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글보다 그녀

2022.06.30 04:5006.30

1

 

 

 

생각해 보면 참 한심했었다. 상금도 없는 소설 공모전에 입선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응모자의 반이 입선이었던 공모전 수상에 고무된 나는 그날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었을 때 밤낮이 바뀌었고 집 평수가 다달이 줄어들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나자, 아내가 아이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가며 말했다.

“당신을 믿어. 기다리고 있을게.”

 

어느새 나는 쪽방에 홀로 누워 있다. 더는 글 한 줄 나오지 않는다. 내일은 직업소개소에 나가 볼 작정이다.

 

눈을 떴을 때는 점심때가 훨씬 지나 있었다. 해 뜰 때 잠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설탕물을 마시고 거리로 나섰다. 지나가는 사람이 들고 있는 커피를 보자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직업소개소 앞에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을 만나지 않은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내일은 반드시, 소개소에 당당히 입성하리라 각오를 다졌다.

 

방문을 여는데 명함 같은 게 떨어졌다.

‘작가 공작소. 작가로 만들어 드립니다.’

명함에는 전화번호도, 이메일도 없이 주소만 적혀 있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문 앞에서 보란 듯이 명함을 구겨 던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나는 동해로 향하는 고속버스 위에 올랐다. 명함이 구겨지기 전에 주소가 화인 찍히듯 뇌 속에 박혀 있었다. 화인도 지워질세라 밤새 주소를 되뇌며 날을 샜다.

 

이젠 속지 않을 만도 한데, 나는 또다시 지겹지도 않게 덫으로 향하고 있었다. 덫이라고 해봤자, 더는 털릴 것도 없었다. 어쩌면 나는 그 잘난 소개소 입성을 앞에 두고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너무 관대해 왔는데 인제 와서 야박할 건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 또한 누구보다도 내 귀에 못이 박힌 상태라 새삼스러울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지쳐 쓰러진 명분을 슬며시 일으켜 세웠다. 정말 마지막으로 바다나 보고 오자, 바다에 지난날의 나를 버리고 오자… 하며 어느새 버스 안에서 잠들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케렌 앤의 ‘Not Going Anywhere’의 노래가 들리는 듯했다.

 

도착한 곳은 망상 해변 부근의 민박집이었다. 주소를 잘못 외운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내 손엔 구겨진 명함이 있었으니. 민박집 사장님이 작가 지망생을 상대로 벌인 사기일까? 그러기엔 명함 판 값도 못 뽑을 텐데… 아무튼 나는 오기 전에 주소를 확인했어야 했지만, 인터넷은 끊긴 지 오래였고, 끊긴 게 전기인지도 모르겠다, 핸드폰은 뒀다 뭐하냐고 하는 말은 핸드폰이 있을 때나 가능했던 처지라, 다만 버스비가 아깝다는 생각만을 버린다면 이대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바다로 향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고 애써 자위하며 돌아서려는 중에, 드르륵 문이 열리며,

 

“작가가 되고 싶나?”

연세가 지긋하신 노인 한 분이 대뜸 나에게 물었다.

“어? 아, 예…”

나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노인은 소박한 민박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호화로운 차림새에 기골이 장대했다.

“가지.”

어디로 가자는 걸까… 노인이 차 키를 누르자, 민박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부터 눈에 띄던 고급 중형차에서 삑삑 소리가 들렸다. 통화 중이던 노인은 나에게 먼저 타라는 손짓을 보냈다. 나는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앉았다. 곧 통화를 끝낸 노인이 뒷좌석에 들어가 앉았다. 그러고는 나에게 키를 주며,

“저쪽에서 왼쪽으로 꺾이면 되네.”

“저… 죄송한데, 운전면허가 없는데요…”

“나도 없네. 밤눈도 어둡고.”

한낮이었다.

 

노인을 모시고 간 곳은 망상 해변 한옥 마을이었다. 하늘에 맞닿은 기와의 곡선에 잠시 마음이 흐뭇했다. 그 곡선이 만든 그림자를 따라 마당을 걷고, 마루를 밟고, 오랜만에 창호지가 발린 문을 열고, 그런 문들을 열고 또 열었다. 약간 어지럽다고 느꼈을 때, 마침내 노인이 멈추어 섰다. 그가 방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들어가지.”

바닥에 문이 있었다. 노인은 손으로 문을 가리킨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는군.’

나는 속으로 구시렁대며 문을 열었다.

 

폭이 좁은 계단이 아래로 끝도 없이 뻗어 있었다. 주저하는 나를 계단으로 밀어 넣으려는 듯, 노인이 우람한 몸으로 나의 등 뒤에 바싹 붙어섰다. 엉겁결에 한두 계단을 내려선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경악했다. 난간 없는 계단들이 구름다리처럼 사방에 얽혀 있었다.

“에셔의 ‘Relativity’를 방불케 하는군.”

등 뒤에서 노인이 감탄하며 말했다.

 

한참을 내려가고 있는데, 어둑한 공간이 점점 뿌예졌다. 안개 속을 걷는 듯했다. 눈앞이 막막해진 나는 뒤를 돌아보며,

“저, 저기요…”

노인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런 건 딱 질색인데…

 

누군가가 나를 밀었다. 나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노인과 소파에 마주 앉아 있었다. 화려한 꽃무늬의 벽지를 타고 흐르는 장현의 ‘빗속의 여인’이 귀에 추적추적했다. 설마 아니겠지 했지만, 계단을 내려간 건 노인과 나밖에 없었다. 너무도 태연한 노인의 모습에 혹시 저를 미셨느냐고 묻기가 망설여지던 중에,

 

“커피 한잔하겠나?”

“커피요? 아, 네네.”

노인이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에 커피 자판기가 있었다.

“저… 동전이 없는데요.”

“자네, 굴러떨어질 때 엄청나게 짤랑거리더군.”

노인이 나의 얼마 안 되는 동전을 알아챘다. 더는 머뭇거릴 수 없었다.

“…영감님께서 저를 미셨나요?”

“커피값이 있나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어. 사적인 감정은 없었네.”

희로애락에서 애만 남아 있던 나에게 오랜만의 분노가 일었다. 이 늙은이를 어떻게 하지? 일단 멱살부터 잡자, 하며 그에게 손을 뻗는데,

 

“자네, 작가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 수 있겠나?”

“아니요. 그럴 리가요.”

너무도 결연한 노인의 목소리에 나는 뻗은 손을 거두며 얼른 대답했다.

“면허에, 동전에, 용기도 없군. 자넨 없는 게 너무 많아.”

이번에야말로, 하며 노인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노인에 대한 아량도 없고.”

다시 손을 거두었다.

“멱살 한번 잡을 배짱도 없지.”

나도 모르게 번개같이 달려들어 노인의 멱살을 잡았다. 노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손목을 거머쥐었다. 노인의 손아귀가 족쇄처럼 느껴졌다.

 

“다시 한번 묻지. 작가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 수 있겠나?”

갓난아이가 목욕물에 잠기듯 천천히, 노인이 소파에 파묻히며 나에게 물었다. 노인에게 붙잡힌 나의 손목이 빨려 들어갔다.

“아뇨, 아뇨, 아니!”

소파에 얼굴이 묻힐 때까지 나는 소리쳤다.

 

 

 

2

 

 

 

음악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쇼팽의 야상곡, 녹턴 2번이었다. 나는 수술대 같은 곳에 누워 있었다. 주위는 재질을 알 수 없는 하얀 벽으로 둘려 있었다.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내 인생이 쪽방에 빠진 뒤로 곧잘 이런 꿈을 꾸곤 했다. 아마 나는 지금 쪽방에 웅크려 자고 있던지, 고속버스 안에서 졸고 있던지, 바닷가에 뻗어 있겠지…

 

“깨어났군.”

거울 너머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울에 비치던 내 모습이 사라지며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아까와는 달리 하얀 가운을 입고 서 있었다.

“짧게 설명하겠네. 자네는 지금 작가 공작소 1번 방, ‘백 년의 습작’에 있네. 현실의 하루가 이 방에서는 백 년이지. 작가는 곧 필력. 필력은 다작에서 나오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테니. 그럼, 문운을 비네.”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노인의 모습을 비추던 창이 다시 거울로 변했다. 어느새 수술실 같던 방도 책장이 가득한 서재로 변해 있었다. 글쓰기에(만) 알맞은 공간이었다. 글만 쓰면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되었다. 서두를 건 없었다. 책장에서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제목도 글쓴이도 없는 책을 펼쳐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백지만 빼곡했다. 내 글로 책장을 채우라는 말이군. 좋아, 그렇게 해주지. 투지가 불타올랐다.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글만 쓰나 싶었다. 1번 방의 목적이 작가의 꿈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라면 확실히 성공이었다. 깔아준 돗자리가 멍석말이가 될 줄은 몰랐다. 도무지 시간이 줄지 않았다. 거꾸로 매달려 있어도 시간은 줄지 않았다. 차라리 인형 눈 붙이기를 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책상 위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어느새 나는 지미 헨드릭스의 ‘Purple Haze’를 들으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떨어진 곳은 다행히도 푹신했다. 고개를 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형의 바다였다. 곰 인형, 고양이 인형, 원숭이 인형… 모두 눈이 없었다. 약간 으스스했다.

 

인형 눈을 붙인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역시 시간이 줄지 않았다. 또다시 지겨워진 나는, 어떤 날은 얼마나 빨리 붙이는지, 어떤 날은 얼마나 웃기게 붙이는지, 어떤 날은 얼마나 이색적으로 붙이는지… 이렇게 저렇게 지루함과 씨름하다가 결국, 아 못 해 먹겠네 하며 눈 없는 인형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밖이 시끄러웠다. 잠깐 졸았던 듯한 나는 눈 없는 인형 무더기 속에서 조심스럽게 밖의 동정을 살폈다.

 

“이놈 어딨어?”

곰 인형이 다른 인형들을 밀치고 다니며 말했다. 그의 한쪽 눈은 빠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덜렁거렸다. 곰 인형에 부딪혀 넘어진 고양이 인형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안 보이면 좀 가만히 있어요! 그러다 남은 눈까지 떨어지겠어!”

내가 나름 예술적 영감에 사로잡혀 여덟 개의 눈을 붙여준 고양이였다. 스파이더 캣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걸 고려하면 아홉 개.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내 꼴을 보라고! 나, 이래 봬도 고급 극세사 원단에, 무독성이라고!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나는 나의 포근한 털에 폭 빠진 소녀의 풋풋한 가슴에 안겨 꿈나라로 갔어야 하는데, 이놈의 눈 때문에…”

곰 인형의 토로에 고양이 인형이 말했다.

“지금 여기 있는 인형 중에 그놈에게 안 당한 인형 있어? 나를 봐요, 내 눈을 보라고! 고양이 동체시력이라고 들어봤죠? 눈 여덟 개가 달린 뒤로, 그야말로 지옥이라고요. 파리라도 한 마리 주위에서 얼쩡거리면 빙글거리는 여덟 개의 눈 때문에 머리가 빠개질 지경…”

스파이더 캣의 얘기가 미처 끝나지 않았는데 여기저기서 ‘풉’ 하는 소리가 들리며 인형들이 갈라서기 시작했다. 말이 끊긴 것에 화가 난 스파이더 캣이 갈라선 길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풉’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금발의 팔등신, 바비 인형이 걸어오고 있었다. ಠ_ಠ의 눈으로. 바비 인형이 금발을 우아하게 흔들며 말했다.

“그놈 눈은 내가 뽑겠어.”

그녀의 말에 모두가 노성을 내질렀다. 밖은 위험했다. 나는 점점 더 눈 없는 인형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챙, 챙, 챙.”

심벌즈 소리였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심벌즈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때,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외눈박이 원숭이 인형이 나와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원숭이가 외눈을 깜짝이며 심벌즈를 치려고 했다. 나는 재빨리 그 사이로 손을 넣으며 말했다.

“오, 오랜만이야 애꾸눈 잭. 잠시 그 손 내려놓고 우리 얘기 좀 할까?”

“내게 손이 있었나?”

원숭이, 애꾸눈 잭이 자신의 심벌즈를 보며 말했다.

“심벌즈가 손인 인형은 흔치 않아. 넌 말이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원숭이라고. 아주 특별하지.”

“눈이 하나밖에 없는 원숭이라는 뜻이야?”

그가 되묻는 말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애꾸눈 잭이 다시 심벌즈를 치려 했다.

“자, 잠깐, 기다려봐. 여기, 눈이 있어. 너를 이제껏 찾아다녔지. 지금 달아줄게.”

나는 얼른 바닥에 떨어져 있는 눈 하나를 집어 들고 빛의 속도로 그의 얼굴에 붙였다. 애꾸눈 잭이 심벌즈로 자기 얼굴을 비춰 보며 말했다.

“눈이 한쪽으로 치우쳐 보이지 않아? 아니면 코가 삐뚤어진 건가?”

나는 애꾸눈 잭의 처음 눈을 얼굴 중앙에 붙인 걸 뒤늦게 후회했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잽싸게 그의 코를 빼내어 두 눈의 한가운데 아래쯤에 붙여주었다. 붙이고 보니 뺨 위에 코였다. 애꾸눈 잭이 입술을 푸르르 떨며 말했다.

“이번엔 입이 삐뚤어져 있네…”

입은 비뚤어졌어도 바른 말이었다. 입을 뽑을 수는 없었다. 눈과 코를 모두 떼었다가 다시 붙여야 하나, 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챙, 챙, 챙, 챙.”

 

눈 없는 인형들이 사방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어느새 내가 아무렇게나 눈을 붙인 인형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곰 인형이 인형들 사이를 헤집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곰 인형의 흥분한 손이 덜렁거리는 눈을 제자리에 대고 보려고 너무 힘을 준 나머지, 그의 눈이 뚝 하고 떨어져 나갔다.

“억, 내 눈, 내 눈!”

곰 인형의 눈은 인형의 물결에 휩쓸려 자취를 감췄다.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공황 상태에 빠진 곰 인형을 보다 못한 스파이더 캣이 자기 눈 두 개를 떼어 그의 눈 없는 자리에 붙여주었다. 성난 고양이 눈을 한 곰 인형이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가 나를 향해 극세사 원단의 무독성 발을 번쩍 쳐들었다. 노인이 말한 목숨을 걸라는 게 이런 터무니없는 거였나, 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멈춰!”

당찬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살짝 한쪽 눈을 떴다. 긴 바늘 옆에 차고 자연산 곱슬머리를 흩날리며 내 앞을 가로막아선 여인. 아름다웠다. 신비로웠다. 나는 여기서 새삼 깨달았다. 내가 금사빠였다는 사실을. 윤종신의 ‘환생’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수많은 인형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그런 그들을 하나하나 사랑스럽게 끌어안았다. 쓰다듬어 주었다. 볼을 비벼댔다. 그리고는 바늘을 들어 눈을 뜯어냈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러웠다.

 

 

 

3

 

 

 

누군가가 나의 뒤통수를 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작업반장이었다.

“야, 정신 안 차려?”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주위를 살폈다. 길게 늘어선 작업대 위에 양열로 앉은 사람들이 이 박사의 ‘몽키 매직’에 맞추어 인형을 만들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하며 정처 없이 떠돌던 나의 시선이 급격히 한곳으로 쏠렸다. 그녀가 여전히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어두운 밤 지나서 동트는 해처럼, 자체 발광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빛 중의 빛. 나는 이대로 백 년이라면 얼마든지요 했다. 이런 나의 감동을 깨며 작업반장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인마, 너 때문에 저 언니가 오늘 뽑은 눈이 몇 갠 줄 알아?”

“괜찮아요, 반장님. 첫날인데요 뭐.”

그녀의 목소리에서 꽃내음이 났다.

“아무리 처음이라도 그렇지, 이렇게나 불량을 내기도 힘들다고!”

반장이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곰 인형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나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꺅!”

그녀의 비명에 놀란 주위 사람들 역시 나를 보고 기겁했다. 뒤에 있던 작업반장이 나를 돌려세우고는 헉하며 물러섰다. 그제야 나는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자기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왼손에 토끼 인형의 얼굴이 박음질 돼 있었다. 인형의 목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본 나는 곧 기절했다.

 

“휴, 다행히 깨어났네요.”

그녀가 수척해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여, 여기가 어디죠?”

“병원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나에게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병원은 안 된다고, 죽어도 좋으니 돈 들지 않는 곳에 데려다 달라고 한 말, 기억 안 나요?”

기억이 없었다. 나는 그저 그녀가 하는 말을 멀뚱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쪽, 작업실에서 쓰러져 머리를 땅에 부딪혔어요. 정신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병원은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해서… 흠, 하는 수 없이 일단 여기로 데려왔어요.”

그녀가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내 멍청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심각하게 물었다.

“혹시… 본인이 누군지는 기억하죠?”

아, 그녀의 크고 까만 눈동자에 어린, 나를 걱정하는 그 선량함이란!

‘제가 누군지는 당신을 본 순간 다 잊어버렸습니다.’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를 끼쳤네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침대에서 일어나 걷다가 짐짓 어지러운 척, 손을 뻗어 세차게 벽을 짚었다.

“으악!”

붕대를 감은 손이 욱신거렸다. 붕대가 다시 피로 물들었다. 방정맞게 뛰는 내 모습을 본 그녀가 ‘풉’ 하고 웃으며,

“그쪽, 정말 안심할 수 없네요.”

 

그녀는 전망 좋은 곳에 살고 있었다. 햇살 가득한 마당도 있었다. 승강기가 없어 5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점은 좀 아쉬웠지만.

‘어떻게 나를 옥상까지 끌고 올라왔을까…’

그러고 보니 그녀의 숨결이 내 뺨을 간지럽혔던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메여 얼굴과 얼굴이 닿을락 말락 했다고 생각하니 작은 옥탑방이 내 심장 소리에 터질 것만 같았다. 확인하고 싶었다.

“저… 메고 오시느라 엄청 힘드셨겠어요. 정말 염치없습니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무슨 말을 할지 망설였다. 역시! 우리 벌써 썸인가!

 

“죄송해요. 아무리 뺨을 때려도 안 일어나길래 질질 끌고 올라올 수밖에 없었어요. 근데… 옷깃을 잡고 끌다가 그만 옷깃이 찢어져서… 그쪽 몇 바퀴 굴렀어요… 그다음엔, 아무리 해도 아래쪽으로 떨어진 그쪽 머리를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어요. 계단이 좁고 가파르거든요. 하는 수 없이 발을 잡고 끌고 올라왔는데…”

갑자기 기억이 돌아왔다. 내 뒤통수가 계단의 모서리마다 쓸고 지나갔었다. 나는 불쑥 뒤통수에 손을 뻗었다. 듬성듬성 맨살이 느껴졌다.

 

그녀가 다시 붕대를 갈아주는 동안, 그녀의 내리 깐 속눈썹이 몇 개인지, 얼마나 긴지, 몇 번을 깜빡였는지 보고 또 보았다. 영원히 기억하리라.

 

이젠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트레이시 채프먼의 ‘Baby Can I Hold You’가 따라 흘렀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진심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저, 백 년만 기다려 주실래요?”

그녀가 이제는 정말로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안 되겠어요. 병원에 가요, 우리.”

 

 

 

4

 

 

 

마지막으로 쓴 책, ‘바늘 공주’를 책장에 꽂았다. 서재는 내가 쓴 책으로 가득했다. 백 년이 지났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허옇게 센 수염에 백발이 성성한, 애석하게도 주변머리에만 성성한 노인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써 내려갔던 글만큼이나 자글자글했다. 주름은 이가 없는 입에서 정점을 이루고 있었다.

‘백 년을 산다는 건 징그러운 일이군.’

 

거울이 다시 창으로 변했다. 젊은 노인이, 하얀 가운을 입은 민박집 사장님이 서 있었다.

“놀랍군. 자네가 정말 해낼 줄은 몰랐어. 진심으로 축하하네.”

나도 내가 해낼 줄은 몰랐다. 다만 그녀가 있어서 백 년이 흘렀다. 그녀 생각에 백 년이 흘렀다. 그녀를 쓰며 백 년이 흘렀다. 그녀라면 백 년은 흐른다…

 

이런 나의 감흥을 깨뜨리며 노인이 말했다.

“끝이 아닐세. 작가 공작소에서 자네가 쓴 백여 편이 넘는 소설을 꼼꼼히 검토했다네. 으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좋겠군. 자네의 필력은 눈곱만큼도 나아지지 않았네.”

노인의 말에 나는 다시금 내가 왜 여기에 있었던 건지 깨닫게 되었다. 그가 나의 얼빠진 얼굴에 대고 말을 이었다.

“물론 공작소가 생긴 이래로 자네처럼 재능이 없는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라 모두 적잖이 당황했지만,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네. 자, 시간을 아끼세. 지금 당장 1번 방을 초기화하겠네.”

“영감님… 잠시라도 좋으니 바다가 보고 싶어요… 부탁드립니다.”

 

해안선을 따라 파도가 차고 기울었다. 파란 하늘 아래 파란 바다. 부드러운 바람과 고운 모래 위에 흐려지는 하얀 새의 발자국.

 

“저 바다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딱히 노인에게 물은 건 아니었다.

“또 다른 바다가 있겠지…”

노인이 말했다.

“영감님, 그만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하얗게 타고 남은 재처럼 말했다.

“작가의 꿈을 포기하겠다는 건가?”

“쓸 만큼 썼어요. 재능이 없다는 것도 알았고요.”

“자네가 재능이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내가 나를 까는 건 괜찮지만 남에게 까이면 아프다.

“없이 태어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백 년을 노력해도 안 되는 건요?”

“엄살이 심하군. 고작 하루였어. 티끌이었네.”

“공작소에서 저 같은 미달은 처음이라고 하셨잖아요.”

“다른 사람의 경우와 비교해 보았을 때 확실히 그렇긴 했지.”

뭐지? 아까부터 깐 데 또 까이는 이 기분은…

“자넨 자네 노력이 정말로 충분했다고 생각하나?”

나는 노인의 말에 기가 찼다. 백 년이란 세월이 동네 강아지 이름은 아니지 않은가…

 

“자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 들어본 적 있겠지?”

그의 소설을 한 권 읽은 적이 있었다. 평소 책을 멀리하던 나에게 한 권의 책을 끝까지 보는 일은 매우 드물었는데, 그의 소설을 밤새워 다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가 자네 옆방에 있었다네.”

히가시노는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1번 방에 와서 글을 쓴다고 했다.

“지금까지 30번 정도 방문했으니 삼천여 년 동안 글을 쓴 셈이지.”

노인은 히가시노에 이어 스티븐 킹을 들먹였다. 스티븐 킹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크리스마스와 독립기념일, 자신의 생일에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거짓말은 사실, 반은 맞는 말이라고 했다.

“스티븐이 앞서 말한 삼 일에는 실제로 글을 쓰지 않네. 물론 자기 땅에서 쓰지 않는다는 뜻이지. 그가 해마다 빼먹지 않고 세 번, 1번 방을 찾아온 지가 벌써 오십 년이 다 돼가는군.”

노인은 1번 방을 찾는 사람은 비단 유명 작가만이 아니라고 했다.

“적지 않은 무명 작가와 작가 지망생들이 오늘도 백 년의 밤을 지새우고 있지.”

 

갑자기 한옥 마을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곧 노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통화를 마친 노인의 얼굴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당혹감이 가득했다. 나는 황급히 마을로 달려가는 노인의 뒤를 쫓았다.

 

“H가 1번 방에서 쓰러졌습니다.”

보고를 들은 노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H라면… 음, 현재 상태는?”

“텍스트 코마 3단계로 보입니다.”

낯선 장비와 각종 화면이 줄지어 늘어선 상황 통제실에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제히 중앙에 있는 대형 화면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 단발의 곱슬머리 여학생이 한 손에 펜을 쥔 채 책상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참 아름다운 손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여학생의 섬섬옥수를 감상하고 있는 나는 혹시 변태 아닐까, 하면서도 눈에서 그녀의 모습을 떼어낼 수 없었다. 그런데… 저 곱슬머리,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자각몽이 붕괴할 때까지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았지?”

노인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네모난 머리를 가진 남자가 있는 곳을 향해 말했다.

“13분 남았습니다.”

네모난 머리의 남자가 노인과 내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으헉!”

그의 얼굴을 본 나는 기겁했다. 남자의 어깨 위에는 머리 대신 바가지 머리 모양의 가발을 쓴 모니터가 달려 있었다. 구형 CRT 모니터였다. 모니터 속에 그려진 얼굴이, 나를 보고 어벙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달려야 하니’의 홍 선생이었다.

 

“RC(Reality Check)를 강제 실행해 보았나?”

노인이 엄중하게 묻자, 나를 보며 어벙하게 웃던 홍 선생의 못난 얼굴이 일순 절세 미남이 정색하는 얼굴로 바뀌며,

“두 번 모두 실패했습니다. 의심스러운 점은…”

 

홍 선생은 여학생 H가 공작소의 강제 소환을 막기 위해 자각몽의 얼개를 미로 형태로 바꿔 놓은 것 같다고 했다. H가 고의로 사고를 일으켰다는 말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H는 1번 방에서 자신을 꿈에 가둔 것이군.”

“왜요?”

내가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꿈에서 나오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노인이 대답하면서 지그시 내 어깨에 양손을 얹었다.

“여, 영감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나는 언뜻 불길한 예감에 빠져 노인에게 말했다.

“자네가 나서줘야겠네. 아직 천 년은 빠른 일이지만…”

나는 노인의 말을 자르며,

“아뇨, 아뇨, 영감님, 이러지 마세요.”

노인이 또다시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 작가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 수 있겠나?”

 

아… 이런 뜬금없는 전개는 인제 그만, 하며 노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미 노인을 따라 바닥에 빨려 들어간 머리를 빼려고 두 손으로 땅을 밀며 엉덩이를 하늘로 뾰족하게 뽑아 세웠다. 갑자기 홍 선생의 모니터 머리가 바닥을 뚫고 들어와 내 얼굴에 대고 말했다.

“5분 남았어요. 1번 방 기준, 약 2시간이죠. 서둘러야 합니다.”

 

 

 

5

 

 

 

미로의 벽마다 만화가 그려져 있었다. 꽤나 만화를 좋아하던 나는 어느새 자신의 처지를 잊고 만화 삼매경에 빠져 이 벽 저 벽을 돌아다녔다.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등장인물의 말풍선이 모두 하얗게 비어 있었다.

‘상상력을 돋우는 새로운 화법의 만화인가? 아니면 독자 참여형 만화?’

 

나는 점점 숨 가쁘게 펼쳐지는 장면을 따라 정신없이 미로를 떠돌다가 드디어 절정의 화려한 액션이 펼쳐질 것 같은 벽에 이르렀다. 주인공으로 보이는 인물이 늠름하게 악당들과 맞서고 있는 장면이었다. 나는 무심코 그 모습에 어울릴 만한 대사를 상상하며 말했다.

 

“뒤로 물러나 계시죠. 놈들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대사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벽이 움찔거렸다. 바로 다음 순간, 나는 벽에 그려진 만화 속으로 들어와 있었고, 내 앞에는 무지막지한 악당들이 서 있었다. 어쩌다가 또 이렇게 되었을까 하며 걷잡을 수 없이 다리를 떨고 있었는데 갑자기,

“혼자서 괜찮겠어요?”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긴 펜 옆에 차고 단발의 자연산 곱슬머리를 흩날리며 내 뒤에 서 있는 교복의 여인. 아름다웠다. 신비로웠다. 나는 여기서 한 번 더 깨달았다. 내가 금사빠였다는 사실을. 또다시 윤종신의 ‘환생’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내뱉은 말이 화장실 바닥에 떨어졌다 해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도로 입에 주워 담았던 나였지만, 그녀가 내 뒤에 있었다. 나의 액션을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느닷없이 치솟는 기운을 느끼며 기꺼이 적들을 향해 돌격했다. 힘차게 땅을 찼다. 만화의 한 장면 안에 있었으니, 만화의 한 장면처럼 높이 솟아오를 줄 알았다. 나는 적들이 나의 목을 치기 딱 좋은 곳에 고꾸라졌다. 평소 눕거나 앉아만 있던 내 하체의 부실함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다른 건 말도 안 되게 다 바뀌면서 내 다리 하나 바뀌지 않는 이 만화의 선택적 개입 또한 원망스러웠다. 이윽고 내 목에 도끼가 날아들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하며 질끈 눈을 감으려는 순간, 어느새 내 앞을 막아선 그녀가 펜으로 도끼를 걷어내며 말했다.

“정말 안심할 수 없는 아저씨네.”

 

그녀는 등 뒤에 검은색 잉크병과 하얀색 잉크병을 X자로 메고 있었다. 그녀가 오른손으로 가볍게 던진 펜을 왼손으로 보기 좋게 낚아챈 다음, 팔을 뒤로 넘기며 단번에 하얀색 잉크병에 꽂고는, 번개처럼 다시 뽑아 도끼를 내려치기까지 걸린 시간은 2초. 잉크병에 펜을 꽂기까지가 1.99초. 귀신같은 솜씨였다. ‘바람의 검심’에나 나올 법한 발도술을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악당의 손에서 도끼가 사라졌다. 악당이 멍하니 빈손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가 곧바로 같은 발도술을 반대로 펼쳤다.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겨진 펜이 검은색 잉크병에 담겼다가 다시 뽑혀, 악당의 빈손 위에 화려한 꽃무늬를 수놓았다. 악당은 이제 도끼 대신 꽃다발을 들고 서 있다가 그것도 잠시, 그녀의 연이은 펜 놀림에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악어가 되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펜의 궤적이 잠잠해졌다. 어느새 배경이 통째로 바뀌어 있었다. 악당의 인상이 반영된 듯, 멧돼지, 늑대, 상어 따위가 푸른 벌판을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얼마 뒤에 배경이 또 한차례 움찔거리자, 그녀와 나는 배경이 그려진 벽 밖에 서 있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나에게 그녀가 대뜸 쏘아붙였다.

 

“내 그림에 대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세요!”

“어? 어… 난 그냥…”

겸연쩍어하는 나에게 그녀가 다짜고짜 물었다.

“아저씨, 누구예요?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어, 나는 그러니까…”

“당장 나가요. 안 나가면 없애버리겠어요.”

“너, 아까부터 말이 좀 심하다?”

듣고 있자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쪼그만 게 벌써부터 말버릇이 그 모양이면…”

갑자기 그녀의 펜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어라? 왜 말이 안 나오지?’

그녀가 ‘풉’ 하고 웃었다. 나는 얼른 내 입을 만져보았다. 손에 걸리는 게 없었다. 그녀가 펜을 놀려 만든 거울을 나에게 던졌다. 거울 속의 나는 입이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나는 그녀에게 당장 내 입을 돌려놓으라고 말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발을 구르며 험상궂게 노려보자, 그녀는 그런 나에게 코웃음 치며 다시 펜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펜이 멈추자, 나는 곧 몸의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잡은 뒤에도 나는 계속해서 이리저리 움직여야만 했다. 왜 이렇게 발이 미끄럽지? 하며 아래를 보았다. 허리 아래가 외발자전거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내 시력이 미치는 범위가 왠지 하트 모양에 갇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눈이 하트 꼴로 변해 있었다. 하트 눈에, 입 없는 얼굴, 외발자전거 다리라니… 오기가 치솟았다. 남은 두 손으로 그녀에게 힘차게 엿 먹어의 동작을 선보였다. 잠시 후, 나는 외발자전거를 타며 심벌즈를 치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애꾸눈 잭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외발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일어서기 무섭게 도로 넘어졌다. 여러 차례 일어섰다 넘어지기를 거듭한 나머지 지쳐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잠시 누운 채로 고민하다가,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하며 몸의 중심을 잡아보았다. 두 심벌즈를 세워 굴리자, 나 자신이 제법 근사한 삼륜차처럼 느껴졌다. 나는 왠지 모를 우월감을 느끼며 보란 듯이 그녀를 향해 턱을 꼿꼿이 치켜올렸다. 그녀가 눈을 부라리며 펜으로 내 양손을 묶듯 사납게 내둘렀다. 나는 곧 중심을 잃고 옆으로 넘어갔다. 두 손이 붙어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오토바이가 되었다.

 

“아저씨, 인제 그만 잘못했다고 비는 게 어때요?”

그녀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아니! 너같이 막돼먹은 녀석한테는 일도 사과 안 해!’

마음이 가닿았나? 그녀가 움찔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녀에게 돌진했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그녀답지 않게 꼼짝 못 하고 서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교통사고가 날 판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오토바이가 된 나를 꺾었다. 곧 엉망으로 구르며 미로의 벽에 세차게 부딪혔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쓰러져 있었다. 바퀴를 질질 끌며 그녀에게 다가선 나는,

‘이봐, 정신 차려.’

그녀가 흠칫 놀라며 깼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그녀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어떻게 아저씨 목소리가 들리는 거죠?”

‘그보다 너 괜찮은 거야?’

“네, 나보다 아저씨가 심하게 망가진 거 같은데요…”

‘끄응… 인제 그만하고 날 원래대로 되돌려줘. 그리고 미안하다.’

그녀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펜을 들다가 돌연,

“악!”

‘왜, 왜 그래?’

“펜이, 펜촉이 부러졌어요…”

아까의 충돌은 그녀를 피했지만, 펜을 비껴가지는 못한 것 같았다. 이대로 오토바이로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려고 하는데,

“흑흑, 이제 어떡해요…”

그녀가 선수 친 울음소리에 눈물이 쏙 들어간 나는,

‘펜이야, 또 구하면…’

“이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펜이라고요!”

그녀가 이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미로의 벽에 그려져 있던 만화가 하나둘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맞은편 벽에서 모니터 머리가 빠른 속도로 그려지고 있었다. ‘달려야 하니’의 홍 선생이었다. 곧 그의 음성이 벽을 뚫고 나오며,

“10분도 채 남지 않았어요. 서둘러 1번 방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떻게, 여길…?’

“저 해킹 좀 해요. 그보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만화와 함께 사라져요. 지금 당장 빠져나오세요!”

‘방법을, 방법을 알려 주세요!.’

“확실하진 않지만, 현재로서는 만화의 마지막 장면을 찾아 그 속을 뚫고 나오는 방법밖에 없어 보입…”

갑자기 벽에서 홍 선생의 얼굴이 뚝 하고 꺼졌다. 나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는 이미 만화가 사라지고 어둑한 벽만 남아 있었다.

 

‘얼른 올라타!’

나는 등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버려 둬요…”

그녀가 넋을 놓은 채 대답했다.

그녀가 실의에 빠진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일단 여길 벗어나야 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우선 이곳에서 나가야 해!’

“그냥 날 내버려 두라니까!”

나는 잠시 숨을 깊게 내쉬며 그녀가 그린 만화를 곱씹어 보았다. 짚이는 데가 있었다. 그녀에게 에두르지 않고 바로 말했다.

‘만화에 빠진 말을 쓰지 못해서야?’

“여기서라면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쓸 수 있어. 마음만 굳게 먹는다면.’

어디선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 나에게 펜을 선물한 그에게 약속했어요… 곧 보여주겠다고.”

나는 그녀의 말을 넘겨짚으며 말했다.

‘그가 너에게 펜을 선물한 건 너의 꿈을 응원해서지, 반드시 만화를 완성하라는 뜻은 아니었어.’

“…”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와 내가 조금씩 투명해지고 있었다. 마음이 초조했다. 무리수를 두는 수밖에…

 

‘그가 널 기다리고 있어. 그가, 지금 너의 말 없는 만화를 기다리고 있어. 너를 만나면 꼭 전해달라고 했어. 하얗게 빈 공백을 함께 채워나가자고, 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자고.’

“지금 한 말… 사실이에요?”

‘내 말이 사실인지는 그를 만나 직접 물어봐.’

“…”

‘머뭇거릴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있는 힘껏 달리는 거야!’

 

그녀가 내 위에 올라탔다. 나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 달리는 미로의 벽을 따라 아델의 ‘Skyfall’이 귓전을 울렸다.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아무리 달려도 남아 있는 만화를 찾을 수 없었다. 갑자기 내 머리 위로 말풍선이 뜨며, 그 안에 홍 선생의 얼굴이 나타났다.

“왼쪽, 오른쪽, 오른쪽, 왼쪽, 왼쪽…”

홍 선생이 설명할 틈도 없이 방향을 지시했고, 나는 그의 말에 따라 거칠게 몸을 틀었다. 손잡이 없는 오토바이를 탄 그녀가 이젠 정말 나를 의지한 채, 내 목을 꼭 껴안고 있었다. 홍 선생의 흥분한 목소리가 말풍선을 터뜨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

“그대로 쭉! 남은 시간, 10, 9, 8…”

 

저 멀리 만화 한 컷이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너무 멀다. 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과연 나는 나에게 몸을 맡긴 그녀를 구할 수 있을까? 앞바퀴와 뒷바퀴 모두 터지고 있다. 몸이 흩어지고 있다. 조금만 더 빨리! 달려라, 나여. 닳아 없어질지라도 끝까지 달려라!

 

 

 

6

 

 

 

“와장창.”

상황 통제실 중앙, 대형 화면의 막이 깨지며 그녀와 내가 튀어나왔다. 통제실 사람들이 황급히 책상 밑으로 몸을 숙였다. 잠시 후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바닥에 엎어진 그녀와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유리 파편들이 지지직거리며 사라지고 있었고, 깨진 화면의 막이 가장자리에서부터 안쪽으로 한 픽셀씩 복구되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의 팔다리로 돌아와 바닥에 길게 뻗은 상태로 끙끙거렸다. 몸이 무언가에 깔린 듯 숨쉬기가 답답했다. 그녀가 내 목을 꽉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노인을 비롯한 통제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내 얼굴에 바짝 붙어 선 홍 선생의 얼굴에서 만화의 눈물이 강 같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어항에 물을 들이붓듯, 모니터 안의 수위를 빠르게 높이고 있었다. 자신의 눈물에 잠긴 홍 선생의 얼굴이 호흡곤란으로 빨갛게 달아오르며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침내 홍 선생의 얼굴이 터지면서 모니터 한가득, ‘펑’이라는 글자가 나타나며 번쩍거렸다. 팡파르가 울리고, 폭죽이 터지며, 색종이 조각이 날렸다. 마지막 색종이 조각이 땅에 떨어지고 나자, 다시 홍 선생의 얼굴이 등장했다. 일 초 간격으로, 눈물을 질질 흘리는 못난 얼굴과, 대견하다는 듯 환하게 웃는 훈남의 얼굴이 번갈아 가며 바뀌는 모습에, 나는 그만 ‘풉’ 하며 기절했다.

 

그녀는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펜을 선물했던 그를 만나러 떠났다고 했다. 내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자, 노인이 나에게 동전을 건네며 말했다.

“서운해할 것 없네. 또 만날 날이 있겠지.”

그러고는 손을 들어 커피 자판기를 가리켰다. 나는 감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노인네 같으니, 하며 커피 자판기로 다가갔다. 동전을 넣으려다 말고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낯익었다. 설마, 아니겠지 하며 동전을 투입구에 넣었다. 개운치 않은 마음이 가시질 않아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주머니에 동전이 정확히 커피값만큼 모자랐다. 노인을 바라보자, 그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잘 마시겠네.”

때마침 홍 선생이 들어오며 말했다.

“저도 한잔 부탁해요.”

벼룩의 간을 빼먹는 족속들 같으니… 동전을 다시 넣자, 커피 자판기에서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가 흘러나왔다. 자판기가 어느새 주크박스로 변해 있었다.

 

“1번 방에서의 자네 활약을 조금은 인정하지.”

노인이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정말 대단했어요! 초를 다투는 시간에 H를 설득하는 그 순발력! 마지막까지 포기할 줄 모르고 달리는 그 패기!”

홍 선생이 맞장구치며 커피를 맛있게 쳐다보았다. 그는 곧 고개를 숙이고 가발을 들친 뒤 모니터 뒤통수에 있는 환기구에 커피를 쏟았다. 홍 선생의 머리 여기저기에서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고는 그의 머리가 탁자 위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가발을 들어 올리고 커피를 닦아낼 것이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뭐가 없었다. 급한 대로 그의 가발로 커피를 닦아냈다.

 

노인이 나에게 그냥 놔두라는 손짓을 보내며 말했다.

“그렇게 꾸물거릴 시간이 없네. 곧 1번 방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네. 커피나 마저 들게. 앞으로 백 년 동안 냄새도 못 맡을 테니.”

나는 다른 때와는 달리 노인의 말에 잠자코 있었다. 커피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나는 나대로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영감님, 방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내가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는지, 노인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영감님이 꿈을 꾸고 계신 건가요?”

노인과 나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노인이 말했다.

“지금 자네는 글을 쓰고 있는 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저는 지금 아직도 1번 방에서 글을 쓰고 있는 건가요?”

“어쩌면 자네는 지금 쪽방에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지.”

 

노인의 말에 나는 불쑥 조금 전에 마셨던 커피가 유난히 달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입에 대려던 나는 깜짝 놀라 종이컵을 떨어뜨렸다. 커피를 쏟은 나의 손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투명한 액체가 끈적하게 탁자 위에 퍼졌다. 투명한 커피가 젖은 손을 타고 내 몸으로 흘러들었다. 몸이 점점 사라져갔다.

 

불현듯 엎어져 있던 홍 선생이 벌떡 일어나 노인에게 말했다.

“그는 지금 자각몽의 이중 구속에 빠져 있습니다. 이대로 내보내는 건 위험합니다.”

“어차피 봉인은 풀리기 마련일세.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미로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게 나을지도 몰라. 지금은 그저 1번 방의 기적이 다시 일어나길 바라는 수밖에.”

 

 

 

7

 

 

 

깜빡 졸다가 책상 위에 설탕물을 엎질렀다. 원고가 엉망이 되었다. 나는 책상 밑까지 흐른 설탕물을 닦다가 쥐와 눈이 마주쳤다. 쥐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듯, 깔보는 눈빛이 역력했다. 곧 놈은 방자하게 돌아다니며 조금씩 음지의 경계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놈이 이제는 위협적인 눈빛으로 책상 밑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잠든 척 눈을 감았다. 어느새 놈은 눈을 뜨면 바로 내 눈을 갉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한번 감긴 눈은 좀처럼 떠지지 않았다…

 

나는 젖은 원고를 다시 읽어보았지만, 잘 말려 보관할 정도로 맘에 들지 않았다. 원고를 구겼다. 구긴 원고 사이에서 쥐의 비명이 새 나왔다. 어째서 쥐는 나를 한사코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일까… 쥐도 새도 모르게 경계를 넘어 원고 안까지 침범했군. 혹시 내 눈 테두리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는 건 아닐까…

 

갑자기 밖에서 문 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쪽방 문을 저렇게 세게 두드리는 건 그들밖에 없었다. 나는 장판 밑이든, 벽과 벽지 사이든, 얼른 숨어야 했다. 나는 모든 것에 앞서, 그것만은 들키지 말아야 하는 바로 그것을 들켜버린 것이 분명했다. 밖에서 안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고 믿어버리자. 그래, 이대로 꼼짝하지 않는 것이 좋아. 밖의 누군가가 사라질 때까지 일 분이건, 한 시간이건, 일평생이건. 근데 만약, 그들이 내가 안에 있는 걸 알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나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문가로 다가갔다. 문틈으로 밖을 엿볼 수는 있지만, 밖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 구석, 그림자도 지지 않는 구석으로. 이곳은 쥐구멍이 없는 쥐도 마음껏 고양이를 피할 수 있으며, 비록 우연히 밟혀 배에서 창자가 쏟아져도 냄새가 나지 않는 곳. 그곳까지 나는 나의 등으로 벽을 소리 없이 쓸었다. 뒤꿈치가 하늘에 닿을 듯,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벽 쓸기를 마친 나는 그 좁은 구석에 나를 밀어 넣었다. 나는 바닥에 오래 달라붙어 검어진 껌처럼 납작 몸을 붙였다. 빚쟁이의 그림자는 언제나 당당하게 화가 나 있었다. 문틈 사이사이로 면도날 같은 그림자를 시퍼렇게 찔러댔다. 머리채를 잡혀도 좋으니, 그래도 빚쟁이에겐 문을 열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들만 아니라면. 그들의 그림자는 빛이 만든 것이 아니라 흑이 토해낸, 흑의 어깨를 툭 하고 치자 어깨를 친 그들의 구두 앞에 짓눌려 더는 흑에서 흑을 낼 수 없는데도 뱉어낸, 재였다.

 

그들의 그림자는 내가 숨어있는 구석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아무 때나 어깨를 칠 수 있는 구두의 그림자가 내가 있는 구석에까지 드리워졌다. 어느새 문이 열렸고 그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나를 없는 사람처럼, 하나가 나를 이리 밀치고, 다른 하나가 나를 저리 밀치고, 그러다가 밀려 넘어지려는 나의 뒷덜미를 잡아 세운 다음 바로 밀치고, 밀치고, 밀치고. 구둣발이 비좁은 방의 바닥을 밟고, 벽을 밟고, 천장을 밟고. 발자국이, 검은 새의 발톱 같은 발자국이, 하나는 왼편에 서서 내 왼발을 그 발톱 사이에 끼고, 다른 하나는 오른편에 서서 내 오른발을 그 발톱 사이에 끼고. 둘은 내 머리 위로 서로의 부리를 물었고, 가볍게 내 어깨를 쳤다. 나머지 한 명의 구두 앞에 고꾸라진 나는 무엇이라도 내뱉어야 했다.

 

내 목구멍에는 글이 틀어박혀 있었다. 아무리 애써 토해내려 해도 나오지 않는 글. 잠시만이라도 내뱉을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서 풀려날 수 있을 텐데…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졸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쪽방에서 언제 나온 거지… 아니면 쪽방에서 벤치에 앉아 있는 나를 꿈꾸고 있는 건가… 나는 이제 점점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 구두를 검은 새 두 마리가 양쪽에서 쪼고 있었다. 나머지 한 마리는 내 어깨 위에서 조용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깨를 흔들어도 박제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한 곳만을 바라보았다. 새를 따라 바라본 곳에 떡볶이 마차가 있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몰려왔다. 구토감과 함께. 구두를 털어내도 붙어 있는 새 두 마리와 어깨를 떨쳐도 붙박인 새 한 마리를 짊어지고 마차로 향했다.

 

긴 주걱 옆에 차고 백발의 곱슬머리를 하얀 수건으로 고이 싸맨 여인. 고우셨다. 묘하셨다. 그때 나는 알지 못했었다. 젊었던 그녀에게 나는 금사빠였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바람이 차가워지며 김창완의 ‘회상’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할머니, 떡볶이 일 인분에 얼마에요?”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내 행색을 한 번 훑고는,

“그냥 먹어요.”

 

떡볶이를 서른 개도 넘게 먹었다. 아직도 모자랐다. 나는 마음껏 들판을 휘젓고 다녔다. 나는 두근거릴 줄 모르는 아귀였다. 그녀는 어느새 양은 바닥이 드러난 들판에 말없이 마차를 몰며, 당신의 얼굴같이 하얀 떡을 빨갛게 띄우셨다. 나의 염치없는 허기가 또다시 들판에 창을 던졌다. 그녀가 하얗게 늙어가는 동안에도 뚫린 주머니 같은 나의 목구멍은 끊임없이 떡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떡이 떨어졌다. 떡 대신 빨간 국물을 들이켰다. 목구멍이 아렸다. 못 먹어본 놈이 토한다고 나는 할머니의 마차 바퀴를 빨갛게 적셨다. 내 구두에 붙박였던 검은 새가 어깨 위의 새와 함께 어느 틈에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마침내 내뱉었다. 오랜만에 차오른 포만감을 내뱉고, 그 밑에 깔려 아우성치던 허기를 내뱉고, 허기를 담고 있던 공백을 내뱉고, 마침내 깊숙이 박혀 있던 글을 내뱉었다. 글은 약간의 염치가 남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정말 염치없네요. 이거라도…”

나는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모두 꺼내 들며 그녀에게 말했다.

“젊은 양반, 커피 좋아해요?”

그녀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동전으로는 그녀를 커피 전문점으로 모실 수 없었다. 그녀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나에게 말했다.

“커피가 어렵다면… 나 좀 바닷가에 데려다 줄 수 있어요? 차비 걱정은 말고.”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가 머릿수건을 풀고 마차에서 나와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지, 지금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우리가 다시 만나겠어요?”

마차를 그대로 두고 그녀와 나는 동해로 떠났다.

 

그녀는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가만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빤히 보고 있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어색해진 나에게 그녀는 세상 풍파를 고스란히 간직한 주름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마음이 뜨거운 국물에 덴 것처럼 울컥했다. 나도 모르게,

“할머니, 고생 많으셨겠어요…”

그녀가 다시 조용히 미소 짓다가,

“사는 게 다 그래요. 그래도 그때가 그립네요.”

 

마차에서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부터 그녀의 모습이 매우 친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길래 보자마자 그리워지는 걸까… 그녀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그런 나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그녀가 자신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소싯적에 인형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지요. (…) 늘 어제와 같던 날에 갑자기 그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녀는 어느새 젊은 시절의 그녀로 돌아간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 사람, 정말 안심이 안 되는 남자였지만 (…) 마지막으로 그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 때 깨달았어요.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걸.”

그녀가 말을 멈추며 그가 했던 말이 뭔지 아냐고 묻듯 나를 쳐다보았다.

“백 년만 기다려 주실래요?”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할머니가 그때의…”

“그런가요? 그럼 그쪽은 누군가요? 지금 그쪽이 그때의 그쪽이라면, 그쪽은 내 노망의 산물인가요? 아니면… 진짜 유령인가요?”

 

어느새 옥탑방의 그녀가 내 옆에 앉아 나에게 되묻고 있었다. 버스 안에 가파르게 경사진 철제 계단이 눈앞에서 끝없이 펼쳐졌다. 그 계단에서 내 좌석만 따로 굴러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버나드 허먼의 ‘Prelude and Rooftop’의 선율을 따라 그녀의 모습이 회오리치며 멀어져갔다.

 

“젊은 양반, 인제 그만 가 봐요. 떡이 다 떨어졌어.”

그녀의 말에 빙빙 돌던 머리가 제자리를 찾았다. 나는 막 빨간 국물을 마시려고 접시를 입에 대고 있었다. 얼른 접시를 내려놓으며,

“죄송합니다, 할머니… 정말 염치없네요. 이거라도…”

나는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전부 꺼내 들며 그녀에게 말했다.

“젊은 양반, 커피 좋아해요?”

그녀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동전으로 커피 전문점은 어림도 없었다. 그녀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나에게 말했다.

“커피가 어렵다면… 나 좀 바닷가에 데려다 줄 수 있어요? 차비 걱정은 말고.”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가 머릿수건을 풀고 마차에서 나와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지, 지금요?”

“지금이 아니면 우리가 언제 또 만나겠어요?”

마차를 그대로 두고 그녀와 나는 동해로 떠났다.

 

그녀는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조용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빤히 보고 있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어색해진 나에게 주름을 무색게 하는 청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마음이 뜨거운 국물에 덴 것처럼 웃퍼졌다. 나도 모르게,

“할머니, 참 고우세요…”

그녀가 내 말에 수줍게 웃다가,

“소싯적엔 그런 소리를 들은 적도 있지요. 그때가 그립네요.”

 

나는 문득 어릴 적 그녀 모습이 궁금해졌다.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사진 한 장을 꺼내 들며,

“학창 시절엔 만화를 그리는 게 꿈이었지요.”

그녀가 보여준 사진에는 단발의 곱슬머리 여학생이 치기 어린 표정으로 펜을 마술봉처럼 휘두르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학생 시절의 여학생이 된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 아저씨, 정말 말이 안 통하는 먹통이었지만 (…) 마지막으로 아저씨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 때 깨달았어요. 내가 그를 의지하고 있다는걸.”

그녀가 말을 멈추며 그가 했던 말이 뭔지 아냐고 묻듯 나를 쳐다보았다.

‘머뭇거릴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있는 힘껏 달리는 거야?’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할머니가 그때의…”

“그런가? 그럼 아저씨는 누구야? 지금 아저씨가 그때의 아저씨라면, 아저씨는 내 노망의 산물이야? 아니면… 진짜 유령?”

 

어느새 미로 속의 여학생이 내 옆에 앉아 나에게 되묻고 있었다. 버스의 좌석들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벽을 만들었다. 그 벽이 만든 미로에서 내 좌석만 따로 떨어져 나가 이리저리 떠돌기 시작했다. 버나드 허먼의 ‘Prelude and Rooftop’의 선율을 따라 그녀의 모습이 회오리치며 멀어져갔다.

 

따뜻한 햇살에 깜빡 졸던 나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버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어색해진 나에게 그녀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젊은 양반이 노인네와 있으려니 지루하겠어요.”

“아, 아니에요. 저보다 할머니가…”

“따분한 늙은이와 동행해 주는 값으로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8

 

 

 

할머니 떡볶이는 그야말로 인기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또 먹고 싶어진다. 먹고 나면 스르르 잠이 밀려온다. 할머니 떡볶이를 먹어 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달콤한 꿈에 사로잡힌 기분이라고.

 

나는 떡볶이 할머니 손자다. 엄마는 내가 세 살 때 집을 나가셨고, 아빠는 삼 일 전에 쓰러지셨다. 쪽방에 굶주린 채 누워 있는데, 할머니가 나타났다. 할머니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내가 네 할미다.”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고 할머니는 그러라고 하셨다. 나는 늘 못된 짓거리를 할 생각만 했지만, 할머니는 나쁜 짓만은 용납하지 않으셨다. 할머니께 반항할 수는 없었다.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이 각별해서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힘이 셌다. 맞으면 많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키가 백오십도 안 되셨지만, 팔근육이 인간의 것이 아니셨다. 자릿세를 받으려던 불량배들은 할머니 팔뚝만 보고도 슬슬 자리를 피했다. 한번은 할머니 마차에 검정 세단이 거칠게 들이친 적이 있었다. 덩치 좋고 험상궂은 아저씨 서넛이 차에서 나와 할머니를 무섭게 윽박질렀다. 할머니는 잠깐 비켜달라 하시더니 검정 세단의 앞바퀴를 들고 척척 걸음을 옮기셨다. 눈 깜짝할 새에 차가 열 걸음쯤 물러나자, 말씀하셨다. 여기다 주차하면 딱지 뗀다고. 그 뒤로 할머니 마차를 막아서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나도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할머닌 팔뚝은 여전하셨지만 하얀 곱슬머리는 얼마 남지 않으셨고 허리와 다리가 너무 굽으셔서 땅속으로 스미실 것만 같았다. 고생만 하신 할머니. 이제 정말 쉬셔야 한다. 나는 매일같이 할머니 대신 마차를 맡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팔 굽혀 펴기나 제대로 하라고 면박을 주셨다. 나는 할머니가 시키시는 심부름 빼고는 늘 팔 굽혀 펴기를 해야 했다. 먹고 자고 팔 굽혀 폈다. 마음이 점점 급해졌다. 얼른 할머니에게 떡볶이 만드는 법을 배워 할머니 대신 일을 해야 할머니가 쉬실 텐데…

 

팔 굽혀 편지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가 물끄러미 내 팔을 보시더니,

“얘야, 너, 한 번에 얼마나 하냐?”

“어? 응, 한 만 개쯤 하다가 세는 걸 까먹는데…”

“물구나무서서 하냐?”

“응.”

“한 손으로?”

“응.”

 

며칠 뒤 할머니는 곤히 자는 나를 깨우셨다. 떡볶이 만드는 법을 알려주시겠다며.

 

삼월 말, 따뜻한 날씨였지만 할머니는 두꺼운 옷을 챙기라고 하셨다. 열쇠 하나를 주시며 창고에서 밧줄과 뜰채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창고가 늘 궁금하긴 했었다. 창고 문을 열며 생각했다. 밧줄은 뭐고 뜰채는 뭘까?

 

뜰채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길이가 기린의 키보다 컸고, 채의 둘레는 코끼리가 들어갈 만했다. 채는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 무척 무겁고 단단했다. 채에 달린 망은 고래 심줄처럼 질겼고 매우 촘촘해서 물을 부어도 새지 않을 정도였다. 밧줄 또한 뜰채 못지않았다. 줄다리기할 때 쓰는 것처럼 굵고 길었다. 도대체 할머니는 이 크고 무거운 것들로 뭘 하시려고…

 

냉동 트럭이 동쪽을 향해 달렸다.  

“이번 길은 손자분과 같이 가시네요.”

트럭 기사가 할머니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손자 녀석이 갈 거예요. 잘 좀 부탁해요.”

할머니가 몇 개 없는 이로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트럭이 도착한 곳은 강원도 강릉, 대관령 치유의 숲. 할머니는 기사 아저씨에게, 그럼 거기서 보자고 인사하시고는, 나에게 트럭에서 밧줄과 뜰채를 내리라고 하셨다. 곧 밧줄과 뜰채를 내린 나는 어떻게 들고 가야 할지 할머니께 여쭈었다. 할머니는 내가 어떻게 하는지 그저 지켜보겠다는 표정이셨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뜰채에 밧줄을 감아 어깨에 멨다. 걸을 때마다 뜰채의 무게에 땅이 푹푹 파였다. 할머니를 따라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할머니의 허리와 다리가 굽으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할머니는 물소리 숲길로 가시는 중간에 나에게 밧줄을 달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밧줄로 올가미를 만들며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할미한테서 떨어지면 안 된다!”

 

할머니는 갑자기 숲길을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가셨다. 길이 없는 가파른 곳을 빠른 걸음으로 옮기시다가 갑자기 쏜살같이 뛰셨다. 할머니의 무시무시한 속도에 놀랄 틈이 없었다. 뜰채를 들고 정신없이 할머니를 뒤쫓았다. 뜰채의 무게만으로도 할머니를 뒤쫓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는데, 빽빽한 나무들이 끊임없이 뜰채에 부딪혔다. 할머니는 뒤도 안 돌아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무 안 상하게 뛰어! 한 손으로!”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무거운 뜰채를 다루는 데 점점 요령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눈 옆으로 휙휙 지나갔다. 어느새 저만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할머니는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으셨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할머니, 위험해! 떨어진다고!”

할머니는 달리면서 거대한 올가미 밧줄을 한 손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봉우리에서 날아오르셨다.

“할머니!” 하며 나도 따라 날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할머니와 나는 지척도 가릴 수 없는 짙은 안개의 바닷속을 날고 있었다. 운 좋게 거센 바람을 타고 있었지만, 곧 떨어질 게 뻔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밧줄을 돌리고 계셨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하늘에서 거대한 밧줄을 돌리며 떨어져 내리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는 것이라니… 눈물이 핑 돌면서도 바람 들이킨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그때였다. 할머니가 밧줄을 힘차게 안개 속으로 던지셨다. 남은 한 손으로는 나의 멱살을 잡으셨다. 나는 할머니에게 멱살을 잡힌 채로 할머니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들고 있던 뜰채를 놓치려는 순간,

 

“뜰채 놓치면 혼날 줄 알아!”

할머니의 음성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갑자기 밧줄이 팽팽해지며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할머니와 나는 떨어져 내리는 대신, 밧줄에 매달려 하늘로 비스듬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얼른 두 발을 앞으로 뻗으며 말씀하셨다.

“빨리 안 뻗으면 많이 아프다.”

무슨 말이지? 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나는 갑자기 나타난 하얀 벽에, 계란으로 바위 치듯 부딪혔다. 할머니는 솜씨 좋게 두 발을 벽에 대셨다. 살짝 무릎에 반동까지 주시며. 할머니의 강하 시범을 끝으로 나는 기절했다.

 

그만 일어나라고 하는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들고 있던 밧줄을 내게 넘기시고는 절대 놓치지 말라고 하시며 내 어깨 위로 올라가 목말을 타셨다. 나는 이제 할머니를 어깨에 앉힌 채, 왼손으론 밧줄을 들고 오른손으론 뜰채를 들고 있었다. 갑자기 들고 있던 밧줄이 마구 흔들렸다. 할머니와 내가 디디고 있는 벽이, 아니 벽은 어느새 바닥이 되어, 들썩거렸다. 할머니가 서둘러 내 왼팔을 잡고 고삐 당기듯 밧줄을 추스르셨다.

“워워, 나야, 떡볶이 할미. 놀랄 것 없다, 백구야.”

 

할머니의 말에 곧 하얀 바닥이 잠잠해졌다. 뭐지, 이 상황은? 나는 어리둥절한 채, 할머니를 올려다보았다. 할머니가 내 어깨에서 내려오시더니 밧줄을 돌려받으시며 말씀하셨다.

“할미가 깜빡했다. 이 밧줄을 따라가서 눈도장 찍고 와. 백구가 덩치만 컸지, 겁이 많은 걸 내 잊고 있었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안개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 밧줄을 따라 더듬더듬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도 안 돼서 바닥은 가파르게 휘어져 내렸다. 더는 발을 디딜 수가 없어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가야만 했다.

 

밧줄 끝은, 어느새 벽이 된 바닥의 기다란 틈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백구인지 뭔지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눈앞의 벽이 둥그렇게 열리며 검은빛을 번뜩거렸다. 흑진주처럼 빛나는 그것은… 고래의 눈이었다. 밧줄에서 떨어질 뻔했다.

 

백구의 기다란 입에 물린 밧줄을 타고 할머니가 계신 곳, 백구의 등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안개에 싸인 백구의 윤곽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대왕고래보다도 훨씬 컸다. 그것보다, 고래가 날다니…

 

다시 내 어깨 위로 올라간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이제 조금 있으면 백구가 안개 속의 꿈가루를 찾아 달릴 거야. 백구가 꿈가루를 먹으려고 입을 벌리면, 뜰채를 백구 입가에 가져가면 된다. 어디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팔 굽혀 펴기 했는지 보자.”

 

멈춘 게 아닌가, 싶은 정도로 백구는 한가로이 안개 속을 떠돌고 있었다. 할머니는 꾸벅꾸벅 졸고 계신 모양이었다. 나도 졸음이 몰려왔지만 나를 믿고 밧줄과 뜰채를 맡기신 할머니를 생각했다. 이 거친 것들이 다시 할머니의 늙으신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며 졸린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백구의 눈에서 검은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직감했다. 온 힘을 다해 밧줄과 뜰채를 움켜쥐었다. 백구가 어딘가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진득한 안개가 백구의 몸을 타고 소용돌이치며 오리가리 흩어졌다. 백구는 헤라클레스가 힘껏 던진 몽둥이 같았다. 거칠 것이 없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안개의 수렁에 조금씩 구멍이 뚫리며 빛보다 환한 가루가 새어 나왔다. 백구가 입을 벌렸다. 아, 꿈가루구나! 나는 얼른 뜰채를 백구의 입가에 뻗었다. 밧줄과 뜰채를 든 내 양팔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갈 것 같았다.

 

어느새 백구가 입을 다문 채 잠잠해졌다. 다행히 내 팔은 어깨에 잘 붙어 있었다. 그제야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는 어느새 뜰채 끝에 달린 줄을 잡아당겨 망의 주둥이를 오므리고 계셨다. 꿈가루가 담긴 망을 들고 떠다니는 안개 속이 초롱불 밝힌 듯 아늑했다.

 

동이 트고 안개가 걷혔을 때 할머니와 나는 망상 바닷가에 서 있었다. 백구는 발밑에서 안개처럼 사라졌다. 기사 아저씨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냉동 트럭 짐칸에 꿈가루가 담긴 뜰채와 밧줄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맛있는 냄새에 잠시 잠을 깼을 때는 이미 할머니가 꿈가루로 떡을 뽑고 계셨다. 할머니가 잔잔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오늘은 할미 혼자 일 보고 올 테니, 더 자.”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얘야, 그만 일어나야지. 언제까지 잠만 잘 거야?’

동굴 속 메아리 같은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려고 했지만, 좀처럼 떠지지 않았다.

‘할미, 이제 갈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보자꾸나. 그만 일어나거라.’

 

마지막이라는 소리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방 허공에 고양이 얼굴이 연기처럼 떠 있었다. 내가 깨어난 걸 본 고양이는 이내 소리 없이 웃기 시작했다. 조금씩 위아래로 벌어지는 입 모양이 흡사 눈동자가 없는 고양이가 눈을 뜨는 것 같았다. 그 컴컴한 입구가 점점 커지며 앉아 있는 나를 천천히 집어삼켰다.

 

“으악!”

악몽이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문 닫을 새 없이 밖으로 튀어 나갔다. 할머니가 계신 떡볶이 마차로 내달렸다. 할머니가 없었다. 할머니가 다니실 만한 곳을 전부 찾아다녔다. 간 곳을 또 가보고 안 가본 곳도 안 가본 데 없이 돌아다녔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할머니를 찾으러 다녔지만, 할머니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새 나는 홀린 듯이 대관령, 안개의 바다로 가고 있었다. 할머니 없이 들어선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 무작정 안개가 자욱한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숲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들이 검고 무뚝뚝했다. 마침내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지듯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9

 

 

 

얘기가 끝나갈 즈음, 우리는 동해에 도착했고 그녀는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바닷가로 가는 동안, 두세 발짝마다 쓰러지려는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가 허락하지 않았지만, 강제로 그녀를 등에 업었다. 등에 업힌 그녀는 무안할 정도로 가벼웠다. 바닷가에 도착한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았다. 멀지 않은 곳에 발목만큼 파묻힌 커피 자판기가 있었다. 자판기로 걸어가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동전을 넣기 전부터 놓여 있던 오래된 컵에 하얀 모래가 쏟아져 내렸다. 떨어져 내리는 모래가 가늘어지는 모습에, 컵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담은 모래시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나는 이제 커피 한잔의 시간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모래에 스민 듯 누워 있었다. 그녀가 파란 하늘보다 파랗고, 하얀 바다보다 하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바다 끝에 무엇이 있을까요?”

“…”

“지나간 우리의 뒷모습이 있을까요? 아니면… 지금의 뒷모습을 보는 남은 날의 우리가 있을까요?”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곱슬머리가 수평선을 따라 너울거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었지만, 한 올 한 올이 위태로워 보였다.

 

“고양이가 왜 배를 보이는지 알아요?”

그녀가 힘겹게 말했다.

“…”

“당신을 믿어, 내게 다가와…”

“…”

“고양이가 배를 보인다면, 망설이지 말고 다가가세요…”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바다를 따라 하얗게 누웠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하얀 포말이 한데 어우러져 내 눈을 어지럽혔다. 눈에 들이찼던 물거품이 사라지자 어느새 나는 홀로 모래가 담긴 컵을 들고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컵에 담긴 모래를 바다에 뿌렸다. 모래가 들어갔는지 뜨거워진 눈시울에 바다가 흐릿했다.

 

문득 흐려진 시야에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컵에 담긴 설탕을 원고 위에 쏟고 있었다. 원고보다 설탕이 아까웠다. 원고를 접어, 쏟은 설탕을 조심스럽게 컵에 부었다. 종이도 아까워 다시 그 위에 글을 쓰고 있는데, 무언가 꿈틀거렸다. 나는 돋보기를 쓰고 종이를 훑어보았다. 지면에 남아 있던 설탕에 붙은 글자 부스러기였다. 너무 작은 그것을 가까스로 보다 보니 지면이 울렁거리며 구토감이 일었다. 얼른 가운뎃손가락으로 누르려 하자 글자 부스러기가 말했다.

 

“이봐요, 내 아무리 보잘것없는 부스러기라지만 치욕스럽게 꼭 그 손가락으로 눌러야 한단 말인가요?”

내가 잠시 멈칫한 사이, 부스러기가 재빨리 설탕 컵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이, 어이, 이거야 원. 이래서는 다 들통나는 거라고!”

설탕 컵 어디선가 볼멘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같은 부스러기끼리 이러기예요? 저 사람이 나를 가운뎃손가락으로 욕보이려 했단 말입니다.”

내 손가락을 피해 들어간 부스러기가 하소연했다.

“젠장, 설탕 가루가 책상 사방에 깔렸는데 왜 하필 여기로 뛰어든 건지, 원…”

누군가 한 소리 하자, 다들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난 몰라. 이젠 모두 끝장이라고!”

“도대체 시커멓게 젊은 놈이 왜 이리로 뛰어든 거야?”

“이거 한숨만 나오는군.”

나는 설탕 컵 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하얀 가루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글자 부스러기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10

 

 

 

“오빠, 설탕에 뭐 들어갔어?”

누군가 묻는 말에 온통 새하얗던 시야에 동그란 테두리가 나타났다. 이어 테두리를 감싸 쥔 손이 보였다. 컵을 든 손이었다. 나는 설탕 컵 속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곧 설탕을 떡볶이에 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누가 니 오빠야?”

“그럼, 아저씨라고 부를까?”

 

지금 내 앞에서 쉬지 않고 쫑알거리고 있는 그녀를, 나는 모르는 체했어야 했다.

 

떡볶이 마차를 몰며 놀이터를 지나는 길이었다. 그녀는 빨갛게 물들인 파마머리에 짧게 줄인 교복 치마를 입고 있었다. 껌을 씹는 폼이 딱 봐도 일진이었던 그녀는, 침 좀 뱉었을 남학생 셋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전혀 꿀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한 남학생이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며,

“니가 그렇게 잘나가? 어? 어?”

다른 녀석들이 옆에서 히죽거렸다. 그녀가 손가락을 놀린 남학생 다리 사이를 힘껏 걷어찼다. 다리를 꼬며 풀썩 무릎을 꿇은 남학생에게 근사한 무릎 차기를 날리고 난 그녀는 재빨리 당황한 남학생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달아나려 했다. 언제 있었는지 미끄럼틀 아래에서, 달아나는 그녀를 향해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곧 네 명의 남학생이 넘어진 그녀를 에워쌌다. 발길질의 주인이, 꼬나문 담배를 입에서 빼 들고 그녀의 얼굴에 갖다 대려는 순간,

 

“야, 니들 뭐하냐?”

내가 뚜벅뚜벅 걸어가며 말했다.

“뭐야, 이 꼰대는?”

녀석 중 하나가 짝다리를 짚으며 말했다. 다른 녀석 하나가 놀라며 말했다.

“헐, 쩔어. 이 아저씨 팔뚝 좀 봐!”

또 다른 녀석이 턱을 세우며,

“아저씨, 그냥 가요. 아저씨 팔뚝 굵은 거 알겠으니까, 말로 할 때 그냥 가던 길 마저 가라고.”

나는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다.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기며, 나무를 하나 뽑을까… 아니야, 나무 하나 다 자라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 저기 저 철봉을 살짝 구부릴까… 안 되지, 자라나는 아이들의 팔운동에 지장을 줄 순 없는 노릇… 미끄럼틀 위치를 살짝 바꿔 놓을까… 아, 이놈의 결정 장애…

 

“야, 이 아저씨 완전 개쫄았어. 봐봐, 정신줄 놓고 멍때리고 있어.”

하나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하나가 달려들며,

“그러게 왜 나서고 지랄이야?” 하며 나에게 주먹을 날렸다.

“으악!”

내가 반사적으로 든 손바닥에 주먹을 부딪친 녀석이 손을 부여잡고 팔짝 뛰었다. 다른 녀석들이 흠칫했다. 짱으로 보이는 녀석이 담배를 사납게 집어 던지며 나에게 꽤 멋진 발차기를 날렸다. 다시 반사적으로 녀석의 다리를 붙잡은 나는, 공중에서 녀석을 빙빙 돌리며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디에다 던져야 다치지 않을까…

 

“아, 아저씨 잘못했어요.”

“걔, 그러다 죽겠어요.”

한 마디씩 외치는 소리에 녀석들의 짱을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짱은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다.

 

남학생들이 사라지고 난 뒤, 나는 장사할 준비를 했다. 그녀가 아까부터 안 가고 있다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안녕? 난 H. 오빠네 떡볶이, 맛있어요?”

 

오빠,

누가 니 오빠야?

 

언제부터 매일같이 찾아오는 그녀와의 인사말이 돼 있었다. 우리는 둘 다 고아였다. 그래도 나는 할머니가 있었지만, 그녀에겐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늘 떡볶이값을 내지 않고 떡볶이를 먹었다. 틈만 나면 나에게 자신의 만화를 보여주며 말했다.

“오빠, 내 그림 어때?”

 

어느 날, 나는 손님 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어느새 나타난 그녀가 네 손에서 책을 뺏어 들더니, 책 제목을 보며 말했다.

“바늘 공주?”

 

나는 그녀에게 읽고 있던 책에 대해서 꿈꾸듯 이야기했다. 늘 건성이던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오랫동안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얘기를 마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오빠, 내 만화에 글 좀 넣어주라. 난 맞춤법 하나도 제대로 모르거든요.”

나는 그녀의 이런 말을 무시했다. 그러다 말겠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떡볶이를 거를 때는 있어도 나에게 글을 써달라는 부탁은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역시 그때 나는 그녀를 모르는 체했어야 했다.

 

장사를 반나절 쉬기로 했다. 그녀가 억지로 나에게 안긴 그녀의 습작을 들고 H 대학가의 H 화방을 찾았다. 나는 점원에게 그녀의 만화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런 그림 그리려면 뭐가 필요한가요?”

 

어느새 나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싫었다. 겁이 났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으셨다. 매일같이 떡볶이 마차를 지키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문득, 저 멀리 ‘오빠’ 하며 할머니가 달려왔다. 그녀가 내 앞에 도착했을 땐, 할머니 대신 H가 서 있었다.

 

나는 그녀가 떡볶이를 먹고 있는 내내 망설이다가, 멋쩍게 선물을 내밀었다. 그녀가 크고 까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말했다.

“뭐예요?”

“…”

내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그녀가 포장된 상자를 열고 펜을 꺼내 들며 외쳤다.

“와!”

그녀는 펜을 이리저리 보다가 갑자기 마차를 넘어 나에게 뛰어들었다. 내 팔뚝도 그녀에겐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깔린 채로 말했다.

“잘 그려.”

 

그녀가 눈물을 감추려고 나를 와락 껴안았다. 마차 건너편에서 거리 공연의 연주가 땅거죽을 울렸다. 아소토 유니온의 ‘Think About' Chu’가 누워 있는 등을 타고 들어와 그녀와 나의 심장을 두드렸다.

 

며칠 후, 그녀가 떡볶이를 먹으며 나에게 이상한 말을 했다.

‘백 년만 기다려 오빠. 풉! 놀래긴, 낼모레 봐요.’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떠난 그날 이후, 그녀는 두 번 다시 마차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졌다. 할머니처럼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마차에 서서 오지 않는 할머니를 가슴에 묻은 채 그녀를 기다렸다. 어느덧 나는 손님들에게 불평을 듣고 있었다. 이렇게 맛없는 떡볶이는 처음이라는 말도, 묻는 말에 대꾸 하나 없는 불친절한 아저씨라는 말도 다 맞는 말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단발의 파마머리 여고생과 담배를 입에 문 남학생이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었다. H였다! 나도 모르게 거칠게 남학생을 밀치고는 그녀를 돌이켜 세웠다.

“뭐, 뭐야, 이 아저씨?”

낯선 여학생이 식겁한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여학생에게 돌아서는데,

“야, 이 X새끼야!” 하며 넘어진 남학생이 주먹을 휘둘렀다. 남학생의 주먹은 시원치 않았다. 나는 좀 더 세게 얻어맞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에게 말했다.

“뭐야, 이게 다야?”

 

남학생의 눈이 돌아갔다. 나는 흠씬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갈증이 나고 허기가 졌다.

“좀 더, 더 세게 치라고!”

남학생이 지친 숨을 헐떡이며 질렸다는 표정으로,

“이, 이 새끼 완전 돌았어.”

나는 주춤주춤 물러서는 그를 붙잡고는,

“좀 더 세게 치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남학생이 겁에 질려 허둥지둥 뒷걸음치다가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졌다. 그가 일어나지 않는 자리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학생이 나를 가리키며 뭐라고 악을 썼다. 내 몰골에 사람들이 거리를 두며 나를 에워쌌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여학생이 소리쳤다.

“저 사람이 죽였어요!”

 

 

 

11

 

 

 

삼 년의 세월이 흘렀다. 감옥에서는 누굴 기다리지 않아서 좋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 도착했다. 잠시도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갇혀 있을 때보다 숨쉬기가 어려웠다. 거리를 나섰다. 비가 내렸다.

 

어느새 나는 신발을 벗고 난간 위에 올라섰다. 빗길을 치는 바퀴 소리는 한 번 멈추어 서는 일 없이 매끄럽기만 했다.

 

“안녕하시오? 그렇군요, 딱 좋은 날씨요.”

갑작스러운 인사에 놀란 나는 하마터면 강물에 빠질 뻔했다.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다리에 매달린 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고는 곧 내가 벗어놓은 신발을 옆구리에 끼고 내 곁을 지나쳤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리 위로 오르며 고양이를 불러 세웠다.

“야! 죽을 뻔했잖아!”

그러자 고양이는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선생, 죽으려고 했으면서 죽을 뻔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맞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어쨌거나 이 고양이, 하는 말이 무척이나 괘씸하지 않은가… 나는 얼버무리며 얼른 신발 이야기를 꺼냈다.

“그, 그보다 너, 남의 신발을 맘대로 가져가도 되는 거냐?”

고양이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곧 죽을 사람이 신발 타령이라니… 뭐, 알겠소.”

도대체 뭘 알겠다는 거지? 멀뚱멀뚱 서 있는 나를 잠깐 지켜보던 고양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오? 안 뛰어내릴 거요?”

 

멍했다. 나는 어쩌다가 이런 인정머리 없는 고양이를 만나 죽음을 강요당하는 신세가 된 걸까… 내가 죽겠다고 하다가도 남이 죽으라고 하면 서글픈 법이구나 하며, 망연자실 서 있는 나를 보고 고양이가 말했다.

 

“이봐요, 인제 와서 신발을 달라고 하면 나는 이대로 내달려 어쩔 수 없이 도둑고양이가 될 수밖에 없다고요. 선생은 지금 없던 문제를 새로 만들고 있어요. 이미 버린 물건을 주웠다는 이유로 죄 없는 나를 도둑으로 몰고 있단 말입니다. 선생, 선생은 선생의 마지막 시간까지도 지긋지긋한 일상의 시비에 내던지고 있군요. 지금 선생의 처지에서 신발이 더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를 잡기가 그리 쉽진 않을 거요. 선생은 이제 맨발이고, 나처럼 맨발로 뛰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오. 어쩌다가 나를 잡는다고 해도 더 어려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지요. 나는 마음만 먹으면 선생 마음쯤은 식은 쥐 먹듯 사로잡을 수 있어요. 어쩌면 나는 나의 목덜미를 잡은 선생 손에 뺨을 비비며 망설일 겁니다. 이대로 떠돌이 생활을 접고 홀로 외로운 선생 품에 안겨 집고양이가 될까, 아주 잠깐 마음이 약해져 생각해 볼 겁니다.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집밥이란 것이 불현듯 그리워지기 마련이니까요.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보다 입이 까다롭습니다. 이 몸은 츄르라는 것도 알고, 캣타워에 발톱 자국을 내 본 적도 있지요.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과 헤어지기 전까지는 나름 대접받고 살았어요. 그야말로 스스로 그루밍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뭐, 어쨌든 선생 벌이로는 어림도 없는 것들이지만… 선생, 벌써부터 나의 집사가 되겠다는, 그런 눈빛은 사절이오. 선생을 위해 하는 말입니다. 나의 음식값에 곧 등골이 빠지고 말 거요. 아까도 말했지만, 입맛이 까다로워 유기농 제품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뭐, 이러쿵저러쿵해도 선생은 선생 몸 하나 추스르기도 어려워 보이니… 자, 아무튼 답은 이미 처음부터 나와 있었습니다. 어서 하려던 거, 마저 하십시다.”

 

밉살스럽게 지껄이는 말과는 달리, 고양이는 어느새 내 젖은 발밑에서 엎치락뒤치락 배를 보이며 뒹굴었다.

 

나는 바짝 야윈 고양이의 배를 내려다보려고 난간 위에 올라섰던 것은 아니었다. 흠, 일단 젖은 몸을 말리자고 하며 고양이를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 문득, 비 비린내를 뚫고 소금기 어린 말이 나에게 들려왔다.

‘당신을 믿어, 내게 다가와…’

 

 

 

12

 

 

 

무언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에 책상 위에 엎어져 있던 나는 눈을 비비며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양이였다. 고양이가 어떻게 쪽방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거 참, 곤란하군, 나도 먹을 것이 없는데… 하지만 곧 나는 나나 굶지 않으면 된다는 걸 알았다. 고양이는 내가 글을 쓰다 버린 종이를 먹었는데, 그것으로 충분했다. 고양이가 종이를 먹을 때마다 쥐의 비명이 들렸다.

 

고양이를 굶기려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하얀 지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글자 없는 공백에서 꿈꾸는 종이가 나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또다시 기다리지 못하고 글을 썼다. 내 글은 그러므로 언제나 후회의 폭주. 그녀가 나를 찾지 못하는 방으로 도망쳤다. 그 방에도 그녀가 벽으로 서 있었다. 서로 알아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둘 다 쫓고 쫓기느라 만신창이였으니까. 나는 여전히 남아있고 그녀는 지금도 무한히 사라지고 있다. 난 어린애처럼 그녀의 조각난 허물을 줍는다. 찬란한 파편들. 이 지지부진한 넝마를 걸치고 난 또다시 그녀에게서 달아난다. 그녀를 쫓는다.

 

이런 모순은 꿈꾸는 종이가 만드는 것인가… 종이에 글을 입히는 내가 만드는 것인가… 책 끝 마지막 문장은 언제나 새로운 나락의 시작이었다. 나는 다시 시작되는 사막같은 나락에 떨어진 갈라진 혀. 말라버린 내 눈에 눈이라도 내렸으면…

 

 

 

13

 

 

 

곧 떨어진다. 극으로 가는 아이들은 행복하기만 하다. 만년설이 되는 건 모두의 꿈이다. 만년설로 향하는 기차는 오래전에 떠났다. 나는 어디에 떨어질까? 떨어지면 얼마나 살까? 춥고 높은 산으로 가는 바람 열차도 이미 떠났다. 나락으로 가는 바람만 남았다.

 

나락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사람은 온기가 있다. 온기는 우리를 녹인다. 사람의 온기는 곧 죽음. 꼭 피해야 하는 것.

 

아버지는 1초 만에 사라졌다. 아버지의 보고서에는 짧게 한 문장만 적혀 있다.

‘따뜻합니다.’

따뜻합니다 라니…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간 아버지.

 

아버지가 떨어졌던 날은 바람이 많았다고 한다. 충분히 다른 바람을 타고 온기를 피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대로 사람의 눈 속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사람의 눈은 마주치면 안 되는 함정이다. 겉은 촉촉해 보여도 그 속은 끓는 나락이다.

 

마지막 바람 열차가 말했다.

“망설여도 어쩔 수 없어. 어차피 떨어져.”

맞는 말이다. 어차피 떨어진다. 마지막 바람을 탔다.

 

‘하늘이란 게 이렇게 아름답구나!’

나는 떨어지며 하늘을 만끽했다. 갑자기 내던져졌어도 거기에 하늘이 있었다. 떨어지는 것에는 하늘이 함께 했다. 나락이 보인다. 온기가 느껴진다. 사람을 피해야 한다. 나와 같이 떨어지던 눈들은 재빨리 다른 바람으로 갈아타며 온기가 없는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저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나를 보고 바람이 말했다.

“언제까지 떠돌기만 할 거야?”

 

바람이 나를 태우고 사람들 사이를 아슬아슬 날았다. 어떤 눈이 혀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녹았다. 덧없다. 역시 온기는 위험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사람을 마주한 눈들은 모두 그 온기에 끌려갔다. 손바닥에서 녹고, 뺨에서 녹고, 이마에서 녹았다.

 

사람의 눈을 피해 고개를 가슴 깊이 파묻은, 온기를 잃은 등이 보였다. 안성맞춤이었다. 그의 등에 떨어졌다. 곧 문제가 생겼다. 그의 어깨 너머로 온기 가득한 액체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36.5 도의 씁쓸한 액체. 너무나 구구절절해서 금방이라도 그 갈피 없는 물세례에 맞아 녹을 순간이었다.

 

친구들이 날아와 나를 꽉 붙들었다. 나는 제법 단단한 눈덩이가 되었다.

“고마워!”

“별로 인사받을 건 아닌데. 운이 없어 이리로 떠밀렸고, 너에게 붙은 건 네 위치가 그나마 좋아서. 뭐, 우리도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단 말이지.”

참 무뚝뚝한 거짓말이었다.

 

온기 없는 등은 나락을 빠져나와 또 다른 나락으로 향했다. 이 사람 돌아갈 집이 없나…

 

무뚝뚝한 친구가 말했다.

“바람이 세지고 있어. 기회야! 어서 갈아타자고!”

나는 망설였다.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따뜻합니다.’

 

“야, 뭐해? 계속 그렇게 붙어 있을 거야?”

“어? 응… 미안해. 난 여기 남아 있을게.”

친구들이 바람을 타고 온기 없는 등을 떠났다. 무뚝뚝한 친구만을 남겨두고.

 

“왜 안 가고…?”

나의 물음에 무뚝뚝한 친구는 늦었다고 했다. 내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고 했다. 그와 나는 어느새 서로의 결정이 얽혀 있었다. 결정이 얽히면 마음이 얽힌다.

“너 온기가 궁금한 거냐?”

친구가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에게도 얽힌 친구의 마음이 보였다.

‘사람의 온기에 잘만 녹으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단다.’

친구의 마음에도 그의 아버지가 남긴 말이 담겨 있었다.

 

친구와 내가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고 있을 때였다. 온기 없는 등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위험해, 입김이야!”

 

다행히 숨은 차가웠다. 우리가 내려앉은 등은 점점 싸늘해졌다. 눈이 무릎 꿇은 등에 소복이 쌓여 갔다.

 

온기 없는 등이 차가운 땅 위에 엎어졌다.

‘이 사람, 이러다 죽겠어…’

 

스스로 엎어진 사람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나는 반쯤 얼어붙은 그의 눈물에 다가갔다. 그 눈물의 결정에 나의 결정을 얽었다. 친구가 내 곁에 꼭 붙어 주었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도 외롭고 괴로웠다. 뭐라고 위로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이해되지 않는 아버지의 말밖에는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따뜻합니다.’

 

말없이 다만 그의 마른 눈을 나로 감싸 안았다. 온기 없는 사람의 눈에서 따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녹기 시작했다. 같이 녹아내리던 친구가 말했다.

“아버지는 만년설을 떠나 사람이 사는 나락으로 내려가셨어. 나락에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란 것이 찾아온대. 봄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하셨어.”

 

나도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다. 사람에게는 몇 번의 겨울과 몇 번의 봄이 있다고, 겨울이 봄보다 길고 때로는 봄이 생략되어도, 또한 마지막이 봄은 아니더라도, 사람은 언제나 온기를 품고 있다고, 그런 온기를 감싸 안으면 봄이란 걸 볼 수 있다고 했다.

 

아직까지 눈의 보고서에서 봄을 보았다는 기록은 없다. 안타깝게도 봄이란 걸 보지 못하고 사라질 운명이 확실했지만, 우리는 지금 그의 눈 속에서 따뜻하다…

 

 

 

14

 

 

 

벤치에 누워 있던 나는 갑자기 영문 모를 눈물을 흘렸다.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딸아이와 눈을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빠, 눈은 왜 녹아?’

‘글쎄… 눈이 녹아야 봄이 오지 않을까?’

‘그럼 눈은 봄을 못 봐?’

‘그렇겠지…’

아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나에게 말했다.

‘나, 내 눈에 눈 넣을래!’

‘…?’

‘눈이 봄을 볼 수 있도록 말이야. 이렇게!’

그렇게 말하고선 아이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때의 아이처럼 나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눈이 내 눈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린 눈을 깜빡였다. 눈이 내 눈 속에 빠졌다. 나는 또다시 시린 눈을 깜빡였다. 점점 가슴이 시려왔다. 마지막에 아이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갑자기 ‘애플파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어리둥절했다. 애플파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떡볶이 마차가 보였다. 나는 마차로 다가가 마차의 주인에게 혹시 무슨 소리 못 들었냐고 묻다가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마차의 주인은 두건을 두른 고양이였다. 그가 말했다.

 

“애플파이 말씀이시군요. 애플파이는 애플과 파이로 나누어 볼 수 있지요. 애플은 금단의 열매, 즉 욕망의 실체를 말합니다. 파이는 원, 바퀴를 의미하지요. 끝없이 도는 욕망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아를 일깨우는 그 어떤 외침, 바로 그게 애플파이입니다. 외침이었다면, 끝난 게 아닙니다. 시작이지요. 이제부터는 애플파이라고 외친 목소리의 출처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목소리는 동굴에서 나왔소? 아니면 거울이었소? 남자의 목소리였나요, 여자? 아니면 아이? 그것도 아니면 늑대였나요? 아이였다면 아이가 빨간 망토를 썼었나요? 늑대였다면 늑대의 손은 밀가루로 하얬었나요? (…) 벌써 시간이 다 되었군요. 다음에 조금 더 담화하기로 하고, 두 번째 방문하실 때 이번 상담료도 같이…”

 

나는 돈 얘기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마차에서 달아나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골목길로 숨어든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눈 내린 골목길에 바퀴 자국이 두 줄로 길게 뻗어 있었다. 바퀴 자국이 끝난 곳에 어느새 떡볶이 마차가 서 있었고, 아까 그 고양이가 마차의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그가 지붕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애플파이. 애플은 떨어집니다. 정확히는, 사과와 지구가 서로 당기는 것이지요. 만유인력의 법칙을 적용하면 될 것이고, 파이는 당연히 원주율일 것이니, 애플파이의 무게와 지름, 떨어져 내린 거리를 알면 애플파이의 ‘값’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의 ‘값’이라는 말에서 미묘한 강세가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그것은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선물이었을 거라고 넌지시 말하자, 고양이는 단호하게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며 다음번에 올 때는 애플파이에 대한 수치와 함께 수업료를 잊지 말라고 했다.

 

나는 상담비를 먼저 마련해야 할지 수업료가 먼저인지를 고민하며 눈 내리는 거리를 정처 없이 걷다가, 한 아이를 만났다. 곱슬머리의 아이 얼굴이 낯설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물었다.

 

“얘, 너 애플파이가 뭔지 아니?”

“네? 뭐라고요?”

“애. 플. 파. 이!”

“아, 아빠 빠이!”

“어? 어, 그래, 그렇구나. 아빠 빠이…”

 

아이와 헤어지며 애플파이를 약속했던 기억이 났다. 그제야 지금 내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동네를 열 바퀴쯤 도는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수중에는 애플파이가 없었다. 내일이란 문턱에는 언제나 먼저 값을 치러야 할 것들이 들어차 있었으므로, 애플파이는 나에게 영원한 아빠 빠이였다.

 

아까 보았던 아이가 슬쩍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늦었어요. 그만 들어가요.”

아이에겐 너무 찬 손이라 슬며시 뿌리치려 했지만, 아이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갑자기 몰아치는 눈보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깜빡하고 아이의 손을 놓쳤다. 누군가가 아이의 손을 잡고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눈 폭풍 속으로 사라지며 말했다.

“당신을 믿어, 기다리고 있을게.”

 

아이의 손을 놓친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눈이 무릎 꿇은 등에 소복이 쌓였다. 등이 점점 싸늘해졌다. 마침내 나는 차가운 땅 위에 엎어졌다. 누군가 속삭였다.

‘이 사람, 이러다 죽겠어…’

 

 

 

15

 

 

 

엎어져 있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가 느긋하게 배를 보이며 방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책상 위 공백의 종이 앞에 앉았다. 또다시 무언가에 쫓기며 정신없이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글을 쓰다가 꿈에서 깨고 나면 언제나 전보다 더 큰 허기가 찾아왔다.

‘잠들기 전에 공백을 채워야 해, 잠들기 전에…’

 

지면이 부족했다. 어느새 나는 쪽방의 사방 벽에, 바닥과 천장에 빼곡히 글을 남겼다. 더는 채울 면이 없게 되자, 쪽방의 허공에 대고 글을 썼다. 쪽방은 글자 사이와 문단 사이를 빼고 글자들로 가득 찼다. 여전히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남은 글자 사이와 문단 사이에도 글을 채웠다. 하지만 채운 글자 사이에 새로운 공백이 생겼다. 글자를 쓸수록 글자 사이가 무한으로 늘어났다. 공백을 메꿀수록 더 큰 공백이 드러났다.

 

쪽방을 채울 수 없었다. 쪽방에서 나올 수 없었다. 1번 방에서 천 년을 보내도 쪽방을 채울 수 없다는 걸, 나올 수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텍스트 코마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나는 나에게 돌아올 수 없었다. 나는 글을 채우는 동안에도 한결같이 꿈속에 갇혀 있었고, 꿈에서 깨어났을지라도 여전히 종이의 공백 안에 묻혀 있었다.

 

홍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자각몽의 이중 구속에 빠져 있습니다…’

 

다시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자면 안 돼! 깨어 있으라, 나여. 각성하라!

 

마침내 나는 쪽방 문을 박찼다.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글자가 문을 부술 듯 밖으로 쏟아졌다. 문밖은 글자로 어두웠다. 글자를 헤쳤다. 다시 쪽방이었다. 다시 문을 박차고 나갔다. 여전히 쪽방이었다. 문이 문으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는, 닥치는 대로 부수며 나갔다. 벽을 뚫고, 천장을 무너뜨리고, 바닥을 뜯어냈다.

 

어느새 이 방 너머 저 방 천장을 거꾸로 걷는 내가 있었고, 동시에 저 방 아래 벽을 수직으로 걷는 내가 있었으며, 동시에 옆 방의 바닥을 사이에 두고 위아래로 엇갈리는 내가 있었다. 에셔의 ‘Relativity’.

 

떼를 지은 먹잇감을 향해 기세 좋게 좌충우돌하던 맹수가 갈 길을 잃고 사냥꾼의 그물에 몰려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쪽방의 ‘Relativity’에 지친 나는 우뚝 멈추어 섰다.

 

나는 무슨 이유로 그렇게 홀로 쪽방에 앉아 글을 썼던 것일까? 지금 나를 흔들어 깨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녀와 모두 헤어졌다. 쪽방을 나선 그녀와 헤어졌고, 옥탑방의 그녀와 헤어졌고, 미로의 그녀와 헤어졌고, 마차의 그녀와 헤어졌고, 내 차가운 손을 놓지 않았던 그녀와 헤어졌다.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빈 공백에 새로 등장할 그녀와 계속해서 헤어질 것이다.

 

헤어져 공백을 만들고 만나 공백을 채우는 글쓰기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 왜 화살은 끝내 과녁에 도달하지 못하는 걸까. 왜 거울 너머의 나는 소실점 없는 수평선 끝에 서서, 마주 선 나에게 뒤돌아 서 있는가. 왜 나는 한 번 꼬아 붙인 띠를 끝없이 배회하는가.

 

“그건 선생이 지금껏 너무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지. 지금은, 선생이 나갈 염치가 없다고 하는 염치가 생겼기 때문이고.”

어느새 따라온 고양이가 말했다. 그의 말이 내 마음의 정곡을 파고들었다.

‘염치…’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고양이가 말했다.

“그렇소, 염치의 이중 구속이오.”

 

나는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았다. 내가 글을 쓴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골방에 틀어박혀 있었을 때, 그녀는 내게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었다. 고된 공장 일을 마치고 돌아와, 부업으로 들고 온, 낮에 지긋지긋하게 보았을 인형들에 눈을 붙이던 그녀. 아이가 혼자 라면을 끓이다 손을 데었을 때, 부리나케 달려온 그녀에게, 다 그러면서 크는 거라고 한마디 남겨 놓고 도로 골방으로 들어갔던 나. 집세에 밀리고 밀려 이사를 밥 먹듯 할 때마다, 끄적거리던 이야기의 있을 리 없는 마감일을 들추면서, 그녀와 아이를 내버려 두고 이사가 끝날 때까지 도서관에 처박혔던 나. 단칸방 구하기도 힘든 형편에 이르렀을 때도,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쓸 방이 따로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나에게, 조용히 결혼반지며 돌 반지 등을 전당포에 맡겼던 그녀. 일일이 셀 수도 없이, 그토록 그녀에게 염치없는 짓을 일삼았던 나.

 

내가 염치없는 놈이란 건 누구보다 더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잊기 위해 나는 더욱더 글 속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곧 글도 내가 어떤 놈인지 알아차렸다. 더는 나를 반기지 않았다. 글이 나와 상대해주지 않자,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글을 썼다. 하늘을 나는 꿈도 아니고, 달콤한 연애의 꿈도 아니고, 세상을 정복하는 꿈도 아닌, 고작 ‘글 쓰는 기계가 된 나’가 전부인 꿈.

 

나는 꿈속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자신을 기만하고 있었다. 쪽방에 똬리를 튼 가짜 명분이 나를 질식시켜 혼수상태에 빠지도록,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을 뿐이었다. 잠이 오면 잠을 자고, 자다가 꿈을 꾸고. 어쩌다 꿈속에서 글을 썼다고 해도, 꿈을 깨고 나면 사라져 버리는 글을 베개 삼아 누워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쪽방에 누워, 바닥이 보이면 바닥에 누웠다가, 벽이 보이면 벽에 누웠다가, 천장에 누웠다가… 어느새 그렇게 나는 쪽방이 되었다. 쪽방이 어떻게 쪽방에서 나올 수 있을까…

 

나는 마침내 지쳐 쓰러졌다. 바닥에 엎드린 채 방 밖으로의 탈출을 포기했다. 또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탈출이 아니고 탈피야…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너를 벗어. 너를 벗어나.

 

나비가 방바닥에 내려앉으며 속삭였다. 다시 보니 그것은 찢어진 종잇조각이었다. 바닥에 귀를 묻고 한동안 떨어진 종잇조각을 바라보고 있는데, 바닥 저 아래, 나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염치가 없었다면 끝까지 없어야 하지요…

만약 늙은 참나무에 노란 리본이 단 한 개도 묶여 있지 않다면, 당신은 그냥 버스 안에 머물 건가요? 버스에 실려 멀리 도망칠 건가요? 쪽방에 갇혀 쪽방으로 남아 있을 건가요? 쪽방 밖으로부터 영원히 달아날 건가요? 염치없이 내리세요. 염치없이 쪽방에서 나오세요. 그것이 당신에게 남은 마지막 염치입니다.

 

쪽방 너머로 그녀가 들린다. 아이가 들린다. 나는 더는 벽을 쓸지 않고, 아무도 못 보는 벽의 구석에 숨지 않고, 염치없이 문으로 걸어갔다. 천천히 문을 열었다. 하늘 가닿은 옥탑방의 창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을 맞으며 아이와 엄마가 정답게 얘기하고 있다. 내 작은 집, 스위트 홈…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가 나를 어색하게 쳐다보았다. 다가가 아이를 안았다. 품 안의 아이가 쭈뼛거렸다. 알아, 아빠가 염치없게 너를 안고 있다는 거. 그래도 놓아주진 않을 거야. 염치없는 아빠잖니. 아빠에게 시간을 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여보…”

“오래도 기다리게 하네… 당신, 정말 안심할 수 없다니까… 어휴, 냄새. 어서 씻고 와. 김치찌개 끓여 놓을게.”

 

그녀가 오랜만에 내가 알던, 그 어떤 멋진 여름날보다, 어떤 포근한 겨울의 눈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그만 부엌,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I'll Be Your Mirror’의 가락에 실려, 옥탑방이 구름 위로 둥실 떠 올랐다.

 

염치없는 나지만, 내겐 아직 시간이 있다.

염치없는 내게도, 글보다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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