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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현을 인터뷰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나는 심란했다. SNS에 적힌 메일 주소로 그에게 평소대로 하는 것처럼, 정중한 어투와 요점만 간단히 설명하는 문체로 인터뷰에 응해달라는 메일을 보냈었다. 마지막 시집 전에 인터뷰 한 번만 하죠, 형님. 어차피 시단 떠나시는데 독자분들이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시잖아요. 저희 잡지 문단이랑 별 관련 없는 거 아시잖아요. 그런 식의 말을 조금 더 정제해서 보냈었다.

 

답장은 짧았다. ‘내가 너랑 하는 인터뷰를 마다할 이유가 있겠냐.’ 그렇게 인터뷰는 성사되었다.

 

그의 행보는 가히 파격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독보적이다. 신춘문예에 응모하지 않은 시인들은 많고, 동인을 조직하는 시인들도 많지만, 홀로서기로 사이트를 운영하며 인지도를 ‘성공적으로’ 획득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그의 개인 사이트 <인외천국人外天國>에서 게재한 시들을 묶은 첫 번째 시집 <인간어로 말하지 않는다>는 내가 2024년에 읽은 시집 중에서 가장 감명 깊은 작품이다.

 

독립출판, 온라인 활동, 신비주의. 21세기 문학판을 뒤흔드는 ‘척’ 했던 세 가지 키워드를 김이현은 사용했고, 그리고 유일하게 ‘진짜로’ 흔든 유일한 작가였다. 첫 번째 시집을 공격적인 마케팅과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팔았다. 그러면서도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 당시 시인 김이현을 상징하는 열쇳말이 있었고, 그 단어는 ‘비인간’이다. 문학적 페르소나를 2차원으로 존재하는 캐릭터로 사용했고, 그 캐릭터는 인간이 아닌 수인(獸人)이었다. ‘시 바깥의 언어와 시인 자체의 목소리로 독자를 또 다른 세계로 초대하는 신인의 등장’이라는 평이 있었던 만큼, 그의 활동은 파격적이었다. 페소아도 숱한 한국 시인들도 페르소나를 효과적으로 사용했지만, 그는 신세대의 감각으로 자아를 타자화하여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그렇기에 ‘이제 문학계는 경직되지 않고, 젊은 작가들의 대표적인 얼굴 중 하나가 김이현이다’는 평가도 쉽게 나왔다. 시인 본인은 ‘경박한 호들갑’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5년간 행보는 호들갑보다는 거인의 차분한 발걸음에 가까웠다. 꾸준한 시집과 하나의 산문집, 자신이 몸담아왔던 퍼리 팬덤(furry fandom)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비판, 그리고 문단과 팬덤 양쪽에서 받은 폭격. 그가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김이현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독자로서 즐겁고 슬프던 나날이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걸 제공해준 김이현은 이제 시단을 떠난다.

 

그를 환영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하면 배척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시인은 그 뒤의 부류를 더 많다고 느낀 것일까. 김이현은 지난 4월 인외천국에 기고한 기고문에서 ‘이제는 말들에 지쳤고 더 말할 힘이 없다’라고 고백했고, 올해 말에 마지막 시집을 출간한다고 밝혔다. 선공개한 시에서 그는 ‘조용한 곳에서 살았다 / ‘그렇지만 이건 전부 꿈이야’ 읊조리는 네루다’고 쓸쓸히 읊조리기도 한다. (「영매사와 한 편의 절망」) 무엇이 시인을 이토록 애달프게 만들었는가. 서점가에 있는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는 그의 마지막 시집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문단을 떠나기로 한 김이현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인터뷰 일정을 잡고 장소를 골라야 했다. 평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는 퍼슈트를 착용하는 그의 특징 때문에 프랜차이즈 카페를 고를 순 없었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남을 신경 쓰지 않는 독립서점 파란연필에서 진행했다. 이 작은 서점에서 먼저 그의 시집을 판매했으니, 의미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빨리 자리에 도착해서 그를 기다렸고, 잠시 뒤 문을 열고 그가 등장했다. 이번에 그는 첫 시집에서 사용한 페르소나를 형상화한 퍼슈트를 착용했다. 그러니까, 독립서점에 키가 175cm나 되는 정장 입은 검은색 고양이 인형 탈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적은 수의 손님들이 그를 슬쩍 바라보았고 사인을 요청하는 손님도 있었다. 나는 그런 광경마저도 씁쓸히 바라보며 시인을 맞이했다.

 

”오랜만이에요 형. 어느새 모습이 바뀌었네요.“

 

그건 농담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그런 인형 탈 - 퍼슈트는 많았다. 적어도 3개 정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농담도 이제 마지막이네.“

 

우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시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데에 눈물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인터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작했다.

 

 

 


 

 

 

“먼저 독자분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서 인터뷰하는 게 처음이라 답변이 조금 서툰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시인도 소설가도 요즘은 검소하고 소박하게, 일상적으로 말하는 게 유행인 것 같지만 좀처럼 저는 그러지 못하네요.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말만 이 친구랑 같이 잔뜩 하고 갈 예정입니다.”

 

그렇게 말한 것치고 김이현은 상당히 ‘현대적’인 모습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다면 퍼슈트(Fursuit)1를 입는다. 그것도 전신형으로. 매번 모습이 달라진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그는 지난 시집 북토크에서는 용을 닮은 퍼슈트를 입었지만, 이 인터뷰에서는 고양이 모양의 퍼슈트를 입었다.

(1:개인제작 맞춤형 수인(獸人) 의상. 그 단어대로, 동물과 인간을 혼합한 듯한 인외 종족을 형상화한 의상이다. 동물 탈처럼 머리에 쓰고, 몸통을 입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옷은 매번 갈아입으시죠?

 

“옷이라기보다는 피부에 가깝지. 파충류가 탈피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해, 나는. 기본적으로 이 친구들은 쑥쓰럼이 많아서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하고, 꼭 나서야 할 때만 내 안에 있는 걸 끄집어내서 피부로써 두르는 거야. 그리고 이번엔 마지막이니까 처음에 함께한 친구로 나왔고.”

 

─좋아요. 마지막 시집에 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작가님의 오랜 팬이라서 그런진 몰라도, 이번 마지막 시집이 상당히 아쉽게 느껴집니다. 『유령은 작별을 고한다』는 어떤 마음으로 묶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목에 다 담았어. 요즘 사람들은 직관적인 시어를 좋아한다는 동료들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하여서, 최근에는 직관적인 시들만 적었거든. 그러니까 이 시집은 말 그대로 유령이 작별을 고하는 말들만 모아둔 시편이다. 모든 유령이 목소리를 내어 담은 레코드다. 유령에 대한 말까지 해설해버린다면 시집이 너무 볼품없어지니, 죽음과 기존의 문학이라는 키워드만 제시하겠어. (그는 이 단락에서 웃었다. 흐흐,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김이현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시집에 들어가는 시중에, 묶이기도 전에 많은 인기를 끈 시가 있는데. 직접 소개해주신다면?

 

“SNS에 이미지로 직접 투고한 「후장주의자」라는 시가… 많은 분들이 좋아해줬지. 좋아해줬다기보단 그건 씹었다고 하는 게 맞지 않나? 아무튼, 시인으로서는 많이 언급되니 기분은 좋았어. 논쟁적이구나, 하는 느낌이 제법 뿌듯하거든.”

 

후장주의자는 화자가 당한 동성간 성폭력 피해를 고백하며, 진술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세한 묘사를 선보인다. 그러다 결국 파괴된 심리를 드러내다가, 자신의 욕망마저 부정할 수 없어 마지막에는 ‘그래 결국에는후장주의자였던거지/ 그렇지만 저는그들만큼은용서할수없었구만그려’라는 한탄하는 듯한 시구로 끝나는 작품이다.

 

─사실 『유령은 작별을 고한다』는 저를 포함한 문학계의 몇몇 사람들, 그리고 김이현 시인님의 주변인에게 먼저 배포됐었죠. 이런 저런 ‘찌라시’들이 오가는 와중에 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인간들을 보고 화를 내는 것 같았어요. 용 같은 영물이요.

 

“저번 인터뷰에 용 퍼슈트를 입고 와서 그러냐? (‘아뇨,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 그렇지만 비슷한 마음으로 쓰긴 했어. 그 시편을 쓸 때 가장 많이 떠올린 이미지가 앉아있는 누군가거든. 제 자신이기도 하고 친구들이기도 하고 제가 모르는 누군가이기도 하겠지, 하면서 썼어요. 그런 목소리들이 들려와. 그걸 들으면 전화기를 들어서 받는 것처럼… 그냥 써.”

 

─이번에 차용한 영매사라는 이미지도 그런 것에 속하는 건지.

 

“맞아. 나는 결국 그런 시인이니까, 마지막 시집의 페르소나는 결국 영매사일 수밖에. 그 녀석을 디자인해준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계속 말했지. 무조건 갓을 쓰고 부채를 들어야 한다…. 왜냐면 말하고 있는 그 아이는 유령과 이야기하고 있는 거니까. 서사적인 장치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주장해서 나온 이미지야.”

 

─이번에도 시집 내부에 일러스트를 넣으셨죠. 그런데도 여전히 김이현의 시는 글로 이루어질 때가 제일 아름답습니다. 마지막 시가 인상 깊어요.

 

“독자를 대하는 마지막 인사니까 심혈을 기울였어. 그래서 장시가 된 것 같기도 해. 롱테이크로 찍은 영화를 좋아해서 글도 길게 쓴다고 생각하거든. 허우샤오셴이나 에드워드 양 같은 영화. 고지식한 취향이야.”

 

“내가 좋아하는 건 역시 가장 마지막 연이네. 『유령은 작별을 고한다』에 대한 이야기는 이걸로 마무리해도 좋을 정도로. 생각해보니 이 시집의 첫 시는 제령을 위한 재료를 모으는 장면으로 시작하네. 시들의 화자가 각자 다른 사람인지 한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런 일관성들이 재밌어.”

 

시인의 말대로 그 시집에 관한 이야기는 그 정도로만 하기로 한다. 대신 그 시의 마지막 연을 붙여 둔다.

 

 

 

 

 

이제는 화톳불이 타오르고

 

누군가를 던져야만 해요

 

그건 누구일까 골몰하는 밤

 

그렇지만 확실한 건

 

불타오를 수 있기만 하다면 괜찮아요

 

보들레르처럼 말할 수 있다면 좋아요

 

그러면 새라도 시를 읊을 테니까

 

피어 오르는 재

 

몸을 떠나가는 유령들

 

도시에 남은 한 명의 소년

 

 

 

<김이현, 분신>

 

 

 


 

 

김이현이 시를 쓰게 된 계기는, 시인이 여러 산문에서 밝혀왔듯이 상당히 독특하다. 그가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늘 퍼슈트를 입는 것처럼, 김이현은 퍼리 팬덤이라고 하는 서브컬처와 아주 밀접한 거리에 있다.

 

─시를 쓰시게 된 계기가 ‘내가 속한 마을에서 글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잖아요. 그 내막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너도 알겠지만 난 인간 아닌 것에만 흥미를 느끼잖아. 그중에서도 용을 좋아했고. 독자분들이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인터넷에 많이 볼 수 있지.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끼리 모여 작은 사회를 조직하고, 그 사람들은 결국 팬덤이라는 단체로 모여. 같은 걸 좋아하니까, 우리는 친구. 우린 한 족속. 나는 거기서부터 시작했어. 사람들이랑 교류하고, 인간 아닌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열광했지. 컨벤션에 참가하고 퍼슈트 촬영회에도 구경 가보고. 좋아하는 캐릭터에 대해 소설도 써보고, 그 열광의 현장을 시로 남기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좀처럼 글을 안 쓰더라고. 내가 유일했지. 그래서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 처음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었지만, 나중에는 의무감 같은 걸 가지면서.”

 

─이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써야 한다.

 

“자꾸 인용하네. 화나게.”

 

─(하하) 그렇게 쓰면서도 계속 퍼리 팬덤에서 활동했고, 결국 그 작은 글들이 모이고 모여서 책이 됐죠.

 

“처음에는 퍼리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고 싶었지. 문장을 잘 쓰니까 이건 분명히 이 사람들도 좋아할 거다. 상상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춤추는 문장들 사이에서 그림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외의 존재를,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다. 그러면 읽고 난 다음에 책을 덮은 뒤, 감동에 빠져들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모두 잘 다듬은 글보다는 막 휘갈긴 그림을 좋아하기 마련이었지. 당연히 인기는 없었어. 그럴 때는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질투하기도 했었어. SNS 같은 데에 저주를 남기면서. 난 왜 이렇게 못 흥하냐….”

 

─이제는 그랬던 게 부끄러우시다면서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어쩔 수 없는 것처럼 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었던 거지. 그냥 내가 별종이었던 거야. 이놈의 글이 뭐라고. 그건 상당히 나중에 한 깨달음이야. 당시의 나는, 글로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내가 잘 쓰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알아줄 거라 생각했지.”

 

2022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2년 동안 <인외천국>에 수십 편의 시를 올렸지만 조회수는 세 자릿수에 그쳤다. 몇몇 문학계 관계자들이 발견하긴 했었지만, 팬덤 내부에서 나온 창작품이라는 점에서 그저 특이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당시 김이현의 행보를 문학계가 주목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퍼슈터 활동 때문도 있었다. 그는 <인외천국>을 만들 때부터 퍼슈터로 활동하고 있었고, 그의 시를 읽는 사람들은, 김이현의 퍼슈팅이 궁금해서 찾아 왔다가 클릭 한 번 해본 자들뿐이었다.

 

─그래서 첫 번째 시집을 내기로 결심하셨었죠. 팬덤에서의 활동을 한차례 청산하되, 그곳 사람인 걸 숨기지 않고서.

 

“독립출판으로 호기롭게 시집을 낸 시인들이 SNS 스타가 되는 걸 보고 영감을 얻었어. 나도 저렇게 성공하겠다, 진짜 글로서 혁명을 보여주겠다. 팬덤 명찰을 달고 한번 성공해보겠다! 당시의 나는 예술로써 성공하고 싶었으니까 그건 대단한 착각에 불과했지만(웃음).”

 

어쨌든 호기롭게 낸 시집이 알음알음 입소문을 탔었지. 시집 일러스트에 수인을 때려 넣은 무시무시한 오타쿠가 있다, 근데 시를 끝내주게 잘 쓴다…. 독자들에게도 문학계에서도 반응이 있어서 즐거웠어. 비록 그때 내가 바랐던 성공은 아니었지만 어쨌던.”

 

─그렇게 형님이 세상에 등장했고요. 첫 번째 시집에는 저자 사진 대신에 수인 일러스트를 실으셨고, 시집 내에서도 퍼슈터들의 사진이나 난해하고 몽환적인 스타일의 수인 그림이 실렸어요.

 

“저자 사진 들어간 녀석은 내 첫 번째 퍼소나(fursona). 그 시집은 인간계에 출사표를 던지고 저 어딘가에서 내려온 화자를 상정해둔 시집이니까, 그 친구를 분신 삼고 싶었어. 일러스트는 당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의 그림을 실었고, 퍼슈터들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 그 시집은 합작 같은 느낌도 있었어. 각자의 퍼소나를 함께 모아보자. 그렇지만 가장 먼저가 되는 건 내 글이다. 너희들이 협조 좀 해줘라. 착한 친구들이라서 가능했지. 그리고 그 친구들은 이미 퍼리 팬덤에서는 유명 인사였어서, 잃을 게 없었거든. 취미 단계에선 끝장을 본 친구들이니까.”

 

─퍼소나(fursona)라는 단어를 소개하는 걸 깜빡했네요. 페르소나와 털을 뜻하는 영단어인 퍼(fur)의 합성어죠?

 

“맞아. 그쪽 마을에서는 굉장히 흔한 방식이지. 제 자신이 아닌 캐릭터를 만들고, 적당한 설정과 세계관을 부여하고,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거야 그 ‘하고 싶은 대로’라는 게 창작이 될 수도 있고, 퍼슈팅(fursuiting)처럼 일종의 생활 연극 같이 선보일 수도 있고. 나의 경우에는 글쓰기였어.

 

그래서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고 썼지. 그 녀석들이 이 세상을 감각하는 대로 받아 적는 거야. 소설가가 될 순 없었어. 나는 내 안에 있는 누군가가 느끼는 감정만을 언어화할 수 있었고, 그 세계까지는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인간의 감정이란 게 설명하면 이상해지잖아. 그래서 그냥 적은 거야. 그게 시가 되었고.”

 

─그래서 첫 번째 시집의 판매량은….

 

“초동 5천 부. 즉시 2쇄, 3쇄하며 계속 책을 찍었었네.”

 

─화려한 데뷔에 걸맞은 판매량이네요.

 

“온라인에서의 마케팅이 컸잖아, 너도 알면서 왜 그래. 동물 캐릭터가 시 쓰겠답시고, 그렇게 광고를 해대는데 궁금해서 안 클릭할 사람이 있었을까? 그래도 시 자체도 사람들한테 다가가서 다행이야.”

 

─그때 인터뷰 기억해요. 아직도 그 의견은 여전하시나요?

 

“‘우리 안에는 모두 괴물이 있고, 그걸 받아 적기만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좋아해줬다’는 그거?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지금 고백하자면 받아 적기만 한 건 아니고, 조금 과장한 면이 있어. 젊은 시인이니까, 과격해야 한다고 친구들이 계속 그랬거든.”

 

 

 


 

 

 

문단은 온라인에서 인기 있는 그가 자신들의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공모전에 계속해서 투고하였고, 기존에 퍼소나를 시인명으로 사용하던 김이현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문단에 내걸었다. 시와사회 신인문학상 25회에 그는 신작을 투고했고,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당선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의 평은 “야성의 목소리로 잊은 감각을 되살리는 젊은 시인”이었다. 나를 포함한 문학계의 지망생과 업계인들은 그의 배경을 겨냥한 평이라고 이야기했다. ‘야성’과 ‘퍼리’.

 

김이현을 본격적으로 사랑하게 된 시집이 바로 그가 등단한 뒤에 낸 시집 <가끔씩 죽기도 하고>(2026, 문학사)였다. 첫 시집을 들췄을 때에는 사실 독특한 컨셉으로 시선을 끄는 게 다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지만, 그다음 시집에서 나는 그의 세계를 읽었다. 날카롭고 패기로운 시어는 한층 정제되었고, “연못가에 떠다니는 시체”를 보아도 “내일 먹을 점심이나 생각”하는 특유의 감성은 여전했다. 인간 아닌 화자를 내세워 인간계의 온갖 것들을 바라보며 말하는 괴물. 그는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시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등단 이후의 시집에서도 꾸준히 수인 일러스트를 고집해왔다. 문학사는 엄격한 레이아웃과 디자인으로 유명한데, 표지에 실린 캐리커처로 출판사와 시인 간의 크고 작은 조정이 있었다고 발매 전부터 화제였다. 결국 이긴 건 시인이었고, 표지에 거친 동물 캐릭터의 두상 캐리커처를 담은 <가끔씩 죽기도 하고>는 그해에 팔린 시집 중에서 판매량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 이후로도 시집을 계속 내시고, 자전적 산문집 『읽고 쓰는 이상한 괴물』도 내셨어요. 그런데 등단하기 전에, 팬덤에서 글을 쓸 때는 무명이었죠.

 

“내가 그냥 서브컬처 시장에서 활동하는 작가였다면 상당히 달랐겠지. 소설을 썼을지도 모르고, 등단을 안 했을지도 몰라. 그 정도로 그 사람들은 글에 관심이 없었어. 얼마나 심했냐면, 팬덤 내부에서 그냥 춘화나 소비하면서 음담패설로 낄낄대며, 심지어는 얼마 만나지도 않은 상대방에게 섹스를 제안하는 불한당도 있을 정도였지. 그들이 남근의 노예처럼 보였어, 나한테는. 그래서 질려버렸어. 팬덤 내에서 글쓰기를 하는 게. 어차피 읽을 사람도 없는데 왜 쓰지? 나오기로 했지. 나만의 피부를 뒤집어쓰고. 내 소중한 영혼의 친구들을 데리고.”

 

─그렇게 출사표를 던지고 나와서 들어간 곳이 문단이었죠. 문단 내의 왈가왈부를 기억하시는지?

 

“지금은 친한 문인들도 많고 팬들도 있지만, 당시에 나를 대상으로 이렇다 저렇다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그걸 굳이… 다시 불러와서 기억하고 싶진 않아.”

 

그렇게 말하는 그는 일부러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이현의 퍼슈트는 표정 변화까지는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한 동작인 것 같았다. 나는 이번에는 시인의 뜻을 존중해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김이현 시인에게 지금까지 글쓰기란?

 

“그건 생존이었어.”

 

─생존. 시인님의 글쓰기가 생존이다.

 

“나는 에세이에서 자기해방의 글쓰기는 결국 퍼리 팬덤의 퍼슈팅, 캐릭터 창작에 기반한 오타쿠질과 닮아 있다고 말했어. 근데 그건 역도 성립하는 거거든. 가상의 존재에 탐닉하는 건 일종의 자기해방을 향한 욕구라고 말이야. 그리고 다시 한 번 돌아서. 그런 게 글쓰기와 닮아 있다면, 내 글쓰기가 왜 퍼리스러운 게 아닐까? 적절한 외관만 삽입한다면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

 

생존이라고 한다면 결국 살아남는 거잖아. 나는 오타쿠가 예술가가 되지 못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편이고, 예술가는 예술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는 특이한 부류의 족속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에게 퍼슈팅과 시 쓰기는 생존이야. 이걸 하지 않으면 죽어.”

 

 

 


 

 

 

─시인으로서 활동하면서 고된 점이 있었다면.

 

“성희롱. 그리고 숱한 오해와 질문들.”

 

그는 그렇게 말하는 데에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미리 준비해둔 멘트처럼 즉각적으로 나왔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시집이 나올 때부터 호형호제하던 사이였으니까.

 

그의 퍼슈트는 팬덤 시절에서부터 인기가 있었다. 그렇기에 팬덤의 고질적인 문제점에서 계속 노출되었다. 장난식으로 하는 성희롱과 포르노 창작자들의 일방적인 조롱. 팬아트랍시고 그의 퍼소나로 포르노를 그렸고, 그는 받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SNS의 태그 기능 때문에 억지로 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시인은 시 바깥과 시 안에서 양쪽으로 날카롭게 응대했고, 점차 그 ‘일부’와의 분쟁은 팬덤 전체와의 싸움이 될 정도로 오해로 얼룩져갔다.

 

─「후장주의자」, 「살랑살랑」 등. 팬덤을 노린 시가 잡지에 실릴 때마다 SNS에서 싸움이 촉발되었는데요.

 

“그게 싫었어. 나는 결국 내 영혼의 친구들이 강간당하는 걸 억지로 보게 된 셈이지. 정말 그래. 단어 선택이 부적절하다고? 그렇지만 그들은 인터넷에 있는 변태들 때문에 내 퍼소나들이 2차원 상에서 온갖 체위를 취하는 그림이 퍼져나갔어.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그 사람들의 들끓는 성욕 때문에 조롱당했지. 너도 알겠지만 난 욕망을 부정하는 시인은 아니야. 그리고 그건 퍼리에도 해당 돼.”

 

실제로 김이현은 인외와 인간 사이의 에로티시즘, 인외와 인외 사이의 에로티시즘을 자신의 시 세계로 내세운 시인이었다. 그의 시 속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인간 세계에 어울리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들이었고, 너머의 세계에 존재하는 기이한 풍경만이 그를 반긴다. 김이현의 대표작 중 하나인 「Aqua kiss」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를 모티브로 하여, 범고래 수인과 남자의 키스를 산문시 형식으로 담은 작품이다.

 

“퍼슈터들 사이에서 그런 걸 즐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 그렇지만 난 아니었어.”

 

─법적 대응을 해도 언젠가는 나오게 된다고 한탄하셨던 인터뷰가 기억나요.

 

“실제로 포르노의 개수는 줄어들었어.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지.”

 

─<바그너가 들려오는 여름> 사건이죠.

 

그는 세 번째 시집 <바그너가 들려오는 여름>에서 고전적인 에로티시즘과 탐미주의를 시에 녹여냈다.

 

“문단의 반응은 예상할 수 있었어. 철 지난 에로티시즘이다. 지금까지의 파격에 비해서는 고전적이다. 나쁘게 말해선 낡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바그너가 들려오는 여름>을 두고 팬덤에서 그러는 거야. 쟤는 자기 스스로가 하는 외설은 되는데 우리가 해주는 건 안 된다고. 그리고 그런 의견도 있었어. 그렇게 깔끔하게 굴거면 차라리 계속 그랬어야지, 왜 굳이 에로티시즘을 부어서 팬덤 이미지를 흐리냐는 이야기야.”

 

─이상한 논리네요.

 

“그렇지만 그 당시 과열된 팬덤은 그 이상한 의견을 공유했어. 그 때 많이 힘들었어. 친구들도 ‘네가 너무 퍼리로 성공하니까 선을 넘은 것 같다’ 같은 이야기를 했고, 가족부터 시작해서 문단 사람들까지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지. 당시에 병원 상담도 받았어. 내 변태성욕을 미학으로 두는 건 아닐까요, 라면서. 결국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팬덤에 있던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깨달은 것도 있어. 결국 그 욕망은 존재할 뿐이고 예술가는 그걸 받아 적을 수밖에 없다고. 그렇지만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그래서 난 그 시집을 미운 오리 새끼처럼 보게 돼. 내가 저런 욕망 같은 걸 예술이랍시고 전시하지 않았다면, 팬덤에게도 문단의 사람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결국 자식은 자식이라 절판시키지는 못했지만. 복잡해.”

 

그렇게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낮고, 진중했다. 진심으로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있으면서도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말로는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반성하는 패배자였다.

 

─그리고 마지막 시집을 출간하고…… 앞으로는 시 쓰기를 안 하신다고.

 

“어떻게든 내 자신 안에 있는 걸 끄집어내는 건 하게 되겠지. 요즘은 뜨개질이 재밌더라고. 그리고 읽는 걸 아예 그만두는 것도 아니니까. 결국 나는 시를 발표하면서 남들 앞에 서는 걸 그만두는 것일 뿐이지. 쓰는 걸 멈출 순 없어. 산문집에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가 아예 쓰는 걸 그만둬버리면 부끄러워서 견뎌질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쓸쓸했다. 마시지 못하는 작은 머그잔을 거대한, 털로 뒤덮인 손으로 쥐고 있었다. 마치 폐업을 앞둔 놀이공원의 마스코트처럼 보였다. 꿈의 세계에 홀로 남겨진 어른 같았다. 나는 그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그러하듯이.

 

 

 


 

 

 

형, 그래서 결국에는 왜 떠나기로 한 거에요? 나는 인터뷰 중 쉬는 시간에 그에게 물었다. 인터뷰에 안 실을게요. 정말 사람 대 사람으로 궁금해서 하는 말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문단의 누구랑 싸웠다, <바그너가 들려오는 여름>의 출판사 사람이 심하게 괴롭혔다, <가끔씩 죽기도 하고>의 편집자가 그 주동자였다, 퍼리 팬덤에서 린치를 당했다. 소문이 너무 많은데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요. 가해자는 보이지 않고 피해자만 있는 싸움 같아요. 근데 형은 그냥 입만 다물고 있잖아요.

 

눈 앞에 있는 수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고개만 숙인 채로 꼬리도 흔들지 않은 채로 컵에 담긴 커피만 응시할 뿐이다. 나는 조금 화가 났다. 그의 글을 더 보고 싶었다. 그의 시를 더 노래하고 싶었다. 그를 더 보고 싶었다. 문단에서, 팬덤에서 유일한 존재인 김이현을.

 

에로티시즘이 뭐 어때요. 앞으로 안 쓰면 되지. 문호들도 다 실수해요. 잘 나가는 작가도 말 실수 한 번 하면 묻히고요. 저는요, 형이 문단의 이상한 괴물로 남는다고 해도, 설령 문단에서 쫓겨난다고 해도 시는 계속 발표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러다 그가 말한다. 재훈아, 알면서 왜 그래. 왜 자꾸 모른 척하냐. 그냥 내가 다물고 그런 사실들을 시로 쓰니까 그게 좋아서 모른 척 해? 우리 사이에? 독기가 실린 말. 나는 가슴이 내려 앉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는 상처 입은 사람이야. 그래서 내가 그의 시를 좋아했어. 첫 번째 시집에서의 반항아도, 두 번째 시집에서의 현자도, 세 번째 시집에서의 욕망 가득한 청년들도, 마지막 시집에서의 영매사도, 모두 상처 입은 사람들이야. 나 대신 그가 상처를 언어로 쏟아내서 좋아했어.

 

그리고 좋아해서 모른 척했을지도 모르지.

 

시를 쓰기엔 너무 지쳤어. 이 이상 다른 애들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아. 나는 그의 말에 담긴 ‘다른 애들’이 그의 수인 친구들임을 알았다. 내면 속에 있는 그의 영혼을 용서하고 보듬고 싶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게 너무 슬펐다. 더 이상 밖으로 꺼낼 수 없게 된 고귀한 자아를 볼 수 없게 됨에, 그들이 상처 받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그러니까 모른 척할 거면 계속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라. 그건 외면하고 이건 계속 붙들고 싶어하면 내가 너무 힘들다.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나는 김이현과 함께 갈 곳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퍼슈트를 착용한 채라서,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이현을 알아보는 사람이 절반, 그냥 신기해서 보는 사람이 절반. 게릴라 사인회냐는 말에 허허 웃기만 했다. 가지 마세요 시인님. 작가님 글 보고 많은 위로 받았어요. 그렇게 칭얼거리는 팬도 있었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머리를 톡톡 두드리거나, 아니면 고개를 젓거나. 퍼슈팅이다. 그는 지금 시인 김이현이라기보다는, 첫 번째 시집의 페르소나처럼 보였다. 인간어를 말하지 않는, 그래서 자신의 언어를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정장 입은 괴물.

 

나는 그가 왜 시단을 떠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가 떠나기로 했을 때, 김이현에게 쏟아진 연락 중 하나는 내 것이었다. 그때 물은 적이 있었다. 왜 가냐고. 지금 시인으로서 절정기 중 하나고, 형님에게 쏟아진 비판들만큼 찬사도 많고, 당신을 증오하는 사람만큼 사랑하는 사람도 많다고. 그중 하나가 나라고. 그렇지만 그는 모든 답변을 똑같이 보냈으니 너에게도 이런 답변을 보낼 수밖에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동안 받은 상처는 한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내 영혼의 친구들이 많다고 해도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내 옆에는 괴물이 걷고 있었다. 그 괴물은 털에 뒤덮여있고, 멀쩡히 걸어 다니며, 인간과 의사소통 역시 할 수 있다. 그렇게 계속 대화를 시도하던 괴물은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에 의해 쓸쓸히 퇴장한다.

 

동화 같은 이야기다.

 

그렇지만 사람의 삶은 동화가 아니라서, 그의 뒷모습은 쓸쓸하다.

 

김이현은 자신의 마지막을 쇼처럼 벌이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보아서 기록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따라갔다. 그는 홍대와 합정 어느 사이의 중단된 공사장에서, 해가 진 뒤에 자신의 마지막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굳이 도심에서 그 행사를 고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도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도시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언젠가 증언한 적 있었다.

 

나는 그를 위해 마른 나뭇가지와 종이들을 모았다. 종이들은 특별히 그가 좋아하는 시인과 소설가들의 작품으로 골랐다. 엘리엇, 포크너, 베케트, 카뮈, 울프, 브론테, 셸리가 화염의 제단을 만들었다. 괴물은 이제 그곳에 투신해 신성하게 타오를 것이다. 탈 거면 고귀하게 타야지. 그게 이현의 입장이었다. 등장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나는 스마트폰을 켜 촬영을 준비했다.

 

형, 정말 이래야 될까요. 굳이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

 

이래야 해.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자신의 고양이 머리를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위로 들어 올렸다. 그대로 목과 머리가 분리되었다. 그의 ‘진짜’ 머리는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나는 왠지 모르게, 김이현이 정말 괴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땔감에 라이터를 붙이자 타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꽃이 춤추며 하늘로 향한다. 아무도 없는 도심의 공터에 불이 난다고 해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김이현은 퍼슈트의 헤드를 그 속에 던졌다. 화르륵. 털로 된 부분이 가장 먼저 탄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았고, 나는 그걸 촬영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비는 오지 않았고 날씨는 건조했다. 이현의 머리였던 것이 점점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눈과 뼈대 부분만 남아, 이제 그것은 머리라고 하기에도 뭣한 잡동사니가 되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불이 타오르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불을 바라보았다. 퍼슈트 헤드는 이제 온데 간데 없었다. 뒤이어 이현은 장갑까지 벗었다. 그의 손 역시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촬영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형.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현이 형.

 

고개를 그곳에만 집중하고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응, 하는 소리만 내었다. 나는 그를 불렀지만, 정작 그에게 무어라고 말할지 몰라 그저 불꽃만 바라보았다.

 

재훈아.

 

네.

 

난 성공했냐?

 

그는 목적어를 생략하고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게 시인의 화법인 것을 알고 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 불꽃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그가 남긴 시들을 생각했다. 인간 사이의 패배자로서,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으로서, 홀로 남겨진 괴물로서. 남겨온 말들을. 우리의 마음 속에 남은 그 단어들을.

 

성공하셨어요.

 

그럼 됐다.

 

그는 마지막으로, 후회는 안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이현의 뒷모습을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다. 껴안거나 위로해주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나에게는 그는 그저 시인이었기에.

 

 

 


 

 

 

김이현의 마지막 시집 『유령은 작별을 고한다』는 8월 21일 출간하는 그 즉시 초동 1만부가 팔렸고, 온갖 문학 잡지와 멀티미디어 잡지가 앞다투어 기사를 냈다. 모두가 그의 퇴장을 화려하게 장식해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인외천국>에 약속한 대로 더 이상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8월 23일 오후, 잠실 교보문고에서 그의 시집을 샀다. 시집의 표지는 가제본과 다르게 나와 있었다. 인간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그의 손에는 퍼슈트 헤드가 들려 있었다. 너무 직관적인 그림이라 오히려 그는 싫어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드 커버의 시집을 펼치면 시인의 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실 나는 늘 버스표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손을 잡아준 친구들을 보면 늘 찢어버렸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로 한다. 우리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더 멀쩡한 모습으로. 기왕이면 우리가 우리 되는 세계에서. 크게 웃고, 좋을 때 사랑하고.

여전히 인간이 되기에는 멀었다.

2028년 8월

시인 김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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