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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만다린 치킨

2022.08.25 23:5608.25

"계동길 만다린(주:감귤) 치킨"은 '명동 칼국수'나 '아웃백 스테이크'처럼 명칭과 무관하게 어디에나 있는 식당이 아니다. 계동길에만 있고 만다린 치킨을 파는, 이름에 솔직한 식당이다. 10m폭 넓은 도로에 접해 있지만 도로 폭보다 비좁은 8평짜리 작은 가게이다.

 

태희와 상재 둘이서 요리도 연구하고, 운영에 대한 의논도 하며 다른 직원 없이 가게를 운영해오고 있다. 둘이서 모든 일을 의논하여 처리하다보니 생각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요리에 대한 것은 상재가, 기타 가게 운영에 관한 것은 태희가 최종 결정권을 가지는 것으로 서로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큰 싸움으로 이어진 적은 없다.

 

이 집의 대표 메뉴는 물론 만다린 치킨. 갈색 설탕 절묘하게 그을려 만든 카라멜 베이스, 표면은 살짝 바삭하고 안은 촉촉 탱글한 식감, 코코넛 오일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향. 여기에 더해진 비장의 한수는, 솜이불처럼 가볍게 요리를 덮어 코를 간지르고, 한입 삼킨 뒤에도 상큼하게 입안에 남는 산뜻한 만다린 귤향이다. 시작은 알싸한 귤껍질 향으로 시작하여 입맛을 돋구고, 씹는 동안에는 새콤 달콤한 귤즙에 톡톡 터지는 과육이 잇몸과 혀를 즐겁게 해주며, 꿀꺽 삼키고 난 뒤에는 귤꽃의 보드라운 향이 목젖 근처를 감돈다. 손님들은 열이면 열, 이 세밀하고 현란한 감귤향의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이 감귤향이,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럭셔리 과일의 대명사 샤넬 귤의 것이라는 것을 알면 다시 한번 탄성을 지르기 마련이다. 어떤 손님들은 남아 있는 귤 향을 모두 폐에 담아가려는 듯, 빈 접시에 고개를 숙이고 다시 큰 숨을 들이쉬기도 한다.

 

이 곳 만다린 치킨의 또다른 특징이라면 특징은, 닭고기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손님은 다양한 종류의 닭고기 대체품을 선택할 수 있다. 글루텐 닭고기, 콩 단백 닭고기, 글루텐 프리 과일류 닭고기, 버섯 닭고기, 배양육 닭고기 5 가지 종류의 대체품 중 선택할 수 있다. 상재와 태희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닭고기는 버섯 닭고기인데, 버섯 값이 오르면서 가격 압박이 심해서 요즘은 새로 오는 손님들에게는 잘 추천하지 못한다. 살아있는 닭을 죽여서 만든 '진짜 닭고기'는 선택지 중에는 없다. 2052년이 된 지금, 서브웨이에서도 고기 없는 햄을 여덟 종류나 고를 수 있는데 이게 뭐가 특징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배양육 빼고는 태희와 상재가 모두 직접 수제로 만든 것이라 여느 공장의 대체육과는 맛이 다르다고 평가하는 단골들이 많다.

 

이 곳 만다린 치킨이 전국, 아니면 적어도 계동 최고라고 생각하는 매니아 손님들이 은근히 있다. 이런 손님들 덕분에 가게는 그럭 저럭 유지되고 있고, 문 열기 바쁘게 다시 문을 닫는 경쟁이 치열한 계동에서 장사한지 어느새 5년째가 되어 동네 터줏대감 대접도 받고 있다. 하지만 태희와 상재는, 자신들의 솜씨라면 좀 더 유명해져야 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실력과 맛에 비해 운이 잘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월요일 점심 시간이 막 지나서 배달 주문 알람이 더 이상 울리지 않고, 홀에도 손님 한 명만 남아있다. 여느 때와 같이 태희는 홀 정리를 한 뒤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가고, 나는 주방에서 저녁 장사를 준비하고 있다. 주방은 오픈키친 스타일이라 주방에 서서도 홀이 잘 보인다.

 

“사장님, 저기 골목 입구 디저트집, 이번에 메타타운에 올라갔더라구요. 보셨어요? 거기도 이제 아주 대박이네요. 요즘엔 메타월드에 올라가느냐 아니냐로 한방에 갈리는거 같아요. 일단 새로 올라갔다 하면 사람들이 엄청 몰리니까요. ”

계동거리에 있는 한 중소기업 영업부장인 최 부장은 외근이 많은지 종종 혼자 늦은 점심을 하러 온다. 가게 초기부터 단골로 찾아주는 최 부장과은 점심을 하면서 심심한지 말을 붙인다.

 

알죠. 거기 별로 맛있는지도 모르겠고 손님도 그렇게까지 많진 않았거든요? 근데 지금은 손님들 줄이 한 100미터는 서는거 같아요. 배달 안드로이드도 엄청 오고. 아주 인기 맛집이 됐어요.” 생각보다 퉁명스럽게 답이 나갔다. 평소에 그 가게는 인테리어만 번듯하고 음식도 모양 뿐이라고, 이렇게 장사하면 곧 문을 닫을 것이라고 못마땅해 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조금 샘도 나기 때문이기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최 부장이 슬쩍 눈치를 보고 서둘러 덧붙인다. “아니 뭐 그래도 그 담에도 잘해야죠. 가본 손님들이 평점 나쁘게 올리면 아주 그냥 문 닫는거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여기야말로 메타월드만 올라가면 단박에 대박일텐데. 아니 대박 정도가 아니라 분점도 여러 개 내고, 아니 아예 프랜차이즈도 만들 수 있을텐데. 우리 계동 만다린 치킨 맛이면 충분히 가능하죠.”

 

어휴, 그게 보통일인가요. 보니까 우리보다 크고 유명한 가게들만 있던데요. 다 그럴 만한 가게들이 올라가는거겠죠” 처음 대답이 너무 퉁명스러웠나 싶어,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한다.

 

에이 사장님. 그건 아니죠. 겸손도 지나치면 정신 건강에 나빠요. 여기 계동길 만다린 치킨은 맛으로 치면 메타월드 가게들 중에서도 최소한 상위 십퍼센트에요! 수제 대체육에 귤의 갖가지 향을 연금술사처럼 복합적으로 조각하여 입힌 만다린 치킨이 대한민국에 또 있나요? 최고 중의 최고 귤 샤넬 귤로만 만든 만다린 치킨. 다들 원가 깎으려고 혈안인데, 최고의 맛을 지키기 위해 최고급 원재료를 쓰는 꼿꼿한 장인의 기상! 이런데 없죠. 메타월드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건지 참. 무슨 알고리즘이 있다고 하던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보기엔 왜 올라간건지 잘 이해가 안되는 집들도 수두룩하게 있더라구요.”

평소에도 맛집 매니아, 아니 미식가를 자칭하는 사람답게 이야기가 조금 장황하다. 하지만 나도 메타월드 알고리즘에는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이야기에 흥미가 생긴다.

최부장님 말씀대로, 맛있고, 유명하고 손님 많으면 메타월드에 올라간다고 다들 알고 있죠.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대요. 저도 좀 공부해봤어요. 메타버스로 올라가는 알고리즘이 워낙 비밀인데다가 계속 바뀌고 해서 알기가 어려워요.” 계속 이야기를 할까 말까 순간 멈칫하다가, 일반 직장인 손님인데 뭐 어떠랴 하는 생각에 계속 말을 꺼낸다.

그런데 이쪽 업자들 얘기로는, 손님수나 주문 트래픽 수 같은 단순 숫자 말고도 부수적인 알고리즘들이 많대요. 크기는 조금 작아도 참신한 가게들을 메타월드에 포함시키기 위한 방법이죠. 이건 알고리즘이 훨씬 더 복잡해서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 없더라구요. 그나마 제일 확실한건 그 가게가 있는 동네의 인플루언서가, 동네 맛집으로 추천해주는 거래요. 어느 정도 등급 되는 인플루언서들은 추천할 수 있는 자기 티오가 있대요.”

 

메타월드는 메타 기업에서 운영하는 가상적인 세상이다. 페이스북이라고 했었던가, 자기 사진과 글을 올려놓고 서로 좋아요를 누르는 방식으로 교류하는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기업인 메타 기업. 지금은 실제 존재하는 세계 곳곳의 지역과, 존재하지 않은 상상의 세계를 메타버스 공간에서 구현한 ‘메타월드’를 운영하고 있다.

 

메타월드에는 한국 서울의 여기 인사동/북촌 지역도 포함되어 있고 서울에서 제일인기가 많은 지역 중에 한 곳이다. 언뜻 보면 실제 동네와 아주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 세계와는 많이 다르다. 그 자체로 재미없는 현실 세계를 그대로 똑같이 만들어서는 무슨 재미란 말인가. 조금, 아니 상당히 미화된 이 지역 메타월드에는 우선 우리 같은 가게는 없다. 우리 가게처럼 그럭 저럭 운영하는 곳은 이 메타월드에 올려시켜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동네 메타버스 주민들도 여기 현실세계의 주민들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낮에는 항상 우리 가게 뒤쪽 주택 골목가에 서서 누군가 지나가면 한마디씩 던지는 할머니는 메타버스에 없다. 이 동네가 자신의 이미지와 잘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월 비용을 내고 자신의 아바타를 입주시켜 살 고 있다. 아바타를 위한 월세라고나 할까. 여기 인사동/북촌 지역은 메타월드에서 꽤 인기가 많은 곳이라 비용도 비싸고, 북촌의 한옥 이미지가 자신의 이미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연예인, 교수, 예술가들의 아바타가 많이 입주해있다. 뒷골목 할머니는 아바타가 없던지, 아바타가 있더라도 월세를 많이 내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 아무튼 이 메타월드 이 동네에서는 본 적이 없다.

 

사장님, 그럼 이 동네 메타월드 주민에게 가게 추천을 부탁해보면 어떨까요?”

 

그럼 좀 좋겠어요.., 그런데 메타월드의 이 동네 지역 주민은 다 연예인, 잘 나가는 사업가 그런 사람들이에요. 저희가 현실 세상에서도 메타월드에서도 알고 지낼일 없는 분들. 그 사람들도 메타월드에도 없는 우리 가게 따위를 알리도 없구요.” 얘기하면서도 기분이 우울해진다.

 

잠시 가게는 다시 조용해지고, 나는 조금 언짢아진 기분으로 재료통에 저녁 장사를 위해 손질한 재료를 채워넣는다. 조금 전에 돌아와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태희도 조용히 컵을 마른 행주로 닦는다. 최 부장은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몇 개 남지 않은 치킨 조각을 집어먹는다.

 

저기”, 최 부장이 짧은 침묵을 깬다. “이 동네 메타월드에 얼마전에 이사왔다고 하는 김정민 작가 아시죠? 요즘 생태 SF 소설이 완전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거의 월드 스타자나요. 그 작가님을 제가 좀 아는데, 혹시 여기 한번 추천해줄 수 있는지 물어볼까요?”

 

관심이 확 쏠린다. 손을 마른 행주로 닦는 둥 마는 둥 하고 홀로 나간다. “정말요? 그게 가능해요? 김정민 작가요? 정말요? 그런 분이면 추천 한번만 해주셔도 메타월드 바로 올라가겠죠! 근데 그 분이 해주실까요? 어떻게 그분을 아세요? 와 대단하시다” 태희도 행주를 놀리던 손을 멈추고 놀란듯 처다본다.

 

그 분이 원래 직장 생활 오래하다가 늦게 작가 데뷔한 분이자나요. 예전 직장에서 좀 친하게 지냈어요. 맨날 점심 먹으러 같이 다니고. 입맛이 비슷해서, 같이 회사 주변 맛집 찾아다니고 했거든요. 요즘도 종종 연락하고 지내고, 여전히 맛집에는 관심이 많을 테니…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요! 정말요! 아, 그럼 진짜 감사하죠. 아, 정말 너무 감사해요!”

에이, 너무 그러지 마세요. 해 준다고 할지도 아직 모르는건데요.”

여쭤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희는 정말 감사하죠.”

 

“아이고, 괜히 번거로우시게 하는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항상 와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데….” 내가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하는지 태희가 끼어든다.

부담스러워 한다고 생각하고 최 부장 마음이 변하면 어떻하나 하는 생각에 태희에게 세모꼴 눈을 한번 던지면서 서둘러 태희 말을 자른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된다면 정말 은인으로 모실께요. 작가님 오시면 선생님 추천에 누가 되지 않게 진짜 잘할께요. 아, 물론 작가님 일정이 안되시면 할 수 없는거구요.”

 

최 부장은 김정민 작가에게 연락해보고 소식 듣는 대로 알려주겠다고 하고, 들어올 때보다는 키가 10센티는 더 커보이는 뒷모습으로 가게를 떠났다.

 

정신없이 저녁 장사를 마친 뒤 둘이 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 연락을 준다고 한 것도 아닌데 가게 문을 닫고 나갈 수가 없다. 가게 문을 닫고 나가면 모든 일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질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희망이다.

김정민 작가님이 언제 데뷔한 분이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한번 찾아볼까…음 이제 2년 조금 넘었네.” “와 우리 동네에 마스 미켈신 들어온거 알았어?” “그러게, 오 이현우 선수도 새로 들어왔어.” VR 안경을 쓰고 나란히 앉아, 우리 동네 메타월드를 산책하고 김정민 작가님의 기사를 여기 저기 찾아보기도 한다. 우리 가게도, 집도 없는 메타월드안의 이 동네를 ‘우리 동네’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맨날 걷는 거리와 아주 비슷한 이 곳을 달리 부를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메타월드의 우리 동네는, 맨날 걷는 우리 동네보다는 훨씬 좋아보인다. 비슷하긴한데, 더 세련되었고 뿐만 아니라 정감도 든다. 김희수 배우의 집임이 표시되어 있는 한옥 앞을 상재의 아바타와 나란히 지나가며, 우리 가게도 이제 여기 들어올 수 있나 싶어서 마음이 두근거리다가도, 김정민 작가님의 우리를 추천해 줄 가능성이 아직 영 프로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어! 강원도 샤넬 농장에서 제품이 못 나오고 있다는데?” 김정민 작가님 최신 뉴스 기사를 찾으며 이런 저런 눈에 띄는 기사들을 보던 중 샤넬 농장 소식에 눈이 번쩍 뜨인다.

 

강원도 애국주민단체가 강원도 지역 최대 농장인 샤넬 농장과 고속도로를 잇는 지방도로를 봉쇄하고 점거 시위에 들어갔습니다. 현재 샤넬 농장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는 모든 화물 운송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어제 오후 4시, 강원도 주민단체와 샤넬 농장을 소유하는 샤넬 그룹측은 제방 건설 비용 분담을 위한 협상에 돌입하였으나, 금일 오후 4시까지 24시간 동안 진행된 마라톤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이에 강원도 애국주민단체는 예고하였던 대로 샤넬 농장에 대한 전면 투쟁을 선언하며 국도를 봉쇄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최근 더욱 급격해진 동해안 지역의 해수면 상승에 따른 해안 저지대 지역 피해 최소화를 위하여, 강원도는 동해안 해안가 제방 증설 및 신설을 검토를 마치고, 예산 마련 및 일정 조율 중에 있습니다. 제방 건설에 소요되는 막대한 예산의 부담을 위하여 특별 주민세 인상을 예고한 바 있습니다. 이에 강원도 주민단체는 해안가 최대 부지를 소유하고 있는 샤넬 그룹에 대하여 특별 부담금 제공을 요구하였고, 샤넬 그룹은 부담금 지급을 거부하며 갈등이 고조되어오던 가운데 벌어진 상황입니다.

 

주민단체 연합은 샤넬 그룹이 특별 부담금을 약속할 때까지, 세금으로 지은 지방도로를 쓸 수 없을 것이라며 오늘 오후 6시를 기점으로 도로 점거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태희도 기사를 본 모양이다. “아이구. 농장에서 물건이 아예 못나오나보네. 어쩌지! 우리도 내일 새로 귤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다. 계동 도로보다 좁은 조그만 가게이지만 우리는 샤넬 농장의 귤을 쓴다. 이런 작은 가게가 그 비싼 샤넬 귤을 쓰다니 웬 허세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태희는 샤넬 귤을 쓰는 것이 그닥 탐탁치는 않지만, 나는 확실한 브랜딩이 우리 같은 가게를 지속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귤 향기가 샤넬 것이라고 하면 훨씬 더 좋아하는 손님들도 꽤 적지 않다. 

 

구할 수 없게 되면 할 수 없는거지… 그렇다고 장사 안할 수도 없고. 이미 서울에 풀려있는건 농장에서 받는 것보다 상태도 좋지 않을꺼고, 웃돈도 엄청 받을거 같은데 … 상재야, 그냥 우리 다시 싱싱하고 유기농인 브랜드 없는 귤 쓰면 안될까? 예전에도 그렇게 해서 잘 했고, 상황이 이렇다면 손님들도 이해하지 않을까.”

안돼. 그건 안돼. 우리의 일관된 브랜드라는게 있지.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손님들이 오히려 우리가 잠깐 어려운 상황이라고 초심을 잃었다고 할껄? 그리고 우리가 뭘 예전에 잘했었어. 샤넬 귤을 쓴다는 브랜드 이미지가 딱 입혀지니까 그나마 지금까지 버티는거 아냐.”

 

2030년대 중반 샤넬 그룹이 농산물 사업에 진출한 이후, 샤넬 과일은 과일 소비의 개념을 바꾸어버렸다. 샤넬 그룹은 엄격한 검증을 거쳐 자신들의 기준에 맞는 당도, 모양, 향기를 가진 과일만 출시하기 때문에, 다른 과일들과 과일대 과일로 비교해도 훌륭한 편이다. 게다가 유기농 인증, 열대우림 보전 인증, 탄소 네가티브 인증, 공정무역 인증, 자유노동 인증 등을 내세워 지구와 제3세계를 살리는 선두 장군 같은 브랜드 이미지도 갖추고 있다. 여기에 명품 브랜드다운 세련된 포장까지. 이 모든 것들이 더해져서, 샤넬 그룹의 과일은, 간식거리가 소비가 아니라, 선하고, 아름답고, 향기롭고 그리고 럭셔리함을 소비하는 행위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는 최근에 샤넬 귤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세련되고 선한 고급 브랜드 귤을 사용한 동네의 소박한 가게라는 이미지는, 우리 가게를 더욱 발전시킬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소박하고 작고 이쁜 동네 가게는 많다. 하지만 잠깐 관심의 대상이 될 뿐, 곧 새로 생긴 소박하고 작고 이쁜 가게로 관심이 옮겨간다. 그런데 럭셔리한 브랜드와 작고 소박함이 결합되는 순간, 손님들은 우리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것도 있지만, 나는 우리 초심은 맛과 진정성이라고 생각해. 샤넬을 쓴다는 것도 우리가 진심이라는 표시일 뿐이고. 근데 샤넬이라는 브랜드 자체에 무리해서 집착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우리 이 기회에 샤넬 귤은 아예 그만 쓰고, 다른 방향으로 가자.”

태희는 아무래도 샤넬 귤을 쓰는 것이 탐탁치 않은 것 같다. 샤넬 귤을 쓰기로 결정할 때부터 태희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이 정직하다. 하지만 주방에 관련된 사항은 내가 최종적으로 결정권이 있으니 할 수 없이 따랐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다시 샤넬 귤 사용 문제를 건드리려는 것 같다.

 

달콤한 희망을 음미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두 동업자의 싸움이 화르륵 시작되려는 순간.

띵동!’

메타월드에서 누군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최 부장의 메시지다. 역시 영업으로 잔뼈 굵은 사람 답게 팔로우업이 빠르다. VR 안경을 다시 쓰고 메시지를 실행하니 최 부장과 비슷하지만 훨씬 어려보이는 아바타가 화면 정면 가득히 함박 웃음을 띄며 떠올라 메시지를 전달한다.

 

김정민 작가가 괜찮을 것 같대요. 흥미 있고, 한번 와보고 싶다네요. 마침 이번주 금요일 그 동네 볼일이 있어서 조금 늦은 점심쯤 가볼 수 있을 것 같대요. 아직 월요일이니 준비에는 충분하시겠죠? 혹시 문제 있으면 알려주세요. 근데 이 분 스케줄이 잘 안나서… 일정을 조정해달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번은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암튼 정말 잘되었어요!” 아바타가 엄지손가락을 척 든 뒤 사라진다.

 

VR 안경을 벗고 태희를 바라본다. 태희도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기쁘면서도, 당황스러우면서도, 다시 기쁘다. “우와!!!!” 벌떡 일어나 팔을 치켜들며 고함을 지르고 만다.

 

목요일. 엄지 척 메시지를 받은지 삼 일째 되는 날. 샤넬 농장에 대한 농성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샤넬 농장 앞으로 모이는 시위자 명수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시위대들이 샤넬 농장에 화물 운송 유닛이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있는 상황이라 귤을 받을 길이 요원하다.

 

틈틈이 기사를 확인하며 언제쯤 농성이 풀릴지 나름대로 열심히 추측도 하고, 샤넬 귤을 구할 방법이 없을지 궁리도 하지만 사실 마땅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샤넬이 일반 유통업체에는 아주 소량만 공급하면서 대부분은 직송 방식으로 거래해왔고, 우리도 더 신선할 것이라는 생각에 직송 물건을 받아왔기 때문에, 농장에서 물건이 막혀버리면 그 뿐이다. 일부 유통업체는 물량이 있다는 소문도 있어서 연락해봤지만 모두 거절이다. 아마도 남은 물건이 있어도 원래 거래하던 중요 업체들에게만 보내주는 것 같다.

 

니가 오늘 장사 혼자 하고, 나는 강원도 농장에 가볼까? 조금만 사서 들고 나오면 되지 않을까?” 가게 오픈 준비를 하며 태희에게 의논을 해본다.  

시위대들이 농장 앞을 꽉 막아버렸다는데 그걸 어떻게 뚫고 가져오겠어. 얼마전에 무슨 업체에서 자기네 차 끌고 농장에서 물건 받아 나오려다가 차가 하도 두드려맞아서 못쓰게 됐다고 하자나. 그러다 어디라도 다쳐서 내일 아예 요리를 못하게 되면 어떻게해.”

무리겠지… 오늘 중으로 어떻게 해결되진 않겠지… 태희야 우린 정말 운이 없나보다. 어떻게 이렇게 귀한 찬스가 왔는데 딱 이런일이 생길 수 있는거지.”

지금까지 계속 뉴스를 보고 있지만, 답답한 마음에 그래도 새로운 뉴스가 있는지 다시 검색해본다.

 

 

“… 전국 각 해안지역 제방 건설 계획이 속속들이 추친됨에 따라, 지방 자치단체 부담금 비중이 증가된 것이 원인입니다. 지난 30년동안 제방 건설 사업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데요, 제방 건설 사업이 다 같은 것이 아니고 주체와 재원 마련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번째는 국토 관리 계획 일환의 제방 건설입니다. 중앙 정부 부처들이 협업하여 전국 국토 상황과 예상 침수에 따른 피해, 국가적 식량 생산에 미치는 차질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제방 건설 우선 구역을 지정하여 국토 관리 계획에 편입시키고 이에 따라 추진하는 건설입니다. 이는 주로 해발 고도가 거의 0에 가까운 서남지역 간척지 주변, 삼각주 지역에 몰려 있습니다. 이 곳들은 침해 피해가 조속히 그리고 심각하게 일어날 것으로 예상될 뿐만 아니라 쌀농사를 짓는 평야가 있는 곳이어서 침해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 국내 식량 상황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중앙 정부의 계획에 따라 건설되는 제방은 중앙 정부의 재정으로 진행됩니다.

 

다른 또다른 유형은 지방자치 단체에서 추진하는 건설입니다. 이번에 문제된 강원도 동해안 지역은 이 유형에 해당합니다. 사실 동해안 지역은 기후 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속도가 전국에서 가장 빠른 편입니다. 하지만 인근 도시의 해발고도가 낮지 않고, 주요 곡창지대가 있는 곳이 아니므로 우선 건설 지역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국토 관리 계획에도 편입되지 않았구요. 그러나 동해안에 상륙하는 태풍이 최근 현저히 강해져서 동해안 인근 지역의 침수 가능성이 더 높아졌고, 동해안 해안 인근 저지대에 대규모 농장, 랜드마크 건설 등 개발이 가속화됨에 따라 예상되는 피해에 대한 염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감이 커지게 되자 강원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제방건설 계획을 발표한 것입니다. 이렇게 지방자치단체가 제방 건설을 추진하는 경우, 중앙 정부는 예산의 일부를 부담할 뿐이고,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의 일정 부분을 부담해야 합니다 …”

 

여러 뉴스 채널이 ‘강원도 샤넬 속보 라인’이라는 서브 채널을 만들어 새로운 포스팅을 계속 내보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방금 들은 최신 포스팅도, 이미 여러 번 들어 익숙한 내용을 ‘전문가’가 몰랐지 하는 태도로 설명하고, 진행자는 처음 듣는 양 ‘그렇군요’ 하면서 다시 반복하는 내용이다.

 

다른 포스팅을 확인해본다.

강원도 주민단체연합 회장의 화상 인터뷰입니다. “샤넬 농장이 지금 해안가 지역에 처음으로 귤 농장을 시작한 2035년은 이미 1990년 기준으로 해수면이 50센티미터 가량 상승한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샤넬 농장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샤넬 농장은 해수면 상승에 필요한 조치를 전혀 하지 않은 채 해안을 따라 농장을 늘려갔습니다.

 

샤넬은 바다에 바로 접한 귤나무, 해안, 동해의 푸른 바다의 풍경을 충분히 우려먹었습니다. 그 농장 근처에 주택 단지와 각종 별장, 리조트를 개발하여 또 돈을 벌고 있습니다.

 

왜 강원도 주민들이 허리가 휘는 세금을 내서 샤넬 땅을 지켜주어야 합니까. 저희 강원도 주민들은 단호하게…”

다음 기사로 넘어간다.

 

“(전문가)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샤넬 그룹은 2035년 동해안에 과일 농장을 처음으로 열었습니다.

(사회자) 왜 동해안이었을까요?

(전문가) 동해안이 귤, 딸기 등 상품성 높은 과일들을 키우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기 때문이죠. 사실 귤, 딸기 모두 동해안의 토착 작물은 아니에요.

(사회자) 맞습니다. 불과 이 삼십년 전만 해도 귤은 한반도에서 제주도 또는 남부지역에서만 재배되었던 것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을겁니다.

(전문가) 흠흠, 그렇죠. 하지만 기후 온난화로 한반도 아열대화가 진행되었고, 이제 강원도 지역이 귤농사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 되었죠. 딸기의 경우…”

 

언제쯤 시위가 풀릴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VR 안경을 벗어버린다.

 

상재야,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네. 우리 내일은 그냥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보자. 내가 내일 새벽에 제일 좋은 유기농 귤로 찾아올께. 샤넬 브랜드가 빠질 뿐이지, 맛이 빠지진 않을꺼야.”

“…”

니가 월요일에 남은 귤 몇 개 얼려둔거 알고 있어. 샤넬 브랜드도 좋지만, 얼린 샤넬 귤보다는 내일 사오는 일반 생귤이 훨씬 맛있을꺼야. 그렇게 하자 응? 내일 조금 일찍 나와서 혼자 오픈 준비 해? 알았지?”

 

태희는 다음날 새벽 일찍 출발하여 강원도로 출발했다. 밤새 조사하여 찾은 작은 유기농 농장에 찾아가 무작정 농장주를 찾고 사정을 털어놓았다. 애원조로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은 주인은 고맙게도 흔쾌히 좋은 나무를 골라 멋지게 생긴 귤들만 모아 내주었다. 점심 장사 시간에 늦지 않도록 맹렬히 안국역 앞으로 돌아오니 딱 정오였다. 점심시간에는 늦었지만, 김정민 작가는 느지막히 온다 하였으니 괜찮을 것 같다.

계동길을 따라 헐레벌떡 올라와 가게 앞에 다 왔을때, 태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항상 놓여있는 작은 꼬마 감귤 나무 한 그루와 그 옆의 오래된 나무 벤치, 그리고 그 벤치 아래 샤넬 귤 박스가 두 개 놓여있는 것 아닌가.

급히 가게안으로 들어가 상재를 찾는다. 상재는 주방에 있다.

뭐야, 귤 온거야?”

아니 안왔어. 빈 상자야. 샤넬 농장 박스가 세련됬자나. 몇 개 보관하고 있던거야. 인테리어에 도움 되는거 같아서 가게 안팎에 디스플레이 좀 해봤어.” 상재는 다 만들어진 요리를 접시에 담으며 눈을 마주치지 않는 채 대답한다.

상재의 말을 듣고 가게 안을 둘러본다. 좁은 반평 계산대 입구에도 원래 있었던 것인 양 샤넬 귤 박스가 세 개 쌓여있고, 그 위에 잎이 아래로 축축 처진 고사리 화분이 놓여있다. 축 쳐진 파란 고사리 잎 사이로 샤넬 농장의 로고가 선명하다. 주방에서 홀로 나가는 입구옆에 귤 박스가 쌓여있는데, 누가 보면 마치 아침에 귤을 받아 정리를 하고 미처 박스를 치우지 못한 것처럼 놓여있다.

이게 다 뭐야?”

뭐긴, 박스가 워낙 고급스럽고 이쁘자나. 재활용 겸 활용할 수 있을까 해서 놔봤어. 니가 봐서 안어울리면 저녁에 치우고.”

태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주방은 나간다.

 

나도 알고 있다. 샤넬 귤을 썼다고 할 수 없으니, 샤넬 귤을 쓴 것으로 오해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얄팍하다 못해 불쌍하다는 것을.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은가. 오늘 같은 기회는 오지 않는다. 해볼 수 있는건 다 해보는거다. 1시 반이 지나니 주방으로 더 이상 오더가 들어오지 않는다. 설거지통에 쌓인 접시를 닦기 시작하지만, 신경은 온통 문에 가있다.

 

딸랑’

2시하고도 15분이 지났을 까, 문이 열린다. 반사적으로 홀 쪽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기사에서 너무 많이 봐서 이제 익숙해진 얼굴, 김정민 작가이다. 유명인이라고 볼 수 없는 소탈한 차림이라, 기사를 미리 공부한 게 아니었다면 못알아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어서오세요!” 태희는 마치 못 알아본 듯 인사한다. 아니 열렬히 환영하고 모셔서 기분을 좋게 해도 모자랄 판에 왜저러나 싶어 태희 얼굴을 보니, 너무 긴장한 탓에 웃는 것인지 찌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저 김정민이라고 합니다. 오늘 친구가 예약을 해주었는데요.” 다행히 김정민 작가는 아무런 불쾌한 기색 없이 먼저 자기 소개를 해주고, 태희는 얼른 수습할 기회를 가진다. 김정민 작가는 소탈하고 좋은 분인 것 같다.

안녕하세요? 네! 네! 말씀 들었습니다. 귀하신 분이 여기까지 걸음 해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영광이구요. 여기 어디든 편하신 자리에 앉으시죠.”

 

태희는 김정민 작가가 골라 앉은 테이블에 세팅한다. 한결 편해졌지만 아직은 여전히 조금 뻣뻣한 움직임이다. 다 똑 같은 모양의 물잔들 중 더 이쁜게 있다는 것인지 몇 개씩 들었다 놨다 하며 물잔을 고르고, 제빙기 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제일 투명하고 예쁜 얼음을 고르겠다는 듯 하나씩 골라 담는 모습은 조금 귀엽기도 하다.

 

친구가 여기 만다린 치킨 꼭 먹어보라고 해서요. 특히 귤 향이 환상적이라고 막 극찬을 하더라구요. 마침 오늘 근처에서 미팅이 있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어서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왔어요.”

아유 늦긴요. 전혀 아니에요. 만다린 치킨 아주 맛있게 준비해보겠습니다. 저희 닭고기 대체육을 선택하실 수 있는데요, 처음이시니 버섯 대체육을 추천해드리고 싶은데 어떠실까요?”

네 저는 추천해주신 대로 할께요. 감사합니다.”

 

주문이 주방에 전달된다. 중국식 프라이팬을 중강불에 얹고 기름을 두른다. 김정민 작가를 위하여 미리 완벽하게 자르고 살짝 구워둔 버섯 닭고기를 프라이팬에 붓는다. ‘촤-악-!’하며 기름이 끓러 오르는 가벼운 소리가 들린다. 소스를 팬에 붓고 조리 듯 익히기 시작한다.   

 

완벽한 캬라멜 색깔, 영롱 색색의 파프리카 조각, 그리고 쪽파가 송송 올려진 만다린 치킨을 따끈하게 데운 접시에 담는다. 하얀 쌀밥을 좀 더 작은 접시에 따로 담는다. 쌀알이 조금 뭉그러진 것 같아서 새로 접시를 꺼내 다시 담는다. 요리를 받아 테이블로 가져가는 태희의 얼굴도 살짝 상기되어 있다.

와 정말 맛있겠어요! 속도도 엄청 빠르시구요!”

빠르지만 정성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만들어요. 우선 고기를 드시면서 향과 식감을 즐기시구요, 어느 정도 드신 다음에 밥에 얹어서 또 같이 드시면 더욱 맛있습니다. 다 잡수시면, 홍차를 올리겠습니다. 가볍게 탄 얼그레이인데요, 저희 만다린 치킨의 잔향과 잘 어울려서 식사의 여운을 즐겁고 깔끔하게 마무리해줍니다. 그럼 천천히 좋은 시간 보내세요!”

 

태희는 꾸벅 인사하고 주방으로 물러온다. 우리는 주방에서 바쁘게 손을 놀리는 척 하며 김정민 작가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김정민 작가는 접시 위로 고개를 숙여 향을 맡고는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빙긋 하는 것 같다. 김작가는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한 점 집는다. 맛집 마니아답게 천천히 음미하며 맛을 보는 모습이다. 맛을 보고 나니 표정이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다. 입안의 고기를 천천히 씹으며 가게 인테리어도 둘러본다.

혹여나 눈이 마주치면 불편해할까봐 몸을 살짝 돌리다가 태희와 눈길이 마주친다. 

'좋아하는거 같지?' '응 그런거 같아' 눈빛으로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래도 오늘 성공인 듯 하다.

 

천천히 식사를 다 마치고 엷은 얼그레이 홍차까지 마신 김정민 작가는 주섬주섬 일어선다.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나와 태희가 동시에 주방에서 서둘러 나간다. 어쩌다 보니 내 팔꿈치가 태희가 문 뒤쪽으로 밀어둔 샤넬 박스를 쳐서 떨어뜨려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태희가 숨겨버린 샤넬 박스의 마지막 등장 기회를 주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토동’ 소리를 내며 떨어진 박스 위로 작가의 눈길이 살짝 스친다. 오케이. 확실히 보았다.  

 

친구가 말한 것 보다 훨씬 더 맛있었어요. 식감도 좋고, 향도 정말 좋더라구요. 이렇게 신선하고 복합적인 향을 더한 만다린 치킨은 정말 처음이에요. 다른데서 먹어본 만다린 치킨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맛이더라구요. 아마… 샤넬 귤로 하셨나봐요?” 작가의 눈길이 주방 앞에 뒤집어 떨어진 귤 박스로 다시 한번 가더니 빙 돌아서 고사리 잎 사이로 보이는 샤넬 농장 로고에 멈춘다.

 

아이고, 저희가 귤을 들여놓고 비운 박스들인데, 제가 미처 버리지 못하고 잠깐 쌓아둔 걸 제가 실수로 떨어뜨려 버렸네요. 상자가 든든해서 받침대로도 좀 쓰기도 하구요.” 절묘한 대답이다. 언제 생긴 박스인지는 얘기 안했지만, 어쨌든 거짓말은 한마디도 안하지 않았는가. 이 정도 정보면, 작가의 추론 능력을 바탕으로 샤넬 귤로 만들었다고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충분하리라.

 

그런데 태희가 입을 열고 뭔가 말을 덧붙이려 한다. 오늘 귤은 샤넬 것이 아니었어요. 이런 말이리라. 아무튼 태희는 뭐든 다 까야 속이 시원한가보다. 김작가가 보지 못하도록 태희 등을 꾹 찌른다. 태희는 나를 보더니 부라리는 내 눈빛을 읽었는지 입을 다문다.

 

몇 번의 옥신 각신이 있었지만, 김정민 작가의 우김을 이기지 못한 채 밥값을 받았다. 김 작가는 다시 인사하고 가게를 나갔다.

 

내가 사온 귤 쓴거 아냐? 냉동해둔거 쓴거야?” 태희는 접시를 치우며 물어본다.

오늘 사온 귤로 했어. 신선하고 과육도 단단하고, 향도 복합적이고 진하더라고. 잘 골랐더라.”

근데 아까 왜 내가 말하려고 하니까 못하게 했어?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았잖아.”

김작가가 오늘 맛있다고 흡족해 한 거 같았어. 근데 샤넬 귤로 했다고 생각하면 더 좋을거 아니야?”

아니… 작가의 질문은 오늘 그걸 썼냐고 물어본 거였던 거 같은데…? 그냥 아침에 농장에서 갓 따온 귤이라고 했어도 되지 않을까? 그게 더 정성스럽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태희야. 산지 아침 직송 같은 건 이제 흔하고 흔해. 내 생각에, 샤넬 귤을 쓰는, 원가를 짜게 잡지 않는 진정성 있는 가게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그게 더 감동적이겠지!”

김 작가가 우리 음식을 좋아한 것 같긴 한데, 속인 것 같아서 기분은 안좋네. 나는 작은 유기농 농장에서 아침에 갓 따온 귤로 만들었다는거 하나도 부끄럽지 않고 더 감동적일 것 같은데. 김 작가도 소탈한 스타일인 것 같고.”

아무튼, 맛있었다고 했으니 추천은 해주겠지. 샤넬 귤 언급까지 해주면 금상첨화고. 샤넬 문제 해결 되면 우리도 다시 샤넬 귤 쓰면 되니까 거짓말도 아니지 뭐. 암튼 오늘 너무 수고 많았어. 주말이니 일단 푹 쉬자.”

 

시험날을 마친 수험생처럼, 금요일이 지나자 두 사람은 각자의 현실 집에서 화장실, 냉장고 앞에 갈 때를 빼고는 침대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주말을 보냈다. 물론 깨어 있을 때에는 틈틈이 메타월드에 접속하여 김작가의 추천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김작가 그렇게 빨리 추천을 해줄 거라고는 기대는 없었고, 예상한대로 추천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

 

월요일 늦은 오후. 금요일에 남은 귤로 점심 장사를 한 뒤, 태희는 문득 간식이 먹고 싶다며 간식 거리를 찾아서 나가고, 나는 샤넬 귤을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VR 안경을 끼고 뉴스 채널에 접속한다. 

샤넬 그룹은 오늘 오전 9시 기자회견을 열어 30억원의 기금을 제방 건설에 쾌척하겠다는 발표를 하였습니다. 샤넬 코리아 대변인입니다.

 

저희 샤넬 농장은 환경을 아끼고 사랑하는 기업으로서, 해수면 상승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경기도민들의 의지에 공감하는 차원에서…’

 

한편 강원도 애국주민협회는 샤넬 그룹의 한국내 매출을 고려할 때, 이번 기금은 연 매출의 0.1%에도 미치지 않는 지극히 미약한 것으로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강원도 주민협회는 샤넬 그룹의 이번 입장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강원도 샤넬 농장의 철수 요구로 공세의 강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일주일간 진행되었던 시위를 무기한 연장할 것을 선언하며, 전 국민이 힘을 더하여 줄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한편 샤넬 그룹의 이번 발표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일반 국민 여론이 일고 있습니다. 다국적 기업 샤넬 그룹이 한국 국민을 얕보는 것이라며 여러 단체에서 샤넬 그룹의 발표에 대한 비판 성명을 내고 있고, 곳곳에서 샤넬 농수산물뿐만 아니라 샤넬 제품 전체에 대한 불매운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VR 안경을 벗고 생각을 한다. 상황이 심상치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샤넬 브랜드의 선한 영향력, 고상한 럭셔리 이미지를 믿어왔는데, 반환경 반한국적 몰염치 기업으로 몰린다면 여기에 연결되었을 때 계동 만다린 치킨에도 좋을 것이 없다. 따라서 일단 샤넬과의 관련성은 모두 끊고 보자는 결론이다.

이렇게 결론이 내려지자 얼른 일어나 고사리 화분 아래의 박스를 치우고, 가게 밖으로 나가 벤치 아래의 박스도 치운다. 주방 문 옆에 쌓아둔 박스도 끌어낸다. 그래도 혹시 나중에 또 쓸지 모르니 버리지는 않고 딱딱한 박스를 살살 해체하여 주방 뒤쪽 작은 창고에 차곡차곡 쌓는다.

 

박스를 치우고, SNS에 접속한다. 메타월드에도 다시 들어가본다. 소식이 빨리 돌고 누구나 바로바로 의견을 내는 메타월드에서는 벌써 샤넬 불매운동에 대한 의견과 주장들이 빙글 빙글 빠른 속도로 공유되고 있다. 샤넬 매장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고발 영상과 비판 영상도 빠르게 올라온다. 샤넬 불매 채널들이 새로운 채널 소식 리스트에 속속이 뜬다. SNS에 들어가서 샤넬 귤에 관한 포스팅은 모두 숨김 처리를 한다. 그래도 혹시 나중에 또 쓸지 모르니 삭제는 하지 않는다.  

 

띵’ ‘띵’ ‘띵’ 메타월드 친구들의 메시지가 갑자기 쏟아진다.

무슨 일이지?” 불길한 느낌이다. 명치 끝이 갑자기 갑갑해지면서 속이 쓰리기 시작한다. ‘띵’ ‘띵’ ‘띵’ 유명인이 된 양 메시지가 계속 들어온다. 속이 약간은 부글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메시지를 실행한다.

 

야, 괜찮아? 이게 무슨 일이냐? 곧 괜찮아 질꺼야. 조금만 버텨라…”

힘내라. 할 말이 없네. 나도 응원할께.”

괜찮아? 힘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뭘 할 수 있다고. 참 너무들하네. 힘내라.”

자영업자가 진짜 동네 북인가보다. 어휴… 얘기 하고 싶으면 연락해.”

 

걱정스러운 얼굴의 아바타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문득 마음에 스치는 것이 있다. 떨리는 손으로 김정민 작가의 최신 노트를 열어본다. 김정민 작가의 아바타가 나타나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한다.

 

샤넬의 마크는 무슨 의미일까요? 당신에게 무슨 의미입니까?  

 

저는 지난 금요일에 저는 계동 만다린 치킨이라는 식당에 가서 만다린 치킨을 먹었습니다. 귤 향이 참 좋다고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샤넬 귤을 쓰더군요. 10평짜리에, 가게 유리는 맑게 닦여있고 그 앞에는 꼬마 귤나무가 서있는 가게에서 샤넬 귤을 쓰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의외라는 생각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번 샤넬 사태를 지켜보면서 다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샤넬 농장이 지금 하려는 일은 일반 우리 서민들과 기업인들을 엎어뜨리고 무릎 꿇려 제방으로 삼아 자신들의 땅을 지키려고 하는 행위가 아닌가. 과연 샤넬 브랜드의 실체라고 생각하였던 공생과 지구의 영속, 연대의 가치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실재하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우리의 욕망을 반사시켜 거짓으로 만들어낸 껍데기였을 뿐인가. 이번 사태를 통하여 이제 우리는 모두 그 답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껍질에 불과한 샤넬의 마크에 홀려 왔던 것일까요? 제가 만다린 치킨을 먹었던 그 작은 가게는 왜 굳이 샤넬 귤을 썼을까요? 가게 주인장은 자신의 요리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샤넬 귤을 쓴다는 이미지로 호가호위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즉 껍질뿐인 거짓된 이미지에 편승해서 그 이미지가 더욱 강화되도록 돕는 작고 사악하고 눈치빠른 조력자였던 것일까요? 아니면 가게 주인도 샤넬 귤로 만든 소스에는 특별한 맛이 있다고 스스로 속은 것일까요. 어느 쪽이라도 화가 나거나 또는 슬픈 일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소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그날 요리가 강원도에서 갓 따온 싱싱한 유기농 귤로 만든 요리였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합니다. 강원도 어느 해안가에 있으며, 제방을 쌓아 지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실히 세금을 내고 제방 작업을 기꺼이 돕는 그런 어떤 농장의 귤로 만든 요리였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마 여러분들께 강하게 추천했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감탄스러웠던 그 요리의 감귤 향기는, 샤넬의 위선과 허영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이제 제 기억속에서 악취로 남게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 소비자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믿고 있었던 것을 모두 의심하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맑게 살펴보는 유리알 같은 눈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그만 VR 안경을 벗어버린다.

 

깨끗이 닦은 유리창 밖으로 태희가 귤 빛 노을을 등에 받으며 간식 봉지를 들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인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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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훈 22.09.01 22:29 댓글

    시간상 긴 글을 적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이 글 충분히 재밌게 읽었습니다. 결말부가 특히 인상에 남았습니다. 김정민 작가가 참 얄밉네요. 이 밖에도 여러 주제에 대해 하나씩 다루었지만 다 적기에는 무리입니다. 배경에 대해서도 잠깐 짧게 느낌을 남기자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환상적인 일을 서술하고 있지만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에 쓴 웃음이 지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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