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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의견설화

2022.01.25 17:4301.25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경찰이 초인종을 눌렀다. 여자는 철제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다른 경우라면 절대 침범해서는 안 될 그들만의 사적인 공간. 하지만 지금은 예외다. 우리도 선을 넘고 싶지 않아. 그런데 왜 네 아이를 때렸니?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경찰이 두 번째로 초인종을 눌렀다. 정적이 흘렀다.

경찰이 여자의 눈을 살폈다.

‘문을 딸까요?’

‘네. 그럼요. 아동학대 현행범입니다. 국가가 당신에게 부여한 권한을 행사하세요.’

여자가 눈으로 말했다.

경찰은 쇠지렛대를 들었다.

빠직.

경찰의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아기 엄마는 문 앞에 엉거주춤 서있었다. 열아홉 살. 누군가의 엄마가 되기에는 그 스스로가 아직 어린아이였다. 핏기 없는 얼굴, 충혈된 작은 눈, 헝클어진 숱 없는 머리. 사람 돌게 하는 도난 경보기 소리에 귀를 막고 서 있었다. 뭉크의 ‘절규’. 딱 그 표정.

“안에 있으면서 왜 문을 안 열었어요? 이거 문 다시 하려면 돈이 제법 들 텐데...”

경찰은 경보기를 찾아 끄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동복지 전담 공무원인 여자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너희들이 그렇게 신뢰하는 카스펫(Child Abuse Surveillance pet, 아동학대 감시용 반려동물 로봇)이 오작동한 것이라면 남의 집 문을 함부로 딴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너희 아동복지센터 책임이다.’

경찰이 내뱉는 말에는 그 뜻이 숨어 있었다.

‘경찰 나리. 걱정도 팔자네.’

여자는 속말을 삼켰다. 카스펫의 오작동 비율은 만 건 중 세 건이다. 평소에는 영락없는 강아지나 고양이였다가 아동학대 징후가 감지되면 실시간으로 경찰서와 아동복지센터에 알람을 전송하는 카스펫. 합계출산율 0.3명, 세 명의 가임기 여성이 한 명의 아이를 낳는 저출산 시대. 태어난 아이를 단 하나라도 잃지 않겠다는 국민적 염원의 결과물이다. 실제로 고위험 가정에 카스펫이 보급된 이후, 아동학대 치사 사망자 수가 연간 서른여섯 명에서 연간 네 명으로 극적으로 줄었다.

“하윤이 어디 있어요?”

아기 엄마에게 여자가 물었다. 아기 엄마는 겁에 질린 눈으로 집에 있는 유일한 방을 가리켰다.

“때린 거 아니에요. 놀다가 넘어진 거예요.”

하윤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하윤이의 상처를 보면 알 일이다.

모니터링 대상 아동, 오하윤. 생후 18개월. 엄마, 오미정. 만 19세. 무직. 미혼모. 임신 초기 산부인과 진료에서 낙태를 희망. 여성가족부에 접수되어 국가 차원의 출산 장려금 제시 등, 출산을 격려. 아니 종용. 출산 후 위탁 양육 권유받았으나 본인이 거절. 현재 미혼모 출산 장려 프로그램에 따른 국가 지원 양육비로 생계유지.

여자는 집중 관리 대상 폴더에서 본 아이에 대한 자료를 떠올렸다. 저출산으로 인한 국가 소멸을 앞에 두고 어떻게든 아이를 낳게 하려는 국가와 준비되지 않은 채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버린 또 다른 어린아이. 아동복지센터가 자주 만나게 되는 전형적인 사례다.

아이는 누비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공룡들이 그려져 있는 어린이용 누비 이불. 스테고사우루스, 티라노사우루스, 브라키오사우루스. 어린 엄마가 골라줬겠구나. 아니면 어딘가에서 얻었던가. 그런데 세탁한지가 오래되었는지 땟국물과 얼룩투성이네. 아이가 숨을 쉴 때마다 귀여운 스테고사우루스가 덩달아 움직였다. 죽은 건 아니구나. 죽었을 리 없지만 여자는 새삼 안도했다.

아이 옆에는 비글 강아지 한 마리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펄럭대는 쳐진 귀는 금방이라도 펄럭거리며 몸을 날아오르게 할 만큼 큼직했다. 보석을 박아놓은 듯한 갈색 눈의 눈매는 다른 개들과는 달리 살짝 올라가있었다. 코에는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흐르고 입은 앙 다물고 있었다. 갈색, 흰색, 검은색이 잘 조합된 털에서도 윤기가 흘렀다. 토끼 사냥을 마치고 주인의 칭찬 한마디를 기다리는 진짜 비글처럼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우뚱한 채 낯선 방문객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했어. 카스펫. 네가 모니터링 알람을 보내지 않았다면 아기는 더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지 모르지. 하지만 칭찬은 조금 이따 마저 해줄게.

여자는 이불을 살짝 들쳤다.

아이는 깨어 있었다. 사내아이처럼 비죽비죽 자란 머리칼. 발그레하게 오른 볼 살. 귀염살이 붙은 코, 예쁘게 붉은 입술. 눈가에 번진 눈물 자국만 아니라면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평범한 아기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겁에 질려 여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무서워서, 숨기 위해서 이불을 얼굴까지 덮어쓰고 있었을 것이리라.

“괜찮아.”

아이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말했다.

“괜찮아.”

여자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좀 더 들췄다. 그리고 아이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 아이가 작은 손으로 여자의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나도 그랬어. 여자가 마음속으로 말했다. 무서워서 나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어. 잠들지 않았지만 잠든 척했지. 아빠는 엄마를 때렸고, 난 맞지 않으려고 이불 속에 숨어 있었어. 지금 울면 나도 맞는다. 그 생각 뿐이었어. 난 울음을 참았지. 두 돌 때 기억이 어쩌면 이렇게 생생할까?

아가야. 넌 오늘을 잊으렴. 네가 크면 오늘 일이 떠오르지 않으면 좋겠구나.

아이의 팔뚝에서 시퍼런 멍 자국이 보였다.

“어머니. 죄송하지만 하윤이 몸 좀 보여주시겠어요?”

생각 같아서는 여자가 직접 하윤이의 몸을 살피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는 매뉴얼에 따라 친모에게 도움을 구했다.

아이 엄마는 마지못해 아이의 잠옷을 벗겼다.

팔뚝에 멍, 종아리에 멍, 허벅지에 멍, 그리고 찰과상.

여자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매뉴얼대로 하는 거야. 매뉴얼대로.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속옷도요.”

아이의 속옷을 벗기는 아이 엄마의 손이 떨렸다. 엄마의 손이 서투르자 아이는 스스로 움직여 옷 벗기는 것을 도왔다. 아이 스스로 피해 사실을 증언하려는 듯.

엉덩이에도, 등에도, 어깨에도 모두 멍, 그리고 찰과상.

“잘못했어요. 흑흑흑”

아이 엄마는 고개를 조아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여자는 아이 엄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방 안에 냉기가 있는데 발가벗고 있는 하윤이가 안쓰러웠을 뿐이다. 여자는 매뉴얼을 어기고 하윤이의 옷들을 주워 주섬주섬 입혔다. 그리고 누비 이불을 끌어당겨서 아이의 작은 몸에 두른 후, 품에 안았다.

“괜찮아. 하윤아. 괜찮아.”

으앙~~

제 엄마가 우는 것을 보고 아이도 울음이 터졌다.

멍~멍~

울지 말라고 말하려는 걸까? 비글 강아지가 여자와 아이 사이를 파고 들어와 아이에게 제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이는 비글을 안고 울었다.

“스누피. 스누피.”

아이가 비글의 이름을 불렀다. 강아지 이름이 스누피구나. 비글은 연신 아이의 표정을 살피며 따뜻한 제 몸을 아이 품에 비벼댔다. 괜찮아. 괜찮아. 이젠 안전해. 스누피가 하윤이에게 눈으로 말했다.

“오미정 씨. 귀하를 현 시각 부로 아동학대 혐의로 체포합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변명의 기회가 있고,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으며, 체포적부심을 법원에 신청할 수 있습니다.”

경찰이 아이 엄마를 연행했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하윤이는 우리 아동복지센터에서 돌볼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자가 덧붙였다.

아이 엄마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미정 씨가 때린 게 아니죠?”

여자가 물었다.

아기 엄마는 여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연신 땅바닥의 흙을 쓸어대는 자기 발만 바라보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기 엄마는 포대기로 하윤이를 업고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었다. 11월 들어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져서 여자는 엄마 등에 업혀 있는 하윤이가 코를 훌쩍 거리는 것이 영 마음에 쓰였다. 하지만 달리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혹시 함께 사는 다른 분이 계신 것 아니에요? 경찰관이 남자용품들을 봤다고 하던데...”

여자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아니에요. 가끔 제 아빠가 도와주러 오시거든요. 아빠가 놓고 가신 거예요.”

미정이 말했다.

“아빠. 아빠.”

엄마 등에 업힌 하윤이가 말했다.

“아빠? 하윤아. 집에 아빠 계시니?”

여자가 또 선을 넘었다.

“응. 아빠. 아빠”

아기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방금 제가 제 아빠 얘기하니까 애가 따라 한 거잖아요. 왜 자꾸 절 못살게 구세요? 제가 아기 때린 건 잘못했는데요. 저 초범이라서 금방 풀려났고 센터에서도 분리 조치까진 필요 없다고 해서 아기 데리고 지금 잘 있잖아요. 자꾸 이러시면 사생활 침해로 신고할 거예요.”

아기 엄마가 벌컥 화를 냈다.

하윤이는 또래에 비해 말이 늦은 편이었다. 하윤 엄마가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동안, 여자는 하윤이로부터 증언을 들어보고자 했지만 하윤이와는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았다. 학대 상흔은 맞지만 치명상은 아니라는 의료진의 진술, 스트레스 때문에 자기가 때린 게 맞지만 유일한 양육자인 자신이 반성하고 있으며, 잘 키우겠다는 아기 엄마의 말이 믿을만하다는 경찰 조사 결과, 그리고 예산 문제로 일 년에 한 번 겨우 열리는 아동복지심의위원회를 기다릴 수 없어 팀장 직권으로 내려진 원 가정 복귀 결정. 추가 조사가 이뤄질 때까지 분리 조치가 필요하다는 담당 공무원의 의견은 이렇게 묵살되었다.

“아기 엄마한테는 국가 지급 양육비가 꼭 필요할 거야. 어차피 아기 엄마도 오갈 데 없는 열아홉 살짜리 어린애잖아. 아마 더 심하게 때리지는 못할 거니까 이제 집으로 돌려보내야 해. 여차하면 카스펫이 또 알려줄 거 아냐. 강아지 이름이 스누피라고 했던가? 스누피한테 맡겨놓자고.”

팀장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행정직 출신인데 회전문 인사로 아동복지전담팀 팀장을 맡게 된 사내였다. 한심한 놈. 네가 아동복지에 대해 뭘 안다고.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없는 놈이. 여자의 가슴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여자는 또 한 번 선을 넘기로 했다. 여자는 덥석 아기 엄마의 손을 잡았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오미정의 손에도 멍이 있었다. 이 멍은 왜 생겼을까?

“미정 씨. 미정 씨를 돕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왜요? 왜 나 같은 걸 돕고 싶은데요?”

미정이 물었다. 둘이 만난 뒤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갈색의 깊은 눈. 처음 마주쳤을 때는 왜 몰랐을까? 아름답고 깊은 눈이다.

“나도 같은 일을 당했어요. 우리 엄마도요. 돕고 싶어요.”

미정의 눈이 더 깊어졌다. 미정은 비로소 여자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 미정은 그만 정신을 차렸다.

“아기 감기 걸리겠어요. 저 이만 가볼게요.”

오미정은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여자는 멀어져 가는 아기 엄마와 등에 업힌 아기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기 엄마가 너무 서둘러 걷는 바람에 대충 둘러맨 포대기 안에 있는 아기가 떨어질세라 위태로워 보였다. 여자는 달려가서 바로잡아주고 싶어 벌떡 일어났지만 차마 따라가지 못했다.

 

 

여자는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따라 굽이굽이 깜깜한 산길을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할머니, 나 다리 아파. 좀 천천히 가면 안 돼?

삐비비빅. 삐비비빅.

여자의 스마트워치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새벽 두 시 사십 분.

아동학대 의심 정황 발생. 경기도 ○○시 □□구 △△3길 256.

하윤이 집이다.

여자는 벌떡 일어나 집을 나섰다.

“경사님. 경찰서에도 접수되었죠? 저 지금 하윤이네로 가고 있어요.”

여자는 차를 몰며 경찰에 연락했다.

“아이고. 이거 어쩌죠? 지금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해서 우리 서 근무자들이 전부 현장에 출동해있어요. 하여튼 내가 다른 인력이라도 현장 출동시킬 테니 먼저 좀 가 계세요.”

타다다닥.

여자가 5층 빌라의 계단을 뛰어오르는 동안, 낡은 빌라의 계단실은 아기 우는소리, 퍽퍽하는 파열음, 컹컹 개 짖는 소리, 그리고 아이 엄마의 악쓰는 울음소리가 한데 뒤엉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연신, “오빠, 하지 마! 하지 말라고!”라고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소음이라면 누군가 나와보기라도 하련만, 재개발을 앞두고 대다수의 주민이 이주해나간 다 쓰러져가는 빌라에는 사는 사람도 없는 듯했다.

여자는 토악질이 나올 만큼 숨이 찼지만 5층 꼭대기에 단숨에 도착했다. 문 앞에 도착하니 비로소 숨만 씩씩대며 짐승처럼 아이를 사냥하고 있는 악마가 사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헙! 크헙!” 지옥에서나 들릴 법한 기괴한 목소리를 토하며 사내는 아기를 때리고 있었다. 으앙. 아기 울음소리. 컹컹. 개 짖는 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매뉴얼 따위, 개나 주라지. 여자가 초인종을 눌렀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초인종 소리에 갑자기 파열음이 멈췄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기의 울음소리도 그치지 않았고, 집 안에서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초인종 소리 때문에 폭행은 멈춘 것 같았다. 적어도 시선을 돌리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적이 흐르자 집 안에서는 다시 그 기괴한 숨소리와 함께 파열음이 났고 아기는 더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기 울음소리가 뚝 끊어져 버렸다.

여자는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다급해진 여자는 초인종을 마구 누르며, 철제 현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동 복지센터입니다. 곧 경찰이 올 겁니다. 아동학대 행위를 당장 중단하세요.”

“이런 씨발. 어떤 년이야?”

순간, 철제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역한 술 냄새가 여자의 코를 찔렀다. 사내의 눈동자는 붉게 이글거리고 있었고, 사내의 손에는 쇠 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여자는 반사적으로 등을 돌려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사내는 덩치가 컸다. 놈의 그림자가 여자의 몸을 덮치듯 따라붙고 있었다. 술 냄새와 땀 냄새가 훅 하고 밀려오며 여자의 등 뒤에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여자의 뒤통수에서 전기가 흐르듯 쭈뼛쭈뼛한 느낌이 올라왔다.

이대로 죽는 건가?

3층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여자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휙 소리를 내며 놈이 쇠 파이프를 내려쳤다.

퍽. 뒷머리를 가격 당한 여자가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살갗이 찢어지며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튀는 게 느껴졌다.

여자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할머니. 나 머리 아파.

그때였다.

컹! 컹!

소리와 함께 좁은 계단실에 개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쿠!

소리와 함께 놈은 계단에서 구르기 시작했다.

비글이었다.

비글이 놈의 종아리를 물고 있었다. 불시에 종아리를 물린 놈은 계단을 헛디뎠고 다리에 개를 메단 채 계단을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비글은 앙 다문 입을 절대 떼지 않은 채 놈의 종아리를 물고 있었다. 계단을 구르며 여기저기 부딪힌 놈의 몸 곳곳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놈의 비명 소리가 좁은 계단실에 울려 퍼졌다.

이때 쓰러져 있는 여자 뒤에 또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쓰러진 여자의 몸을 타고 넘어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가더니 개와 뒹굴며 신음하고 있는 놈에게 다가갔다. 그림자는 개와 엉켜 붙은 사내를 향해 칼을 내리꽂았다.

으악.

남자가 비명을 질러댔다. 계단을 구르며 몸 이곳저곳이 망가진 놈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그림자는 소리치며 칼을 휘둘렀다.

“죽어! 네가 죽어!”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단말마의 비명이 계단실에 울려 퍼졌다. 씩씩대는 암살자의 숨소리도 함께 울려 퍼졌다. 여자는 눈을 들어 암살자의 그림자를 보았다. 낡은 빌라의 형광등은 센서가 고장 났는지 깜빡깜빡 점멸하고 있었고 그 사이로 암살자의 등이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림자는 남자의 단말마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듯 칼을 떨어트리고 손을 들어 귀를 막고 있었다. 뭉크의 ‘절규’에 그려진 그 사람의 뒷모습.

아기 엄마였다.

“미정 씨?”

여자는 정신을 잃었다.

 

 

여자는 사흘 만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석 달 동안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하윤이는 죽지 않았다.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두 달 정도 치료를 받은 뒤 회복될 수 있었다.

티브이에서, 유튜브에서 연일 남편 살해 사건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여자는 관련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피 냄새가 떠올라서 속이 메스꺼웠지만, 소식으로부터 피해 달아나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혼 관계의 남편으로부터 지속적인 학대를 당해오던 젊은 아기 엄마가 쌓였던 분노를 이기지 못해 남편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 오미정 씨 가족의 진실은 이렇게 세간에 알려졌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인터넷 사기 전과 3범으로, 술과 인터넷 도박에 절어 살고 있던 사내는 채팅 앱을 통해 당시 고등학생이던 하윤 엄마를 만났다. 데이트 성폭행으로 하윤이가 생기자 사내는 낙태를 종용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미혼모 출산 장려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장려금과 양육비를 노리고 하윤 엄마에게 출산을 하게 했다. 그리고 하윤 엄마에게는 계속 미혼모 노릇을 하게 시켰다. 그러면서 자신은 하윤 엄마 집에서 동거하면서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드러나지 않는 유령으로 살면서 하윤 엄마가 출산 장려금으로 마련한 월세 집 거실과 안방, 화장실에서 아내와 딸을 지속적으로 때렸다. 이런 사실을 바깥에 알리면 친정 식구들까지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에 하윤 엄마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 하윤이에 대한 학대가 발각되었을 때 자기 짓이라고 거짓 진술을 하면서까지.

사내는 하윤 엄마와 하윤이를 때릴 때 카스펫을 장롱 속에 숨겨놓곤 했다. 스누피는 장롱 속에서 하릴없이 짖곤 했는데, 두 번의 알람 전송은 그 와중에도 워낙 학대 소음이 커서 장롱 속 스누피에까지 소리가 닿은 경우였다.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였는데도 다섯 차례나 칼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오미정은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살인죄로 판결되었지만 그동안의 지속적인 피해 사실이 인정되어 오미정에게는 감형을 통해 4년형이 선고되었다.

 

결국, 카스펫 비글이 아동복지 전담 공무원의 목숨을 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세간에는 카스펫이 사람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 감히 기계가 사람을 공격하다니.

토끼 사냥꾼이었던 대표적 사냥개 비글이 자기 몸의 네 배까지도 뛰어오르는 점프력이 있는 데다 특유의 근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비글은 몸무게가 겨우 10 킬로 그램 정도 밖에 안되는 중형 견종이다. 아니, 그전에 이 비글, 스누피는 인공지능 로봇이 아닌가.

‘나의 사생활 침해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모임’ 시민 단체는 원래부터 카스펫 정책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나침반’은 하윤 아빠의 유가족을 부추겨 피살로 이어진 당시 상황에 대해 카스펫을 보급한 대한민국 정부와 카스펫의 제조사인 주식회사 마이보 시스템을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하도록 했다.

가정폭력이 동기가 된 살인 사건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국가가 보급한 로봇 개가 사람을 문 일은 처음 일어난 일이었다. 살인 사건 피의자의 국선 변호인이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의 폐해에 대해 역설하며 선처를 호소한 오미정 살인사건 재판은 단신 처리되었지만, 카스펫 손해 배상 청구 재판은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여자는 후유증으로 욱신거리는 뒷머리를 연신 주무르며 자취방에 앉아 유튜브 생중계를 지켜봤다.

“카스펫은 원래 순수하게 아동학대 감시 기능만 하도록 설계되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어떻게 카스펫이 사람을 물게 된 거죠?”

원고 측 변호사가 마이보 시스템 대표에게 물었다.

“저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입니다. 다만, 한 가지 짚이는 부분은 있습니다. 저희가 처음에 카스펫 알고리즘에 변수를 짜 넣을 때, 개라는 종의 특성이 모두 반영되도록 했습니다. 개는 서열 의식이 매우 강한 종인데요, 아동학대 감시가 카스펫의 주된 임무였기 때문에 자기가 보호해야 할 아동을 무리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알파독으로 인지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카스펫이 자신이 알파독으로 인지하고 있는 아동을 공격하는 대상을 자신의 적으로 여겨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피고가 하고자 하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공격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이네요.”

변호사는 유도신문을 했다. 하지만 제조사 대표로서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내재되었다는 표현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저희가 그런 기능을 의도한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머신러닝 알고리즘에는 설계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기계가 스스로 학습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변호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로봇 개가 그런 판단을 했더라도 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가정에 반려 동물용으로 보급한 개가 사람을 물고 놓지 않을 정도로 이빨과 턱이 견고하게 제작될 수 있죠? 로봇 개의 판단은 기계 학습 알고리즘 탓이라고 치부한다 할지라도 이빨과 턱의 물리력을 필요 수준보다 강하게 설계한 것은 명백한 제조사의 책임 아닌가요?”

“그 부분은 저희도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카스펫의 구강 부분은 그저 주인이 던진 원반이나 테니스 공을 물고 올 수 있을 정도의 힘만 발휘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실제 이빨과 턱 부분은 아주 무른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건 당시 비글이 피해자를 계단에서 넘어뜨릴 정도로 세게 물었다는 점에 대해서 저희 제조사로서는 그것이 그저 아주 예외적인 경우고 그 원인을 도저히 모르겠다는 말씀 밖에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와 주식회사 마이보 시스템은 패소했다. 스누피는 폐기 처분되었고, 정부와 마이보 시스템은 하윤 아빠 유족에게 3천만 원의 배상금을 지급했다.

카스펫 시스템에 대한 여론은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많은 부모들이 무서워서 못 데리고 있겠다며 카스펫을 반납했다. 법이 통과된 마당이었지만, 정부도 부모들의 공포감에 대해 마땅한 설득 논리를 찾지 못했다. 카스펫을 통한 아동학대 예방 정책은 흐지부지 시간을 끌다가 슬그머니 폐기되었다.

 

 

여자는 퇴원을 하자마자 아동복지센터에 임시 입소한 하윤이부터 찾아갔다. 그새 걸음마를 뗀 하윤이가 다다다다 여자에게 다가와 안겼다. 이불 속에 숨죽이고 숨어 있던 그 하윤이가 당당하게 이불을 박차고 나와 작은 두 다리로 세상을 호령하고 있었다. 봄날의 햇볕이 하윤이의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다.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하윤이를 안아 올렸다. 어느새 제법 묵직해진 하윤이의 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여자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당황스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말만 좀 늦지 애가 발달이 빠른 편이에요. 겁이 많은 편인데 어느 순간 첫걸음을 떼더니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던지... 조금 있으면 기저귀도 뗄 것 같아요.”

돌봄 담당 복지사들은 하윤이를 꽤나 예뻐했고 별것 아닌 일에도 대견해하느라 바빴다. 여자는 하윤이가 첫걸음을 떼던 장면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 장면을 그려낼 수 있었다. 여자는 좋아하는 영화 장면을 자꾸 되돌려 보는 사람처럼 그 장면을 자꾸 떠올려봤다. 여전히 그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윤이는 공을 좋아했다. 공을 어깨 위로 던졌다 받기도 하고, 데구루루 구르는 공을 따라 뒤뚱거리며 달리기도 하면서 까르르 웃었다. 그림책도 좋아했는데 특히 강아지와 고양이가 나오는 그림책을 보며 멍멍이, 야옹이를 구분하며 즐거워했다. 무엇보다 도형에 관심이 많았는데, 조그만 손으로 블록 장난감을 가지고 한참을 골똘히 놀곤 했다. 제법 자란 머리를 질끈 묶고 머리핀도 하나 꼽자 아기 모델 뺨치는 미모가 드러났다.

사연이 많은 아이라 그런지 위탁 양육하겠다거나 입양하겠다는 지원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윤이는 센터에서 교대 근무하는 복지사 이모들을 엄마 삼아 무럭무럭 자랐다. 여자 역시 주말에 만날 사람도 없고 자취방에서 혼자 있어봐야 심심하고 해서 주말이면 센터에 나가서 하윤이랑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자는 복직을 하긴 했지만 남의 집 현관문 앞에만 가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고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의사는 여자에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내렸다. 이래저래 핑계 김에 여자는 센터 돌봄 근무 이동 발령 신청서를 냈다. 여자는 이제 더 많은 시간을 하윤이와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여자가 주말 근무를 도맡아서 자원했기 때문에 다른 근무자들은 신참의 등장을 반가워했다.

하윤이는 뭐든지 따라 하는 것을 좋아했다. 복지사 이모들이 책을 읽어줄라 치면 자기도 책을 하나 달라고 해서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어 가며 낭독을 했다. 이모들이 공책에 뭘 좀 쓸라 치면 저도 연필을 쥐고 삐뚤빼뚤 뭔가를 그려냈다.

하윤이는 호기심도 많아서 아무 데나 잘 기어올라가기도 했는데, 한 번은 그러다가 책상에서 떨어져서 이마가 깨진 적도 있다. 여자는 얼마나 놀랐던지 병원 가는 내내 큰 소리로 울기만 했는데, 정작 하윤이는 응급실 의사 선생님이 바늘로 이마를 꿰매는데도 생각보다 의젓하게 잘 참아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하윤이는 잘 웃는 아이였다. 누가 함께 놀아주던 까르르 잘 웃었다. 이모들이 튀밥을 가지고 와서 먹다가 후 불어서 튀밥이 흩날리자 그 모습이 우습다고 연신 웃어댔다.

하윤이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여자는 껍데기로 둘러싸인 자신의 삶에 작은 균열이 일어났고 이제 그 속살이 드러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널 만나려고 이 세상에 왔구나.’

여자의 가슴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올라왔다.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모. 왜 울어?”

하윤이가 다가와 작은 손으로 여자의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글쎄. 이모가 주책맞게 왜 울까?”

여자가 하윤이를 품에 안았다.

“이모. 슬퍼서 울어?”

“아냐. 이모 기뻐서 우는 거야. 사람은 때로 기뻐서 울 때도 있어.”

여자가 말했다.

하윤이가 여자의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괜찮아. 이모. 괜찮아.”

여자가 하윤이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그 말을 하윤이가 하고 있었다. 이모. 괜찮아. 슬퍼하지 마.

 

 

여자의 이름은 김수연이었다. 하윤이를 정식으로 입양하자면 하윤이는 김하윤으로 이름을 바꿔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십오 년, 자그마치 십오 년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자기 아버지의 성씨 김 씨를 따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학대에 못 이겨 가출을 할 때까지 그 상황을 그저 방관하기만 했던 어머니의 성씨를 따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한민국 민법에서는 귀화자인 경우가 아니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 이외의 성을 선택하거나 새로운 성을 만들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반면,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범죄 용의자 등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개인이 부모 외의 성으로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는 권리가 허용되고 있었다. 많은 인권단체들이 성본 창설의 자유를 제한한 대한민국 민법이 인권침해 요소가 있다고 지적했다. 5년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양친 모두로부터 심각한 학대를 받았던 한 30대 남성이 새로운 성으로의 성본 변경 신청을 했고,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결국 위헌판결을 받아냈다.

여자는 자신도 한 번 부딪혀보기로 했다.

“김수연 씨는 왜 아버지의 성도 아니고 어머니의 성도 아닌 오수(獒樹) 오(獒)씨 성을 쓰는 오수연(獒秀硏) 씨로 새로운 성본 창설을 하고자 합니까?”

판사가 물었다.

“존경하는 판사님. 저의 어린 시절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제 친부의 잔혹한 폭력 행위로 갓난 아기 시절부터 제가 열다섯 살, 가출할 때까지 십오 년 동안 황폐함과 두려움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저는 커 가면서 이 나라에서 아동학대 행위를 뿌리뽑겠다는 일념으로 아동복지전담 공무원으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 해왔습니다. 그러다 제가 입양하고자 하는 딸 하윤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야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제 딸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제 이름에 드리워진 제 어린 시절의 그림자를 모두 걷어내고 싶습니다.

보도를 통해 알려지기는 했지만, 제가 제 딸을 만나게 된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저는 제 딸의 친부로부터 살해를 당할 뻔하였고, 그 과정에서 아동학대 감시용 인공지능 로봇인 카스펫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판사님도 아시는 것처럼, ‘오수(獒樹)의 개’는 사람을 살린 충직한 개의 상징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 전라북도 임실군에 살던 어떤 사람이 마을 잔칫집에 다녀오면서 만취해 풀밭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마침 풀밭에 불이 번졌습니다. 주인을 충실히 따르던 취객의 개는 주인을 흔들어 깨웠으나 만취한 주인은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개는 근처 호수에 가서 물을 제 털에 묻혀와 풀밭을 뒹구는 방법으로 불이 주인 근처로 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렇게 한참을 하다 보니 개는 지쳐 쓰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잠에서 깨어난 주인이 보니 충직한 개가 자신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지팡이를 그 자리에 꽂아 자신 대신 죽은 개를 애도하였는데, 그곳에서 커다란 나무가 자라났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매우 유명한 ‘오수의 개’ 의견설화(義犬說話)이며, 현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의 지명 유래이기도 합니다.

저를 구한 비글 견종의 카스펫 스누피도 단지 사람을 공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재판을 받아 폐기처분되었고, 당시 사건에 대한 여론으로 아동학대 치사 방지에 매우 큰 효과가 있었던 카스펫 정책도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그 시점 뒤로 3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아동학대 고위험 가정에서 카스펫이 회수된 후, 아동학대 치사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연간 네 명에서 연간 마흔 명으로 열 배가량 증가했습니다. 카스펫 정책 재도입을 촉구하는 시민단체가 결성되었고 저도 그 단체의 일원입니다. 스누피의 제조사인 마이보 시스템은 폐기처분된 스누피의 CPU를 보관하고 있었고, 저희 단체는 그 CPU를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에 있는 의견비 밑에 안장하고 해마다 오수 의견문화제 때마다 추모하고 있습니다.

스누피의 의로운 행동 때문에 제 인생은 큰 변화를 맞았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이든 출산이든 입양이든 누군가와 가족을 이루는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누피 덕분에 우리 하윤이를 만날 수 있었고 이제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 딸 하윤이 만큼은 두려움과 폭력이 없는 안전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게 하고 싶습니다.

오수(獒樹) 오(獒) 씨라는 성본은 하윤이와 함께 새 인생을 출발하고자 하는 한 사람의 성인이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제 인권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 세상의 어떤 자식도 자신의 부모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나오겠다는 의사결정을 한 적이 없는 존재들이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부모의 잘못된 양육이 준 상처라는 과거의 그림자에 얽매여 살아야만 하는 걸까요? 부디 침해받지 않는 인권의 측면에서 배려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고의 뜻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의 성본에 ‘개 오(獒)’자를 쓰는 것은 개를 주로 비하의 대상으로 일컬어온 우리 국민의 보편적인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판사가 물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흔히 영화에서 보면 인간의 사고체계를 그대로 닮은 강한 인공지능이 언젠가는 인류에게 반기를 들고 인류를 멸망시킬 것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실제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다른 종의 복지를 압살하고 우리 종의 이기적인 욕망 만을 추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우리의 특성을 닮은 인공지능이라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게 당연하겠죠.

하지만 개, 카니스 루푸스 파밀리아리스는 일만 년 동안 우리 호모 사피엔스와 공생하면서 항상 우리 인간의 이익을 위해 충직하게 살아왔습니다. 저와 관련된 그 사건에서도 개의 습성이 알고리즘에 반영된 로봇 개 스누피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인 하윤이의 안전을 바라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 오히려 하윤이의 친부를 비롯한 인간은 어떤 모습을 보여줬었던가요? 저는 사람의 성본에 ‘개 오(獒)’자를 쓰는 것이 왜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판사는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판사는 김수연의 주장을 꽤 흥미 있는 표정으로 들었다. 그렇지만 최종 판결에서는 성본으로 오수 오 씨의 창설과 개명을 허용하되, 오 씨의 한자만큼은 흔히 쓰이는 ‘나라 이름 오(吳)’자를 쓰도록 판결했다.

이렇게 해서 오수연 씨는 오수(獒樹) 오(吳) 씨 가문의 시조가 되었고, 오하윤은 오수 오 씨 가문의 2대조가 되었다.

 

 

사십 년이 지났다.

토성의 위성 엔셀라두스의 심해 열수공에서 외계 생명체가 발견되었다. 각 나라 정부는 엔셀라두스에 독자적인 탐사선을 보내는데 열을 올렸다. 엔셀라두스 탐사는 향후 우주 개발 전반에 있어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회로 여겨졌다.

국내 최고의 우주항공공학 전문가인 오하윤 박사는 급하게 결성된 대한민국 엔셀라두스 탐사선 프로젝트 추진단의 단장으로 선임되었다. 어린 시절의 어려움을 딛고 세계 최고 수준의 공학자로 성공한 오하윤 박사의 성공 스토리가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추진단은 탐사선 발사체의 이름을 ‘오수(獒樹)’호로 정하고 싶어 했다. ‘오수의 개’ 의견설화처럼 엔셀라두스의 생명체들이 인류와 영원히 화합하게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반영되었다는 것이 추진단 홍보팀의 설명이었다. 오하윤 단장의 인생 스토리를 반영한 마케팅 효과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오 단장의 생각은 달랐다. 오 단장은 오수의 개 설화가 개의 인간에 대한 일방적인 충성과 희생이 너무 강조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기다리다가 조우한 최초의 외계 생명체인 엔셀라두스의 생명체들과 인류는 좀 더 동등한 입장에서 우정을 쌓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 단장은 좀 더 직관적인 명칭인 ‘우정(友情)’ 호를 제안했다. 탐사선의 이름은 우정 호로 확정되었다.

전라남도 고흥에 있는 나로우주센터에서 탐사선 우정 호의 발사가 있는 날, 오하윤 단장의 두 어머니, 오미정 여사와 오수연 여사가 초대를 받았다. 두 사람이 발사대 관람석에 도착해 보니, 맨 앞 열의 대통령 옆자리가 배정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난생처음 대통령과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을 누렸다. 대통령이 옆에 있든 말든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오수연이 걸음마를 뗀 하윤이를 처음 본 그날처럼 봄날의 햇볕이 따사롭게 우주센터를 비추고 있었다.

“우정 호 발사 30초 전입니다.”

장내 아나운서가 말했다. 미정의 손이 수줍게 수연의 손을 잡았다. 수연으로서는 두 번째 잡아보는 미정의 손이었다. 사십여 년 전의 처음과 달리 미정의 손은 따뜻했다. 수연이 미정의 손을 굳게 되잡았다.

우정 호의 꽁무니에서 허연 연기가 나오는가 싶더니 엄청난 굉음과 함께 엄청나게 큰 불이 붙었다. 그 큰 몸뚱이가 지구의 중력을 이기고 우주를 향해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는 우정 호가 내뿜는 굉음에 파묻혀 조용한 속삭임처럼 들릴 뿐이었다.

수연이 미정을 바라보았다. 딸이 우주로 쏘아 올린 우정의 전령을 바라보는 늙은 어머니의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름답고 깊은 눈. 사십여 년 전, 11월의 놀이터에서 돕고 싶다고 말했을 때 봤던 그 갈색의 아름답고 깊은 눈을 하고 있었다. 수연은 그런 미정을 처음으로 안아주었다. 수연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정작 당사자인 오하윤 단장은 발사 성공 여부 때문에 초긴장 상태로 하루를 보냈다. 다행히 우정 호는 계획대로 정확하게 궤도에 올랐고 엔셀라두스를 향해 긴 항해를 시작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엔셀라두스의 모든 생명체와의 우정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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