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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선택>

 

젠장!

 

보넷은 거친 말을 뱉으며 다리를 잡아당겼다. 쓰러지던 나무 둥치에 깔린 한 쪽 발이 단단히 끼어 움직이지 못하였다. 전장의 고함도, 승리의 한호도, 검과 검이 부딪히는 투쟁의 소란도 나지 않는다. 보넷은 감은 눈을 들어 귀를 열었다. 얕은 불씨들의 타닥거림과 솔솔 부는 선바람만이 들려온다. 분명 병사들이 길을 잃은 게 분명해. 어서 그들을 이끌어 주어야 해. 저 사악한 숲의 악마들을 내 손으로. 그런 그녀의 귓가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와핫핫핫!

이거, 고양이 기사님이 아니신가!

 

보넷은 그 목소리를 따라 고함을 쳤다.

 

누구냐, 숲의 아이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보넷은 있는 힘을 다해 허공으로 검을 휘둘렀다. 호탕하던 목소리는 난처한 투로 그녀를 달래려한다.

 

이봐, 진정하자고.

난 싸우러 온 게 아니네.

 

호탕한 웃음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거대한 나무 둥치가 옆으로 몸을 비튼다. 보넷이 검을 땅으로 짚으며 일어난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다.

 

고맙군.

 

보넷의 귀가 쫑긋거린다. 그녀가 연신 좌우로 고개를 돌린다. 그녀는 귀를 기울인 채로 자신을 구해준 기사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 병사들이 숲을 탈환하고 있는가?

 

탈환?

 

그 목소리가 되묻는다. 왜 어디에도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보넷은 눈썹을 찡그렸다. 한가하게 잡담을 나눌 시간 따위 없다. 어서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야 한다. 왕자, 그 어리숙하고 앳된 왕은 어디 있지. 어서 숲을 빼앗고 악마들을 처단 하여야 하는데. 보넷의 목소리가 커진다.

 

전쟁 말일세, 전세가 우리 쪽으로 기울었는가?

 

그녀의 옆으로 목소리가 숨을 나직이 들이쉬며 말을 꺼내었다. 작지만 웃음기도 섞여 있다.

 

글쎄, 아이들이 전쟁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군.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전쟁이 아니라면 대체....!

 

얘야!

 

발아래로 쉰 목소리가 도도도 달려 나간다. 그 소리를 따라 보넷이 몸을 기울였다. 검을 짚고서 이를 문다. 전쟁을 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홍감 기사가 눈이 먼 하얀 고양이의 곁에 서서 숲을 돌아다보았다. 마을의 아이들이 숲의 아이들과 섞여 서로를 부축하고 등으로 업어준다. 몇 아이가 부상당한 아이들을 안아들고, 몇 아이는 몸에 붙은 불을 꺼주기도 하였다. 허둥거리는 이의 손을 잡아주고, 도망을 치는 이들을 보내준다. 아이들이 모두 한데 모여 보넷과 홍감 기사의 주위로 다가왔다. 그들이 고개를 일제히 한 방향으로 든다. 그곳엔 마을의 왕자가 여자아이를 안아 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모두 그를 보고 있다. 홍감 기사가 기사단장 보넷에게 말을 건네었다.

 

전쟁보다 더 좋은 것을 하고 있군, 그래.

 

보넷은 화를 내었다.

 

말도 안 돼, 우리는 싸워야해!

전쟁에서 승리해야 된다고!

우리가 이 숲을 정화해야하는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마구 뛰어다니는 그녀가 나뭇가지에 발목이 채여 넘어진다. 그녀의 머리맡으로 왕자가 선다.

 

집으로 돌아가요, 보넷 경.

 

검은 숲으로 전쟁을 일으킨 아이들이 서로를 이고 지며 함께 마을로 돌아간다.

 

마을은 숲의 아이들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전쟁을 멈추고 데리고 온 아이들은 여전히 숲의 아이들이었고 증오와 미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명들이었다. 그들의 붉은 눈을 마을의 아이들은 두려워했고, 그들의 날카로운 발톱을 마을의 아이들은 무서워하였다. 그들을 위한 집을 두고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마을은 전쟁을 멈추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더 큰 골칫거리를 마을에 들이게 되었다. 그런 숲의 아이들은 마을의 눈을 피해 왕성으로 몸을 숨기었다. 왕성은 마을과 떨어진 곳에 있었다. 몇 인형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집을 지어주자 말하였고, 몇 장난감들은 단단한 벽을 만들어 그들을 가두자고 말하였고, 몇 강아지들은 그들에게서 주인들을 보호해야한다고 큰소리로 짖어대었다.

 

엇갈린 말들이 어지럽게 마을광장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보넷은 절뚝거리며 모든 마을의 아이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다시 저들에게 기회를 준다면, 어떤 위험이 다가올지 모릅니다.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합니다.

저들을 전부 없애버려야 합니다.

 

숲의 아이들을 죽이는 것, 그것이 왕성의 기사단장이자, 왕자의 대리자 보넷, 그녀의 주장이었다. 검과 창을 든 아이들은 보넷의 그러한 결정에 찬사를 보내며 고성을 질러대었지만, 아무것도 쥐지 않은, 빈손의 아이들은 어서 이 싸움이 지나 다시 평화가 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숲의 아이들이 숨어든 왕성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한다.

 

‘우리는 숲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이 숲의 아이들이 내린 결정이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보넷이 왕자에게 버럭 고함을 치기도 하고.

 

잘 생각해보십시오.

저들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둘 것 같습니까.

 

어르는 투로 설득을 하기도 하고,

 

선대왕인 구르구리님의 유지를 헤아려 주십시오.

 

먼저 세상을 찾아간 선대왕을 이야기하며 부탁을 하기도 하였다. 왕자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숲의 아이들을 숲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보넷의 의견은 완고했다. 선대왕이었던 구르구리 님은 왜 자신을 왕자로, 차기 왕으로 정한 것일까. 만약 그분이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 마을의 일을 결정하기에 왕자는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하였다. 왕자는 벌을 받고 있는 것 마냥 두 다리를 꼭 붙이고서 몸을 틀었다. 누군가 자신의 고민을, 아니 자신의 이름을 대신 가져가주길 바라면서.

 

 

 

 

 

 

<그 아이>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포근한 솜이불이 안겨왔다. 배 위로 두더지 씨가 잠들어 있다.

 

윽.

 

신음을 흘렸다. 옆구리를 짚으니 붕대가 감겨있다. 맞아, 그 여왕이란 인형에게 배를 찔렸었지. 도로 누워 숨을 새었다. 다행히도 죽지는 않았구나. 참나무로 지어진 방과 잔잔한 등불로 그림자가 일렁인다. 소년을 보았었다. 그 남자아이를 보았었다. 포도나무 넝쿨이 잔뜩 얽힌 다리 위에서 만났던 그 아이. 어렸을 적 놓쳤던 내 동생의 손을 따라 내 손을 보았다. 동생이 컸다면 저 정도 즈음 되었을까.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갔다. 검은 숲에서 날 기다리는 인형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인형이 내 배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결국 마을의 왕자, 그 아이를 만나러 가야하는 걸까.

 

끼익.

 

잘 익은 감 색깔을 가진 홍감 기사가 문틈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이봐, 몸은 좀 괜찮아?

 

응, 고마워.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를 볼 면목이 없다.

 

미안해.

 

홍감 기사는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손님이 왔어.

널 보고 싶다하더군.

 

그는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괜찮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홍감 기사가 조심스레 말한다.

 

검은 숲에서 왔어.

네가 알거라던데.

 

뭐?

 

그 인형이 아니었나. 나는 놀란 얼굴이 되어 문 너머를 보았다. 홍감 기사가 눈을 엄숙하게 뜬다.

 

이상한 녀석일지도 몰라.

돌려보낼까?

 

아니야!

 

나는 단박에 대답하였다.

 

괜찮아, 들어오라고 해.

 

홍감 기사는 순순히 자리를 비켜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잠이 든 두더지 씨를 품에 안고서 손님을 맞았다. 검은 숲에서 온, 그가 문을 열어 모습을 보인다. 그는 머리가 깨진 무드등이었다. 달과 우주선이 일자로 붙은 옛 시절의 흔적. 그는 오래전 동생이 갖고 놀던 물건이었다. 불이 들어오는 달 모형이 깨져있다.

 

여, 오랜만이군.

 

나는 잔뜩 긴장하여 두더지 씨를 꽉 끌어안았다. 그가 점잖게 고개를 숙여 간이 의자를 끈다. 그는 나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앉아 벽으로 기대었다. 깨진 무드등이 나를 본다. 나는 어쩔 줄 몰라 입을 꼭 다물었다.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할까.

 

난 이해해.

 

그 문장이 그가 꺼낸 첫 마디였다. 그는 그 말과 함께 나를 향하여 이야기하였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짐을 떠안게 되었으니.

 

두려움에 밀려 묻고 만다.

 

나를 원망하니?

 

그가 몸을 펴 어깨를 으쓱인다.

 

왜, 내가 검은 숲에 있어서?

 

나는 두더지 씨에게 들은, 홍감 기사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풀었다. 그는 얌전히 내 말을 들으며 깨진 머리를 짐짓 끄덕이기만 하였다. 그가 나를 본다.

 

네 말이 맞아.

검은 숲의, 숲의 아이들은 그런 것들이지.

 

그의 목소리는 쇠고 낮으며 수풀에 푹 젖은 흙과 같은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야.

나처럼 버림을 받은 존재도 있으니.

 

그가 나를 향한다.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내가 꼭 묻고 묻어두었던 것들을 파헤친다.

 

기억나, 그때 있었던 밤들을?

 

나는 얼굴을 감추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계속 이야기한다. 나는 아랑곳하지도 않고서.

 

그가 네 손을 놓치고, 네가 그의 손을 놓쳤던 날.

그 매 밤들로 너가 눈물을 흘렸던 날.

매일 밤 하나를 홀로 등에 지어야 했던 날들 말이야.

 

그만!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나 때문에 동생이 실종되고, 엄마 아빠는 나를 탓한다. 나와 동생을 붙여둔 자신들을 책망한다.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짐의 무게가 아니었다. 분함과 억울함에 이기지 못해 그 애의 물건들을 창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하였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멍청한 짓을 한 것에 대해. 부끄러운 짓을 한 것에 대해. 몹쓸 짓을 한 것에 대해. 그리고 분명 그 어떤 버팀목도 되어주지 못한 그 두 분에 대한 분노 때문에 말이다. 그때 던져서 영영 잃어버리게 된 물건들 중 하나가 그 무드등이었다. 그 점쟁이 고양이가 가르쳐주었던 아이는 나를 위한 아이조차 아니었다. 대체 저 아이에게서 무엇을 얻는다는 말일까. 그가 말한다.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말투였다.

 

나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

그건 그저 재앙이었을 뿐이었고,

나 역시 그 재앙에 휘말린 것뿐일 테니까.

 

그가 일어나 웃옷을 턴다. 문가로 서서 내게 말한다.

 

그냥 보고 싶어서 왔어.

반가운 얼굴이 있어서 마지막 인사나 할 겸 말이지.

 

나는 물었다.

 

너는 왜 마을에서 살지 않는 거야?

 

그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마을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야.

그리워할 게 남아 있지 않다면 있을 이유가 없지.

너희 둘은 나쁘지 않은 주인들이었어.

그저 시기가 좋지 않았을 뿐이지.

 

무드등이 문으로 몸을 기댄다. 그의 무게로 문은 작은 신음을 흘렸다. 문 밑으로 작게 그림자가 움찔거린다. 홍감 기사가 기다려주고 있는 걸까. 나는 안심이 되었다. 무드등이 말을 마친다.

 

만약 더 좋은 시기가 있었다면,

나도 여기 남아서 너희 둘을 위해 울어주었을 거야.

 

정말?

 

무드등이 나에게로 눈을 맞춘다. 고장이 나 빛도 나지 않는 그의 얼굴로 화사하게 등불이 비친다. 그가 말한다.

 

물론이지.

 

나는 그의 소매를 잡아 매달리듯, 그의 등 뒤로 물었다. 정말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혹시 여기에 나를 기다려주는 아이가 있을까?

 

혹여나 했다. 그 무엇에 기대어 붙어 있을 수 없던 나에게 꼭 그런 존재가 필요했다. 나를 위한 존재가 있지는 않을까. 그는 점잖게 자세를 곧게 펴 나에게 일러주었다.

 

이미 이 세계에 온 것부터가,

누군가 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증거야.

 

그렇다는 건!

 

그래.

 

그가 친절하게 답하여준다.

 

내가 이곳에 오고 매일 보았던 얼굴이 있어.

난 처음 그가 날 부른 것인 줄 알았지만

그는 더 먼 곳을 보고 있었어.

 

그가 나에게로 고개를 숙인다. 막이 내리고 배우들이 작별을 고하듯.

 

네가 그를 필요로 하듯 그에게도 네가 필요할 거야.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열어 너머로 걸어 나갔다. 문으로 서있던 홍감 기사가 몸을 비킨다. 무드등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마 숲으로 다시 돌아가겠지. 나는 겁이 나기도 하면서 함께 가슴이 두근거렸다. 평생을 원망하고 미워했던 그 애가 나를 기다리고 있단다. 무드등의 마지막 말이 가슴께로 와 간질인다. 이 마음을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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