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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종말의 마라토너

2022.12.28 09:3412.28

1.

잠이 깼다.

나는 낮에 자고 밤에 움직인다. 오늘도 평소처럼 해가 질 때쯤—그러니까 저녁 7시로 알람을 맞춰놓고 잠들었는데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깬 것이다. 나는 규칙적인 생활에 집착하는 편이라 좀더 누워있기로 한다.

눈을 가늘게 떠보지만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방은 항상 어둡다. 창문을 완벽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창 바깥을 판자로 막고, 안쪽을 여러 겹의 장판으로 덧대고, 틈새는 모두 검은색 실리콘으로 꼼꼼히 채웠다. 그래서 여기서는 항상 깊이 잘 수 있다. 꿈을 꾸는 일도 드물다.

나는 흐릿한 정신으로 오래 기다린다.

드디어 알람이 울린다. 따르르르르, 하고 구식 자명종 소리가 날카롭다. 소리가 저렇게 클 필요가 없다고 깰 때마다 생각한다. 언젠가는 좀더 조용한 알람 시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 찾을 지도 모른다. 곧 시내에 나갈 테니까 말이다.

오늘은 달리는 날이다. 그래서 아침을 든든히 먹을 계획이다. 침실 옷장에서 꽁치 통조림 하나를 꺼내들고 일층 거실로 내려간다. 통조림을 조금 따서 국물을 모두 냄비에 따른다. 그리고 국물이 담긴 냄비에 생쌀을 한컵 붓는다. 쌀은 꼭 씻지 않은 채로 넣어야 한다. 쌀은 처음 닿은 물에서 70%의 수분을 흡수하기 때문에, 한번 씻은 쌀에는 육수가 충분히 배지 않는다고 한다. 세상이 멸망해버리기 전에 TV에서 봤던 내용이다.

냄비를 버너에 올리고 불을 붙인다. 이대로 물을 더 넣어가며 천천히 끓이기만 하면 완성이다. 나는 이 요리를 ‘꽁치 국물 리소토’ 라고 부른다.

남은 꽁치 살코기는 키친랲으로 밀봉해서 싱크대에 넣는다. 그건 돌아와서 저녁식사—먹는 시간은 아침 즈음이겠지만—로 먹을 예정이다. 운동하는 날 아침은 탄수화물 위주로, 저녁은 단백질 위주로 먹는다. 그게 근육 발달에 좋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왠만큼 탄탄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햇빛 한번 보지 않는 사람치고는 말이다.

한참 동안 요리가 되는 것을 지켜본다. 바쁠 게 하나도 없다.

드디어 쌀이 다 익은 것 같아 냄비를 버너에서 내린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기 시작한다. 맛은 물론… 비릿하다. 하지만 기분 나쁜 비린내는 아니다. 먼 바다의 맛 같다고 생각한다. 큰 배를 타고 일주일은 가야 하는 먼 바다. 지금은 아무도 가지 않을테니 아마 ‘꽁치 반 물 반’일 텐데. 외삼촌에게 들은 원양어선 생활을 떠올리며 나는 먼 바다에서 낚시하는 상상을 한다.

이제 저녁 9시 반이 되었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을 것이다. 이제 ‘채집 활동’을 나갈 시간이다.

* * *

나는 열 몇 채의 집이 있는 작은 마을에 혼자 산다. 그리고 이 마을은 작은 도시—30만명 넘게 살았던 곳을 작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가까이 있다. 나는 매주 두번씩 시내에 가서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구해오는데 이걸 채집 활동이라고 부른다. 나는 원시인처럼 살고 있고 수렵·채집 중 채집 활동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시내에는 맨몸으로 뛰어서 간다.

처음에는 차를 타고 다녔는데 영 불안했다. 일단 엔진 소리가 시끄러워 내 위치를 사방에 광고하는 것 같았다. 전조등을 켜면 앞쪽만 환할 뿐이고, 옆이나 뒤는 장막을 친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기척도 전혀 느낄 수 없어서 차에서 내리거나 차에 탈 때마다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차를 포기하고 두 다리를 택했다. 시내까지는 뛰어서 가고, 가서는 빠른 걸음으로 움직인다. 내 기척은 줄이고 감각을 곤두세운다. 항상 도망갈 수 있는 골목을 눈여겨보며 다닌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도 괜히 불안한 느낌이 들면 겁쟁이처럼 바로 뒤돌아 달린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살아남았다.

* * *

나는 옷을 챙겨입는다.

먼저 레깅스 위에 짧은 반바지를 입는다. 사실 반바지를 입지 않으면 더 편하다. 하지만 레깅스만 입으면 사타구니 부근이 민망했다. 아직 다른 사람을 의식하나보다.

다음으로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후드가 있는 얇은 바람막이 점퍼를 걸친다. 그리고 두꺼운 양말을 신고 가벼운 배낭을 메고 마지막으로 러닝화를 신는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옷이든 배낭이든 온통 검은색이다. 하지만 러닝화만은 예외다. 이 신발에는 커다란 흰색 로고가 그려져있고, 심지어 재귀 반사 재질이어서 조명을 비추면 번쩍거린다.

이런 약간의 위험을 감수한 까닭은 물론 이 신발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이다. 무게감이나 반발력 같은 특성이 마음에 딱 맞아서 달리기가 더 즐거워진다. 지금 취미라고 할 만한 건 달리기 뿐이고 러닝화는 유일한 사치다.

나는 현관을 조금 열어 밖이 완전히 어두운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다.

마을 밖으로 1차선 도로 하나가 이어져있다. 마을의 모든 빈 집들이 나뭇잎의 줄기처럼 이 길에서 갈라진다.

천천히 도로를 걸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세 달 가까이 가꾸고 있는 감자밭이 어렴풋이 보인다. 어찌 될지 몰라 최대한 넓게 지었는데 정말 잘 자랐다. 성공적인 첫번째 농사다. 하지만 너무 많아서 다 수확하기 어려울 것 같고, 수확한 다음에도 장기간 보관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다. 가공할 방법을 찾으면 좋을 텐데, 식품 공장에 다녔으면 좋았을 걸, 반도체 공정 경험은 너무 쓸모가 없다.

마을 밖으로 몇 백 미터 걸어나오자 길이 트럭으로 막혀 있다. 궁리 끝에 내가 만든 바리케이드다. 도로 양 옆은 밭 쪽으로 경사가 심해 차량은 우회할 수 없을 것이다. 침입자가 들어오면 알 수 있도록 트럭에 장치도 해뒀다. 생각대로 작동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말이다.

이제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내가 만든 바람이 느껴진다. 어두움은 물 같고, 나는 그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같다. 눈이 어둠에 완전히 적응하기 전까지의 막막한 느낌, 긴장 속에서 몸이 천천히 더워지는 이 느낌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지금 완전히 무방비 상태다. 하지만 불안한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나는 내 운을 믿는다. 애초에 운이 좋았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다. 운 좋게도 ‘그 시기’에 햇빛을 보지 않았다.

* * *

재작년 겨울, 갑자기 사람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당장 알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병의 원인에 대해 토론하고, 논쟁하고, 편을 갈라 서로를 비난하기도 했다. 일주일 넘게 그랬다.

수많은 가설이 나왔고 새로운 감염병이라는 주장이 가장 그럴 듯 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가설이 진실이 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병의 원인은 ‘햇빛’이었다. 햇빛을 의심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모든 생명 활동에 태양의 빛이나 열은 꼭 필요하다고, 태양은 모든 생명의 아버지라고들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특정 시기 이후로 햇빛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게 명백해졌다.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듯 태양은 인류를 버린 모양이었다. 몇몇 피부가 얇은 포유류들과 함께 말이다.

병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 지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랬다. 과학자들이 진실을 알아내는 속도보다 병이 사람들을 죽이는게 더 빨랐기 때문이다.

어쨌든 과학자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고 했다. 혈액 전체에 있는 것보다 2배 더 많은 T세포가 피부에 있다든가 하는 설명이 기억난다. 햇빛이 피부의 면역 세포에 이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내게는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했다.

* * *

나는 그 시기에 마침 야간근무 중이었다.

원래는 교대근무라고 해도 며칠에 한번씩 주간·야간이 바뀌었었다. 그런데 갑자기 노사 협상에 따라 새로운 교대 방식을 시험 적용한다고 했고, 하필 내가 일하던 라인이 그 대상이었다. 주간 또는 야간 근무가 한달 이상 이어지는 ‘주야연속 4조 2교대’ 라고 했다.

수면 주기를 자주 바꾸지 않는 게 신체에 무리가 덜 간다는 논리였다. 조삼모사 같기도 했지만 나는 진짜 그런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주기를 완전히 바꿔보려고 휴무일에도 낮에는 잠만 잤다. 마침 약속도 없고 밖에 나갈 일도 없었다.

태양에 대한 의심은 어느 순간 헛소문처럼, 음모론처럼 퍼졌다. 나는 음모론을 잘 믿는 편이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빛을 완전히 피하고, 혹시나 싶어 회사에도 가지 않았다. 그 덕에 살아남았다.

* * *

40분 정도 천천히 뛰어 시내 외곽에 도착했다. 좀 더 뛰고 싶지만 참는다.

오늘의 채집 계획은 평소와 같다. 가볍고 열량과 보존성이 우수한 식품은 배낭에 담는다. 그리고 당장 가져가지 않을 식품들과 혹시 필요할지 모르는 물품들은 지도에 표시한다.

마트는 텅텅 빈 지 오래다. 그래서 가정집들을 뒤져야 하는데, 높은 아파트는 도어락을 열 지 못해 못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열쇠공이 만약 살아남았다면 엄청난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문 따는 기술이 없는 나는 창문을 깨고 들어갈 수 있는 주택이나 낮은 빌라, 복도식 아파트를 노렸다.

허탕 칠 확률이 높지만 여러 군데 다니면 먹고 살 정도는 얻을 수 있다. 잔뜩 사재기해놓고 곧 죽어버린 사람들이 많고, 살아남은 사람은 적어서다. 장기적으로는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는게 목표지만 아직은 채집을 병행해야 한다.

* * *

여러 집을 거쳐 작은 빌라 단지 입구에 섰다. 배낭이 많이 찼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낸다.

한 주택 1층의 낡은 창틀 섀시를 밀어보니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린다. 깰 필요가 없겠다. ‘계십니까’ 라고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안쪽 주방을 살핀다. 주방은 비어있고 특별한 악취도 나지 않기 때문에 천천히 들어간다. 그리고 주방의 찬장들을 하나씩 확인한다.

이어서 다른 방들을 확인하다가 헤드랜턴의 노란색 불빛에 비친 그녀를 본다. 나는 놀라서 몸이 굳는다.

바싹 마른 여자다. 턱이 갸름하고 광대가 두드러진 얼굴이다. 어린아이같은 티셔츠를 입고 몸통도 어린아이처럼 납작하다. 그녀는 차분한 표정이다.

“불빛을 치워주시겠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천둥 소리라도 들은 양 움찔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실제로 큰 건지, 크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혼란스럽고 두렵다. 그녀의 얼굴에 헤드랜턴을 비춘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간다.

지금, 세상에는 법이 없다. 법이 없는 상황에서는 폭력이 가장 효율적인 수단 같아 보인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력에 민감해졌다. 이런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이 두렵기도 하지만, 상대편이 나를 두려워하리라는 사실이 불쾌하기도 하다. 나는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고, 동시에 가해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나는 그저 빨리 이 건물을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부른다.

“저, 잠시만요.”

나는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멈춰선다. 만약 덩치 큰 남자였다면 나는 바로 도망갔겠지. 하지만 그녀는 너무 약해보인다. 나는 멈춰서 그녀를 돌아본다. 그녀가 눈부시지 않도록 헤드랜턴의 각도를 아래쪽으로 조정한다. 불빛은 그녀의 발치를 비춘다. 그녀는 로퍼 구두를 신고 있다. 로퍼를 신고도 살아남을 수 있군.

“얼굴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가 너무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 같아 좀 불쾌하다. 나는 랜턴을 벗어 내 턱 아래에 가져다 댄다. 그렇게 아래쪽에서 얼굴을 비추면 무섭게 보이리라 생각한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다시 헤드랜턴을 머리에 쓰고 그녀의 로퍼를 계속 쳐다본다. 교무실에 불려온 중학생처럼,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어디 살고 계세요?”

그런 민감한 내용을 묻다니, 아무래도 내가 만만해보이는 모양이다. 앞으로 주머니칼이라도 들고 좀더 위협적인 모습으로 다녀야 할까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거절하는 게 맞겠지만 적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말없이 뒤돌아서기도 타이밍이 늦은 것 같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발치만 쳐다본다.

“혹시 정 필요한 일이 있으면 도와달라 하고싶어서 그래요.”

그녀는 공손하게 말한다. 만약 그녀가 나를 돕겠다고 했다면 나는 바로 도망쳤을 것이다. 속이려는 게 뻔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도와달라는 말에는 속임수가 없어 보인다. 그녀는 약하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오랫동안 외로웠던 탓에 오랜만에 만난 여자에게 친절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대한 무뚝뚝한 말투로 ‘석두 2리’ 라고 대답한다.

“석두 2리…… 그게 끝이에요?”

그것만 듣고 찾아오긴 어려울 것 같지만, 나는 이제 충분하다고 느낀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몸을 숙여 신발끈을 다시 맨다. 나는 그녀가 보거나 말거나 늘 하던대로 햄스트링과 대퇴사두근, 어깨를 충분히 스트레칭한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한다.

* * *

멀리 뒤쪽에서 나를 비추는 전등 불빛이 보인다. 그 여자는 손전등도 있었던 모양이다. 주소를 알려준 것이 역시 찜찜하다. 이제는 집에서 좀 더 긴장하고 있어야겠다. 하지만 괜찮다—죽기밖에 더 하겠냐 싶다. 죽음이란 흔히 있는 것이고, 노력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얼마 달리지 않아 평소보다 심박수가 높이 오르는 것 같이 느낀다. 잠시 제자리 뛰기를 하며 손목시계를 보면서 오른손 검지로 왼쪽 손목의 심박을 잰다. 심박은 괜찮다.

나는 계속 달린다. 한가지 생각만 한다—지금 페이스를 유지하자.

 

2.

집에 도착했다.

땀에 흠뻑 젖었다. 몸이 너무 식지 않도록 플리스 재킷을 입는다. 다시 한번 팔과 다리, 목과 어깨를 스트레칭한다.

샤워를 할까 잠시 생각해본다. 옥상에는 물탱크가 있다. 가끔 한 번씩 냇물을 채워두면 모든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온다. 잠시 문명인처럼 살게 해주는 이 물탱크 때문에 이 집을 골랐다.

물탱크는 가득 차 있지만 오늘 샤워는 건너뛰기로 한다. 땀 냄새가 지독하겠지만 상관없다. 대신 물을 여러 컵 따라 마신다.

저녁 요리를 시작한다. 이름하여 ‘비타민 꽁치 요리’다. 꽁치를 냄비에 넣고 그 위에 종합비타민제를 부숴 뿌린 다음에 살짝 끓이면 끝이다. 신맛이 강한 요리다. 모두가 좋아할 만한 맛은 아니지만, 나는 먹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깨끗히 긁어 먹고 설거지도 다 했다. 이제 제 시간에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된다. 그때까지 잠들지 말고 지루함을 참아야 한다.

나는 오늘 있었던 일, 그러니까 마른 여자를 만난 일을 생각한다. 평소보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날이지만 시간은 더 느리게 흐른다.

* * *

갑자기 멀리서 삐익삐익삐익삐익—차량 경보음이 울린다. 날카로운 소리다. 마치 칼날로 현관을 긁어대는 것 같다.

재빨리 플리스 재킷을 벗고, 러닝화를 신고, 밖으로 달려 나간다. 경보음이 나는 곳은 내가 길을 막아둔 트럭이다. 누군가 침입했다. 나는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을 느낀다.

트럭으로 달려간다. 침입자의 눈에 띌 수 있으니 찻길을 따라가지는 않는다. 밭 건너 옆 집 뒤쪽으로 농로가 있다. 그 길을 뛰어서 나는 곧 트럭이 보이는 곳에 도착한다.

나는 몸을 숨기고 숨을 고르며 트럭 주위를 살핀다. 마을버스만 한 버스가 트럭 앞에 서있다. 버스의 전조등이 너무 밝다. 두 명이 밖에 나와 있다. 둘 다 남자인 것 같다.

시내에서 만난 여자가 집 위치를 알려준 게 분명하다. 배신당한 기분이다. 하루도 지나기 전에, 주소를 알려준 바로 그날 이렇게 쳐들어오다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호흡은 이제 차분해졌다. 나는 계속 살펴본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경보음을 끄거나 우회할 방법을 찾는 것 같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는다.

시간이 지나 경보음마저 꺼졌다. 나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간다.

몇 걸음 앞에 가서야 그들은 나를 알아본 모양이다. 둘다 몸을 떨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놀라는 모습을 보니 순진한 사람들 같다. 폭력적인 사람들 같지는 않아 보인다. 나는 멈춰서서 팔짱을 끼고 선다.

버스에서 한 사람이 내린다. 아까 본 마른 여자다. 그녀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다른 남자들에게 확인해준다. 남자 둘은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 중 하나는 뿔테 안경을 쓰고 키가 컸다. 다른 하나는 작고 뚱뚱한 남자다. 아직도 저렇게 큰 덩치를 유지할 수 있다니.

“이 차는 어떻게 한 건가요?”

뚱보가 대뜸 내게 묻는다.

이들은 길을 막은 트럭을 보고 차를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트럭을 살펴보다 문이 열려있고 차 키도 꽂혀있다는 걸 보고 시동을 걸어보려고 했겠지. 하지만 차 키를 돌리자마자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을 텐데, 그걸 어떻게 했는지 묻는 것이다.

나는 차 키의 ‘이모빌라이저’를 부순 채로 꽂아두었다고 설명한다.

“오.”

뚱보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나는 으쓱한 기분을 느낀다. 그동안 트럭에 주기적으로 연료를 채워 넣고, 시동을 걸어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도록 충전해왔다. 바로 집 앞도 아니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의도한 대로 됐다.

“공돌이신가 봐요.”

뚱보가 반갑다는 듯이 묻는다. 생산라인 근무자로서 ‘공돌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리지만 악의는 없어 보인다. 나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다.

내가 말이 없자 뚱보는 뿔테를 쳐다보며 상황을 설명했다—자동차 키는 열쇠가 물리적으로 맞더라도 서로 인증된 전자칩이 없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을 뿐 아니라 경보음이 난다고 말이다. 나는 자동차나 전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오래전에 차 키를 잃어버려 열쇠를 복사한 적이 있었고 그때 카센터에서 얻어 들은 지식일 뿐이다.

또 대화가 끊어지자 이번에는 뿔테가 입을 연다. 뚱보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분이 전자공학 전공이거든요. 비슷한 부류를 만난 것 같아서 반가웠나 봐요.”

약간 솔깃한 이야기다. 전문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 지금 가장 아쉬운 것은 전기니까 말이다. 전등만 해도 그렇다. 촛불은 그다지 밝지도 않은 주제에 공기를 탁하게 만들었다.

나는 뿔테에게 뭐가 필요한지 묻는다.

“모두가 원하는 것들입니다. 물과 식량, 그리고 집이죠.”

뿔테는 팔을 크게 움직여 한숨을 쉬는 듯한 몸짓을 하면서 말한다. 예의바른 목소리지만 뻔뻔한 요구다.

나는 뿔테를 천천히 살펴본다. 얼핏 수염이 길어 보이지만 턱수염과 구레나룻을 잘 다듬은 모습이다. 운동을 하는지는 몰라도 뚱보처럼 물렁물렁한 몸은 아니다. 잘생겼다고 할 순 없어도 왠지 여자들이 좋아할 얼굴 같다.

옆에 서 있는 여자도 다시 한번 자세히 본다. 건강한 느낌을 주는 까무잡잡한 피부이긴 하지만 다시 봐도 너무 말랐다. 체성분계로 측정하면 골격근량이 16킬로그램이나 나오려나 싶다. 먹을 게 부족했던 건지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내 눈을 피하는 것 같다. 나를 속였다는 사실에 가책을 느끼는 걸까? 물론 그녀는 혼자라고 한 적 없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무리의 남자들과 같이 찾아갈 거라고 말했다면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고, 그건 그녀도 알았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여자에게 속는 게 처음도 아니고 말이다.

나는 마른 여자를 계속 쳐다보면서, 버스 안에는 몇 명이나 있는지 묻는다.

“저희까지 모두 남자 다섯 명, 여자 네 명입니다.”

뿔테가 대답한다. 모두 아홉 명이다. 너무 많다.

나는 턱에 손을 올리고 곰곰이 생각한다. 사실 생각하나 마나다. 이들, 이 난민들을 들이는 건 큰 손해인 게 뻔하다.

하지만 이들이 나한테 위험하진 않다. 누군가를 공격할만한 기세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저 궁지에 몰려 도움을 청하는 것 뿐이고, 만약 내가 거절하면 돌아가서 다른 방법을 찾든가, 아니면 그냥 죽어버리든가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결정권을 가진 느낌이 뭔지 알았다. 우두머리 수컷이 된 기분 말이다. 이들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지만 그건 죄수의 마지막 자존심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죄수들에게 자비를 내리기로 한다. 지금 나만이 부릴 수 있는 사치다.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한쪽 손을 빼고는 한쪽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쪽에는 내 집 근처로 갈 수 있는 뒷길이 있으니 거기에 차를 대라고 말한다. 뿔테와 뚱보, 마른 여자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제대로 알아듣기도 전에 일단 끄덕거리는 것 같다.

* * *

나는 버스 승객들을 모두 집 안에 들어오게 한다. 집이 넓어서 공간은 충분하다. 이들은 좋은 랜턴을 갖고 있고, 그 밝은 빛 아래에서 본 사람들은 더럽고 초라하다. 한 사람은 장애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얼굴을 찌푸린다.

이들에게 먼저 샤워를 권한다. 부잣집 아이가 피아노를 자랑하는 기분으로 말이다. 다들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이들은 다 씻고 나서는 새 몸이라도 얻은 것처럼 기뻐한다. 나는 그런 모습에 만족감을 느낀다.

사람들이 씻는 동안 감자를 쪘다. 나는 이들에게 감자를 먹은 다음 모두 일 층에서 자라고 하고 이불이 있는 곳을 알려준다. 이불은 충분하지 않겠지만 알아서들 할 것이다.

나는 이층으로 올라간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 이층 침실 문을 잠그고, 베개 밑에 주머니칼을 넣어둔 채로 침대에 눕는다. 칼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깊이 잠든다.

 

3.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몇 주가 지났다.

그동안 좋은 시간이 많았다. 가장 즐거웠던 건 감자 수확이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감탄했다. 다른 사람들의 감탄처럼 달콤한 건 없다고 느꼈다. 어차피 감자는 너무 많아서 처치 곤란이었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뚱보는 감자를 보관할 방법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는 것 같았다. 전자공학 전공자가 별 뾰족한 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고민을 팔아버린 것처럼 개운했다.

사람들과의 대화도 생각보다 즐거웠다. 사실 대부분 나를 어려워하는 것 같았고, 내가 말주변이 없어 제대로 대화했다고 하긴 어렵다. 그래도 마른 여자와는 이야기를 꽤 나눴다. 그녀는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또 왜 밖에서 망을 보다가 나와 마주치게 됐는지 자세히 얘기했다. 솔직히 재밌었다.

하지만 이들과 약간씩 가까워지는 것 같은 느낌은 곧 끝났다.

이들은 대부분 순한 양 같다. 나는 이들 사이의 외로운 늑대지만, 그건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참기 어려운 것은 양치기—즉 뿔테였다. 사람들은 병아리가 어미를 따르듯 뿔테를 따랐다. 나는 그런 모습이 불편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결국 이들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게 돼버렸다.

* * *

다 같이 하는 식사 시간이다.

모두가 거실에 모인다. 사람들은 각자 역할을 나눠 음식을 차린다. 음식이래 봐야 대부분 감자지만 말이다. 그리고는 모두가 뿔테의 신호를 기다린다. 뿔테는 물컵을 들어 올린다.

“자 그럼 식사할까요? 식량을 주신 ‘검은 마라토너’에게 감사를.”

사람들은 웃으며 식사를 시작한다. 이들은 끼니때마다 나한테 감사를 표했다. 감사 인사를 아주 많이 하면 그 감사한 일을 없던 걸로 만들어, 빚 진 게 없는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검은 마라토너’라고 부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은색 운동복 차림에 놀라기야 했겠지, 이해는 갔다.

살가운 대화도, 그렇다고 불평도 없는 식사가 이어진다.

다들 식사를 마친 것 같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뿔테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런 상황을 만든다. 타고난 리더만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뿔테는 옆 옆자리에 앉은 나를 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른 분들은 모두 아는 얘기겠지만, 제가 어떻게 살아남게 됐는지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 시기에 기도원에 갇혀 있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현지에서 취직하지 못해 돌아와서 말이죠. 좀 우울증이 있긴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 부모님은 저를 병원에 보내기보다는 기도원에 집어넣었어요. 심지어 그분들은 신자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왜 갑자기 자기 과거를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뿔테는 계속 말을 이어간다.

“기도원은… 지독한 곳이었어요. 거기서 죽게 될까 봐 두려웠는데, 곧 태양의 분노가 시작됐죠. 그 기도원 덕분에 살아남을 거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어요. 어쨌든 저는 그렇게 이 벌을 피했습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는 이런 분위기가 싫다. 솔직한 마음을 뭐라도 하나 강제로 털어놓아야 하는, 중학교 수련회 같은 분위기 말이다.

뿔테와 나 사이에 앉아있던 마른 여자가 이야기를 잇는다.

“저는 흔히 말하는 은둔형 외톨이었어요. 세상이 망해버린 다음에는 이상하게 밖에 나오는 게 두렵지 않더라고요.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조금 웃는다. 그녀는 최대한 짧게 이야기한 것 같다.

사람들은 이제 나를 쳐다본다. 내 차례라는 뜻이다.

뿔테는 뭔가 계획이 있는 모양이다. 다들 돌아가면서 각자의 부끄러운 부분, 즉 어떻게 태양을 보지 않고 살아남았는지 얘기한 다음에는 뭔가 감동적인 얘기를 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얘기를 하기 싫다. 부끄럽지도 않다.

나는 뿔테를 바라보며 힘주어 말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내 의도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나는 덧붙인다.

“이럴 시간이 있으면 스쿼트라도 해서 코어 근육을 키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뿔테를 쳐다본다. 뿔테는 난처한 표정도 짓지 않고 빙글빙글 웃는다.

“좋은 말씀이에요. 역시 저희하고는 수준이 다른 분이세요. 어떻게 살아남으셨는지 말씀 안 해도 알 것 같아요.”

뿔테의 말에 사람들은 비로소 웃는다.

“짐작하시는 것처럼 제가 오늘 할 말이 있어서 먼저 분위기를 좀 만들어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마라토너 선생님의 지적대로 시시콜콜한 부분은 건너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네요. 각자 사정은 다르겠지만 솔직히 2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겠어요.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해도 할 말 없죠.”

나는 뿔테의 말이 불쾌하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허리를 똑바로 펴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는 모두 우연히 만났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남은 건 우연이 아니에요. 우리가 살아남도록 해준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덕목은 현명함입니다. 바로 이분이 똑똑했던 덕분에 우리가 살아남은 거죠.”

뿔테는 뚱보를 쳐다보며 박수를 친다. 사람들도 그를 따른다. 뚱보는 부끄러운 기색 없이 두툼한 가슴을 내밀고 앉아있다. 아마도 이 칭찬이 그가 얻는 유일한 보상일 것이다. 사람들은 계속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햇빛을 받으면 끄덕끄덕하는, 차 대시보드에 얹어두는 멍청한 인형처럼.

“첫 번째는 현명함, 그리고 그다음에 우리가 가진 것은 선량함입니다.”

뿔테는 장애가 있어 보이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 동생, 태양에 노출된 탓에 지금은 아무 쓸모도 없는 이 친구를 우리는 항상 데리고 다닙니다. 이건 우리가 사람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린 선량한 사람들이죠. 그것은 우리가 살아남아야 할 자격을 알려줍니다.”

나는 뿔테의 연설이 불편하다. 낡은 홍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민망한 기분이 든다. 그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시작한다.

“우리가 가진 현명함과 선량함, 이 두 가지로는 부족하다고 저는 늘 말해 왔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강함’입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약한 자가 외치는 정의란, 죽은 자가 하는 주장일 뿐입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의 외침이나 마찬가지예요. 거기에는 아무런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에요. 신이 아니면 뭐든 간에,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어설픈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힘을 찾았습니다. 이분이 우리의 힘이에요”

뿔테는 나를 가리킨다. 두세명이 작게 손뼉을 친다.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뿔테가 원하는 것은 알 것 같다. 그는 내게 지금 가진 것을 모두 내놓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죽, 그들을 먹여 살리고 보호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약간의 칭찬만을 대가로 받으면서 말이다. 치사한 제안이긴 하지만 뭐, 사실 생각해볼 만한 제안이다.

뿔테의 혓바닥은 혐오스럽지만, 저렇게 혓바닥이 날렵한 사람도 필요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배웠다. 손이 빠른 사람들 위에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들이 있고, 그 위에는 혓바닥이 빠른 사람이 앉아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간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갔고,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그동안 외로웠고 열 명 정도는 부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냥 어깨를 살짝 으쓱한다. 사람들은 내가 뿔테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도하는 것 같다.

뿔테도 자신감을 얻었는지 좀 더 단호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제는 3단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든다. 눈빛들이 엇갈린다. 다들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특정한 누군가를 쳐다보거나, 눈을 내리 깐다. 으음, 하는 탄성을 입 밖으로 내는 사람도 있다. 마른 여자만이 꼼짝하지 않고 뿔테를 쳐다보고 있다.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뿔테에게 3단계가 무엇인지 물어볼 수밖에 없다.

“3단계는 콘돔 압수 단계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콘돔을 보급하지 않을 겁니다.”

뿔테는 다시 빙글빙글 웃으며 말한다. 나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그의 말을 이해한다. 이들은 복잡하게 얽혀 열심히들 교미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살아남을 궁리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판국에 말이다. 나는 얼굴을 찡그린다.

“그러니까 여기가 에덴의 동산이고, 당신은 인류 문명을 재건하겠다는 거죠?”

나는 제대로 이해한 건지 확인하기 위해 뿔테에게 묻는다.

“저는 그냥 평화로운 마을 계획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어쨌든 맞게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뿔테는 순순히 인정한다. 나는 화가 난다. 그는 미친 게 분명하다. 기도원에 갇혔다는 건 거짓말이고 아마 정신병원에 갇혀있었을 것이다. 인류는 종말을 맞았다. 왜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이들 난민은 스스로 살아남을 능력도, 하다못해 아이를 안전하게 낳을 능력도 없다. 그러면서 나에게 아이들까지 지키기를, 쾌락 없는 책임을 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세상에서 애를 낳겠다고요?”

* * *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시간이 조금 이어진 후에 나는 뿔테를 바라보며 나가라고 말한다.

“저희는 이곳이 마음에 듭니다.”

뿔테는 공손하게, 하지만 당당하게 말한다. 처음에 이곳에 들어오려고 할 때와 같은 태도다. 그때는 내가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들을 모두 쫓아낼 방법은 없다.

익숙한 상황이다. 남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가 내 것을 뺏기게 되는 상황 말이다. 나의 패배가 뚜렷하고 이제 도망치는 방법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나는 말이라도 강하게 한 마디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혓바닥은 내 발목만큼 날렵하지 못해서 나는 머뭇거린다.

“당신 같은 권력자는 항상 이런 식이지. 자신의 과대망상의 다른 사람들한테 강요하는 것 말이야.”

나는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말을 던져놓고는 뿔테를 노려본다.

“저는 권력자가 아닙니다.”

뿔테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억울한 표정이다.

나는 천천히 뿔테의 얼굴 앞으로 다가갔다. 두어 뼘 거리까지 다가가지만, 뿔테는 주춤거리지 않는다. 내가 그의 안경을 벗겨낼 때도 꼼짝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안경을 손으로 비튼다. 안경 렌즈가 바닥에 떨어진다. 나는 렌즈를 발로 밟지만 렌즈는 깨지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공구함에서 망치를 꺼내 와서 렌즈를 부수는데 성공한다. 아무도 꼼짝하지 않는다. 무기력한 인간들이다.

나는 뿔테에게 테만 남은 안경을 다시 씌운다.

“이 못생긴 안경의 렌즈를 다시 구하는 데 사람들을 얼마나 이용하는지 보면, 당신이 권력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나는 조금 후련하다고 느낀다. 제대로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 * *

나는 바로 떠나기로 한다.

무엇을 가져가야 하나 생각해보지만 흥분한 탓에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라이터와 헤드랜턴, 주머니칼 정도를 배낭에 넣어 들고, 여분의 러닝화가 들어있는 종이 박스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밖으로 나간다. 인사는 하지 않는다.

밖에서 손에 익은 호미를 챙긴다. 빠뜨린 게 없는지 이곳 저곳을 살펴보느라 누가 밖에 나온 것도 몰랐다. 고개를 들어 보니 마른 여자가 나와 있다.

“네가 말한 거 말이야, 나는 동의해.”

그녀가 말한다. 아마도 나를 위로하고 싶은 모양이다. 미안할 만도 하지,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녀가 의외의 제안을 한다.

“따라가도 돼?”

나는 놀라서 그녀를 쳐다본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순식간에, 나는 그녀가 진심일 거라 믿기로 한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그렇듯이 갑작스러운 행운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내가 그녀를 쳐다보며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조금씩 눈이 어둠에 적응한다. 이제 그녀의 모습이 자세히 보인다.

역시 너무 마른 몸이다. 조금만 근육이 붙으면 꽤 멋질 텐데. 먼저 발에 잘 맞는 러닝화를 하나 구해줘야겠다. 맘에 드는 신발이 있으면 운동하려고 할 지도 모르지.

내게는 지도가 있다. 멸망한 세계가 내게 남긴 유산이다. 지도는 꽁치 캔 같은 식품들 뿐 아니라, 러닝화 같은 특별한 물건들의 위치로 빼곡하다. 아, 콘돔의 위치도 있었지—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좀 부끄러워진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몸을 숙여 신발 끈을 맨다. 나는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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