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친절한 나의 주인님>

 

커다란 바늘을 이고서 진흙더미들을 발로 차 달렸다. 무겁고 버거웠다.

 

주인님, 도망만 치면 놀이가 되지 않아요.

 

검은 뿌리의 여왕은 경기장처럼 넓게 뒤틀어진 왕좌의 홀 가운데서 말하였다. 그녀의 뒤로 돌아가 힘껏 바늘을 휘둘렀다. 허리가 꺾이고 바늘이 빈 허공을 가른다.

 

가벼운 움직임이었어요, 좋아요!

 

챙.

 

바늘과 바늘이 맞부딪힌다. 고요하고 적막하다. 아무도 소리 내지 않는다. 분노에 찬 아우성이나 열기에 찬 고성, 하물며 자신들을 버린 주인들에게로 향한 저주조차도 그들은 내지 않았다.

 

학, 학.

 

밭은 숨소리만이 왕좌의 홀을 가득 채운다. 다시 그녀에게로 달려가 팔을 휘둘렀다.

 

앗.

 

그녀는 가볍게 피하고는 내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발라당 넘어진 내게로 바늘이 세워진다.

 

끝인가요?

 

으아아아악!

 

안간힘을 다해 사정없이 휘둘렀다. 나의 바늘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동작이 커진다. 그녀는 내게로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 나의 주인님.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요.

 

그녀의 바늘이 내 발목을 홱 긋는다. 무릎이 꿇려진다. 어찌해도 벗어날 수가 없어 소리를 질렀다. 혹시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했는데. 혹시라도 행복이 내게 올 수 있을까, 했는데. 몸을 구부려 오들오들 떨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피곤해서 그런 걸까. 그래 분명 지친 거다. 한계다. 이제는 한계다. 난 지친 거야. 진 거야.

 

움직이지 않으면 놀이는 그걸로 끝이에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래 난 원래 이런 아이였으니까.

 

아, 나의 주인님.

 

버려진 이 숲의 아이들처럼 나도 똑같이 버려졌으니까.

 

즐거웠답니다.

 

그래 안녕. 안녕 나의 세계.

 

그럼 안녕히.

 

여왕의 기다란 바늘이 공기를 타고 아래로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뭐야, 이것들은!

 

그녀가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넘어진다. 구석으로 숨어 있던 꼬마 불씨들이 아장아장 기어 나와 그녀에게로 뛰어든 것이었다. 여왕의 옷과 왕관이 불에 그슬린다.

 

당장 놓지 못해 떨어져!

 

타는 냄새가 자욱하게 올랐고, 재들이 여왕의 몸에서 떨어진다. 그녀가 몸부림을 칠수록 불길은 더욱 크게 일어났다. 온 몸이 그슬리고 데인 여왕은 넘어진 채로 발버둥만 친다. 자신들의 여왕이 당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그녀를 지키거나 막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일어나 모두가 보게끔 허리를 폈다. 재에 뒤덮이고 작은 불씨들에 둘러싸인 여왕은 다리와 팔이 타 들어가 제대로 서있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제가 진 건가요?

 

나는 아이들을 올려다보았다. 여왕이 상냥하게 말하였다.

 

저 아이들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이 여왕 자리도 그저 놀이일 뿐이거든요.

아이들이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듯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뿐이에요.

 

시끄러.

 

여왕에게로, 그 여자 인형에게로 갔다. 행복해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저 아이들에게도 행복을 보여주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잔말 말고 내 손이나 잡아.

 

여왕이 웃어 보인다.

 

어머, 상냥하셔라.

 

그 잠깐의 순간에서 방심하였다. 그 잠깐의 순간에서 착각하였다. 정말 혹시나 했는데, 혹시나 하고 바랐는데.

 

그런데 어쩌나,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아서요.

 

현실 너머의 주인들이 놓치고 잃어버린 아이들이 있는 세계. 그 세계에서 나는 나의 작은 믿음을 지키지 못했다. 애초에 이 숲으로 발을 들이지 말 걸 그랬다. 긴 바늘이 몸을 꿰뚫고 핏물이 여왕의 손과 팔로 진득하게 번지어 갔다. 여왕은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나의 주인님, 친절한 나의 주인님.

 

정신이 멀어진다. 발치로 작은 불씨들이 깡총거리고 허둥거린다. 짧은 이명과 기절 끝으로 남동생이 깜빡이고 사라진다.

 

 

 

 

<아이들의 전쟁>

 

보넷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의 얇은 앞발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 짧게 돋아나 흔들거리는 털들로 재들이 날린다. 보넷은 자신이 고양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곧게 허리를 펴 숲이 내는 둔중한 진동을 두 귀로 엿들었다. 자신이 이끄는 군대가 숲의 악령들을 내쫓을 것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자박.

 

발자국 소리를 따라 보넷이 귀를 쫑긋거린다.

 

폐하이십니까?

 

보넷의 눈가가 흉터로 덮여있다. 그녀가 감은 눈으로 한 곳을 향한다.

 

정말 숲을 없애버릴 거야?

 

보넷은 갓 성인의 티를 내기 시작하는 아이의 목소리로 몸을 바로 세웠다.

 

폐하 예의를 지켜주십시오.

 

보이지 않았지만 숨이 먹히고 허리를 피는 동작이 귀에 들어온다. 보넷은 더욱 엄한 표정을 지었다.

 

크흠.

 

어색한 기침소리. 보넷은 어서 빨리 그가 선대왕을 이어 위엄을 가지길 바랐다. 맞은편으로 소년의 목소리가 울린다. 한참 경직된 상태로.

 

보넷 경, 정말 이렇게 해야겠나.

 

물론입니다, 폐하.

 

보넷은 망설이지 않고 답하였다.

 

이곳은 주인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계에서 납치와 실종이라니요.

 

보넷은 말과 단어에서 분노와 화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검은 숲의 아이들을 미워한다기보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듯 보였다.

 

우리들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타박타박. 앳된 왕이 서성거리고 만다. 두 발자국의 걸음 소리에서 불안이 비어져 나온다. 보넷의 귀로, 귀로 들려온다. 그녀는 왕을 다그쳤다.

 

그 사명을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합니다!

 

서성거리던 타박거림이 멈춘다. 보넷은 제 귀를 활짝 열어 왕의 소리를 좆았다. 발 아래로 검고 파랗게 질린 나무들이 쓰러지고 박살나는 소란이 아우성친다. 마을에서 만든 병기가 제 기능을 알맞게 수행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 사명이라는 게.

 

왕의 목소리로 불안의 씨앗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우리에게 무슨 소용일까.

 

의심하지 마십시오!

 

보넷은 허리로 찬 검을 뽑아들었다. 병기의 속도가 점차 느려진다. 마을에서 연습한대로 보넷은 낙하공간이 있는 병기의 강하 승강장으로 몸을 돌렸다.

 

강하 준비!

 

병사들이 분주하게 승강장으로 모인다. 보넷도 발맞춰 승강장으로 몸을 빼었다.

 

주인님은 언제나 돌아오십니다.

 

보넷이 손을 뻗는다. 앳된 왕은 그녀의 다짐에 머뭇거리고 만다. 그녀가 팔을 휘적여 왕의 작은 손을 찾아 잡는다. 왕을 잡아끈다. 아주 작은, 아주 어리고, 설익은 남자 아이를 붙잡아 잔뜩 힘을 준다. 앳된 왕이, 소년이 보넷의 품에 안기어 숨을 먹었다. 앞으로 뻥 뚫린 승강장은 검은 숲 위를 날고 있었다. 병기가 앞으로 전진하고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보넷은 강하 승강장으로 폴짝 몸을 날린다. 앳된 왕과 보넷이 공중으로 날아든다.

 

와악!

 

보넷이 제 등에 멘 날개 장치를 가동하자 두 아이가 크게 활강한다. 그녀가 앳된 왕에게 소리친다.

 

약속하죠,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다 할 겁니다!

 

앳된 왕은 그 사명에서 잔뜩 겁을 집어 먹고 말았다.

 

 

왕좌를 품에 안은 보넷은 검은 숲을 높게 날았다. 그녀의 뒤를 따라 장난감, 인형, 동물 병정들이 함께 날개 장치를 젖히며 양 갈래로 나뉘어 난다. 왕자는 아래를 보았다. 마을의 아이들이 숲으로 불을 일으키자 검고 창백한 얼굴의 나무들과 버림받은 아이들이 도망을 쳤다. 앞 다투어 숲 일대를 빠져나가려 한다. 개들 중 몇은 날카로운 바늘과 가윗날을 들어 마을 아이들과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앳된 왕은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망연히 불이 오른 숲을 바라보았다.

 

꽉 잡으십시오!

 

보넷이 몸을 틀어 부드럽게 숲 사이로 착지하였다. 그녀가 코와 귀를 쫑긋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앳된 왕의 어깨가 보넷의 허리께로 당겨진다. 보넷은 그를 끌며 외치었다.

 

왕이시여, 우리 모두를 지휘하십시오!

모두 사명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소서!

 

둘의 머리께로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솔방울들이 흩뿌려진다.

 

위험해!

 

왕자가 소리치고 보넷이 검을 휘둘렀다. 솔방울들이 힘을 잃고서 떨어진다. 보넷은 왕자의 어깨를 끌어 전장 위로 목소리를 높였다.

 

왕이 오셨다!

선대왕을 이어 이곳으로 닿으셨다!

 

숲을 가로질러 용맹하게 고함친다.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마을의 병정들이 팔과 무구들을 높이 들어 올렸다.

 

와아-!

 

아이들의, 병정들의 함성소리가, 불이 붙어 몸부림치는 나무들이, 붉은 눈빛을 내며 도망과 비명을 치는 숲의 아이들이, 왕자는 참을 수 없이 겁이 났다. 그의 두 발이 굳어 꼼짝도 하지 못한다.

 

와아-!

 

꼼짝도 하지 못한다.

 

왕이시여,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보넷이 왕자의 어깨를 잡아당긴다. 움직일 생각조차도 없는 그의 몸으로 보넷은 몸을 굽혔다. 그녀가 소리친다. 다그친다.

 

당장 달려가서 싸우십시오!

저기 있는 악마들을 쓰러트리십시오!

 

왕자가, 앳된 왕이, 소년 하나가 고함 소리에 못 이겨 눈을 꼭 감는다. 사나운 보넷의 갈기들이 그의 코끝을 때린다.

 

왕이시어!

 

둘의 위로 커다란 고목이 쓰러진다. 보넷이 다급하게 왕자의 몸을 밀쳤고 두꺼운 둥치가 둘 사이로 넘어진다. 앳된 왕은 엉덩방아를 찧은 제 엉덩이를 문지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보넷!

 

자신의 충신이자 친구를 부른다. 불씨들이 사방으로 튀어간다. 왕자는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작은 불똥들이 주위를 돌며 앳된 왕의 바지 밑단을 잡아끈다. 앳된 왕은 작은 불씨들의 재촉을 받으며 전쟁이 아직 닿지 않은 굴의 입구로 닿았다. 그 굴에는 흉측하게 얼굴이 타 들어간 개 한 마리가 가만히 서서 앳된 왕을 맞았다. 그 늙은 개가 왕자에게로 몸을 비키었다. 개의 마중을 받아 불씨들을 따라간 곳으로 왕자는 어둡고 탁한 공기를 질러 나아갔다.

 

바스락거리는 썩은 낙엽들을 밟고서 그의 눈으로 여자 아이 하나가 들어온다. 왕자를 이끌던 불씨들은 여자 아이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소리치듯 일렁거린다. 제 몸만한 바늘에 찔린 소녀는 가픈 숨을 쉬고 있었다. 왕자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살며시 무릎을 꿇었다. 여자 아이를 안아든 앳된 왕의 발치로 비슷한 키의 여자 인형도 함께 쓰러져 있다. 그의 아래로 불씨들이 이리저리 튄다. 불안에 떨 듯 가만히 있지를 못하였다. 쓰러진 여자 인형의 주위로 망가진 장난감들과 병든 동물들이 차례로 모여들어 메워간다. 그들이 왕자에게로 걸어오고 불씨들이 오들오들 떨며 앳된 왕과 여자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탁.

 

왕자에게로 뻗어 든 검은 손들이 아래로 내려간다. 굴 입구로 서있던 개가 지팡이를 두드려대었다. 숲의 아이들이 물러나고 왕자는 개의 뒤로 몸을 숨기었다. 늙은 개는 그를 굴의 밖으로 안내하였다. 그곳을 나가며 앳된 왕은 뒤를 돌아보았다. 빽빽하게 숲의 아이들이 서있어 여자 인형은 보이지 않았다. 늙은 개는 굴 밖으로 나와 고개를 숙이었다. 왕자는 그에게로 허리를 숙여 답례하고는 보넷이 있을 곳으로 뛰었다. 품으로 안아든 여자아이의 입으로 들릴 듯 말듯 잠꼬대가 흐른다.

 

미안해.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796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91 키미기미 2023.01.14 0
2795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8 키미기미 2023.01.14 0
2794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7 키미기미 2023.01.14 0
2793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6 키미기미 2023.01.14 0
2792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5 키미기미 2023.01.14 0
2791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4 키미기미 2023.01.14 0
2790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31 키미기미 2023.01.14 0
2789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2 키미기미 2023.01.14 0
2788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현실편) - 1 키미기미 2023.01.14 0
2787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다음 장으로 키미기미 2023.01.14 0
2786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8 키미기미 2023.01.14 0
2785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7 키미기미 2023.01.14 0
2784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6 키미기미 2023.01.14 0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5 키미기미 2023.01.14 0
2782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4 키미기미 2023.01.14 0
2781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3 키미기미 2023.01.14 0
2780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2 키미기미 2023.01.14 0
2779 장편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 1 키미기미 2023.01.14 0
2778 단편 종말의 마라토너 정우지 2022.12.28 0
2777 단편 궤도 위에서 임희진 2022.12.27 2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