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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집>

 

나는 내가 버려질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약속을 깨버렸다. 나는 가족을 깨트렸다. 가정을, 엄마와 아빠가 있던 그리고 그, 그와 있던 공간을 부수어버렸다. 엇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술, 담배. 남자와 모텔. 혹은 가출. 그런 나에게 엄마와 아빠. 두 분은 싸움과 원망으로 벌을 주었다. 차라리 내가 사라져야 했을까. 나를 곁에 두기 힘들어서였는지. 나를 옆에 두기가 힘에 부치신 거였는지. 나를 먼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 댁으로 보내었다.

 

기차표와 작은 짐가방 하나만을 덜렁 안은 나는 풀이 죽어 있었다. 약속을 깬 대가는 혹독했다. 할머니 댁은 마을과 동떨어진 언덕에 앉아있었다. 할머니의 집은 둔덕으로 느긋하게 앉아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맞아주고 있었다. 복사꽃과 찔레가 담장으로 핀 벽돌담을 지나며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다.

 

다시 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다. 나는 칠이 벗겨진 파란 대문을 밀어 보았다. 잠겨있지도, 막혀있지도 않다. 작은 마당으로 나무와 텃밭들이 푸르게 빛나고 있다.

 

할머니?

 

불러도, 두드려도, 멋대로 들어가 쿵쾅거려보아도 할머니의 집은 묵묵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나는 할머니의 집에 있는 기다란 거울로 마주 섰다. 삐뚤빼뚤한 노란 셔츠와 구멍이 난 청 반바지. 햇빛을 받지 않은 허벅지가 하얗게 반들거린다.

 

할머니!

 

아무리 소리 질러도 개미 한 마리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괜히 심술이 나 발로 바닥을 찼다. 학교 애들과도 멀어지고 도시의 편의기능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지난 9년 간 받아온 원망에도 그러려니 하였다. 하지만 이런 시골구석으로 까지 자신을 떨어트려 놓을지 몰랐다. 나는 빈 할머니의 집으로, 고요히 휴식을 취하고 있던 들과 밭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 짜증나!

 

심술이 났고 화도 났다. 물건을 집어던지는 버릇은 애저녁에 버렸지만, 왠지 손이 근질거렸다. 뭐라도 잡아 흠씬 두들겨 패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문을 뻥 걷어차며 거칠게 나왔다. 철문이 요란하게 사방으로 비명을 내지른다. 할머니의 집은 산책로를 옆에 끼어 주욱 뻗어 있었다. 밖에서 할머니를 찾을 심산으로 산책로를 죽 따라 걸었다. 유채꽃들이 들판 가득 만발하여 산책로가 온통 노랗게 물이 들어있다. 유채꽃 사이로 난 흙길을 밟아 고개를 휘휘 둘러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산책로는 들판에서 강가로 이어졌다. 강물 위로 새들이 날으고 물푸레나무들이 잎을 내려 살랑거린다. 흥미가 동이 난 나는 걸음을 재촉이며 빠르게 길을 건넜다. 아카시아 꽃과 포도 꽃이 매달린 다리를 두고서 나는 우뚝 멈추어 섰다.

 

할머니는 끝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꽤나 멀리까지 왔다. 해도 늘어져 숲과 들 위로 몸을 뉘이고 있다. 나는 할머니 댁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슥.

 

갖은 형형색색으로 천들을 기운 천막 같은 옷이 다리 건너편으로 서 있었다. 포도 꽃을 올려다보던 그 아이는 짧은 머리칼을 가지고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가 나를 돌아본다. 왜 저 낯선 얼굴이 눈으로 들까. 나와 마주보던 아이가 몸을 돌려 너머로 달려간다.

 

잠깐.

 

소리쳐 그를 불렀다. 낯선 아이에게서 그리운 이름이 맴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그 애는. 포도 꽃과 아카시아 꽃이 주렁주렁 매달린 다리로 따라 들어간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다리 위도, 산책로도 아니었다.

 

여긴.

 

어안이 벙벙해져 고개만 돌렸다. 금빛 강물이 한 켠으로 이어진 기다란 흙길. 뒤를 보아도 똑같은 흙길뿐이었다.

 

아, 아, 대체.

 

당혹스러움에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거기, 아이야.

 

흠칫 놀라 신경을 곤두 세웠다. 주먹을 쥔다.

 

길을 잃은 거야?

 

몸을 홱 돌려 두 주먹을 올렸다. 아무도 없다.

 

여기야, 여기!

 

소리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땅 위로 들꽃을 한아름 안고 있는 작은 두더지가 힘차게 몸을 흔든다.

 

안녕?

 

넌 뭐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말을 하는 두더지라니.

 

너도 버림받았니?

 

뭐?

 

두더지가 흙 속에서 엉금엉금 나와 엉덩이를 털었다. 작은 흙먼지가 나폴거린다.

 

아님 잃어버린 거라도 있니?

 

잃어버린 거. 내가, 내가 잃어버린 것. 9년 전 공원 위로 지어진 작은 유원지.

 

이곳에서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찾을 수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오래됐어.

 

걱정 마.

 

작은 두더지가 제 품에 인 들꽃을 힘껏 들어 휘청인다. 그가 자신 있게 외친다.

 

아주, 아주 옛날의 것이라도 남아 있을 거야!

 

두더지가 나를 보고 있다.

 

넌 무얼 잃어버렸니?

 

난.

 

9년 전 공원과 풍선 7살짜리 여자아이와 두 살 터울의 남자아이 하나. 엄마, 아빠와의 맹세.

 

나는.

 

그리고 보란 듯 깨져버린 평화.

 

남동생을 잃어버렸어.

 

9년간의 원망과 분노. 잘못은 있었지만 오래도록 방치되어 곪아있었다. 나는 이를 갈았다.

 

그 빌어먹을 녀석 때문에.

 

내 험악한 말투에 겁을 먹은 걸까. 작은 두더지는 뒷걸음질치며 작게 소곤거렸다.

 

찾을 수 있을 거야.

 

찾다니?

 

두더지가 품에 있던 들꽃들을 잊은 건지 팔을 활짝 펴 보인다. 들꽃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흩어진다.

 

여긴 잃어버린 아이들의 세계이거든.

세상의 인간들이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이곳으로 모여.

 

내 동생도?

 

기운찬 대답에 돌아온다.

 

물론이지.

 

 

<잃어버린 아이들의 왕국>

 

두더지의 작은 발자국들을 좆았다. 자그마한 하트 모양 자욱들이 들의 위로 길게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두더지는 작은 나무 둥치에서 살았다.

 

내 집은 마을과 떨어져 있어.

마을엔 정말 많은 아이들이 살고 있단다.

 

그러든 말든. 난 지쳐 있었고 짜증이 났다. 두더지가 나를 올려다보며 내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의 집을 찾아다녔다. 커다란 나뭇가지 위에 얹혀진 새집으로 두더지가 올랐다. 내게는 머리만 내밀고 있으라 한다.

 

이 아이가 세계로 뚝 떨어졌어.

 

두더지가 나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동그란 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낡은 시계 뻐꾸기가 수염을 쓸며 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 왔다.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혀를 찬다.

 

이제 곧 축제야.

저 아이도 아이지만 축제 준비가 한창이야.

 

마을로 가면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괜한 소리.

 

두더지의 생각을 덥석 잡아 내치는 뻐꾸기의 목소리는 먼지가 끼어 탁했다. 나는 눈을 굴리며 짜증스러운 말투로 툭 뱉었다.

 

찾고, 말고 뭐 저는 집에만 가면 되는데요.

 

뻐꾸기와 두더지가 눈썹을 올리며 나를 돌아본다. 뻐꾸기 시계의 뻐꾸기 영감은 엄하게 이르었다.

 

네가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야.

 

친절한 두더지 씨가 말을 덧붙인다.

 

주인을 보내줄지 말지는 아이들이 선택하는 거니까.

 

개소리.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와 놀랐지만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더 빳빳하게 들었다.

 

난 집에 갈거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벌떡 일어나 걸었다.

 

얘, 얘야!

 

등 뒤로 두더지가 나를 불렀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별 시답잖은 애들 장난에 붙잡혀 있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다. 성큼성큼 내가 처음 눈을 뜬 곳으로 되돌아간다. 흙길 위로 빈 바람이 분다. 옆으로 강물이 빛을 반짝이고 줄기가 잘린 잡다한 꽃들이 뒹군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가 아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시골 길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아프다.

 

얘, 기다리렴.

 

허둥지둥 나를 좆아 걸음을 아장거리는 두더지가 내 밑으로 다가와 팔을 들어 버둥거린다.

 

일단 마을로 가자꾸나.

밤이 오고 있단다.

 

해가 마지막 빛을 뿜으며 저물어 가고 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두더지 씨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두더지 씨는 어두운 숲길 사이에서 작디작은 자신을, 내가 놓칠까봐 색색의 꽃들을 그러모아 제 머리에 이었다. 들꽃 송이들이 도도도 힘차게도 굴러간다. 어두운 밤이 되어 닿은 마을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두더지 씨는 높은 크기의 집을 골라 발을 굴렸다. 가스등이 은은하게 빛을 내는 카운터로 머리를 땋은 여자 인형이 반기었다.

 

손님인가요?

 

응, 오랜만이지?

 

카운터로 올라가려 낑낑대는 두더지는 여자 인형이 잡아끌어 올려 주었다.

 

이 아이가 세계로 떨어졌어.

 

그런!

 

짧은 감탄을 내며 여자 인형은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오랜만이네요.

 

그럼!

 

여자 인형은 우리에게 방을 잡아 주었다. 작고 아담한 장소였다. 나무의자와 작은 탁상, 어린이용 침대와 보송보송한 카펫. 나는 침대로 몸을 던졌다. 온 몸이 뻐근하고 피곤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야?

 

응?

 

아이들이 정한다니?

 

두더지가 달빛이 드는 동그란 창가로 기대어 밖을 보았다.

 

이곳은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버림을 받은 것들이 모이는 곳이야.

인형도 있고 애완동물이나 물건들도 있어.

 

그래서?

 

그딴 걸, 물은 게 아닌데. 난 어찌되든 집으로 가야 했다. 두더지가 창을 연다. 밖에서부터 바람이 들이친다. 차갑다.

 

근데 가끔, 아주 가끔.

주인이 이 세계로 떨어질 때가 있어.

 

그리고?

 

그건 아이들이 주인들과 함께 하고 싶은,

바람이 너무 커서 그런 거래.

그래서 아이들의 부름을 받고

주인들이 오게 되는 거지.

 

지루한 설명은 집어치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 걸까.

 

네가 집으로 돌아가고픈 건 알아.

나도 이해해.

 

아, 그러셔.

 

또 빈정대는 말투. 지난 9년이라는 시간이 나를 너무 날카롭게 만든 걸까. 아니면 너무 무디게 만든 걸까. 어찌되었든 난 다른 누군가를 걱정하고 배려하는 인물은 되지 못할 것이다. 두더지 씨는 그런 내 말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모든 주인 분들이 그랬어.

아이들이 만나고 또 작별을 해왔지.

그럼 원래 세계로 넌 돌아가는 거야.

 

만약에 그렇게 되지 못하면?

 

두더지 씨가 어색하게 웃는다.

 

글쎄, 그런 건 보지 못했는걸.

 

팔로 눈두덩이를 짚었다. 방법이야 어떻게든 있을 것이다. 일단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만나는 일이 급선무이다. 그럼 꼭 남동생이 아니어도 되는 게 아닐까.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래전 갖고 놀았던 인형이나 읽었던 잡지. 혹은 흔해빠진 자전거 같은 물건들. 나는 두더지 씨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

 

으아아아앙.

 

창밖으로 울음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멀리서부터 들리던 울음이 점점이 번지고 퍼져나간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물었다. 두더지 씨는 창으로 서서 가만히 울음을 듣고 있었다. 울음들이 넘실대는 파도가 되어 밤 거리로 너울거린다. 파도가 곧 몸집을 불리며 다가온다. 두더지 씨의 눈가가 가득 글썽이고 있다.

 

대체 뭐야!

 

짜증을 내는 나를 두고서 두더지 씨는 물 한 방울이 되었다. 울음 하나가 되어 파도 사이로 섞인다.

 

으아아아앙.

 

어느새 여관 전체가 울음을 울고 있다. 침대로 기어 들어가 귀를 틀어막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게로 머리를 덮었다. 온 땅으로 진동하는 울음들 때문에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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