어붙어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네가 내 가족이야. 내가 널 잃어버렸다고. 넌 날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야. 서로의 형태로 덧붙이면 치료할 수 있는 마음의 병이, 상처가 이제야 덧 나을 수 있는데. 홍감 기사가 어깨를 붙잡는다. 옆을 돌아보니 두더지 씨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다. 홍감 기사가 입을 연다.

 

얘야,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넌 아이의 부름으로 오게 된 주인이 아니야.

 

나는 멀뚱히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들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두더지 씨가 홍감 기사의 말을 대신 이어간다.

 

왕자님이 너머로 산책을 가실 때

포도 넝쿨 다리를 사용하신단다.

그리고 그게 가끔 제 때에 닫히지 않는 경우가 있어.

 

저 애를 처음 보았던 때. 할머니 집에서 나와 밭과 숲길을 산책하던 저녁놀 중간. 갖은 천 무더기 옷의 그와 포도 넝쿨들. 그리고 고즈넉한 나무다리.

 

그때 동물이든, 인간이든 가끔씩 휘말려서

이쪽 세계로 넘어 올 때가 있단다.

 

눈가로 그가 든다. 맞은편으로 어리둥절해 있는 앳된 얼굴의 그가 내 눈으로 든다. 무드등의 말이 아프게 들려온다.

 

‘이미 이 세계에 온 것부터가 누군가 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증거야.’

 

두더지 씨의 말이 아프게 들려온다.

 

그러니까 네가 이 세계에 오게 된 건,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는 거야.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눈두덩이를 두껍게 덮어버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득 가리기도 하였다. 홍감 기사가 풀내가 나는 딱딱한 플라스틱 몸으로 가득 덮어주었고, 두더지 씨는 아장아장 걸어와 등을 감싸주었다. 나는 울먹이는 말을 꾹 누르고서 차분히 물어보았다.

 

그럼 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인가요?

 

두 아이 모두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나를 안아 기다려주었다. 다시 묻는다.

 

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나요?

 

홍감 기사가 쓰디 쓴 침을 삼키며 겨우내로 말한다.

 

그래.

 

거기서 그만 울고 말았다. 나는 정말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프고 아파서. 그립고 그리워서. 살이 까진 상처로 소금기를 머금은 물결이 거품을 일으키며 다가오듯, 따갑고 따가워서.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왜 울었을까요.>

 

왕자는 하늘로 고개를 뻗었다. 산들바람이 분다. 그 인간여자가 돌아갔다. 포도넝쿨이 얽힌 작은 나무다리로 그녀와 함께 걸어 들어가자 세계가 활짝 몸을 펼쳐 모습을 보였다. 왕자는 궁금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는 왜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세계에서 무엇을 바랐을까. 혹시 이곳에 남길 원했던 걸까. 왕자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왕자님.

 

하얀 고양이, 보넷이 꼿꼿이 몸을 든 채로 걸어온다. 그녀는 똑바로 왕자의 얼굴을 보고서 말하였다.

 

성에 눌러앉은 저 골칫거리들을 어찌할 셈이십니까?

 

왕자는 제 발치를 보았다. 그녀는 저 아이들에게, 숲의 아이들에게 주인의 편지를 주겠노라 약속하였었다. 그녀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언제까지고 그 여자의 장난 같은 말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저들이 언제 우리 마을을 습격할지 모를 일입니다.

 

왕자는 보넷을 훌쩍 지나쳐 마을 사이를 거닐었다.

 

왕자님!

 

기사단장 보넷이 소리쳐 부르지만 소년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소년은 마을 근처의 작은 숲과 들판을 가로질렀다. 뻐꾸기시계의 낡은 둥지도 만난다. 왕자는 뻐꾸기시계의 둥지 아래로 멈추어 말을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뻐꾸기시계의 뻐꾸기 영감은 불쑥 나타난 불청객을 달갑지 않게 여기었다. 영감이 볼멘소리를 낸다.

 

나에게 묻지 말고 너의 그 충직한 부하들에게나 물어보려무나.

 

왕자가 순순히 답한다.

 

그들은 답을 내지 못해요.

 

뻐꾸기 영감은 삐딱하게 눈썹을 들었다. 그가 잠시 언성을 높였다.

 

왜, 나는 대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왕자가 뒤꿈치를 들며 하늘로 고개를 주욱 뻗는다.

 

그들은 늘 저와 있으니까요.

그래서 나에게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해요.

지금 저에겐 제대로 된 답이 필요해요.

 

뻐꾸기 영감 역시 물러나지 않는다.

 

내가 알 것 같으냐?

 

도움을 주실 수 있나요?

 

이런.

 

뻐꾸기 영감은 이마를 짚었다. 그는 체념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래 무슨 도움이 필요하니.

 

그게.

 

왕자는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두서없이 이야기하였다. 아이들의 세계로 온 인간 소녀에 대한 일. 그녀가 검은 숲에 갇혀있다 구출해낸 일. 주인들과 믿음에 대한 일. 그녀는 아이의 부름이 아닌 자신의 포도넝쿨 다리에 휘말려 오게 되었다는 사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울음을 울었다는 사실까지 털어놓았다. 왕자는 손바닥을 가득 펼쳐 뻐꾸기 영감에게 보였다.

 

그 사람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그리운 느낌이 들어요.

언제고 느꼈던 손아귀의 감촉처럼요.

 

뻐꾸기 영감은 왕자의 그 많은 일들을 담아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였다. 영감은 왕자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서 무엇을 알고 싶다는 거니.

 

왕자는 자신의 그 하얀 손바닥을 더욱 활짝 펼쳐, 더 높이 들어 보인다.

 

그 사람이 제 주인일까요?

 

뻐꾸기 영감은 혼을 내듯 단호하게 외치었다.

 

가서 직접 물어봐!

그 누구도 그녀의 대답을 대신 해줄 수 없어!

그녀를 보러 가, 어서!

 

왕자는 뻐꾸기 영감의 말에, 등을 꼿꼿이 펴고는 부리나케 작은 들을 달려나갔다. 왕자는 도랑이 양 길로 난 좁은 길과 초원의 위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밭으로 갈대와 이삭들이 잔뜩 흩날린다. 왕자가 자신의 포도넝쿨 다리로 다가간다. 그리고 발을 멈춘다.

 

‘정말 그 사람을 만나러가도 괜찮은 걸까.’

 

혼자서 떨고 있는 왕자의 뒤로 얌전하게 다려 입은 일본 기모노가 다가왔다. 왕자가 몸을 돌려 그를 맞는다.

 

안녕하신가요, 자상한 아오 씨.

 

자상한 아오 씨는 몸을 곧게 편 채로 바람을 맞았다. 그는 두 눈을 감고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포도넝쿨 다리의 너머로부터 무척이나 반가운 소리가 들릴까봐, 혹여나 그럴까봐. 왕자는 자상한 아오 씨와 함께 나란히 서서 다리를 마주보았다.

 

제가 가도 되는 걸까요.

 

왕자가 말한다. 자상한 아오 씨에게 말한다.

 

제가 그녀를 만나도 되는 걸까요.

 

자상한 아오 씨가 왕자의 어깨로 손을 올린다. 따스한 그의 손으로 왕자는 귀를 기울였다. 반가운 소리라도 들릴까, 두 귀를 쫑긋거렸다. 아오 씨의 손이 그에게 묻고 있다. 왕자는 잠잠히 그의 바람을 듣고 있다 단박에 대답하였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아오 씨가 왕자의 손을 잡아준다. 앞장 서 다리로 향하며 왕자를 이끈다. 왕자는 자신의 두근대는 심장을 꼭 붙잡으며 함께 걸었다. 설렘이 입술로 비어져 웃음이 나왔다.

 

두 아이가 포도넝쿨 다리를 지난다.

두 아이가 너머의 세계로 걸어간다.

두 아이가 소녀 하나를 만나러 간다.

 

혹시나 반가운 소리가 들릴까 두 귀를 바쁘게 쫑긋거린다. 유채꽃 냄새가 난다. 야채밭으로 뿌린 거름 내도, 느즈막이 햇살을 맞는 나무 내도 난다. 왕자는 다리 위로 껑충 뛰어내렸다. 작은 집과 너른 밭들이 들과 숲으로 이어진다. 왕자는 아오 씨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팔락.

 

왕자의 손으로 작은 사무라이 봉제 인형이 손을 맞잡고 있다. 푸른 기모노. 왕자는 봉제 인형, 아오 씨를 품으로 꼭 안아 둑과 도랑 위를 걸었다. 마을의 길 위를 걸었다. 그 사람은 어디 있을까. 궁금함을 한 가득 담아 총총거리며, 걸음과 걸음으로 주인들의 세계에서,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왕자는, 아니 소년은 궁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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